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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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몸이 가벼워진다 싶더니 눈을 떴을 때는 이루미네가 텅 빈 스크롤 막대만 든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기억 속인 줄 알고 잠시 헷갈릴 뻔했지만 머리카락 길이가 발끝까지 닿는 것을 보고 이쪽은 현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봤구나.”

“이걸로 끝입니까?”

“남겨진 기억은 끝이지. 하지만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이제부터란다.”

이루미네는 그렇게 말하며 스크롤 막대를 바닥에 버렸다.

“다 본 소감은 어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쁜걸.”

내게 묻는 거냐고 대답하려던 순간 슈페리어가 내 입을 빌려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만들어진 존재였을 줄이야. 그리고 거기에 네가 참여했다는 것도 놀라워.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제2의 출생의 비밀이라니.”

“그와 나는 한 사람을 안정적으로 둘로 나누는 방법을 찾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연구를 거듭했지.”

그렇게 말한 이루미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스크롤에 봉인된 기억은 거의 그의 입장에서만 남겨진 것이니 내 입장에서도 말을 해 주고 싶어. 들어주겠어? 난 이 날을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으니까.”

“마음대로 해.”

슈페리어의 말이 묘하게 냉랭해져 있었지만 이루미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날 찾아온 건 인간들이 마신 전쟁이라고도 하는 그란 페르디 종족 전쟁이 끝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때였어. 온 대륙이 폐허가 되고 북서부의 지형까지 갈아엎어진 뒤라 살아남은 지적 생명체들이 모두 전후 복구에 정신이 없었던 때였지. 누구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못한 때이기도 했어.”

이루미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우리 엘프는 터전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였던 라마 숲이 유실되어 떠나야 했고, 드워프들은 그들이 일하던 오염되지 않은 지하 광맥을 대부분 잃었지. 드래곤은 대륙의 축을 맡아 관조하고 있다는 명분과 자긍심에 타격을 받았고, 인간들은 그들을 이끌 지도자를 잃게 되었어.”

다들 자신의 목숨을 건사하는 데 바빠 정확히 어떻게 마신이 사라졌고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싸웠던 이들의 생사는 어땠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말하는 이루미네의 목소리는 버석하기 그지없었다.

“나조차도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전쟁 후 동족들을 불러 모으던 것을 잠시 미루고서 서쪽에 남겨진 마지막 격전지로 향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곳에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 땅이 다시는 생명체가 자랄 수 없는 불모의 사막이 되리라는 것만 알게 된 이루미네는 인간들을 피해 그 끝자락에 숲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혼란 속에서 이종족에 대한 경계와 증오가 최고로 강해져 있었던 때였거든. 그렇게 제2의 숲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 찾아온 그는 내게 방금 기억에서 보았듯 그런 요구를 한 거야.”

내 머릿속에 순간, 예전에 이루미네를 처음 만나러 왔을 때 슈페리어가 묵었다는 오두막집에서 보았던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일까.

“나는 처음에는 자신을 둘로 나누겠다는 그를 막을 생각이었지만, 결국 끝까지 막지 못했어. 그가 마지막에 내게 말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질서만 지켜준다면 내 선택은 마음대로 하라는 것뿐이었지.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해.”

“무슨 선택?”

슈페리어의 질문에 이루미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지금 당장은 네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생각해 볼 거라 쉬이 말해 줄 수는 없어. 네가 기생충처럼 변하든, 아니면 다른 가능성을 찾든. 그건 마음대로 해. 널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알려줄 건 여기까지야.”

“…그래. 그러면 나도 궁금한 걸 물어봐도 되겠지? 넌 과거의 완전했던 내가 어떤 기준에 의해 둘로 나눈 것인지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말해 주지 않는 거지?”

“그걸 말하지 않는 것이 그와의 약속에 들어갔기 때문이지. 네 말대로 나는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어.”

“그러면 두 번째.”

말을 한 뒤 잠시 망설이던 슈페리어가 이루미네를 향해 천천히 질문했다.

“나는… 널 전처럼 루미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마음대로 해.”

이루미네는 그 질문의 진의를 알고서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답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조용히 대꾸했다. 슈페리어는 뭔가 더 질문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 조용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다른 질문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루미네. 그러면 이제 염룡 코르의 질문에 대한 답도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이루미네가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다려 왔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젠 해 줄 수 있어. 그 대답을 듣고 싶다면 이제 돌아가자꾸나. 정신 놓지 말고 따라오렴, 아가.”

조용히 나를 지나쳐 걷기 시작한 이루미네를 따라 나오면서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간에 홀로 버려져 있는 빈 스크롤 막대가 보였다. 여기서 보았던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충격적이라 지금의 이 광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미쳐가고 있었던 슈페리어와 둘로 나뉜 슈페리어. 이루미네에게 말할 때에는 교묘하게 넘어간 그의 ‘두 가지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부활해 가는 마신만 해치우면 될 것 같았던 퀘스트 초기와는 달리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이루미네가 남긴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왠지 불어올 리 없는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키온 형이 기다리고 있는 동공으로 돌아가자 형이 눈에 띄게 반색하며 달려왔다.

“카르야, 왔냐!”

“응.”

“형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일은? 잘 끝났어?”

우리를 지나쳐 원래 자리로 향하는 이루미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물어보는 형에게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것 같아.”

좀 기분이 찝찝하긴 하지만 뭐 일단은….

내 대답에 형이 환하게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 잘 했다 잘 했어.”

“거기 둘. 와서 앉아 줬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원래 자리에 앉은 이루미네의 서늘한 목소리에 형이 웃는 얼굴 그대로 멈칫 굳었다.

“아, 예.”

이루미네의 앞에 가서 앉자마자 키온 형이 질문을 꺼냈다.

“그럼 오늘은 저도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사실 너희 둘의 뒤에 있는 이들이 내게 바란 건 전부 같은 문제니까.”

키온 형의 얼굴에 환희가 떠오르다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모했다.

“전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루미네는 피식 웃으며 형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이번 스가 여신의 선택자는 정말 재미있구나. 그래. 너부터 답변해 주자면, 대륙의 북쪽에서 서서히 강력해지고 있는 어두운 기운의 정체는 오래전의 봉인이 풀려 점점 되살아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이다. 대륙을 이미 한 번 뒤덮은 적이 있었던 것이지.”

“아…….”

나처럼 마신이 어떻게 부활하고 있을지 퀘스트 동영상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을 형이 애매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을 보니 여신께 이미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현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느끼고 계실 여신께서 내게 조언과 도움을 부탁했다는 것은 역시 같은 쪽에 설 것인가 아닌가를 물으시려는 것이겠지. 그에 대한 우리 엘프의 답은, 조언은 수락하되 당장의 연대는 어렵다는 것이다.”

“조언은 수락하되 연대는 어렵다…….”

오랫동안 기다려 얻어낸 답변을 형이 곱씹어 보다 그런대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전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래. 우린 현재 외적인 문제로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는 것도 전해 드리렴.”

이루미네와 엘프들이 왜 여기서 나갈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조금 전에 알게 된 나는 그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이루미네는 다음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염룡은 이변에 대해 움직여야 할지, 아닐지에 대해 우리의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했던가.”

“예.”

“염룡에게 가서 전하도록 해라. 엘프 종족인 나, 엘 카라나 이루미네의 의견은 과거와 같은 역사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처음부터 움직이거나, 아니면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쪽이 좋겠다는 것이라고.”

과거와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처음부터 움직이거나 아니면 아예 움직이지 말라고…. 이 역시도 간단하지만 뼈가 들어 있는 듯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알겠습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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