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20/57)

#(2)

“헉……!”

몸 전체가 까마득히 낙하하는 감각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여긴 어디지?’

“파이어 볼!”

일단 어둠이 거슬려 주문을 외쳤는데, 이상하게도 당연히 들려와야 할 화르륵 하고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세 번 외쳐 봐도 마력이 빠져나가는 약간의 느낌조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온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킨 순간, 갑자기 눈앞에 확 하고 흰빛이 일어나며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

반사적으로 공격 태세를 취했던 나는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그는 슈페리어였다. 정확히는, 이루미네를 만났던 때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10년 후의 슈페리어. 성별이 구분 가지 않던 미모는 간곳없이 갑자기 훌쩍 장성한 청년처럼 보였던, 얼굴에 흉터를 입은 짧은 머리칼의 로드 슈페리어였다.

늘 그를 먼 곳에서 보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와 내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나와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슈페리어가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대는 별로 붙임성이 없군. 뭐, 고독한 수련을 추구하는 마법사가 붙임성이 좋아서 어디에 쓰겠냐마는.”

“……나에게 한 말입니까?”

믿을 수가 없어 묻자 슈페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누구에게 한 말이겠어? 난 혼잣말하는 취미는 없는데.”

“이것 참…….”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자 슈페리어가 짐짓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놀랐겠지. 이해한다네. 이런 불세출의 천재와 만나게 되다니, 놀라지 않고서야 그게 인간일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 말에 내가 인상을 푹 찡그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도 슈페리어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대는 그대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고 있나?”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모릅니다.”

“이곳은 언젠가 그대가 나타났을 때를 위해 예비해 둔 곳이지. 나 또한 마찬가지야. 정확히 말해서 나는, 로드 슈페리어라 불렸던 남자가 훗날 찾아올 자신의 후인을 위해 남겨 둔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러면 이것도 퀘스트의 계속이란 말입니까?”

“……즉 시험자이자 도우미이지. 하지만 안심해도 좋아. 시험자의 역할을 하는 건 이번뿐이거든.”

나도 모르게 놀라 퀘스트란 말을 그대로 하고 나서 아차 했는데 슈페리어는 못 들은 것처럼 계속해서 말했다. 아마 게임 바깥 시스템적인 내용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사명에 따라 그대를 시험할 거야. 시험 내용은 두 가지이고 굳이 나누자면 필기와 실기에 해당할까? 하하하하. 뭐부터 하고 싶어?”

“……예?”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묻자 슈페리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후…… 오랜 세월 기다린 후인인데, 솔직히 말해서 내 후인이라기엔 너무 외모적으로 딸리는 것 같아. 시커먼 거나 뒤집어쓴 모양새하며…… 눈도 머리도 시커먼데 굳이 옷도 그렇게 시커멓게 입는 건 또 뭐야? 마물 쫓는 놈들도 아니고.”

‘……뭐라고?’

이미지를 깨는 발언에 있던 어이도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고 입을 다물자 몇 번 더 투덜거리던 슈페리어가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그대를 시험할 거라고 말했다. 시험은 두 가지고. 머리 쓰는 것과 몸 쓰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아?”

투덜거려도 솔직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어투는 불쾌감보다는 호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대충 머리를 굴려 이것이 그동안 퀘스트를 치르며 꼭 겪어야 했던 온갖 고생들과 모양새만 달라졌을 뿐, 그리 다른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머리칼과 후드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몸 쓰는 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는 현실에서 여태껏 살아오면서 머리를 쓰기보다는 몸을 쓰는 일이 더 많았던 체육계였던 것이다. 대답을 들은 슈페리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내 후인은 나보다 씩씩한 모양인데. 뭐 좋다. 그럼 검을 뽑아.”

“……검?”

검이 어디 있다고 저런 헛소리를 하는가 싶으면서도 반사적으로 늘 검을 차고 있었던 왼쪽 허리께로 오른손을 가져갔던 나는 뭔가 없어야 할 것이 잡히는 감각에 흠칫 시선을 내렸다.

손에 잡힌 것은 검처럼 긴 빛 덩어리였다. 느껴지는 무게는 생긴 것처럼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이 적당한 무게와 손에 잡히는 감각은 마치…….

“괜찮지? 그대의 육체가 기억하는 밸런스에 맞춘 검이니까 당연히 괜찮을 거야. 그러면 나도 내 검을 들도록 하지.”

전에 샀던 검보다도 더, 예전에 썼던 검만큼이나 손에 딱 맞고 익숙한 무게였다.

슈페리어가 허공에 손을 뻗은 순간 주먹을 쥐듯 밑으로 웅크린 손안에서 터져 나온 작은 빛 하나가 갑자기 주욱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손에 착 달라붙었다.

그것을 쥐고 한 바퀴 멋지게 돌려 양손으로 가볍게 쥔 슈페리어가 턱을 끄덕이며 나를 도발해 보였다.

“다른 능력은 쓰지 않고 오직 육체와 검만을 사용한다. 처음이니 세 번 양보해 주지. 자, 와 봐!”

슈페리어가 미쳤나 싶었지만, 생각과 별개로 몸은 민첩하게 검을 움켜쥐고 허점을 찾아 달려들고 있었다. 비어 있는 옆구리를 향해 빠르고 강렬하게 검을 찌르자, 미끄러지듯 끼어들어와 막아낸 슈페리어의 검이 부딪치면서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펑!

“……윽.”

“호, 몸이 정말 좋군. 검사를 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육체인데 마법사를 선택한 이유는 뭐야?”

아이를 놀리는 듯한 말에 투심이 불처럼 치솟았다. 이상할 정도로 집중력이 높아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와 나 외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 상태이니 그럴 만도 한가 싶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조절이 안 될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거리를 벌리며 물러선 슈페리어를 쫓듯 빙글빙글 돌며 대치하던 나는 틈이 보이자마자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재차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퍼펑, 펑!

어쩌면 이게 처음이었던가?

3년 전 그날 이후 검과, 나와, 상대만 남은 채로 이렇게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하게 달아오른 몸이 이 순간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달았다.

스킬과 스탯의 영향을 받는 미스트의 검사들과 싸울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것은 그저 순수하게 아무런 차이 없는 육체와 검의 승부였다. 게다가 검의 기본이 되는 다리는 더없이 멀쩡했고, 머리 또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아프지도 않았다.

그것이 못 견디게 기분이 좋아서, 그 이전의 일이나 그 다음의 일은 의식 속에서 기꺼이 전부 날려버린 채로 나는 이 기회에 온몸으로 응했다.

손안에서 검이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은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는지 모를 시간 후였다.

“그만. 이제 충분해.”

주먹을 저도 모르게 꽉 쥐며 안타까움을 표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이 슈페리어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미소 띤 표정으로 다가왔다.

“예상보다 더 훌륭해. 이 정도 실력이라면 나보다 더 높은 경지를 노려볼 수도 있겠는데. 혹시 그대는 전에 검을 배웠던 경험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 둡시다.”

현실에서 배운 거니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 같아 그렇게 대답하자 슈페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별 기대 없이 시험했는데, 매우 마음에 들었어. 역시 이 정도 능력도 없는 자가 내 후인이 될 수 있을 리 없지.”

혼자 떠들며 몇 번 자화자찬을 한 슈페리어가 숨을 고르고 있는 내 쪽을 바라보며 흐뭇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 이제 문답 시험으로 들어가 볼까?”

“…….”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나도 시험 같은 건 다 아는 거 뭐 하러 하는지 몰라 귀찮아서 안 하는 성격이지만, 최소한의 사람 거름망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 딱 하나만 물어볼 테니 걱정 말아.”

자화자찬도 급이 있다면 저놈은 분명히 1위를 다툴 것이다.

“그대가 생각하는 위대한 마법사의 제1조건은 무엇인 것 같아?”

위대한 마법사의 첫 번째 조건?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가 그게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임을 깨닫고 꾹 다물었다. 슈페리어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질문이 간단하다고는 말했지만 답도 간단한 건 아닐 텐데. ‘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생각하는 표정이잖아. 원래부터 알고 있던 질문이기라도 했던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설마 이렇게 간단한 질문을 할까 싶어서.”

“…….”

드디어 한 방 먹은 듯 입을 다문 슈페리어의 표정을 보며, 나는 이게 위대한 마법사의 첫 번째 조건이 아닐 거라고는 한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말을 꺼냈다.

“그거야 당연히…….”

…….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어느새 내가 기억을 보기 전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돌무더기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돌아온 건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쩐지 고향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서 있자, 귓가에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 퍼져 나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그래? ]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 맞다. 말하는 걸 잊었는데 말이야, 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때 존댓말을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특히 그대처럼 억지로 예의 차리려 하는 것 같은 경우엔 더 그렇지. ]

“…….”

[ 말 놔. ]

“그래도 됩니까? 그럼 그러도록 하고.”

본인이 하라는데 뭐 하러 거절을 하겠나.

지금 내게만 들려오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드 슈페리어였다. 정확히는 로드 슈페리어의 분신으로, 본체의 1/1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기억과 지식만큼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이 사람이 로드 슈페리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도 뭐했다.

그러나 슈페리어는 아까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전 내가 했던 짧은 질문에 대해 답을 말해 준답시고 시간을 3박 4일쯤 걸리지 않았나 싶었을 정도로 질질 끌어 댔다. 그에 대해 복수할 뜻이 솔직히 아주 없지는 않았던 탓에 바로 승낙하자 약간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져 왔다.

[ ……한 번 거절도 안 하고 바로 넙죽 승낙하는 게 보통이 아니군? ]

“뭐.”

[ 표정도 돌 같은 놈이 이런 철면피까지 있다면 그대는 무적이다. 그 정도라면 마신도 문제없어. ]

“고맙다.”

[ ……. ]

슈페리어는 잠시 기가 막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곧 약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휴…… 어쨌든 날 소중히 좀 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 몸에는 전에 없었던 것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허리춤에서 허리띠에 가볍게 묶여 있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듯한 나무 막대 하나.

양손으로 쥐기 딱 좋은 정도의 길이인 그 막대가 바로 내가 네 번째 슈페리어의 기억 퀘스트를 끝내고 받은 단 하나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내게 말을 거는 슈페리어 또한 이 막대기 안에 있었다.

막대기 전체에 대충 갈긴 듯이 쓰여 있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글씨는 로드 슈페리어의 말에 의하면 영구 마법이 지속되도록 새겨 놓은 일종의 주문이라고 했다. 꽤 많은 용도가 있다고 본인은 소리 높여 주장했지만 현재 내가 아는 용도는 딱 하나뿐이고…….

[ 잠시만 이 앞에서 있다가 가자고. ]

슈페리어의 말에 나는 막 뒤돌아서려 했던 것을 그만두고 돌무더기 앞에 다시 섰다. 슈페리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까 슈페리어의 시험을 치르고 나서 들었던 말에 의해 겨우 ‘레쥴의 꽃’에 대한 진상을 알 수 있었다.

레쥴의 꽃이란 원래는 슈페리어가 남겨 놓은 일렉트릭 나이트를 위한 그의 동생들의 묘비와도 같은 개념의 표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그가 찾아와 손보는 과정에서 훗날 찾아올 후인을 위해 분신도 남기고 보호 마법도 쳐 놓았던 것이, 워낙 장소가 좋지 않은 곳에 있었던 터라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마법의 근간을 이루는 마나가 일부 일그러졌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는 겁니까?」

「마법은 마나의 힘을 빌려 구체화시킨 이미지의 힘이잖아. 그런데 그 옆에 그것을 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모이고 또 모인다면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도 결국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설마 이 성의 돌을 노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걸었던 마법이었지만 결국 이렇게 된 것을 보면…….」

그 때문에 원래는 다가오면 튕겨 나가야 했을 사람들이 나만 빨려들어야 했을 슈페리어의 흔적에 빨려들어 애꿎은 사고를 당했던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진짜 후인인 그대가 왔으니 이제는 그런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

그 말을 할 때의 슈페리어는 꽤 홀가분하고 기뻐 보였다. 잠시 묵념하듯 돌무더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돌아서서 아직까지 실드가 쳐져 있던 곳을 빠져나오자 나 또한 그때의 슈페리어보다 한층 더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뭔가 바뀌었으려나? 어디로 가야 하지?’

“헉! 자네!”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렉스와 나머지 사내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자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여기저기 훑어보며 바삐 질문을 해 댔다.

“뭘 어떻게 한 거요, 도대체?”

“당신이 사라지고 하루가 지나가면서 죽었을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빛이 숲 전체에서 빛나더니 하늘에 해가 생기고 달이 떴소! 거기다 이젠 어디로 걸어도 길이 바뀌지도 않고 말입니다!”

“정말 모든 게 당신 말대로 되었어요! 원래대로 돌아왔다고요!”

그들의 감격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싱긋 웃었다. 역시 슈페리어 퀘스트를 처리하고 나니 그간의 이상한 일들이 제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대로 이 숲만 빠져나가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가족들도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되겠지.

“정말로, 정말로 고맙소.”

렉스는 내 손을 꽉 맞잡고는 놓아줄 줄을 몰랐다. 한참 동안이나 10년어치의 감동에 휩싸여 있던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 간신히 손을 떼고는 불타는 듯한 눈으로 웃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요.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소. 당신은 정말이지…… 영웅이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영웅이라니, 퀘스트를 수행했을 뿐인데 이게 무슨 닭살 돋는 호칭인가. 그러나 렉스의 말로 인해 한번 영웅이라는 호칭에 재미가 들린 듯한 사내들은 함께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나를 계속해서 영웅이라고 부르며 말투마저 공손해졌다.

마침내 마을에 줄줄이 서 있는 집들이 눈앞에 가까워지자 사내들은 다들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이쯤에서 먼저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떠나야 할 것 같군요.”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적어도 음식은 한 끼 얻어먹고 가십시오!”

화들짝 놀란 남자들이 만류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또 갈 곳이 있습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고, 저는 이대로 가보겠습니다. 다시 만난 가족분들과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말은 렉스를 보며 했다. 렉스는 수염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놓아주고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얼굴로 각자가 기억하던 집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레쥴을 나가는 쪽 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띠링!

- 비공식 퀘스트, ‘노파의 소원’을 완수하였습니다!

- 비공식 퀘스트, ‘소녀의 소원’을 완수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안내창에 놀라 멈춰 서자 이어서 경험치가 몇이 오르고 스킬 수련도가 몇이 또 오른다느니 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눈앞에 떠올랐다.

‘비공식 퀘스트라니…….’

들어본 적은 있었다. 제대로 퀘스트라고 안내창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행하게 되는 즉흥적 퀘스트가 있을 때 그것을 비공식 퀘스트라 부른다고 했다. 보통 자신이 퀘스트인 줄도 모르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완수하는 사람보다는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고, 때문에 비공식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것 자체가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런 것을 한 번에 두 개나 해내다니…… 나는 얼떨떨했지만 그간 고생한 데 대한 보상을 받은 기분으로 레쥴을 빠져나가며 다음에 할 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이번 퀘스트를 끝냈으니 지도에 다음 목적지도 나타났겠지? 확인해 보아야겠군.’

“지도창 오픈.”

팟!

내 명령에 따라 곧바로 대륙 전도가 반투명하게 펼쳐진 뒤 레쥴에서 사라진 붉은 점을 찾기 위해 한참을 지도를 노려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곳은…….

‘중앙과 동쪽 사이……이긴 한데 동쪽에 더 가까운 곳이라…….’

레쥴로 바뀌기 전 목적지였던 북쪽이 아니라니.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머릿속으로 대충 경로를 짰다. 키잘키르스텀에서 워프를 타고 토렐리트로 갔다가 그곳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 될 듯했다.

‘좋아…….’

매우 큰일을 치른 듯 피곤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정도야 로그아웃을 해서 쉬고 나면 씻은 듯 해결될 문제였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다음 퀘스트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6619572195883.jpg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죽어 있던 전신의 감각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떠오르듯이 천천히 각성했다. 그와 동시에 어디라고 딱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골고루 느껴지는 격통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주변의 소리가 갑자기 몇 배로 더 높아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처음에는 몽롱하게 일그러진 시야 앞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자 천천히 시력이 회복되었다.

“아…….”

맨 먼저 보인 것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택시 기사였다. 내가 눈을 뜬 것을 보자 그는 겨우 한숨 놓았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듭니까? 정말 다, 다행이구만!”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 택시 기사의 옆에 서 있는 자를 본 순간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유…….”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완…… 아니, 진제환이 그곳에 서 있었다. 무심코 이름을 부르려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 망치로 두들겨 대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어지럼증이 일어 이마에 손을 대니 무언가가 칭칭 감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붕대인가?

“그럼 다시 한 번 의사를 불러올 테니 잘 부탁하네.”

택시 기사가 제환에게 말한 뒤 뒤돌아 나가면서 커튼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하얗고 넓은 곳에 여기저기 둘러쳐진 칸막이들, 강렬한 조명, 아기 우는 소리들과 아픈 신음 소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하얀 가운이 어지럽게 느껴지는 응급실이었다.

‘병원이었군…….’

좀 더 바깥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는데 진제환이 열려 있던 커튼을 무표정한 얼굴로 쭉 잡아당겼다. 내가 바라보던 세상은 몇 초 만에 또다시 차단되고 말았다. 녀석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큰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쳐다보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네가 여긴 왜…….”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말을 하자 제환이 알아들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번에…… 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한 번 더 보려고 갔었는데.”

‘아…… 체해서 토했을 때 말인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택시가 도착했다. 그리고 네가 있었지.”

평소처럼 말 한 마디마다 무게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 기세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내 표정을 내려다보던 진제환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침대 옆으로 앉아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려 했다.

순간 정신을 잃기 전, 정승조의 집에서 있었던 이와 비슷한 상황의 기억이 떠올라 흠칫 몸을 굳히고 바라보자 진제환이 긴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눈에 살기가 있어.”

담담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제야 내가 반사적으로 주먹까지 쥐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라 손을 풀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게 된 것은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진제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을 때였다.

‘어…….’

지금까지 그저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한 줄만 알았던 두 눈이 심해의 끝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쳐다보는 순간 어떤 것이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바닷속 깊은 곳에 삼켜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제환이 그 고요하게 빛나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원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배우처럼 생긴 놈이 그런 표정을 짓자 단지 그것만으로도 박력이 다르게 느껴졌다.

“누군지 말해 봐.”

잠깐 떨어졌던 손이 다시 다가와 목과 어깨 사이를 살짝 쓰다듬었다. 순간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느껴져 이를 꽉 깨물고 뭐 하는 짓이냐는 뜻으로 노려보자 놈이 이번에는 눈까지 스윽 휘어 보였다.

“네 목에 이렇게 상처를 내고.”

그다음 옷을 스치며 내려간 손이 늘어져 있던 내 오른손 위에서 멈췄다. 시선을 따라 내 손으로 같이 눈길을 옮긴 나는 기이하게 퉁퉁 부어 있는 손가락과 손등에 놀랐다.

“손을 부서지게 만든 게.”

그러고 나서 한 번 더 섬뜩할 정도로 가라앉은 눈을 한 진제환이 말투만큼은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마지막 물음을 끝맺었다.

“도대체 누군지…….”

그 얼굴은 평소의 내가 알던 놈 같지가 않았다. 말을 잊고 쳐다보고만 있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답답했는지 진제환의 눈동자가 물속에서 거품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야. 대답해 줘.”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다 내 일이고…… 일단 이미 끝났어.”

짤막짤막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여기저기가 쑤셨다. 머리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욱신거려 특별히 더 아픈 곳을 찾아보려 시도해 보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아는 사람 소행인가?”

나는 입만 꽉 다물었다. 무언으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자 진제환이 순간 폭풍 전의 고요 같았던 표정을 깨버리며 침대 난간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내가 너를 거기서 보았을 때 얼마나……!”

“환자분이 깨어나셨다고요?”

촤악!

로봇 도우미와 함께 바쁘게 칸막이를 젖히며 들어온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의사가 무릎을 꿇은 채 내 곁에 고개 숙이고 있던 진제환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뒤따라 들어온 택시 기사는 안의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젊은이.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군. 택시비는 이 청년에게 이미 받았고 하니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일을 하다 온 거라…….”

아까 내가 택시에 탈 때만 해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던 택시 기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저 택시 기사에겐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제환이 택시비를 내 주었다고는 해도 개인적으로 추후 감사 표시를 따로 하겠다고 말했으나, 택시 기사는 당연히 할 일이었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는 혹 경찰에 갈 생각이라면 증언을 도와줄 테니 부르라는 말과 함께 명함을 쥐여 준 뒤 사라졌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는 택시 기사가 나간 뒤 가까이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머리가 많이 아프십니까?”

정승조의 집에서 바닥에 쓰러졌을 때 머리에 뭔가가 거세게 부딪쳤었다. 그때부터 소리가 윙윙거리며 잘 들리지 않았던 데다 피까지 보았던 것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지와 약지는 못 움직이시겠죠?”

그 말에 오른손을 움직이려고 꿈틀거려 보았으나 통증만 오고 움직이지 않는 것에 또다시 예, 하고 수긍했다. 그러고 나자 이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후려치고 빠져나온 곳이 연상 작용으로 다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승조는…….’

정승조는 내가 떠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느끼는 이 마음은 걱정일까. 아니면 분노일까.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발바닥에도 상처가 많지만 그건 비교적 가벼운 찰과상입니다. 어깨와 등도 그리 심하지는 않고요. 다만 며칠 고생하시겠군요. 그런데…… 목은…….”

목 쪽을 살펴보며 난감한 표정을 한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어뜯기셨습니까?”

“…….”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들어온 이후부터 옆에서 말없이 난간만 움켜쥐고 있던 진제환의 손등에 시퍼렇게 힘줄이 도드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부분도 심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오른쪽 다리입니다.”

그 말에 나는 번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 진제환이 있었다. 나 혼자 있을 때라면 모를까, 내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똑바로 의사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부탁드립니다.”

쉬어 터진 목소리로나마 배에 힘을 주어 명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의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본인이 원하신다면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단 정신이 드셨으니 몇 가지 검사를 더 해 보아야 합니다. 가족 분들에게도 연락해 주시고요, 그러면 이따가 뵙죠.”

의사가 나가고 나서 나는 진제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고요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이 폭발할 듯한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 다음은 가족들에게 연락할 테니까…….”

그러니 이만 가 달라 말하려던 순간 서늘한 시선이 와 닿았다. 그 분노하고, 씁쓸하고, 안타까워 보이는 표정에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뭘…….’

그 눈과 마주하고 있자 온몸의 통증이나 아까 전까지의 기억 등이 모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시끄러웠던 응급실의 소음 또한 하얗게 날아가며 고요해지는 공간 속에서 진제환이 나를 끌어안았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걱정할 기회를 주지 않아. 전부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아프지 않게 끌어안긴 가슴에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대상 없는 분노를 간직한 진제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라고 해서 너와 달랐던 것은 아니었는데…….”

“…….”

“……이상하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건 나쁘게 느껴진다는 것뿐이야.”

“…….”

“너만이 그래.”

그 갈라질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순간 마음속에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 떨어져 무한의 동심원으로 퍼져 나갔다.

“너만이…….”

「언제나 너를 보면 증오스럽고 괴로웠어……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 그래, 강무헌?」

증오와 독기를 나누고 화상을 입어 돌아왔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아갔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진제환이 돌아가고 나서 얼마 뒤, 부모님과 사부님 내외가 찾아와 한바탕 눈물을 쏟으셨다. 항상 바쁘신 부모님들까지 찾아올 줄은 몰라 무척 놀랐지만 찾아오시기 전 미리 탈골된 손가락뼈를 제대로 맞추고 상처 치료를 끝내놓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대강 몇 가지 검사를 더 거친 후 개인 병실로 옮기자 그제야 한숨 놓고 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치료만 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뇌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 입원하라는 말에 병원에 머물러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오는 부모님께는 대충 얼버무렸고, 대략적인 사정을 눈치채신 듯한 사부님과 사모님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네 분들이 모두 옆에 있고 싶어 하시는 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 병원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자 내가 정기 검진을 하는 곳이기도 했고, 또 옛날에 내가 1년 넘게 장기 입원을 했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누워 있으려니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3일 정도면 끝날 테니 다행이군.’

만약 그 이상 입원하라고 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에 그렇게나 오래 입원하게 된다면 현재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는 미스트에 제대로 접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테니까. 크란과 운오를 보내고 혼자서 네 번째 슈페리어 퀘스트까지 마무리한 상황이라 그래도 다행이었다.

“후…….”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창밖이 어두웠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자연스레 정승조의 모습이 생각났다. 게임이고 현실이고 할 것 없이 똑같이 불안정해 보였던 그 모습…….

각오는 했었지만 광기까지 서려 있던 그 눈을 다시 마주 본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그 증오보다도, 분노보다도 더했던 알 수 없는 감정에 동조해 펄떡거리던 심장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다시 한 번 피가 식고 머리가 울려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잠이나 청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몇 시간 전 진제환의 말이 또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진제환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뭘 모른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여태까지는 내가 모든 일을 무난히 잘해 가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오늘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이 일들을 진지하게 다시 고찰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지만 고민하는 사이 하루 동안 쌓인 피로로 인한 수마가 닥쳐왔다. 약 기운이 돌면서 머릿속이 둔해지기 시작해 결국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머리가 차가워진 뒤에 제대로 생각해 보는 편이 낫겠지.

윤석호는 평소처럼 눈웃음 띤 유들유들한 태도가 아닌, 진중한 표정으로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몇 사람의 얼굴이 떠 있었는데 워낙 홀로그램이 절묘하게 입체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던지라 마치 진짜 앞쪽에 회의석 탁자가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석호의 시선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앉아 있는 머리가 센 중년 남자가 콧수염을 비틀며 눈살을 찡그렸다.

“그 프로젝트는 이미 90퍼센트 이상 성공했다고 들었소. 그런데 왜 아직도 적용을 못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저도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도 동의를 표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로만 장애인용 특수 캡슐이라고 떠들어 댔을 뿐, 정말로 공개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쯤 되니 실은 모든 것이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목소리가 요즘 높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투자자들의 불안이 주식선에도 곧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같은 회사 내에서도 비밀로 일을 처리해야 할 만큼 말입니다!”

불만에 찬 목소리들이 덩달아 공감을 표시했다. 자리에 모인 남자들은 대부분이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점잖은 척 불만의 목소리를 주고받던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는 한 사람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장명진 실장.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당신이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장명진이라 불린 남자는 무표정하던 얼굴을 들어 제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다른 이들도 연이어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진 말들을 쏟아냈다.

“우리가 지금껏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당신들이 만들겠다 설친 게임 따윌 그냥 지켜보았던 것은 회장님의 옹호 때문이 아니오. 새턴이 어디까지나 VT 선진기술에 기반한 회사라는 걸 잊지 않고, 그에 도움이 될 기술을 제공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넘겨주었더니 서비스가 시작된 지 반년이 넘어가도록 정작 진짜 중요한 건 하나도 발표하지 않다니! 실은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닙니까?”

“애초에 게임 따위에 그런 기술을 접목시키고는 꽁꽁 싸맨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정말 그 프로젝트가 90퍼센트 이상 성공했다는 소문은 맞는 거요?”

“우리 이사진은 이 일에 대한 우려가 아주 크오.”

“장명진 실장.”

“장명진…….”

윤석호는 이 모든 장면들을 바라보며 비죽이 입꼬리를 올렸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꼼과 불만들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장명진은 제풀에 지친 이들이 조금 조용해지고 나서야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연구는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개인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회장님의 산하 연구개발팀으로서 새턴에 왔고,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를 회장님이 아닌 다른 분들께 먼저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분명히 보안 처리된 정보는 다 어디서 들으셨는지도 의문입니다.”

싸늘한 발언에 잠시 얼어붙었던 회의의 분위기가 곧바로 폭발했다.

“뭐라고 하셨소?”

“내가 누군데 전혀 관련 없는 작자 취급을 하다니!”

“한낱 실장에 불과한 자가 오만 방자하기 짝이 없어!”

“제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회의라기에 대체 무슨 일인가 했었는데, 역시 오지 말 것을 그랬군요. 여기에 오느라 버린 시간에 일을 했다면 훨씬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을 텐데요.”

그 놀라울 정도로 거침없는 말에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부르르 떠는 사이, 장명진 실장은 잠시 시계를 보고는 이런,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바빠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이 회의 결과는 추후 메일로 보내 주십시오. 물론 거기서 개인적 사견을 빼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럼 이만.”

냉랭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연결되어 있던 장명진의 얼굴이 픽 하고 사라지자, 남은 자들은 모두 분노에 치를 떨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런 방만한 자가……!”

“아주 대놓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는군. 그까짓 게임이 조금 잘나간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거기까지 보고 나서 윤석호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움직였다.

“‘훔쳐보기’는 이제 그만.”

말이 끝나자마자 홀로그램 화면들이 일시에 팟 하고 꺼졌다.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아하하하핫…….”

방금 전까지 진중했던 표정은 거짓말인 양 한참 동안이나 웃음을 터뜨리던 윤석호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간신히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고 옆에 연결되어 있던 고글을 썼다. 몇 개의 번호를 빠르게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추자 VT포트로 들어가는 연결음과 함께 곧 눈앞의 풍경이 일시에 바뀌었다. 가장 비밀스럽고 조용한 장소인 이곳. VT포트 내에서는 장명진 실장이 벌써 접속해 윤석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윤석호보다 조금 더 세월의 깊이가 쌓인 눈매를 지닌 이였다. 겨울처럼 서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웃음을 전혀 지어본 적 없는 듯 차가웠고, 동시에 아주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장 차림에서는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듯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석호는 드물게 친근한 눈빛으로, 장난스레 과장된 존댓말을 썼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윤석호의 미소 띤 인사에 장명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본 모양이구나.”

“‘지켜보기’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아주 멋지시더군요. 반할 뻔했습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이에게 하기에는 매우 적절치 않아 보이는 말이었지만 장명진은 윤석호의 말에 아무런 질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고 날카로운 눈을 치켜뜨고 입꼬리를 얇게 끌어올렸을 뿐이었다.

“ReL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점점 애가 타는 모습이 제법 볼만하지.”

윤석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장명진은 침묵을 지키다, 문득 조금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쪽’은… 요즘 어때.”

“변함없이 똑같습니다. 키스로도 안 깨는 걸 보면 공주는 아닌 게 확실하죠.”

“의사는?”

“여전히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더군요.”

“그래.”

순간 장명진과 윤석호, 두 사람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지워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질문은 내용을 바꾸어 계속해서 이어졌다.

“데이브가 얼마 후 한국에 갈 것 같더군. 허가는 이미 끝났고, 유프도 아마 함께 갈 거야. 이번에 만나면 ‘그쪽’에 대해선 어디까지 말할 예정이지?”

“허가되었다니 다행입니다. Mr. 리는……. 글쎄요. 이번에는 역시… 말을 해야겠지요. 슬슬 그에게도 도움을 받을 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러면 ReL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모두 다 순조롭습니다.”

“L-10의 경우는 어떻지? 저번에 문제를 한 번 일으켰었다면서.”

“그도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HZ 퀘스트 또한 놀라울 정도로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나친 순조로움은 방심을 부르는 법이지. 우리에게 실패할 기회 따윈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늘 잊지 말도록, 지부장.”

“예.”

“보안에 대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라. 어디까지나 그들은 일반 유저 아닌가. 아무리 대외용 특수 캡슐 프로젝트 쪽을 뒤져 봐도 절대 찾을 수 없게 감추어 둬.”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실장님이야말로 바람막이를 똑바로 해 주셔야 할 겁니다.”

장명진과 윤석호는 입가에 차가운 공범자의 미소를 띠었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선 장명진 실장이 접속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윤석호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메일로 이야기하던 메이지 소프트인가 하는 곳은 어떻게 되었지?”

“일단 정황을 살피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조금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다른 곳들처럼 게임 내에 해커 몇을 심어 두는 정도였다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전 업계 1위라는 자들이 그토록 저급하게 나오는 건 꽤 놀랍더군요.”

“그들이 심어 둔 공범은 찾았나?”

그 순간, 윤석호의 얼굴에 매우 날카로운 웃음이 피어났다 사라졌다.

“……네, 당연히 찾았습니다.”

“빨라서 좋군.”

장명진 또한 가늘게 뜬 차가운 눈동자를 희미하게 휘며 웃었다.

“그것도 물론 모른 척하고 더 살필 셈이겠지?”

“잘 아시는군요. 바로 때려잡는 것보다는 그것을 기회로 만드는 쪽이 제 취향에 맞습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지는 마. 우리에게 협력해 준 이들을 상대로 감히 헛짓을 한 놈들에게 내줄 여유 따윈 없으니까.”

윤석호가 하핫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야 당연하지요.”

VT포트의 접속을 끊은 윤석호는 고글을 내려놓고 나서 다시 홀로그램 화면을 켠 뒤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메일을 열었다가 서류를 보고, 다시 보고서를 확인하는 작업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안내문이 떠오른 순간 윤석호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 THE MIST. 에피소드 3 - 4 영상 제작 완료 알림. ]

“드디어 네 번째인가…….”

윤석호가 가볍게 확인을 누르자 메일의 전문이 나타났다.

[ HW-05의 영상 제작을 완료하였습니다.

갑자기 HZ 퀘스트 수행 유저들의 퀘스트 수행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HE-06, HS-04, HB-07의 영상도 예정보다 빠르게 제작을 시작할 수 있게 될 듯합니다.

또한 우려가 크셨던 HR-02 또한 이제 절반을 넘겼으므로 순조롭게 에피소드들의 진행을 관리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래는 HW-05의 영상을 첨부한 파일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