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운명의 날
늦가을의 날씨 좋은 날이었다.
바람 잘 날 없는 전씨 집안 다섯 형제 중 사람만 좋은 아버지와 밖으로 나도는 싸가지 없는 장남을 대신해 본의 아니게 동생들의 뒤치다꺼리에 애쓰고 있는 차남 전민열은, 넷째 전찬열이 어쩌다 운 좋게 나가게 된(찬열은 그것이 실력이라고 우겼으나 나머지 형제들은 전부 운으로만 취급했다) 전국 고교검도대회를 보기 위해 와 있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애써 보러 온 것이 무색하게도 넷째는 끄트머리 중의 끄트머리인 32강에서 이미 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바쁜 자신을 헛걸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찾아갔지만, 형의 분노를 미리 짐작한 넷째는 이미 홀랑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쫓아가 보았자 도망가는 데 도가 튼 넷째는 이미 3일은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간 지 오래일 것이었다. 민열은 결국 아쉬운 대로 결승전까지는 다 보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나마 그저 그랬던 다른 경기들과는 달리 준결승부터는 재미있는 승부가 많아 계속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결승은 깜짝 놀랐지…….’
우승한 놈은 그야말로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준결승에서 졌던 어떤 놈도 완벽한 기본 동작만으로 이기고 올라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었는데, 우승한 녀석은 느낌 자체가 딴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결승전의 중반부터는 잠시나마 모든 관객들이 조용해졌다고 느꼈을 정도로 그 시합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우승한 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으니까. 도저히 상대가 어떻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한 놈이었다.
마침내 일방적이기까지 했던 경기가 끝이 나고, 모두가 예상했던 우승자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트로피를 들며 호면을 벗는 모습을 보고 민열은 혀를 찼다.
‘멋지군……. 우리 멍청한 넷째 놈도 좀 저런 놈을 보고 배워야 되는데.’
모처럼 좋은 구경을 했다. 남들보다 한발 먼저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온 민열은 갑자기 달려와 자신의 옆쪽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때문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부딪칠 뻔했던 것을 간신히 피하며 고개를 들자 상대는 벌써 멀리 가버린 상태였다. 욕 한 마디 해 주기 위해 놈을 노려보았던 민열은 그가 입고 있는 검도복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엥? ……웬 도복?’
오늘 검도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시합자 외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달려가는 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멈춰 서 있던 민열은 잠시 후 뒤쪽에서 들려오는 두 번째 발소리에 다시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승조, 정승조!”
이번에도 검도복을 입은 소년이었다. 다만 그는 앞서 보았던 소년보다 옷이 흐트러져 있었는데 매우 급하게 뛰쳐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반사적으로 옆으로 조금 물러선 민열에게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스쳐 지나가는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그러나 처음에 보았던 소년과 달리 이번에 지나간 소년은 민열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 녀석…… 방금 상 받았던 우승자 아냐?’
조금 전까지 열심히 지켜보았던 경기의 주인공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바로 방금 전에 트로피를 손에 들고 있던 오늘의 주인공이 갑자기 누군가를 뒤쫓아 뛰쳐나왔다는 사실에 민열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검게 보이는 경기장 안을 돌아보았지만 또다시 뛰쳐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뭐야……?”
머리를 긁적인 민열은 곧 신경을 끄기로 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횡단보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연료값이 아까워 차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자기부상열차역은 횡단보도를 건너서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횡단보도 가까이까지 갔을 때, 어이없게도 방금 보았던 두 명의 소년과 또다시 마주치게 된 민열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첫눈에 보기에도 현재 둘의 모습은 심각해 보였다. 큰 소리가 오가다 우승자 소년이 다른 한 녀석에게로 다가가자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그가 횡단보도 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어어……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다니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지만, 빨간불의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위험해 보였다.
그 모습에 우승자 소년도 놀라 멈추자, 잠시뿐이었지만 민열의 눈에 보인 상대 소년의 얼굴에 괴로운 듯도 하고 누그러진 듯도 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침묵하고 있던 우승자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정승조 너 이 자식…… 왜 그러냐고, 도대체!”
그 말에 상대 쪽 소년이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표정에 광기 같은 미소를 띠고 느릿하게 무어라 대답하더니 몸을 돌려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말을 듣고서 힘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우승자 소년을 바라보며 민열은 이제 끝난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잠시 뒤 주먹을 쥐고 달려 나간 우승자 소년이 횡단보도 가운데쯤을 지나고 있던 상대 소년의 어깨를 돌려 잡아 다짜고짜 턱을 갈겨버린 것이다. 그러자 뒤이어 쓰러졌던 상대 소년도 일어나 우승자 소년을 발로 차버렸고, 그 사이에 몇 번의 악의 서린 고함이 더 오갔다. 놀라고 난감한 기분으로 멈춰 서 있던 민열은 그제야 지금이 끼어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안 되겠군.”
그리고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민열이 막 뛰기 시작한 순간,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우승자 소년의 앞에서 뭐라 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는 상대 소년의 뒤쪽, 즉 민열이 보는 도로의 오른쪽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트럭을 보았다.
‘저……!’
경악한 민열이 속도를 더해 달려간 순간, 우승자 소년도 이변을 눈치챈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봐!”
아이들을 발견한 트럭도 놀란 듯 급정거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가속을 받을 대로 받은 차바퀴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도로를 한없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민열이 막 횡단보도로 발을 들였을 때 엄청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던 아이들이 확 사라져버렸다.
‘아…….’
아니었다.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민열의 눈앞에서 한없이 느려진 시계의 허공에 한 녀석이 떠올랐다가, 몇 미터를 앞으로 날아가서야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위로 방향을 꺾은 트럭 바퀴가 지나갔다.
우지직.
그 순간, 민열은 그에게 들렸을 리 없는 사람의 몸이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긴장감의 끝이 영점이 되어 한계에 다다른 순간,
“흐, 으, 아아악!”
고무 타는 냄새와 함께 1초가 100년 같은 정적이 지나고 들려온 것은 반쯤 열린 차창을 통해 터져 나온 트럭 기사의 비명 소리였다. 그제야 민열은 간신히 이 모든 끔찍한 현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트럭 옆으로 다가간 순간, 바퀴 밑으로 길게 흘러나오는 피가 보였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간신히 차 앞까지 다가갔을 때, 그는 1미터쯤 떨어진 옆에서 구르다 만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검도복의 소년을 보았다.
‘저 녀석은…….’
그제야 하늘로 떠오른 것은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이 반짝 떠올랐다. 서둘러 멀쩡한 녀석의 얼굴을 살펴보자, 그는 맨 처음 민열을 스쳐 지나가고 우승자 소년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던 그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민열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사실도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고당한 녀석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봐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민열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이상하게 꺾인 목각인형처럼 피 웅덩이의 진원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한쪽 다리는 방향을 급격히 꺾다 비틀어진 트럭의 커다란 한쪽 바퀴에 깔려 보이지 않았다. 그 몸뚱이에서 생명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소름 끼치도록 적막한 이 사고 현장에서, 민열은 홀로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사고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여기는…….”
그 모든 침묵이 마치 비명 소리처럼 느껴졌다.
일단 전화부터 하고 나서 민열은 먼저 트럭 운전자를 살펴보았다. 운전석에 앉은 중년의 남성은 유리에 부딪친 이마에서 피를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그가 일단 숨은 제대로 쉬고 있음을 확인한 후, 민열은 두 번째로 쓰러져 있긴 했지만 살아 있음이 분명한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소년은 약간의 생채기 외엔 다친 곳이 없었지만 동공이 풀려 있었다.
“어이. 어이! 이봐!”
소년을 바로 눕힌 민열이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노력하자, 잠시 뒤 소년의 눈이 깜박였다. 하아. 민열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이 들어? 괜찮은 거야?”
그러자 그의 말을 들은 듯 만 듯 멍하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소년이, 잠시 후 지옥에서 기어올라 온 귀신 같은 형상으로 벌떡 몸을 뒤집어 일으켰다.
“어이!”
놀라 제지하려는 민열을 거인 같은 힘으로 뿌리친 채, 정신없이 방황하던 소년의 눈동자가 곧 피 웅덩이 속에 들어가 박혔다.
“……헌…….”
민열이 놀란 순간, 멍하니 뭐라 중얼거린 소년의 눈에 일순간 핏발이 섰다.
“강……무헌, 강무헌!!!! 강무헌!!!!!!!!!”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기다시피 몸부림치며 그 피 웅덩이 속에 누운 우승자 소년을 향해 간 소년은 옷과 몸이 피에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그를 살펴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실로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끔찍한 비명이었다.
때맞추어 멀리서,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속하게 이송된 구급차 안에서 짧게 사고 상황을 진술한 민열과 달리 정승조라는 소년은 자신들의 이름만을 밝히고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열을 믿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보자마자 시체라고 생각했던 사고당한 소년이 실은 아주 실낱같은 숨결의 씨앗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온몸이 피에 젖은 그 얼굴은 구급차 안에서 응급 처치를 받으며 다만 창백하게 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그 아수라장 응급조치 속에서도 정승조 소년은 절대로 강무헌이라는 우승자 소년의 머리를 무릎 위에 뉘인 채 놓지 않아 결국 그대로 치료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많은 감정을 한 얼굴에 담을 수 있는가 싶을 정도의 끔찍한 표정에서는 벗어났으나 이제는 반대로 시체 같은 무표정이라는 것이 아까와 달라진 점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저 무표정이 더 끔찍하기도 했다.
그때,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민열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워낙 아수라장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민열은 휴대폰을 집어 들며 고개를 구석진 곳으로 돌린 채 슬라이더를 내렸다.
[ 야, 전민열! 어디 가서 아직도 안 들어와? 오늘 저녁 당번 너잖아! ]
전화한 상대는 웬수 같은 형, 장남 전주열이었다.
“씨발…… 형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몇 년 만에 흥분해 욕을 내뱉자, 전화기 반대쪽에서 다혈질인 형이 버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뭐? 지금 형한테 뭐라 그랬냐, 너? ]
“나 지금 병원 가고 있으니까, 오늘은 형이 좀 해.”
[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병원엘 가는데? ]
“알아서 뭐 하게!”
민열은 아까까지 억지로 억눌렀던 갉아 먹힌 듯한 신경이 그대로 폭발하는 듯한 기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잠시 후, 전화기 너머에서 형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았다. 네가 좀 흥분한 것 같으니 일단 끊을게. 저녁은 도열이한테 맡길 테니까, 병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해. 형이 바로 나갈 테니까. ]
이럴 때만 형다운 형의 말에 민열은 간신히 속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안심이 되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며, 어느새 그는 평소처럼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았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도착했습니다!”
전화를 끊는 것과 동시에 다급하게 소리친 구급대원의 말에 민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바로 문이 열리고, 눈앞에 보이는 응급실을 향해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묶어 임시로 고정해둔 침대를 끌고 내려갔다. 그 와중에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정승조 소년도 힘없이 그를 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끝인 줄 알았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응급환자가 너무 몰려서 옮겨 실을 수가 없습니다…! 순서도 밀려서…….”
“뭐라구요?”
당혹해하는 구급대원들의 곁을 돌아보자 어디선가 대형 사고라도 났었는지 반짝거리는 초록 불빛의 흰 구급차들이 여기저기 매우 많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환자를 다른 곳으로 이송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도 기적처럼 간신히 붙어 있는 환자의 생명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는데,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고정 벨트를 망설임 없이 풀고 환자를 들쳐 안았다.
“뭐 하는 겁니까! 위험해요!”
만류할 새도 없이 환자를 안고 응급실 문 안으로 질주해 들어가는 정승조 소년을 뒤늦게 발견한 이들이 소리를 쳤다. 피투성이로 뭉그러진 다리 때문에 저렇게 안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업어도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민열은 뒤늦게 정승조 소년의 뒤를 따랐다. 소년은 자신이 울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시퍼렇게 귀기 서린 두 눈이 여기저기 피를 묻힌 채 번득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놀라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비켜 주는 것이 보였다. 정승조 소년의 눈빛 때문에도 그랬지만 시체처럼 늘어진 채 안겨 있는 핏덩어리 같은 몸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 때문에 더 그런 듯했다.
정승조 소년은 옆에서 민열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어라 입 속으로 계속해서 중얼대고 있었지만 그 말은 민열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죽지 않고 숨을 이은 환자가 수술실에 급하게 넣어지고 불이 켜진 지 한 시간.
환자를 무사히 인도하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푹 숙인 고개를 들 줄 모르는 정승조 소년을 대신해 민열은 고생고생한 끝에 겨우 경기장 측에 연락을 넣어 강무헌 소년의 사고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다가, 마침내 일대 혼란이 일어난 전화 저편에서는 곧 환자의 가족과 측근, 경찰들을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말해 왔다.
민열은 이제 대충 제가 할 일은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불이 켜진 수술실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단 둘이 남은 정승조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원래 치일 거라 생각했던 위치는 저 정승조 소년이 있던 곳이었음에도 정작 치인 이는 강무헌 소년이었다. 밀쳐진 채 넘어져 있던 정승조의 당시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강무헌이 그를 밀치고 차에 치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안타까움에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아 민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것을 기폭점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거기서 그렇게 싸웠던 것일까. 왜 자신은 진작, 더 빨리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을까.
지금 죽어가고 있는 그 소년은 바로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전국 고교검도대회의 우승자였다. 빛나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는 소년이었다. 그런 녀석이, 도대체 왜…….
민열이 자책감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수술실에서 한 사람이 다급히 빠져나왔다. 그러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정승조 소년이 미처 민열이 반응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붙잡았다.
“저, 무…헌은…… 지금… 어떻게……?”
더듬거리며 상태를 묻는 그의 눈빛을 보고 당황했던 이가 곧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
그 순간 민열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방금 숨이 멎어서…….”
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한 민열이 바쁘게 지나가는 의료진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 정승조 소년이 끈 잘린 인형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친 채 주르르 내려앉았다.
민열은 텅 빈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정승조 소년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아까 그 말을 들은 이후 정승조 소년의 숨조차 멈춘 것 같았다. 마치 그도 죽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어…….”
그래도 간신히 뭐라 말을 걸어 보려던 때에, 갑자기 정승조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저……?”
“…….”
정승조는 여전히 민열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멀거니 수술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그는 뒤돌아서 휘청휘청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여기로 달려올 환자의 가족들에게도 설명을 해 줘야 하는 민열이 따라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정승조 소년은 곧 병원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에서 민열은 소리 없는 절규를 느꼈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죽다니, 그야말로 죽고 싶은 기분이겠지. 거기에 그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민열이 허탈한 기분으로 의자에 기대앉았을 때,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수술실 안쪽에서 들려오더니 곧 한 명의 간호사가 빠져나왔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민열과 눈이 마주치자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환자 보호자 분이세요?”
“아뇨… 관계는 조금 있지만…….”
“아, 네. 지금은 현재 상태 설명만 드리는 거니까 듣고 다른 분들에게 알려 주시기만 하면 되어요.”
그 말에 민열은 단단히 긴장했다.
“……예.”
“환자가 잠시 숨과 심장이 멎었었지만 기도를 다시 제대로 확보했고 지금은 심전도도 되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망의 가능성이 있으니 마음의 준비는 필요하시리라 봅니다.”
‘뭐, 뭐야?’
“그, 그럼, 죽은 게 아니란 말이죠?”
“예. 아직은…….”
“휴…….”
아직이라는 간호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열은 터져 나오는 안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판 모르는 사이인데도 오늘 그에게 심장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게 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승조란 녀석은 어디까지 가버린 거지?’
그 후, 민열은 달려와 오열하는 환자의 부모와 스승 부부라는 사람들에게 대충의 상황 설명을 한 뒤 잔뜩 지친 채 간신히 형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형 전주열은 곧바로 애마를 끌고 달려와 주었고, 지친 동생을 실어 나르며 한 사람을 살렸으니 장한 일을 한 거라며 모처럼 진심 가득한 칭찬을 해 주었다.
사랑스러운 넷째는 예상대로 3일 후 집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더욱 강력한 형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 한 달 동안 눈에 시퍼런 멍을 달고 다닌 뒤 운동 종목을 검도에서 태권도로 바꾸었다.
이후 신문 한 귀퉁이에서 그 사고에 대한 기사를 짧게 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로 두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민열은 싸늘한 병원 문밖을 걸어 나가던 한 소년의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은 채 가끔 머릿속에서 어른거리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