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늪 (25/57)

#외전, 늪

어릴 적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매우 고요한 늪 같은 세상에 혼자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는 감상 정도가 현재까지도 소년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 고요한 세상에서 제일 처음에 마음에 들어온 것은 숫자 카드였고 그다음은 숫자 그 자체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아무 곳에나 종이가 있으면 펜을 들고 숫자를 쓰고는 했다.

그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어서 계속해서 그것들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바깥의 요소들은 소년을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점차 강제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자신 주변의 일을 파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깥과 접한다는 것은 무척 질척질척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과 같이 소년에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재했다. 그러나 소년이 조금 나이를 먹어 어느 정도 타인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짐을 싸서 집을 빠져나왔다.

그때 소년보다 훨씬 더 큰 소년이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무어라 크게 소리쳤던 것 같지만 어머니는 그 손을 뿌리치고 빠져나오면서 내내 눈물을 찍어냈다.

새로 도착한 집에서는 어머니와 소년을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늙은 두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라고 부르라고 했고 앞으로는 소년이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새로운 집에서는 소년에게 숫자를 쓰지 말고 다른 쪽을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변에서 시끄럽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소년은 금세 그 집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런 안정적인 환경 덕분이었는지 소년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점차 보통 사람과 같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자신의 주위 또한 조금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의 부모는 이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두 아들을 한 명씩 갈라 데리고 살기로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때에서야 소년은 어머니가 자신의 손을 잡고 집을 떠나던 날 떨어지지 않으려고 소리치던 소년이 실은 자신의 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혼한 뒤 외가댁으로 돌아와서 그때까지 불렸던 그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불리는 이름과 집에서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그에게 어머니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게 네 진짜 이름’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소년은 두 개의 다른 이름에 다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나는 원래 가지고 있던 호적상의 이름으로 학교나 대외적으로 쓰였지만, 다른 하나는 오직 집 안에서만 개인적으로 그를 부르는 데에 쓰였다.

외할아버지는 그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넉넉한 자산가였기 때문에 이혼 후 몇 년 뒤부터 계속 침대에만 누워 시름시름 앓는 딸과 아이답지 않은 손자를 돌보는 데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년을 보며 늘 만족스러운 빛을 아끼지 않았고, 소년이 다른 정상 아이들과 다르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공공연히 이 아이가 자신의 후계가 될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니곤 했다.

나이를 먹고 계속해서 자라나면서 소년은 점점 좋아하는 숫자와 관련된 과목에 놀라운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평범한 어린아이가 보일 수 없는 엄청난 수학 능력에 어른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소년에게 있어서 수학은 삶의 당연한 한 부분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그리 놀랍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른들은 소년이 좀 더 수학에만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중학교 무렵부터 또 다른 분야들로 관심 분야를 옮겨 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육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사내 녀석들이라면 누구나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주먹다짐을 해대며 암암리에 서열을 정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소년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늘 따로 불러내어 원숭이처럼 소리치며 때리고는 했다.

“기분 나쁜 새끼! 매일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숫자만 적지!”

“키만 멀대같이 크면 뭘 해? 음침하게 굴지 좀 마!”

“선생님 편애 받으니 좋냐, 이 병신 새끼야? 너 정신병 있다며?”

소년은 처음에는 그저 묵묵히 참기만 했지만 어느 순간 폭력이란 참는다고 해서 언젠가는 꼭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자신처럼 아이들에게 늘 맞고 다니던 다른 아이가 결국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지기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폭력이란 것이 결국은 생이 마감될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으로 끊어낸다 하여도 아무도 죽은 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소년은 더 이상 폭력을 참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관찰하자 싸움 서열상으로는 끄트머리에 있는 녀석들이 주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열이 높은 놈들은 자기들끼리의 서열 다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소년에게는 관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서열이 낮은 녀석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혼자 다니는 소년에게 자꾸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행위를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없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진 소년이 외할아버지를 찾아가자 한참 일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눈을 맞춰 준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구나, 유완아.”

소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할아버지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더불어 방해받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보자 할아버지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계속 맞고 있었다고? 너는 그 아이들에게 맞는 것이 분하지 않던? 같이 때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단 말이냐?”

“네.”

“그러면 네가 맞다가 혹시라도 잘못되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소년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는 난감한 듯이 웃었다.

“허허, 이것 참. 내 손자가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니고 있었다니.”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소년이 원하던 답을 말해 주었다.

“그 나이 대에 가져야 할 건 육체적인 힘이란다. 육체적인 힘이 월등하면 대부분의 놈들은 널 건드리지 않게 되겠지.”

그래서 그다음 날부터 소년, 진유완은 여러 가지 운동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운동에 열중하는 사이 그동안 자신을 때리던 놈들이 차례차례 전학을 가거나 이사를 간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운동이라는 것은 신기했다. 처음에는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피곤하게 여겨졌었지만 적응하고 나니 이것은 수학만큼이나 묘한 재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이 수학과 달랐던 점은 확실한 답이 정해져 있어 그것을 찾아가야 하는 과정을 즐기는 놀이 같은 수학과 달리, 정해진 답은 없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 또한 있었다. 자신을 잊고 계속해서 계산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어릴 적의 그 기분 좋았던 고요한 늪 속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던 수학처럼, 운동 또한 몸을 움직이는 데에 강하게 집중하게 되면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게 되면 더 이상 육체만 단련해서는 올라갈 수 없는 단계가 생긴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영원히 그 안에서 유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기분 좋은 늪 안에서의 잠깐은 평소 보내는 무의미한 몇 시간보다도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몸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던 운동은 서서히 정식 무술들을 배우는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진유완을 얕잡아 보았던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월등히 커지고 단련자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게 된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려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과연 할아버지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진유완은 어느 한 스포츠나 무술을 진득이 배우지 않고 늘 어느 정도 배웠다 싶으면 다른 무술로 넘어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는 했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가 싫증을 빨리 내는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했지만, 실제로 그는 각각의 종목이 다른 개별의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인다는 하나의 이름 밑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즉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 수단으로 무엇을 하든 딱히 상관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즈음, 수학에만 관심을 가졌던 때에서 한 단계 발전해 컴퓨터란 것을 접하게 된 진유완은 생전 처음 보는 숫자로 구현된 무한한 세계에 엄청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지 얼마 뒤부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초보 수준에서 이용되고 있던 가상현실 프로그래밍 구현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진유완이 프로그래밍에 재능을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종종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의 검사를 맡기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진유완은 항상 놀라운 성과를 보여 그의 존재를 아는 이들의 경악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만큼은 그는 누구보다도 집념과 끈기가 넘쳐흐르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나 진유완이 고등학생이 되자, 각종 스포츠와 무술을 섭렵한 그에게 많은 부에서 대회 대타를 요청해 오기도 했고, 대련 상대로서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진유완은 그 전부를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남으면 적당히 취미 삼아 응해 주고는 했다.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은 얼굴 때문인지 그 나이 또래의 소녀부터 시작해 지나가다 마주치는 성숙한 여성들까지 진유완에게 강한 호감을 보였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숫자와 육체 단련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진유완의 주변에는 좀 친해져 보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떨어지는 자들과 사귀어 보려고 접근하다 울며 뛰쳐나가는 이들이 즐비했다. 학교에서 진유완의 이미지는 어느새 그다지 좋지 않은 쪽으로 변질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것은 당사자뿐이었다.

그 무렵, 오래도록 시름시름 앓아왔던 진유완의 어머니가 드디어 눈을 감았다. 진유완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네 아버지만큼은 만나지 말라 말했던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배신감이 너무 커 결국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여자는 평생 동안 남편을 닮은 아들의 얼굴만을 그립게 바라보다 갔다.

그러나 남겨진 진유완은 새로이 큰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눈을 감은 창백한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는 어머니를 알던 사람들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자신의 눈에서는 그런 비슷한 액체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로 검은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진유완을 보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 남들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 어딘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를 태우던 날에는 날씨가 아주 맑았다. 세상과 유리된 듯한 투명한 벽 너머로 관이 들어가고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해 달라는 안내문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가 옆에 서서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진유완의 등을 토닥거렸다.

“불쌍한 것, 울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유완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울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함에 담긴 채 한 평도 안 되는 납골당의 자기 자리에 사진과 함께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진유완은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그 앞에 서서 유리 속 어머니의 사진 액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너무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0년이 넘도록 늘 자리보전만 하고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지만, 그런 그녀가 이제는 불살라져서 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별로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과연 어머니가 슬퍼하지도 않는 이런 자신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장례식에 온 이들이 손가락질하며 말했듯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될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진유완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한 가지를 결심하기로 했다. 어머니를 위해 울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머니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기로.

죽은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남들에게서 잊히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었었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이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오늘 울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의 표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드디어 발걸음을 돌리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진유완의 앞에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둘 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진유완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진제환인가?”

그들 중 나이가 훨씬 젊어 보이는 남자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이제 고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도 진유완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네 형이다. 이름은 진서환이지. 네가 너무 어릴 때 나가서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은데, 이분은 네 아버지이시다.”

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의 남자는 말없이 진유완을 흘긋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강하고 압도적인 야수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만 진유완을 바라볼 때에는 마치 물건을 평가하는 듯한 시선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도 자기 세계에 갇혀 있나 보지? 컴퓨터를 그런대로 잘 다룬다기에 기대해 보았는데 뭐, 너무 기대했던 것 같구나.”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평가당한 뒤 별 볼 일 없는 물건을 보는 시선으로 버려지고, 형이라는 남자에게는 매우 열등한 존재로 폄하당하는 눈빛을 받은 진유완은 마음속으로 약간 기묘한 충격을 느꼈다.

자신과 닮은 얼굴에게 부정당한 느낌은 무척 끈적하고 기분이 나빴으며, 빨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더러운 얼룩 같은 것이었다. 이름을 진서환이라고 밝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고 떠났고 그곳에서 진유완은 ‘(주)메이지 소프트’라 쓰인 회사명을 보았다.

진서환이 진유완에게 연락해 온 것은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안녕, 진제환.”

“……누구십니까?”

“진서환. 네 형이지. 저번에 장례식 때 보았는데 기억 안 나나?”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드는 신작 인기 게임들을 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게임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대충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진유완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문득 변덕스럽게 한 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제안을 승낙했다.

며칠 뒤 집으로 도착한 게임은 그럴싸한 겉포장과 달리 생각보다 허술한 체계에 따분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었다. 진유완은 얼마간 그 게임을 플레이해 본 후 곧 흥미를 잃었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게임의 기술적 완성도였을 뿐이지 즐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전화를 걸어 게임을 그만둔 이유를 물었던 진서환은 이유를 듣자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하, 그래. 역시 소문이 그냥 난 것은 아니다 이건가. 네가 그 게임을 파헤쳐 준 덕분에 치명적 버그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게 생각한다. 네가 괜찮다면 종종 이런 일도 부탁하지. 물론 대가는 정당하게 주마.”

진유완 자신은 좋아하는 육체 단련을 즐기며 때때로 자신이 생각해 본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것들을 인터넷에 올려 간단한 평가를 받는 정도로 취미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지 못하는 사이 인터넷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 천재적인 프로그래머가 끼치는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매우 강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몇 번은 프로그램을 보고 그를 직접 찾아오는 자들도 있었지만 진유완은 그것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쯤 되어 진유완은 처음으로 바이크를 접했다. 그 나이 대의 소년들이라면 모두들 동경하는 바이크 때문에 교실 안에는 관련 잡지들이 간혹 떨어져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다 그것을 보게 된 진유완은 바이크를 직접 타 본 뒤 그 스피드에서 오는 해방감에 큰 만족을 느꼈다.

도로를 미끄러지듯이 질주할 때 느껴지는 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스릴과 해방감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느 정점에 도달하면 세상이 정적에 다다라 한 점이 되어 조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또 ‘늪’의 느낌과 흡사했던 것이 바이크를 타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들쑤시며 달려대니 차에 치어 버려진 동물들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살아 있는 놈들을 몇몇 동물 병원에 맡겼더니 다 나은 후에 따로 맡길 곳이 없었다. 진유완의 방에 작은 동물들이 몇 마리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말 못 하는 동물들이 그의 기운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다가와 애교를 부리는 것은 그의 주변에 다가오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대비되어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18세의 전반을 바이크에 푹 빠져 한동안 운동부에서 부탁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문불출했던 그에게 어느 날 처음 보는 녀석들이 허리를 몇 번이고 숙여 보이며 부탁을 하러 왔다.

“진, 진제환! 제발 부탁이야! 전국대회가 곧 코앞인데 부장이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어!”

“그래서?”

의아하게 묻자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던 녀석이 힉 하는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 아니. 그러니까…….”

“우, 우우우리 검도부에 잠깐만 대리 입부를 해서 대회에 참여해 줬으면 한다, 진제환! 원한다면 시간당 아아아아아르바이트비라도 쳐 줄게!”

다른 녀석이 눈을 질끈 감고 외치는 말을 듣고 잠시 눈을 몇 번 깜박인 진유완은 교실 제일 뒤편에 혼자 앉아 있던 자리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 순간 움찔하는 녀석들이 느껴졌지만 진유완은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해 보았다.

최근 할아버지가 프로그램의 검토를 두어 개 맡겼었는데, 대회라면 꽤 오랜 기간 운동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므로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렵겠는데…….”

낮게 내뱉자 그 말이 고함 소리라도 되는 양 찔끔했던 이들이 이내 기운을 차리고 왁왁거리며 소리쳐댔다.

“진제환 너, 강한 놈이랑 싸우는 거 겁나게 좋아한다며! 이번에 나와! 나온다니까?”

“진짜 센 놈 두 놈이 동시에 떴다고!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어!”

“싸워 보고 싶지 않냐? 응? 피가 끓지! 그럴 거다!”

단지 육체의 단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강자와의 대련이라는 것을 오래 전에 알아차리고 기회가 되는 한 즐기고 있었던 것뿐인데, 어느새 소문이 조금 이상하게 와전된 듯했다.

시끄러운 것이 싫어 지그시 인상을 찌푸리는 진유완을 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찔끔한 검도부 일동 중 하나가 갑자기 “이, 이걸 좀 보고 다시 말해 줘!” 하고는 품속에서 휴대용 가상홀로그램 플레이어를 꺼내 집어 던지듯 떠안겼다. 그러고는 뜻밖의 일에 인상을 찌푸린 진유완을 피해 일제히 도망가 버렸다.

“우워워워! 튀어!”

“시 시발 존나 잘생기고 무서운 놈은 저놈이 처음이야!”

시끄러운 일당들이 도망간 뒤 진제환은 멍하니 가슴에 처박힌 PVP를 바라보다 천천히 집어 들어 책상 위에 놓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기계를 보고 내장 OS 프로그램과 관련된 뭔가를 보라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주변에 앉아 있는 모든 반 학우들이 숨죽여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PVP를 살펴보던 진제환은 한참 후에야 그 프로그램 안에 든 뭔가를 보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동영상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 잘한다! 이겨라!

‘타앗! 타앗! 타앗!’

‘후욱!’

검도 도장 한가운데 같은 곳에서 장난스러운 환호성과 함께 중앙에 서 있는 두 소년이 격돌하고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몸도 좋았지만 다른 한 명은 그보다 작고 근육이 별로 없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을 갖고 있었다. 둘 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상당한 실력자들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특히 키의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힘의 차이는 없다는 듯이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상대의 공격을 전부 쳐 내는 작은 소년에게서는 그 나이에 느끼기 어려운 강자의 여유까지 보일 정도였다.

‘어떻게 저런 힘을 낼 수가 있지?’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그것은 육체적 힘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의 힘인 것 같았다. 손목과 팔의 움직임을 교묘한 방향으로 틂으로써 상대의 공격을 최소한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이 마치 괴력처럼 보였던 것이다.

- 잘한다, 무헌아! 또 눌러버려!

- 정승조! 언제까지 질 거냐? 하하하!

- 야, 밥 안 먹냐? 빨리빨리 끝내자!

주변에서 각자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가 처음에는 매우 거슬렸지만 빨리 끝내라는 고함이 나온 이후부터는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 하아!

조금 더 마른 쪽이 세찬 기합을 지른 뒤 검을 새로 고쳐 쥐고 달려든 순간부터 진유완은 그렇게나 싫어하던 소음에 대한 것들을 모두 잊었다.

‘…….’

동영상을 노려보듯이 보고 있는 눈가가 한 번 움찔거리고, 선뜻한 전류가 지나간 듯 손끝이 몇 번 덴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교복 셔츠 사이로 균형이 잘 잡힌 몸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눌린 용수철처럼 뻣뻣이 긴장하고 있었다.

5분여가 지나 동영상 재생이 완료되고 난 뒤에도 정신을 놓은 듯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던 진유완은 무언가에 홀린 양 다시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반복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잘한다! 이겨라!

‘타앗! 타앗! 타앗!’

또다시 똑같은 소리가 나오며 동영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소년이 화면 안에서 다시 대결하는 광경을 진유완은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후, 진유완은 그 동영상을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봄으로써 같은 반 학생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뒤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검도부로 향했다.

드르륵!

“이 새끼. 신입들은 들어오기 전엔 인사부터 하라고……헉! 진제환!”

“이 동영상.”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보느라 살짝 충혈된 눈으로 휴대용 플레이어를 들어 보이자 기겁한 검도부 학생들이 말은 듣지도 않고 각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저거 누가 가져다 보여 주자고 그랬어?”

“너잖아!”

“아 시발, 저거 아끼는 거였는데…! 흑…….”

“포기해라, 저 녀석한테 안 맞는 게 어디냐.”

“이 동영상, 나한테 줘.”

“그래 쟤한테 주…… 아니, 뭐라고?”

“뭐?”

“정말이냐?!”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꿋꿋이 자기 할 말을 한 진유완의 진지한 눈에 검도부 학생들은 그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차…… 참가할 거야?”

“그래.”

믿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철저한 마이페이스로 살아가느라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된 그 진제환이 자신이 한 번 했던 말을 뒤집고 참가 의사를 밝혀오다니!

“우와와!”

그러나 진유완은 광란하며 날뛰는 검도부원들을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 나온…….”

“아, 거기 나온 두 명이 바로 시·도 통틀어 제일 잘나간다는 수운고 검도부 부장과 부부장이야. 짱이지? 그거 입수하느라 존나게 힘들었다. 수운고 새끼들, 기분 나쁘게 남자 동영상 따위가 뭐 그리 신급이라고 모시고 사는지 원.”

“나가면 확실히 볼 수 있는 거겠지.”

“그럼그럼! 안 나올 리가 있나.”

“그러면 동영상은 내가 직접 뽑아간다.”

“아,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라. 으하하하핫!”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좋다고 웃어대는 녀석들을 뒤로한 채 진유완은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동영상에 나온 놈들의 실력이 속임수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영상에서 본 그 충격적인 대련의 주인공들과 꼭 한번 대련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들면서 오랜만에 짜릿한 감각이 뇌에서부터 뺨과 팔뚝, 손끝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해도 적응되지 않는 소음으로 가득 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유완 자신도 이 시끄러움에 동조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때는 바로 이런 도전을 앞두고 기대감이 느껴질 때 외에는 없었다.

진유완이 걸어가는 복도의 창밖으로 한창 여름임을 나타내듯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이 보였다.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에 시선을 주었다가 자신의 손바닥을 한 번 꽉 쥐었다 편 진유완은 아까 전보다 한결 시원해진 눈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시원하게 불어온 여름 바람 한 가닥이 곧게 편 교복 셔츠의 등을 두드리듯 한 번 훑고는 가볍게 스쳐 날아갔다.

전국고교검도대회가 3개월쯤 남았던 때의 여름이었다.

진유완은 그 이후 다른 운동은 모두 잠시 그만두고 검도에만 신경을 써서 대회를 준비했다. 한창 열심히 타고 다니던 바이크도 그만두었고 컴퓨터도 3개월 동안에는 아예 만지지 않았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그의 뜻을 이해해 주었기에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일을 맡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었다. 덕분에 진유완은 여름 방학이 지나갈 때까지 열심히 검도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검도는 무기를 써서 하는 무술 중에서는 원래부터 상당히 좋아했던 것이었다. 숙련자들을 보면 누구나 동경할 만큼 화려한 멋이 있었지만 초심자부터 시작할 때에는 그런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이 그저 육체적 한계에 다다를 정도의 끈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좋았다. 한 동작을 하루 천 번씩 휘두르라면 보통 사람들은 도리질을 치며 도망갔겠지만 진유완에게는 그런 시간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소중한 때였다.

드디어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개학을 했다. 전국고교검도대회의 지역 예선이 시작되었다. 예선에 같이 참가한 학교의 검도부 녀석들 중에서는 예선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녀석이 진유완 말고는 한두 녀석밖에 없었다. 그조차도 아슬아슬하게 올라온 것이니 실질적으로 학교의 희망은 진유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진유완은 자신을 신 보듯 우러러보는 검도부 녀석들과 함께 전국고교검도대회 본선 대회가 열리는 APC 체육관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본선엔 누구누구 올라온 건지 다 봤어?”

이미 떨어졌지만 응원을 한답시고 온 다른 녀석들이 옆에서 아무리 신나게 떠들어댔어도 지금까지는 그저 자는 척을 하며 눈을 감고 흘려 넘겼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화제는 귀에 잘 들어왔다.

“야, 진제환만 한 놈은 그래도 별로 없더라.”

“별로 없다뿐이냐? 메달권에는 그냥 진입할 것 같던데.”

“그런데 역시…… 그 수운고 부장, 부부장 놈들은 다 올라온 거지? 에이…… 하나라도 사고가 생겨서 좀 빠져주길 바랐는데.”

한 녀석이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암묵적으로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진유완은 자신을 검도대회까지 오게 만들었던 PVP 속의 주인공들에 대한 말이 나오는 순간 가슴속이 거칠게 한 번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동영상 속의 놈들도 역시 본선까지 다 올라온 것이다. 이제 도착하면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영상으로 보았던 그놈들과 진짜로 겨룰 수 있게 된다는 실감이 났다.

“수운고 놈들…… 항상 메달권 안에 들면서 이번 년도엔 아주 싹쓸이를 하려고 그러나. 치사한 놈들.”

“야, 우리가 못 하는 게 문제지 그놈들이 잘하는 게 문제냐? 이럴 땐 두 놈이 붙어서 한 놈이 빨리 떨어지길 바라야 하는 거야. 알았냐?”

“푸하하하. 그거 진짜 그랬음 좋겠네. 듣기론 막상막하라던데 누가 이기려나.”

재치 있게 던진 말에 다른 녀석이 웃어젖히며 들었던 소문에 대해 궁금해하자 또 다른 녀석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막상막하는 무슨. 사실은 둘이 붙으면 한 놈이 매번 진대. 그것도 몰랐어?”

“엥, 그래? 의외네.”

“야, 그놈들 말고도 저기 정삼고에서 본선 진출했다는 신입생 얘기는 들었어?”

“누구 말이야?”

“그…….”

진유완은 거기까지만 듣고 다시 신경을 꺼버렸다. 저 녀석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과연 어느 정도나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동영상의 중후반부부터 보았던 그 놀라운 선수의 모습을 직접 대할 수 있게 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목표였다.

대회라고 해도 시합 자체는 평소 하던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진유완은 파죽지세로 마주친 상대 참가자들을 모두 꺾으며 위로 올라갔다. 처음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람이 보인 이 대이변에 사람들은 잔뜩 흥분했다.

승리 후 맞이한 쉬는 시간에 마스크를 벗으면서 대기실로 들어서자 준비하고 있는 다른 참가자들이 보였다. 혹시 이 중에 자신의 눈을 사로잡았던 수운고 학생이 있을까 싶어 한 번 훑어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의자에 앉았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마스크를 쓴 이가 때마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까지 남아 있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마른 체격을 가진 것 같은 참가자였다. 곧은 걸음으로 죽도를 쥐고 걸어가는 것이 무척 잘 어울렸다. 도복 자락 밑으로 살짝살짝 보이던 발목이 바로 대기실 문 안쪽에 서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곧 그가 나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몇 분 뒤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앞 팀 경기의 승패가 갈리자 안으로 들어온 진행 요원이 입가에 손을 모아 다음 참가자를 불렀다.

“다음! 16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른 참가자가 절도 있는 몸짓으로 손을 들었다. 그들은 들리지 않게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곧 바깥으로 나갔다. 경기가 시작한다는 안내음과 함께 선수의 이름이 불렸다.

[ 다음은, 수운고의……. ]

뭐!

진유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바깥쪽을 내다볼 수 있는 다른 통로로 나갔다. 몇 분을 뛰어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내려다보자 이미 한창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그 둘 중 누가 수운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둘의 실력 차는 확연했다. 실력이 더 좋은 이가 가볍게 내려치는 것 같은 죽도를 뻔히 보면서도 상대는 제대로 막지 못하고 계속해서 실점하고 있었다.

결과는 오래지 않아 뻔하게 나왔다. 당연히 실력이 훨씬 좋았던 이의 승리였다.

저 사람이 수운고의 학생일까? 아마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실력은 출중하다는 느낌만 들 뿐 제대로 가늠해 볼 수 없었다. 상대와 너무 실력 차이가 났던 탓에 할 수 있는 만큼도 다 못 보여 주고 이겨버렸다는 인상만 강하게 남았다.

진유완은 다시 천천히 걸어 대기실 쪽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양쪽으로 두 개였기에 운이 좋으면 절반의 확률로 수운고 학생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미 들어와서 다른 쪽으로 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반대쪽의 대기실에 있는 것인지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 몇 번의 시합이 더 지나가고, 드디어 4강만이 남게 되었다. 진유완 또한 그 마지막까지 남은 4인 중 하나였다. 장내를 정리하는 시간 동안 찾아온 시끄러운 학교 검도부 놈들이 대단하다느니, 어쩌느니 떠들어 댔지만 진유완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진제환, 너 봤냐? 다른 학교에서 너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왔어!”

“…….”

처음에는 진유완을 무서워하던 놈들은 딱히 방해만 하지 않으면 진유완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성격임을 알게 되자 이제는 곧잘 말도 걸곤 했다. 여학생들이 왔다는 말에 주변에 둘러서 있던 다른 녀석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쏠렸지만 진유완은 오히려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정리 시간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대기실에는 그 많던 참가자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한 명이 더 이쪽으로 와야 할 테지만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진유완은 혼자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아마 순서대로라면 4강전 중에서는 자신이 먼저 하게 될 터였다.

“23번. 나오십시오.”

진행 요원이 들어와 진유완의 번호를 불렀다. 진유완은 일어서서 시합장 쪽으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또 다른 4강 참가자가 다른 쪽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진유완은 나가기 바로 전 그 사람의 모습을 흘깃 확인했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여전히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마른 체격에 걸음걸이가 바른 몸짓이 아까 보았었던 그 참가자임에 틀림없었다.

저 사람도 여기까지 올라왔던 건가. 4강까지 올라온 네 명의 참가자 중 두 명이 수운고 학생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저 사람이 그 둘 중 한 명일지도 몰랐다. 진유완은 그를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듯 뚫어져라 바라본 뒤 뒤돌아서서 시합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자신이 이긴다면, 어쩌면 다음 상대는 저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심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4강 상대는 수운고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키가 크고 근육이 적당히 잘 잡힌 팔뚝이 죽도를 쥔 팔 사이로 보기 좋게 드러나 있었다. 마스크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한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둘은 전의를 가다듬었다.

진유완은 자신과 몸집이 비슷한 상대를 보며 아마 동영상에서 봤던 둘 중 키가 큰 쪽이 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들과는 그 밀도부터 다른 투기를 흘리는 상대 때문에 손끝이 다 짜릿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긴장된 손과 손이 죽도를 잡고 자세를 취한 영원 같은 순간. 심판의 깃발이 휙 움직였다.

“와아아아아아!”

진유완은 죽도를 잡고 있던 팔을 뒤로 젖히며 상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상대 또한 동시에 비슷한 동작을 취하다가는 곧바로 망설임 없이 연속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팔을 움직여 막아낼 때마다 죽도끼리 부딪치는 공기 울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충격이 왔다.

그 이후부터는 그저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린 시간이었다.

…….

“하아……하아…… 하…….”

“승! 수운고 정승조!”

진유완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을 느끼며 힘없이 늘어뜨린 팔을 움직였다.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경기는 그야말로 대 난타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격렬하게 매달려 본 경기도 처음이었지만, 점수를 이렇게까지 사이좋게 때리고 맞으며 주고받은 경기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진유완을 놀라게 만든 건 제게 지지 않을 만큼 대단했던 상대의 체력과 힘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때마다 남아도는 체력과 힘으로 얼마든지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비슷한 신체 능력을 지닌 이가 나타나니 모자란 경험이 발목을 잡았다. 역시 운동의 세계는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결국 놈이 이겼고, 자신이 졌다.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심판의 인도 하에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상대도 기운이 많이 빠진 듯 인사를 하는 어깨에 힘이 빠져 있었다. 진유완은 처음으로 마스크 사이로 상대의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길고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은 번들거리는 빛을 띠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유완은 돌아서서 대기실로 향하면서 소원대로 수운고 학생 중 하나와는 싸우고 가는 것이니 목표의 절반은 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졌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3위 결정전까지 기다리며 다른 이들의 경기를 보아야 했다.

“후우…….”

진유완은 마스크를 벗으면서 대기실로 들어갔다. 마른 몸의 마지막 참가자가 혼자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다음은 10분 후, 수운고의 강무헌과 대종고의 유정호의 경기가 있겠습니다.

안내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전차 진동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대기실 안은 묘한 침묵이 가득 차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마지막 참가자는 마치 눈을 감고 자신을 잊는 수련을 하는 도가의 수련자처럼 보였다. 차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라 진유완은 저도 모르게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10분이 지나고 시합장으로 걸어 나간 그 참가자는 본능적으로 계산되어 있으면서도 어디 하나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기 짝이 없는 검을 펼쳐 보이며 그대로 결승행을 확실하게 결정지어 버렸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본 진유완의 귀에 희미하게 그가 수운고의 강 누구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온 말은 하나도 없었다. 강한 상대와 맞붙을수록 점점 더 꽃이 피듯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 검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결승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수운고의 두 명이 맞붙는 결승 경기에 흥분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진유완 또한 기이하게 들뜬 기분으로 경기를 기다렸다. 비록 자신은 저 둘 중 한 명과만 겨뤄 보았지만, 이 경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하여,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두 사람이 맞붙은 마지막 결승 경기는 모두가 기대했던 수준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진유완은 한시도 그 경기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의 3위전 경기를 준비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검을 그런 식으로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저 사람과 경기해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희미하게 들었던 생각은 유일하게 그것뿐이었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끝이 없는 늪 속에 빠져들어 가는 듯한 느낌 때문에 못 박힌 듯이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단지 지켜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그러했다.

진유완의 눈이 향하고 있는 곳의 끝에서 움직이고 있는 마른 참가자 소년이 죽도를 휘두를 때마다 뜨거운 늪 속에 빠진 뇌가 똑같은 방향으로 이리 돌고 저리 돌았다.

모두가 넋을 잃고 지켜본 경기도 마침내 승패가 갈렸다. 진유완은 승자의 영광을 거머쥐는 순간의 마른 참가자 소년을 보고 무어라 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태초의 어느 날 느꼈던 그 감정. 처음으로 인식했던 숫자를 보고 느꼈던 욕망과 힘든 운동의 정점에서 느꼈던 어떤 기분, 그리고 바이크를 타고 한계속도를 넘었을 때 느꼈던 고요한 정적 속의 감각과 모니터 속 프로그램을 구성해 가며 느꼈던 카타르시스를 모두 합친 것 같은 너무나 엄청난 감정이었다.

진유완은 난생처음 느껴 본 그 무게에 눌려 물에 빠져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난간을 붙잡고 숨을 쉴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의 이름은 뭘까. 대체 이것이 정체가 무엇이기에 지금까지 느꼈던 그 무엇보다도 깊은 늪 속에 자신을 빠트린 것일까.

방금 전의 경기는 정말로 무어라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었다. 우승자와 싸웠던 사람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이겼을 거라고는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없었다.

결승전이 워낙 대단했던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잃은 가운데 3위전이 간략하게 치러졌다. 진유완은 방금 전 보았던 결승 경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제대로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결국 자포자기하듯이 3위를 내주고 말았다.

3위 결정전까지 끝났으니 이제는 우승 트로피를 건네줄 차례였다. 경기에 비해 생각보다 간단한 시상식이었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승자를 한 번 더 보기를 강하게 희망했다. 그것은 거의 열망에 가까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진유완도 어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 시상식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대기실로 들어갔는데 한편에서 누군가가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은 검도복 차림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큰 키에 자신과 비슷하게 운동으로 다져진 몸집. 그는 준우승을 한 소년임에 틀림없었다. 진유완은 대체 그가 왜 그렇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어 의아했지만 그냥 별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무심하게 지나치며 얼굴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진유완이 그 두 명의 수운고 소년들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3일이 지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4위를 해 메달 하나 받지 못한 진유완을 위로하겠답시고 귀찮게 굴던 검도부 녀석들도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렸고 할아버지는 도로 일을 맡겨도 괜찮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진유완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때 우승자 소년이 펼쳤던 결승 경기 장면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잔상으로만 남아 있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 이제는 멀쩡히 눈을 뜨고 깨어 있는데도 계속해서 그 경기를 반복해서 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 만들었다.

숫자나 프로그래밍, 바이크, 운동에 관련된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에 불과한데도 이렇게 강렬하게 머릿속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간절했던 것은 그날 느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강렬한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욕구였다.

“후…….”

길게 한숨을 쉰 진유완은 이마를 문지르다가, 문득 자신이 수운고에 한번 직접 가서 그를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수운고라는 것과 검도부 부장을 맡고 있다고 했던 정보만큼은 똑똑히 기억이 났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이 스스로 마음에 들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어 버렸다.

그것이 자신이 처음으로 타인에 대해 가진 관심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채 진유완은 이제야 좀 맑아진 머릿속으로 홀가분하게 수운고에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방과 후 수운고에서 정차하는 버스에 올라타자 버스 안에 앉아 있던 다른 학교 여학생들의 시선이 진유완에게로 흘끔흘끔 쏠렸다.

진유완은 확실히 인근 일대에서 보기 힘든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남색의 포인트 줄무늬가 들어간 하얀 반팔 교복셔츠가 잘 어울리는 조금 마른 듯한 몸과는 반대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에는 보기 좋을 정도로 근육이 잘 잡혀 있었다.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색상의 남색 교복바지도 잘생긴 놈이 입으니 터무니없이 잘 어울려 마치 화보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대체 저 아이가 어느 학교 누구인지 아느냐 속살거리며 여학생들이 그를 강하게 의식했지만 정작 진유완의 머릿속에는 수운고에 갈 생각 외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유완은 수운고 앞이라는 정거장명을 듣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는 처음 와 본 곳이라 생소했지만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커다란 학교 건물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찾아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천천히 걸어서 수운고의 교문을 넘자 낯선 교복을 입은 남학생의 등장에 놀란 수운고 학생들의 얼굴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경계하는 표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네 시 반이 넘어 방과 후인 상황이라 대놓고 제지하러 다가오는 사람은 없어 다행이었다.

진유완은 체육복을 입고 지나가던 아이 중 한 명을 붙잡았다. 갑자기 팔이 붙잡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던 남학생은 타교 교복을 입은 키 큰 이와 눈이 마주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누구세요?”

“……검도부.”

다짜고짜 말한 검도부란 단어에 남학생은 한층 더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네?”

“검도부로 찾아가고 싶은데, 알아?”

진유완이 최대한 제대로 말하기 위해 노력한 질문을 들은 남학생은 뭔가 떠올리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문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검도부는 지금 다 안 모여요. 모르세요?”

“……왜?”

기껏 찾아왔는데 검도부가 안 모인다는 소리에 진유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왜는요. 검도 대회인가가 끝나고 나서 상 탔던 두 명이 둘 다 교통사고가 나서, 앞으로 학교에 못 나온대요.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나서 못 모이는 거죠. 검도부를 찾아왔으면서 그것도 몰라요?”

순간 진유완은 너무나 뜻밖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남학생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왜…….”

“더 궁금하시면 그냥 교무실 가 보세요. 전 바빠서 이만.”

붙잡힌 팔을 뺀 남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진유완은 문득 자신의 가슴께를 만져 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자신은 실은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거나 들떠 있었던 것 같았다.

진유완의 충동적 행동은 그날 그곳에서 끝이 났다. 그는 더 이상 그 두 소년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잊어버렸다.

그러나 인연이란 것은 때로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3년 뒤, 진유완은 오랜만에 걸어온 진서환의 화상전화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네가 새턴사의 그 신작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에 관련된 정보를 알아봐 줬으면 한다. 할 생각이 있다면 지원은 이쪽에서 해 주지. ]

진유완은 얼마 전에 보았던 새턴사의 신작 VT게임에 대한 정보를 희미하게 기억해냈다. 최초의 리얼 VT게임이 될 것이라는 발표에 대해 과장이다 아니다 하며 말이 많았었는데, 그것에 대해 이렇게 진서환이 직접 연락해 올 정도라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가늠해 보며 옆에 붙어 있는 일정표를 보니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딱히 맡은 일이 없었다. 원래는 그 시간 동안 해외로 여행을 갈 생각이었지만, 왠지 그 게임을 한 번쯤 직접 해 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충동이라니. 그에게는 참 오래된 말이었다.

“……좋습니다.”

[ 좋아. 그 게임의 이름은 THE MIST. 오픈일은 4월 10일이라고 들었다. 그때까지 접속기기를 그쪽으로 보내고, 사전정보는 네가 직접 알아보는 쪽이 더 낫겠지? 필요한 것이 더 있으면 연락해라. ]

진유완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진서환은 만족한 표정으로 연결을 끊었다.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신이 한 갑작스러운 결정이 잘한 일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일단 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기에 빨리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새턴사의 신작 게임을 시작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진유완은 두 달 동안이나 같은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무척 놀라움을 느꼈다. 사실 그가 진서환의 제의를 받아들인 입장이 아니었다면 새턴사의 게임을 진심으로 편하게 즐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게임은 대단했다.

설마 누가 진짜로 뇌와 컴퓨터를 연결해 현실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게임을 만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이렇게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 다른 이들은 도저히 원리조차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신기술을 가지고 고작 게임을 만들었다며 한쪽에서는 비판이 빗발쳤지만 진유완은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고작 게임만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진유완은 최근 우연히 얻었던 능력치가 좋은 검이 실은 어떤 까다로운 퀘스트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관련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까지 갈 수 있는 파티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 퀘스트가 게임의 정보를 파헤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그에게 짐이 될 것인지 득이 될 것인지가 애매하게 느껴져 결정하기 어려웠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있는 듯 없는 듯 파티원이 다 차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어…… 파티에 참여하시려고요?”

시끄럽던 파티장과 그 일행들이 주눅이 든 채 물을 만한 사람이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자 어두침침하게 후드를 눌러쓴 음침한 남자가 보였다. 전설 속에 나오는 흑마법사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양새였다.

“레벨은 몇이나 되시죠?”

“32.”

필요한 대답만 끊어 하는 목소리는 냉랭하지는 않았지만 더 말을 걸기 힘들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직업은?”

“마법사.”

그 말에 다들 놀라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유완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짜 마법사 유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디까지 쓸 수 있으신데요?”

“3서클 마스터입니다.”

거기다 3서클 마스터라. 현재 나와 있는 마법사 유저들 중에서는 독보적이라고 해도 될 만한 실력이었다.

“에…… 예.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런 실력이라면야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할 말을 잃은 파티장이 우물거리며 이름을 물었을 때 진유완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 중 볼 수 있었던 것은 코와 입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가려 있는 얼굴이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남자는 파티 가입 절차를 위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긴 로브 안으로 보이는 움직임이 상당히 절제되고 바른 걸음걸이라고 생각했던 진유완은 어디선가 또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하는 데자뷰에 눈썹을 찌푸렸다.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

“카프.”

진유완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과거의 어느 한 점에서 마주칠 뻔했던 인연이 우연한 기회에 다시 한 번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눈앞의 음침한 남자가 그로부터 고작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을 늪 속으로 사로잡는다는 것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상황이 이어진다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지금은 그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일 뿐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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