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크란과 운오가 사라진 워프 마법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거리로 향했다. 크란의 수수께끼 발언과 기시감을 느꼈던 때의 감각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지금은 결론을 내기 힘들 것 같다는 답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힌트가 될 만한 것은 아까 느꼈던, 평소와 다른 무거운 느낌의 데자뷰인데…….
‘도대체 그걸 언제 느꼈었지?’
오랜만에 두통이 일 정도로 머리에 쥐가 나게 생각하며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눈치채지 못한 척 옆을 곁눈질해 보았지만, 시선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눈빛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향해 똑바로 쏘아져 들어오는 중이었다.
‘누구냐?’
태연한 척 먼 곳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보았지만 익숙했던 내 검은 시저와의 싸움으로 인해 부서졌다는 사실만 다시 깨달았을 뿐이었다. 상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 일단 블링크를 사용해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군.”
침착한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파악해 돌아보자 방금 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가게와 가게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이 보였다.
놀랄 만큼 날카로운 그 시선은 시저와 마주했을 때처럼 온몸이 들끓는 전투 감각이 일어나게 하진 않았지만 단순히 나를 관찰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 기분이 나빴다.
“누구십니까?”
일단 나를 향해 말한 것이 맞는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묻자, 그림자에 가려진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쪽에서 이야기하지.”
상대는 유저인가? 아니면 NPC?
“무슨 용건인지를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짧은 말만 나눈 상태에서는 상대가 유저인지 NPC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여차하면 공격할 심산으로 꼼짝하지 않은 채 그림자 속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자, 대답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심산임을 알았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성이 많군.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비스탈레에서 여기까지 따라오는 동안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 경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소?”
‘뭐라고?’
비스탈레라니. 거기서부터 뒤를 따라왔다면 운오와 크란이 함께 있었던 때인데, 그 누구도 저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었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나나 크란은 몰라도 운오는 직업이 헌터라서인지 놀라울 정도로 적의 기척을 잘 읽었다. 같이 다니면서 운오가 자신의 반경 500미터 이내로 몬스터가 들어왔을 때 감지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으니, 그 예민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운오와 우리가 저 남자를 놓치고 있었다고?
흘깃 바라본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타이밍이 우연히 생겼을 리 없었다. 즉, 이것은 내가 혼자 남았을 때를 골라서 다가온 치밀함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처음부터 습격을 노린 거라면, 여기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일단 언제라도 마법을 일으킬 수 있도록 머릿속을 비우면서 생각하고 있는 나를 향해 남자가 ‘아참.’ 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누구인지부터 말하는 것을 잊었군. 너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다 보니……. 나는 비스탈레에 존재하는 지하 조직의 일원이오. 당신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얼마 전 우리를 찾아왔던 강한 남자가 콜로세움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입고 사라진 것을 보고 상층부가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지. 상층부는 당신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소. 나를 따라오겠소?”
콜로세움에서 상처를 입고 사라졌다는 강한 남자?
의아했던 머릿속에 이내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시저!’
나는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남자는 키잘키르스텀의 지형을 매우 잘 아는 듯했다. 좁은 길을 몇 번이나 굽이굽이 돌아 방향 감각마저 잃어갈 때쯤, 남자가 갑자기 담벼락 어느 구석에서 불쑥 사라졌다.
쫓아가 보니 얼핏 담처럼 이어지는 벽의 일부가 뒤틀려 있었다. 마치 안으로 열리는 문이 바깥쪽으로 살짝 열린 듯한 모습이었다. 별게 다 있다고 생각하며 밀어보자 약간 묵직한 저항감과 함께 벽이 안으로 열렸다.
안은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파이어 볼 하나를 손바닥 사이즈로 꺼내 띄워 놓고 밑으로 내려가자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또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나는 그냥 방향을 외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언제 수틀려 여기서 탈출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어느 순간, 드디어 남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땅을 파서 만든 듯한 넓은 공간에 여기저기 문이 달려 있었다. 남자는 그중 정면에서 바로 오른쪽의 문을 열어 먼저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뒤따라 들어가자, 문이 바로 뒤에서 쾅 닫혔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순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달걀귀신처럼 밋밋한 바탕에 눈코입만 작게 뚫린 가면을 쓴 남자가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 몇 명의 남자들이 더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맨 얼굴이었다. 그중에는 나를 데려온 남자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와서 앉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 말에 잠시 망설이다 그가 가리킨 자리에 가서 앉자, 가면의 남자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기운이 무엇인지 남자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시저와 만났을 때 보고 느꼈던 어두운 기운과도 비슷했지만, 차이점이라면 시저의 것은 폭발적으로 검은 기운이 치솟는 반면, 이들은 주변이 그림자처럼 보일 정도의 기운을 서늘하게 계속 내뿜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하 조직이라더니 생각보다 실력이 상당하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도 나에 대한 대략의 관찰을 끝낸 듯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먼저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저희들은 비스탈레를 거점으로 오랜 세월 활동해 온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중 두 번째 부단주를 맡고 있지요. 저희들의 사정상 이름을 가르쳐 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흠.’
그의 말로 인해 나는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오랜 세월’ 활동해 왔다고 말한 점을 미루어 이들이 모두 NPC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두 번째는 좀 뻔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역시 그리 좋은 일을 하는 집단은 아니리라는 점이었다. 비스탈레는 맨 처음 유저보다 NPC의 수가 절대 다수였을 때부터 무법 도시의 이미지였고, 그런 곳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고 거점으로 삼고 있을 정도였다면 이들 또한 그 무법에 한몫했을 집단임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바라는 듯 가면의 남자가 지그시 응시하는 것을 보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행자인 카프로스입니다. 듣자 하니 ‘저에게’ 흥미를 보이셨다고요.”
돌려서 묻는 화법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성미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큼은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까 들은 말에 의하면 이들은 전에 시저를 만났고, 시저와 나, 크란, 운오가 싸우는 것을 보고 나를 찾았다고 했다. 비스탈레에서부터 우리를 쫓았다면 우리 셋이 다 있을 때 접촉하는 것이 더 쉬웠을 텐데, 이들은 어째서 나만을 찾았을까?
“어째서 당신 혼자만을 데려왔는지 궁금하단 말씀이시군요. 당시 싸웠던 것은 당신 일행까지 합쳐 셋이었는데 말입니다.”
가면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가면 안의 눈동자를 빛내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과 콜로세움에서 싸웠던 그 남자 때문이지요.”
“시저…… 말입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어째서 나만 불러오기를 원한 건지는 설명되지 않는데?’
가면의 남자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보니 저희의 짐작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저희가 보았을 때 그 남자와 가장 많은 관련이 있어 보인 사람이 일행 셋 중 당신이었습니다. 세 분 모두를 정중히 모셔도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저희 조직원들이 힘들 것 같아 이렇게 당신 한 분만을 모시게 된 것이죠. 저희가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해결소이긴 하지만, 내부의 일에 한해서라면 무엇보다 안전성을 추구하는 곳이니까요.”
어째서 내가 시저와 가장 많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저렇게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아 침묵한 나를 알아차렸는지 가면의 남자가 웃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내 가슴께를 가리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표정이군요. 당신의 가슴에 매달고 있는 그것은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보석 브로치가 아닙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같은 보석의 일부로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뭐……?’
순간 나는 경악스런 감정과 함께 옷자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내 왼쪽 가슴의 슈페리어 브로치, 아이아가스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이걸 본 거지? 또 시저의 퀘스트 보석, 로드 피스도 저들은 이미 본 적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두 개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는 말은…….
놀라는 사이에도 가면의 남자는 친절한 태도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우선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군요. 시작은 얼마 전, 그 남자가 저희 본거지로 찾아왔을 때였습니다.”
그들의 조직은 비스탈레의 지하에 가장 큰 본거지를 갖고 있으며, 대륙 곳곳에 작은 지부를 설립해 놓고 여러 가지 일을 의뢰받아 처리한다고 했는데 워낙 비밀스러운 탓에 조직의 본거지에 방문자가 직접 찾아온 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본거지에 혼자 찾아와 조직 전체와 이야기를 하기를 원했다. 조직은 규칙대로 먼저 그 남자가 대화를 할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했고, 남자는 누구보다도 잔인한 손속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조직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시험 합격자. 그의 이름이 바로 시저였다.
시저는 조직에게 어떤 제안을 했다. 바로 결정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조직은 일단 보류 결정을 내리고 돌려보냈으나, 처음으로 조직 전체와 대화할 자격을 얻은 남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그때부터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저는 얼마 후 충동적으로 저지른 듯 보였던 콜로세움에서의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고 모습을 감추었고, 조직은 그 강자를 상대한 이 중, 그들의 말에 의하면 ‘가장 큰 관련이 있어 보였던’ 나에게 접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설명을 끝낸 뒤 가면의 남자는 내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린다는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비스탈레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며칠간 귀신처럼 사라졌던 시저의 행방 중 일부를 이곳에서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스탈레에 왔었던 건가…….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저가 이들에게 했다는 제의인데, 정확한 건 몰라도 대충 동영상과 콜로세움에서 했던 것처럼 같은 편을 먹자는 식의 말을 했을 것 같군.’
맨 처음, 자그레브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던 영상만 보았을 때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약간씩 그 선동 이벤트의 끝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저는 현재 자신의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구는 것치고는 제법 성실하게.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중 나와 싸워 쉽게 깨질 만한 느낌을 풍기는 약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유저의 도움은 변심이 가능하지만, NPC들의 도움은 거의 절대적인 경우가 많았다. 시저는 그런 NPC들을 찾아다닌 게 아니었을까.
“후…….”
낮게 숨을 내쉰 뒤, 나는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나에게 듣고 싶었을 말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게서 듣고 싶은 것은 정확히 시저에 대한 뭡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가면의 남자가 대답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당신들은 시저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생각이겠군요. 당신들도 알고 있겠지만 저는 그와 적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서 제게 좋을 일이 무엇입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가면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옆에 앉아 있던 이가 대신 일어나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타당합니다만, 우리의 규칙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직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의명분에 맞지 않는다면 그 어떤 강압적 제의라도 받아들일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대의명분에만 맞는다면 그 어떤 제의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도로 자리에 앉은 남자 대신 가면의 남자가 다시 나섰다.
“상황의 빈틈을 찌르는 능력이 상당하시군요.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드리도록 하죠. 당신이 저희에게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신다면 저희도 그 남자에게 받은 정확한 제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단주!”
“쉿.”
또 다른 남자가 당혹하여 소리쳤지만 가면의 남자는 가볍게 한 손을 드는 것만으로도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다른 이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아 저 제의가 내 생각과 달리 좀 더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나를 보고 가면의 남자는 한 가지 제안을 더해 왔다.
“확실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당신에게 적대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리라 약속하지요.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남자나, 그 남자의 반대편에 선 당신이나 비슷한 가치로 느껴집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나서 오히려 그 남자 쪽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 이상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의 제안은 나에게 있어서 손해 볼 것 없는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NPC 실력자들이 시저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은 내 입장에서 필히 막아야 할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시저에게 졌다고는 해도 그의 말을 꼭 들어줄 생각은 아닌 듯하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가면 속에 숨겨진 남자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여 제안에 수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충분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시저의 얼마 되지 않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현재 시저와 내가 하고 있는 퀘스트의 접점, 그가 자그레브에 거점을 둔 거대 길드의 마스터라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싸우면서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시저의 실력 정도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가면의 남자는 크게 만족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단주님께서도 크게 만족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우리에게 했던 정확한 제의에 대해 말씀해 드리지요.”
드디어!
나는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세계의 봉인이 풀린다. 갇혀 있던 신이 부활하게 되면 대륙 전체를 가르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너희들의 힘을 보일 생각이 있다면 나를 도와라.’”
서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고 이제 떠나겠다고 말한 나에게 가면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저희 모두의 이름은 ‘Born’으로 통합니다. 저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든 일을 하고 있지요. 만약 카프로스 님께서도 어느 날 갑자기 저희의 도움이 필요해지신다면 언제든지 비스탈레의 콜로세움 접수 도우미에게 이 이름을 대고 연락해 주십시오. 언제가 되든 꼭 한 번은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콜로세움 접수 도우미?!’
지금까지 그리 놀라지 않았던 나도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와 크란, 운오가 접수하는 것을 도와주며 웃던 그 평범해 보이던 여자가 실은 이런 만만치 않은 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니 말이다.
‘역시 비스탈레라고 해야 하나?’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와 마찬가지로 이제 자리를 파장하려는 듯 일어선 가면의 남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카프로스 님을 조금 놀라게 해 드렸던 것 같은 그 브로치 말입니다.”
또다시 나온 아이아가스에 대한 언급에 나도 모르게 왼쪽 가슴께로 보호하듯이 손을 가져갔다.
“예.”
“시저 님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보석이었을 뿐이라 느낌이 잘 오지 않았었는데,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레쥴의 꽃과 닮았군요. 색도 그렇지만, 특히 그 기운과 느낌이 닮았습니다.”
‘레쥴의…… 꽃?’
띠링!
그 순간, 오랜만에 듣는 안내창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크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