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Sword master(소드 마스터) (17/57)

#외전, Sword master(소드 마스터)

와아아아아!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경기장의 가장 위쪽이자 뒤쪽. 5층의 출입문 바로 안쪽에 남자는 서 있었다. 3층 전체를 터서 만든 큰 경기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의 바람이 이마를 간질일 때마다 늘어져 있던 앞머리칼이 부드럽게 날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검고 긴 코트를 걸친 채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문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한 기색이 역력했고, 실제로 눈에 안 띌 만도 했으나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현재 남자를 계속해서 흘끔흘끔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들만 해도 대여섯은 족히 될 정도였다.

‘모델인가?’

‘아니, 탤런트 그…… 누구 닮지 않았어?’

그러나 그 모든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선글라스 안의 시선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현재 전국의 내로라하는 고교 검도의 인재들이 모여 한창 격돌하고 있는 중이었다.

희고 푸른 등띠를 맨 두 명이 땅에 끌듯이 발을 움직이며 긴장 속에서 대치하다가는 번개처럼 부딪치고 다시 떨어지는 광경에서는 젊은 패기가 넘쳤고, 경기장 내의 열기는 한여름의 열기와 맞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높았다.

그러나 그 열기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남자는 한참 미동도 없이 경기를 바라보았다. 승자가 나오고, 패자가 나오고, 승패가 갈림에 따라 더욱더 치열해지는 시합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은 점점 실망스러움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꼽을 정도의 선수들이 남았을 때쯤에는 드디어 입에서 긴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여기도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 뒤돌아서 나오려던 찰나, 남자의 품속에서 부르르하는 진동 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빠르게 반응해 품속에 손을 넣었다 꺼내자 딸려 온 것은 구식의 음성, 화상 지원만 가능한 핸드폰이었다. 현재 걸려온 것은 음성 전화라는 그림 표시가 화면에 반짝거렸다.

남자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윤석호입니다.”

[ 쓸 만한 사람은 봤어? ]

“없습니다. 차라리 전국의 유명 유단자들이나 찾아가 보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 그렇다고 대충대충 보고 있었던 건 아니지? 그러면 안 돼. 네 말대로 전국 고수 투어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좋은 보석을 제일 빨리 찾으려면 원석이 있는 곳을 봐야 한다고. ]

“…….”

[ 우리 머리 좋은 데이브도 말했지만, 내 생각도 똑같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대한 신선한 자료야. 그래서 널 보낸 거잖아?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해낼 거라 믿으니까. 하하하하. ]

“……네. 압니다.”

[ 썰렁하네.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가는 곳마다 사람들 시선이 따갑지 않아? 사인해 달라는 사람은 없었어? 그랬으면 무지하게 웃겼을 텐데……. ]

“저 끊습니다.”

[ 잠깐만…… 아직 할 말이 더……! ]

“거긴 밤이 늦었을 텐데 그만 주무시죠, 선배.”

뚝.

“후…….”

전화를 끊고 머리를 가볍게 흔든 남자, 윤석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지그시 찌푸렸다.

지금쯤이라면 다들 피로에 절어 제대로 된 사고조차 못 하고 있을 때일 터이다. 그런 때에 밖에 나와 있는 자신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다는 건, 상대가 자신의 휴식 시간을 그만큼 줄였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이라도 1분 더 자는 것이 나을 텐데, 그는 윤석호가 한국으로 온 뒤에 종종 이렇게 전화를 걸어댔다.

몇 분 정도 핸드폰의 화면을 내려다보며 그가 다시 전화를 거는지 안 거는지 지켜본 후 잠잠한 것을 확인한 윤석호는 핸드폰을 도로 품속으로 집어넣은 뒤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무심코 한창 시합 중인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몇 초 뒤, 찌푸리고 있던 눈을 별안간 크게 뜬 그는 재빨리 경기장에 조금 더 가까운 앞쪽 난간으로 몸을 내밀었다.

‘저건…….’

그곳에서는 호구를 뒤집어쓴 두 소년이 흔한 기합 소리도 없이 격돌하고 있었다.

한 명의 검은 놀랍도록 동작이 딱딱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본을 보는 듯한 동작에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힘을 실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원시원한 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상대보다 연결동작 등은 부드러웠지만 공격할 때마다 저런 공격을 어떻게 피할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기세의 검을 보이고는 했다.

그야말로 타입은 다르지만 둘 다 공격을 위해 태어난 검 같았다.

거의 난타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머리, 손목, 허리 등을 공격해대던 둘의 승부는 마침내 좀 더 오래 수련한 티가 나는 두 번째 소년의 승리로 끝났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호면 너머로도 격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보기 드물게 격렬한 시합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소년들이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서면서 땀을 닦기 위해 각자 호면을 벗었을 때, 놀랍게도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핑크빛 감탄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두 소년의 외모는 장래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출중해 보였으니 주변의 반응이 후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윤석호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외모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그들의 공격 일색이었던 시합은 한창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방어를 포기한 애들 자존심 대결 같은 싸움의 결과에 불과했지만, 그 속 시원한 공격의 모습만큼은 윤석호에게 하나의 가벼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젊은 생명력.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래…… 저래야겠지.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더라도 겁 없이 신나게 무기를 휘두르며 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둘의 시합이 신나 보였다기엔 분명 문제가 많았으나 윤석호의 머리는 이미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은 저 애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아야겠군.’

곧바로 결정한 윤석호가 막 몸을 돌려 관객석 옆에 붙어 있는 계단을 통해 빠른 걸음으로 뛰어내려가던 순간이었다.

- 다음은 10분 후, 수운고의 강무헌과 대종고의 유정호의 경기가 있겠습니다.

“우와아아!”

‘뭐지?’

다음 경기 안내가 흘러나온 순간 갑자기 경기장 내에 큰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것에 윤석호가 움찔하고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쪽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관객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누나, 누나가 영계 밝히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여기 나오는 놈이 나이가 아무리 많아 봤자 나하고 한 살 차이밖에 안 날 텐데 그러면 대체 누나하고는 몇 살 차인지나 알고…… 꾸엑!”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막내야. 이건 같은 무인으로서의 순수한 호감이야! 너처럼 빌빌대는 놈이 그 애를 알 리가 없지.”

“그딴 걸 내가 알아서 뭐해요? 아까 나온 정 뭐시기인가 하는 그놈 설명 듣는 걸로도 지쳤는데…… 게다가 그 무시무시한 무기 휘두르는 걸 보는 건 누나들만으로도 충분… 커헉! 윽! 윽!”

잠시 어둠 속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난 후, 여자가 살짝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말했다.

“여하튼 정민후, 더 이상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입 다물고 봐. 그 애는 정말 진짜진짜 대단하다고.”

“쿨럭쿨럭…… 으윽… 아니 그런데…… 나…….”

뻑!

힘겹게 내뱉은 작은 목소리는 곧바로 들려온 깊은 타격음에 묻혔다. 그때, 반대쪽에서 다가와 남매의 옆자리에 앉은 다른 사람이 어머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 다녀왔는데…… 어머, 우리 민후, 자니? 시합은 안 보고? 민정아, 얘 좀 깨워야지.”

“기절한 거니까 이따 깨워요.”

“하여튼 막내는 다 귀여운데 입이 문제야. 자고 있으면 아빠 닮아서 참 잘생겼는데.”

“여하튼 다음은 수운고의 그 부장 시합이래요!”

“정말? 부전승이라 아쉬웠는데, 이제야 나오는구나. 그런데 전 시합은 누가 이겼어?”

“수운고 쪽이요. 아무래도 얼마 안 배운 티를 내던 경의고 애가 이기기는 힘들었겠죠. 그런 것치고는 굉장하긴 했죠?”

“경의고 애도 스타일은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름이 뭐랬더라? 진…….”

“엇, 조금 있으면 시작할 것 같아요. 민후 깨울게요.”

거기까지 들은 윤석호는 잠깐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유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청소년 검도계에 대해 자신보다는 잘 알고 있는 듯한 그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다음에 나오는 선수 중 한 명이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일단 경기 하나 정도는 더 보고 내려가도 상관없으리라 생각한 윤석호는 계단을 약간 더 내려가 그 남매들의 바로 앞쪽 빈자리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끗이 닦인 경기장에 다시 한층 밝은 조명이 들어오면서 선수 입장을 알리는 장내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 등띠를 달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호면을 쓴 두 명의 선수가 각기 반대쪽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윤석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았던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와아아아아!

서로 인사한 후 뒤돌아 걸어가는 두 선수 중 등이 곧고 걷는 자세가 유달리 반듯한 흰 등띠의 소년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윤석호는 자신이 보았던 경기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시합은 준결승전이라는 이름이 허망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끝났다. 흰 등띠의 선수, 강무헌이라는 소년의 검 끝은 시종일관 놀라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방어와 공격, 둘 다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가 거기에 속할 것이리라. 조용하지만 압도적으로 강했다. 도저히 뭐라 트집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정확한 공격과 완벽한 승리였다.

단 한 가지 단점이라면 무도의 어느 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감, 즉 강한 카리스마가 약간 부족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 고수들과 비교했을 때였고, 호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 소년에게서는 카리스마 대신 그에 못지않은 젊은이다운 강렬한 투지가 엿보여 어느 누구도 그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우습게 보고 시합했다든가, 대충 싸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직접 그와 싸운 상대 선수가 더 잘 느낀 듯, 시합이 끝나고 인사를 나눌 때 상대 선수는 드물게 조금도 패배감이나 분한 기색 없이 기껍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실력과 그 실력을 가진 자의 자세. 윤석호의 눈으로 보기에도 천재라는 찬사가 모자랄 정도였다.

시합이 끝난 뒤에 다시 휴식 시간 약간이 주어졌다. 윤석호는 그 틈을 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매들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올해 결승은 수운고끼리 싸우게 되는 건가?”

“그러게요. 하지만 둘 다 아주 뛰어난 애들이니 뭐라고 하진 못할 것 같은데요. 게다가 원래 무예 특수계 학교잖아요.”

수운고라…….

윤석호는 머릿속에 그 이름을 적어놓고, 이 경기가 끝나면 꼭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별다른 정보 없이 두 명의 누나가 남동생 하나를 놀리며 재미있게 웃는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결승전이 시작할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윤석호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기가 무섭게, 장내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 다음 결승전은 수운고의 강무헌과, 수운고의 정승조의 경기가 있겠습니다.

이제 곧 같은 학교의 두 사람이 결승전에서 만난다. 같은 학교라면 둘은 아마 꽤 친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본인들에게는 꽤 껄끄러운 시합이 아닐까.

윤석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절도 있게 걸어 들어오는 두 선수를 보았다. 두 선수의 검도복 아래로 내딛는 맨발은 단호했고, 어느 한구석에도 망설임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이어 인사를 나눈 뒤, 심판의 깃발이 힘차게 올라갔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시합 시작 후 초반에는 두 선수의 기세가 팽팽해 어느 쪽도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재며 기회를 엿보다 몇 번 잔 공격이 오가기만 했다. 죽도가 부딪치는 딱딱한 소리들만 긴장감에 가득 찬 경기장 안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렇게 맴돌고만 있어서는 승패의 결과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곧 두 선수의 격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점수를 내주지 않으려 치열하게 막으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공격한다.

준결승전에서 아낌없이 그 위력을 선보였던 푸른 등띠를 맨 정승조의 날카로운 기세의 공격에도 강무헌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받아넘기며 그 사이사이 놀라울 정도로 등골 섬뜩한 공격을 날렸다.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시합에서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움직임 전부를 완벽하고 부드럽게 연결시켜가는 강무헌의 몸놀림 덕분이었다.

치고, 물러서고, 돌고, 다시 또 치는 것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춤 같았다.

시합이 중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렇게 움직이던 강무헌의 몸이, 어느 순간 한없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얼핏 보기에는 힘이 빠진 공격인 듯 보였고, 그에 따라 정승조의 공격도 한층 거세어졌지만 짐짓 열세에 몰리는 듯 보이는 와중에도 강무헌과 그의 검은 천천히 더 변화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완전해졌음을 알게 된 것은 모두가 마지막이 될 거라 예상했던 그 공격, 구석에 몰아넣으며 휘두른 정승조의 내려치기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빠져나가면서 상대의 허리를 강타한 강무헌을 보면서부터였다.

파악!

그 다음부터 윤석호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경기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곳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한 사람의 몸놀림과 검 끝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윤석호는 전율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시합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강무헌을 향해서였다.

불 같은 투지와 얼음 같은 기세가 한 몸에 있었다. 아까까지 강무헌을 열세에 몰아넣었던 정승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석호는 준결승전을 보고 자신이 했던 생각 중 하나를 철회하기로 했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했던가? 절대 아니었다.

단지 격에 맞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낙화하는 꽃처럼 부드럽고 비상하는 새처럼 곧고 빠른 검이 그 손과 발놀림으로, 그리고 검 끝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아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움직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경탄할 최고의 모습이 있다면, 그 일부는 바로 그 소년의 모습 안에 있었다.

윤석호는 회사를 빠져나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밝아져오는 환희를 느꼈다. 그래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똑같은 환희를 본 자가 내뱉는 말은 미처 듣지 못했다.

“검이… 저렇게 대단했어……? 엄청 멋지잖아……! 누나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아!”

시합이 끝난 후, 그 어느 때보다도 소란스러워진 경기장을 뒤로하고 조용한 문밖 외부 복도로 빠져나온 윤석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울리기 시작한 통화 연결음이 거의 2분 가까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드디어 ‘네…….’ 하는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나 자라는 자신의 말대로 자다 일어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윤석호는 그런 사정을 지금만큼은 배려해 줄 수 없었다.

“찾았습니다.”

[ 아…… 어… 뭐가……? ]

“선배, 아니. 실장님의 말대로 정말 보석이 있더군요.”

[ 어어, 보석 그거 좋지…… 반짝반짝……. ]

“살아 있는 보석 말입니다! 이거라면 중단되어 있던 것들도 이어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

그제야 잠이 퍼뜩 깬 듯,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똑같이 높아졌다.

[ 그러면 빨리 돌아와! 영감 떨어지기 전에! ]

“일단 호텔에 돌아간 뒤, 이쪽에서 메일로 윤곽만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보고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 왜? 그냥 바로 돌아와도 되잖아! ]

“아직은 조금 모자랍니다. 이쪽에서 조금 더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 젠장! 알았어. 빨리 보내! 기대되잖아! ]

뚝!

개발 대상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바뀌는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은 뒤, 윤석호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경기장 쪽을 흘끗 쳐다보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회장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은 뒤 목적지인 호텔 이름을 말한 윤석호는 시원한 한숨과 함께 자신의 안에서 멈추어 있다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들의 모습을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고쳐 그려 보며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자신에게 이런 도움을 준 수운고 소년들의 학교에는 원래 내일쯤 가려고 했었지만 아무래도 예상보다 조금 더 후에 찾아가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예상치도 못한 후회를 낳게 될 선택이라는 것을 그때의 그는 물론 알지 못했다.

며칠 뒤, 대충 서로의 의견 교환을 다 끝내고 새로운 일의 진행 방향을 완벽히 잡게 된 윤석호는 피로한 기색임에도 쉬지 않고 움직여 웹과 VT포트를 통해 알아낸 수운고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언덕 위에 위치한 유난히 운동장이 큰 학교에 들어선 뒤,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아 검도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얼굴을 붉힌 학생은 서쪽 체육관의 2층이라고 알려 주었다.

학생들이 정규 수업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부 활동에 매진하는 시간도 대충 맞춰 찾아왔기에 윤석호는 검도부가 활동하는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꽤 많이 모여 있는 남색 검도복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잘 맞춰 온 모양이군.’

그러나 윤석호는 가장 중요한 사항인 그가 찾는 소년의 맨얼굴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호면을 쓴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여기서도 또다시 직접 안에 들어가 검도복 소년 무리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말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일사불란하게 정렬하여 수련 중이던 소년들에게 묻자, 순식간에 시선들이 윤석호에게로 쏠렸다. 윤석호는 낯선 자에 대한 호기심도 섞여 있지만, 놀랍게도 그보다는 어두운 기색이 더 강한 소년들의 표정을 보고 내심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아함을 다시 묻기도 전에 소년들 중 가장 오른쪽 앞줄에 서 있던 소년이 윤석호의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 여기에 혹시 강무헌 씨가 계십니까?”

윤석호는 그의 말이 끝난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소년들의 대부분이 일그러지거나, 혹은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윤석호의 앞에 선 소년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없습니다.”

“예? 이 학교라고 듣고 찾아왔습니다만…….”

“없습니다! 입원했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윤석호의 눈이 드물게 놀라 부릅떠졌다.

“입원……?”

“…….”

“부장은 여기 없습니다. 유대부속병원으로 가 보세요.”

비교적 침착한 얼굴의 다른 소년 하나가 싸늘함을 뚫고 대답해 주었다. 윤석호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가 찾으려던 다른 한 사람 또한 이 학교였음을 상기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정승조 씨는 계십니까?”

그리고 체육관 내에는 전보다 한층 깨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아까 유대부속병원으로 찾아가 보라 대답해 주었던 소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부부장도 없습니다.”

“…….”

이쯤 되자 정말로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윤석호는 섣불리 왜냐고 묻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보기 싫었는지 다른 소년들 중 또 다른 누군가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다려도 안 와요. 학교를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침입자가 당장 나가기를 바라는 그 목소리에, 결국 윤석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체육관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한없이 초조하고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윤석호는 일단 호텔로 다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웹 페이지에 연결해 ‘21일 전국 고교검도대회’로 검색한 순간, 아까까지 그가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 …우승 후 30분도 안 되어…… 교통 의식 부재가 부른 불행한 사고 ]

[ 한 명 중태, 두 명 경상 ]

수많은 사건 사고 뉴스들에 비해 몇 개 안 되는 작은 기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윤석호는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 그 기사들 중 하나를 클릭했다.

[ 21일 APC 체육관에서 열렸던 전국 고교검도대회 남자부 경기의 우승자 강 모 군과 준우승자 정 모 군이 경기가 끝난 후 체육관을 이탈하여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은 채 횡단보도를 침범했다 때마침 달려오던 트럭에 치여 강 모 군이 큰 중상을 입었다.

트럭 운전자 이 모 씨는 신호에 맞추어 운전하고 있을 때 앞에 두 학생이 보여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바퀴가 미끄러진 탓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진술했으며, 목격자 전 모 씨 또한 같은 진술을 하였으므로 경찰은 증언에 따라 두 학생의 방심으로 인한 사고로 결론 내렸다.

현재 강 모 군은 서울 Y모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다. ]

윤석호는 안경을 벗어 던지며 양손으로 미간과 눈을 가렸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발견한 빛이 갑자기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며칠 동안 쌓였던 여독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감각에 옆에 있던 침대로 가 누운 뒤, 윤석호는 한참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최고’를 찾아 헤맸다.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한 세계를 창조해내는 일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중요한 마법과 무기에 관한 스킬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게임에도 있는 것이지만 스킬을 쓰는 것을 눈으로만 보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직접 느끼고 몸으로 움직이며 현실에서 비현실의 증거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 웬만해서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천재들 덕분에 그들을 도와 착실히 진행되어온 일은 이제 가장 굵은 뼈대이자 중요한 부분만을 앞두고 있었다. 과연 가장 중요한 부분답게 몇 달간이나 계속된 개발 난항 끝에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이 한국으로 왔고, 그 경기장에서 발견한 보석 덕분에 이제야 물꼬가 좀 트여 어느 정도 앞길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후우.”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코트 차림 그대로 누운 방향을 바꾸며 낮은 숨을 내쉰 순간, 갑자기 코트 속에서 부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전화였다.

“예. 윤석호입니다.”

[ 응? 왜 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어? ]

윤석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의 변화를 이렇게 귀신같이 집어내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혹시 외로워서 그래? ]

“…….”

[ 괜찮아. 외로운 건 인간의 숙명이야. 이상한 게 아니니 가끔은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

전화기 너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지끈 하고 가슴이 울렸다. 이 고통은 공적으로 만나 대화하는 낮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그가 지나친 친절함을 발휘해 전화해 주는 밤에는 수도 없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윤석호는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고통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으음…… 네 덕에 일이 잘 풀려서 나도 오늘은 데이트나 해 보려 했었는데 말이야. ]

듣기 좋은 장난스러움이 밴 목소리는 주인의 다정함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혼자 누워 있는 이 밤은 이 비슷한 대화를 수도 없이 나눴던 그동안의 어느 때보다도 조금 더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여기서 침묵을 하면 내가 또 민망해지잖아~ 그럴 땐 장단도 좀 맞추고 해 보라고. ]

윤석호는 가슴에서 지끈대던 통증이 이제는 머릿속까지 울려대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 즐거운 데이트 되십시오, 실장님.”

말해놓고도 살짝 위험하다고는 느꼈지만, 역시나 일이 아닌 다른 부분의 예민함은 말살된 듯한 남자가 느낄 만한 자극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 아, 안 넘어오네. 사내에 부는 네 고자 루머를 한 번에 종식시켜주려 했더니. ]

지끈지끈 양쪽 관자놀이 안쪽이 쥐어짜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종일 피곤한 하루였다. 아침나절 내내 일을 하다가, 오후에는 놀라운 사고 소식을 접했고, 그리고 저녁에는 심적으로 지치게 하는 이 고통과 싸워야만 하다니.

윤석호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 어? ]

그동안 이런 류의 전화 통화 및 대화를 수도 없이 했지만, 윤석호가 딱 잘라 알았다고 대답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전화 저편에서도 순간 놀란 듯 대답이 끊겼다가는 한참 후에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정말이야? 진짜 나가려고? 좋아. 내기는 나의 승리다! ]

“…….”

[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잠깐 살펴봐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러면 좋은 밤 보내고, 데이트 결과가 어땠는지도 말해 줘! 파이팅! ]

뚝, 뚜…… 뚜…… 뚜…….

윤석호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놓고 일어서서 코트 자락을 폈다. 전화는 끊겼지만 머리와 가슴 어느 부근의 통증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잘 모르겠지만, 윤석호 또한 정상적인 남자로서 섹스 정도는 주기를 두고 상대를 찾아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 날은 주로 오늘처럼 통증을 견디기 힘든 날이었으며, 과거의 상념이 되살아나는 날이기도 했고, 손끝이 유난히 차가워져 뭐라도 해서 피를 덥히고 싶은 때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세 가지 모두가 해당되고 있었다.

쉽게도 만난 하룻밤 상대와의 섹스가 끝난 뒤, 윤석호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계속해서 생각을 했다. 내일은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뻔했던 소년들의 불행한 사고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들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윤석호가 받은 충격은 사실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충격의 크기치고는 매우 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던 소년들의 아직 덜 다듬어진 모습 속, 최대로 발휘된 강함에서 윤석호는 최고이자 궁극, 즉 ‘MASTER’의 모습을 엿보았었다.

지금껏 수많은 마법과 수많은 스킬을 개발하는 것을 도왔지만, 궁극에 다다랐을 때의 모습만큼은 어떻게 방향을 잡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많은 수련을 쌓아 올라가 최고의 실력이 되었을 때 구현될 최고의 모습. 그것은 윤석호가 바라는 최고의 이상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고의 모습이란 대체 정확히 어떤 것이란 말인가? 그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함만이 최고의 전부일까?

어떤 방향을 제시해도 곧 파기되고 마는 개발 난항 속에서 동료들까지도 그에게 ‘네가 원하는 건 MASTER가 아니라 하느님 아냐?’ 하고 말했을 정도였지만 윤석호는 자신들이 이뤄내고 있는 이 놀라운 업적의 무엇 하나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으로 채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궁극’은 그저 강함만이 아니었다. 노력의 정점으로 이룰 수 있는, 그런 위대함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일은 한없이 멀기만 했고, 결국 최근 몇 달 동안은 그동안의 모든 열정조차 식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끝에 너무나 어렵게 발견해낸 빛은 우습지도 않게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이게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애초에 처음부터 손에도 잡히지 않는 경지의 것이 아닌가? 한때는 일도, 사랑도 둘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은 혼란스러울 뿐이고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랑은 나을 줄 모르는 감기와 더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으응…… 안 주무세요?”

“……곧 자겠습니다.”

뒤척거리다 희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작게 속삭이자 곧 다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내일, 상황을 설명한 후 강무헌이라는 소년의 병원에라도 가 보도록 하자. 거기까지 생각한 후 윤석호는 무엇인가가 꽉 눌려 있는 듯한 답답함을 참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찾아간 병원 접수처의 직원은 윤석호를 사건을 취재하러 온 기자쯤으로 여긴 듯, 이름을 묻자마자 아직 깨어나지 못한 환자의 안정을 위해 면회는 절대 금지이며 환자 가족들의 요청으로 인해 그 어떤 정보도 알려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윤석호는 결국 오랜 설득 끝에,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된 직원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환자 가족분들은 아니시지만, 가족의 동의하에 매일 오시는 분들은 계세요. 지금 시간이 두 시이니 마침 30분 정도만 기다리시면 그분들이 신청을 위해 오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별 희망 없이 찾아온 것이었지만, 왜인지 기다리는 동안 서늘했던 마음속 한편이 차차 침착하게 나아지는 것을 느낀 윤석호는 역시 이 빛을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강무헌의 이름을 대고 면회를 위해 찾아온 중년 부부가 나타났다. 살짝 눈짓하는 직원에게 감사의 고갯짓을 건네며 윤석호는 부부의 인상착의를 잘 기억해 놓았다.

몇 시간 뒤 슬픈 얼굴로 빠져나오는 부부의 뒤를 쫓은 윤석호는 한 커다란 검도장으로 들어가는 부부를 보고 그들이 강무헌 소년의 ‘검’과 매우 큰 연관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계십니까?”

부부가 들어간 후 문이 닫힌 검도장 옆 인터폰을 누르며 반응이 없음에도 계속해서 기다린 지 시간이 꽤 지났을 때, 탐탁지 않은 듯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십니까? ]

“강무헌 씨에 대해 여쭈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온 사람입니다.”

[ 우린 할 말이 없으니까 가시오. ]

예상 외로 차가운 대답에도 윤석호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날이 21일. 그리고 지금은 달이 하나 지난 2일경이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환자의 주변인들이 얼마나 많은 불쾌한 관심을 겪었을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 검에 대해서…….”

[ 글쎄 우린 할 말이 없소. 어차피 다 같은 찌라시 나부랭이 아니오? ]

자신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완강하게 거부의 뜻을 말한 뒤 뚝 하고 인터폰이 끊겼다.

“이런…….”

윤석호는 난감했지만, 이 검도 도장은 어떻게 해도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한 채 돌아가기로 했다. 저번처럼 불의의 사고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도 거절당하고, 세 번째로 찾아갈 때는 윤석호도 그리 느긋한 마음은 아니었다. 서울에만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갈 정도로 오래 체류하고 있었다. 찾아가 볼 곳은 아직도 한참 남았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것들을 보아야만 하는데, 그러기에는 남은 시간이 꽤나 촉박했다.

윤석호는 세 번 왔다고 벌써 익숙해진 인터폰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제발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또 한참을 기다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이번에는 빠르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 또 왔소? 대체 바라는 게 뭐요? ]

“선생님께서는 강무헌 씨에게 검을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강무헌 씨의 검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그동안 놀기만 한 것은 아니라, 윤석호는 검도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강무헌과 이 검도장 관장 부부와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었다.

[ ……내가 가르친 것은 맞소. ]

윤석호는 잠시 후 흘러나온 지금까지 중 가장 부드러운 긍정에 기회는 이때라는 것을 느꼈다. 본인에게 물어볼 수 없다면, 그 스승에게라도 질문해야만 했다.

“강무헌 씨가 우승할 수 있었던 강함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터폰을 붙들고 너무나 진지하게 물은 그 질문은 상대편 쪽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임에는 분명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 한참이나 침묵만 흘러나오는 인터폰을 향해 윤석호는 한 번 더 외쳤다.

“최고의 강함이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 허참.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군. ]

한참 후에야 흘러나온 대답은 어이가 없어 쌀쌀맞음도 다 빠져버린 듯 헛웃음이 섞여 있었다.

[ 이보시오. 뭔 뚱딴지같은 소리요? 강함이 어디서 나오냐니. ]

“정말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 어디 시합 좀 보고 와서 그러는 것 같소만, 그럴 시간에 기본기나 더 익히시오. 내려치기 하나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면 힘이 아무리 세거나 말거나, 기술 몇십 개를 할 수 있든가 말든가, 다 무슨 소용이오? ]

그 대수롭지 않은 말을 들은 순간, 윤석호의 전신에 정수리로 내리꽂힌 듯한 전율이 흘렀다.

“……예……?”

[ 아 그러니까, 가서 내려치기 연습이나 하란 말이요! ]

뚝!

매몰차게 끊겨버린 인터폰 앞에서 윤석호는 눈을 멍하니 부릅뜬 채로 서 있었다. 손끝, 발끝까지 전율이 흘러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수많은 것들이 들쑤시고 끓어올라 흘러넘쳤다. 정신없는 섹스로도 뜨거워지지 않았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아…….’

윤석호는 한참이나 그곳에 못 박힌 듯 선 채로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열광의 순간을 맛보았다.

훗날, 가장 비밀스럽게 THE MIST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스킬들의 원형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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