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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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갑자기 뒤를 따라가고 있던 목표가 훌쩍 하늘을 날아 사라지는 어이없는 광경을 목도한 뒤, 롭과 파티원들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여정을 겪고서야 겨우 목표가 날아갔던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낭떠러지 골짜기를 그 수상한 로브의 남자처럼 날아서 내려갈 방도가 없었던 그들은 아쉬운 대로 무기를 벽에 박아 넣으며 내려오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성직자인 에반이 아무런 육체적 능력도 없었던 탓에 초우와 롭이 번갈아 그를 업고 내려와야만 했다.

중간에 바람만 한 번 불어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블루레이디는 그러게 멀쩡히 잘 가던 길을 왜 안 가고 여기로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며 비명과 욕을 질러댔고 롭은 그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위에서 부츠로 밟아대는 블루레이디의 고문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간신히 낭떠러지를 다 내려오자 이번에는 오히려 낭떠러지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고약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사실 데 고르카 골짜기의 근처는 이미 유명한 고레벨 유저 전용 사냥터로, 고렙들도 혼자서 마음껏 휘젓고 다닐 만한 사냥터가 아니라 보급존을 형성해 놓고서야 파티를 맺어 무리로 돌아다니는 곳이라는 것을 잊었었다.

덕분에 그들은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겨 가며 그런대로 자부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실력에 회의를 느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저곳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에반이 생각보다 신성력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진즉에 죽어도 몇 번은 더 죽었을 것이었다.

블루레이디의 부메랑 중 하나가 파손되고, 초우의 오른쪽 견갑이 뭉그러졌으며 롭의 온몸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진물을 뒤집어쓴 채 로브를 쓴 남자가 사라진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잠깐 사이에 몇십 배로 돈독해진 동료애를 확인하며 눈물을 흘렸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그놈이 정말 어떤 직업을 가진 놈인지까지는 봐 주고 돌아가겠어.”

초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블루레이디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냥 지금이라도 이 근처에 있다는 고렙 유저들의 보급존에서 토렐리트로 워프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사서 가는 게…….”

“자, 가죠!”

“우오오오!”

에반의 말이 묻혔지만 아무도 그가 말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롭은 일행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뒤따라 들어갔다. 사실 파티원들은 반드시 그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이 고생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롭은 이미 그 남자를 비스탈레의 콜로세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콜로세움이 무너졌던 큰 사고 때도 그 남자를 제일 오래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그 유명한 시저가 나타나서 콜로세움을 두 쪽을 내버린 상황에 다른 사람들은 죽어라 도망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롭은 오히려 낮은 포복 자세로 관객석 구석에 숨어 구경을 했다. 얼굴들이 하도 튀어 그가 말을 걸었던 일행 셋은 놀랍게도 시저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싸우고 있었다. 그때까지 로브를 쓴 남자가 검사인 줄 알았던 롭은 당연하다는 듯 마법을 쓰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하고 방금 전의 파티원들처럼 기겁을 했었다.

곧 죽어도 궁금한 것은 못 참는 터라 그 싸움의 끝을 보고 싶었는데, 결국 얼마 보지도 못하고 낙석에 깔려 로그아웃된 바람에 끝을 보지는 못했다. 이후에는 어느 미스트 관련 웹페이지를 뒤져 봐도 그날 자신이 본 것 정도로 자세한 영상이 없는 바람에 크게 낙담한 후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로 오늘, 긴가민가하며 아는 척을 했다가 봉변을 당한 로브의 남자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아얏, 뒤에서 부대끼지 말아요! 짜증 나 죽겠네!”

“일부러 그런 거 아니거든요?”

“계속 그렇게 말하면서 아까부터 열 번은 더 부딪쳤잖아요!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요! 아니면 혹시 저한테 관심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꿈 깨요!”

“아니, 전 당신 같은 여자 전혀 취향 아니거든요! 야, 롭!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 엉?”

블루레이디와 큰 소리로 싸우던 초우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든 롭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에 인상을 찌푸렸다. 에반은 워낙 말이 없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몬스터가 나올까 봐 긴장했던 것은 5분 정도였고 이내 방만해진 파티원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니 한숨이 다 나왔다.

“내 전 여자친구가 얼마나 좋은 애였는지 빨리 증언 좀 해. 지금은 없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헤어진 것뿐이라고!”

“어어 그래, 있었어.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르겠는데 헤어진 건 맞지.”

“들었어요?”

“자기가 로미오라는 거예요, 지금? 와……. 저기요, 왕자병도 그 정도면 병이에요.”

“말 다 했어요?”

“자…… 잠깐만요!”

막 초우가 무어라 소리치려던 순간 갑자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에반의 외침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파티원들이 에반이 있을 위치를 바라보자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음. …저기서 생명체의 반응이 보여요.”

“……그런 스킬도 가지고 있었어요? 진작 말하지!”

“왜 좀 더 일찍 말을 안 한 거예요?”

“마…… 말했는데요…….”

“아, 저기라고? 이제부턴 조용히 하고 가야겠군요.”

“당신만 조용히 하면 끝나거든요?”

“어우, 진짜.”

“…….”

그들은 또다시 존재감이 묻혀 좌절하고 있는 에반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려 맨 뒤의 롭부터 시작해 도미노처럼 굴러떨어진 덕분에 그들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으아악!”

“꺄아아악!”

쿠구구구구구궁!

“아야야야…… 으윽……!”

좁은 통로에 엉켜서 굴러떨어진 롭과 그 일행들은 충격이 가신 후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모두가 괴로운 상태였지만 롭은 특히나 시끄러운 블루레이디와 초우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내 위에서 냄새나는 엉덩이 빨리 치워욧!”

“지금 더 불쾌한 건 저거든요?”

“그만 좀 해!”

롭이 벽에 부딪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둘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소리치자 둘은 순간적으로 찔끔했다.

“지금 다 같이 힘을 합쳐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둘이서 자꾸 싸워야겠어?”

그러나 롭이 호통을 치며 배에 힘을 주었을 때, 그의 밑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저…기요……. 저 이제 정말 죽을 것 같…… 상태이상이…….”

“우아악, 이봐요, 에반! 정신 차려요!”

그것은 다 죽어가는 에반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죽음이 지척에 닥친 에반의 빈사 상태 모습에 놀란 나머지 일행들은 싸우던 것도 잊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가장 밑에 깔려 있던 에반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상태이상 ‘질식’에 빠져 있던 에반은 한참이 지나서야 헤롱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온갖 난리를 다 피우고 나서야 다시 길을 갈 수 있게 된 롭과 그 동료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의 눈앞에서 어둡던 길이 사라지고 약간 넓은 동공과 그 건너편의 길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이미 선객이 한 명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사람……! 흡!”

“쉿!”

눈치 없이 외치는 초우의 입을 롭이 급히 틀어막자 나머지 일행들이 그의 몸을 들어 올리며 벽 구석에 가서 철썩 달라붙었다. 초우가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람이죠?”

블루레이디가 긴장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까만 로브의 후드를 내리고 생각에 잠긴 듯 주저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정체 모를 글씨만 벽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뒤통수뿐이었지만 그 남자였다. 틀림없었다.

“그런 것 같군요. 일단 여기서 지켜봅시다.”

롭의 말이 끝난 후 그들은 계속해서 남자를 주시했다.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던 남자는 마침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갑자기 꼬랑지에 불붙은 개처럼 펄쩍 뛰어 벽에 새겨진 문자 앞으로 달려갔다. 동시에 그가 허리춤에서 꺼내 든 것은 붉은빛을 뿌리는 이상한 나무 막대기였다. 롭과 모두는 남자가 그 이상하게 생긴 막대기 하나로 갑자기 검기 같은 것을 뿜어내며 몬스터들을 도륙했던 것을 똑똑히 보았었다.

긴장으로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노려보기를 몇 분이나 했을까. 계속해서 깜박깜박대는 막대기에 대고 뭐라 뭐라 중얼대던 남자의 손끝에서 갑자기 빛과 압력이 퍽 하고 터져 나왔다. 막대기를 든 오른팔 쪽이었다.

“으윽!”

너무 눈부신 빛에 신음을 토하며 눈을 질끈 감았던 롭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붉은빛 속에서 남자의 오른팔을 감싼 공기의 소용돌이를 보았다.

‘저……게 뭐야?’

그가 의아해하는 동안 드러난 살색이 천천히 붉은빛으로 물들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터질 듯이 뿜어져 나와 그들을 뒤로 쓸어 보낼 것 같았던 바람이 먼저 가라앉고, 그다음에는 남자의 오른팔을 붉게 물들였던 빛이 서서히 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와중에 간신히 막힌 입을 풀고 정신을 차려 일어난 초우가 투덜거렸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이었다.

“……헉!”

블루레이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롭 또한 마찬가지였고, 일어나자마자 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 초우는 아예 눈만 멍청하게 껌벅껌벅하며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멀리 선 남자의 오른팔이 매우 기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로 묶어 사지를 조종하는 인형처럼 부자유스럽게 공중에 뜬 남자의 팔이 스스로의 얼굴을 묘하게 쓰다듬었다.

“저게…… 뭐죠?”

에반이 중얼거렸지만 그들은 모두 에반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만큼 남자의 오른팔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팔꿈치 부분이 손목 부분보다 더 높이 공중에 뜬 채 이리저리 스스로의 얼굴을 매만지며 움직이는 것은, 마치 전에 보았던 고전 호러 영화에서 귀신 들린 손이 주인공 스스로의 목을 조르던 그 장면을 상상케 했다.

“귀, 귀신 같아…….”

그 생각을 한 것은 롭뿐만이 아니었던 듯, 블루레이디가 질린 듯이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오른팔을 갑자기 남자가 왼손으로 철썩 내리쳤다. 공중에 날아다니던 귀찮은 모기나 파리를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차 없었고 거센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오른팔이 움찔하고 내려왔고, 또다시 한참을 이쪽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중얼거림만 내뱉던 남자가 다시 팔을 들었을 때는 손에 기이한 붉은빛을 띤 예의 막대기를 필기라도 하려는 듯이 쥔 채였다.

잠시 후, 남자는 그것을 이용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게 문자가 새겨져 있던 벽에 겹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나는 것을 롭 일행이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을 때, 잠깐 멈칫했던 남자가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힉!”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유난히 그 남자를 두려워하는 에반이 재빨리 먼 뒤로 엉덩이걸음을 해 물러섰다. 나머지도 움찔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남자가 천천히 오른팔을 벽에서부터 떼는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롭은 온몸의 솜털이 거꾸로 섰을 정도로 긴장해 숨소리를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의 손에 쥐인 막대기까지 벽에서 떼어진 순간이었다.

“블링크!”

쿠구구구구구구궁!

“우악……!”

“꺅!”

“흡!”

번개같이 사라졌다가 그들의 3미터쯤 앞에 다시 나타난 남자를 본 일행들이 제각기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음울하게 흔들리며 울부짖기 시작한 동굴이 지각 변동이라도 하는 듯 사정없이 지진을 일으켰다. 일행들은 기절할 듯이 놀란 가운데에도 그 남자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자각을 갖고 머리만 가린 채 최대한 뒤로 물러서기 위해 애를 썼다.

그들이 도로 계단이 있는 어둠 속의 구석진 곳까지 사사삭 물러섰을 때에야 지진은 간신히 가라앉았다. 이제 일행이 있는 곳에서는 저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하죠?”

에반이 패닉 상태에 빠져 외쳤다.

“저희 들킨 것 아니에요?”

“들켰으면 바로 이쪽으로 왔겠죠! 이럴 틈이나 있었겠어요? 그보다 일단 여기까지 물러나긴 했는데 어떡할 거예요? 도로 나갈 건가요?”

블루레이디가 면박을 주면서도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롭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단, 50을 세고 조심해서 앞으로 나가 보죠.”

“네에?”

“싫으신 분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저만 가도 되니까요.”

싫어하는 티를 내는 블루레이디에게 롭이 차갑게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여기까지 억지로 데려온 것도 그쪽이면서!”

“야 롭, 저 사람 계속 데려가야겠어? 그냥 두고 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초우가 롭에게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지만 그 말을 못 들을 블루레이디가 아니었다.

불을 뿜을 듯이 화를 내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났을 때는 숫자를 세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숫자 50 안 세도 되려나?”

초우가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을 때 구석에 서 있던 에반이 손을 들고 슬프게 중얼거렸다.

“저기요…… 저는 셌어요. 이제 78까지 셌고요.”

“오! 고마워요, 에반.”

“좋았어, 가죠.”

“…….”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에반의 등을 두드려 주었으나 에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매정한 일행들은 누구 하나 에반을 신경 써 주지 않은 채 신나게 앞서나갔다.

“저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동공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은 블랙홀 같은 것이 윙윙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 하나가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 그 블랙홀 너머로 어둡지만 확실히 길이라고 알 수 있을 만한 형체가 보였다. 놀란 일행이 흠칫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자 블랙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기로 들어갔을까?”

초우가 롭 쪽을 바라보며 하얗게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블랙홀을 손가락질했다.

“그렇……겠지.”

롭은 자신 없게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까 그 남자는 저 너머에 멀쩡한 동굴 길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거기에는 신경 한번 쓰지 않고 무언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저 블랙홀과 그 너머의 또 다른 차원처럼 보이는 어두운 길이라면 그쪽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쪽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설마 여기도 들어갈 건가요?”

블루레이디가 꺼림칙한 얼굴로 물었다. 롭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아악 정말, 이 스토커 같은 인간들하고 내가 왜 파티를 해서……!”

“그렇지만 솔직히 당신도 궁금하잖아요. 지금 이 일은 미스트를 백날 플레이해도 한 번 보기 힘든 그런 일이라구요. 저 남자가 대체 뭘 하려고 여기에 온 건지 여기까지 온 이상 봐야겠다는 생각 안 듭니까?”

“……흐, 흥.”

블루레이디의 코웃음에 힘이 좀 빠졌다. 롭은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블랙홀의 주변을 몇 번 돌아본 뒤, 일행의 대표가 되어 천천히 안으로 발을 내디뎌 보았다. 순간 발에서부터 전혀 다른 곳의 땅을 밟는 느낌과 함께 오싹함이 전신을 달렸다.

“왜 그래요?”

롭의 묘해진 표정을 본 블루레이디가 답지 않게 겁을 내며 물었으나 롭은 표 내지 않으려 고개를 붕붕 흔든 뒤 그대로 쑥 한 발을 더 내디뎌 완전히 블랙홀을 통과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느낀 것은 그가 지금 전혀 다른 곳의 어딘가로 이동했다는 사실이었다. 공기의 느낌이 축축하고 차가웠으며 땅은 딱딱했지만 질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앞을 향해 선뜻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롭이 뒤를 돌아보자 거울 너머로 보이는 것처럼 투명한 막을 경계로 나머지 일행들이 뒤따라 넘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쑤욱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을 통과해 넘어온 초우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를 쳤다.

“으윽,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비켜 봐요.”

뒤이어 건너온 블루레이디가 초우의 등을 철퍽 밀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초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블루레이디는 못 본 척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요. 또 에반에게 부탁해야겠네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건너온 에반이 귀신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저, 저요?”

“아까 썼던 그 스킬 있잖아요. 생명체 탐지 스킬인가? 그거 쓰고 앞장서세요.”

“…….”

불쌍한 에반은 울상을 지었지만 거역하지 못한 채 무언가 스킬 이름 같은 것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홀리 라이프 파인더.”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에반이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멀리 뭔가 보이는 것 같긴 한데……. 따라오세요.”

그리고 그들은 일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렬로 줄을 서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기차놀이를 하듯 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발을 밟거나 몸이 부딪치는 사소한 일로 블루레이디와 초우가 으르렁대며 싸우는 바람에 나머지 두 명이 골치 아파해야 했던 것은 여태까지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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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 왜? ]

파이어 볼을 앞에 몇 개 띄워두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내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람 목소리 같은 것에 걸음을 멈추자 슈페리어가 바로 질문을 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 한번 탐색해 보지 그래. ]

슈페리어가 느긋하게 대답해 주었으나 나는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흔들었다.

“착각이었겠지. 갈 길이 급하니 그냥 가겠어.”

파이어 볼을 세 개나 썼는데도 가시거리가 1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듯한 이곳은 이상하게도 있을 법한 몬스터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아 더욱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밟을 때마다 약간 질게 느껴지는 땅도 기분이 나빠지는 데 한몫했지만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현재 스트렝스, 헤이스트를 쓴 상태에서 디텍트 매직까지 사용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적의 흔적을 최대한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으로는 모자랄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었다.

두 개의 마법을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하면서 가고 있지만 다행히도 그리 무리가 되는 것 같진 않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시도는 한번 해 보는 것이 나을까.’

그 마법을 사용해 보기 전에 나는 먼저 슈페리어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 디텍트 매직을 써서 시야에 걸린 마법을 통해 적을 훑고 있는데, 여기서 시야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마법을 또 쓰면 어떻게 될까?”

[ 중첩마법인가? 네 능력이 따라준다면야 적절히 효과를 발휘하겠지. ]

“능력이 안 되면?”

[ 그러면 마력만 손실되고, 네 정신은 피폐해질 테고. ]

“괜찮군. 그럼 시도해 봐도 되겠어.”

[ 그런데 뭘……. ]

머릿속으로 세 번째로 함께 쓸 마법의 이미지를 떠올린 뒤 오른팔로 서클을 그려 손을 밀어 넣었다. 서클의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나오는 찬란한 빛이 순간적으로 파이어 볼보다도 밝게 주변을 비추었다.

“에어리얼 서번트!”

슈아악!

세 번째 마법이 소리 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에어리얼 서번트? 6서클짜리라고는 안 했잖아! ]

슈페리어의 드물게 놀란 목소리가 시끄럽게 머릿속을 두드렸지만 이미 발동되기 시작한 마법을 멈출 수는 없었다.

천천히 억지로 시야가 비틀려 두 개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두통이 밀려왔다. 눈앞에 보이던 파이어 볼들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마구 깜박거리며 사정없이 휘청거렸고, 보이지 않는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 시전했던 디텍트 매직이 반발을 일으키는지 눈앞에 새파란 빛이 번쩍거렸다.

‘젠장…… 꽤 반발하는군.’

[ 당장 그만둬! ]

서클 안에 들어가 있던 오른손이 슈페리어의 의지를 따라 멋대로 뒤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것을 왼손으로 콱 붙잡아 저지시키자 오른팔이 몸부림을 치며 꿈틀거렸다.

[ 그대가 지금 하려고 하는 건 너무 무모해. 지금의 실력으로 시도할 만한 일이……. ]

“정신 사납게 굴지 마!”

집중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앵알거리는 목소리는 귀를 막아도 계속해서 들리는 것이었다. 오른 손목을 붙잡고 막았지만 워낙 심하게 요동을 쳐대니 집중력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 시끄럽게 굴어대는 슈페리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배에 힘을 주고 버럭 소리치자 오른팔이 깜짝 놀랐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마터면 쓸데없이 집중이 깨져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중에 두고 보자, 슈페리어. 일단 이것부터 끝내고.’

그 틈을 타 나는 두 개로 나뉘다가 한 개로 겹치면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를 통제하기 위해 이미징을 계속했다.

현재 세 개의 마법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파이어 볼, 디텍트 매직, 에어리얼 서번트의 세 가지를 모두 동시에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신경이 분산되어 힘들 것 같았다.

그러면 먼저…… 앞을 밝히는 것 외에는 쓸모없이 신경만 분산시키고 있는 파이어 볼은 없애놓고 해도 괜찮겠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세 개의 파이어 볼의 이미지를 천천히 지웠다. 그러자 그와 함께 눈앞에서 깜박깜박 움직이던 파이어 볼들도 똑같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됐다…….’

조심스럽게 시도한 덕분인지 두통이 더 커진다거나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디텍트 매직과 에어리얼 서번트의 연동 문제인데.

눈앞을 파랗게 밝히며 마법의 기운을 찾아내는 디텍트 매직, 그리고 시야를 둘로 나누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바람의 눈을 공유하는 에어리얼 서번트. 이 둘을 어떻게 해야 무리 없이 함께 쓸 수 있을까…….

지금 내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실제로는 꽤 다급한 상황에서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의외의 흥분과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고양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 끗발 차이로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본능이 경고해 오는 이런 상황이 나는 정말로 기분 좋았다.

도전한 일이 어려울수록 해결한 후의 성취도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무도(武度)의 길이란 육체의 단련이 기본이지만 결국 자신과의 싸움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그 이상 위로 향하는 길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찌 그 고된 수련을 한 번쯤 쉬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결국 모든 고뇌를 이겨냈을 때 찾아오는 희열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향해 싸움을 걸었고, 이겼다.

지금은 마법이 바로 나에게 그런 도전의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사람의 눈에서도 불꽃이 튈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런 때 같았다. 번쩍번쩍 두들겨 대는 두통 속에서도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하고 천천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가볍게 한 번 핥았다.

‘좋아.’

웅웅웅웅웅!

갈피를 잡지 못하고 중도에 멈춰 있는 마법 때문에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며 마력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이 제대로 시전되지 않고 오랜 시간 멈춰 있으면서 마력이 급격히 소모되는, 이전에 디스펠을 배우기 전에 나를 무척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 바로 그 현상이었다.

눈앞이 노랗게, 파랗게 번쩍거리며 전기처럼 타닥거리는 마력의 기류가 옷자락을 멋대로 펄럭이게 만들었다. 젖혀진 후드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위로 사납게 날리는 것을 쓸어 넘겨 누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던 디텍트 매직의 반발과 내 시야가 없어지면서 깜박깜박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만 어둠 속에서 불꽃을 탁탁 터뜨려 보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해 보면 어떨까.’

디텍트 매직이란 마법은 마법의 힘으로 가려진 생물체를 볼 수 있는 파란 안경을 눈 위에 끼움으로써 내 시선이 닿는 곳에 그 힘을 미치게 하는 것이라고 쉽게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에어리얼 서번트까지 써버리면 안경은 하나밖에 없는데 보아야 할 내 눈이 갑자기 두 쌍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방법은 하나. 일단 디텍트 매직을 해제한다.

슈, 우, 우우…… 피피픽!

억지로 디텍트 매직을 해제하려 하자 반발이 일어나며 그렇잖아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마력이 또다시 껑충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느껴지는 어지러움 때문에 힘이 죽 빠지는 것 같았으나 애써 버티고 서자 잠시 후 디텍트 매직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거리낄 것 없이 혼자 남은 에어리얼 서번트가 시원하게 시동되었다. 시야가 익숙하게 두 개로 잘 나뉘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쳤다.

“디텍트 매직!”

그리고 한 번 더,

“디텍트 매직!”

같은 주문을 외쳤다.

파이어 볼 같은 마법은 몇십, 몇백 개라도 중복하여 내 의지대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텍트 매직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파란 안경을 내 눈에도 씌우고, 에어리얼 서번트에도 씌우면 되는 것이다. 굳이 억지로 나눌 필요 없이 말이다. 간단한 발상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상상력으로 마법을 구현시키는 미스트에서는 엄청난 차이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파랗게 발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진의 빛을 느끼면서 나는 더 이상 두통이 느껴지지 않는 맑은 머릿속으로 시원하게 웃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파이어 볼!”

다시 한 번 시전한 파이어 볼 또한 아까보다 두 개 더 추가하여 다섯 개를 만들었고, 모두 문제없이 환하게 떠올라 내 앞길을 밝게 비추었다. 디텍트 매직의 새파란 기운을 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내가 원하는 대로 공중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나는 것을 보는 것은 굉장한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또다시, 내가 이겼다.

[ 내가 정말, 마력이 쭉쭉 떨어져 가는데도 눈 한번 안 깜짝이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걸 봤을 땐 두려워서 다 포기해 버렸나 했었다니까. ]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슈페리어의 한숨 섞인 말에 차갑게 대답하자 오른손이 알았다는 듯 눈앞에서 홱홱 흔들리다 툭 떨어졌다.

[ 알았어. 내가 그대를 너무 우습게 보긴 한 것 같아. 설마 1, 3, 6서클 마법의 중복 연동을 순서를 바꿔 시동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쉽게 해낼 줄이야. ]

나는 피식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재 두 개로 나뉜 내 시야 중 하나는 바쁘게 파이어 볼을 앞세워 동굴 앞쪽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질주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에어리얼 서번트에 파이어 볼 두 개를 달아 앞쪽으로 미리 내보낸 나는 정찰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공유하며 편하게 뒤따라가고 있었다.

체감 시간으로 한 시간이 넘게 걸어왔지만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별 수확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변화란 길이 점점 좁아지면서 급격히 구불구불 밑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래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아까와 달리 미리 앞을 내다보고 가는 길이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기 그지없는 산책길과도 같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더 앞을 향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슈페리어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 저기, 주변의 온도가 좀 올라간 것 같지 않아? ]

그 말을 듣고 멈춰 선 뒤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해 보자 과연 약간 텁텁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아직까지는 덥다고 느낄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때부터는 기다렸다는 듯 점점 더 숨이 턱턱 막혀오면서 후끈한 기운이 피부를 익혀버릴 것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찰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에서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공기의 변화를 보니 아무래도 이 길의 끝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굉장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아이스 볼트.”

파이어 볼트와 함께 배웠었지만 별로 써본 적이 없었던 아이스 볼트를 시전하자 새하얀 냉기를 내뿜는 얼음의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손으로 움켜쥐고 얼굴 근처에 갖다 대자 약간 숨이 트이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호오, 마법을 참 실용적으로 쓰는데. ]

슈페리어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를 냈다.

남이사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이라고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점점 심해진 뜨거운 기운 때문에 마법으로 구현된 아이스 볼트가 절반쯤 녹아내리는 상황에까지 직면하게 되었다.

게임이라 기온 또한 고통 수치와 마찬가지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경으로 아이스 볼트를 서너 개 더 불러내 몸 여기저기에 호위하듯 딱 붙여놓은 상태였지만 숨쉬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만 갔다. 마치 사우나 안에 들어갔을 때 숨이 턱 막히면서 자신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한없이 뜨겁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 땀이 흐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이 이상 더워지면 옷을 지금처럼 두껍게 걸친 상태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로브를 벗어 아이템창에 넣은 뒤 입고 있던 옷의 바짝 달라붙은 칼라 단추까지 풀었다. 그제야 그나마 숨쉬기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

그때, 3미터쯤 앞선 곳에서 날아가고 있던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에 새빨간 빛이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이 길의 끝이 그곳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그 즉시 에어리얼 서번트를 거두어 내 옆에서 따르도록 명령한 뒤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어리얼 서번트를 통해 보았던 길 끝의 붉은빛이 진짜 내 눈을 통해 들어왔다.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것을 따라 뛰어갈 때마다 더운 숨이 코에서 뿜어져 나왔다.

너무 뜨거운 공기 탓에 제대로 된 스피드로 뛰지도 못하고 보통 사람의 느릿한 조깅 수준으로 길 끝에 다다라 빠져나오기 직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장관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

눈앞에 펼쳐진 진홍의 바다.

그것은 내가 빠져나온 동굴에서부터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길까지 온통 뻥 뚫린 거대한 지하공간에 존재하고 있던 용암의 불구덩이였다. 유황 공기방울을 내뿜으며 뿌옇게 끓어오르는 용암과 벌겋게 달아올라 녹아내리는 벽. 세상이 모두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던 슈페리어가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질문했다.

[ 이거 난관이군. 이번에는 어떻게 처리해 보일 건가, 그대? ]

그 말에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시선을 거둔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마주친 용암의 강. 다리도 없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어떤 수단도 없으며 가야 할 곳은 뛰어넘어서도 갈 수 없는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취할 방법이라고 해 봐야…….

“일단 에어리얼 서번트를 보내 봐야지.”

옆에 붙어 있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이리저리 움직여 거리를 가늠해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날아가 봐.”

휘익 하는 바람 소리가 작게 들려온 뒤 에어리얼 서번트는 내 명령에 따라 착실히 앞으로 날아갔다. 나는 눈을 감고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에만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최대한 용암에서 멀리 떨어진 위쪽에 뜬 채 날아가는 에어리얼 서번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 길 쪽에 거의 다다를 수 있었다. 어른어른 올라오는 유황 기운을 띤 아지랑이 속에서 어두컴컴한 건너편 동굴 안쪽이 막 모습을 드러냈다. 문득 그곳에서 반짝하는 파란 빛 같은 것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건너편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속도를 내라고 중얼거리려 했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 부딪히는 충격이 시야와 머릿속을 동시에 관통했다.

쿵!

“윽!”

뭔가에 부딪힌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며 멈춰버린 에어리얼 서번트를 뒤로 물러서게 했지만 앞은 여전히 뿌연 아지랑이에 가려 있을 뿐 특별히 막고 있는 장애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앞으로 날아가게 시켰을 때, 또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에어리얼 서번트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서야 나는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에어리얼 서번트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나? 바람을 차단하다니?’

에어리얼 서번트의 본질은 바람, 즉 공기이다. 바람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 한가운데서 막혀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다는 이 상황이 나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 보게 시켰지만 에어리얼 서번트는 어떻게 해도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옆으로 돌며 계속 돌진하게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거리에 다다르면 에어리얼 서번트는 도저히 그 투명한 무언가를 넘지 못하고 막혀 멈추고 말았다. 막고 있는 것에 최대한 밀착한 채 에어리얼 서번트를 통해 보이는 건너편을 보려 했지만 어른어른한 동굴 외에는 그다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몇 분을 그렇게 주변만 어슬렁대며 헤매고 있었을 때, 후끈하게 올라오던 주홍빛 유황 연기가 사라지면서 앞이 좀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아까 잠깐 보았었던 푸른 빛이 건너편 동굴 안쪽에서 확실하게 보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닌 확실한 푸른 빛이었다.

파앗!

그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건 디텍트 매직이 감지한 빛이었구나.’

디텍트 매직은 마법의 힘으로 감추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파랗게 비추며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디텍트 매직의 푸른 빛이 확실하게 기운을 감지하고 파랗게 깜박이는 것을 보니 동굴 안쪽에 마법의 힘으로 감추어진 엄청난 무언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애쓰려 했을 때, 다시 부글부글 끓으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유황 불꽃과 아지랑이 덕분에 나는 그 동굴 쪽을 탐색하는 일을 거기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에어리얼 서번트, 돌아와.”

에어리얼 서번트를 불러들인 뒤 눈을 뜨자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 건너편이 한없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한숨을 쉬고 에어리얼 서번트와 디텍트 매직을 둘 다 거두자 슈페리어가 그제야 말을 걸어도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막대기에서 붉은빛이 깜박거렸다.

[ 에어리얼 서번트로 탐색을 보낸 거군. 뭘 봤어? ]

“건너편에 뭔가 굉장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 에어리얼 서번트가 뭔가에 막혀서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질 못하더군.”

[ 호오…… 마법 결계인가? 6서클의 에어리얼 서번트를 막았다는 걸 보니 꽤 엄청난 결계인가 본데. ]

마법 결계라고? 그런 것도 있나?

“그게 뭔데?”

[ 결계란 마법사가 다른 이의 공격이나 접근을 막기 위해 치는 일종의 보호막이라고 할 수 있어. 한 번 치면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니 그 안쪽에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치는 일이 많지. 이 결계란 게 사용하는 마법사 마음에 따라 쉬운 조건에서부터 까다로운 조건까지 마음대로 조정 가능해서 어떤 조건의 결계인가에 따라 지나갈 수 있는 방법도 달라지기 마련이지. ]

“예를 들면?”

[ 음…… 가장 많이 쓰는 결계의 예를 들어보자면 일단 자기보다 낮은 서클의 마법사가 마법을 써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를 칠 수도 있고.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지만 마법적으로는 통과 가능한 결계를 칠 수도 있어.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해. 아까 네 에어리얼 서번트가 통과하지 못했다고 했으니 6서클 이하의 마법은 일단 통과하지 못한다고 봐야겠지. ]

의외의 말에 나는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는 생각보다 먼저 한 방 맞았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결계라니? 그것도 6서클 이하가 통과할 수 없는 결계라고? 이 드넓은 용암의 강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플라이 마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플라이 마법은 고작 3서클에 불과했다. 즉 6서클 이하의 마법이 통과할 수 없는 결계를 플라이를 사용한 채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플라이를 쓴 채 허덕이며 날아간 내가 방금 전의 에어리얼 서번트처럼 보이지 않는 결계에 부딪쳐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젠장,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거지?’

믿고 있던 당연한 해결책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막히고 나니 안 그래도 더운 곳에서 이젠 아예 숨이 다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긴 나에게 슈페리어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 그런데 저 건너에 뭐가 있는지는 확실히 본 거야? 결계를 쳤다는 건 그만큼 그 안에 있는 것이 대단하다는 말도 될 텐데. ]

“멀어서 제대로는 못 봤어. 일단 디텍트 매직으로 파란빛을 감지하긴 했으니 저 안에 있는 건 아마 마법적인 무언가겠지.”

[ 마법적인 무언가라……. 짐작 가는 건 없고? ]

“없어.”

[ 그래, 그러면 이젠 탐색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그대의 실력 발휘 시간이군. 6서클 이하의 마법이 무용지물이라면 그대가 지금 쓸 수 있는 마법의 대부분이 쓰레기가 되는 건가? 기대할게. ]

이놈의 막대기를 저 용암에 던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달콤한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막대기 근처에 가져다 댄 손가락이 근질거려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나는 집어 던지는 것만은 그만두기로 하고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여길 건너가기 위해서 쓸 수 있을 만한 마법이 뭐가 있을까.’

분하지만 슈페리어의 말은 맞다. 나는 6서클 마법사이니 저곳을 지나가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무것도…….

‘잠깐. 아무것도 없는 게 맞지 않나? 슈페리어는 왜 ‘대부분’이라고 말한 거지?’

“왜 대부분인데? 전부 쓰레기가 아니고.”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슈페리어가 자신감 넘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 거기서 당연히 내 건 빼야지! 내 마법을 두 개나 배웠다는 게 그대가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걸! ]

남들의 10년 어치는 될 재수 없는 말을 단 한 번에 끝내버린 슈페리어는 내가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이 기막힘을 조금이라도 더 되갚을 수 있을지 궁리하는 동안 그 생각이 쏙 들어갈 말을 해 주었다.

[ 내 마법은 그런 결계 따위에 막히지 않아. 애초에 내가 만든 마법이 결계에 막히는 꼴 따위를 볼 거였다면 만들지도 않았겠지. ]

“정말이냐?”

어디서부터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어 미심쩍게 반문하자 슈페리어가 모욕이라도 받은 양 되려 성질을 냈다.

[ 그대, 못 믿는 거야? 일단 써 보라고! 내 마법이 세계 최고라는 건 500년이 지나든, 1000년이 지나든 변함없는 사실이야! ]

“…….”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한번 시험해 볼까.

몇 번 고개를 움직여 뚜둑 소리를 내자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던 목과 어깨가 약간 시원해졌다. 마력이 어느 정도나 남아 있나 대충 가늠해 보니 절반이 조금 안 되게 남은 것 같았다.

‘이 정도라도 6서클 몇 번은 아직 더 쓸 수 있을 것 같으니 다행이군.’

슈페리어의 마법을 쓸 때는 다른 마법을 쓸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동안 슈페리어의 마법을 좀 더 쉽게 불러낼 수 있게 하기 위해 거쳐 왔던 던전만 몇 개며 쓸고 다닌 몬스터들이 몇백 마리인가.

그런 추억들을 되새겨 보면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말을 참 안 듣는 지옥의 불꽃, 인페르노. 진짜 지옥의 불꽃 같은 용암 바다에서 얼마나 위용을 떨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험해 볼 만한 건 너밖에 없구나.

“인페르노!”

외치면서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자 내가 보고 있던 곳에서부터 재가 떨어지듯 불티가 흩날리더니 새빨간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는 악마처럼 사악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색깔만큼은 용암보다도 더 붉고 선연했다.

여전히 내 눈길이 닿는 곳만 따라다니는 인페르노를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다 저 먼 곳의 건너편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아가라!’

인페르노는 잠시 반항하듯 깜박거렸지만 눈알이 빠져라 힘을 주며 노려보자 그제야 슬금슬금 움직여 허공에 떠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고, 나중에는 작은 파이어 볼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공중을 신나게 가로질렀다.

마침내 아까 에어리얼 서번트가 결계에 부딪쳐 보기 좋게 막혔던 부근까지 간 것처럼 보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바짝 긴장하며 혹시 모를 마법 실패의 후폭풍을 대비했다.

‘그래, 그쯤에서 결계가 나타난다……!’

막상 인페르노가 결계의 지척에 다다르자 긴장된 나머지 무심코 속도를 약간 늦추기 위해 눈에 힘을 뺐을 때였다.

슈욱!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결계 부근을 통과한 인페르노가 건너편 길이 있는 동굴 옆의 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콰쾅!

부딪친 곳에서 일어난 폭발 덕에 부서진 바위들이 신나게 용암 바다로 굴러떨어져 녹아내렸다.

‘이럴 수가…….’

슈페리어의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게 슈페리어가 자랑스러운 말투로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 어때. 끝내주지? ]

“…그래. 이거라면…….”

무리하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뒷말은 생략했지만 슈페리어는 딱히 내 대답을 바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즉시 내가 배운 슈페리어 마법 두 개만으로 용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짜내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용암 바다를 건너기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 시각, 롭과 일행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차놀이처럼 손을 얹은 채 어둠 속에서 2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처음에 어렸던 긴장감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짜증과 싸움뿐이었다.

“에반,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아요? 길 잘못 든 건 아니죠?”

“아, 그만 좀 물어요 진짜!”

“불안하면 확인할 수도 있지, 왜 사사건건 시비예요?”

블루레이디와 초우의 싸움이 블랙홀을 건너온 이후부터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저 소음을 제발 BGM 정도로 인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따라가던 롭은 갑자기 멈춰 선 에반 때문에 따라 멈춘 초우의 뒤통수에 코를 박아야만 했다.

“아야. 뭡니까? 갑자기.”

“어쩐지 좀…… 더운 것 같아서요.”

“덥다고요?”

생뚱맞은 말에 롭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어둠밖에 안 보이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 잘 모르겠는데요.”

“아… 그럼 그냥 제 기우일지도……. 죄송합니다. 계속 갈게요.”

“아니, 뭐.”

서로 뻘쭘하게 말을 끝낸 뒤 계속해서 걸어가던 중, 롭은 에반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점점 더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암시 효과인가? 희한하네?’

그러나 그것은 암시 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폭발적으로 뜨거워진 공기를 느낀 일행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대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격렬한 토론(주로 블루레이디와 초우만의)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계속 앞으로 향했다.

롭은 솔직히 조금 덥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 기온이라면 아직 초여름 정도의 느낌이니 버틸 만한 것 같아 계속 길을 가는 데 찬성했었다. 그러나 30분 뒤에는 그렇게 찬성했던 자신의 결정을 죽도록 저주하게 되었다. 앞으로 향할수록 기온은 놀랄 정도로 높아져 나중에는 숨쉬기조차 벅차게 느껴졌던 것이다.

“흐억… 헉… 헉……!”

“개 헐떡대는 것 같은 소리 좀 내지 마, 롭!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는 롭에게 초우가 개소리 내지 말라는 막말을 던졌음에도, 롭은 그 자식을 한 방 날리기 위한 주먹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었다. 초우는 스텟 포인트를 체력과 힘에 투자한 전형적인 검사 타입이라 체력이 남아도는 모양이었지만 롭은 스피드와 기술에 많은 부분을 투자한 스피드형 검사였기에 체력이 매우 달렸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초우 저 자식을 그냥……!’

헐떡헐떡 숨만 내쉬며 무거운 발을 옮기고 있던 그의 앞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에반이 쉰 목소리로 바람만 쌕쌕거리며 중얼거렸다.

“빛, 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때, 뒤에서 결국 살인적인 기온을 이기지 못한 블루레이디가 상태이상을 일으켰는지 털퍼덕 쓰러졌다.

“어? 이봐요!”

초우가 기겁해 그녀를 두들겼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런! 어떡하지?”

“초우 네가 업어야지 어떡하겠어.”

“뭐? 내가? 너도 있잖아!”

당황하는 초우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롭은 최대한 기운 없고 불쌍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스피드형 검사고…… 갑옷도 무거운데 여기에다 저 사람까지 업으면 나까지 기절할지도 몰라. 그래도 넌 체력도 좀 있고……. 체력에 찍은 스탯은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쓸 건데? 하아…하…… 쿨럭쿨럭!”

“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업으면 될 것 아냐!”

그들은 얼마간 더 지옥을 헤맨 끝에 간신히 에반이 보았다는 빛을 육안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반쯤 바닥을 기고 있었던 때라 기쁨이 매우 각별했다.

“으아아아아 드디어!”

“쉬, 쉿, 조용히 해! 그 남자다!”

축 처진 블루레이디를 등에 지고 질질 울면서 바닥을 기던 초우가 빛을 향해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내미는 것을 롭이 가차 없이 쳐내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저 멀리 보이는 주홍빛 빛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서 있었다. 어른거리는 뒷모습만으로도 롭은 저 남자가 그들이 쫓아온 바로 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긴장한 채 제대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남자를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가 조용히 발을 내디뎌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시작될 것 같다는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절벽 끝에 선 남자가 양손을 뻗으며 기이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크게 주문을 외쳤다.

“블리자드!”

쩡!

그 순간 주변에서 요동치던 모든 뜨거운 공기들이 바짝 굳어 얼어붙었다. 롭 일행이 공기가 정체된 느낌을 받고 의아해하려던 때, 어디선가 불어오기 시작한 차가운 바람이 열로 달아올라 있던 피부를 차게 식혔다.

“뭐……야, 이건?”

“차, 차가워……? 어? 눈?”

그것을 시작으로 용암이 펄펄 끓는 공간에서 절대 볼 수 없을 눈보라가 온 동굴 안을 휘감아 몰아쳤다. 롭 일행은 한여름 뙤약볕에서 순식간에 시베리아 벌판의 혹한에 알몸으로 내버려진 듯한 기분으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으아악! 이게 뭐야!”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온몸을 찢어발길 듯이 불어닥치던 눈보라는 그들이 생사를 오가길 열 번쯤 반복했을 때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다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어울리지 않는 눈을 머리에, 어깨에 얹은 채로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있던 롭 일행이 고개를 들자 그들의 눈앞에는 또 다른 의미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허……업.”

저도 모르게 희한한 소리를 낼 뻔했던 초우가 알아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직접 본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청난 마법을 불러낸 남자는 아직도 아까 그 자리에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몸은 여기저기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잔뜩 젖어 있었는데 눈보라 때문에 맞은 눈들이 용암의 열기에 녹아내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남자의 앞에서는 방금 전 온 동굴 내에 휘몰아칠 정도로 광폭하게 날뛰었던 눈의 폭풍이 범위는 훨씬 줄어들었음에도, 위력은 아까보다 한층 더 강해진 모습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억지로 압축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공중 한가운데에 토네이도처럼 회오리치며 둥둥 떠 있는 작은 공기의 기류가 으르렁대듯 눈보라를 뿜어내는 것은, 그리고 그 밑에서는 바로 시뻘건 용암이 펄펄 끓고 있는 장면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두 말을 잃고 보고 있는 사이 남자가 팔을 한 번 휘젓자 압축되어 있던 눈보라가 남자의 발밑으로 쏘아져 내려오며 하얗게 냉기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파츠츠측 소리를 내며 눈과 얼음가루 같은 것이 뭉쳐져 어느 정도 두껍게 바닥에 층을 형성하자 남자는 나머지 한 손을 밑으로 뻗으며 새로운 마법을 불러냈다.

“인페르노!”

공기 중에서 시뻘건 불씨가 혀를 날름거리며 툭 떨어져 내렸다.

땅에 떨어져서도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야수처럼 움직이는 그 불꽃은 마치 자신의 의지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 불꽃이 몇십 센티 정도 쌓여 있는 얼음가루 옆에서 활활 타오르자 잠시 후 소복이 쌓여 있던 얼음가루들이 녹기 시작했다. 그때 남자는 불꽃을 멀리 떨어지게 한 후 약간 얌전해졌던 회오리 눈바람을 다시 맹렬히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그러자 잦아들었던 냉기가 바람의 힘을 얻어 주변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혔고, 녹아내리던 얼음가루들은 서로 엉겨 붙어 단단하게 굳어졌다.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비슷한 작업을 반복해 자신의 앞에 밟고 올라서도 될 법한 얼음층을 쌓은 뒤, 몇 번이나 그 얼음층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위에서 누르기도 하면서 강도를 시험해 보고는 만족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양손을 뻗어 먼 앞쪽을 힘차게 가리켰다.

“좋아. 그대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오리바람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한 번 폭발하더니 흰 얼음가루를 내뿜으며 위로 솟아올랐다. 마치 하얀 무지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 뒤를 이어 새빨간 불꽃이 혀를 날름대며 불티 꼬리를 끌고 따라 올라갔다.

롭은 자신의 옆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에반의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곁눈질하며 지금 자신의 꼴도 별 다를 바 없을 것임을 자각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높은 공중에서 눈보라를 뿌려대면, 그 얼음가루를 뒤따라가던 불꽃이 적절히 녹여 엉겨 붙게 만들었다. 불과 눈보라가 합쳐져 만들어진 얼음 덩어리는 남자가 서 있는 절벽 끝에서부터 이어져 이제는 확실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암의 열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 만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계단을 닮은 다리의 형상과 흡사했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단신으로 얼음 다리를 만드는 정도의 실력자가 여태껏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저 남자는 정말 유저인 걸까? 실은 NPC가 아닐까?

롭은 이 믿기지 않는 기적을 일구어내고 있는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정적인 뒷모습이었지만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온 집중력과 힘을 마법에 쏟고 있다는 것이 걷어 올린 소매와 뒷목을 타고 줄줄 흐르는 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통해 느껴졌다.

“미친… 나 지금 헛걸 보는 거 아니지……? 저게 진짜 사람이라고?”

초우가 옆에서 오래전에 그만두었다던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 또한 넋을 잃고 앞쪽에 못 박혀 있었다.

“오지게 멋있네…….”

롭 또한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둘 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만들어지고 있던 얼음 다리가 마침내 절반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남자가 드디어 자신이 만든 결과물 위로 천천히 올라섰다. 그대로 미끄러워 보이는 곳을 망설임 하나 없이 걸어 올라갔다. 이윽고 그는 난간 하나 없는 까마득한 높이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바로 용암에 빠져 로그아웃될 것이 분명했지만 전혀 긴장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위험해 보였지만 남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느리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모습에서는 어떤 경이감마저 느껴졌다.

남자는 절반을 조금 넘어갔을 때 잠깐 멈추어 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무언가 가늠해 보듯이 팔을 휘저어보더니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가만히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팬터마임이라도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문제없이 움직인 몸이 다음 걸음을 내디딜 땅에 닿자 남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왜 저러는 거죠?”

에반이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재수 없는 소리 말아요. 용암에 추락해서 녹아 죽는 유저를 보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고요…… 봐요, 다시 가잖아요.”

롭이 말하던 도중 남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 그곳이 고비였던 듯 이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걷는 모습이 더욱 위태로워 보였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남자는 마침내 건너편에 닿았고, 유황 아지랑이에 가려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마법으로 이루어진 얼음 다리는 빠르게 허물어져 녹아버렸다. 부서진 얼음덩어리들이 풍덩풍덩 용암 속으로 잠수하는 것을 끝으로 기적의 순간은 끝이 났다.

“허…….”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롭 일행은 남자가 사라진 곳에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친… 진짜 대단해… 미친…….”

초우가 계속해서 같은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야, 롭……. 아까 저 사람 앞에서 우리가 대체 뭔 쪽팔리는 짓을 한 거냐?”

롭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나도 몰라…….”

여기까지 보았음에도 남자가 왜 여기에 와서 저런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잭의 콩나무처럼 움트기 시작했다는 사실뿐이었다.

[ 내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6서클 두 개로 다리 만들기를 해내다니. 정말 크게 감명 받았다고. 앞으로 그대를 더 이상 비웃지 않겠어. 그대는 존경받아 마땅해. 그런 삽질을 자청해서 해낼 수 있다니, 보통 정신이 아냐. ]

슈페리어가 얼음 다리를 건너와 건너편 땅을 밟았을 때부터 했던 말을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동굴을 향해 뛰어들어 파이어 볼을 앞에 놓은 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몬스터는커녕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 심심할 지경이었지만 동굴 밖의 결계를 통과한 직후부터 느껴지는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과 무거운 기운이 이 끝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갈수록 가중시키게 했다.

[ 그렇지만 이제 마력은 바닥을 치지? 얼마나 남았어? ]

은근한 목소리에서는 걱정보다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더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지금까지 예상치 못했던 점만 보여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자신의 예상을 뒤엎을지 모르겠다며 어찌나 재미있어 하던지 막대기를 풀어 태워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슈페리어의 말대로 사실 이제 내 마력은 앞으로 6서클 마법 한두 번이나 겨우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떨어진 채였다.

6서클을 배운 이후 계속해서 늘어나 웬만해서는 마력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그건 역시 내 낙관이었을 뿐이었나 보다. 마력을 회복시키고 갈 만한 시간이 있었다면 그래도 좋았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로그아웃을 하면 간신히 다 잡은 실마리를 놓쳐버릴 것만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슈페리어는 내가 대꾸하지 않았음에도 대답을 그리 바랐던 것은 아닌지 그 이상은 신경을 긁지 않았다. 대신 어느 정도 더 갔을 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 슬슬 뭔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까지 온 것 같으니 정신 바짝 차려. ]

말하지 않아도 나도 느끼고 있었지만 슈페리어가 직접 경고까지 해 줄 정도면 정말 지척에 다다르긴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뭐라고 대꾸할까 고민하고 있었을 때, 달려가고 있던 통로가 갑자기 확 넓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좀 넓다 싶었던 곳이 조금 더 갔을 때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굴이 되어 있었다.

일단 내가 있는 장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짙은 어둠 덕에 가시거리가 짧아 벽을 더듬으며 나아가야만 했다. 벽을 짚으면서 흙의 느낌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바닥에 닿는 것은 단단하고 약간 매끈하게까지 느껴지는 금속 같은 감각이었다. 바위가 층층이 쌓인 것처럼 가끔 울퉁불퉁하게 만져지는 요철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다.

두쿵.

‘음?’

놀라 손을 뗀 뒤 파이어 볼을 벽에 가까이 대어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검고 단단한 돌벽뿐이었다.

‘잘못 느꼈나 보군.’

괜히 놀란 것에 자책하며 다시 한 번 벽에 손을 짚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 짚고 있던 벽이 터져 나갈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큰 지진이 일어나며 바닥이 요동치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엎어져 굴렀다. 구우우 하는 음울한 울음소리 같은 진동이 온 동굴에 메아리쳤다. 고막이 찢겨나갈 듯한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낙석이 일어나 다칠까 최대한 몸을 사리기 위해 머리를 감싸고 실드 주문을 외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매직 실……!”

『 이.곳에. 생명체.가. 들어. 온. 건가? 』

땅 밑 깊은 곳에서부터 음울하게 울려 퍼지는 기이한 목소리가 주문을 외치려던 나를 멈추게 했다.

“누구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외치자 지진이 서서히 멈추면서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의지를 발했다.

『 인.간이.군. 드디.어. 약.속의 시.간인가……. 』

‘대체…… 뭐지?’

밀려들어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일어설 수조차 없어 당황해하고 있었을 때, 허리춤의 슈페리어 막대기가 환한 빛을 냈다.

[ 코르……! 코르잖아? ]

“뭐?”

난데없이 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슈페리어가 낮게 중얼거렸다.

[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말해.”

뭘 알려 줘야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기다리던 슈페리어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원하지 않는 놈만 계속해서 듣기 싫은 딱딱한 억양을 뱉어냈다.

『 인.간이여, 너에.게서 그.의 힘.이 느.껴지.는군. 』

침묵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대답을 바라는 것 같아 아직도 말이 없는 슈페리어 막대기만 한 번 쳐다본 다음 입을 열었다.

“누구 말이냐.”

안 들어도 왠지 슈페리어를 가리키는 말 같다는 느낌이 왔지만 혹시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 한번 물어보았다.

『 나.를 이곳.에 데려.온 자. 인간.이며 동.시에 9서.클의 완.성자. 』

음. 역시 슈페리어 맞는 것 같군.

“좀 마주 보고 말할 수 없나? 여긴 너무 어두운데.”

아무래도 해를 끼치거나 할 존재는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서서 안정을 되찾고 조용히 말하자 상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무슨.소.리인가. 너.는 이미 나.를 보.고 있는데. 』

“안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

『 ……그렇.군. 인.간은 작.았지. 알겠.다. 기.다려라. 』

그 후 한참 동안 그 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나는 슈페리어 막대기를 툭툭 치며 몇 번 말을 걸어 보았지만 슈페리어는 여전히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이럴 때 쓸모가 없어져서 어쩌자는 거냐?’

어둠으로 인해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공격할 수단을 절반 이상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슈페리어가 정보를 한 마디만 주어도 훨씬 좋은 상황으로 굴러가게 만들 초석이 될 수도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니.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하란 말이다. 멋대로 주절대다 답답하게 입 다물지 말고. 속으로 분노를 삭이느라 나는 잠시 어둠으로 가득 찬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기척도 없이 별안간 파이어 볼 앞으로 걸어 나온 붉은 머리칼의 청년을 보았을 때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하고라면 좀 더 편하게 대화하실 수 있겠지요?”

불빛에 비친 서글서글한 얼굴이 잘생기긴 했지만 어딘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세상 공기를 마셔본 건 5, 600년쯤 전이니 참 오랜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죠?”

“카프로스.”

“아, 카프로스 씨. 그렇군요. 아까 코르도 말했었지만 당신에게선 정말로 그의 기운이…….”

“그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혼자 주절대던 남자의 말을 끊고 물어보자 맑은 눈동자를 몇 번 깜박인 남자가 별안간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이마를 철썩 때렸다.

“소개를 잊다니. 죄송합니다. 전 미리 다 알고 오신 줄 알았지 뭡니까?”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하하하.”

시원하게 웃어젖힌 정체불명의 남자가 드디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코르의 정신체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인간다운 정신체로 대화하는 것이 본체와 대화하는 것보다 나을 거란 코르의 판단에 의해 제가 나오게 된 거죠. 그래서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코르……?”

두 번이나 반복된 이름이 방금 전 슈페리어가 외쳤던 말과 같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체 당신들은 누굽니까.”

“아, 맞다. 여기가 너무 어둡다고 하셨나요? 눈을 밝게 해 드리면 괜찮겠군요. 자. 이쪽을 보세요.”

내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이페이스로 건네는 말에 무심코 눈을 마주친 순간, 남자가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눈앞에서 번쩍 불이 일어났다. 깜짝 놀라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서서 방어태세를 갖추자 남자가 또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너무 경계하시는군요. 그 손을 떼고 주변을 좀 돌아보세요. 어떻습니까? 이제 좀 괜찮은가요?”

그 말에 천천히 손가락을 떼고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180도로 달라진 시야 앞의 장관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제 더 이상 눈앞은 어둠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여전히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모든 것을 대낮처럼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형체뿐 아니라 색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에서야 지금까지 내가 벽인 줄 알고 짚고 있었던 것이 실은 검붉은 색을 띤 거대한 생명체의 말아 놓은 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도 없이 넓은 굴 안에 거대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었다. 산이나 바다가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듯한 정적이고도 거대한 기운이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뗄 줄 모르고 쳐다보고 있는데 드디어 침묵을 깨고 나타난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두드렸다.

[ 그대. ]

“너? 아까는 왜…….”

[ 저들과 이야기할 때, 내 존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아줬으면 해. ]

“뭐?”

[ 반드시 그렇게 해 줘. 부탁이야. ]

“무슨 말이야.”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에 몇 번이나 슈페리어를 불러 보았지만 놈은 또다시 그 이후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다.

‘젠장!’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상대의 정체도 모르겠는데 정작 도우미라는 놈이 자신에 대한 함구령이나 내리고 사라진 것을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열이 치솟았으나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애써 슈페리어 막대기를 부러뜨리려는 충동을 삭이고 있는 내게 예의 그 붉은 머리 남자가 다가오며 히죽이 웃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단 표정이시네요. 이쯤 되면 아실 줄 알았는데…….”

“대체 저게 뭡니까?”

너무 커서 거대한 꼬리와 등 빼고는 보이는 것도 없는 산 같은 덩어리를 가리키며 묻자 남자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건 코르이고, 저는 코르의 정신체입니다.”

“그러니까 그 코르가 뭐냔 말입니다.”

“종족적 특성으로 대답해야 한다면, 코르는 용이지요.”

“……용?”

“네. 보시다시피 붉은 용입니다. 드래곤이라고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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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만큼 눈앞의 상황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정승조가 어째서 내 집 앞에 서 있는 것인가부터 시작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에 대한 의문과 본능적으로 치솟은 경계심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대체 왜…….’

머리는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3일 전 정승조와 내가 나누었던 혈투를 기억하는 몸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날을 바짝 세운 검 같은 시선이 피할 수 없는 추격자처럼 바로 따라붙었다.

모자 아래로 거즈나 밴드로 가리지 않은 시커먼 멍을 그대로 드러낸 정승조가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 않았어.”

“뭐?”

“죽지 않았군, 강무헌.”

그게 지금 터진 입이라고 하는 말인가 싶어 대답하지 않자 정승조가 비죽이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 듯하다가는 소름 끼치는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내 집 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세웠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내 손가락에 감긴 깁스, 여기저기 붙은 밴드와 거즈, 그리고 머리를 칭칭 감은 붕대에 오래도록 머무르다 눈을 마주쳐 왔다.

“너도 이제 깨달았겠지? 두 번은 말하지 않아. 다시는 내게 관심 가지지 마.”

손끝까지 선뜩해지는 독기 서린 목소리. 정승조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흐릿한 기억 속의 난투가 떠오르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내가 정승조를 찾아갔던 것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무작정 너를 찾아갔던 게 잘못이었던 건가?’

정승조는 정말 진심으로 이제는 나와 아무런 대화도 하고 싶지 않은 걸까.

이미 우리 둘 사이의 모든 게 다 끝났으니 되돌릴 수 없다고, 그게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정승조를 만나러 갔을 때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자신이 단숨에 아득하게 무너졌다. 내가 정승조를 정신없이 때렸던 때의 기억이 오버랩되어 속이 울렁거렸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어 어금니를 꽉 악물었을 때 정승조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말을 이었다.

“그 꼴을 당했으면 뭔가 깨닫는 것이 있었겠지. 다시 한 번 더 알량한 관심 따위를 보인다면, 그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알아?”

거침없이 다가온 정승조가 느닷없이 팔을 불쑥 올렸다. 본능적으로 긴장해 주먹이 움찔했다. 충동을 간신히 자제하고 나니 정승조의 손에 내 지팡이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 잘 알아들었겠지. 넌 머리 좋은 녀석이었잖아.”

“…….”

“그러니, 다시는…… 보지 말자.”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정승조!”

“내 이름 부르지 마.”

3년 전 그때와 똑같은 고통 때문에 나는 몇 번 숨만 힘겹게 몰아쉬다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조차 그때와 똑같았다.

‘대체 너는 왜…….’

정승조는 혈색 하나 없는 창백하니 멍든 얼굴 그대로 내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앞에 들이밀어진 지팡이를 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뻣뻣한 손가락을 움직여 가느다란 지팡이대를 하나하나 천천히 쥐어 건네받는데 정승조와 손끝이 살짝 닿았다.

“…….”

순간 나도, 정승조도 멈칫 굳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들자 마찬가지로 이쪽을 보고 있던 정승조의 눈과 제대로 시선이 마주쳐 붙잡혀 버렸다.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 너무나 낯설고도 익숙해서 목 안쪽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1초가 한 시간 같았던 잠깐의 침묵 뒤, 정승조가 손을 확 떼고는 옆으로 몸을 돌려 찬바람 느껴지도록 성큼성큼 걸어 내 뒤로 빠져나갔다.

도저히 무어라 할 수 없이 심장이 아파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이성적으로라면 당장이라도 놈을 붙잡아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삽시간에 다시 터져버린 과거의 상처가 고통스러워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는, 포기 안 한다.”

“…….”

간신히 내뱉은 작은 한마디에 뒤에서 걸어가던 이가 잠시 멈칫한 듯 느껴졌지만 곧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온 후 정승조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막 스쳐나갈 때 정승조에게서 약간의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은 듯했지만 그것이 정말 피 냄새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

정승조가 사라진 지 한참 뒤에야 긴장이 풀린 나는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더 물러서다가 누군가와 부딪치고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정승조를 본 순간 바짝 긴장하느라 어느새 잊고 있었던 진제환이 아무 기척도 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진제환의 바이크를 타고 집 앞까지 왔으며 여기까지 같이 올라왔다는 사실이 기억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 되었다. 정승조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지쳐버렸는데, 도대체 그 꼴을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진제환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정승조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내가 가장 이야기하기 싫은 비밀에 가까이 닿아 있었다. 예전부터 나를 지켜봐 왔던 사람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아직까지는 그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낭패스러움을 느끼며 대충 돌려서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진제환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방금 정승조가 지팡이를 넘겨주려 했을 때 모르고 손끝이 서로 닿았던 쪽 팔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저, 방금 일은.”

“그놈이지.”

진제환이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무표정과 침착한 목소리 그대로 말했기에 나는 잠시 동안 놈이 뭐라고 말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뭐?”

“그놈이군. 너를 이 꼴로 만들었던 게.”

두 번째로 말했을 때에는 그 덤덤한 목소리의 저변을 짙게 가득 채운 지독한 분노와 적의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저 눈동자. 바닥도 없이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평소와 다름없다고 착각하다니. 나는 방금 뭘 봤단 말인가?

기백에 당황해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자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놓은 진제환이 망설임 없이 휙 뒤돌아섰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간 진제환의 뒷모습이 계단에 가까워져서야 나는 놈이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지 간신히 깨닫고 지팡이를 짚을 생각도 못한 채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잠깐. 어디로 가려고 그래.”

걸음을 멈춘 진제환이 내 쪽을 흘긋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놈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말인즉슨 지금 당장 정승조를 잡으러 갈 테니 말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제환은 그 말만 남긴 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진제환이 정승조를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난간을 붙잡고 버럭 소리쳤다.

“기다려! 너와는 아무 상관 없잖아!”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등을 향해 외치자 진제환이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더니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내 일이야. 이 일은 그 녀석과 나 사이의 일이라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나설 일이 아니야. 지금 네 행동은 명백한 참견……!”

중간에 말이 끊긴 것은 내 쪽으로 똑바로 돌아서서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 진제환 때문이었다. 내 앞까지 다가와 차갑게 끓어오르는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진제환이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만 느리게 움직였다.

“상관이 없다고?”

무시무시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안의 감정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상관이?”

그러고는 불꽃이라도 튈 듯 격렬하게 핏발이 선 눈으로 진제환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널 상처 입힌 놈에게 화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상관없는 사람이었다고?”

“뭐……?”

“네 일, 그래…… 그 말은 맞아. 하지만 너는, 네게 소중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걱정하지 않아? 화내지 않는 건가?”

소중한, 뭐라고……? 말을 잃고 있는데 진제환이 어금니를 꽉 악물며 불꽃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다른 사람은 걱정이 되더라도 나는 안 되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나는 처음 택시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너를 보았을 때부터 이 분노를 계속해서 참아왔어! 그런데, 상관이 없다고?”

어느새 놈과 나의 얼굴이 서로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이쯤 되니 나도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의 핵심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화를 내는 놈 때문에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네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내가 한 말은 너와 내 이야기가 아니고, 네가 지금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그만두라고 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라는 거냐. 상관이 없으니까 가지 말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네게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자식이 정말!

“그게 아니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 일에서만큼은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다른 이의 간섭 같은 건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간섭을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게 있어!”

분노를 참고 제발 좀 뜻이 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힘주어 말하자 주먹을 쥔 놈의 팔뚝에 선 힘줄이 꽉 솟아오르며 어두운 음영이 졌다. 이를 악물고 감정을 참아내기 위해 노력하려는 듯했던 진제환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외쳤다.

“그럼 내 마음은. 내 마음은 네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건가? 그래?”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 진제환은 결국 격렬해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 머리 옆의 벽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둔탁한 울림이 복도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안 그래도 그리 좋지 않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머리 옆 벽에 꽂혀 있는 주먹을 바라본 뒤 천천히 진제환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날 위협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남자와 남자의 대화에서 말로 하려던 노력이 사라졌다면 남은 건 주먹뿐이다. 안 그래도 아까 전부터 놈의 말이 핀트가 하나도 맞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초조한 신경이 갉작갉작 거슬리고 있었는데 이 주먹질은 거기에 제대로 불을 붙여준 격이었다.

서서히 나도 화를 참고 있던 인내심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제환이 왜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가 반복해서 부탁하는데도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상관도 없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은 부분까지 배려해 주고, 진중하게 기다릴 줄 안다고 생각했던 놈이 보이는 처음 보는 태도가 낯설었다.

나는 놈이 지켜주어야 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지금까지도 내 일은 내가 잘 처리해 온 사람이다. 아무리 내게 정도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말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이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추정한 정승조에게 달려가는 건 뭐란 말이냐. 가서 뭘 하겠다고?

다행히 먼저 말을 않는 것을 보면 진제환이 정승조의 얼굴이 시저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그 문제를 제외하고도 정승조는 아직 내게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 말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방금 본 일만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한 것뿐이잖아!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만!”

진제환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화가 난 내 눈에는 그 얼굴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답답하게 앞에 버티고 서서 내 머리 옆 벽을 짚고 있는 놈의 주먹 쥔 손목을 잡아 밀쳐낸 다음 옆으로 몇 발짝 물러났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진제환이 노려보고 있던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참 만에야 놈이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나는 그 상처 입은 기색의 목소리를 분노를 참느라 조용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내 일에 간섭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널 절대 이해 못 할 것 같다.”

주먹을 꽉 쥐고 내뱉은 말에 진제환이 번개라도 맞은 양 눈을 크게 떴다. 폭발하던 격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서서히 얼음 같은 무표정이 얼굴 위로 뒤덮였다.

진제환은 한참 뒤에 천천히 흰 이를 드러내며 무언가를 되뇌었다.

“참견…….”

“뭐?”

“간섭.”

“…….”

“그게 네 진짜 생각이고 대답이었던 건가.”

너무 낮은 목소리라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지만 진제환은 말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복도에 차가운 침묵만 흘렀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햇빛이 우리가 등지고 서 있는 벽까지 늘어져 어른어른 어둡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평소와 같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드디어 좀 진정하고 말을 알아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좀 말이 통할 만한 상태로 변한 듯해 나도 서서히 ‘들켜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사그라졌다. 머리가 좀 식자 방금 전에 다급하게 질렀던 말들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네겐,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그놈과 관련된 일이 내겐…… 중요해.”

“…….”

“정말로… 중요하다. 아직은, 설명을 못 하겠지만…… 나중에는…….”

그러나 과연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방금 보았던 정승조를 생각하자 자신이 없었다. 뒷말을 흐리며 말을 맺었을 때, 진제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요한 것 같군.”

이제야 좀 의사소통이 되는 건가? 겨우 안심하려던 찰나 한마디가 더 들렸다.

“하지만 필요 없어.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낮은 목소리는 지금까지 놈이 했던 모든 말 중에서 가장 차갑고 서늘했다. 나는 잠시 멍해져 있다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너, 이……!”

삐리릿. 삐리릿. 삐리릿.

이 자식이 결국은 아까 하던 영문 모를 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화를 내려 했을 때 진제환의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없이 휴대용 VT메신저 기기를 꺼내 든 진제환이 빠르게 안의 내용을 훑어보고는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가 도로 차가운 빛으로 가라앉혔다.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은 놈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강무헌.”

이 녀석에게 성까지 붙여 불린 것은 처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상황에 맞지 않게 먼저 떠올랐다. 진제환이 여전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두운 계단 그늘 밑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 그런 말에는 상처를 입는 것 같다. 네가 원하는 대로 오늘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군. 소란을 떨어서 미안했다. 그럼.”

평소의 느릿한 말투와 달리 차갑고 매끄럽게 말을 끝낸 진제환이 내가 부르기도 전에 곧바로 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빠르게 걸어 내려가는 뒤통수가 잠깐 보이다 곧 사라졌고, 몇 분 뒤 건물 바깥에서 시동이 걸린 바이크의 엔진 소리가 났다.

그리고 놈이 떠났다.

나는 몇 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홀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진제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말에는…… 상처를 입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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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는 어두운 병실 바깥에 홀로 서 있었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병실 안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이 호흡기에 의지한 채 몸에 연결된 수많은 기계 속에서 규칙적인 기계음을 통해서만 간신히 자신이 살아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장제천, 33, 男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쓰인 이름판이 침대 머리맡에서 파랗게 빛났다. 그 잠든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모습을 고요히 내려다보는 윤석호의 어둡고 서늘한 눈동자에는 평소의 유들거림이나 밝음 따위라고는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잠들어만 계실 겁니까, 실장님.”

자조적으로 내뱉은 뒤 상대가 대답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윤석호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유리창에 손바닥을 올렸다.

“백설 공주 노릇도 정도껏 해 주셨으면 했는데…… 역시 그냥 제 바람일 뿐이었나 봅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지만 정작 그 얼굴은 잔뜩 피곤에 절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이 만들고 싶어 했던 게임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신가 보죠? 보여 드리고 싶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말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다 나았는데, 넋은 어디를 방황하시는지 돌아올 줄을 모르니 기다리다 숨넘어가겠습니다.”

그 이후에도 윤석호는 대답 없는 이를 상대로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군요. 알고 계시겠지만, 다들 실장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다리고 있는 건…….”

진지하게 말하다 문득 반응 없는 이에게 속삭이는 자신이 우스워진 듯 자조적으로 피식 웃은 윤석호가 말을 이었다.

“……저입니다, 선배. 그것만큼은 일어나셨을 때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병실을 나서기 전까지도 그의 시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윤석호가 나가고 난 뒤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한 침대를 비추는 유리창에 나 있던 하얀 손자국이 서서히 지워져 갔다.

윤석호가 나온 병원 정문 앞에서는 장명진 실장이 사복 차림으로 벽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두 남자는 서로가 무엇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아는 자들의 표정으로 맥없이 병원을 나서서 차에 올라탔다.

“언제 오셨습니까? 미국에서 빨라야 어제저녁에나 출발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은 좀 어때.”

대답은 하지 않고 자기 질문부터 하는 장명진을 바라보며 윤석호가 피식 웃었다.

“똑같습니다.”

장명진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 연기만 허공에 뿌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윤석호가 먼저 평소처럼 태도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이사들 측은 요즘 어떻습니까?”

“그쪽도 똑같지.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까. 여전히 돼지 같더군.”

윤석호의 태도에 전염된 것처럼 장명진도 평소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답했다.

“회장님은 건강하십니까?”

“뭐 그렇지. 새로 뜨는 여배우와 염문을 뿌릴 정도로 건강하시더군.”

“그건 좀…… 과도하게 건강하시군요.”

윤석호의 말에 장명진이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지만 곧바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메이지 소프트라고 했던가. 그들은 아직 별다른 행동이 없었고?”

“아직까지는 그런 것 같더군요. 시기상으로 보면 이제 곧 뭔가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대로 처리해. 꿈의 증명도, 관문의 통과도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만에 하나라도 방해꾼들이 끼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니까.”

“물론이지요.”

“비록 새턴의 아래로 들어왔지만 우리의 이름은 아직 여전히 ‘Project M’ 안에 있다는 걸, 나는 항상 잊지 않고 있어.”

새턴사의 한국 지부 건물 앞에서 차가 멈추기 직전, 장명진은 문득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윤석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나는 예약해 놓은 호텔에 먼저 들렀다가 이곳으로 올 테니 그때 보지.”

“알겠습니다.”

윤석호를 내려놓은 검은 차는 배기음과 함께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윤석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서서 새턴 한국 지부사의 건물로 들어갔다.

쌍둥이처럼 이어져 있는 두 채의 건물 중 오른쪽으로 들어서자 세련된 건물 내에 벽마다 판타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건물이나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밑에 적혀 있는 한결같은 THE MIST라는 글자는, 이곳이 새턴 사가 내놓은 현재 명실상부한 최고의 게임 THE MIST와 관련된 곳임을 바로 알 수 있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타자 먼저 타고 있던 많은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윤석호에게로 쏠렸다. 한 나라의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워낙 얼굴마담처럼 언론 매체에 모습을 많이 드러내 보였던 탓에 일반 직원들은 물론이고 아르바이트생들까지도 윤석호가 누구인지 대부분 다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상사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지부장 자리에 앉은 사내에 대한 동경도 윤석호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눈빛들이었다.

- 3층입니다.

평소였다면 꼭대기 층인 7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겠지만 이번에 그가 내린 곳은 3층인 GM 부서, 운영자들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망설임 없이 내려 어딘가로 걸어가는 윤석호의 뒤를 따라 슬금슬금 내린 사람들이 넋을 놓고 있다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웬일이야. 영자 알바 4개월째에 지부장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진짜 잘생겼다.”

“소문에 의하면 애인이 없다는데, 정말일까요?”

“꿈들 깨세요. 그런 건 다 대외적으로 하는 말일 게 뻔하잖아요.”

수다를 떨던 이들이 찬물을 끼얹으며 지나간 동료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 누가 진짜 사귀고 싶대요? 매일 밤샘 야근하는 새끼영자 처지에 이런 얘기라도 해야 숨을 돌리죠!”

THE MIST는 그 큰 규모답게 관리자 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관리운영부서 직원의 수가 새턴의 모든 부서원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란 말이 우습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워낙 운영자가 많이 필요하다 보니 새턴 측에서는 유저들의 소소한 문의를 처리해 주는, 사소하지만 가장 인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은 대부분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하여 맡기고 있었다. 이런 아르바이트 운영자들을 부서에서는 새끼영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소하기는 제일 사소하다는 이 일이 처리해야 할 가짓수는 얼마나 많은지, 해결을 해도 해도 매일 쏟아져 나오는 문제 때문에 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시간이 모자라 캡슐 내에서 긴급 투여되는 영양분을 맞는 일이 허다했다.

“아, 오랜만의 눈보신이었는데, 이제 또 일하러 가야 하다니. 정말 지긋지긋해요.”

“전 이 후줄근한 반팔 티 좀 갈아입고 싶어요! 이게 뭐야 정말.”

“어차피 캡슐에 들어가서 게임에 접속하면 알아서 운영자 유니폼으로 바뀌잖아요. 그냥 편한 게 편한 거겠거니 하고 참아요.”

“어휴, 이제 또 접속하면 한동안은 먹을 것과는 안녕일 테니 미리 커피라도 뽑아 먹고 가요.”

“그럴까요?”

한숨을 쉬며 그녀들이 휴게실로 향하고 있을 때, 아까 윤석호 지부장이 갔던 길 쪽으로 바쁘게 뛰어가는 남무건 GM 3팀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한창 캡슐 안에서 일하다 나왔는지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그녀들의 상사였으며, 동시에 게임 내에서는 미스트 대륙 동부 지방 전체를 관리하는, 인간 같지 않은 일을 소화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새끼영자들에게 친절해 인기가 꽤 좋았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유명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유명한 소문은…….

“조금 전 분명히 남 부장님이었죠?”

“방금 거긴 윤석호 지부장님이 갔던 방향이잖아요?”

“저기로 가면 그…… 뭐더라? 영상통제회의실인가 하는 곳이 있지 않아요? 평소엔 아무도 안 가는 거기요!”

“어머, 어머머머! 웬일로 지부장님이 이런 폐인 소굴에 행차하셨나 했더니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인가 봐요.”

사실 새턴 직원들에게는 윤석호 지부장이 일하다 말고 자주 남무건 부장을 불러들인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 있었다. 이 소문은 지부장 비서실에서 흘러나온 소문으로 알려져 신뢰도를 더했다.

그간 사내에서 내로라하는 미인들의 추파에도 한 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윤석호 지부장이었던지라, 이 소문은 곧 윤석호가 실은 남자에만 관심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괴담으로 발전했다. 사실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윤석호 지부장에게 대시했다가 깔끔하게 차인 이들의 분노에 있었지만 사람들이란 그런 뒷배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법이었다.

남무건 부장이 뛰어간 복도 쪽을 바라보며 원래의 목적인 커피도 잊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던 이들은, 잠시 후 지나가던 선배 사원에게 휴식 시간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일은 안 하고 뭘 하고 있는 거냐며 크게 한 소리 들은 후 풀이 죽어 끌려갔다.

한편 그 시각, 남무건은 자신이 지나간 뒤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줄은 상상도 못한 채 영상통제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취직한 후 매일 캡슐 속에서만 살다 보니 고작 이 정도 뛰었다고 숨이 가빴다. 신경질적으로 목에 건 사원증을 잡아당겨 인식기에 가져다 대자 붉은 레이저 빛이 깜박인 뒤 인식을 완료했다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여유 만만한 표정의 윤석호 지부장이었다. 깔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이 오늘도 눈꼴시게 단정했다.

“부른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오는 건지 모르겠군. 군기가 빠졌어.”

“장난하십니까?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을 느닷없이 호출해서는 3분 안에 여기로 오라니! 이런 식으로 부를 거면 아침에 미리 연락을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나? 오늘은 아침부터 중요한 곳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연락할 시간이 없었지 뭐야.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지?”

“…….”

그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태연한 말투에 남무건이 부르르 떨며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지만 윤석호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만 둘러볼 뿐이었다. 결국 남무건은 언제나처럼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그의 스위트 허니 엔젤 소영 씨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진정하려 애써야 했다. 그가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자 기다렸다는 듯 윤석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밑도 끝도 없이 뭘 말입니까?”

“그거 말이야, 그거. 저번에 살펴보라고 했던 것. 기억 안 나나?”

“저번에라니, 저번에는 그냥 평소처럼 ReL 프로젝트 대상자들의 근황만 보고받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지부장님하고 나눈 이야기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 아.”

분통을 터뜨리려던 무건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움찔하고 말을 멈췄다.

“설마…….”

이전에 윤석호에게 ReL 프로젝트 대상자들의 근황 보고가 끝나고 나서 나가려 했을 때, 그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하나 있었다.

「남 부장. 요즘 부하 직원들과는 잘 지내나?」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일도 좋지만 부하 직원들도 잘 살펴 주게. 주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지 않겠나? 나처럼 말이네. 하하하.」

…그때는 솔직히 늘 하던 헛소리 중 하나라 생각해 대충 대답하고 머릿속에서 바로 지워버렸었다. 그런데 그 말에 설마 제가 모르는 다른 의도라도 숨겨져 있었던 것인가?

윤석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억났나 보군.”

“부하 직원들이나 잘 살펴 주라고 하셨던… 그거 말입니까?”

설마, 그건 아니지? 싶은 마음을 표정에 여실히 드러내며 물었지만 윤석호의 미소는 더 짙어지기만 했을 뿐 변화가 없었다.

“그래. 그거.”

“멀쩡한 직원들은 갑자기 왜……?”

여태까지 몇 번이나 진의를 알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었지만 이번이 그중 단연 톱이었다. 무건의 어이없어하는 물음에 윤석호는 말없이 한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알겠나?”

“리…모컨입니다만?”

“아니, 그거 말고 앞에 켜 놓은 것 말한 건데.”

무건이 민망해하며 황급히 앞쪽을 바라보자 언제 켰는지 대형 VT화면이 회의실 전면을 입체적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피함 때문에 얼굴이 목까지 벌게진 무건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석호가 입을 열었다.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법이지. 보시다시피 말이야.”

유들유들한 말투와 달리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 응시하는 화면에는 누군가가 GM관리운영부서의 자료를 일부 개인적으로 빼내 갔다는 증거가 담긴 보고서가 떠 있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오가는 부서라 더없이 헐렁해 보이지만, 실은 GM관리운영부서만큼 철저하게 관리되는 부서도 없었다. 심지어 게임의 핵심부서라 일컬어지는 VT 프로그램 개발부서에 설치된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보안추적 프로그램을 심어 놓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모두 윤석호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무건은 충격 받은 얼굴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마지막으로 정보를 빼내 간 것이 18일로 추정된다면 고작 일주일 전 아닙니까.”

“몇 번 해 보니 들키지 않을 것 같아 자기 실력에 기고만장한 모양이지. 마지막으로 빼내 간 날로부터 오늘까지 일을 그만둔 GM부서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범인은 아직도 여기 있을 가능성이 커.”

“그…… 그러면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빼내갔는지도 알 수 없는 겁니까?”

당혹스러워하는 무건의 말에 윤석호가 묘한 미소를 띠고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물론 알 수 있지. 사실 나는 한 달 전부터 이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까지 기다려 왔네. 왜 그랬을까?”

“예?”

요즘 머리가 많이 굵어져 윤석호의 말에 사사건건 대들었던 남무건도 이 말을 듣는 순간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이를 알면서도 방치했다니, 그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인가?

“사실 놈이 가져간 자료는 전부 모양만 그럴듯한 쓰레기들이야. 우리에겐 전혀 쓸모없지만 놈들은 착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네. GM부서의 컴퓨터들에 설치된 보안 프로그램들엔 특별히 그런 기능을 심어 놓았거든.”

“아, 그…… 그래서…….”

간신히 졸아드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안도의 한숨을 쉰 무건에게 윤석호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기다리다 마지막이었던 일주일 전에는 미끼를 뿌려놓았거든. 특별히 그럴듯한 놈으로 말이지.”

“그럴듯한 놈이라니요?”

“‘GM부서에 설치된 운영자용 접속캡슐에 대한 점검일지.’ 실질적으로 THE MIST의 캡슐 기술에 대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군.”

“예?!”

무건은 그 순간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일이 잘못될 시 지부장이라 해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소지가 충분할 만큼 위험했다. 능력 있는 윤석호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지금 잘리면 몹시 곤란한 사람이었다. 장점이라곤 성실함 하나뿐인 제가 어디 가서 이런 직장을 또 잡을 수 있겠는가?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아 사랑하는 스위트 허니 엔젤과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이 암담해지고 연인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오빠. 우리 엄마가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려와 보라더라. 다음 달에 어때?」 어때?… 어때?…….

‘으아아아아!’

“……그래서 자넬 부른 거야.”

“으아악……! ……예?”

“뭐야. 원맨쇼 중이었어?”

윤석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건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렸다.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고 뛰쳐나가 그냥 평범한 사원으로서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그런 그가 조금쯤은 안쓰러워 보였는지, 윤석호가 답지 않게 두 번 말해 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때 뿌린 떡밥에 드디어 어제 물고기가 걸렸더군. 예상했던 물고기라 별로 놀랍진 않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슬슬 우리도 움직여 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자넬 불렀다고 말했어.”

“아…….”

멍청하게 대답하는 무건을 향해 윤석호가 매력적인 눈웃음을 뿌렸다.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부터 나가서 그놈을 찾아. 방금 본 보고서는 나중에 VT Disk에 담아 보내주겠네. 물론 그동안 GM부서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의 퇴사 신청은 수리하지 말도록. 그 정도 요령은 있겠지? 기한은 이 주일 주지.”

“제가 혼자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GM부서에 사람이 어디 한두 명입니까?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평소에 부하 직원들을 잘 살펴보라고 했잖나.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자네 재량이야.”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사원들과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으앗!”

필사적으로 변명하던 무건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면을 꺼버리고 다가오는 윤석호의 그림자 때문에 흠칫 놀라 물러설 뻔했다.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무건의 귓가 쪽으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져다 댄 윤석호가 무건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내에서 인기만 좋던데, 거짓말하지 말고 2주 후에 데려와. 안 그러면 뒷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자네의 소영 씨 말이야. 다음 달에 상견례를 하자고 말했다면서?”

“그걸 어떻게……!”

“글쎄.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귀신이라도 만난 듯 기겁하는 무건의 귓가에 윤석호가 웃음바람을 훗 불어넣은 뒤 그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잠시 동안 귓구멍에 불어넣어진 바람 때문에 소름 돋는 간지러움으로 괴롭게 전율하던 무건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윤석호의 뒤를 따라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그, 그건 저하고 소영 씨만의 비밀인데 대체 어떻게…….”

윤석호는 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요즘 많이 대들더니, 한동안 조용하겠군.”

이제 그가 기다릴 것은 낚싯대에 걸린 줄도 모르고 줄이 허락하는 끝까지 헤엄쳐 갈 물고기의 행방과 2주 뒤 무건이 물어올 겁 없는 스파이의 정체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진제환의 마지막 말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그런 말에는 상처를 입는 것 같다.」

오늘 처음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는 놈을 보았을 때만 해도 헤어질 때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차라리 오늘 만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었을까?

그러나 정승조가 이곳까지 와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놓고 간 물건을 돌려주러 온 척했지만 실상은 마지막에 속삭였던 그 한마디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더 이상 만나려 하지 말라는 어두운 경고를.

정승조와 나는 이제 고작 한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인데, 서로에게 남은 것은 3년 전의 상흔에 더해진 깊은 상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으니 포기할 수야 없겠지만 정승조를 볼 때마다 힘든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과 사부님께도 잘 들어왔다고 전화를 드려야 하고, 내가 없었던 3일간 THE MIST에 무슨 변화는 없었는지도 알아보아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도 마음도 한계까지 지쳐 무엇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소파에 누운 채 올려다본 창문 밖에서 마지막으로 내리쪼이는 진홍의 햇살이 얼굴을 할퀴며 사라져 갔다. 천천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혼자 사는 집은 늘 그렇듯이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이럴 때면 나는 이 집 전체가 내 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멍하니 있으려니 1년 전 THE MIST를 시작하기 전 같았다. 매일이 조용하고 삭막했던 나날들.

‘하지만 그때와는 이제 다른데…….’

새로 한 발짝 한 발짝 디디는 길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옛날의 내가 어떻게 친구들을 대하고 사람들을 대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는 굳이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도 잘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네게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몸을 뒤척이려다 또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 때문에 멈칫했다. 그래. 이 말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진제환은 왜 자꾸 상관이 없다는 말만 반복해서 물었을까?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은 정승조와의 일을 진제환이 아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일은 못 본 척 관심을 꺼 달라는 의미였는데, 진제환은 그 말을 아무래도 이상하게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누가 놈과 내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라고 말하기라도 했느냔 말이다. 사람 대 사람의 사이를 지칭하는 그 관계가 아니라는 걸 몰랐을까?

내가 오해할 만하게 말한 점이 있더라도 원인의 절반 정도는 그 녀석 때문도 있을 것이다. 진제환은 정승조가 내 상처를 만든 장본인이냐고 묻자마자 앞뒤 재지도 않고 무작정 뛰쳐나가려 했다. 뒤따라갈 수도 없는 이 몸으로는 소리쳐서 붙잡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만약에 그게 정승조가 아니었다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역시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만 생각나는 뒷모습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축 처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우리는 확실히 싸운 건가? 내가 잘못한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머리가 아프다…….’

나 혼자서는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차라리 수련처럼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해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볼 수 있는 상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전에 주열 형의 조언을 받아 생각이 바뀌었던 때에 깨달았던 점이었다. 형은 누구나 혼자서는 벽에 부딪히는 때가 오며,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충분히 조언과 도움을 받아도 되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럴 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필요해.’

눈을 가린 양 손가락 너머의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먼저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보고 조언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이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생각난 상대인 주열 형은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말하기 가장 편안한 상대였지만 최근에 보냈던 음성 메시지에서 요즘 직장이 바쁜 시즌이라며 투덜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부님은 아무래도 부모님 같은 분이라 이런 사적인 고민에 대해 말씀드리기 껄끄럽다.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보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친구가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그동안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여전히 좁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을 때, 한 얼굴이 문득 크게 떠올랐다. 그 녀석은 나와 달리 밝고 편안한 상대이지만 과연 이런 일로 연락을 해도 될까? 그러나 의문을 토하는 머리와 달리 입은 이미 컴퓨터 전화기를 부르고 있었다.

“컴퓨터, 음성 전화 모드로. 수신번호는…….”

“카프, 아니. 무헌아? 정말 네가 건 거야?”

잠시 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응.”

전화를 한 번에 받아 줘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바로 포기하고 혼자 날이 새도록 고민했겠지.

“무슨 일이야? 네가 설마 내가 낸 수수께끼를 벌써 풀었을 리도 없고…….”

“수수께끼?”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반문하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훅 한숨을 쉬었다.

“기억 안 나? 내가 가기 전에 말했던 거. 아, 섭섭하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말한 건데 예상은 했지만 그러면 안 되지.”

“…….”

드물게 무척 풀죽은 말투라 괜히 걸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 녀석이 언제 그런 말을 했었던가 싶어 서둘러 기억을 더듬어 보니 토렐리트로 떠나기 전 녀석이 했던 말이 좀 희미하게 기억이 날 듯도 했다. 요즘 너무 일이 많아 잊고 있었나.

“……그래. 미안하게 됐다.”

“컥? 컥, 쿨럭! 크헉, 컥!”

오늘따라 대체 왜 이런가 싶었다. 일단 먼저 사과하자 예상치 못했던 듯 요란하게 사레들린 소리를 내던 전화 저편에서 한참 만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너, 너 무슨 일 있지! 어서 말해!”

“크란…….”

전혀 변하지 않은 말투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언제 헤어졌냐는 듯이 대해 주는 태도가 아까 완전히 변했었던 누군가의 태도와 대비되어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목소리 상태가 전에 너 때문에 나 죽었다고 삽질하던 그때처럼 그러냐고. 얼른 말해 보라니까.”

크란, 정민후가 펄펄 뛰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지금만큼은 그것이 짜증 나거나 웃기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기 위해 전화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을 정도로 울렁거리는 초조함이나 불안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을 때 민후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대답도 못 할 정도야? 알았어. 내가 갈게! 기다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 상대편에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총 통화 시간 2:51. 삐-삐-삐- ]

“…….”

잠시 말을 못 한 사이에 무엇을 지레짐작했는지 민후가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잠시 황당함에 휩싸였지만 곧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래. 크란은, 정민후만은 내가 친구로서 사귄 사람이 맞겠지.

인터폰 소리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이미 밤이 한창 깊은 시간이라 정말 정민후가 올지 의문이 들었었는데 놈은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미안할 정도로 급하게 달려왔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차림새로 집 안에 들어섰다.

“헉, 헉. 늦어서 미안. 밤이라 건물 찾기가 어렵더라고. 그런데 왜 집 안 불이 다 꺼져 있는 거야?”

연한 금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표정이 유머러스해 보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켤 거야. 들어와.”

드디어 집 안 불을 다 켜자 내가 3일 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 맞긴 하구나 싶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이라도 마시겠어?”

“어?”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아직까지도 숨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녀석에게 일단 물을 권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집 안을 둘러보던 것을 멈춘 민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답보다 먼저 비명을 토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 붕대는 다 뭐야!”

그때에서야 내가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못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이마에 감긴 붕대를 난감하게 문지르는데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민후가 오른손을 잡아챘다.

“이건 또 뭐야…… 너 손가락 부러졌어? 목은 또 뭐야 이게……!”

연신 더듬거리며 손가락에 낀 깁스를 만져대던 놈이 목에 붙인 거즈까지 발견하고는 눈에서 불꽃을 튀길 듯 부릅떴다. 동시에 손을 잡은 힘이 거세져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음…….”

“미안. 아직 아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새어 나간 신음 소리와 찡그린 표정을 본 민후가 흠칫하며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잔뜩 굳은 눈은 반드시 이 일에 대해 먼저 들어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별것 아니야. 일이 생겨서 나갔다가 사고가 좀 있어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온 것뿐이니까.”

“사고?”

민후가 어디를 봐도 훌륭하게 싸움질을 하다 온 상처가 분명한 흔적들을 불신의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네가 그렇게 보면 어쩔 테냐 싶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마주 쳐다봐 주자 속이 타 죽겠다는 듯한 한숨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거짓말하지 마. ……누구야? 어떤 놈이랑 병원까지 다녀올 정도로 그렇게 싸운 건데?”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는 놈의 표정에서 서서히 바보스러운 다정함은 사라지고 날카로움이 가득 찼다. 나는 이 표정을 일찍이 미스트에서 함께 다닐 때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아차리려던 순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차가운 척을 했을 때도 그랬고, 실력 차이가 나는 시저를 향해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들 때도 민후는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을 고압적으로 내리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꾹 다문 입가까지…… 평소의 상냥함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냉정한 얼굴이 내가 아는 놈 같지가 않아서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사고였어.”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지만 민후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사고가 아니잖아. 누가 사고로 그런 상처가 나?”

“나 너한테 이 이야기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다.”

“무헌아.”

아까는 진제환이 그러더니, 이 녀석까지도 똑같은 걸 묻는다. 정민후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다 금방 해결될 듯한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아까의 모든 화까지 다 합친 울컥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내가 너한테 관계없는 일이니까 신경 끄라고 말하면 너도 상처 입었다고 가버릴 거냐? 그래?”

“…….”

순간적으로 언성을 높인 뒤 나는 금세 극심한 후회를 느끼며 이를 꽉 악물었다.

‘……실수했다.’

진제환 때의 상황과 겹쳐진 바람에 자제를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을 최악의 날로 지정해야 할 것 같았다. 기껏 찾아와 준 녀석에게 소리부터 지르다니. 정말 최악이다. 아까부터 그랬지만 계속 평소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웠다.

‘자제를 할 수가 없어…….’

“저…….”

후회와 함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민후 쪽으로 돌아서서 사과를 하려고 했다.

내가 오늘 안 좋은 일이 많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돌아선 곳에 서 있는 정민후의 표정을 본 순간 그 말은 나오지도 못한 채 목에서 걸려 사라졌다.

“……누가 그랬는데?”

나는 정민후가 진심으로 화난 얼굴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누구처럼 폭발하듯이 화를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과 담담한 말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는 나조차도 한순간 입을 열 수 없게 했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하고 갔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을 하면서 척척 걸어 다가온 민후가 망설이지도 않고 내 어깨를 잡아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미안하다. 내가 말실수를 했어.”

“그래, 좋아. 그러면 ‘누가’ 그런 말을 하고 갔는지는 묻지 않을게. 하지만 그 말이 오늘 네가 나한테 전화한 이유와는 상관이 있는 거지?”

나는 또다시 대답할 말을 잊었다.

“어떤 놈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사고’ 때문에 네가 다쳤어. 그런데 제2의 다른 놈이 와서 나하고 비슷한 질문을 한 거야? 너는 대답하기 싫어서 관계없으니까 신경 끄라고 말한 거고? 흠, 그랬더니 그놈이 상처 입었다고 한 건가? 이거 맞아?”

“…….”

등골이 다 오싹할 뻔했다. 내 부러진 쪽 팔을 살짝 쥔 채 그때의 상황을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민후의 목소리는 일견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했다.

시간이 조금 흐를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피할 수 없는 대답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민후는 내 표정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마치 여기서 자신이 놓친 증거는 없나 살펴보는 경찰 같은 눈초리였다. 결국 울렁거림을 참지 못하고 눈을 찡그려 감아버리자 한참 만에야 긴 한숨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무헌아, 나 좀 봐.”

나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모든 걸 다 들켰다는 기묘한 허탈함과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만 했다.

“왜.”

“나는 말이야, 네가 이렇게 작아져 있는 걸 보려고 온 게 아니야. 내가 너 힘든 데 더 보태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런데 네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좀 화가 난다. 왜 그럴까.”

마지막 물음은 나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알려 주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생각에 잠긴 듯한 민후의 얼굴이 보였다. 전에는 같은 남자로서 짜증 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에 진 깊은 그림자가 평소에 주었던 선한 인상 대신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민후는 마침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카로워졌는지는 알 것 같다. 하지만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의 마음도 알 것 같아.”

“……알겠다고?”

“나 말이지, 너를 보면 가끔 나한테는 말해 주지 않을 비밀들로 스스로를 겹겹이 감싸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모른 척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참았는데…… 아마 그건 나 말고도 널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렇게 행동했을 거야. 나도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너한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을 테니까.”

당혹스러울 정도로 뜻밖의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네가 다친 건 그런 말해 주기 싫은 것들과 관련되어서겠지? 아. 내 추측일 뿐이니까 너무 티 내는 표정은 짓지 마. 어쨌든 카프, 아니. 무헌아. 네가 아까 나한테 화냈던 건 너한테 그런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는 놈 때문이야?”

민후는 이번 질문만큼은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 듯했다. 나는 한참 동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민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다렸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응. 그러면 이제 그놈이 왜 너한테 그런 말을 하고 갔는지 내 추측을 말해 줄게. 아마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무헌아, 넌 혹시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있어?”

“……뭐?”

저도 모르게 입에서 반문이 튀어 나갔다. 민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내 표정을 바라보며 묘하게 어두운 얼굴로 웃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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