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발정(發情)
열다섯의 봄은 유난히 싸늘했다.
3월이라고는 해도 아직 해도 짧고 간간이 폭설도 내리는 때였다. 그런 날씨에 학교 측에서는 심신 단련을 이유로 봄 방학을 이용한 전 운동부의 합숙 훈련 공고를 내렸는데, 안내문에 따르면 검도부의 합숙 훈련지로 결정된 곳은 차로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외진 강원도 산골짝에 위치해 있었다. 더불어 기간은 3박 4일.
합숙 훈련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부원에 불과한 정승조에게는 힘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떨어지기 어려운 친우가 기대하는 눈치로 꼭 가고 싶다고 했으니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합숙 훈련을 가는 날, 정승조는 대절해 온 버스를 기다리면서 떠드는 무리들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말하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꽤 많으며, 지금도 눈치를 보며 말을 걸 기회만 노리는 놈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들과 필요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누구의 시선도 무시한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합동과 의리를 중시하는 운동부에는 그 누구보다도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정승조는 이상할 정도로 꿋꿋이 부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지켰다.
그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친구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승조야, 정승조.”
정승조는 그제야 얼음 같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실로 마법 같은 변화였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차갑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빙긋이 웃는 얼굴은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과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늦었잖아, 강무헌.”
어릴 적부터 외모로는 뒤지지 않던 소년의 미소는 실로 빛이 났지만 그의 친구는 전혀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옆에 다가와 섰다.
“먼저 와 있었네. 나 오기 전에 안내 사항 같은 것 있었어?”
“아니, 없었어.”
“다행이다. 출발은 언제쯤이래?”
“여덟 시. 이제 곧 버스가 올 거야.”
정승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무헌은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옷가방과 목검을 넣은 긴 가방을 옆에 털썩 던져놓고 그 옆에 앉았다.
“너무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
“평소 새벽 훈련도 똑같이 일어나서 하잖아.”
“훈련은 하면 잠이 깨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땀을 흘려야 좀 개운하고 몸도 덥혀지는데 지금은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추워?”
정승조는 마지막 말에만 관심을 보인 후 잠시 고민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자신의 옷가방을 툭툭 쳐 보였다.
“안에 바람막이 점퍼 있는데 줄까?”
“음…… 따뜻할 것 같지만 됐다. 이 정도는 견뎌야지.”
그러면서 슬쩍 웃는 얼굴에 정승조는 다시 한 번 저도 모르게 풀리는 표정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입꼬리를 올렸다.
강무헌이 나타나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많은 아이들의 관심도 무헌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무헌은 부 내에서 가장 실력이 출중했고, 그 실력을 가진 것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장 열심히 훈련에 임했으며 누구에게나 성의를 다해 대하는 것이 보여 아이들에게 가장 신뢰가 높았다. 선배들의 경우도 은근히 귀여워했으면 했지 미워하지는 않는 편이라 벌써부터 차기 부장감이 아닌가 암암리에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무헌아! 이제 왔어?”
정승조의 눈치를 보며 한 아이가 말을 걸자 다른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 주변으로 모여들며 한마디씩 했다.
“이번에 가는 곳 얘기 들었어? 작년에는 여름 합숙 수련만 갔었잖아. 선배들 얘기로는 진짜 춥고 빡세대.”
“그래?”
그중 합숙 수련이 유난히 힘들 것이라는 말에 무헌이 관심을 보이자 말을 꺼낸 아이가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니까. 다섯 시부터 사람을 깨워서 막 굴린대. 어흐~”
“야, 인마. 그 정도에 약한 소리 할 거냐?”
“뭐야? 새끼. 지는 저번에 훈련 다섯 시간 할 때 나중에 징징 울려고 해 놓고. 저 이젠 못하겠어요~ 그만 둘래요~ 으힝힝힝힝.”
“이 자식이?”
“무헌이 반만 따라가 봐라, 인마. 얘는 한 번도 못하겠단 소릴 한 적이 없는 걸로 유명하잖아. 그 독한 수언 선배도 결국 인정하게 만들고.”
서로 싸워대는 아이들의 말 속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무헌이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로 그런 건 아닌데. 나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승조도 그랬잖아.”
“겸손 너무 떨어도 그렇다, 인마. 네가 차기 부장이라고 하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잖아.”
“그런 건 별로.”
“뭐? 부장이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한데?”
“난 그냥 검도가 하고 싶어서 들어온 거니까…….”
난처한 듯하면서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강무헌의 표정을 정승조는 한발 물러선 채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막 밝아지고 있는 아침 햇살에 비친 강무헌의 유난히 새카만 머리칼과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속눈썹까지도 하얗게 반사되어 이상할 정도로 신비하게 보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승조의 눈에는 강무헌 외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은 정승조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그는 강무헌 외의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검도를 통해 무헌을 만난 지 10년이 거의 다 되어가지만 정승조에게 언제나 친구는 강무헌 하나뿐이었다.
때때로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심심치 않게 그에게 관심을 보이곤 했으나 정승조는 계속 거절해 왔다. 하지만 강무헌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말을 들어 주었고,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도 강무헌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는 자신뿐이란 것을 믿었기에 지금까지는 그 점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요즘 들어 정승조는 저렇게 마냥 다른 녀석들과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 강무헌을 볼 때마다 울컥 속에서 화가 치솟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무심코 내려다본 자신의 주먹이 손톱이 살에 파고들도록 꽉 쥐여 있는 것을 본 정승조는 떨떠름하게 손을 폈다. 손바닥에 네 개의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기분도 무척 좋지 않았다.
대체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자신의 성격에 집요한 면이 있다는 것은 정승조도 알고 있었다. 소수의 친구에게 매우 집중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친구에 대해 소유욕에 가까운 감정이나 친구와 친한 타인에 대한 질투도 느낄 수 있다고도 들었다.
‘질투라…….’
한 사람만이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친구에 대한 질투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던가.
정승조 자신도 그런 질투는 우습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무헌이 저렇게 자신과 대화하던 것도 잊은 것처럼 다른 녀석들과의 대화에 몰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곤 했다.
여태까지는 강무헌의 옆에만 있어도 뭔가 충족되는 것 같고, 기쁜 감정만 들었었는데 요즘 들어서 시작된 이 감정은 정승조에게는 표현하지는 못해도 매우 견디기 힘든 것들 중 하나였다.
정승조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들의 중앙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무헌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느슨하게 걸치고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있어 햇살에 반사된 목덜미가 하얗게 보였다.
강무헌은 그가 하루에 소화하는 엄청난 운동량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근육이 잘 붙지 않았는데, 피부도 잘 타지 않는 편이라 본인은 그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정승조는 가끔 강무헌과 둘이서 아옹다옹하며 싸울 때가 오면 그런 점을 가지고 놀려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콤플렉스를 자극당해 부르르 떠는 눈을 보면 몹시 기분이 좋았다. 사실은 그런 점도 하나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을 계속 보기 위해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무헌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정승조는 자력에 끌리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철가루처럼 버스가 도착해 모두들 짐을 싣기 위해 달려갈 때까지 계속해서 보고 또 보았다.
“승조야. 짐 실으러 가야지. 안 가?”
그때 갑자기 자신의 쪽으로 고개를 돌린 얼굴에 정승조는 흠칫 놀랐지만 강무헌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손을 뻗어 불렀다.
“빨리 와.”
“……응.”
정승조는 안도감을 느끼며 강무헌에게로 걸어갔다.
버스에 먼저 올라탄 선배들과 고문 선생이 아이들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승조는 줄을 서서 버스의 아래쪽에 짐을 실은 뒤 먼저 버스에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들어온 강무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곧바로 정승조의 옆에 앉자 정승조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옆에 맞닿은 팔이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미약하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안쪽에는 강무헌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약한 죄책감도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15세의 봄, 합숙 수련회의 시작이었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가다 마침내는 멀미가 나도록 덜컹거리던 버스는 어느 산 중턱까지 와서 멈추었다. 그곳이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진짜 목적지까지는 버스가 들어갈 수 없으니 내려야 했다.
“다들 내려라! 이제부턴 짐을 들고 걸어간다! 자는 놈들 깨워.”
맨 앞자리에 타고 있던 고문 선생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으며 정승조는 난감하게 옆쪽을 쳐다보았다. 강무헌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 한동안은 이것저것 말을 걸더니, 이내 졸리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듯 쓸데없는 말이 사라지고 꾸벅꾸벅 졸다가 툭 떨어뜨린 고개가 기댄 곳이 바로 정승조의 어깨였던 것이다.
덕분에 정승조는 달려오는 세 시간 내내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 있어야만 했다. 지금은 어깨가 아플 정도였지만 어서 깨워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안하게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니 깨우기가 힘들었다.
강무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승조는 강무헌이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자신만을 편하게 여겨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 좋은 따뜻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거기 정승조! 옆에 자는 건 무헌이냐? 안 깨우고 뭐 해?”
하지만 결국은 깨워야 할 듯싶었다.
정승조는 이 소음에도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잘 자고 있는 강무헌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강무헌.”
“…….”
“무헌아. 일어나. 목적지에 다 왔어.”
그 순간 거짓말처럼 강무헌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다 왔다는 말에 반응한 것 같았다.
눈을 뜬 무헌은 잠시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버스 안을 둘러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벌써 다 왔다고? 왜 우리만 이러고 있었지?”
정승조는 잠시 가벼워진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다 슬슬 팔을 돌려 근육을 풀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안 일어나서 그런 거지 뭐야. 무거워 죽는 줄 알았다.”
“어…… 내가 너 깔고 잤냐?”
“그래. 보면 모르냐?”
“미안. 고의는 아니야. 너무 졸려서 그만…….”
“괜찮아. 얼른 나가기나 하자.”
“아, 맞다. 나가야지.”
허둥대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강무헌의 뒤를 따라가며 정승조는 짐짓 아픈 듯 주무르고 있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어쩐지 싸늘한 냉기가 어깨에 와 닿아 몹시 추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곳은 하나도 춥지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버스가 멈춘 곳에서 합숙소까지 걸어 올라가는 데에는 한 시간 반이 더 걸렸다. 익숙하지 않은 산타기는 한창 혈기왕성한 소년들도 지치게 했지만 도착한 후 짐을 풀자마자 시작된 것은 지옥의 훈련이었다.
“기초 체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냐? 자, 가볍게 맑은 산의 공기를 마시면서 정신이나 차려라! 구보 준비!”
“예!”
산을 한 바퀴 더 뛰어서 돌아온 뒤에는 하체 단련을 위해서라며 오리걸음과 토끼뜀을 해야만 했고, 그 후에는 기초 자세 훈련과 타격 훈련을 했다. 전부터 꽤 오래 이용했던 곳이라고 하더니 넓은 앞마당 한쪽에는 폐타이어들도 제법 손질이 잘 되어 세워져 있었다.
정승조는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옆을 돌아보다 타격 훈련을 하고 있는 강무헌을 보았다. 순간 시선이 완전히 멈추었다.
“타앗! 타앗! 하!”
공격을 위해서 앞으로 치고 나갈 때에는 상반신에 힘을 주면 안 된다. 자칫 무게 중심이 잘못 쏠려 비틀거릴 수도 있고, 몸이 지나치게 뻣뻣하게 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장 힘을 주어야 하는 곳이 바로 배꼽 부근의 허리와 골반 부근인데, 그쪽은 무턱대고 힘을 준다고 나가는 곳이 아니라서 잘못 의식하면 엉덩이만 쭉 빠지거나 하는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강무헌의 바로 옆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녀석 하나는 너무 의식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느라 엉덩이만 빠지고 어깨는 지나치게 앞으로 쏠린 웃기는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서 강무헌의 움직임은 대단히 빠르고 부드럽게 보였다.
그 역시도 지금까지 밥 한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속되는 훈련을 받았을 텐데도 전혀 지치지 않은 것처럼 정확한 동작이었다.
바닥에 스치듯 밀고 나가는 발목 뒷부분의 곧게 선 힘줄이 도복 사이로 하얗게 보이다가 옷자락에 가리는 것이 반복해서 보였다.
무심코 자신이 해야 할 훈련을 잊고 그것을 집중해서 보고 있던 정승조는 갑자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뒷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고문이 서 있었다.
“어이구, 뭐 하냐. 수련 안 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정신을 놓은 거냐?”
“아닙니다. 계속 하겠습니다.”
정승조는 곧바로 목검을 들어 올려 기본자세 수련에 들어갔다. 사실 그나 강무헌에게 이런 것은 밥 먹기보다도 쉬운 동작이었다. 괜히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검을 휘두르고 다닌 게 아닌 것이다.
중학교 검도부에는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도 많아 훈련도 자연히 초보 수준을 기준으로 했다. 이미 그런 수준은 옛날에 다 건너 뛴 정승조에게는 이런 훈련이 체력만 빼게 만들 뿐 지루하게만 느껴져 어떤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본 강무헌은 정말 진지하게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몸이 힘들어도 처음 배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훈련에 몰입한 그 표정은 흐르는 땀에 가려 눈이 살짝 가늘어져 있었고, 볼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진지했다.
주변에 시선 한 조각도 돌리지 않는 그 무서운 집중력은 예전부터 익히 정평이 나 있던 것이었다.
정승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도 자신의 검로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아까 보았던 강무헌의 움직임뿐이었다. 스치고, 떨어지고, 다시 스치는.
‘……힘들어서 그런가?’
머리를 흔들어 보았지만 익숙한 자신의 검로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괜히 남의 검을 봤나.’
검을 배워온 기간이라면 자신도 강무헌과 거의 같고, 실력도 그리 차이 나지 않을 텐데 왜 자신은 저렇게까지 집중하기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승조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주변에서 훈련하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말 훌륭하구나.”
감탄하는 목소리에 정승조가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자 박수라도 칠 듯 감격하고 있는 사내와 그 앞에서 난감해하는 표정의 강무헌이 보였다.
“나는 이 검도부가 처음 생겼을 때 고문이었단다. 전근하게 되면서 지금의 김 선생님에게 부를 맡겼었지. 하지만 너 같은 녀석이 올 줄 알았더라면 몇 년 더 버텨 볼 것을 그랬구나. 네가 몇 살이라고?”
“15…세입니다.”
“엄청나군, 엄청나. 하루 이틀 배운 솜씨가 아닌데, 몇 년 배운 거지?”
“8년쯤 되었습니다.”
강무헌의 대답에 전 고문이라고 밝힌 중년 사내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8년? 그렇게 어릴 때부터?”
그 순간 난감한 듯 고개를 기울이던 강무헌의 눈이 정승조와 마주쳤다.
정승조는 보이지 않게 어깨를 움찔했지만 강무헌은 구세주를 만난 듯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저뿐만이 아니고…….”
“대단해! 어느 도장에 다니지? 널 가르친 분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아…….”
강무헌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지만 사내는 무헌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승조는 옆에서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진짜 잘하긴 잘하지, 무헌이. 하~ 부러움도 안 생긴다.”
“난 그래도 좀 부럽다. 나도 어릴 때부터 배웠으면 저렇게 잘했을까?”
“관둬라, 인마. 저기 정승조 보이냐? 쟤도 비슷하게 어릴 때부터 했대.”
“진짜?”
“쟤도 잘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헌이랑은 좀 다르잖아.”
“뭐야, 그게. 근데 무슨 말인지는 좀 알 것 같네.”
“피아노 같은 것도 암만 어릴 때부터 시켜 봐야 뜨는 건 다 진짜 천재들뿐 아니냐? 운동도 똑같아.”
정승조는 순식간에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중년 사내는 끊임없이 무헌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어 당황시키는 중이었고, 옆에서는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가세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손에 힘을 주자 쥐여 있던 목검의 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강무헌과 단 둘만 있었을 때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평화롭고 기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백 년쯤 전의 일 같았다.
정승조는 홱 몸을 돌려 다시 천천히 목검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아직도 강무헌 쪽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의 움직임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홱.
내려치고,
홱.
또 내려치고,
홱.
공기를 가르도록 힘을 주어 내려치면서 정승조는 검게 가라앉은 시선을 검 끝에 두었다.
사실 이런 일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곱 살에 강무헌을 처음 만난 이후 정승조의 삶은 놀랍기 그지없는 날들로 변모했다.
세계적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무역업체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듬뿍 칭찬과 사랑을 받고 어디서든 1등을 독차지하며 이기적으로 자라왔던 정승조는 강무헌을 만나 처음으로 패배의 맛을 알았고, 처음으로 또래와 논다는 즐거움을 알았으며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무언가를 할 때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모두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면에서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던 감정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이름은 바로 불안과 질투였다.
강무헌은 천재였다. 그가 든 것은 정승조가 든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검이라는 도구였지만, 정승조가 들면 평범한 검인 그것은 강무헌의 손에 들렸을 때는 절대적인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운동 신경의 차이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함이었다. 그 강함을 단순히 신체적 능력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정승조에게도 얼마든지 갖춰져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정승조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강무헌을 이기지 못했다.
강무헌은 검 한 자루로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승리는 비겁했던 적이 없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에게 도전했고, 또 졌지만 누구도 강무헌을 원망하거나 미워했던 적이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와 싸워 졌다는 것은 원망이나 질시보다는 경탄과 존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승조는 달랐다. 정승조는 늘 간발의 차로 강무헌에게 졌다. 승부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을 느꼈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해 굶주림과 비슷한 허전함을 느꼈다.
정승조는 강무헌에게서 결코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매번 느껴야 하는 그 패배감은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도 싫었지만, 강무헌에게 질 때 느꼈던 것만큼 절망감을 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정승조는 늘 강무헌만큼 노력하려 애써왔다.
강무헌은 자타가 공인한 수련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도 가방을 옆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고, 새벽부터 수련을 시작해 잠자기 전도 수련으로 마감할 정도의 엄청난 훈련량을 자청해서 해냈다.
그런 자기학대에 가까울 정도의 수련을 해내고 있으니 평범하게 수련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런 강무헌보다 더 많이 수련한다면 강무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몰래 졸음을 참으며 강무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 새벽 수련을 하고, 강무헌보다 더 늦게까지 수련한 다음 잠을 잤지만 정승조는 강무헌을 이길 수 없었다.
꼭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강무헌은 자신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어 이미 저만치 위에 선 자의 역량을 보여 주고는 했다. 그때에서야 정승조는 정말 천재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끔찍한 허탈감과 함께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다른 아이들과 아무리 같이 섞여 있어도 강무헌만은 자갈 사이에 낀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났다. 어린 정승조의 눈에도 보이는 그의 가치를 어른들이라고 몰라볼 리 없었다. 강무헌은 늘 경탄에 찬 말과 부러운 시선을 받았고, 그때에 꼭 비교되는 것은 정승조의 이름이었다.
「저 애가 그 천재 소년입니까? 다섯 살은 더 먹은 애들과 시합해서도 이긴다지요? 엄청나군요. 덩치도 훨씬 큰데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강함이 나오는 걸까요? 예? 옆에 있는 아이도 굉장하다고요? 하하, 그런 아이도 저 천재 소년에겐 한 번도 못 이긴다니 정말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요.」
「정승조 그 자식 잘난 척하는 것 봤어? 정말 짜증나더라. 자기가 아무리 뛰어나 봤자 강무헌한테 만날 두들겨 맞고 진다는 걸 모르는 놈이 없는데 뭘 믿고 그런다냐, 싸가지 없는 새끼.」
「체육부장 추천 좀 해 봐라. 선생님 생각엔 공부도 잘하고 체육 성적도 좋은 승조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뭐? 무헌이한테 깨지는 걸로 유명하다고? 하하하. 무헌이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는데. 응? 뭐, 강무헌이가 성격은 참 반듯하긴 하지. 선생님이 이런 말 하니 부끄럽냐? 알았다, 얘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무헌이를 좋아하니 믿고 한번 맡겨 보도록 하마. 강무헌, 잘 할 수 있지?」
끔찍했다. 하나밖에 없는 친우가 칭찬받아 기뻤지만, 그때마다 그 비교대상이 되는 자신에 대한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기쁨과 분노가 오가고 원망이 치솟다가도 함께 놀자고 손을 내미는 얼굴을 보면 금세 행복해지곤 했다.
감정의 소모가 심해 견디기 힘들었으나 정승조는 늘 꾹 참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를 신뢰하는 강무헌의 웃는 얼굴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의 알량한 자존심이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강무헌이라고 해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동요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강무헌을 자신보다 한 단계 더 위의 실력자로 인정해 버린다면 되지도 않는 승부에 집착하며 혼자 패배감에 속앓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승조도 알고는 있었다. 검도만 아니라면 굳이 강무헌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강무헌보다 공부도, 부유함도 하등 부족한 것이 없는데.
그러나 아무리 포기하려 해도 강무헌과의 승부만큼은 승패에 초연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포기가 되지 않는다면 이기기 위해 독을 키우는 수밖에.
훈련이 끝난 후 나온 따끈한 밥상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잡담 한 마디 안 하고 밥을 씹어 삼키는 강무헌의 모습을 보며 정승조는 천천히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아까 들었던 비교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아 밥알이 아니라 돌을 씹는 것처럼 입맛이 없었다.
새삼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비교당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란 힘들었다.
대충 맨밥만 한 그릇 밀어 넣은 뒤 바깥으로 나오자 땀이 식어 싸늘하게 느껴지는 산의 공기가 도복 사이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지만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 정승조지?”
익숙한 강무헌의 목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정승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몇 번 본 것 같긴 하지만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는 녀석이 서 있었다.
“뭐야.”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았지만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뜻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자 소년이 눈을 부드럽게 바꾸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 난 예전부터 너랑 꼭 얘기해 보고 싶었어.”
“뭐?”
“드디어 수련회까지 와서야 기회가 생기네. 너, 만날 혼자 다녀서 왕따라고 불리는 것 알고 있어?”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들었다. 정승조는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소년이 천천히 걸어와 옆에 섰다.
“솔직히 내가 널 대충 1년을 봐왔는데, 한 명 빼고는 아무하고도 말 안 하고 항상 혼자 있더라. 다른 애들이 말 걸면 싸가지 없게 굴고. 다른 녀석들 눈에는 그런 게 왕따로 보이는 거야. 알아?”
“꺼져.”
“근데 난 네가 상당히 맘에 들거든? 솔직히 네가 성격은 좀 안 좋더라도 얼굴은 잘생기다 못해 예쁘잖아. 난 얼굴만 잘생기면 뭐든 용서할 수 있거든. 거기다 머리도 좋고, 강무헌 빼고라면 검도실력도 톱이고. 완벽하네, 정말.”
그 말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억양에 정승조는 한층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 남자에 관심 없으니 꺼져.”
지금까지 혼자 있는 정승조에게 접근해 왔던 놈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되고 싶다며 말을 건 소심한 놈들도 있었고, 다짜고짜 시비를 걸며 싸움을 원했던 놈들도 있었다. 그리고 흔하지는 않았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부류가 바로 눈앞의 소년과 같이 자신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놈들이었다.
남자고 여자고간에 한번 걸리면 제일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것이 이 부류였다. 때문에 정승조는 자신에게 먼저 좋다고 달라붙는 사람에게 혐오가 일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강무헌과 검도에만 신경 쓰느라 최근에는 만난 적이 없다 싶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또 저런 놈을 만나야 하다니. 정승조는 혀를 짧게 차고는 두말하지 않고 소년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막 걸음을 옮겨 소년을 스쳐 지나갔을 때, 속을 알기 힘든 쭉 찢어진 눈에 웃음을 가득 담은 소년이 큰 소리로 혼잣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남자에 관심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놈이 남자 엉덩이를 졸졸 쫓아다니나?”
거기까지 들은 순간 정승조는 소년의 목을 틀어쥐었다. 한 손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목젖 밑을 간단히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듣기 싫은 목소리는 순식간에 멈추었다.
“뵈는 게 없나 보지? 그래서 네 목적과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내가 너 같은 호모 새끼라도 된다는 거냐?”
말을 하며 손의 힘을 살짝 풀자 기침을 몇 번 내뱉은 소년이 아직도 그 기분 나쁜 웃음을 완전히 지우지 않은 채 정승조를 올려다보았다.
“난 단지 너랑 좀 친해져 볼까 싶어서 말을 건 거고, 자기 마음도 모른 채 방황하고 있는 놈에게 제대로 된 답을 가르쳐 주려 했을 뿐이야.”
“헛소리 적당히 하시지. 내 마음을 네가 안다고?”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웃길 지경이었다. 저절로 씰룩거리는 한쪽 입가에 힘을 주며 묻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 따윈 눈치만 조금 있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걸. 넌 항상 강무헌 생각만 하잖아.”
“뭐라고?”
순간 감춰오던 무언가를 들킨 듯, 가슴 한구석이 철렁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표정이 기묘하게 변한 정승조를 보며 소년은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정승조의 손을 밀쳐내고 목을 탁탁 털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그러면 밤에 여기로 다시 나와. 넌 2조고 난 3조라서 자는 방이 다르니까 여기밖에 마땅한 장소가 없거든.”
“뭐…….”
살기에 차 눈을 번들거리는 정승조의 표정에도 소년은 전혀 겁먹지 않고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해. 난 홍영의야.”
밥을 먹고 나서 친목을 다지기 위해 게임을 한다 어쩐다 하며 소란을 떨던 사이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소년들은 수련회에 오기 전에 이미 나뉘었던 조에 합류해 각자의 방으로 잠을 자러 갔다. 정승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식사 때와는 달리 그의 기분은 이제 꽤 많이 풀어져 있었다. 강무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씻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밥 먹고 어디 나갔다 왔었어?”
“……그냥, 바람 쐬러.”
세수를 끝낸 뒤 칫솔에 치약을 묻히며 아까의 일을 묻는 강무헌에게 아주 거짓말은 아닌 대답을 하자 별 생각 없이 물었던 질문인 듯 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들어올 때 영의랑 같이 들어오길래 언제 친해졌나 했더니…….”
“모르는 놈이야. ……그런데 넌 그놈 이름을 어떻게 알아?”
불쾌한 이름이 친우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정승조가 눈을 치뜨며 묻자 강무헌이 칫솔을 입에 물며 대답했다.
“왜 모라? 가튼 부언인데. 마른 좀 업지만 열시히 하더데?”
“열심히 한다고? 하.”
강무헌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구역질 나는 녀석이 정승조를 보고 뭐라고 했던가. 자신이 강무헌을 보는 눈이 어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으며 강무헌 이야기를 빌미 삼아 밤에 나오라느니 하며 되먹지도 않은 수작을 걸었다.
빌어먹을 호모 새끼가 짓던 그 비열한 미소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강무헌이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열심히 하는 부원이라니? 그런 식으로 그 비열한 새끼를 기억하는 데 뇌세포를 쓰느니, 거기에 차라리 자신에 대한 것이나 더 기억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너 표정은 또 왜 그러고 있냐? 안 씻어? 나 다 했는데.”
거품을 뱉은 강무헌이 의아하다는 듯이 정승조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정신을 차리며 거울을 보자 잔뜩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아주 이상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좋은 면만 보아 줘도 부족할 친우에게 괴상한 얼굴이나 보여 주었다는 것에 놀란 정승조는 황급히 무표정으로 얼굴 근육을 되돌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할 거야. 기다려.”
산 속의 밤은 길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때의 소년들은 밤을 새서 놀고 싶어 했지만 낮의 혹독한 훈련에서 쌓인 피로감은 이길 수 없었다.
눕자마자 속속 잠드는 아이들 사이에 두 개의 자리를 나란히 깔고 한쪽에 누운 강무헌이 멀거니 서 있는 정승조를 향해 옆자리 이불을 탁탁 두들기며 불렀다.
“정승조, 이쪽에서 자.”
“……응.”
막상 대답은 했지만 방금 씻어서 아직도 물기에 젖은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당겨 덮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강무헌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옆에 앉기가 쉽지 않았다.
“안 자?”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 밝은 형광등 불빛이 눈부신 듯 찡그리며 묻는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 강무헌의 옆자리에 굳은 자세로 눕게 되었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씻고 들어온 녀석에 의해 불이 꺼졌다.
눈이 적응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승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옆자리에 누운 이의 기척을 느끼려 애썼다.
숨소리는 다른 녀석들의 것과 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오른팔에 닿아 있는 몸의 느낌만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바깥 어딘가에서 치르륵거리는 소리와 산의 냄새가 났다.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서인지 강무헌이 몇 번 뒤척거리다가는 곧 한쪽으로 자세를 잡으며 정승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입을 열어 인사를 했다.
“승조.”
“……응.”
“잘 자라.”
“……너도.”
간신히 굳은 혀를 움직여 인사하자 잠시 후 후우 하는 긴 숨소리와 함께 강무헌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그와 함께 들려오기 시작한 규칙적인 숨소리가 점점 느려지면서 안정적으로 변했을 때에야 정승조는 온몸의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정승조는 이제 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지 않은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잠은 오지 않았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직 정승조의 오른편에 누워 있는 친우의 존재감뿐이었다.
강무헌과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덕분에 강무헌의 집에서 자 본 적도 있었고, 반대로 강무헌이 그의 집에 놀러와 자고 간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정승조는 오늘따라 전보다 더 심하게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오른쪽의 이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결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자신의 오른쪽에 누워 있는 이가 정말 강무헌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뜻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마치 아이 같은 불안감을 느끼면서 정승조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는 어둠에 눈이 조금 익어 어렴풋한 형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천천히 하얀 이불을 더듬으며 오른쪽에 누워 있는 자의 어깨를 누르자 그가 웅얼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웅크리고 있던 이불 속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정승조는 순간적으로 놀라 손을 떼었다.
“하아…….”
다행히도 그는 깨지 않았다. 희미한 빛에 얼굴의 음영이 심하게 져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부드럽게 눈썹 위로 늘어진 검은 머리칼, 아직 수염이 나지 않아 솜털이 비치는 창백한 얼굴, 어린 시절의 얼굴이 아직 남아 있는 콧날과 고집스러움을 나타내는 듯이 꾹 다물린 입술, 그리고 턱.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는 강무헌의 얼굴이 맞았다.
안도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늘 냉랭하던 표정을 풀어버린 정승조의 손이 베개 위로 헝클어져 있는 강무헌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닿은 다음 천천히 문질러 보자 차갑고 까끌까끌한 느낌이 났다. 이어서 얼굴을 만져 보려다 멈칫하고 이불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팔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갑자기 강무헌이 심하게 몸을 뒤척였다.
“음…….”
두어 번 뒤척이던 강무헌이 다시 몸을 늘어뜨렸을 때는 이불이 구겨져 내려가 잘 때의 사내 녀석들이 으레 그렇듯 홀랑 벗은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
낮에 이상한 말을 들은 탓일까. 그 맨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사내의 맨살이 갑자기 너무나 이상한 미지의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목이 몹시 타는 것 같아 침을 삼켜 보았지만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물이 이 방에 없다는 것은 아까의 기억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정승조는 속으로 셋을 센 다음 간신히 눈을 돌리고 더듬더듬 벽을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아까 점심시간에 식당을 빠져나와 배회했던 그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왜 여기까지…… 식당에 가서 물이라도 마셔야겠군.’
그렇게 판단하고 막 뒤돌아섰을 때였다.
“드디어 왔네.”
홍영의라 이름을 밝혔던 그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사이에서 흐릿하게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좀 늦긴 했지만 올 줄 알았어.”
“헛소리 집어치워. 물 마시러 나온 것뿐이야.”
저놈은 왜 또 여기 나와 있단 말인가? 짜증을 내며 식당을 향해 걸어가자 홍영의가 뒤에서 쫓아오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잖아. 아까 네가 항상 강무헌 생각만 한다고 내가 말했을 때 넌 분명히 켕기는 얼굴을 했었어.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여기 나온 것 아냐?”
“친구가 친구를 생각하는 게 뭐 어쨌다고. 난 너처럼 남자에 관심 보이는 호모 새끼가 아냐.”
“모르는 척하지 마. 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나와 같은 종류라는 걸 깨달았다고. 남들은 네가 강무헌에게 매번 지면서도 계속 대련을 청하는 이유가 단순한 승부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난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너는 강무헌을…….”
“그 이상, 강무헌 이름 꺼내지 마.”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한 단어 한 단어 잘라 말하자 홍영의의 말이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홍영의는 오만하게 시선을 거둔 정승조가 식당에 들어가 파란 빛을 희미하게 내뿜고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실 때까지 조용히 있었지만 그가 입을 닦고 나가려 하자 다시 큰 소리를 냈다.
“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널 보기가 답답해 진실을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야.”
퍽! 콰당탕!
정승조는 망설임 없이 홍영의의 얼굴을 갈겼다. 불시에 얻어맞은 놈이 날아가 구석 벽에 처박혔다.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배 위에 느긋한 움직임으로 깔고 앉은 정승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진실 같은 소리 하고 있군.”
“하…… 좀 아픈데.”
퉷 하고 옆으로 침을 뱉은 홍영의가 얻어맞은 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당장이라도 벌벌 떠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승조는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 홍영의의 모습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자꾸 날 호모로 몰지를 않나, 진실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해대는 저의가 뭐야.”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하자 홍영의가 기묘한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네가 아까 말했듯이, 그래. 난 남자한테 관심이 많은 호모야. 하지만 네게 관심이 있다고 했던 건 그런 쪽의 관심은 아니었어. 어쩌다 보니 1년간이나 틈틈이 너와 강무헌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확실한 자기 마음을 혼자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웃기고 답답해서 저절로 관심이 생기더라고.”
“뭐라고?”
한 대 더 팰까 고민하며 손을 들어 올리려 했을 때 홍영의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강무헌이 다른 애들과 이야기하는 게 싫지?”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낮에 ‘넌 강무헌 생각만 하잖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굳은 정승조의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홍영의가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다른 녀석들이 강무헌 이름만 말해도 싫어하잖아. 강무헌이 네 옆에만 오면 안 놔주려고 하고. 검도로는 못 이기면서 다른 걸로라도 이기면 더 기분 나빠하고. 정작 그 애는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지. 그러고 나면 강무헌에게 유난히 잘 대해 주고. 안 그래?”
“너…… 뭐야.”
소름이 끼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정승조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빼며 일어서자 홍영의가 폭소를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했잖아. 네 바보 같은 짓을 1년간 지켜봐온 할 일 없는 호모라고.”
당장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이상할 정도로 귀에 선명히 파고들었다.
“넌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감정이 친구에 대한 것으로만 여겨지나 본데, 나뿐만 아니라 널 보는 놈들은 거의 그렇게 생각 안 할걸.”
“…….”
“웃기지 말라는 표정이네. 내가 너도 납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를 하나 들어 줄까?”
“뭐.”
“검도복을 입으려고 강무헌이 옷을 벗을 때마다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평소 상상이란 것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정승조의 머릿속에 강무헌의 모습이 크고 자세하게 그려졌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검도부실로 가서, 검도복을 입기 위해 교복 셔츠와 바지를 벗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눈앞에서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훌렁훌렁 옷을 벗으며 무신경하게 자신에게 잡담이나 거는 강무헌이 얼마나 짜증이 났던가. 남들이 쳐다봐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건가 싶어 화까지 날 때가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린 정승조를 보고 홍영의가 “그래, 바로 그 얼굴이야.” 하고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잖아.”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무 데서나 탈의하는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야.”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다른 녀석들이 보니까.”
“그 말대로라면 자기가 그런 데서 탈의하는 건 더 싫어해야 하는 것 아냐? 하지만 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옷만 잘 갈아입고 나가잖아.”
“그건…….”
입을 열었다가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조용해진 정승조에게 홍영의가 말했다.
“이래도 안 이상하다고? 자기는 남들 앞에서 탈의해도 괜찮다면 왜 친구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설마 강무헌이 여자라도 돼? 아니잖아.”
홍영의의 말에 정승조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홍영의는 정승조가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마지막 말을 날렸다.
“그런 걸 친구 사이의 걱정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 내일까지 대체 네가 하고 있는 짓이 뭔지 잘 생각해 봐. 그리고 밤에 여기서 또 보자고.”
다음 날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소년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불을 개고 새벽 훈련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을 깜박이고 있는 정승조에게 강무헌이 의아하게 물었다.
“눈이 왜 그래? 눈병이냐?”
“아니. 아까 세수할 때 비누가 들어가서 세게 씻어내느라 그런 것뿐이야.”
“조심하지 그랬어. 아…… 산이라 그런지 새벽 공기도 참 맑아서 마음에 든다. 이런 데서 해야 땀 흘릴 맛이 나지.”
“……응.”
의욕에 차 있는 강무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꾸 어젯밤 홍영의가 말했던 것들이 생각나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한 기분으로 앞마당에 정렬해 서자 기다리고 있던 고문 선생이 오늘의 일정을 외쳤다.
“얘들아. 잠은 잘들 잤는지 모르겠다. 어젠 좀 힘들었지? 오늘은 새벽에 쌍쌍 트레이닝과 구보로 시작해서 아침밥 먹고 기본자세 훈련, 점심밥 먹고 가볍게 대련, 저녁밥 먹고 친목 장기자랑, 그리고 자는 걸로 끝난다!”
“우우…….”
“이 녀석들,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냐? 하하하하. 그러면 이제 트레이닝부터 시작해야지. 두 명씩 짝지어서 해라!”
“승조야. 여…….”
“무헌아! 나……나랑 한번 해 볼래?”
당연하다는 듯이 정승조를 부르기 위해 돌아보았던 강무헌에게 갑자기 곰 같은 녀석이 달려들어 콧김을 내뿜었다. 당연히 강무헌과 함께 할 거라 생각하며 다가가려던 정승조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정승조의 얼굴을 보고 슬슬 피했으나 정작 강무헌과 곰 같은 놈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랑 하고 싶다고?”
“응. 싫어?”
저돌적으로 들이대며 강무헌에게 난감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정승조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강무헌. 아까 나 불렀잖아.”
서늘한 미소와 함께 곰을 제치고 다가가자 강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같이…….”
“같이 하려고 부른 것 맞지?”
곰의 표정을 흘긋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를 보며 정승조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러면 가자.”
“뭐야, 정승조! 갑자기 끼어들어……서…….”
제 분수를 모르고 정승조의 어깨를 밀친 곰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년답지 않은 살기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못 들었나 본데, 끼어든 건 네 쪽이야.”
그 얼굴에 띤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분노를 가득 담고 있었다. 완전히 질린 표정을 한 곰이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서는 틈을 타 정승조는 강무헌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어…… 야 인마, 정승조, 잠깐만……! 성우야, 미안하지만 먼저 갈게.”
이 소동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홍영의만은 웃음 띤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정승조는 자신의 옆에서 잠든 강무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늘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되새겨 보았다.
강무헌이 다른 녀석들과 이야기했을 때 화가 나는 자신, 강무헌이 다른 녀석들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을 때 분노하는 자신, 강무헌이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자신…….
모두 다 친구로서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해도 질투가 심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점욕이 강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강무헌이 그런 자신의 태도에 의문을 표한 적은 없었지만 과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럼 이제 우리 둘 다 사과했으니까 친구하자. 내 이름 강무헌이다.」
1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정승조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타는 듯한 여름의 태양, 노란 해바라기 꽃 아래에서 강무헌이 웃으며 했던 말이었다.
‘네 눈에는 아직 내가 그때의 나로 보일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강무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날이 갈수록 패배감과 질투심이 심해진 것은 물론이고 친구를 향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하루에도 몇 번씩 강무헌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어릴 적의 고집은 세었지만 그런대로 순수했던 아이의 면모는 아무리 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강무헌이 친구를 하자고 말해 주었던 그날의 자신은 이제 없는데, 그래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친구일까? 정승조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고민도 모른 채 속 편하게 자고 있는 강무헌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 정승조는 무심코 손을 뻗어 강무헌의 코끝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고된 훈련 덕분에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정승조는 설핏 웃고 강무헌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목덜미를 지나 어깨의 맨살까지 훑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상의를 벗고 자느라 드러난 맨살이 차갑지만 매끄럽게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그 부근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숨을 고른 정승조는 천천히 손을 내려 이불을 헤치고 강무헌의 왼쪽 가슴에까지 손을 대 보았다. 심장이 뛰고 있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전해져왔다. 어쩐지 자신의 손안에 강무헌의 생명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은, 오히려 기쁘고 만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강무헌이 몸을 뒤척이며 곧 깰 것처럼 숨소리를 내는 바람에 정승조는 깜짝 놀라 손을 떼어야만 했다. 손바닥에 닿던 체온이 사라지자 짧은 순간이었지만 묘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정승조는 머리를 긁적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직까지도 그리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이 기분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홍영의를 만나야 했다.
“내가 어제 말했던 것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봤어?”
홍영의가 식당 의자에 앉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정승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외면하고 있는 얼굴에서 그 나름대로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홍영의는 대꾸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네 행동이 내가 어제 말했던 것과 별로 다른 게 없다는 건 알아?”
정승조는 식탁 밑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간신히 풀었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점이었지만 그것을 삼자에게 지적당하는 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알아.”
“응?”
“알겠다고.”
결국 정승조는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네 말대로, 내 감정이 강무헌에게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질투나…… 뭐 그런 거라고 쳐. 독점욕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절교 따윌 권유한다면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정승조는 숨을 골랐다. 홍영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순진하네. 질투나 독점욕만 인정하겠다고? 그것들은 다 피자의 잘라놓은 조각 일부분 같은 거야. 내가 보기에 네가 보이는 감정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많아. 훨씬. 그런 것까지 다 인정해야지.”
“헛소리 늘어놓으려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꺼지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정승조, 너 사랑이란 말은 들어 봤어?”
또다시 직격타를 맞은 느낌에 나오던 말이 저절로 쑥 들어간 정승조를 바라보며 홍영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층 더 커졌다.
“이상하지 않냐? 개나 소나 말하는 게 그건데, 정작 입에 올리려고 해 보면 무엇보다도 무겁더라.”
“너, 설마…….”
“‘그 말을 내게 대입시키겠단 건 아니겠지?’”
정승조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챈 홍영의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점점 눈앞의 녀석이 보통 녀석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홍영의의 얼굴에 매우 쓴 것을 삼켰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 떠올랐다.
“날 똑바로 봐봐.”
정승조는 저도 모르게 홍영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가려 윤곽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어 약간 창백해 보이는 낯빛,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 등이었다.
마찬가지로 정승조를 한참 쳐다보던 홍영의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를, 강무헌이라고 생각해 봐.”
“말도 안 되는 소릴…….”
“생각해 보라고.”
정승조의 본능적인 반발은 홍영의의 강한 억양에 눌려 수그러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미친 것 같았지만,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응시하다 보니 점점 가려져 있던 나머지 부분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 얼굴로 일렁이며 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처음부터 홍영의의 생김새가 강무헌을 닮아 있었던 것일까?
강한 의지를 투영하는 눈, 침착하게 다물린 입술, 근육이 별로 없이 말랐지만 적당히 다부진 몸까지. 눈앞에 있는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정승조의 눈을 바라보던 홍영의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것조차도 친우의 미소 같아 정승조는 거칠게 내쉬어지는 숨을 참지 못했다.
“뭐……야. 이게!”
“정승조.”
눈앞의 홍영의, 아니, 어둠 속의 강무헌이 웃으며 말했다. 곧바로 멈칫한 정승조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강무헌의 손이 닿았다. 꿈틀 동요하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물어뜯어버릴 것처럼 떨리고 있었지만 결국 밀쳐내지는 못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무헌이 천천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뺨에 닿아 있는 손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대로 천천히 상체를 숙이며 그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정승조는 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주먹이 비명을 질렀다. 숨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냐. 뭘 하겠다는 거야……!’
소리가 되지 못한 외침이 속에서 메아리쳤지만 튀어 나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건 마치, ……그러니까 마치,
‘키스, 라도, 하려는…….’
것, 같잖아.
마지막 생각은 끝까지 할 수 없었다. 거침없이 다가온 숨결이 결국 정승조의 입술에 맞닿아 눌린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짝 마른 껍데기 같았지만 뭉클하고 부드럽게 눌린 살의 느낌에 온몸이 전율했다. 맞닿은 그 입술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지만 곧 천천히 벌어지며 안에서 축축한 것이 빠져나와 힘없이 굳어 있는 정승조의 입술을 열고 침투했다. 다물고 있던 이를 혀로 밀어 살짝 벌리면서 타인의 혀가, 타액이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 섬뜩할 정도로 생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퍽!
정승조는 필사적으로 그 얼굴을 후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에 밀린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날카롭게 긁히는 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기는 다시 싸늘해졌고, 얻어맞고 돌아간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것은 홍영의였다.
“너, 죽여버리겠어.”
정승조가 살의로 몸을 떨며 말했다.
“다 좋은데, 바지를 뚫고 나오려고 하는 네 것부터 먼저 처리하고 와서 죽여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서야 정승조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간을 내려다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금방이라도 앞섶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짜 크다, 너. 그렇게 좋았어?”
홍영의가 웃었다.
정승조의 머릿속이 그대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 정승조의 얼굴을 본 강무헌은 깜짝 놀랐다.
“정승조, 너 잠은 잔 거야? 얼굴이 왜 그래?”
정승조는 짓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림자가 시커멓게 진 눈이나 거칠해진 얼굴 등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무헌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정승조의 등을 두들겼다.
“어디 아프냐?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래?”
“난 괜찮아. 씻으러 가.”
“넌? 벌써 씻었어?”
“응.”
“뭐야…… 나도 빨리 깨우지.”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강무헌의 눈 속에 일렁이는 걱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승조는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씻고, 같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던 그 모든 자유를 이제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강무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한 번 달궈졌던 몸은 그리 쉽게 식지 않았다. 정승조는 또다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다리 사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친구에 대한 질투와 독점욕이 심한 놈일 뿐이고, 강무헌에게는 그 외에 아무 감정도 없을 뿐인데. 그런데. 그것뿐인데.
밖으로 나가자 새벽 트레이닝을 위해 다른 방 아이들도 나와 있었다. 그중 한 아이를 둘러싸고 몇몇이 걱정스럽게 질문하는 것이 정승조의 눈에 들어왔다.
“영의야. 어디서 맞은 거야? 얼굴이 왜 그래?”
“넘어진 거라니까.”
“야, 주먹 자국이 선명한데 뭐가 넘어진 거라는 거야. 대체 어떤 놈이야.”
“아니래도 그러네.”
“…….”
홍영의의 뺨에 선명한 멍은 햇빛 아래서 더 울긋불긋하게 보였다. 정승조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트레이닝 짝을 정하는 것은 어제처럼 시끄럽지 않고 조용히 진행되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지 않은 티를 내고 있는 정승조를 건드릴 간 큰 녀석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승조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강무헌의 등을 밀면서 그 까만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야. 세게 좀 밀어 봐.”
갑자기 강무헌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정승조는 움찔 팔을 거두었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찌뿌드드하니까 콱콱 밀어 보라고.”
“……알았어.”
다시 자세를 잡고 엎드린 강무헌의 등을 정승조가 양손으로 꾹 밀기 시작했다. 밑에서 으으윽 하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게 밀라고는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근육이 땅겨지는 느낌은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
보통은 그쯤에서 멈추었겠지만 정승조는 한층 힘을 강하게 주어 더 세게 밀어 눌렀다.
“아아…….”
약간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강무헌의 등이 완전히 구부러졌다. 다리가 흠칫흠칫 떨렸지만 독하게도 아직 항복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서 한 번 쉬고 조금 더 밀려던 순간, 등에 완전히 밀착하다시피 한 정승조의 힘에 눌려 짜부라져 있던 강무헌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승조야.”
“왜.”
“등에 좀 이상한 게 배기는 것 같은데 주머니에 뭐 넣었어?”
……설마.
정승조는 멍하니 강무헌의 등 쪽, 즉 자신의 다리 사이를 보았다.
때와 장소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물건이 또다시 반쯤 일어선 채로 강무헌과 자신의 다리 사이에 눌려 있었다. 몰랐을 때는 운동 때문에 힘들어서 몸이 뜨겁다고 생각했던 것이, 알아차리자마자 견딜 수 없는 감각으로 다가왔다.
정승조는 재빨리 하체를 강무헌의 등에서 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
“어? 야! 정승조. 어디 가는 거야!”
뒤에서 강무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불렀지만 정승조는 이미 건물 안으로 서둘러 사라진 뒤였다. 그 뒤쪽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트레이닝을 하고 있던 홍영의의 표정이 변했다.
잠시 후, 파트너에게 무어라 말을 한 홍영의도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컥, 쾅!
“헉…… 헉…….”
화장실 문을 부서져라 열고 바로 앞에 보이는 좌변기 칸 안으로 뛰어든 정승조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좁은 바지 안에서 성을 내고 있는 물건은 금방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틀이나 잠을 자지 못한 머릿속에서는 어젯밤 느꼈던 뜨겁고 축축한 감각이 방금 겪은 것처럼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승조는 열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차가운 벽에 비벼 식히면서 서둘러 바지를 반쯤 내리고 속옷 안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욕망의 증거가 징그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는 시간이 많아 만지지 않고 식힐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강무헌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승조는 이를 갈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벽을 짚은 손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물건을 흔들며 쥐어짜기 시작했다.
“헉…… 하아… 흐…….”
뜨겁게 달아오른 물건이 난폭한 손의 움직임에 성을 내며 발광하기 시작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정신없는 쾌감이 머릿속에서 터져댔지만 동시에 그것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승조는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마지막 박차를 가해 손을 흔들었다. 곧 절정이 가까워지면서 머릿속에 쾌감을 부채질시키는 엑스터시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 환상은 무방비하게 벗은 채 자고 있는 강무헌의 이불을 들추고 그의 몸을 유린해 들어가는 정승조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뭐?!’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정승조가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지만, 그 순간 그는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윽……! 하아!”
움켜쥔 손끝에서 하얀 액체가 터져 나왔다. 몇 번에 걸쳐 튀어나온 액체가 조준한 대로 변기 안으로 떨어지면서 툭툭 소리가 났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마지막 숨이 뜨겁게 새어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떤 정승조는 물건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면서 별안간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타일에 머리를 찧었다. 이어서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머리를 찧은 정승조는 눈을 부릅뜬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내가 그럴 리가…….”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두워진 시야에 닿은 변기 물 위로 번지면서 떠다니고 있는 하얀 덩어리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났다.
“우욱!”
정승조는 입을 가리며 변기를 붙잡고 앉으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토사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한참 뒤 정승조가 입을 헹구며 나왔을 때 본 것은 팔짱을 낀 채 문 옆에 서 있는 홍영의였다.
“뭐야.”
눈만 살아 독기가 번들대는 정승조의 질문에 홍영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에서 뭐 했어?”
“대답할 이유 없어. 비켜.”
“없긴 왜 없어.”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승조는 말없이 홍영의를 지나쳐 걸어갔다.
“겁이 났지?”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승조는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몇 발짝 더 앞으로 갔다.
“아니면. 혐오스러웠어?”
이번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정승조는 주먹을 움켜쥐고 뒤돌아서면서 으르렁거렸다.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러나 노려본 눈이 마주친 순간, 정승조는 뜻밖의 장면에 그대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서 있는 홍영의는 지금까지의 뜻을 알 수 없는 수상한 녀석이 아니었다. 정승조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너와 같아. 그래서 네가 처음부터 싫었어.”
그날 밤, 이번에는 조금 일찍 만난 식당에서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긴 홍영의가 중얼거렸다.
“나도 친구에게 발정한 적이 있어. 부정하고 싶었는데, 내가 호모새끼인 건 어쩔 수 없더라고….”
정승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홍영의는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했지. 사랑이 뭔지 아냐고. 우리 같은 놈들에겐 사랑을 알아차리는 게 기쁨이 아냐. 충격일 뿐이지.”
“난.”
“나같은 그런 호모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거면 이제 포기해.”
정승조는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곧바로 홍영의에게 가로채였다.
“상대를 위해서라도 빨리 인정하는 게 나아. 모른 척하고 기만하면서 보는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말란 소리야.”
스스로에게조차 숨겼던 마음 속 가장 내밀한 부분이 까발려진 느낌이 들었다.
정승조는 숨을 씨근대며 주먹으로 벽을 내질렀다. 단단하게 속이 들어차 있는 콘크리트 벽은 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충격은 배로 크게 주었다. 정승조의 손이 순식간에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인정하면, 뭐가 달라지나 보지?”
이를 갈며 중얼거린 말에는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인정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적어도 후회는 덜 할 수 있지.”
홍영의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아도, 몰라도 나중에 후회한다고 치면 적어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후회하는 게 더 낫거든.”
정승조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을 잃어버렸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비틀비틀 다시 돌아온 자신의 잠자리 옆에는 여전히 강무헌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충실히 살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얼굴로 꿀맛 같은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의 친우가 이렇게나 원망스럽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정승조는 멍하니 손을 뻗어 강무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 경험으로 강무헌은 외부의 웬만한 자극에도 잘 깨지 않을 정도로 잠을 깊이 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승조는 그림을 그리듯 손끝으로 이마를 더듬으며 눈썹을, 코를, 입술을 만져 보았다. 입술 부분에서는 더러운 자신의 손이 닿으면 강무헌까지 더럽혀질 것 같아 차마 건드릴 수 없어 그 주변만 덧그렸다. 그러자 꼭 감긴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깨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깨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그들의 관계 같았다. 정승조가 아무리 만지고 바라보아도 강무헌은 깨지 않는다. 강무헌은 아마 평생 정승조로 인해 질투하거나 고민할 일은 없을 것이고, 모든 괴로움은 오롯이 정승조만의 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친구를 상대로 발정하는 것도 구역질이 났지만, 평생 자신만 괴로워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정승조는 대담하게 옆에 누운 자세에서 강무헌의 이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따뜻하게 오르락내리락 숨 쉬고 있는 가슴을 만졌다. 이러고 있는 것이 꿈결 같았다.
손바닥으로 슬슬 만지자 작은 돌기가 손가락에 걸렸다. 그것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한 번 눌렀다 힘을 빼며 빙글빙글 움직이자 돌기 또한 부드럽게 짓눌리며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음…….”
간지러웠는지 강무헌이 손을 들어 가슴께를 긁적거리다 다시 잠들었다. 정승조는 잠을 자지 못해 핏발 선 눈으로 웃으면서 갈비뼈를 따라 손바닥을 내렸다.
이미 자신의 다리 사이는 입술 주변을 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열을 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진득한 쾌감이 아랫부분에서부터 끊임없이 밀려왔다. 허리를 쓰다듬으며 내려가다 보니 고무줄 체육복 바지에 손끝이 닿았다. 정승조는 잠시 망설였지만 천천히 바지 안쪽까지 손을 비집어 밀어 넣어 보았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뜨거움과 습한 느낌이 났다. 머리까지 차오른 열이 터질 것 같았다. 슬슬 일어서던 다리 사이가 단번에 우뚝 서서 끄덕거리고 있었다.
“하…….”
정승조는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느끼는 감촉에 집중했다. 먼저 느껴진 것은 팬티의 천이었다. 만질만질한 면 사이로 슬슬 손을 움직여 보자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남자의 물건 윤곽이 느껴졌다.
그것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이 놀라울 정도로 그를 사로잡았으나 정승조는 간신히 다른 쪽 손을 자신의 바지 안에 넣는 것으로 참아냈다.
곧 터질 것 같은 자신의 물건을 꽉 잡으면서 정승조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반쯤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너무 흥분해서 더 이상 어떤 이성적인 생각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젠장…….”
이 와중에도 강무헌의 얼굴은 편안히 규칙적인 숨만 내쉬고 있을 뿐, 자신의 몸에 어디까지 타인의 손이 닿아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다행한 일임을 머리로는 아는데도 갑자기 분노가 치솟은 정승조는 약간 거칠게 팬티를 지나 강무헌의 맨 다리를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맨살의 느낌이 미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하아……!”
일주일간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다가 처음으로 한 방울 혀끝에 물을 떨어뜨렸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달았다. 부정할 수도 없이 너무 달아서, 정승조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강무헌에게 정말로 발정하고 있었다.
숨죽인 헐떡임이 일고여덟 명이 같이 자는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자신이 마치 개새끼 같다고 생각하면서 정승조는 정신없이 다리를 쓰다듬다 대퇴부를 만지고, 아랫배와 배꼽을 더듬었다. 오른손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익숙하게 흔들고 있는 채였다.
헉, 헉, 헉, 헉, 하아. 하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물건에서 액체가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정승조는 계속해서 강무헌을 조심해서 더듬으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과 함께 파정을 맞았다.
머릿속에서는 하얗게 터지는 환상이 움켜쥔 팬티 안 엉덩이를 더듬으며 물건을 비비는 자신의 영상을 계속해서 보여 주었다. 환상 속의 강무헌이 그에게 눈물 젖은 얼굴로 엉덩이를 흔들며 손을 벌리고 있었다. 승조야, 정승조. 도와줘.
‘도와줘.’
“크으윽…….”
손바닥 안에서 물건이 요동을 치며 정액을 쏟았다. 시큼한 냄새가 이불 속에서 금세 올라왔다. 정승조는 절정의 쾌감에 몸을 떨면서 필사적으로 강무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눈앞이 흐릿하게 일렁인다 싶더니, 어느 순간 눈에서 뜨거운 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난…….”
정승조는 벌벌 떨리는 왼손을 강무헌의 바지에서 빼냈다. 그것만으로도 강무헌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이불 사이로 빼꼼 모습을 드러낸 유두만으로도 정승조는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일어서는 자신의 물건을 느꼈다. 끔찍함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강무헌……!’
정승조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또다시 자신의 물건을 붙잡았다. 차마 소리도 못 낸 채 흐르는 물이 베개에 계속해서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간신히 고개를 움직여 강무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집에 가는 날의 아침이 되었다. 모두 부산히 짐을 싸고 있는 가운데 강무헌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정승조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자 더욱 수척해진 얼굴이 이젠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너 진짜 안 되겠다. 약이라도 타러 가자.”
열이라도 있나 싶어 이마를 짚으며 말하자 흠칫하고 놀란 정승조가 퀭한 눈을 들어 강무헌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어?”
“너 약이라도 타러 가야겠다고. 같이 가자. 어디가 아픈지는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아픈 거 아냐.”
정승조는 고개를 저으며 도로 몸을 뒤로 기대었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색은 한층 깊어져 있었다. 강무헌은 이유 모를 우울함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왜 그래.”
말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정승조가 드디어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그러면 나 먼저 나가도 되는 거냐? 엇…….”
약간 섭섭한 얼굴로 내뱉은 강무헌의 말에 정승조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강무헌의 허리를 감싸 품 안에 끌어안았다. 마치 어리광이라도 피우듯이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대는 광경에 강무헌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종 공격이냐?”
“……두고 가지 마.”
“뭐?”
“나 두고 먼저 가지 말라고.”
약간 쉬어서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가 어둡게 중얼거리자 우울함이 한층 배가 되었다. 강무헌은 잠시 멍하니 자신을 끌어안은 정승조의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손을 올려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럼 같이 갈게. 그러면 됐지?”
“어디까지 같이 갈 건데?”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말하는 목소리는 어두웠지만 강무헌은 그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뭘 어디까지 같이 가? 계속 같이 가는 거지.”
“계속.”
“그래, 인마. 계속.”
“…….”
그러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승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무헌.”
“어.”
“강무헌.”
“왜.”
“넌 내 친구인데.”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아무래도 얼굴을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정승조를 밀쳐내기 위해 애를 쓰는 강무헌에게 정승조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러면 난 네 친구가 맞겠지?”
“그럼 너랑 내가 친구지 원수겠어?”
어이없어하며 강무헌이 대답한 말에 마지막으로 허리가 부러져라 꽉 껴안았던 정승조가 스르르 팔에서 힘을 풀었다.
“으윽. 내 허리…….”
투덜거리며 정승조를 완전히 밀쳐낸 강무헌은, 그 순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인마, 정승조!”
“…….”
놀랍게도 정승조는 그 짧은 순간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흔들어 보기도 하고, 발로 차 보기도 했지만 무슨 수를 써도 정승조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정승조는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 나가 버스에 실려야만 했다.
서울로 가는 내내 죽은 듯 잠을 자던 소년은 내릴 때가 되어서야 눈을 뜨며 짧고도 깊었던 숙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날 이후, 정승조는 더 이상 강무헌에게 다가오는 다른 아이들에게 대놓고 적대적인 살기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간혹 말을 걸 때마다 제대로 대답까지 해 줘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승조의 안에서 그날 무언가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3의 마지막 검도부 은퇴식은 제법 화려했다.
“선배님! 많이 드세요!”
“야, 뭐 하냐! 빨랑 가서 더 안 가져 오고!”
“넵!”
이제 곧 고등학교에 올라갈 전 부장 강무헌을 위해 후배 부원들이 떡 벌어진 한 상을 부 연습실 내에 차려왔다. 더 놀라운 것은 컴퓨터 부엌이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이때 자기들이 재료 구입부터 조리까지 전부 직접 했다는 것이었는데,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 저편에서는 상다리 부러질까 겁이 나는 음식들의 산이 보이지 않는 듯 계속해서 끓이고 자르고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상의 상석에 앉은 강무헌은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정승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당황스럽게 눈을 돌리며 묻는 강무헌에게 부부장 정승조는 빙긋이 미소 지어 보였다.
“성의라니까 먹으면 되겠지.”
“그건 그렇지만…….”
사실 정승조는 이 모든 소동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우연히 연습실을 지나가다가 어떤 음식을 준비하면 좋을 것인가로 머리가 빠개져라 고민하고 있는 녀석들을 발견한 것이다. 무서운 부부장에게 딱 걸린 후배들은 경기를 일으키듯 놀랐으나 정승조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지나감으로써 오늘의 소동을 묵인했다.
그리고 강무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오늘 이 순간, 정승조는 음식의 산이 위태롭게 쌓여 올라가고 있는 것을 불안스레 바라보는 친구를 향해 늘 그러했듯 속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님, 안 드십니까?”
차마 젓가락을 들지 못하는 강무헌에게 2학년 부장 놈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다가왔다. 험상궂은 얼굴에 거대한 덩치, 굵은 목소리를 자랑하는 그의 그렁거리는 눈물 따위는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효과만 나게 할 뿐이었으나 강무헌은 그렇지도 않은지 미안해하며 얼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어, 아니. 미안하다. 너희들은 같이 안 먹어?”
“어떻게 선배님과 한자리에서 꿀돼지들 같이…… 흠흠. 추접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선배님들을 위해 준비한 거니까 맛있~게 드셔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러고 보니 다른 3학년들도 있는데 왜 우리만 부른 건데?”
“아…….”
곰 같은 2학년 부장은 그 길로 입이 딱 막혔다.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정승조였다.
“연락했어. 못 온다는데.”
정승조는 ‘부부장 선배! 제가 선배를 잘못 보았었나 봅니다!’ 하는 눈빛을 보내는 2학년 부장을 싸늘한 눈빛 하나로 저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강무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엉? 진짜? 애들 다 할 일 없다고 메시지 오고 그랬는데…… 이상하다?”
“……오늘은 할 일이 많나 보지.”
“음, 뭐. 아, 그럼 어쩔 수 없겠다. 빨리 먹어 없애자.”
밥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강무헌을 향해 정승조는 말없이 싸늘한 눈빛을 감추었다.
밥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검도를 한다는 것이 칼질 실력에도 영향을 주는지 재료의 모양들도 전부 반듯했고, 간도 잘 맞아 먹는 데 불편함은 없을 정도였다.
강무헌은 끊임없이 먹고 있었다. 크게 허겁지겁 먹는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하게 한 수저씩 먹고 있는데도 꾸준하게 먹는 모습은 첫 한 술을 뜰 때나, 옆에 그릇이 열 장쯤 쌓인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괴기스러운 그 모습에도 문 뒤에 숨어 지켜보던 부원 녀석들은 ‘부장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계셔……!’, ‘저건 내가 만든 거야!’ 따위를 연발하며 감동에 몸을 꼬았다.
“얘……얘들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감동을 담아 몇 접시 더……!”
“그만.”
특히 눈물을 훔치며 당장이라도 부엌으로 달려갈 듯한 2학년 부장의 뒤에서 정승조가 싸늘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부, 부부장!”
도대체 언제 자신들의 뒤로 다가왔단 말인가!
강무헌만 지켜보느라 옆에 있던 정승조가 어느새 사라진 것도 몰랐던 그들은 뒤에 서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정승조의 큰 키가 이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 벌벌 떠는 그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가 눈짓으로 강무헌을 가리켜 보였다. 강무헌은 여전히 제법 쌓여 있는 그릇들을 한숨 한 번 쉬지 않고 천천히 비워나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금붕어야.”
“……예?”
하늘처럼 떠받드는 부장을 향해 금붕어라는 막말을 내뱉는 부부장에게 부원들은 전부 경악의 눈초리를 보냈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고. 일단 먹기로 결심했으니 저것까진 다 먹겠지만, 그 다음엔 아무리 저 녀석이라도 집에 가서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저 녀석도 인간이다. 위까지 멀쩡할 리 없잖아?”
“예에엣?”
“이 이상 먹일 생각이라면 배 터지는 것도 생으로 구경할 수 있겠지만.”
“우와아악!”
“누구냐! 저만큼 만들자고 한 놈이!”
“부, 부장! 드시지 마세요!”
나직한 말 속에 숨겨진 등골 오싹한 내용에 놀라 울면서 달려가는 부원들에게 무헌이 먹다 말고 놀란 눈을 떠 보였다. 그 사이를 틈타 문 옆에 기대어 서 있는 정승조를 발견했는지 매달려 있는 부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씩 웃어 보이는 것에 정승조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한계는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이쯤 먹었으니 이제 집에 갈 때는 꽤 볼 만한 장면이 나올 것이었다.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독하고 강한 놈이 볼썽사납게 비틀거리는 꼴은 이런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
정승조는 조용히 웃고, 곧 평소대로 침묵을 지키는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으…… 배야.”
배를 감싸 쥐며 비틀비틀 걷고 있는 강무헌을 부축한 정승조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약국 간판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 약국이 있는데. 약 사가지고 올 테니 여기 좀 앉아 있어.”
“나 정말 꼴사납다. 뒤처리 시켜서 미안.”
“아냐. 다녀올게.”
벤치에 강무헌을 앉혀놓고 걸음을 빨리해 약국 안에 들어선 정승조는 인사를 건네는 약사에게 소화제 하나를 주문했다. 약사가 알았다고 말한 뒤 칸막이 뒤로 사라졌을 때, 갑자기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용의주도해졌군 그래.”
정승조가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키가 정승조만큼이나 커져버린 홍영의가 서 있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1년 전의 봄 수련회 이후 얼마 안 있어 부를 그만두었었다. 키는 많이 컸지만 웃을 때마다 쭉 째지는 눈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누군데.”
“모르는 척이냐? 그러고 싶으면 그러든가.”
정승조의 불쾌한 표정에도 홍영의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는 담력을 보였다. 정승조가 쳐다보든 말든 홍영의는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다.
“저 밖에 있는 건 강무헌이지?”
“…….”
“넌 아직도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더라.”
그 말에 정승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홍영의가 미소를 지었다.
“인내가 꼭 달지만은 않아.”
“…꺼져.”
말은 짧았지만 홍영의는 정승조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후회할걸.”
“죽고 싶으면 더 말해 봐.”
정승조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막 주먹을 쥐었다 풀었을 때, 타이밍 좋게 약사가 소리쳤다.
“소화제 가져가세요.”
정승조는 빙글 뒤돌아서서 약을 받아 든 뒤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약국을 빠져나갔다. 홍영의는 그런 정승조의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약사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잠시 후 약국 문을 나선 홍영의는 멀리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는 강무헌과 그 앞에 서 있는 정승조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강무헌의 어깨를 붙잡고 부축하는 정승조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홍영의는 웃음기를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핏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만은 그 모습이 결코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홍영의는 정승조를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했다. 그는 대련에서 자신을 이긴 강무헌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뒤돌아서 있던 강무헌이 정승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는 녀석의 표정은 한껏 좋아 죽겠다는 듯 녹아내렸다.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후 눈길을 주다 보니 여러 가지 면이 눈에 들어왔다. 정승조는 강무헌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이기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했다. 다른 녀석들이 말이라도 걸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주제에 강무헌의 검도하는 모습을 볼 때의 그의 표정은 가질 수 없는 수집품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그것이었다.
홍영의는 정승조가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강무헌을 검도로 이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강무헌은 진짜 천재였고, 좋게 봐 줘야 수재인 정승조가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미래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홍영의는 그것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과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사랑과 질투. 그 두 개의 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정승조의 인내심이 언젠가 바닥나는 날. 그날이 아마 저 둘의 같잖은 우정의 종착지가 될 것이었다.
소년은 강무헌과 정승조가 걸어간 방향을 등지고 돌아섰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