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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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성 보호 스킬을 쓸 줄 알면 사막의 햇볕을 자동으로 막을 수 있다는 내 말을 들은 형은 무척 기꺼워했다.

“아니, 그 쓸모없는 스킬이 이런 때 쓰이다니.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다행인걸? 그럼 난 그 물약인가 하는 거 안 사도 되는 거냐?”

“……응.”

“하하핫, 그럼 거기 들렀다가 바로 사막으로 가자. 그 물약 살 수 있는 곳은 어느 쪽에 있어?”

“이쪽으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한쪽 방향을 잡아 앞서나가자 형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따라왔다. 예전에 에데니아의 집에 갔던 기억을 더듬어 큰길에서부터 길을 짚어나가기 시작하자 얼마 후 기억에 남아 있는 무하람 가의 저택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꽤 큰데. 가게라기보다는 어쩐지 집 같다?”

집 맞아, 형.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나는 먼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계십니까.”

몇 번 더 쿵쿵쿵 두드린 뒤 적당히 사람이 나올 만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안에서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오늘은 왠지 익숙한 손님이 찾아올 것 같더라니.”

에데니아. 죽음의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물약을 파는 약재상이자 사막의 숲에 사는 엘프들의 조력자이기도 한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우리를 맞이했다.

“들어와요.”

잘 모아 한쪽 어깨에 늘어뜨려 느슨히 묶은 갈색 머리칼조차 그대로인 것을 보자 예전에 크란과 찾아왔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어쩐지 조금 그리워졌다. 에데니아의 집은 안쪽도 변함없이 여전했지만 달라진 것이라면, 전에는 엘프 시라비 렌이 들어가 있었던 곳 문 앞에 쳐져 있던 발이 위로 말려 올라가 묶여 있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이쪽 마법사님은 한 번 봤으니 알겠는데, 뒤에 있는 새로운 분은 누구시죠? 아주 멋있게 생기셨네요.”

에데니아가 키온 형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농밀한 매력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관심 어린 눈길에 형이 눈을 몇 번 빠르게 껌벅거리더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무척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하하 하고 기운차게 웃으며 한다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뭐…… 다들 절 보고 그렇게 말하던…….”

“이분은 제 동료이자 형이십니다.”

형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가며 재빨리 소개를 해 주자 에데니아가 어머 하고 양손을 맞잡았다.

“그분도 숲에 가시려는 분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형은 내가 왜 갑자기 자기 말을 자른 것인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저 시선을 계속 에데니아 쪽으로만 향하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러면 카프로스 님처럼 저분도 렌에게 자격 증명을 받으셔야 해서 오신 건가요?”

음…… 형은 교단 자체에서 이루미네의 숲으로 가라고 정확히 지적해 줬다니 아마 아니겠지? 하지만 시라비 렌이 있다면 만나서 확실히 이야기를 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마…… 아닐 겁니다. 시라비 렌은 지금 없습니까?”

드물게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형의 얼굴을 슬쩍 살피며 말하자 에데니아가 뺨에 한 손을 댄 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렌은 지금 여기에 없답니다. 이걸 어쩌나. 언제 들어온다고는 말하지 않았거든요.”

“아뇨, 아닙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당신에게 전에 얻으러 왔던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기 때문이라서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에데니아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랬군요. 저번에 받아 가신 물약이 괜찮은 성능을 발휘해 준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그곳에서 원하시던 목표는 이루실 수 있으셨나요?”

괜찮은 성능 정도뿐인가. 너무 성능이 좋아서 먹을 때마다 구역질에 고생을 했던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뭘요. 마법사님이 렌과의 내기에서 이기셔서 마땅히 자격을 얻으신 것뿐인데요. 물론 그때의 자격은 아직도 유효하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전에 가져가셨던 만큼 정도면 될까요?”

“아뇨. 조금 모자라더군요. 그보다 몇 개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데니아의 물약 맛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전에 사막을 건널 때 물약이 모자라 반 죽어가는 상태로 사막을 횡단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던지라 어쩔 수 없이 추가 제작을 부탁했다. 에데니아는 다행히도 불쾌해하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여 그러마고 했다.

“그럼요. 어렵지 않아요. 그럼 여기 계시면 제가 그것을 만들어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햇볕이 강한 사막도시에 사는 이답게 희고 팔랑거리는 옷을 입은 에데니아가 다른 방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 나는 조용한 거실 안에 형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저 여자가 약을 파는 거냐? 겉모습과 직업의 갭이 상당하네.”

형이 에데니아가 사라진 쪽을 눈짓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음…… 뭐.”

나도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설마 에데니아가 약을 만들어 주는 NPC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정보 길드에서 처음 얻어낸 정보가 몇십 년 전의 것이라고 해서 더 그랬었던가.

“아까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미 전에 여기에 한 번 왔었어?”

“응.”

“그럼 저…… 사막 쪽에 간 것도 그때?”

“응. ……그때는 크란하고.”

너무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를 더 덧붙이자 형이 흠…… 하고 수긍하는 소리를 내고는 무료해진 듯 주변을 돌아다니며 장식품 따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도 좀 앉아서 기다릴까 하고 소파로 향하고 있는데 발라 모냐크로 온 뒤에는 내내 조용했던 슈페리어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 휴. 드디어 말을 좀 할 수 있겠군. ]

“어…….”

나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려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때문에 흠칫하고 등을 세웠다.

“……슈페리어?”

[ 응. ]

“뭐야, 갑자기.”

[ 갑자기는 아니야.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건 그대가 아까 전까지 만났던 그 남자 때문이었어. ]

“그 남자?”

설마 시저를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혹시 몰라 반문하니 여태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진지한 슈페리어의 대답이 들려왔다.

[ 그래. 내가 차마 말을 잊을 정도로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던 그 남자 말이야. ]

사악한 기운이라……. 새삼스레 시저가 마신의 기사 퀘스트 유저라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왜.”

[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 때문에 함부로 나올 수가 없었어. 매우 사악하고 강력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고. 그 남자는 그대의 적인 건가? ]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당연하게 알고 있던 시저는 마신의 기사 퀘스트 유저이고, 내 적 포지션이라는 사실을 슈페리어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해 줘야 하나. 나는 유저이기 때문에 퀘스트를 진행해 나가면서 들었던 말들이나 발표된 퀘스트 동영상들에 의해 마신이 점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NPC인 슈페리어에겐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 봤자 이해시킬 수 없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내가 슈페리어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는 정도까지는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러면 방법은 또다시 적당히 각색하여 설명하는 것뿐인가?

“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사실은, 네게 말하는 것을 깜박한 것이 있는데…….”

“카르.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갑자기 형이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슈페리어도 마찬가지였다. 막대기 속 슈페리어의 존재가 그리 숨길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다 보니 대놓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아…….”

“표정이 왜 그래? 놀랐어? 그런데 약 만든다고 아까 들어간 그 여자는 대체 왜 안 나오는 거냐. 지루해 죽겠…….”

형이 큰 소리로 내뱉은 바로 그때, 에데니아가 작은 병들을 모아 들고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왔어요. 뭐 하고 계셨…… 어머.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지루하다 말했던 바로 그 순간 등장한 에데니아 때문에 놀라 내게 달라붙었던 형이, 졸지에 소파 옆쪽으로 거세게 밀쳐져 옆구리를 치인 나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웃었다.

“아, 네. 뭐. 우리가…… 사이가 참 좋죠. 하하, 하하하.”

“형…….”

“미안, 카르야.”

내 눈빛에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속삭인 형이 옆으로 물러서서는 에데니아에게 보이지 않게 내 등을 토닥거리며 사과했다.

“마법사님이 저번에 같이 오셨던 기사님과 함께 안 오셔서 사실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번에 함께 오신 분도 매우 좋은 분인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자, 여기 이것 받으세요.”

에데니아가 통치마 자락에 가득 받쳐 들고 있던 푸른 물약들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남자인 나도 두 손으로 받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라 형의 도움을 받아 소파 위에 내려놓아야 했다. 20여 개쯤 되어 보이는 물약들을 언제든지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고대 저장의 반지에 집어넣고 나자 에데니아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여기서 렌을 기다리실 건가요?”

엘프족인 시라비 렌이라면 최근의 엘프족 동향에 대해서도 잘 알 것 같아 한 번쯤 만나고 가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가 언제 돌아올지 이야기하지 않고 나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뇨. 그냥 안부만 전해 주십시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지요. 이번에 이번에도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아무래도 이제 가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어머, 음료도 한 잔 안 드시고 바로 가시려고요?”

잠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던 에데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렌이 돌아오면 좀 섭섭해하겠는걸요. 떠나신 후에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마법사님을 높이 평가했었거든요. 호호. 마법사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나중에 이 물약이 또 필요하실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다시 오세요.”

고마운 말이긴 했지만 사실 그 물약을 또 마실 기회가 생긴다는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데니아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드는 에데니아가 보이지 않는 길까지 나왔을 때 뒤를 흘끗 돌아보았던 형이 시원하게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준비도 다 했으니 진짜 가는 거구나. 아, 실감이 잘 안 나네. 난 지금까지 퀘스트를 하면서 전 대륙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사막은 처음이야. 사막은 어때? 센 몬스터들이 많던?”

글쎄. 내가 경험했던 죽음의 사막이 어떠냐고 묻는 거라면…….

“몬스터는 없어. 하지만 햇볕의 저주가 생각보다 강해. 형은 시간 맞춰 스킬을 쓰면 될 테니 괜찮겠지만 나는…… 꽤 골치가 아팠어.”

“허어, 네가?”

그 사막의 햇빛은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하며 만났던 모든 적들 중 가장 대적하기 힘들었던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적의 공격력을 두 배로 만든 것은 물론 지금 내 아이템창에 고이 들어 있는 에데니아의 지옥 같은 맛 물약이었고.

“몬스터가 없다니 재미는 없겠구만. 앞으로 나는 너만 믿고 갈 테니 잘 부탁한다. 카르야.”

노골적으로 김샌 표정을 지은 형이 후드 위로 내 머리를 거칠거칠하게 쓰다듬으면서 장난치듯 꾹꾹 눌렀다. 나는 후드 안쪽의 머리카락이 정전기 때문에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피하고도 남았을 접촉 행위였지만 이제는 이런 것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새삼스럽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전에는 손만 가져다 대도 피하더니, 정말 성격 좋아졌네. 어이구 귀여운 자식.”

마지막 호칭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 전의 말에서는 형의 뿌듯해하는 심정이 그대로 느껴져 웃음이 났다.

“어, 카르. 방금 웃었지. 웃은 거지? 그놈의 모자 좀 뒤로 젖히면 안 되냐? 어떻게 된 게 표정을 볼 수가 없어요!”

투덜거리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빨리 앞서나가자 슈페리어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 저 사람, 그대를 상당히 아껴주는구나. ]

“……응.”

[ 그대에게서 나오는 파장도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부드러워졌어. 이게 스가 신의 종들의 보편적인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던 사람도 무척 성격이 좋았었지. ]

어쩐지 그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슈페리어…….”

답진 않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는 너무 상투적이고, 분위기를 쇄신시킬 만한 말은 아는 것이 없으니…….

입을 다물고 고민하고 있을 때 슈페리어가 별안간 하하 웃으며 밝게 말을 걸었다.

[ 뭐, 그러면 이제 곧 루미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건가? 나 솔직히 좀 기대하고 있다고. 어서 날 데리고 부지런히 가는 거야! ]

“카르야, 왜 그렇게 빨리 가냐! 같이 좀 가자!”

뒤에서 형이 쫓아오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것이 같은 타이밍으로 들려왔다. 마음 한구석이 못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막대기에서 시선을 떼고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번 엘프의 숲으로 향하던 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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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건은 길게 한숨을 쉬며 더 미스트의 운영자용 캡슐 문을 열고 나왔다. 한창 일하고 있다가 윤석호가 불렀다고 호출당해 나온 것이라 마음이 영 불편한 상태였다. 전에는 종종 게임 속에 직접 들어와 그를 만나던 윤석호는 언제부터인가 무건만 오프라인으로 호출해 직접 사무실에서 만나는 쪽으로 노선을 돌렸다.

윤석호를 만나러 간다고 무건 자신에게 좋은 일도 하나 없는데 이제는 운영자 일이 본업인지 윤석호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본업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기억도 안 나는 중학교 선배라는 말을 하면서 다가왔을 때 경계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망한 일이지…….’

어이구 내 신세야. 가슴을 치며 상층에 위치한 지부장실로 향하는 무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빨리 오라고 했을 텐데.”

지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무건의 심정도 모르는 윤석호가 고작 몇 분 늦은 것만으로 뼈까지 발라버릴 듯 웃으며 말했다.

“요즘 들어 어쩐지 점점 오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그걸 정말 몰라서 묻나. 당신 같으면 추가 수당도 안 주면서 죽어라 일만 시켜 먹는 상사의 호출에 응하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겠느냔 말이다!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남무건은 억울한 마음만 꿀꺽 삼켜 참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는 소영 씨와의 커플링을 보자 그나마 힘이 났다. 무건은 이것도 다 더러운 사회를 살아나가는 월급쟁이인 죄라 여기며 굽실굽실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운영관리라는 게 그렇게 금방금방 자리를 뜰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다음부터는 좀 빨리 오게. 이건 뭐 할 말이 생각이 났다가도 잊어버리겠어.”

그 유들유들한 말투에 다시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지만 무건은 커플링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참고 또 참았다. 다행히 윤석호는 그 이상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저번에 내가 뿌렸다던 미끼, 기억하고 있나?”

윤석호의 예상치 못한 화제에 남무건은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미끼라면…….”

“저번에 말했었잖나. 우리의 운영관리팀 안에 있을 미꾸라지 한 마리 말이지.”

“아……!”

남무건은 그제야 그 말이 운영관리팀 안에 있을 스파이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윤석호가 자신에게 내린 그 스파이를 찾아오라는 2주간의 명령 기한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직 2주는 지나지 않았잖습니까. 팀원들에게 캐묻는 것도 제대로 못 했는데요.”

“실은 말이지, 그런 활동들이 이젠 필요 없게 되었거든.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야.”

“네? 왜입니까?”

“내가 그놈에게 한 방을 먹었거든.”

윤석호의 어투는 쾌활했지만, 그 눈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은 일순 남무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년 반 정도나 옆에서 보고 겪은 윤석호였지만 이럴 때만은 도저히 평소의 능글능글한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쳤다.

“예……?”

“말 그대로야. 이걸 좀 보게.”

윤석호가 빙글 의자를 돌려서 허공의 벽 쪽에 대고 작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위에서부터 지잉 나타난 홀로그램 영상이 흑백으로 녹화된 CCTV 화면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밑쪽에 하얗게 표시되어 있는 시간은 새벽 세 시경. 장소는 무건의 눈에도 익숙한 운영관리팀의 메인 컴퓨터 앞이었다. 새벽 세 시쯤이라면 새턴 한국지부의 운영관리실 내부에서는 대부분이 캡슐 안에서 뻗어 있는 때였고 자신도 거의 다를 바 없었을 것이었다.

바로 그런 틈을 타 대담하게 복면과 머리카락을 가리는 니트 모자를 쓰고 들어온 수상한 그림자는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메인 컴퓨터를 부팅시켜 이것저것 두드리기 시작했다. 운영관리팀의 메인 컴퓨터는 본래 담당자가 아니면 만질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그림자가 어떤 수를 취한 것인지 몇 분 후에는 모든 보안장치를 풀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보였다.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며 모니터를 읽던 그림자는 만족했는지 메인 컴퓨터의 본체에 CD를 넣고 정보를 그 안에 넣은 다음 다시 몇 번 정도 키를 입력한 것만으로 컴퓨터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것 또한 컴퓨터 담당자가 아니라면 컴퓨터를 그리 쉽게 끌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눈을 의심하게 했다.

“저…… 저 사람, 메인 컴퓨터 담당자가 아닐까요?”

저렇게 쉽게 모든 보안장치를 풀어버리는 인간이 메인 컴퓨터 담당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무건이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자 윤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체격부터가 너무 달라. 공범일 가능성도 없다고 이미 판명되었다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남무건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화면 속에서 여유롭게 CD를 품속에 집어넣고 막 CCTV의 영향권 바깥으로 나서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칫했다. 천천히 정면을 향해 몸을 돌린 남자가 행한 마지막 행동은 여유로운 태도로 두 손가락을 펼쳐 가볍게 경례를 날리는 것이었다.

그 방향은 정확히 CCTV가 위치하고 있는 쪽이었다.

‘저런 간 큰 놈이 다 있나?’

남무건이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든 말든 여유 있게 경례를 남긴 남자는 다시 제 갈 길로 가며 운영관리실을 나가버렸다. 그것으로 화면은 끊겼지만 윤석호와 남무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언제 있었던 일인 겁니까?”

황당해하는 무건의 표정을 본 윤석호가 피식 웃었다.

“언제일 것 같아? 벌써 일주일도 전이야. 내가 갑자기 이걸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다면 내 눈을 믿지 못했겠지. 내가 미끼로 넣어두었던 운영자용 캡슐의 점검일지 자료가 다 털린 지 오래더군.”

“허……!”

일주일 전쯤이라면 저 CCTV가 찍히던 시간에 남무건도 회사에 있었을 수도 있었다. 최근 계속 야근을 하느라 요 며칠간 밤에도 운영자 캡슐 안에 접속해 있는 상태였는데 그 사이에 운영관리팀의 메인 컴퓨터실에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니.

“흔적은 찾아내지 못한 겁니까? 아무것도요?”

“전혀 없어. 발자국도, 지문도 없고 컴퓨터에서 자료를 빼내 간 흔적은 남았지만 전처럼 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간신히 남은 걸 보아 일부러 그렇게 남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내가 눈치를 깠다 싶으니 공개적으로 저렇게 엿을 한 번 먹인 거지.”

윤석호가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 영상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지?”

웃고 있는데도 저절로 소름이 끼치는 눈으로 질문을 하니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남무건은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이 굳는 느낌이었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독사 앞에 선 개구리가 된 양 얼어붙어 있자 윤석호는 딱히 대답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영상을 보고 그 녀석이 내부의 인간이라는 것을 정말로 확신하게 됐네. 외부인이라면 새턴에는 들어올 수도 없었을 테고 건물 내부의 사정에도 어두웠을 텐데, CCTV에 잡힌 그 녀석의 태도는 오만함 그 자체였지. 사실 자네에게 2주 동안 수상한 놈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안일하게 아르바이트생이나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신입들이 범인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은 아니었던 거야. 빈틈이 있었던 거지.”

윤 지부장이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에게 혹독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건은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부장님…….”

“……하지만 결국 이번엔 내가 한 수 위야. 어쨌든 지금까지 저놈이 가져간 건 진짜 자료들이 아니니까.”

윤석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싸늘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럼 대체 놈이 어떤 녀석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적어도 초보는 아니야. 그 녀석은 철저히 우리 안에서 자신을 감추고 있고, 또 아주 교활하며 영리해. 도대체 왜 그 정도 놈이 저쪽 일을 돕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마 녀석은 속으로는 낄낄거리며 겉으로는 잘도 우리 사원인 척 위장하고 있겠지. 지금도 말이야.”

윤석호가 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녀석은 신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견도 아닐 가능성이 크네. 이도 저도 아닌 놈들 중 수상한 녀석을 찾아봐. 그 녀석은 분명히 우리 안에 있어. 내가 믿는 건 자네뿐이네.”

그 녀석이 일주일 전에 정보를 털어서 사라지도록 너는 뭘 했느냐는 타박이 나올 줄 알았는데 윤석호는 의외의 말을 했다. 표정도 빙긋이 웃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남무건은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입을 멍하게 벌렸다가 재빨리 닫았다.

“네? 방금 뭐라고…….”

“그러니까 일을 하라는 뜻이지. 일 말이네, 일.”

잘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물었지만 윤석호는 두 번은 말해 주지 않았다. 일이나 하라는 말을 듣고 남무건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풀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말씀해 주신 조건에 맞을 만한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면 됩니까?”

“하하. 이젠 척하면 딱이군.”

척하면 딱은 무슨.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비위를 맞추다가 그런 거야! 하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반발을 삼킨 뒤 남무건은 애써 썩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저는 하던 일이 있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잠깐. 그건 보고하고 가야지.”

갑자기 붙잡는 윤석호의 뜬금없는 질문에 남무건이 “예?”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시치미는. 그것 말이야. ReL 프로젝트 대상자들의 최근 상태 말이네.”

“진작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그것이라고 하시면 지부장님이 시키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어떻게 바로바로 압니까?”

참지 못하고 한번 작은 항의를 한 남무건이 그간 윤석호의 지시대로 꾸준히 파악하면서 머릿속에 새겨 놓았던 ReL 프로젝트 대상자들의 최근 상태를 떠올려 보았다.

“뭐, 다들 대체적으로 문제는 없습니다. 유난히 자주 죽어서 걱정하게 만들던 사람도 이젠 요령이 생겼는지 거의 죽지 않더군요.”

남무건의 대답을 들은 윤석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예정대로군. 슬슬 안정기야.”

“그렇지만 L-8은 최근 크게 한 번 죽었던 적이 있어서인지 요즘은 바이오 기록이 좀 불안정했습니다.”

“L-8이라면 격투가였던 그 학생 말이군.”

“예.”

사실 남무건은 보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이 사항들이 윤석호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윤석호가 무건에게 가끔씩 이런 보고를 듣긴 했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은 절대로 자세히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ReL 프로젝트 대상자들에 대한 보고였으니 ReL 프로젝트와 관련된 쪽으로 쓰겠거니 하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L-10 유저는 어떻지?”

그때 갑자기 윤석호가 또다시 질문한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무건이 눈을 껌벅거리며 반문했다.

“예?”

“L-10. HR 유저 말이네.”

HR 유저라는 말까지 듣고 나자 남무건은 그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는 무건도 실제로 한 번쯤 보고 싶을 만큼 흥미를 느끼고 있는 유저였다. ReL 프로젝트의 대상자로 게임을 시작했지만, 미스트 속에서 H-Zero 퀘스트까지 받아내면서 두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요주의 대상. 그 와중에 최초의 마법스킬 5서클 마스터 이상을 찍고 그 마법으로 어떤 필드 전체를 태워 먹은 탓에 남무건이 직접 뒤처리를 하게 만든 전적도 있었다.

“한 달쯤 전에 계속 바이오 기록이 불안정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 그것 말씀이시라면 그 이후에 다행히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 유저는 평소에도 다른 유저들에 비해 게임 연결 시 뇌 이용의 폭이 좀 큰 것 같더군요.”

“뇌 이용의 폭이 크다라……?”

남무건은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들은 윤석호는 왠지 약간 미심쩍은 기분을 느낀 듯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며 중얼거리다가는 표정을 원래대로 바꾸었다.

“그래. 알겠네.”

“아, 예. 저, 그러면 저는 이제 나가봐도…….”

“나가봐도 좋아. 하지만 여기서 했던 말들에 대해서는 평소보다 더 주의해서 행동해 주길 바라네. 어디에 그 스파이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지금은…… 말이야.”

윤석호는 마지막 말을 평소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 말뜻은 무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상사에게 그리 순종적인 성격도 아니고 특출 난 능력 하나 없는 남무건이 윤석호 지부장의 가까운 곁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단 하나. 한 번 지킨 신의는 끝까지 지키는 성격 때문이었다.

남무건은 윤석호에게 잔뜩 틱틱거리던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로 똑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물론 주의하겠습니다.”

지부장 사무실에서 나온 무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방금 전 보았던 CCTV 영상 속의 스파이에 대해 생각했다. 윤석호 지부장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맡았던 스파이 색출 작업이긴 했지만 무건은 자신이 정말로 잡아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머리 좋은 윤석호가 충분히 미끼를 깔아 두었고, 자신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한 일은 지금까지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만 봐 왔었기에 이번 일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운영관리부서 사람들 중에 그렇게 노골적인 악의를 띠고 정보를 타사에 팔아넘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대체 어떤 놈일까…….’

CCTV 속의 남자는 말랐지만 건강해 보이는 체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머리칼 모양이나 얼굴 등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윤석호 지부장은 그 남자에 대해 신입도 아니지만 중견도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그 말이 사실일까?

운영관리부서에서 사용하는 통제용 메인 컴퓨터의 보안을 그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국내에 몇 명이나 될까? 어느 기업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돈을 원 없이 벌 정도의 능력자가 고작 여기서 정보나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고작은 아닌가?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새턴 사에 위장 침입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유령처럼 정보만 빼내어 빠져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범죄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빼내 간 정보와 이번에 빼내 간 정보 모두 윤석호가 준비한 허술한 가짜 정보뿐이었다고는 해도 사내에서 해킹을 당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파장이 올지 무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윤석호를 호시탐탐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저 새턴의 미국 본사 측은 또 어떤가. 이 소식만 알려진다면 윤석호는 얼마든지 새로운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무건은 처음으로 윤석호가 정말 위험한 곳에서 홀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농담만 일삼으며 헛소리를 해 대지만 실제의 그가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것은 그간의 많은 일을 통해 이미 넘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은 그 능글거리는 농담조차 진심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꾸며낸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다.

윤석호는 상대에게 한 방 먹었다고 말했음에도 거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냉정하게 스파이 축출을 무건에게 맡겼다. 사내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는 엘리트들이 아니라 고작 운영관리 부서에서 근근이 일하고 있는 자신에게 말이다.

‘후아, 내가 정말 위험한 일을 맡긴 했구나.’

무건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쩐지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믿는다고 했던 말뜻은 어쨌든 그동안 자신이 도움이 되긴 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 열심히 해서 수상한 놈의 꼬투리라도 잡아 보자고.’

모처럼 의욕에 찬 채 띵 하고 목적지에서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나간 무건은 이젠 익숙한 반 폐인의 몰골을 한 운영자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밥들 먹고 와서 쉬는 모양이군.’

그나저나 이 부서에만 들어오면 왜 다들 저렇게 불쌍한 몰골로 변할까. 자신도 별로 다를 바는 없지만 나이도 어린 편인 부하 직원들의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채 피부가 거칠어져 있는 것을 보니 새삼 가슴이 쓰렸다.

이러니 운영관리 부서에는 사내커플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가 신빙성 넘치게 흘러나오는 것일 테다.

“어어, 남 부장님! 어디 다녀오셨나 봅니다?”

그때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어느 사원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네. 그쪽 분들은 벌써 밥 먹고 오신 겁니까?”

“하하. 네. 이제 쉬어야죠. 남 부장님은 벌써 캡슐실로 가시게요?”

운영관리부서는 대부분이 게임 내에서 업무를 보기 때문에 사무실 내에도 책상이나 의자 대신 접속캡슐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원들은 운영관리부서 사무실을 캡슐실이라고 불렀다.

“그래야겠죠. 지금은 아무도 없으려나요?”

“그건 아니고, 유저 상황 모니터링 해야 되는 당번들은 남아 있을 거예요. 그럼 수고하세요!”

“예. 이따 뵙시다.”

무건은 커다란 사무실들을 지나 자신이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제3팀의 캡슐실로 들어갔다.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운영자용 캡슐들은 마치 공동 무덤처럼 보여서 이렇게 조용할 때 오면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캡슐실 중앙에는 커다란 홀로그램 모니터가 몇십 개로 분할되어 THE MIST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저들의 상황을 시시각각 모니터링 하고 있었는데 몇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가 무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부장님! 어서 오세요.”

“윤미 씨와 상욱 씨, 지현 씨가 오늘 우리 팀 모니터링 담당인가요?”

단순히 유저들이 게임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모니터링하는 것이라면 운영자들이 대부분 직접 하고 있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이 홀로그램 모니터가 하는 진짜 중요한 일은 유저들의 좌표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계속 로그로 올려 보내면서 혹시라도 게임 속에서 프로그램상의 문제로 곤란한 일을 겪게 된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연락이 왔을 때만 제대로 확인하는 편이라 보통은 이렇게 몇 명씩 돌아가며 당번제로 가볍게 모니터링을 하곤 했다.

말하자면 게임 안에서만 일하는 것도 지겨울 때를 대비해 적당히 나와서 하는 일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뇨. 아까 전까진 천우 씨도 놀러 와서 여기서 저희랑 같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간다고 사라졌네요.”

“아, 1팀의 권천우 씨요.”

무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권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식 사원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들었지만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아 정사원 발탁이 거의 확실할 것이라 기대되는 인재였다. 웃지도 않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1팀 부장인 홍민우 부장이 벌써부터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나이도 젊은 데다 얼굴이 잘생긴 터라 여사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고, 본인도 그것을 즐기며 적당히 바람둥이 기질을 뽐내는 모습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놈인 것 같은데 나는 왜 그간 그 사람과 이야기를 별로 못 해봤던 거지?’

“저 왔습니다. 빵 사왔는데 다들 드시겠어요?”

“우와, 천우 씨 센스쟁이!”

그때 권천우가 품에 가득 빵봉지를 안고 들어왔다. 당번에 걸려 점심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나머지 사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그들이 자리를 만든다 어쩐다 난리법석을 떨고 있을 때 권천우가 싱글싱글 미소 짓는 얼굴로 무건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남무건 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부장님께서도 괜찮으시면 빵 좀 드시겠습니까?”

그 미소를 본 순간 남무건은 왠지 신경 한구석에서부터 껄끄러운 것이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멈칫했다.

‘뭐지, 이게?’

“어, 뭐 준다면야 고맙게 잘 먹죠.”

무건이 얼버무리며 자리에 앉자 사원들이 크게 벌려놓은 빵봉지를 앞으로 밀면서 이것저것 추천을 해 주었다.

“부장님, 이거, 이거 맛있어요. ‘전사라면 몸빵’요.”

“그건 너무 퍽퍽하잖아요. ‘구겨먹는 피자빵’ 어떠세요? 이건 매점 인기품목인데 천우 씨가 잘도 구해 왔네요. 위에 고구마도 올려져 있거든요.”

“하하…… 고마워요.”

어색하게 웃으며 전사라면 몸빵을 집어 든 무건이 껍질을 뜯자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무건은 빵을 먹으면서도 권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붉은 머리칼에 잘생긴 이목구비, 유들유들하게 늘 웃는 듯한 표정까지. 지금까지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들이 방금 전 이상한 느낌을 받은 이후부터 자꾸만 무언가가 생각날 듯 말 듯 거치적거렸다.

‘대체 뭐지? 저놈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말이에요.”

그때 먹으면서도 계속 모니터를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던 한 사원이 뭔가 생각난 듯 화제를 꺼냈다.

“제가 밥을 먼저 먹어서 여러분이 늦게 밥 드시러 내려가신 사이에 저 혼자 여기 있었잖아요? 그때 모니터에서 이상한 거 봤어요.”

“네? 무슨 이상한 거요?”

“그게…….”

다른 사원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하자 그 사원이 괴담을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음침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 담당 지역이 대부분 동부 토렐리트 중심이잖아요? 오르겐 산맥 쪽에 있는 유저들 데이터 로그가 올라가는데, 그 안에 있던 유저 중 한 사람의 데이터가 중간에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고 보니까 멀쩡하게 다시 데이터가 올라가고 있더라구요.”

그 말에 무건은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홀로그램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영어와 숫자로 이루어진 많은 유저들의 데이터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줄줄이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건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암호들이 계속 어지럽게 올라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안상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화자찬하던 윤석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저 글에 생각보다 간단하고도 깊은 법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이의 눈에는 그저 쓰레기처럼 보이겠지만 정식 사원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 글들은 게임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유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것이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그 말은 곧 게임 속에서 한 유저의 몸 자체가 통째로 지워져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요? 눈이 피곤해서 잘못 봤겠죠.”

“아니에요. 이후에도 여러분이 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어서 보고 있었는데 20분쯤 후에 한 번 더 사라졌다가 나타나더라구요.”

“우와, 그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어떤 유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라면 희한한 일이네요.”

주변에서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들으며 무건도 비슷한 기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라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아마 저 사원의 착각이거나, 잠깐 프로그램상에서 인식이 늦었다거나 해서 일어난 일이겠지.

“윤미 씨. 그걸 정확히 오르겐 산맥의 어느 지역쯤에서 봤는지 기억납니까?”

그때, 권천우가 웃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름을 불린 사원은 “네?” 하고 당황한 소리를 냈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음…… 아. 오르겐 산맥 쪽에 얼마 전에 형성된 고렙촌 골짜기인가? 그런 게 있었잖아요.”

“아~ 데 고르카?”

“네. 맞아요. 그쪽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말에 권천우는 갓 새턴에 들어와 처음 모니터링 작업에 대해 들어본 초보 사원들처럼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저 모니터를 봐도 자세한 것까진 잘 못 보겠던데 여러분은 저보다 훨씬 전에 들어오셔서 그런가, 볼 때마다 바로바로 알아내니 신기하네요. 하하하.”

“뭘요. 어차피 천우 씨도 이제 곧 정식 사원으로 들어오시면 저희처럼 다 배우게 되실 거잖아요. 천우 씨는 정사원도 아닌데 벌써 새끼영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무슨 소리예요.”

권천우가 이제 곧 정식 사원으로 올라올 것이라는 말은 소문 수준을 넘어 거의 확실시된 소식에 가까웠다. 권천우는 그 말에 이를 드러내며 싱글싱글 웃었다.

“아하하. 그런가요.”

‘저 표정은……?!’

“어……!”

순간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급하게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난 무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부장님? 왜 그러세요?”

“남무건 부장님?”

다른 이들처럼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권천우를 보는 무건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방금…… 그건 잘못 본 게 아냐.’

남무건은 정식 사원으로 들어오면 다 배우게 될 거란 말을 들은 순간 권천우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짧은 표정을 읽어냈다. 늘 싱글거리던 미소가 비틀어지고 무표정한 얼굴에 날카롭게 뜨고 있던 눈빛에 지나가는 섬뜩한 무언가. 그것은 아까 전 지부장실에 올라갔을 때 스파이를 상대로 자신이 한 수 위라는 말을 내뱉던 윤석호에게서 보았던 그 표정과 거의 흡사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묻어나오는 서늘한 비웃음. 그러나 다시 다른 가면에 자신을 숨기면 곧바로 이지러지고 말 그런 본색의 미소.

그러고 보면 표정이 좀 더 다양할 뿐, 권천우에게서도 능글거리는 윤석호를 대할 때와 똑같이 뭔가 인위적으로 꾸민 과장된 연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 그것 때문이었던 거야.’

그간 자신이 윤석호의 그런 모습을 얼마나 지겹도록 지켜보았었던가. 이제는 그런 류의 표정이라면 귀신같이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이 느꼈던 권천우의 위화감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윤석호는 그 범인에 대해 무어라 추측했었던가. ‘신입도 아니지만 중견도 아니다. 분명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교활하고 영리하게 행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권천우는 아르바이트생이 절반 정도나 차지하는 운영관리부서에서, 정사원이 아닌데도 사내의 여러 소식을 친숙하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었다. 언제 정사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인데도 현재 신분은 어디까지나 임시 사원.

혹시 그것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깨끗이 발을 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면……?

남무건은 온몸이 전율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권천우에게서 강력한 심증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서 밖으로 뛰쳐나가 윤석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밑쪽에 놓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요. 하하.”

남무건은 이 말을 납득시키기 위해 생애 최고의 연기를 펼쳐 보였다. 다행히도 사원들은 그리 큰 의심 없이 이해해 주었다.

“그래요? 이제 곧 근무 시간 다시 시작될 텐데 빨리 다녀오셔야겠네요.”

“얼마나 중요한 거길래 그렇게나 놀라세요? 으하핫. 설마…… 애인 사진?”

“우와. 애인 사진이래!”

“그, 그런 거 아닌 것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빵 잘 먹었어요. 다녀올 때까지 다 먹고 치워 두셔야 됩니다.”

평소처럼 얼굴이 빨갛게 되어 당혹해하는 척하며 뒤돌아서는 무건의 뒤에서 “네-” 하고 대답한 사원들이 다시 다른 화제로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이 안에 요거트가 있었네. 이건 천우 씨 먹으려고 사 오신 거죠?”

“아, 네. 어떻게 아셨죠?”

“천우 씨가 요거트 엄청 좋아한다는 건 모르면 간첩이죠~ 자자, 안 뺏어 먹을 테니 드세요.”

“하하하…….”

천천히 달칵 문을 닫고 나온 남무건은 곧바로 복도를 전력 질주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쾅쾅 눌러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격렬한 흥분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쾅!

“지부장님!”

“응?”

거북이처럼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지부장실로 쳐들어가 눈을 깜박거리는 윤석호를 앞에 두고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속사포처럼 다 말하고 난 무건은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래서, 저는 그렇게 느끼고 바로 여기로 온 겁니다. 헉, 헉. 들으시니 느낌이 오시지 않습니까? 어때요?”

“어…… 일단, 자네는 좀 진정하고 물부터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

윤석호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을 내밀었다. 남무건은 사양하지 않고 꿀꺽꿀꺽 원샷한 다음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무건이 입을 다물어 지부장실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윤석호는 모델처럼 꼬아두고 있던 다리를 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그래서 자네는 그 권천우란 사원에게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네.”

“물증은 없고, 확신만 든 거겠지?”

분명 자신처럼 흥분할 줄 알았는데 윤석호의 표정은 고요했다. 그 빨려 들어갈 듯한 눈을 보고서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무건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네, 네.”

“너무 스파이 생각에 치중해 있다 보니 엉뚱한 사람을 끼워 맞춘 건 아닌가?”

“예?”

뜻밖의 말에 무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렇잖나. 내려간 지 한 시간이 됐나, 두 시간이 됐나. 그런데 다짜고짜 올라와서 이 사람이 확실하다니.”

윤석호가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터라 무건은 설마 자신이 정말 엉뚱한 사람을 끼워 맞춘 것은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말 수상한 것은 권천우 그놈뿐이었다.

‘그게 아닌데…… 정말 이상했는데…….’

묘하게 억울하면서도 창피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무건이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만 꽉 악물며 고개를 숙이자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석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아니면 어쩔 건가? 괜히 수상하게 느껴져서 오해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 내가 믿어도 되겠느냐는 말이네.”

“아, 됐습니다!”

무건은 결국 찌르면 터질 것 같은 붉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느낌엔 그놈밖에 없어요. 단지 알아보게 된 타이밍이 지금이라서일 뿐입니다. 그렇게 의심이 가신다면 직접 만나보시고 판단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절 믿기 힘드시면 저는 그냥 이 일에서는 손을 떼고……!”

거기까지 소리치던 무건은 문득 작게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윤석호와 눈이 마주치고 말을 멈추었다. 윤석호는 정말로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자책하는 듯하면서도 시원해 보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얼굴에 무건이 넋이 나간 순간 윤석호가 턱에 괸 손을 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뭡니까?”

“좀 시험해 본 거야. 미안하게 됐네.”

“시…… 시험…….”

귀신도 경악할 만한 말에 맥이 탁 풀려 눈을 부릅뜬 무건을 보며 윤석호가 시선을 슬쩍 유들유들하게 피했다.

“자네의 감은 이런 데서 쓸 만하지. 내가 자네를 믿는다고 했잖아. 그러면 당연히 믿는 거지.”

“그럼…… 제 말을 믿으신다고요?”

“그래. 사실,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도 감이 좀 오더군.”

그 말을 들은 순간 남무건은 분노로 윤석호의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다.

“하지만!”

마치 그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 윤석호가 진지한 얼굴로 강하게 힘주어 말했다. 무건은 움찔하고 도로 제자리에 섰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아직 손대서 좋을 것이 없어. 그러니 나는 자네를 통해 한동안 지켜보겠네. 자네의 감으로 찍은 것이니 확실하게 지켜보고 바로바로 보고해. 알겠나?”

“예…… 예!”

“좋아. 그놈이 데이터를 빼내 간 그놈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권천우라는 이름만은 전부터 올라오던 다른 보고를 듣고 약간 수상하다고는 생각해 왔었지. 범인이 아니더라도 지켜볼 필요성은 있다고 보네.”

그 말과 함께 윤석호가 싱긋 웃었다. 창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비친 날카로운 미모를 보며, 남무건은 어쩐지 권천우와 윤석호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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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환과 약속한 여섯 시가 되기 전에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미리 캡슐에 알람 기능을 설정해 놓았다. 처음 써 보는 기능이라 어색했었지만 잘 작동해 준 덕분에 다섯 시에 제대로 게임을 종료할 수 있었다.

아직 조금 지끈거리는 머리의 찢어진 상처와 목 부근의 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새삼스럽게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더욱 생경했다.

약을 새로 바르고 거즈를 붙인 뒤 소파에 걸터앉자 나른함이 밀려왔지만 손님이 올 테니 조금만 더 깨어 있자고 자신을 독려하며 평소 안 보던 TV를 켰다. TV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비슷비슷한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끄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의미 없이 한참 들여다보다가 벽에 비친 컴퓨터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다섯 시 50여 분이었다. 이제 곧 오겠군.

- 딩동. 외부인이 방문하였습니다. 인터폰 기능을 켭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벨소리가 들려오면서 컴퓨터가 인터폰 모드로 전환되었다. 일어서서 현관 쪽으로 다가가자 나타난 화면에는 익숙한 진제환의 얼굴이 있었다.

‘……열어줘.’

화면 안에서 진제환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문의 잠금장치를 풀자 잠시 뒤 놈이 신발을 벗으며 들어왔다. 어쩐지 이렇게 다시 마주 보자 어색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이 교차해 괜스레 심경이 복잡해졌다.

특히 더 복잡해지는 이유는 진제환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를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어서였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현실이 되니 참 민망하군.’

분명히 녀석이 나가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마주 서 있는 지금은 처음으로 침묵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긴장하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한 진제환이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놓고는 거실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내 집인데도 어쩐지 저놈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태도였다. 멈칫했다가 곧바로 뒤따라가자 어느새 컴퓨터를 부팅시켜놓고 앉아서 들고 온 가방 지퍼를 여는 진제환이 보였다.

“뭐야, 그건?”

나를 흘깃 바라본 진제환이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노트북이었다.

“아침에는 시간이 없어 제대로 손을 못 보고 간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어. 그래서 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좀 더 가져온 건데.”

짤막한 설명과 함께 긴 선도 끄집어내어 한쪽은 노트북에 꽂고 다른 한쪽은 내 집 전체를 관장하는 컴퓨터의 연결코드라 할 수 있는 콘센트에 가져가 꽂자 부팅되던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뒤이어 떠오르는 알아볼 수 없는 영어와 숫자의 향연은…… 아무리 봐도 아침에 진제환이 보안만 건드렸다며 어쩌고저쩌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작업의 연장선임에 분명해 보였다.

“그걸 지금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안 돼?”

진제환이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게임 속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녀석의 머리칼도 많이 길어서 이제는 앞머리가 눈썹 밑까지 어색하지 않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 살짜리 어린애나 할 것 같은 말을 스무 살도 넘은 시커먼 놈이 하는 것을 보니 순간 닭살이 돋았지만, 진제환은 이상하게도 그런 태도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 없고 과묵하면서도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할 때는 더없이 직설적이고 숨김없이 부딪쳐 오는 성격은 진제환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어색했을 것 같은데도 놈에게는 잘 어울렸다. 나는 그런 것이 아마 천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망가뜨리지만 마. 비싼 컴퓨터야.”

결국 지는 심정으로 그 말만 하자 진제환이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나는 사실 내심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진제환의 한계점이 궁금해 내가 먼저 접촉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하긴 했지만, 놈이 어젯밤 갑자기 습격했을 때처럼 덤벼들면 나도 반사적으로 주먹부터 내지를 것 같아 약간의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분위기를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진제환에게 줄 물을 따라 가져왔다. 진제환은 컴퓨터에 연결한 노트북을 본격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쳐대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진제환이 쓰고 있는 안경이었다.

“여기…… 물.”

한창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걸기는 미안했지만 등을 툭툭 치자 멈칫하고 어깨를 굳힌 진제환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안경이 정면에서 보였다.

“고마워.”

“안경은 왜 쓴 거냐?”

아무리 봐도 생소한 것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목구비가 워낙 뚜렷해서인지 안경 하나 쓰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인상이 달라 보였다. 아침에 봤을 때는 진제환과 컴퓨터라니,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아닌 것 같았다.

“난시가 조금.”

진제환은 담담하게 대답한 다음 가져다준 물을 다 마셨다.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하는 얼굴이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래도 진제환은 컴퓨터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무료하게 앉아서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니터를 같이 쳐다보았다.

‘저거 정말 내 컴퓨터를 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걱정은 되었지만 내가 봐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할 만한 일은 진제환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 남의 얼굴을 보는 경험은 별로 해 본 적이 없어 꽤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꽉 다물린 입술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새까만 눈동자. 확실히 입만 이렇게 다물고 있으면 왜 우리 집에 와서 이렇게 앉아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얼굴이 잘생긴 놈이다. 나는 예전엔 정승조가 워낙 얼굴이 잘난 탓에 다른 좀 생긴 녀석들을 봐도 별로 잘생겼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 만난 진제환이나 정민후 등을 보면 갑자기 그 기준이 본의 아니게 넓어지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럼 반대로 이 녀석들은 나와 같이 다니면 좀 부끄럽지 않을까?’

한참 동안 이것저것 두드리던 놈이 시선을 계속 모니터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심심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혼자서 생각 잘 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뭐해 얼버무리자 진제환이 이쪽을 보고 피식 웃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이것만 처리하면 다른 건 나중에 해도 돼.”

“……그걸 나중에 또 하겠다고?”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진제환이 정말로 내 컴퓨터에 사랑을 느꼈거나, 컴퓨터를 망치려고 작정했거나 둘 중의 하나로 보였다. 반문하는 동안 빠르게 자판을 두들겨 영어로 무언가 친 진제환이 다 끝났는지 모니터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컴퓨터를 껐다.

“끝났어.”

“대체 내 컴퓨터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인상을 찌푸리고 중얼거리자 진제환이 안경을 벗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놈이 지금 균형 잡기도 가끔 어려운 날 보고 일으켜 달라고 그러는 건가 싶어 황당해하며 손을 잡으니 갑자기 몸이 휙 끌어당겨졌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다가온 손이 뒷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

꽉 닫힌 입술을 혀로 쓸며 자꾸 밀고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느끼며 뻣뻣한 손을 들어 놈을 밀어내려 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이게 접촉 시험의 시작인가?’

애초에 놈이 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생각해 보니 그 이유가 맞는 것 같았다. 젖은 혀가 입술을 핥는 것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천천히 어깨를 밀어내던 팔에서 힘을 빼고 입술을 벌렸다.

맞댄 입술 너머의 놈이 내가 입술을 벌리자마자 느른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고작 몇 센티나 될까 말까 한 거리 너머에서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이런 감각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진제환이 다시 눈을 감으면서 벌려진 입술의 경계를 넘어 혀를 침범시켜 왔다. 가만히 있던 내 혀를 감싸고 얽었다 떨어지고 다시 얽는 혀의 느낌이 기묘했다. 액체가 섞이는 젖은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처음에는 그저 나를 침범한 외부의 것으로 여겨졌던 그것이 시간이 지나니 점점 가슴 근처를 근지럽게 만들었다.

‘어쩐지…….’

수동적으로 얽히고만 있으니 왠지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나는 망설이다 처음으로 내 의지로 혀에 힘을 주어 진제환 쪽으로 움직여 보았다. 순간 놀랐는지 멈칫했던 진제환이 내 목 뒤에 얹고 있던 손가락을 움츠려 꽉 붙잡았다.

그 순간의 느낌에 고무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상대가 내 움직임에 맞춰 따라오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내가 진제환의 혀를 먼저 서툴게 얽기 시작하자 진제환은 손을 밑으로 내려 내 허리께 밑의 셔츠 안으로 밀어 넣어 맨 허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읏…….”

간지러워서 허리를 굳히자 괜찮다고 여겼는지 손이 한층 더 깊숙이 올라와 척추뼈를 따라 움직였다. 등골을 쓸어내리는 순간 참을 수 없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하앗.”

등을 떨면서 진제환의 팔뚝을 붙잡고 키스하던 얼굴을 뒤로 돌려 빼자 젖은 입가 사이로 액체가 흘러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진제환은 붙잡힌 그대로 손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놈도 생각보다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목 쪽의 상의 자락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흐트러진 앞머리칼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번득거리며 빛났다.

“왜…….”

“잠깐만…….”

왜 그만두게 하느냐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내 몸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진제환처럼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나도 몸이 꽤 뜨거워져 있었다.

해 보기 전에 기분 나쁠 줄 알았던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아니 괜찮다 못해 이대로 더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거부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질거리는 감각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최소한의 자제심도 없이 얽혀든다면 내가 짐승이나 다를 바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꺼림칙했다.

‘어떻게 할까…….’

진제환의 위에 앉은 채 고민하고 있을 때 녀석이 내 손에 붙잡혀 있던 팔을 비틀어 빼면서 허리를 다시 끌어당겼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진제환이 키스 때문에 붉게 젖은 입술로 슬쩍 웃었다.

“제안한 건 네가 먼저였어. 아니면, 이제 와서 겁나?”

도발인 것을 알면서도 울컥하는 느낌이 치솟았다.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던 것을 멈추기로 했다. 진제환의 가슴에 얹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면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누가 말이냐. 내가?”

그리고 다른 한 손을 들어 직접 내 셔츠 단추를 비틀어 풀어냈다. 세차게 풀 때마다 드러나는 가슴팍에 진제환이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옷 벗는 퍼포먼스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도 진제환의 흐트러진 상의 사이의 목 쪽에 시선이 자꾸 가고 있었으므로 같은 셈 치기로 했다.

“와봐.”

끝까지 다 풀고 반대로 싸움을 걸듯이 노려보며 말하자 진제환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 목소리도 약간 쉬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얽혀들었다.

‘그래. 이런 게 차라리 마음에 드는군.’

망설임이 사라지고 정신없이 키스하면서 나는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진제환이 혀를 뽑아낼 것처럼 빨아들이는 통에 입 안이 아렸다. 적당히 하라고 한 번 꽉 힘주어 혀를 씹자 움찔한 놈이 고개의 방향을 틀어 밑으로 내려갔다.

맞닿은 몸에 와 닿는 진제환의 바지춤에서 뭔가가 딱딱하게 배기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남자의 발기한 물건이었다.

나는 아직 발기까지 하진 않았기에 진제환이 내 몸과 접촉하면서 발기했다는 사실이 좀 충격이었지만 정작 놈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발기한 것을 보니 정말로 진제환이 나를 그런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보고 흥분할 게 뭐가 있다고…….’

진제환은 뒤이어 정승조가 물어뜯어 거즈를 붙인 자리에 한 번 부드럽게 키스한 다음 그 옆쪽으로 옮겨가 아프지 않게 꽉 물었다.

“음…….”

약간 아프다는 신호로 신음을 흘리자 이를 뗀 녀석이 개처럼 그 부분을 핥고 빨아들였다. 좀 간지러웠지만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진제환의 상의를 위로 밀어 올리고 아까 놈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한 번 허리께를 만져 보았다.

타인의 몸을 이렇게까지 제대로 만져 본 것은 처음이라 조심한다고 했지만 진제환도 많이 간지러웠던 모양이었다. 흠칫하고 옆으로 튀었던 허리가 살짝 떨린다 싶더니 발기해 있던 물건이 위에서도 확실히 모양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솟아올랐다.

그것을 보자 어쩐지 내가 다 민망해지는 기분이라 손을 떼었는데 목을 빨아들이던 진제환이 으르렁거리듯이 낮게 속삭였다.

“더…….”

더라고? 원한다면 해 주마. 다시 한 번 손을 대고 허리에서 시작해 등 쪽으로 매만지며 올라가자 진제환이 내 목덜미에 대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

어쩐지 이쯤 되니 진제환이 나를 얼마나 만질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제환을 얼마나 만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견갑골 쪽까지 올라간 손으로 곡선을 그리듯이 매만지자 진제환이 드디어 목에서 떨어져 나간 뒤 한 손을 내 바지춤에 올렸다.

“읏…… 잠깐.”

발기해 있지 않아 얌전한 내 상황을 보고 진제환이 눈썹을 찡그린다 싶더니 허리를 쑥 내려 내 몸을 밀착해 끌어안고 내가 했던 것처럼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아까 맛보았던 오싹한 간지러움을 또 느껴야만 했다.

“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제환이 슬쩍 바지 위로 맞닿아 있던 자신의 발기된 물건을 흔들어 문질렀다.

“…으!”

민감한 부분이 얌전히 닿아 있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놈이 허리를 움직여 문지른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 튀는 것 같은 충격이 달렸다. 그것이 흥분이라는 것은 한 번 더 문질러졌을 때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제환은 흥분했어도 나는 끝까지 발기하지 않을 줄 알았던 터라 아까보다 더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오랜만에 느낀 성적인 흥분을 참는 것이 힘이 들어 숨이 가빠졌다. 인상을 찌푸린 내 표정을 보고 반쯤 감았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을 띤 진제환이 천천히 반복해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지만 하체에서 올라오는 실로 오랜만의 쾌감 때문에 눈을 꽉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자위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인지 옷 위로 문지르는 것뿐인데도 상당히 자극이 컸다.

여기까지 오자 이제 거부감이니 뜻을 모르겠느니 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가 점점 텅 비어가고 등에서 땀이 솟았다. 내 물건이 반쯤 발기한 것을 알아차리자 진제환이 다급하게 손을 움직여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 상태에서 한 번 더 허리를 밀어붙이자 부드러운 천 한 장만을 사이에 두고 문질러진 딱딱한 물건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허리가 비틀렸다.

“하아, 하아…….”

자꾸 강해지는 쾌감 때문에 이를 악물고 진제환의 어깨를 밀어내려 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제환이 다른 손으로 내 손가락에 깍지를 껴 바닥에 밀어붙인 뒤 가슴 쪽을 깨무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었다.

꽉 깨물린 오른쪽 가슴에 피가 몰리며 따끔거렸다. 진제환은 그쪽도 목에다 했던 것처럼 핥으면서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자꾸 허리를 움직이면서 여기저기 깨물어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복수할 생각으로 아까부터 계속 시선이 갔던 진제환의 목 쪽에 이를 가져다 대어 그대로 꽉 씹었다. 흥분 때문에 배어든 땀의 소금 맛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목덜미나 가슴을 씹으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정말 급박한 사정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 살을 빨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이는 진제환은 발기는 먼저 했지만 아직 사정할 기미는 없어 보였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할 것 같은데…… 그건 싫다고.’

나는 진제환의 등과 허리를 문지르는 데 쓰고 있던 한쪽 팔을 꺼내 벗겨진 버클과 지퍼 사이로 나와 있는 속옷 위에 손을 대 보았다. 처음으로 손대 보는 남의 물건 감촉 때문에 한창 흥분 도중이었음에도 조금 식어버렸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진제환은 반대로 예상치도 못했던 듯 손이 닿는 순간 허리를 급격히 튕기더니 다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나보다 덩치도 큰 놈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것도 재미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살짝만 대고 있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하던 도중에 힘겹게 웃으며 놈의 물건을 만지는 손에 힘을 주니 진제환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진…제환, 너…….”

반응이 너무 알기 쉽다……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들은 순간 진제환은 완전히 참을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손을 대고 있었던 속옷 안쪽의 물건이 사정없이 떨리면서 그대로 폭발해 버리는 감각을 나는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놀라서 밑을 내려다보려 했는데 진제환이 또다시 이성을 잃은 표범처럼 달려들어 혀를 빨아들이고 등줄기를 긁었다.

“으윽……!”

이어서 손을 댄 것은 내 바지 버클이었고, 항의하기도 전에 쭉 내려간 지퍼 위로 큰 손이 와 닿았다. 뜨거운 손의 감촉이 느껴져 허리가 떨리는 사이 진제환이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던 물건을 내 속옷 위에 대고 그대로 쿡 하고 찔러 올렸다.

“…….”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절정은 뜨거웠다.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과 함께 참으려 했던 것이 투둑 터져 나와 옷을 적셨다. 절정의 순간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격렬한 사정감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결국 젖혀진 채 떨리는 허리를 얌전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 하아…… 하아…….”

모든 것이 끝나고 나자 뿌옇게 변해 있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도발 당했다지만 대체 내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돌아온 이성이 처음으로 통제 불능이었던 육체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진제환이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정을 했는데 먼저 사정한 놈의 물건은 어느새 다시 젖은 속옷 위로 반쯤 단단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은 뭐 때문에 또 이렇게 된 거야?’

황당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진제환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보니 놈이 내 입술에 쪽 하고 가벼운 키스를 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눈빛이었다.

“……나 때문에 네가 느꼈어. 그렇지.”

“너…….”

“봐.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도,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야.”

민망하니 입 다물라고 하기도 전에 나온 두 번째 말 때문에 나는 차마 이젠 좀 떨어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진제환은 말을 잃은 내 등 뒤로 양팔을 둘러 품 안에 꽉 가두었다. 그것이 꼭 나에게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사정까지 가버린 상황에서 말로만 했을 땐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상대의 마음에 대해 어쩌면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느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게나 많이 말로 듣고도 제대로 감이 안 왔던 것을, 단 한 방에 말이다.

그러나 진제환이 나를 껴안은 상태에서 눈에 먼저 띈 목 옆쪽 부분을 또 깨물고 핥는 소리가 들려오자 할 건 하더라도 축축한 상태에서는 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씻자. 떨어져.”

말을 해 봤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자꾸 목을 깨물어 대는 행동에 짜증이 났다. 사정하면서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손을 들어 목 뒷부분을 가볍게 손날로 내려치자 그제야 움직임이 멈추었다.

“잠시만…….”

더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니 너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늘어져 있다가 온몸에 마지막으로 남은 기운을 모아 진제환을 뒤집어 밀쳐버린 뒤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서서 바지를 끌어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내 경우 걷는 것만 해도 힘이 무척 많이 드는 일이라, 온몸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욕실까지 가는 것은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노동이었다.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욕실 안쪽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나자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건 나였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한 방에 남자끼리 여기까지 온 거지. 내 자신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육체는 당연히 정신과 끈기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어왔던 내 인생에 방금 있었던 일은 상당히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후회는 안 된다는 점인가.’

나는 옷을 벗어 던지면서 고개를 저어 복잡한 생각을 날려 보냈다.

둘 다 씻고 나와서 소파에 앉아 있자 졸음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아직 밤이라기보다는 저녁 시간에 불과하니 벌써 자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조용히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찰나 진제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후회돼?”

“뭐가?”

“한 게.”

나는 그 말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똑바로 감았다 떴다.

“내가 후회가 되었다면 이러고 있진 않았을걸.”

어이가 없어 대답해 주었지만 진제환의 표정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긴 했지. 내가 정말로 네게 많은 부분을 허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직은 그것뿐인 것 같다. 이것뿐이라서 마음에 안 든다면 후회하느냐는 말은 오히려 내가 네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서야 진제환은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어.”

그러고는 자신감 없던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해 잠시 후에는 또다시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어 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는 방금 그 말을 솔직하게 해 준 것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오늘은 아까 그걸로 끝이다.”

“응.”

“그러니까 떨어져라.”

“응.”

놈은 대답은 유치원생처럼 잘했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졸리니까 좀 자겠다고 희미하게 말한 뒤 그냥 그 상태 그대로 눈을 붙이고 말았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하루 동안 상당히 긴장감이 쌓여 있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잠결에 입술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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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놈의 사막. 가도 가도 끝이 없네, 정말!”

키온 형이 작열하는 태양을 노려보며 크게 투덜거렸다. 나는 말할 기운도 없이 축 처진 몸으로 한발 한발 힘들게 모래 위로 발을 내디뎠다.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제 곧 다시 에데니아의 물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젠장. 끔찍하군.’

“카르야, 몸은 좀 괜찮아?”

“……죽지는 않으니까.”

형의 걱정에 진심을 담아 대답한 뒤 고대 저장의 반지를 들어 “물약.” 하고 중얼거리자 손안에 푸른 물약병이 나타났다. 예쁜 바다 같은 색깔이었지만 이것의 향과 맛을 이미 죽을 만큼 맛본 나에게는 바다가 아니라 지옥불처럼 느껴졌다.

힘겹게 병뚜껑을 막고 있는 코르크를 뽑은 뒤 한입에 털어 넣고 삼키자 뭐라 설명할 수 없이 꿀꿀한 향이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면서 진한 화장실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쉽게 말하자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물약의 단 한 가지 장점은 효과가 빠르다는 것이라 먹자마자 화아 하는 기운이 몸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어느 정도 쌩쌩하게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맛이 너무 없어.’

나중에 에데니아를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이 물약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활력이 솟은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도창.”

어느 정도나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도창을 부르자 눈앞에 슉 하고 반투명한 대륙전도가 나타났다. 대충 위치를 보아하니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엘프의 숲이 나타날 것 같았다.

“형,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아.”

“오, 그래? 그럼 조금 더 속도를 내서 가볼까?”

형이 반색하면서 걸음 속도를 높였다. 나 또한 그 뒤를 바짝 쫓아 따라가면서 제발 어서 엘프의 숲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의 지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초록색 물결이 보이는 듯도 했다.

한참 뒤, 정말로 사막 위에 솟아난 페리도트 빛 숲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 광경을 처음 보는 키온 형이 입을 딱 벌렸다.

“와…… 진짜 끝내주네.”

그러나 감탄하는 형보다 더한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 나였다. 크란과 전에 왔을 때도 더 이상 물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홀가분함을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홀가분함을 넘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내 입에서까지 고약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천천히 숲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나무가 솟아난 한 선을 경계로 진득한 모래땅이 아니라 딱딱한 맨땅을 밟는 감각이 제대로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니 숨이 턱턱 막히던 공기 대신 청명한 산소가 폐 속까지 가득 찬 것 같은 모래먼지를 씻어주었다.

“햐…… 여기에 이종족이 산다 그 말이지?”

형이 내 뒤를 따라오며 나무들을 만져 보기도 하고 땅 위에서 뛰어보기도 하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빛냈다.

“카르야, 넌 저번에도 여기 왔었다니 무슨 종족인지 봤겠네? 무슨 종족이야?”

“응, 엘프.”

“엘프? 우와. 어, 윽.”

엘프라는 말에 반색하며 뒤돌아보던 형이 앞에 있던 나무에 부딪힐 뻔하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미스트에도 정말 이종족이 존재하긴 하는 거였구나. 굉장한데. 퀘스트를 하니 이런 걸 보게 되는 건 참 좋단 말이야. 다들 NPC겠지? 어땠어? 엘프라면 역시 미인이지!”

“…….”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형 때문에 나는 전에 이곳에 왔던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아야 했다.

자세한 얼굴이 기억나는 엘프라고 해 봐야 시라비 렌과 이루미네뿐인데…… 시라비 렌은 성별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곱상하게 생겼었지만, 엘프 마을에서 만났던 다른 남자 엘프들은 안 그랬었던 것 같고 여자 엘프들도 얌전한 생김새이기는 했지만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면 역시 제일 미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엘프는 이루미네인가?

“뭐…… 그런 편이었던 것 같은데…….”

얼버무리며 말했지만 형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치가 높아진 듯 어서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그런데 앞장서려고 보니 숲에서 그때 내가 정확히 어느 쪽으로 갔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카르야, 안 가?”

“잠깐만…….”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다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니 어느 쪽이 길인지 알 수가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던 도중 사람이 걸은 흔적이 남아 풀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부분을 찾아냈다.

‘여긴가?’

“이쪽으로.”

계속 신중하게 풀이 꺾여 있는 부분을 찾아내면서 앞을 더듬어 나아가려니 눈이 아팠다. 전에는 이쯤에서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제대로 된 길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한데…… 대체 그쪽은 어디였지?

“아, 카르야. 저기, 저기 뭔가 하얀 길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지 않냐?”

휘익-

그때, 언젠가 들어보았던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리고 끝도 없이 솟아오른 나무 위쪽에서 누군가가 휙 뛰어내려 우리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면서 떨어지는 탄력적인 착지법과 껑충하게 큰 키, 그리고 등에 맨 큰 활을 보자마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누구냐!”

그러나 나와 달리 이곳에 처음 온 키온 형은 깜짝 놀라 바로 주먹을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체를 밝혀!”

“형. 잠깐. 저 사람은…….”

“엘 프라마의 인간 손님들이여. 저는 수호하는 화살의 킬 라질입니다.”

전에 크란과 왔을 때 봤던 얼굴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냉랭한 얼굴에 짧은 머리칼을 한 킬 라질이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경계를 하던 형도 킬 라질이 고개를 든 순간 제대로 드러난 긴 귀를 보고는 그제야 그가 엘프임을 깨달았는지 멈칫 주먹의 힘을 풀었다.

“엘프……!”

“이루미네 님께서 벌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남의 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절도 있게 뒤돌아서서 앞장서는 모습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보다 보니 꼭 군인이 생각나는 킬 라질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는데 형이 옆에서 귓속말을 했다.

“카르야. 저놈 정말 엘프 맞냐? 엄청나게 수상해 보이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전에도 봤었던 엘프니까.”

“그럼 너하고 전에도 봤었는데 아는 척도 안 하는 거네? 와. 정 없는 놈들일세.”

아니, 모든 엘프가 그런 건 아니고 아마 저 엘프만 그럴 것 같은데…… 하는 중얼거림은 괜히 분개하는 형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임에 분명했다.

발걸음 속도가 빠른 킬 라질을 따라가는 것은 여전히 힘이 꽤 드는 일이었다. 울창한 숲속을 이리저리 빠져나가 드디어 두 번째로 와 보는 엘프 마을에 도착하자, 그림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듯한 아름다운 집들이 우리를 반겼다.

꼬마 엘프들이 오랜만에 보는 인간 손님에 호기심을 보이며 여기저기서 얼굴을 쏙쏙 내밀었고 어른 엘프들도 멀찍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나 땅 위에 자유롭게 지어 놓은 집들은 동화 속의 집들처럼 작고 아담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평화로운 기분을 들게 했다.

키온 형은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투덜거리던 것도 잊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표정이 되어 풍경을 감상하다 몇 번이나 뒤처질 뻔했다.

“장난 아닌걸. 나도 나중엔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마을을 가로질러 건너편 숲속으로 빠져나왔을 때 형이 처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엘프 마을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평소에도 기운이 넘쳐 보이던 눈이 굉장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엔 내 애마를 가져오기엔 무리니까 안 되겠지? 게다가 딸린 녀석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이런 곳에 집을 지으려면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평소에는 거의 자신의 집 이야기를 하지 않던 형이 가볍게 현실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아쉬워하는 것을 보니 형도 게임 밖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서 작게 웃음이 났다. 형만큼 직장인답지 않은 직장인도 아마 없을 것이다.

킬 라질은 우리가 뒤에서 무어라 떠들든 전혀 개의치 않고 돌과 나뭇가지들을 가볍게 밟고 올라가면서 이루미네의 동굴로 향했다. 땅에 흩뿌려지듯 깔려 있던 모래가 사라지고 돌이 나타나면서 절벽 밑까지 오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이곳입니다.”

“전에도 뵈었었지만 또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내가 후드를 벗으면서 인사를 하자 킬 라질이 살짝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닙니다. 제가 또 당신을 안내하게 되어 영광이지요. 이루미네 님의 제자여.”

“…….”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하필이면 호칭이 왜 이루미네의 제자란 말인가……. 그 닭살 돋는 호칭을 듣자마자 나는 내 정보창에 쓰여 있는 타이틀이 심히 부담스러워졌다. 키온 형도 순간 의아한 눈으로 킬 라질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이루미네의 제자라는 것이 나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을 파악했는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남의 속에 파란을 일으킬 말만 던져 놓고 전처럼 엄청난 도약력으로 점프해 나뭇가지 위로 뛰어오른 킬 라질이 순식간에 이리저리 나무와 나무 사이로 뛰어가며 사라져 버렸다.

“카르야. 언제 엘프 스승이 생긴 거냐?”

형이 그제야 대놓고 웃으며 질문을 했다.

“이루미네라… 대충 정보 조합해 보니 여기 사는 NPC 같은데. 맞아?”

“응.”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형이 또다시 크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내 등을 펑펑 두들겼다.

“그럼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네 스승 타이틀을 가져간 사람이다 그거지? 으하하하하. 네가 누구의 제자 칭호를 받았다니까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호칭이 참 귀, 귀엽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하.”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대신 형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형이 만날 사람도 아마 그 엘프일걸.”

내가 조용히 대답하자 형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응?”

“이루미네는 엘프 종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형이 만나야 할 이종족의 지도자도 아마 이루미네일 거야.”

“어……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나까지 여기로 데려온 거였나.”

내가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동굴 안으로 먼저 들어서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형, 이루미네는 상당히 성격이 안 좋아.”

“어, 어엉?”

형이 내 뒤를 쫓아오면서 “아니 카르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방금 내가 웃어서 형한테 화난 거냐? 응? 대답 좀 해 봐라, 카르야!” 하고 뒤늦게 소리를 쳤지만 내 입가에 떠오른 웃음은 사라질 줄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나를 정말 열 받게 하다가 나중에는 이루미네의 제자 칭호로 퀘스트를 끝마치게 해 주었던 이루미네가 과연 키온 형에게는 어떤 대가를 받고 퀘스트 완료를 하게 해 줄 것인지 실로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루미네가 살고 있는 동굴 내부로 들어섰다. 익숙한 갈림길을 보니 정말로 이루미네를 다시 만난다는 실감이 서서히 느껴지고 있었다.

‘전에 만났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새삼스럽군.’

점점 폭이 좁아지는 길을 지나 몇 분 정도 더 나아가자 갑자기 모든 공간이 탁 트이면서 현기증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동공이 나타났다. 나는 미리 각오를 했기에 어지럼증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형은 순간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비틀거리다 자세를 잡아야 했다.

“으윽, 젠장. 깜짝 놀랐네. 뭐야, 여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형이 눈만 껌벅이고 있을 때 나는 동공의 한가운데에 하얀 치마를 입고 앉아 있는 금발의 엘프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루미네. 오랜만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키온 형이 내 시선의 끝을 같이 쳐다보다가 그대로 잠시 입을 딱 벌리고 멈춰 섰다. 여전히 신비스러운 긴 금발을 바닥에 그림처럼 흐트러뜨린 채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 있던 이루미네가 똑바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내 말대로, 우리가 또 만나게 될 때까지는 고작 몇 달도 걸리지 않았구나, 아가.”

“저 여자가… 이루미네야?”

[ 루미…… 정말 루미군. ]

형의 질문과 더불어 머릿속에서 갑자기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리춤의 막대기에서 선명한 붉은빛이 반짝거리며 슈페리어가 반응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루미네의 말을 듣자마자 전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 말을 잊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숲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설마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계속 벌렸다 닫았다 하기를 반복하는 사이 이루미네가 이번에는 키온 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몸 위에 걸친 의복은 전투와 전사를 가호하는 여신의 것이로구나. 분명 그녀가 나를 만나라 보낸 것이겠지?”

형의 목적을 듣지도 않고 정확히 맞히는 이루미네는 마치 전지전능한 예언자처럼 보였다. 나도 놀랐지만 키온 형도 많이 놀랐는지 눈만 깜박거리다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아주 귀신이네.”

형의 성격다운 대답이긴 했지만 워낙 어투가 거친 탓에 이루미네가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는 의외로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귀신? 호호호. 여신의 이번 선택자는 꽤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그런 말 참 많이 들었죠. 그런데 어떻게 안 겁니까?”

“타인의 비밀을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형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이루미네가 손짓을 해 우리 둘 다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도 너희가 정확히 무슨 목적으로 내게 온 것인지까지는 다 알지 못해. 이리 와서 이야기를 해 줘야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천사 같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여전히 들으면 깨는 느낌의 활달한 말투도 그대로인 이루미네. 나는 조용히 웃고 말았다.

형과 함께 이루미네의 앞에 다가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서로 누가 먼저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해 눈빛이 빠르게 오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형이었다.

“저부터 이야기하죠. 말씀대로 저는 스가 여신의 대사제를 맡고 있습니다.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신전에 내려온 여신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여신께서는 500년 만에 봉인에서 풀려난 뒤 지금까지 신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북쪽에서부터 서서히 강력해지고 있는 어두운 기운 때문에 자꾸만 힘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두운 기운의 정체에 대해 500년 동안 결전의 성지에서 북쪽을 감시해 온 숲의 딸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니 그 정체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부탁드린다고 하였습니다.”

평소의 양아치 같던 이미지와 달리 긴 말을 더없이 매끄럽게 전한 형을 보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북쪽의 어두운 기운이라면…… 역시 시저 때문이겠지.’

유저 퀘스트 동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측 가능했을 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이루미네의 표정이 제법 묘하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살짝 미소를 띠고 있던 입술이 잠시 텀을 두고 벌어졌다.

“조언과 도움을 부탁한다…라.”

“예.”

“그런 것이 필요 없으실 분께서 자신의 선택자를 내게 보낸 이유는 대충 알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 너는 내일 내가 다시 부를 때 와.”

지금 당장은 안 된다는 말까지는 괜찮았지만 어쩐지 그다음 말에서는 나가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이것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키온 형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그러면 저는……?”

“물론 먼저 나가 봐야지.”

“네?”

“네는 뭐가 네야. 시킬 일이 있으니까 가서 내일까지 다 해 오라는 뜻이야. 흠…….”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빠졌던 이루미네가 싱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 동굴 밖 숲에는 밤이 되면 달빛을 받아 달빛 은청조롱꽃이 핀다. 그런데 그 꽃들은 보름밤이 되면 색이 평소의 은색에 청색이 조금 섞인 것에서 선명한 푸른색으로 바뀌게 되지. 마침 오늘이 딱 보름인 것은 이때를 위한 안배가 아니겠어. 자, 나가서 내일 내가 부를 때까지 은청조롱꽃 100개를 가져다주렴.”

순간 형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 또한 생각보다 심한 이루미네의 퀘스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때도 밤만 되면 말하다 말고 사람을 내쫓거나 며칠 만에 6서클 마법을 배워오라고 하는 둥의 일을 시키긴 했지만 저렇게 갑자기 생각해 낸 것 같은 노가다성 퀘스트를 준 적은 없었다.

형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이루미네를 노려보며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에는 그놈의 퀘스트가 무엇인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고 말았다.

“……카르야, 미안. 난 먼저 가서 꽃 캐고 있어야겠다.”

작은 인사를 남긴 형이 내 어깨를 토닥거린 뒤 돌아서서 갑자기 닥친 퀘스트에 대한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동굴을 나섰다.

“자, 그럼 내보낼 사람은 내보냈으니 이제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가 된 건가?”

형이 완전히 동굴을 나서는 것을 보자마자 이루미네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조용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대체 방금 왜 그런 퀘스트를 준 겁니까?”

“글쎄. 나는 상관없지만 그는 별로 상관없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놓고 키온 형에게 준 퀘스트가 억지성이라고 말하는 이루미네에게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이루미네는 뚱딴지같은 대답만 했다.

“예?”

“……응. 잘 알고 있네. 루미.”

반문한 것과 거의 동시에 내 입이 한 번 더 또렷이 움직이며 낯선 말을 토해냈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누구인지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허리춤에서 붉은빛을 죽일 생각도 하지 않고 환하게 빛나고 있는 나무 막대기. 그리고 그 속에 있는 500년 전의 영웅 마법사.

‘슈페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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