#(1)
“……멀리서 칠라카 같은 몬스터가 좀 몰려오는군요.”
나무 위에서 눈 위로 손을 올려 지긋이 먼 곳을 쳐다보던 운오가 이윽고 시선을 떼면서 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칠라카는 맹수들을 섞어둔 듯한 짐승 몬스터로, 위협적인 붉은 얼룩무늬 털색과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특징이었다. 많은 경우에는 몇십 마리가 한꺼번에 이동하기도 하여 여행 중인 유저들을 공포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리 짓길 좋아하는 몬스터가 ‘좀’이라……. 헌터 스킬로 인해 독수리에 버금가는 시야를 가진 운오가 ‘멀리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적어도 몇 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뜻이었다. 여유 시간은 벌었지만 문제는 양을 지칭하는 ‘좀’인데.
“어…… 칠라카라. 몇 마리 정도인데?”
크란이 약간 불안한 기색으로 묻자 운오가 다시금 먼 곳을 살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무리 지은 모습을 보니 스물은 넘을 것 같습니다. 방향을 바꾸실 겁니까, 아니면…….”
“으음…… 그 정도면 할 만할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또다시 방향을 틀어서 가야 하는가, 아니면 뚫고 목적지까지의 길을 사수해야 하는가의 기로에 선 크란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하는 사이, 나는 천천히 어깨를 돌리며 목을 풀었다. 생각할 게 뭐 있겠는가.
“내가 처리한다.”
“또? 그러다 마력 다 떨어지는 거 아냐?”
난 그냥 조용히 무시하고 마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펴보았다.
6서클의 에어리얼 서번트를 배운 이후 마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거침없이 늘어났다. 동시다발적으로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의 수를 비교했을 때 지금까지 했던 것들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도 한바탕 전투를 치렀지만 현재 남아 있는 마력만 해도 칠라카 스무 마리 정도는 6서클을 조합해 상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란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 의지를 존중해 준 듯 물러서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크란의 리더십은 위험한 도전을 하기보다는 모두가 안전한 길로 빠져나가게 하려 하는 면이 무척 강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게 몸을 사리는 동안 게임을 하는 재미가 사라져 몸이 다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해 본 적이 없었던 이런 생각은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 두 개는 전혀 다른 것이며 꼭 두 개를 한 가지 선에 놓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바보처럼 간단한 깨달음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깨달음을 준 것은 키온 형, 즉 주열 형의 말이었다.
[ 그래, 이제 해결할 방법을 찾은 것 같아? ]
유완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주열 형에게 화상 전화를 연결한 나는 형이 던진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형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의 말을 해 주었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끊기 직전 나는 약간 망설였던 질문을 꺼냈다.
“형.”
[ 어? ]
“게임을 왜 한다고 생각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었다.
나의 제2의 삶과 같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 답은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형이 잠시 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으니까. 난 스릴을 좋아하거든? 그런데 현실에서 스릴 찾다간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하지 않겠냐. 무모하게 달려들어 몇백 번씩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걸 생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이런 스릴은 다른 데서는 느낄 수 없다고. 흐흐흐.”
사실 지금까지 나는 게임에서 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크란이나 운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유저는 전투를 즐기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비전투 유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 운이 좋다면 정말 좋았던 일이었다.
크란 같은 경우 초반에는 멋도 모르고 여러 가지 일에 뛰어들어 매우 많이 죽어 보았다고 했고, 운오 또한 수도 없이 죽고 죽이는 위기를 넘기며 성장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초반에는 키온 형과 잠깐 사냥을 하다 홀로 마법 수련을 했고, 이후에도 좋은 실력을 가진 유완, 크란과 함께 던전을 중심으로 여행해 왔으니 죽을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죽지 않기 위해’ 플레이하는 것을 게임 내 방침으로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마치 현실에서 당연히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저들은 THE MIST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되살아난다. 이 부분만은 죽은 뒤 다시 접속하기까지의 사망 딜레이가 길다는 것만 빼고 보통의 게임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시스템이었다.
이왕 게임을 하고 있다면 나도 몸을 좀 덜 사리고 도전을 즐겨 보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언제부터 제 목숨 사리기에 바쁜 놈이었단 말인가. 초심으로 돌아가 시원하게 즐기고, 풀어내고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성시(聖施)], [성호(聖護)]!”
크란이 내가 하는 양을 보더니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스킬을 외쳤다. 그것들은 크란이 맨 처음 얻었던 신의 파검식 버프 스킬의 일부로, 여태까지는 잘 쓰지 않았던 스킬들이기도 했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배려심 등은 하늘을 찌르면서 싸울 때는 주로 먼저 달려 나가 공격하는 것을 즐기는 크란의 성향상 얌전히 남을 돕는 버프 스킬을 쓸 일이 거의 없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전까지의 일이고, 러씰 마을에서 마을 중앙에 서 있던 처녀상이 실은 여신상이라는 비밀을 알아내어 새로운 스킬을 입수하고 퀘스트를 완료한 크란은 그 이후 묘한 한마디를 남긴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 검의 의미를 깨달았어.」
도대체 무슨 기억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나서부터는 전처럼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지금처럼 버프에 힘쓰거나 약간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살펴보는 일이 늘어났다.
“카프. 성호까지 썼는데 괜찮아?”
“음…….”
연차적으로 희고 푸른빛이 몸을 한 번 감싸면서 부서지고 나서 크란이 외친 말에 나는 불분명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머리가 청량해지며 몸 전체에서 약간 은은한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청량해진 것은 정신을 맑게 하는 성시,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것은 보호하는 성호의 효과였다.
“좋아. 그러면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으니까…… [성사(聖徙)]!”
이번에 러씰의 여신상에서 크란이 얻은 세 번째 스킬, 성사는 나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발현된 금색 빛이 확 하고 퍼져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부서지듯 몸에 흡수된 빛을 바라보고 있자 크란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완벽! 성사 효과도 이따가 좀 보여 줘.”
“…….”
내가 실험 대상이 된 건가 싶어 의아해하는 사이 위쪽에서 운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옵니다!”
딴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
6서클 발현을 위해서는 아직도 제법 많은 시간과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나는 즉시 눈을 감고 에어리얼 서번트의 이미징을 시작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던 독특하고 기이한 그 느낌.
나는 바람이 되고, 바람은 내가 된다.
아직 눈을 뜨고 두 개의 시야를 다 컨트롤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져 차라리 눈을 감고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만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것이 전투 시에는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이 지금 내가 시도하려 하는 6서클 마법 조합의 시작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느끼면서 손으로 서클을 그리고, 팔을 밀어 넣었다. 곧 귓가로 슈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스쳐 지나가며 수식 세계가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멀리서 몬스터 떼들이 수풀을 밟고 접근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다.’
“원하노니,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순간 그 숨결을 드러내 나를 위해 움직이라.”
범위는 내 앞. 방향은 내 시야와 같은 쪽으로.
“에어리얼 서번트!”
“우왁!”
순간 엄청나게 빠른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가벼운 돌풍이 주변을 쓸자 크란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빛이 터지는 것처럼 눈앞의 세계가 밝아지며 눈을 감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바람의 시야는 내 시야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인지, 운오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넓은 범위를 인식할 수 있었다.
몇 번 머릿속으로 움직임을 컨트롤하며 내 주변을 빙빙 돌게 만든 뒤,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다가오는 칠라카들 쪽으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움직여!’
쐐애애액!
곧바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장애물도 거침없이 뚫으며 달려간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잠시 뒤 칠라카들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수는 정확히 스물세 마리. 이 정도면 여태 본 칠라카 중에서는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내가 빙빙 돌며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칠라카 무리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성공의 미소가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바람을, 공기를 경계하는 생물은 없다. 그렇다면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통해 적을 정찰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다. 반대쪽 손으로 서클을 하나 더 그린 뒤 손을 밀어 넣자 뒤에서 경악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프! 또 뭘 하려고…….”
“인페르노!”
“우왁!”
“…….”
그러나 외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저번의 경험으로 인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깨끗이 하나로 인식되고 있던 세계에 눈을 뜨며 보이는 세계가 추가되었다.
후욱!
내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뭉쳐지며 생겨난 불씨 하나가 땅으로 툭 떨어지고는, 곧바로 악마처럼 게걸스레 들판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늘리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와와와왁!”
전에 이 제어되지 않는 인페르노 때문에 쓴맛을 충분히 보았던 크란이 엄청나게 놀라 뒤로 사사사삭 물러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오의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일부러 내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 듯했다. 하지만 내가 시선을 움직이지 않으면 인페르노 또한 제자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둘을 쳐다볼 생각은 없었다.
칠라카들을 따라다니고 있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와 눈앞의 인페르노를 바라보고 있는 시야가 합쳐져 머리가 슬슬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지만 내 예상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이건 아마…… 크란이 걸어 준 스킬의 힘인가?’
두 번째 겪으니 그래도 첫 번째 때보다는 좀 요령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일반 마법인 에어리얼 서번트와 슈페리어의 마법인 인페르노를 컨트롤하는 방법은 각각 달랐다.
에어리얼 서번트는 일종의 명령을 수행하는 로봇 같은 면이 있어 ‘이 적을 따라다니라’고 명령하면 따로 앞으로 움직이라든가 뒤로 움직이라든가 등으로 일일이 조종할 필요 없이 가볍게 정보를 인식하면서 내 눈으로 보이는 세계에 좀 더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이 인페르노는…….
“저거, 한번 나오면 못 없애는 거 아냐!”
크란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번에 인페르노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방법처럼 ‘없어지라’고 명령하고 이미징했지만 인페르노가 사라지지 않아 큰 낭패를 겪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없앨 수 있었는데, 그때 내가 했던 것은…….
‘이미징도, 명령도 아닌 ‘목표에 대한 순수한 염원’이다.’
마지막에 힘이 다 빠져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없어지기만을 바랐을 때, 인페르노는 사라졌다. 후에 나는 그것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했고, 어쩌면 ‘아무런 생각 없이’라는 것이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 전과 그때가 다른 것은 딱 그것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미징을 하는 것은 상상력과도 관련이 있지만 어느 정도는 움직임을 위한 계산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 슈페리어의 마법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로,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아주 간단한 ‘목표’만을 강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처음 인페르노를 불러낼 때 나는 별다른 이미징도 없이 주문과 ‘마법이 구현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만이 강한 상태였다.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위협적인 인페르노를 바라보며, 나는 막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통해 칠라카 무리들이 몇백 미터 앞까지 다가왔음을 보았다.
‘적절한 거리군.’
나는 머릿속을 최대한 비우려고 노력하면서, 이제 내 눈을 통한 시야로도 달려오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붉은색 무리들을 향해 한 가지를 생각했다. 눈동자가 떨리지 않도록 똑바로 바라보면서, 오직 그것만을.
‘공격해라!’
‘…….’
하지만 인페르노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초조함을 누르고 다시 한 번 잡념을 지우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칠라카들을 공격해!’
‘…….’
그러나 여전히 인페르노는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당황한 순간, 뒤와 위에서 크란과 운오의 외침이 들려왔다.
“카프! 오고 있어!”
“옵니다!”
“크르렁, 컹!”
“컹! 컹!”
나도 안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바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채 달려오는 칠라카들의 무리 중 가장 앞선 놈을 바짝 뒤쫓아 따라오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이게 아닌가? 뭐가 잘못된 거지?’
여차하면 에어리얼 서번트를 사용해 칠라카들을 찢어버릴 준비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답답함이 치솟고 있었다. 이런 내가 방심하는 것처럼 보인 것인지, 참지 못한 듯 위쪽에서부터 빛살처럼 무언가가 쏘아져 내려 맨 앞에서 달려오던 칠라카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쐐액! 퍽!
“캥! 커윽!”
기이한 소리와 함께 칠라카가 화살에 꿰뚫려 달리던 그대로 땅에 몇 번 튕기며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 앞과 뒤에서 두 개의 시야로 적나라하게 인식되었다. 그 칠라카는 곧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칠라카들에 의해 가차 없이 밟혔고, 나는 그 사이를 타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블링크!”
팟 하고 뒤로 물러서자 더 화가 난 듯 날카롭게 이빨을 갈며 몰려드는 칠라카들을 몇 번 더 블링크를 사용해 피했다. 다시 한 번 마법을 시도할 생각으로 다급하게 인페르노를 노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페르노는 움직이기는커녕 못 박힌 듯 멈춰 있기만 했다.
‘젠장!’
도대체 왜 안 움직이는 거냐?
“블링크!”
내 생각의 뭐가 문제인 건가!
“크와앙!”
“태워, 버리란 말이다!”
막 블링크를 쓰자마자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달려온 붉은 갈기의 몬스터 무리들을 향해 분노를 담아 외쳤을 때였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인페르노가 거칠게 폭발하듯 부풀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푸화아아악!
“커컹?!”
그리고 붉은 커튼처럼 5미터 이상 위쪽까지 크게 치솟은 인페르노는 위를 향해 던진 공이 떨어지기 직전 잠시 멈추는 것처럼 멈춰 있다가, 놀라 허둥대는 칠라카들을 향해 거대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욱!
도저히 불길이 쏟아져 내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소리가 나고, 곧 온몸에 불의 비를 맞은 칠라카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커엉!”
그러나 이상하게도 칠라카들의 몸에 붙은 불씨들은 아무리 몸을 굴려도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옮겨붙으며 악마처럼 몬스터들을 태워나가고 있었다. 내가 원한 것에 너무나 충실하게도, 말 그대로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파이어 볼 같은 불계열 마법들보다 한층 검붉어 보일 정도로 새빨간 불길이 몬스터들에게 부서져 내려 점점 더 집요할 정도의 생명력으로 불태워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불 그 자체였다.
점점 하나의 큰 불덩어리가 되어 타올라 사라지는 칠라카들을 바라보며 나는 슈페리어의 마법서에 쓰여 있던 인페르노에 대한 단 한 줄의 설명을 떠올렸다.
[ 인페르노 : 지옥의 불길. ]
‘……그래서 ‘지옥의 불길’이었단 말인가?’
정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설명 그대로였다.
“6서클이란 거…… 진짜 무지하게 센 거였구나.”
크란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자, 운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파괴력은 처음 봅니다.”
“하여튼 결국 내 성사 스킬은 효과도 못 봤네. 아깝다, 아까워…….”
그 말에 나는 아까 크란이 나에게 썼던 금빛의 마법을 떠올리며 반문했다.
“그건 뭐였는데?”
“후후후. 그건 말이지……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비로소 진가가 드러나는 거야! 짱이지? 좋지? 멋지지?”
“…….”
미안하지만 별로 필요 없어 보인다. 나는 6서클 두 개를 연달아 쓴 탓에 약간의 피로함을 느끼면서도 아까 처음으로 제대로 실마리를 붙잡은 인페르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처음 내 생각처럼 슈페리어의 마법이 ‘순수한 염원’에 반응할 것이라는 추측은 맞는 말 같았지만, 방금 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좀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야 마법이 발현되는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직접 써 볼수록 체득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써 볼수록…이란 말인가. 그러면…….’
“크란, 운오.”
“응?”
“예.”
분명히 다음 목적지는 내 다음 퀘스트지인 대륙 최북부였던가. 지금까지는 중간중간 마을과 도시를 거쳐 지나갈 기회가 있어도 거의 돌아서 가거나, 몬스터들이 몰려와도 피해 가는 일이 대다수였지만…….
“앞으로 나타나는 던전은 전부 한 번씩 통과하고, 몬스터들도 처리하면서 지나가자.”
“엥?”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놀라 자빠질 듯한 크란과 콧잔등을 미묘하게 찡그린 운오의 목소리에도 나는 기분 좋게 앞서 나가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야 될 것 같으니까.”
“뭐?”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운 채 뻘뻘 쫓아오는 크란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듯한 운오 둘 다, 안 된다거나 무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둘 다 그게 그리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 지나가게 될 마을 근처에도 아마 던전이 있겠지. 마을이나 도시 근처에는 유저들을 위해 적당한 던전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할 셈이었다.
“후. 지면까지 완전히 태워버렸구만. 엄청나군, 엄청나.”
현실에서는 남무건, 게임 내에서는 운영자, 마스터 GM 무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흰 운영자 전용 옷을 입은 채 시커멓게 그을린 대지 위에 서 있었다. 보통은 운영자 전용실이나 투명 상태에서 유저들을 살펴보며 일을 하는 것이 운영자의 일이었지만, 남무건은 현재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L-10이자 HR-02라는 두 가지의 프로젝트와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남자를 살펴보는 것. 그러면서 때로는 이렇게 그가 저지른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그의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남무건의 임무였다.
“벌써 6서클을 그렇게 다룰 줄이야…….”
운영자 전용 지팡이를 들고 땅을 건드리며 복구하는 것을 도우면서 남무건은 아까 그가 보았던 광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불길이 적을 처절하게 잡아먹고 지옥으로 끌고 가는 동안, 남자는 그런 엄청난 마법과 동시에 한 가지 마법을 더 운용하고 있었다. 게임 내 숨겨져 있는 마법들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로드 슈페리어의 마법은 그가 알기로도 단시일 내에 그렇게 쉽게 사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 차원 높은 집중력과, 순수하게 ‘의도’를 구체화시키는 상상력의 힘. 냉철하게 사고하는 마법사다운 이성과 힘을 원하는 뜨거운 열정.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구할 수 있을 때여야만 로드 슈페리어의 마법은 약간이나마 길을 뚫을 수 있었다.
상관인 윤석호는 그 유저에게 깊은 흥미를 지닌 듯했지만, 남무건은 도대체 윤석호가 그 남자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인간이 뭘 생각하는지는 그 스스로 말고는 아무도 모를 터였다.
최근 들어서는 회사 분위기도 조금 이상해져서 본사 내에서부터 시작된 두 파가 양립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래 봤자 자신 같은 말단 사원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한국 지부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윤석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에나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 실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뭐,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남무건은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가 복구를 끝내고 사라진 뒤, 들판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풀과 나무가 우거진 채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며 평화로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전에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아 뛰쳐나간 후, 주열 형의 조언과 유완, 현실의 이름으로는 진제환의 말로 인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찾고 나서 나는 사부님께 전화를 드렸었다. 내용이야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겠다고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사부님은 참 뒤늦게도 깨달아버린 멍청한 내 말 따위에도 뜨거운 목소리로 알았으면 된 것이라고 답해 주셨다.
그 후 휴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검도장에 갔을 때, 나는 어딘지 잠에서 덜 깨신 듯 피곤하고 초조해 보이는 사부님 내외와 마주하고 의아함을 느꼈다.
“사부님.”
“…….”
“……사부님?”
“아. 이 녀석. 작게 불러도 알아들을 텐데, 무슨 일이냐?”
먼저 한 번 불렀지만 알아듣지 못하셨다는 말은 할 수 없어 작게 한숨을 쉬자, 사부님이 나를 슬쩍 쳐다보시고는 다시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셨다.
‘시계?’
늘 꼿꼿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여 주시던 사부님이 저렇게 어딘가 신경 한 구석이 다 타버린 듯한 모습을 보이시는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자꾸 시계를 바라보시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기다리시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오늘 손님이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게다가 가만히 보면 사모님 또한 평소에는 한 번쯤으로 끝냈을 차 내오는 일을 벌써 세 번째 계속하시는 중이었다.
“무헌아. 한 잔 더 마시겠니? 거기 앞에 도넛도 좀 먹으렴. 너 생각나서 사온 건데.”
“……예.”
아까도 마시기는 했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사모님이 따뜻한 차를 담은 컵을 내 주셨다. 현재는 오전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 겸 휴식 시간이었기에 수련관 뒤쪽의 사부님 댁에 잠깐 와 있는 중이었는데 두 분 다 이렇게 이상한 태도를 보이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묻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오늘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응? 뭐라고?”
또 창밖을 초조하게 바라보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신 사부님께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두 분 다 왠지 이상하세요.”
“아니다. 일은 무슨…….”
잠시 말을 흐리며 눈을 돌리신 사부님이 갑자기 퍼뜩 다시 나를 쳐다보셨다.
“무헌아.”
“예.”
뭔가 말해 주시려나 싶어 자세를 똑바로 하고 바라보자, 처음 보는 모습으로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시던 사부님이 사모님을 바라보셨다. 마치 눈으로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어떻게 결론을 내셨는지 사부님이 눈을 가늘게 내리뜨며 입을 여셨다.
“무헌아. 어쩌면 조만간……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르겠구나.”
“……누가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어디서 왜 찾아온단 말인가?
말하면서도 약간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지만 사부님과 사모님은 아무런 말씀도 해 주시지 않으셨다. 되물으려 했지만 마침 휴식 시간이 끝나 수련관 쪽에서 사부님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결국 그 대화는 계속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잊히고 말았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콰콰콰콰쾅!
“츠아아아!”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작렬하자마자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언데드 몬스터들이 쓰러져 내렸다. 마지막까지 허우적거리며 사람 쪽으로 손을 뻗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자 몸을 휘감고 있던 에어리얼 서번트가 곧바로 날아가 마지막 남은 조각까지 바스러뜨렸다.
퍽! 파사사삭!
모든 것이 사라진 동공 안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전투의 피 끓는 흥분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니 새하얀 빛이 나는 검을 든 크란과 활을 막 한 손으로 바꿔 들고 있는 운오가 보였다.
“아, 이거…… 우리가 완전 씨까지 다 말려놓은 거 아냐?”
크란이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스릉 검을 집어넣자 운오가 몬스터들이 사라진 곳에서 나온 잡템을 주워 담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가다 보면 또 나올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크란이 씩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카프. 아까도 완전 멋있었다. 이젠 6서클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맞지?”
“아니.”
내가 고개를 젓자 크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엥? 방금도 6서클 마법 하나 썼고…… 아까 떼거리로 몰려올 때 인페르노도 썼었잖아?”
분명 이제는 전보다 훨씬 사용하는 감을 잘 잡을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하위 서클들처럼 자유자재로 응용하려면 더 깊은 집중력이 필요해서인지 머리가 아플 때가 많았다.
특히나 슈페리어의 마법은 하나하나 우습게 보고 움직이면 바로 마법이 말을 듣지 않아 섬세하게 다루는 감을 잡아야만 했는데, 그 작업은 이미 마법 노가다에 익숙해진 나에게도 고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지금도 마력이 많이 준 것은 아닌데도 인페르노를 쓴 여파로 인해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멀었어. …몇 군데 근처에 더 있다고 했던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묻자 크란의 표정에 이제는 체념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우리가 거쳐 온 던전만 열두 개. 평균 3층짜리 던전을 있는 대로 씨를 말려 쓸어놓고도 더 하겠다는데 나는 그저 따라야지. 이 던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지하 땅굴의 자이언트 앤트 던전이 있다고 하는 건 봤어.”
“그럼 거기로.”
“…그, 그래. 그래도 일단 좀 쉬고 가자. 여기서 내려가려면 또 한바탕 싸워야 되니까.”
너무 망설임 없는 건 아냐? 하는 크란의 눈빛이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은 이 즐거움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네 어쩌네 해도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로 마법을 쓰는 것이 즐거웠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허리춤을 더듬어 익숙한 칼집이 만져지자 미소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출몰하는 몬스터들과 공격 패턴은 대부분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미스트 내에서는 아직 초보 수준인 검을 써 보아도 괜찮으리라.
밑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언제 죽었었냐는 양 다시 나타난 넝마를 뒤집어쓴 언데드 몬스터, 사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키아아아아!”
곧바로 운오가 활을 잰다 싶더니 붉은빛이 도는 화살 두 개가 사이좋게 사귀 두 마리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성호], [성시]!”
그와 동시에 크란이 나와 운오를 향해 차례로 스킬을 걸어 주더니 검을 뽑아 들고 옆에서부터 달려드는 놈들의 견제에 나섰다.
“하앗!”
정신없이 부딪치는 모습 속에서 날카롭게 잘리는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 채 체액을 흘리며 달라붙는 사귀들의 모습은 일견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이런 놈들을 수백 마리는 베고 들어온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특별해 보이지 않는 처리 대상에 불과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여기서 대단위 마법을 한 번 사용하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머릿속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옛 기억이 틈을 주지 않고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것이 어떤 일보다도 중요했다.
‘…….’
이제는 게임은 게임답게, 시원하게 즐길 테니 과거의 기억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다물고 엘프 이루미네가 가르쳐 주었던 마법검의 기초, 그 첫 번째를 떠올렸다.
‘마력을 검으로 밀어 넣는 것.’
우우우웅!
검을 뽑아 들고 마력을 밀어 넣자 손 쪽에서부터 쭈욱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올라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망설임도 없이 올라오는 기운을 보니 오랜만에 했는데도 잘 된 것 같았다. 잠시 만족스럽게 칼끝을 쳐다본 나는 남들보다 처지는 마법사의 이동 속도로도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해 그간 생각해 왔던 방법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선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적당한 곳에서 무리를 잘 따라다니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놈이 한 놈 보였다.
‘저놈이다.’
“블링크!”
순식간에 귀를 통해 슈아악 하고 공간이 바뀌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바로 지금!’
촤아아악!
“크!”
곧바로 무언가를 베는 느낌과 함께 주변 공간이 명확해지면서 검붉은 빛을 띠는 체액이 쏟아져 내렸다. 뭉텅 잘려나간 몸뚱이에 놀란 사귀가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돌아서는 사이에 나는 마력을 더 강하게 밀어 넣으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뼈를 자르는 손맛이 매우 좋았다.
사귀는 언데드이기는 했지만 체액에 다른 독성이 없었고, 단단하지 않은 대신 생명력이 끈질긴 몬스터였다. 그 정도라면 마법사의 약한 힘을 보완해 주는 마 ‧ 라키안 검술 패시브 스킬을 믿고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맞은 듯, 곧바로 절반 가까이 잘려나간 사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츠아아악! 츠아아!”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귀의 소리에 주변 사귀들이 몰려들려는 순간, 나는 놈의 넝마 한가운데로 푹 검을 찔러 넣으며 재빨리 입을 열어 외쳤다.
“프리즌 스트라이크!”
머릿속으로 얼음 쐐기들과 그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어 사방으로 쏘아져나가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강하게 떠올린 이미지는 곧 마법이 되었고, 주변 공기가 삭 냉각되면서 바로 떠오른 얼음 쐐기들이 방사형으로 사정없이 쏘아져나가기 시작했다.
쾅! 콰쾅! 콰콰콰아아!
있는 대로 부딪쳐 폭발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등이 섬뜩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과 함께 뜨거웠던 얼굴이 찬 공기에 식는 것이 느껴졌다. 얼음 가루와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내 검에 찔려 땅에 꽂힌 절명한 사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 짧은 충격파가 훑고 간 사이 운오의 화살이 꽤 많은 놈들을 포인트만 집어 고슴도치로 만들어놓았고, 언데드에는 상극과도 같은 크란의 검기에 당한 놈들이 시커멓게 탄 상흔과 함께 쓰러져 있었다.
여유 있게 원거리에서 공격해 전혀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은 운오와는 달리 크란이나 나는 검붉은 체액을 뒤집어써 지저분했다.
내 경우, 주로 마법을 통해 태워버리거나 얼려버리는 것을 즐겼기에 직접 자르고 찌르는 것은 처음 겪었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얼굴이나 손에 잔뜩 튀어 흐르는 체액은 약간 찜찜하게 느껴졌다.
“검……?”
내가 너무 순식간에 튀어나가 잘 보지 못했던 듯,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는 크란과 운오의 눈에 의아함과 놀라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검을 쓰신 겁니까?”
“응.”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체액이 맺힌 턱을 소매로 닦으며 운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크란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짜 죽인 거야? 마법사가 진짜 검을 썼다고? 으아! 결국 카프가 이 짓까지 성공하고야 마는구나!”
크란은 전에 내 검 수련을 도와주었던 경험이 많았으면서도 내가 검으로 적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이건 진짜…….”
“검만으로 한 건 아니야. 난 마법사니까.”
아무래도 검사의 영역을 침범 받았다는 것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덧붙여 말해 주자 조금 진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라움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검으로는 처음 죽인 거잖아?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 안 무서웠어?”
이놈은 나를 뭘로 보는 건가.
만약 검을 쓰지 못하더라도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어디까지나 마법사다. 코앞에서 적이 닥쳐오더라도 블링크로 피할 수 있고, 되는대로 마법을 날릴 수도, 막아낼 수도 있다.
“아니. 괜찮은데.”
“놀랍군요.”
“여, 역시… 전투할 때 본성이 그러니까…… 그런 것도 상관있는 거구나…….”
순수하게 놀라는 운오와는 달리 곧바로 크란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채 중얼거리는 것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으하하하.”
“…….”
크란은 내가 전투할 때와 평소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은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옛날부터 승부의 스릴을 즐겨왔고, 평소에는 그럴 일이 없으니 침착하게 지내는 것뿐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전에도 비슷한 경우에 나에게 마법으로 실컷 맞았던 것을 기억하는 듯 애교 있게 웃으며 이미 저만치 도망간 크란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후…….”
그럼 다음 놈들에게는 블링크 외 다른 마법은 사용하지 않고 처리하는 것을 시험해 볼까. 그러려면 블링크와 공격이 오가는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겠지. 어느새 다시 공격 패턴과 효과를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내 머릿속에서는 오랜만에 속까지 다 시원한 즐거움이 차오르고 있었다.
THE MIST 에피소드 3의 세 번째 영상이 발표된 후부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유저들의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요즘 몬스터들이 너무 많이 난폭해진 것 같습니다. 사냥 한 번 하기가 엄청 힘드네요……. 이건 뭐 가벼운 사냥을 가려고 해도 솔로로는 힘드니……. 파티사냥을 권장하겠다는 개발사의 취지일까요?’
‘분명히 어제는 있던 던전이 오늘 보니 없어졌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불안전한 시기입니다. 웬만하면 꼭 워프 포탈을 이용해 주세요.’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서서히 진행된 몬스터들의 약동과 크고 작은 던전 및 지도의 변화는 어느새 평온하고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게임 내 플레이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들 또한 그만큼 흘러나왔다.
‘요즘 성직자 패치라도 새로 해 주는 건지…… 사제, 성기사 계열들 파워가 어째 갈수록 세지는데요?’
‘떠오르는 신세력. 마법사 유저들의 수가 늘고 있다! - 자그레브의 매직토피아 길드-’
‘사막도시 발라 모냐크에서 엘프를 보았다는 루머에 대하여…….’
대부분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변화가 너무 느린 탓에 연결 지을 만한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각각의 문제인 줄만 안 채 지나갔다. 그러나 대륙은 변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선택과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계속해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은 나는 검고 고요한 그 한 점에서 천천히 마법의 이름이자 구현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차디찬 얼음의 폭풍. 블리자드.’
곧 쩌저적 얼기 시작한 허공에서 싸늘하게 온도가 내려간다 싶더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얼음과 바람의 동시작용이었다. 휘잉 불기 시작한 얼음조각 하나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쿠와아아아!
그리 넓지 않은 늪 내를 얼음의 광풍이 쓸어가는 것이 보였다. 말라 죽은 풀과 나무가 아니었다면 원래 이곳에 눈과 얼음만 있는 줄로 착각할 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말 그대로 미친 것처럼 휘몰아치는 폭풍 때문에 내 머리칼과 로브까지 뒤집어질 듯 휘날렸지만 눈앞의 광경에 온통 정신이 팔려 그리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크르르륵!’
‘끄륵!’
쩌저저적, 쩍, 펑!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 치다 쩍쩍 얼어붙어 가는 수십 마리 진흙 몬스터들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보여 주고 있는 블리자드를 보고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려니, 게임이라 추위도 별로 안 느껴질 텐데 밑에서 온갖 오버를 하며 검을 들고 뛰어다니는 크란이 보였다.
“우와아악, 추워! 나 날아가! 카프! 그만해, 카프! 사람 살려!”
“이제 적당히 얼었군요.”
“음.”
나는 현재 늪지대보다 훨씬 높은 절벽 위에 서서 마법이 구현된 밑쪽을 남 일처럼 바라보는 중이었고, 운오는 내 옆에서 화살 세 대를 손가락에 끼운 채 활시위를 걸고 있었다.
운오와 나는 둘 다 원거리 공격을 하기 위해 절벽 위로 온 것이라 마법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지만 밑에서 힘겹게 베어도 베어도 다시 붙는 진흙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크란은 꼼짝없이 블리자드의 영향권에 들고 만 것이었다.
어쨌든 눈 좋은 운오가 적당히 얼었다고 말했으니 이쯤 하고 멈추면 살짝만 건드려도 이제 다시 붙지도 않고 깨져 죽을 만큼 잘 얼었다는 뜻이겠지.
‘이쯤 해 둘까.’
“그만.”
다시 정신을 집중해 블리자드가 사라지게 하기 위한 이미징에 힘썼다. 그러나 역시 슈페리어의 마법이라서인지 순순히 없어지지 않고 반항하던 블리자드는 한참 뒤 눈과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리는 것을 한계까지 참으며 노력했을 때에야 간신히 사그라졌다. 그냥 가기는 아쉬웠는지 흉포하게 찢어발겨지듯 모습을 감추는 것이 사나운 짐승이 마지막으로 한 번 성질을 부려 울부짖고 가는 듯했다.
마지막 얼음 조각까지 사라지고 나자 밑에서 머리와 갑옷에 하얗게 얼음이 쌓인 크란이 펄쩍펄쩍 뛰며 고함을 쳤다.
“카프! 예고라도 해 줘야지!”
“……살아 있었어?”
살았으니 되었지 않느냐는 뜻을 담아 나름대로 농담을 실어 물었는데 크란이 이상하게 경직되었다.
“여, 여, 역시 넌…….”
“…….”
아무래도 농담으로 안 들렸던 것 같다.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운오가 옆에서 쭉 크게 활시위를 당기면서 입을 열었다.
“농담하실 시간 없습니다. 빨리 처리하고 여기서 벗어나야죠.”
“아.”
맞다. 다 처리한 것이 아니라 얼려만 놓았었군. 나는 크란의 뒤쪽에 오물처럼 얼어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렁 소리와 함께 제법 빠르게 뽑혀 나온 검이 푸른 예기를 뿌렸다. 마력을 쭉 넣는 데 집중하자 우웅 하고 투명한 기운이 일렁일렁 맺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절벽 위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우왁! 카프?”
“가까이에 얼어 있는 놈들부터 깰 테니 지원 부탁한다. 플라이!”
운오에게 지시를 내린 다음 플라이를 쓰자 훅 하고 떨어지던 몸이 멈추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내려가 땅에 발이 닿았다. 놀라 뛰어오던 크란이 그 모습을 보고 큰 한숨을 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맞다…… 후아. 마법이 있었지.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마.”
내가 그러면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저 높이에서 뛰어내리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사이, 머리 위쪽에서 활시위를 놓는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슈악 날아간 화살들이 얼음덩어리들을 보기 좋게 꿰뚫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쩡! 쨍! 쩌저정!
화살 세 대가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날아가며 동시에 두세 개의 얼음덩어리들을 뚫고 지나갔다. 잠시 뒤 금이 쩌저적 가며 소리도 없이 경쾌하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눈을 휘어 웃었다.
“크란. 이제 우리도 깨뜨린다.”
“어? 엉?”
얼떨떨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가볍게 발을 굴러 뛰고 있었다. 미리 헤이스트와 스트렝스를 걸어놓은 몸은 나비처럼 가볍고 빠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비록 다른 유저들과 겨우 비슷할 정도의 스피드더라도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자유의 상징 같은 몸놀림이었다. 탁탁탁탁 세차게 발을 굴러도 넘어질 걱정도, 다리가 아플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새삼 느낄 때마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눈앞에 얼어 있는 괴기스러운 몬스터의 정수리를 향해 마력을 더욱 세게 주입하며 검을 내리쳤다.
“하앗!”
콰장창!
“으으으음. 후아. 여기만 지나가면 바로 나오는 도시가…… 음, 맞아. 비스탈레였지.”
전부 해치우고 늪을 빠져나와 안전한 숲길에 들어서자 크란이 지친 몸을 아무렇게나 땅에 털썩 누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나도 가끔씩 들어가는 미스트 커뮤니티의 정보와 내 지도를 합쳐 보아 대충 다음에 어느 도시가 나올지 알 수 있을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 비스탈레는 지금껏 거쳐 온 중소 도시들보다는 더 큰 도시였는데, 비교적 사람이 없는 북쪽에 가까운 지형에 있다 보니 자연히 생겨난 특징이 하나 있었다.
“무법 도시군요.”
그것은 바로 운오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 것처럼 무법 도시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의 무법천지라는 점이었다.
외진 지형 특성 탓에 평범한 유저들보다는 PK나 범죄로 분류되는 행위를 즐기는 유저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웬만한 PK로는 살인자 칭호조차 붙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미스트에서조차 손쓸 도리가 없다고 정평이 난 놈들만 모였다고 소문이 난 곳이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할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거긴 아예 도시 안에 대전 콜로세움이 하나 있다며? 완전 자율 PK 아냐.”
늘 정정당당 정의를 부르짖는 크란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떠오른 것과는 반대로 운오의 표정에는 웬일로 흥미진진함이 떠올라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면 돈은 많이 번다는 것 같던데요.”
“너…… 진심으로 한번 참여해 보고 싶다는 표정이다?”
“할 만하면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카프! 이놈 좀 말려 봐! 얘 진짜 고등학생 맞아?”
크란이 기가 막혀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사실은 나도 그 콜로세움에 꽤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기적으로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무차별대전은 아무런 규칙도 없는 1 대 1 대전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우승하게 되면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상품의 존재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매회 달라지는 상품 중에서 얼마 전에는 추정 5서클의 ‘플래시 비트’ 마법책이 나온 적도 있었다고 들었으니 내가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에도 마법 관련 상품이 나오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비스탈레의 성문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골목과 골목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잔뜩 어깨가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몇 번이고 이 앞으로 나가 보려고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라는 부탁을 듣고 결국 오기는 했으나 직접 발을 옮기는 것은 상상보다도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바로 100미터쯤 앞으로는 전통식으로 지어진 큰 검도장의 문이 보였지만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몇 시간을 그대로 서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큰 키에 지쳐 보이는 등과 홀쭉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눈에 띄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선글라스로 애써 가린 눈동자에서 나는 형형한 빛이 선명했다. 마치 살인자처럼.
‘살인자라.’
남자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살인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지독한 괴로움을 겪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다 간신히 무덤에 꽃이라도 바치자고 생각하며 비행기에서 내렸더니, 사실은 그 대상이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땅 위에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고 했다.
좋은 일이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빌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남자에게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안 뒤로 매일 밤 꾸던 남자의 악몽은 내용이 바뀌었다.
죽을 것처럼 후회하게 만들던 꿈이, 그나마 가끔은 행복한 내용도 보여 주어 더 후회하게만 만들던 그 꿈이 이제는 미친 듯한 괴물의 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가능하다면 지워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십 년 넘게 자신의 안에서 똬리를 틀고 묵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되살아나던 그 감각. 견딜 수 없이 떨리는 희열과, 목멤과, 새로운 분노와, 음울한 증오까지 한꺼번에 뚫고 나오는 느낌은 도저히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혹자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남자를 보고도 이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자는 실소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너는…… 바뀌었을까.’
자신은 그동안 이렇게나 바뀌었는데. 그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입을 연다면 금방이라도 짐승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남자는 터진 입술을 꽉 붙이고 참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렇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만 노려보기를 몇 시간을 계속했을까.
갑자기 문이 철컹 열렸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몸을 깊숙이 숨긴 남자의 귀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범님. 오늘 정말 우리 데려다주는 거예요?”
“저 인우랑만 가도 되는데에!”
“요즘 어린이 범죄도 심각하다니까 어쩔 수 없지.”
재잘거리는 꼬마들의 목소리에 섞여서도 똑똑히 들려오는 전율스러운 목소리. 이제는 소년스러움은 전혀 없이, 변성기를 다 거치고 완전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되었는데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소년답고 부드러운 어투와는 달리, 그 목소리는 어딘지 무심하고 차가웠다. 조용하지만 날을 숨긴 듯한 날카로움. 그 변화를 깨닫고 남자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자,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뒤로 피해 있던 사이, 방향을 꺾었는지 보이는 것은 뒷모습에 가까운 옆모습뿐이었다.
그럼에도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맨 오른쪽에 서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큰 남자의 모습이었다. 남색 도복을 입고, 겉옷을 걸친 채 오른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단정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눈에 띄는 남자. 숨이 멈출 것 같은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눈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곧 그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엇, 사범님. 저기 땅이 꺼졌어요.”
“또 넘어져요, 사범님.”
“안 넘어져.”
남자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허억, 헉, 헉…….’
그것을 깨달은 순간, 골목에 숨어 지켜보던 남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담벼락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렸다. 악문 이가 다 부서질 것 같을 정도였다. 숨이 죽을 것처럼 가빠오고 있었지만 남자는 느끼지 못했다.
“사범님도 검 쓰는 거 보여 주면 좋은데…… 그쵸?”
“똥개야! 넌 나랑 해도 지잖아! 사범님은 천재라서 아무한테나 안 보여 줘!”
“아씨! 내가 언제 졌어! 졸라 나쁜 놈아!”
딱!
“욕하면 어쩐다고 했지.”
“…….”
티격태격하면서 싸우는 아이들을 남자가 한 대씩 꿀밤을 먹여 말린 뒤, 세 사람은 다시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사라져갔다. 그 모습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는 호흡곤란처럼 토하던 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턱을 타고 땀이 흘렀다.
“하아… 하… 하아…… 하!”
마침내 힘이 빠진 듯 볼썽사납게 미끄러진 다리조차 간수하지 못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을 때,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변했다.
그도 변했지만, 차라리 그냥 죽었던 것이 더 나았을 뻔했다. 방금 눈으로 보았던 그것은, 정말로 그가 ‘그’였다면 죽는 것만 못했을 변화였다!
‘그게 너라고?’
정말 너란 말인가?
검도 쓰지 못한다는 지팡이 짚은 절름발이 사내가, 정말로 너였단 말인가? 그게 너라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끊길 줄 모르고 터져 나오던 미친 듯한 웃음소리는 마침내 괴성 같은 신음 소리가 되었고, 그러다가는 또다시 흐느끼는 것 같은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에는 을씨년스러운 찬바람만 가득 차 있었다.
삐비비비비빗! 삐비비비비빗!
잠시 의자에 푹 기대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윤석호는 붉은빛이 점멸하며 나오는 컴퓨터 소리에 언제 감고 있었냐는 듯 번쩍 눈을 뜨고 버튼을 눌렀다.
“예. 윤석호입니다.”
[ 지부장님, 안녕하세요. GM 오린입니다! ]
홀로그램이 팟 나타나면서 당혹스러운 얼굴빛의 운영자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윤석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GM을 맡은 관리부 직원들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가 지부장에게까지 직접 화상 통화를 걸게 된 것은 그만한 상황이 일어났다고 모두가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윤석호가 묻자 GM 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HZ 퀘스트 관련 문제입니다. 윗선에 보고를 드렸더니 HZ 퀘스트 유저들의 계약은 지부장님의 직통 소관이기에 제가 직접 보고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
“도대체 무슨 문제지?”
심상치 않은 말에 윤석호가 눈썹을 찡그렸다.
[ HM-08 유저가 강제로 히든 이벤트, ‘선동’ 을 일으켰습니다! ]
“뭐?”
순간 윤석호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크게 뜨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홀로그램 화면을 통해 이제는 익숙해진 미스트베이 월드 커뮤니티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도 페이지, 도시정보 페이지, 아이템 정보 페이지…….’
그중 무심코 자유 게시판을 눌렀을 때 보인 한 단어 때문에 나는 순간 다른 것을 클릭하지도 못한 채 시선이 붙잡혀버렸다.
[ (합성아님)페일 나이츠의 길마, 시저의 깜짝 등장! ] [638]
……뭐라고?
[ 에피3, 두 번째 동영상의 주인공은 시저가 분명합니다. ] [422]
[ 어둠의 군대라니 이게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린지? 설명좀 부탁드림 ][753]
[ 에피소드 3,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 [895]
[ 시저가 누구? ] [632]
[ 야 뽀대난다 난 무조건 그쪽편ㅋㅋㅋ ] [344]
도대체 이 글들이 다 무엇인가. 놀라 우선 눈에 띄는 글을 클릭하자 게시물이 나타났다.
[ 어둠의 군대라니 이게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린지? 설명좀 부탁드림 ]
게시판이 아주 난리가 났네요.. 도대체 어둠의 군대 어쩌고 하는 시저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그냥 평소랑 다름없이 겜하고 있다가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게시판에 글을 쓰네요.
동영상 찍으신 분들 링크 좀 걸어주시고, 상황 설명 좀 간략히 해 주실 분들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