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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침입자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그 순간으로부터 이틀 전.
여섯 번째 슈페리어 퀘스트를 위해 대륙 동남쪽의 반도로 향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이 넘었던 때였다.
그동안 우리들은 한 번도 마을에 들르지 않았고 오로지 숲으로만 지나다니며 가끔씩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데 힘썼다. 예전에는 고작 몇 마리 처리하는 것도 힘겨워했었는데, 이제는 수십 마리가 나타나도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내 자신을 보니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카르야! 그쪽으로 한 마리 간다!”
키온 형의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나는 뒤쪽에서 날아드는 새 형태의 몬스터, 카뮬라의 기척을 느끼고 즉시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완성시킨 다음 주문을 외쳤다.
“블링크!”
훅 하고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내가 원했던 20여 미터 앞쪽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슈페리어 막대기에 마력을 불어넣어 검으로 만든 다음 뒤를 돌아보는 동작에 맞추어 매끄럽게 팔을 휘둘렀다.
“키이이이익!”
촤아아악!
카뮬라의 쩍 벌린 날카로운 부리 안에 불투명한 칼날이 처박히며, 상대가 날아들던 가속도를 이용해 몸을 가르는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조금 빠듯하게 갈리는 뼈 부분의 충격을 감내하기 위해 양손으로 손잡이를 꽉 잡아 지탱하면서 검에 한껏 더 마력을 밀어 넣었다.
‘크으으윽!’
뜨거운 핏물이 사정없이 얼굴 위로 쏟아지고, 카뮬라가 완전히 두 조각이 난 채 땅에 떨어져 퍼덕거리다 죽어 사라지는 것으로 일단 끝이 났다.
“후…….”
나는 후드 끝에서부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내며 슈페리어 막대기에서 마력을 거두었다. 이 검은 굳이 날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 갈거나 닦아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제일 편한 것 같았다.
사라진 카뮬라의 시체 자리에서 익숙하게 떨어진 아이템을 줍고 피에 젖은 후드를 뒤로 넘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자 내가 해치운 놈이 마지막이었는지 조용히 가라앉은 들판 곳곳에 검은 피 얼룩만 남아 있었다.
“언제 봐도 네가 마법하고 검을 동시에 쓰는 걸 보면 진짜 신기하다니까.”
내 곁으로 다가온 키온 형이 눈을 빛내며 슈페리어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특히 방금 카뮬라 가르던 건 완전 횟집에서 광어 배를 번개같이 가르는 장인의 손놀림 같아서 그런가, 갑자기 회가 땡기더라고. 아, 광어 먹고 싶다.”
산뜻한 얼굴로 이상한 비유를 하다 말고 광어회의 맛이 떠올랐는지 살짝 입맛을 다시는 형은 방금 전까지 본인이 얼마나 많은 카뮬라들의 시체를 양산했었는지는 완전히 잊은 듯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는데,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서 있던 루크레이신이 가볍게 내 옷자락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왜.”
“이쪽은 피가 좀 덜 닦였는데요. 이쪽도요.”
“…좀 마르면 알아서 떨어져.”
여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조용히 대답하자 루크레이신이 피식 웃었다.
“웬만하면 그렇겠지만… 지금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범죄 스릴러 영화에 방금 캐스팅된 따끈따끈한 살인마 같은데요. 정말 그대로도 괜찮겠어요?”
묘사를 해도 하필 따끈따끈한 살인마라니…….
나는 순식간에 매우 찝찝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잠자코 루크레이신이 가리킨 앞머리와 뺨 부분을 문질렀다. 루크레이신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대충 닦은 뒤 시선을 무심코 하늘로 돌리자 구름 한 점, 새 한 마리 없이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새라….’
그러고 보니 이제 슈페리어가 돌아올 때가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얼마 전 발라 모냐크에서 거대한 매의 몸에 깃들어 떠나갔던 슈페리어는 20일 후에 내게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 그 후 날짜를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게임 시간으로 보름이 넘은 것 같으니 얼마 후면 놈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정신세계에서의 수련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고.’
슈페리어의 귀환보다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장소가 더 반갑다고 하면 놈이 또 한참 시끄럽게 굴 게 뻔하니 대놓고 말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
나는 슈페리어가 떠났다는 현실의 가장 큰 상징인, 잠잠한 슈페리어 막대기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도로 눈을 돌렸다.
“자, 그럼 이제 대충 정리한 것 같으니 다시 가죠.”
루크레이신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그간 수련했던 내용들을 천천히 되짚어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하고 또 해 왔던 일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길을 걸을 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무척 난감한 일이 발생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안 하면 자꾸 생각이 나니까…….’
잠시라도 빈 시간이 생기면 곧바로 머릿속을 파고들어 오는 그날의 기억.
토렐리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시저. 나에게 영문 모를 질문을 하더니 어느 순간 잠들었던 놈이 중얼거렸던 그 짧은 한마디. 마치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던 그 작은 목소리는….
그건… 정말로 내가 생각했던 그 이름이 맞는 것이었을까?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 보든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릴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다른 모든 것은 다 넘길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얼굴. 잔뜩 야위어 광대뼈가 다 드러난 채 거칠어져 메마르게 변해 있던 놈의 얼굴만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그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고는 했다.
‘정승조…….’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던 것일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이 온통 물에 푹 잠긴 듯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그날, 접속을 종료하고 나서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마지막 날의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차라리 도로 기절해 있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머리가 너무나도 아프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몇 분 정도는 다시 기절했었던 것도 같았다.
신경이 모조리 머리로 쏠려 나머지는 전부 사라지기라도 했는지 누군가 뺨을 때리고 있는데도 그것이 고무를 두드리는 것처럼 둔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간신히 모든 힘을 그러모아 희미하게 고개를 움직이자 귓가에서 윙윙대는 것처럼 들리던 소리가 조금씩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안 깼어?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세게 갈긴 것 같은데. 그러게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워낙 오랜만에 하다 보니 조절이 잘 안 된 것 아니겠어.”
하나같이 기계음을 덧씌운 듯한 낯선 목소리들.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자꾸만 까무룩 꺼져 버리려 하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그런 의문을 떠올리자, 텅 비어 있던 머릿속에 깨어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주어진 답처럼 팟 떠올랐다.
귀를 찌르던 인터폰 벨소리. 누구인지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낮았던 대답. 진제환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문을 열어주었던 나. 그리고…….
‘분명… 진제환이 도로 돌아온 줄 알고 문을 열었었는데…….’
낯선 구둣발 소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짧은 순간.
그 다음의 기억은 없었다.
남은 것은 뒤통수에 내리꽂혔던 불꽃 같은 충격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몸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주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팔다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 또한 컴컴한 암흑만 펼쳐져 있을 뿐 힘겹게 깜박여 보아도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눈을 못 뜬 것이 아니라 눈이 무언가로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더불어 의자에 앉은 채 팔다리가 따로 묶여 있다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정보 또한.
고통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경계와 적의로 찬물을 끼얹은 듯 확연해졌다.
“이봐. 정신이 들어?”
그때 누군가가 다시 한 번 뺨을 반복해서 때리며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들면 대답해. 기절한 척하려 들어도 소용없으니까. 정신이 드나?”
반복해서 천천히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역시 기계음을 덧씌운 듯 변조되어 있어 싸늘하고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폭발할 듯한 경계심과 분노를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냐.”
말을 하는 순간 입 안이 터져 고여 있던 피가 주륵 새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이 들었으면 얌전히 이쪽의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넌 누구냐고.”
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나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기로 뺨을 후려갈긴 손바닥이었다.
“질문은 이쪽이 한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했어.”
이거 참…. 이쯤 되니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데. 나는 휙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며 터져서 화끈거리는 입 안쪽을 혀로 훑어보았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질이 좋은 무리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한동안은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 보는 편이 낫겠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내가 자신들의 뜻을 적당히 알아먹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네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왔다. 얌전히만 대답한다면 이 이상 손대지는 않아. 하지만 방금 전처럼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성의 없는 대답으로 일관한다면 뒷일은 알아서 해. 알아들었나?”
“…….”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려 들면 그 즉시 끝인 줄 알아. 입을 다물고 시간을 보낸다고 누군가 구하러 올 거라 생각하는 바보짓 또한 하지 않길 바란다. 혼자 사는 거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그 말인즉슨… 여긴 아직 내 집 안이라는 거군. 그러면 내가 지금 묶여 있는 이 의자도 식탁 의자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낮에, 내 집에서 집주인인 내가 평소 밥을 먹기 위해 앉던 식탁 의자에 묶인 채 협박을 당하고 있다니. 놈들의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를 보건대 누군가 이곳에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하고 있지도 않은 듯해 더욱 의문만이 솟아올랐다.
보통 강도 놈들 따위는 절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이런 괴한들을 맞이할 만큼 잘못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저놈들의 정체는 무엇이고, 내게 묻겠다는 건 뭐란 말인가. 전혀 추측 가는 것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특히, 하우스 보안 신고 시스템 따위를 가동하려 들면 재미없어. 어차피 이 집의 컴퓨터는 우리가 잠시 숨을 죽여 둬서 소용도 없을 테지만 말이야.”
남자의 말을 듣고서 귀를 기울여 보니 정말로 평소에는 조금씩 벽 속에서 미세하게 들려왔던 컴퓨터의 웅웅대는 가동음이 지금은 완전히 뚝 끊겨 있었다. 내가 그리 오래 기절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짧은 사이 철저하게도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내게 얻으려는 것이 있다고…? 그게 대체 뭐지?
온몸의 세포가 거꾸로 곤두서서 생명의 위험을 부르짖는 것 같았지만, 그를 넘어서는 극도의 분노가 오히려 고통 속에서 내 이성을 점점 더 차갑게 냉각시켜 주었다.
“이상, 다 알아들었으면 대답해.”
“…….”
나는 천천히, 그러나 놈들이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온몸에 식은땀이 솟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좋아. 첫 번째 질문이다. 네 이름은?”
“……강, 무헌.”
아무 이름이나 대답해 볼까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놈들이 정말로 내 이름을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기 전 확인을 위해 묻는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져 그냥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잔뜩 잠긴 목소리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놈들은 개의치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좋아. 그렇게만 해. 알았어? 이제부터 본격적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
“어디 보자…. 01A-1169-G89SCB. 이 번호, 기억하나?”
그 순간 벼락이 떨어졌어도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놈들의 입에서 나온 그 번호는 본의 아니게 외워 버린 너무나 익숙한 번호였으니까.
‘어째서, 윤석호의 번호를 놈들이……?’
“알아, 몰라? 빨리 대답해.”
너무 놀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이 정강이를 걷어차는 구둣발 때문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그건, 왜….”
“이 새끼 참… 다리병신이 아니라 머리병신이었나.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쓸데없는 반문을 하면 어떻게 한다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이 변조된 목소리가 혀를 차며 말을 이어나갔다.
“조용히,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했지.”
퍽, 퍽, 퍽, 퍽.
뒤에서 한 놈이 내가 묶여 있는 의자가 넘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고 있는 사이, 놈이 한 박자씩 쉬어가는 말소리에 맞춰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쿨럭… 쿨럭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코와 입에서 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가슴을 잘못 맞았는지 숨을 쉴 때마다 아프다는 것이었다.
“01A-1169-G89SCB. 알아, 몰라!”
그 순간 검게 차가워진 이성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려 냈다.
윤석호. 윤석호와 관련해 이 비슷한 일을 겪었던 적이 또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얼마 전. 검도장에서 돌아가던 길에 나를 골목길에 몰아넣고 윤석호의 사진을 들이밀던 깡패 놈들과 이놈들이 비슷한 놈들이라면?
두 집단 모두 윤석호에 관련되어 나를 찾는다는 목적이 있으니 그리 헛된 추측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윤석호에 대한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아 올라 이가 부서지도록 부드득 갈렸다. 분명 얼마 전에 윤석호가 직접 내게 전화해서는 그건 자신의 과거의 은원 관계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다시는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알아서 잘 처신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느냔 말이다.
그런 전화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잘 처신한다던 건 말뿐이었나? 내가 무슨 윤석호의 일가친척이나 친구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것이었고, 나는 윤석호가 이전에 그 전화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했던 말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앞으로도 강무헌 씨는 어디서든 저와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윤석호와 내가 아는 사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닐 곳이 있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
내가 여기서 살아서 다시 윤석호를 만날 일이 생긴다면, 아니 생기지 않더라도 반드시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보아하니 네놈들도 윤석호 때문에 찾아왔다 이거냐. 윤석호의 그 잘난 과거의 은원 관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지수 잘못 찾았다.
“…안다.”
발작적인 기침을 수습하고 나서 내뱉은 대답에 만족했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계로 변조된 웃음소리는 더없이 괴이하기만 했다.
“처음부터 맛을 보여줘야 말을 잘 듣는군. 좋아. 너는 01A-1169-G89SCB의 주인과 1년 사이 몇 번이나 통화기록을 남겼지. 01A-1169-G89SCB와는 무슨 사이냐.”
놈들이 윤석호와 관련이 있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니 이제야 좀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아마 놈들은 윤석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일 테고, 내가 그와 무슨 관계인지까지는 몰랐기에 여기까지 온 것일 터였다. 내가 윤석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찾아올 리 없었을 테니까.
윤석호는 내게 이런 놈들을 만날 경우 자신과 아는 사이라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고, 나 또한 그 말을 딱히 어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놈들이 내게 물은 것은 ‘윤석호’에 대해 아느냐는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라 윤석호의 전화번호뿐이었다.
이놈들은 윤석호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게 아닌 건가? 그렇다면…….
나는 놈들이 아마 윤석호에게 원한을 가졌다는 정체 모를 사람에게서 부탁을 받은 전문 깡패들쯤 되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렇다면 놈들도 가진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셈이니 곧이곧대로 대답하나, 거짓말을 하나 지금 당장 알아낼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래… 전화번호야 알지. 전화번호‘는’ 말이다.
그 외엔 내가 알 게 뭐냐!
나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차가운 분노를 씹어 삼키며 놈들이 대충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최대한 굴리기 시작했다.
“내게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 번호의 주인에게 물건을 산 사람일 뿐이야.”
“물건이라고? 무슨 물건을 말하는 거지?”
내 대답에 흥미를 느낀 기색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건…… 쿨럭, 쿨럭.”
본의 아니게 중요한 순간에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젠장, 빌어먹을!
“그게 뭐냐고 묻잖아. 이봐. 그 물건이 뭐냐고.”
“……게임기.”
“뭐?”
“게임기라고.”
나는 반복해서 그 단어를 말하며 속으로 비죽이 웃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맞는 모양이었다.
“게임기라니. 무슨 게임기 말이냐.”
“정말로, 그냥 게임기일 뿐… 쿨럭, 쿨럭쿨럭!!……. 그 외엔 관련이 없어. 나도 몰라.”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을 때마다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 대답을 들은 뒤 놈들은 한동안 저희들끼리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게임기’라는 말까지 듣고도 윤석호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겠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들끓는 분노와 잔뜩 곤두선 불안한 감정들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는데 위에서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네 말대로 그 정도 관계일 뿐이라면, 1년간 상대와 계속해서 부정기적으로 꾸준히 연락을 한 이유는?”
“…비싼 게임이라서. 그쪽에 대금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거든. 쿨럭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동반되는 고통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간신히 숨을 고르기는 했지만 어지러움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전신에 열이 오르는 듯 뜨겁고 둔한 느낌이 들었다.
“그쪽에서 독촉 전화가 왔을 뿐,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다.”
“…….”
“……정말이니 집 컴퓨터의 수신 기록을 확인해 보아도 좋아.”
실은 이전에 유완 때문에 한 번 전화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컴퓨터 시스템을 막기 위해 일부러 꺼 놓기까지 한 놈들이 굳이 사소한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컴퓨터를 켜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답을 내뱉었다.
놈들이 과연 내 말을 어디까지 믿을까. 나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 할 수 있는 만큼 거짓말을 했으니 남은 것은 놈들의 판단뿐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 하나에 내 숨통이 조였다 풀리는 느낌이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평정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거짓말을 제대로 해야 한다면 진실을 섞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내가 윤석호와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차피 아직까지 윤석호에게 내 캡슐 값을 갚지 못한 것 또한 맞는 말이니 이 말이 완전히 거짓말이라곤 할 수 없었다.
‘부디 놈들이 내 생각만큼 윤석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여야 할 텐데.’
놈들의 목표가 정보뿐이라면 굳이 윤석호와 별 관련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큰 해를 입힐 이유도 없을 테니, 그렇다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반항하지 않는 척 그럴싸한 대답만 지어내도록 하자. 그것이 바로 내가 머리를 굴려 밀고 나가기로 한 대처 방안이었다.
그리고 이게 통해야만 여기서 살아나가 윤석호를 한 방 날려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게임기는 어디에 있지?”
한참 뒤 심문자가 내뱉은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겉으로는 더욱 몸을 움츠려 겁먹은 척했다.
“부엌 옆. 왼쪽 방 안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기척 중 두어 명이 그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통해 나는 놈들이 한두 번 이런 일을 해 본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더욱 확신으로 바꾸었다.
얼마 뒤, 앞쪽에서 무언가 거칠게 떨어져 끌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둔중함과 무게감으로 보건대 아마 캡슐을 연결되어 있던 곳에서 떼어내 끌고 온 것 같았다. 그러고는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작은 소곤거림이 몇 번 오간 뒤 심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게임의 기기지?”
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닥쳐왔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첫 번째 도박은 잘 넘어갔지만, 이번에도 과연 잘 넘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THE MIST.”
놈들이 아무리 아는 것이 없더라도 윤석호, 그가 누구인지 이름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여기서는 당연히 반응할 것이다.
윤석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놈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맞은 얼굴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으며 귓가에 어지럽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몇 번이나 세고 있었을까. 드디어 심문자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대로 얌전히 대답하도록 하라고. 네가 마지막으로 01A-1169-G89SCB와 연락했을 때 나눈 이야기 중 특이사항은?”
또다시, 넘어갔다.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전신에서 일시에 식은땀이 죽 솟았다.
“그런 건 없었어.”
“없을 리가. 아무거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내가 미쳤다고 그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겠는가. 나는 최대한 진심이 드러나는 듯 보이도록 하기 위해 뜸을 들여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쿨럭, 쿨럭…. 기억나는 거라고 해 봐야… 언제나 하던 독촉밖에 없었는데. 안부 인사나… 날씨….”
“그런 것 말고. 제길. 그쪽이 하는 일에 관련된 특이한 이야기 같은 것 말이야.”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 짜증이 났는지 심문자의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이 일을 오래 해온 듯한 녀석들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인내심은 없는 모양이었다.
“잘 기억해 봐.”
“……바빠서 연락하기 힘들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 외엔 없…… 윽!”
말을 잇던 도중 기어이 부아가 치밀었는지 또 한 번 놈들의 손이 날아왔다. 뺨에 불이 번쩍 난다 싶더니 머리가 띵해지며 코에서 찝찔한 것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제대로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빌어먹을….
나는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어디를 잘못 맞은 것인지, 이후로 놈들이 말하는 것이 점점 더 뭉그러지듯 어지럽게 들리면서 속까지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어 보아도 지나치게 쌕쌕거리는 내 숨소리는 마치 남의 것 같았다.
“정말로, 그 외엔 없…….”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까지 잘 해 왔으니 정신을… 계속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쿨럭… 쿨럭쿨럭……!”
“이거 왜 또 비실거려? 이봐. 정신 차려. 01A-1169-G89SCB와 나누었던 마지막 통화 내용은 뭐였어! 이봐!”
놈들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이젠 아픔마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속처럼 몽롱해져만 갔다. 정말이지 엿 같은 기분이었다.
“그, 건…….”
그러나 이대로 기절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의지만이 남아 내 입을 간신히 달싹이게 만들었다.
“간단한, 안부… 쿨럭…쿨럭…. 그리고 독촉….”
“그 외의 말은?”
“없었….”
이후로도 놈들이 내 대답을 믿지 않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했고 나는 간신히 같은 대답을 반복했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내가 과연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제길…….
이대로 기절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다지만, 그래도 놈들에 대한 정보만큼은 조금이라도 건져야 했다. 그래서, 그래서 반드시 살아남아 놈들에게 나를 이 꼴로 만든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 순간, 그 격렬한 감정의 폭풍이 고통을 이겨냈는지 잠시나마 다시 귀가 열렸다.
고장 난 TV 소리처럼 어지럽게 섞여 들려오던 이명과 말소리들이 일시에 조용히 가라앉고 정돈되어 뇌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놈들은 내가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실거리는 놈 상대로 너무 때린 것 아니야? 계속 제정신을 못 차리잖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래도 덕분에 얌전히 불지 않았습니까, 실장님?”
“그렇긴 해도 너무 손대다 다 불기 전에 죽기라도 하면 좀 그렇지.”
변조된 목소리들이기는 했지만 개인마다 차이가 있어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 목소리는… 실장이라 불린 자가 나를 심문하던 놈인가 보군. 나는 그 호칭을 머릿속에 필사적으로 기억했다.
“죽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이 호모새끼 상판을 보고 있자니 역겨워서 절로 주먹이 나가는 걸 어떡합니까.”
“그건 그래. 아침에 나가던 놈이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었을 줄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기절시키고 나서 이 자식 몸 보고 놀랐잖아. 어젯밤 아주 열성적으로 놀아났나 보지?”
“나도 호모는 질색이야.”
놈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또다시 멀게 들려왔다. 둔해진 머리는 그들이 나누던 말의 뜻을 몇 박자 늦게 이해했다.
아… 어제 진제환이…….
아침에 거울을 보러 들어갔을 때 온통 얼룩덜룩했던 몸이 생각났다. 상의를 벗고 잠들러 가던 도중 놈들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상의를 벗은 채 묶여 있었다. 놈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쳤을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 말 덕분에 진제환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침에 나더러 주변에 살인마가 돌아다니니 조심하라고 했었던가.
지금 나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놈들이 살인마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놈은 뭔가의 위험을 미리 예측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진제환…….
원래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검도장에서 다시 만났을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건 아마 검도장에 갈 시간이 지난 후쯤이겠지.
지금 시간은… 몇 시나 되었을까.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정신이 까무룩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상태라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찰나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내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게 된다면 좋을 텐데.
이놈들이 내게서 알아낼 것을 다 알아내고 흔적도 없이 떠나가기 전에 말이다. 나는 터져서 찝찔한 입술을 꾹 다물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날카로운 고통에 집중했다.
“이 녀석이 알고 있는 건 생각보다 별로 없었던 것 같아 김이 빠지는군. 더 해도 나올 건 없을 것 같으니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할까.”
그때, 때맞춰 심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안 되었다. 아직 놈들의 얼굴 윤곽조차 보지 못했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지만 천 근은 되는 추를 매단 것처럼 늘어진 몸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 이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냅두지 뭐. 신고해 봤자니까 시끄럽지 않게 입이나 막아 두고 가자고. 아. 그리고 이 게임기기, 두 명이서 들고 갈 수 있겠나? 이거라도 가져가야 의뢰자에게 체면이 설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원통한 마음으로 아무리 몸부림쳐 보았자 묶인 상태에서는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보다도 미약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놈들이 미스트 캡슐을 가지고 가려는 모양인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한 놈이 내 입에 거칠게 천을 쑤셔 넣어 묶었다.
“으윽…….”
“얌전히 불어서 봐주는 줄 알아. 신고 같은 허튼짓을 했다간 죽는다.”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귓가에 그렇게 을러대고는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 나서 몇 분간 더 빠져나갈 준비를 하던 놈들은 작은 흔적까지 다 지웠는지 확인하는 꼼꼼함을 보인 뒤에야 현관문을 열기 위해 잠금장치에 손을 댔다.
집 안의 컴퓨터 시스템을 모두 껐으니 문을 열기 위해서는 수동 장치밖에 쓸 수 없는 상태라 달칵거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려오고, 그리고 그대로 문이 열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나 싶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어디선가 이명을 닮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달칵. 달칵달칵.
“…뭐야?”
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지 거칠게 잠금장치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거 왜 안 열려?”
“이거… 수동 장치가 작동이 안 되는데요.”
“뭐라고?”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던 소리가, 그때쯤 벽 안에서 완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중이었다……!
“뭐, 뭐야, 이게?”
처음으로 심문자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웅웅대던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반가운 무감정한 컴퓨터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 강제 종료 후 일정 시간이 지나 시스템 강제 복원 및 부팅이 시작됩니다. 조건에 따른 사용자 보호 시스템 프로그램이 가동됩니다.
- 프로그램 서명자, YU-WAN JIN.
- 서명이 승인되었습니다.
우우우우우웅!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컴퓨터가 갑자기 왜….”
“자동도 아니고 수동이 열리지 않을 리가 없잖아! 비켜!”
평정을 잃은 누군가의 외침에 뒤이어 당황한 목소리가 하나둘 튀어나오고, 이어 다급하게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아수라장이 될 뻔한 상황을 진압한 것은 나를 심문했던 자였다. 똑같은 기계음 속에서도 놈의 목소리만은 유달리 굵어 곧바로 분간이 갔다.
“돌발 상황 한두 번쯤 일어나는 것 정도도 예상을 못 했나, 이까짓 일에 당황하게? 이 짓 한두 번 해보는 것처럼 굴지 말고 상황이나 점검해!”
그 말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집 안에서 곧 부산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자동, 수동 전환이 안 됩니다.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홈 시스템이 자동으로 복구되어 부팅된 것 같습니다. 이쪽의 제어가 듣지 않습니다.”
“죄다 먹통이 됐단 소리군.”
차갑게 내뱉은 심문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예상했다는 듯 지시를 내렸다.
“너는 이걸로 문을 따. 구식 중의 구식이지만 이럴 땐 쓸 만하니까. 그리고 너는 바깥쪽이랑 통신을 시도해. 안 되면 문을 두들겨서라도 바깥쪽 놈들 불러와. 너희 둘은 나눠서 상황 돕고.”
“…….”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는지 소리 없이 일사불란한 발소리만 남기며 움직이는 놈들을 뒤로한 채 심문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얌전히 좀 분다 싶더니, 막판에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퍽!!! 콰당탕!!
지금까지 중 가장 강한 발차기가 내가 묶여 있던 의자에 꽂혔다. 나는 그대로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지며 바닥에 깔린 팔이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ㅋ…흐윽…….”
“이 상황. 어떻게 된 건지 셋 셀 때까지 부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말해 봐야, 나라고 갑자기 컴퓨터가 부팅되고 집 문이 모조리 잠긴 상황에 대해 뭘 알겠냔 말이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처음 보는 상황에 맞닥뜨려 놀란 건 놈들보다 내 쪽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라고… 제길!
무력하게 놈들을 놓치지 않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나는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하나….”
아까… 컴퓨터가 부팅되면서, 분명히 뭐라고 말을 했었는데… 뭐라고 말했었지? 그것만 생각난다면 어떻게든 말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둘….”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아무 생각도 안 나다니……!
어쩔 수 없다. 한 대쯤 더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결국 심문자가 셋이라고 말하는 것을 기다리며 이를 악문 순간, 갑자기 놈들 중 한 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파가 통했습니다. 바깥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볼륨을 높인 듯 지지직거리는 전파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웅얼거리는 사람 목소리로 변했다.
‘…지직…지직…니다…!’
“뭐라고? 똑바로 말해!”
‘지지직…직…에서 외부인…지직… 그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나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목소리는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바랐으면서도 또한 가장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설마…….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깥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이내 인터폰 벨소리가 울렸다.
‘카… 무헌아. 나야, 민후. 집에 있어?’
이런 꼴이라 모습은 직접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집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집 안에 있던 침입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숨을 죽인 채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바늘 끝만 가져다 대도 터져 버릴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의 끝을 끈질기게 부여잡은 채 하늘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온 구원의 줄 같은 민후의 목소리를 들었다.
설마 녀석의 목소리에 이렇게까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날이 올 줄이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했었을까.
‘무헌아?’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을 텐데도 다시 한 번 벨을 누른 민후가 신중하게 나를 불렀다.
도대체 왜 이 순간에 여기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떻게든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려야…….
“어이. 허튼짓할 생각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죽을힘을 짜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심문자가 곧바로 낮게 을러대며 배를 꽉 밟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의자째로 넘어져 밑에 묶인 채 깔려 있는 팔이 호소하는 끔찍한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으으윽……!!”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잇새로 새어 나간 목소리조차도 입을 막은 천 때문에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젠장……!
그사이에도 민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몇 분이 흘러도 민후가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 머리 위에서 놈들이 나지막이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자식, 없는 것 같으면 빨리 꺼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어떻게 할까요?”
“…일단 기다려. 조금만 더 지나면 바깥쪽 놈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여전히 내 배를 밟고 있는 발을 치우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하는 심문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미칠 것 같은 분노에 휩싸였지만, 덕분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자기 복구되어 켜진 홈 시스템 컴퓨터, 그와 동시에 나타난 민후. 만약에… 정말 만약이지만, 이 상황이 우연이 아니라면…?
정확히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다고 뻗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것뿐!
숨을 고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동안, 민후의 문 두드리는 소리는 갈수록 거세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됩니까?”
“……바깥에 연락 넣어.”
짜증과 초조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누군가 묻자 심문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놈들이 말한 그 바깥에 있다는 동료들이 마침 그때 나선 것인지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거기 벨 누르고 계신 분. 이리 좀 와 보세요.’
‘예?’
언뜻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민후임에 분명한 예? 하는 반문을 듣자 머릿속에 적색경보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안 돼. 민후가 그놈들을 따라가면……!’
“좋아, 저대로 밖까지 데려가서 으름장을 놓든 어쩌든 꺼지게 만들라고 해. 재수가 없으려고 하니 하필 이럴 때 별놈들이 다 꼬이는군.”
심문자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순간적으로 내 배를 밟고 있던 발의 힘을 뺐다.
지금이다!
나는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최대한 한 방향으로 거세게 돌려 옆으로 뒤집었다.
쾅! 콰당탕!
“억!”
있는 힘을 다해 묶여 있는 의자째로 몸을 옆으로 뒤집자 방심하고 있던 심문자는 그대로 내 몸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놈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다. 비록 눈이 가려지고 이 꼴이 되기는 했어도 이곳은 내 집 안이었다. 어디에 어느 가구가 있는지쯤은 보이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심문자가 식탁 쪽으로 넘어지도록 왼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노력은 방금 들려온 큰 소리를 보건대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독하게도 그 와중에 놈이 낸 비명이라고는 단발성 외침 정도밖에 없기는 했지만 현관문 밖에 있을 민후가 듣기에는 다행히 충분하고도 남을 소란이었던 모양이었다.
‘…무헌아? 안에 있는 거지? 무헌아!’
바깥에서 정체 모를 깡패 놈들의 동료로 추정되는 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 같던 민후가 다급하게 인터폰 버튼을 눌러댔다.
‘무헌아! 대답해! 안쪽에서 큰 소리가 났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끄으… 빌어먹을…!”
“실장님! 잡고 일어나십시오!”
“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듯한 심문자가 곧바로 살기등등한 중얼거림과 함께 나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허튼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다행히 옆으로 몸을 굴리면서 몸이 약간 웅크려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놈은 내 어깨나 팔 정도만을 걷어찼을 뿐이었다. 더럽게 아프기는 했지만 배나 가슴을 걷어차이는 것보다는 이쪽이 확실히 나았다.
게다가 지금은, 내가 놈에게 한 방 먹인 상황이니까… 이 정도는…….
나는 가물가물한 정신의 끝을 실낱같이 붙잡은 채 놈의 발길질을 감내했다.
“저,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후우, 후. 젠장! 문은 아직이야?”
내겐 어떤 의미론 구세주처럼 느껴진 다른 깡패 놈의 외침에 심문자의 발길질이 멈췄다. 나는 그제야 소리 죽여 겨우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낼 수 있었다.
민후는 내가 여기 있는 걸 확실히 알아챘을까.
하지만 민후가 집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쪽에도 놈들의 동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제발 그다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대로 빠져나가 경찰에 신고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놈들이 자기들끼리 무어라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심한 어지럼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또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어디로 간 거야, 이 자식?”
“그쪽 뒤져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정민후는 신중하게 숨을 골랐다.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하자 폐가 터질 것 같던 고통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상만 봐도 험악한 놈들에게 쫓겨 다니고 있는 현재 상황이 게임도 아니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새삼스럽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계속해서 뛰느라 고생한 심장이 목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쿵거리는 것을 보니 현실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게임 속이었다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여기가 미스트였다면 저런 놈들쯤은 도망 다닐 필요도 없이 처리했겠지.’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이 몹시 아쉽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 정민후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몇 시간 전, 정민후는 잠에 취한 머리로 끊임없이 울리는 벨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날 큰누나의 호출 때문에 모처럼 강무헌과 만나고 있던 중이었음에도 일찍 돌아와 육체노동을 하느라 잠을 늦게 잔 탓에, 벨이 계속 울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금방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끈질기게 거는 거야?…. 으, 머리야….’
결국 벨소리가 다섯 번이 넘게 끊겼다가 다시 들려올 때에서야 백기를 들고 일어난 정민후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더듬더듬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찾아 귀에 가져다 댔다.
“누구세요…….”
[ ……자는 걸 깨웠다면 미안하게 됐군. ]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그 딱딱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정민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번쩍 떴다. 못 알아들으려야 못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어제 만난 사람이었으니까.
정민후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이불에 발이 엉켜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너…! 으아악!”
[ ……. ]
빌어먹을, 스타일 제대로 구겼다. 정민후는 이게 음성 통화라 자신의 모습이 놈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임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창피함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무시한 채 다시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너 미쳤냐, 깜장검사? 나한테 왜 전화질이야?”
믿을 수 없게도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어제 강무헌을 만나러 갔다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로로 다시 만나게 되어 번호를 교환했던 미스트에서의 이름 유완, 현실에서의 이름은 진제환이라던 바로 그놈이었다.
번호를 교환하기는 했어도 설마 그쪽에서 자신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민후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잠이 싹 달아나 버린 눈을 거칠게 비볐다.
[ 무헌과 연락이 안 돼. ]
그리고 진제환이 내뱉은 용건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정민후는 순간적으로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멍하니 깜박였다.
“어… 뭐라고?”
[ 말 그대로. 연락이 안 돼. ]
“깜장검사 너 지금 무헌…이하고 연락이 안 된다고 말하는 거냐?”
방금 자고 일어난 뇌가 덜 깨어났는지 자꾸만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민후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을 짚고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진제환이 여전히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어투 그대로 대답했다.
[ 그래. 아침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으니 연락이 안 될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집 전화가 완전히 꺼졌어. ]
“아니, 잠깐. 입 좀 다물어 봐. 그러니까… 무헌이네 집 전화가 꺼졌는데…. 넌 왜 무헌이네 집에 아침부터 연락을 했는데?!”
손가락을 꼽아보며 상황을 애써 정리해 보려던 정민후가 결국 버럭 화를 내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진제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단순한 수신 거부 지정 상태가 아니라 홈 시스템 컴퓨터 전체가 꺼지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상태라는 게 문제다. 그 집에서 사용 중인 UHCM143-K2 시스템상 이런 상황에서는…. ]
이후 몇 분 동안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는 설명을 듣다가 세수까지 끝내고 나온 정민후는 완전히 질린 기분으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던 진제환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됐어, 그만 좀 닥쳐.”
그동안 저 자식이 벙어리만큼이나 말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착각이 아니었을까. 정민후는 그런 의심을 하면서 머릿속에 남은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아 조합했다.
“어쨌든 네놈이 이 아침나절부터 무헌이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홈 시스템이 아예 꺼져 있어서 연락이 안 되었다는 말은 알겠어. 그래서 나한테 연락한 이유는 뭔데?”
눈을 날카롭게 치뜬 정민후가 앞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진짜 중요한 건 하나도 말을 안 해 주고 있잖아, 너. 쓸데없는 설명은 관두고 용건만 말하라고.”
그 말에 전화 너머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민후는 그 이상 독촉하지 않고 조용히 숨을 내쉬며 대답을 기다렸다.
[ …자세한 전후 사정은 말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무헌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예감이 좋지 않아. ]
“…그래서?”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정민후는 어떻게든 그것을 삼키려 노력했다.
[ 무헌의 집 위치는 알고 있겠지. 먼저 가 줬으면 한다. ]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며, 너도 무헌이 집이 어딘지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지. 정민후는 정말이지 모든 게 비밀투성이인 저놈이 싫다고 생각하며 이를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헌이 신변에 생길 수도 있다는 그 안 좋은 일이 대체 뭐냐고 근거를 묻고 싶다만, 지금은 물론 대답해 주지 않겠지?”
[ ……. ]
대답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침묵이었다.
강무헌의 이름이 나온 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저 자식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민후는 애꿎은 머리칼들을 이리저리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빗어 정리하면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몇 대 패고 싶다. 아니, 이게 전화만 아니었으면 벌써 팼겠지.”
하지만 혹시 놈의 말대로 정말 만에 하나 무헌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민후는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 아무 바지나 꺼내 급하게 꿰어 입었다. 평소 밖에 나갈 때 꾸미는 것에 몇 시간씩 소모하던 자타공인 패셔니스타 정민후를 아는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두 눈을 믿지 못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너는, 안 가?”
윗옷을 갈아입으며 침대 위에 내려둔 휴대폰 쪽을 향해 정민후가 질문하자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간다. ]
그놈의 사정, 사정…. 저놈은 무헌이한테도 저런 식으로 대화하고 앉았을까. 정민후는 속에서부터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마나 늦게? 나도 여기서 아무리 빨리 가도 한 시간 전후야.”
그것도 원래는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것을 최대한 단축할 경우의 이야기였다.
[ 이쪽에서 일을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
“도대체 제대로 알려주는 게 뭐야.”
정민후의 험악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상대 쪽에서도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 내가 지금 갈 수 있었다면 이런 짓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
“뭐라고?”
[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어. 그러니까, 나에게 나중에 뭐라고 하든 상관없으니 지금은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
[ ……ㅎ…씨! ……께서…시라고……니다! 들어……. ]
그때, 전화기 저편에서 무어라 큰 소리가 들려왔다.
[ 끊어야겠군. ]
“잠깐. 너 진짜 한 마디도 안 해줄 거냐고!”
[ ……부탁한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부질없이 끊겨 버렸다. 정민후는 이를 갈며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결국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를 대충 걸친 뒤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민후야! 너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어머, 쟤가?”
등 뒤에서 둘째누나가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세찬 겨울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는 정민후의 머릿속에는 진제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마지막 말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부탁한다.」
부탁이라니. 네가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네놈이 가진 비밀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헌이한테 털끝 하나라도 이상이 있다면 그건 전부 네놈 탓으로 돌릴 테다.
그렇게 정민후는 유인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통사정을 한 끝에 기억 속에 있는 강무헌의 집 근처로 한 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 정말 강무헌에게 나쁜 일이 생긴 거라면 그사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민후는 최대한 자기 자신을 다독여 강무헌의 집 앞에 섰을 때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 자식의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사실일 리 없잖아. 이대로 벨을 누르고, 무헌이가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야. 무헌이가 용건도 없이 찾아왔다고 황당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거면 됐어…. 된 거야. 좋아.’
이대로 누르자. 정민후는 머릿속으로 강무헌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인터폰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몇 초가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벨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순간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민후는 태연한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무헌아.”
안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세 번 누르고 불렀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네 번째로 누르고 불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번이 넘어가도 대답은 들려올 줄 몰랐다.
밖에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하기에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놈의 태도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놈이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경우를 정민후는 지금껏 딱 두 번 보았다. 첫 번째는 어제 강무헌이 그에게 자신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했을 때였고, 두 번째가 바로 아까의 통화 막바지 때였다.
‘두 번 다 무헌이가 얽혔을 때지.’
정민후는 그가 확실치 않은 일로 장난을 치거나 경거망동할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게임에서 만났을 때의 일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 재수 없는 놈이 다른 이도 아닌 강무헌을 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이 상황은 정말로 그다지 좋은 상황이라고 볼 수 없을 가능성이 컸다.
정민후는 혹시나 강무헌이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거나 게임 캡슐 안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계속해서 인터폰을 눌렀다.
‘이런 식으로 몇 분 정도 더 하면 주거침입이나 스토커 의심군으로 분류되어서 자동으로 인터폰 시스템이 신고한다고 하던데…. 그러면 경찰이 올 테니까 상황이 나아지려나.’
“무헌아. 안에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더 눌렀을까. 갑자기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거기 벨 누르고 계신 분, 이리 좀 와 보세요.”
“예?”
경비원인가 싶어 돌아보았던 정민후는 눈앞에 어느 모로 보나 그다지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는 덩치 큰 남자가 세 사람이나 서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왠지 그들이 경비원 같지는 않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정민후는 슬금슬금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태세로 다리의 근육을 긴장시키면서 만면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아, 경비원이세요? 제 친구가 여기 혼자 사는데 벨을 눌러도 연락이 없어서요.”
그러나 남자들의 서늘한 살기 어린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이리로 좀 와 보시죠. 그쪽은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내뱉고 있는 말이 존댓말이기는 하되, 전혀 존대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본능의 경고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정민후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며 슬쩍 강무헌의 집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흘끔 던졌을 때였다.
-쿵…!
-악…….
안쪽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둔중한 충돌음과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이기는 했지만 그 비명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정민후는 그 순간 설마하며 외면해 왔던 모든 불안감이 현실이 된 듯 끔찍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금까지 억지로 평정을 가장해 왔던 가면이 벗겨져 나가고, 남은 것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자신뿐이었다.
“무헌아?! 안에 있는 거지, 무헌아!”
정민후는 정신없이 벨을 누르고 발로 문을 차면서 강무헌의 이름을 외쳤다.
“무헌아! 대답해!”
“이보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제가 방금,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안쪽에서 난 큰 소리가 깨트린 것은 정민후의 평정심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온 남자들 중 한 사람이 문을 두들기고 있던 정민후의 어깨를 강제로 잡아채며 명치에 주먹을 깊이 꽂았다.
“컥…!”
정민후는 그 일격에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허리를 꺾었으나, 동시에 거의 본능적인 판단으로 허리를 숙인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가며 남자의 복부를 받아 버렸다.
“크윽!”
다행히 집 앞 복도는 아주 좁은 곳이었기에 뒤쪽에 있던 남자들은 이 꼴을 보면서도 제대로 앞으로 나올 수 없었다. 정민후는 그대로 명치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며 이 상황에서 쓸 만한, 각종 무술의 달인이자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일상의 낙으로 삼고 있던 누나들의 어깨너머로 주워들었던 말들을 기억해 냈다.
「일대 다수는 아무래도 힘들지. 하지만 좋은 위치를 선점했다면 못 싸울 만한 것도 아냐. 특히 그게 높이의 이점이라면 더 좋고 말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 계단 위쪽에서 아래쪽에 서 있던 자신의 엉덩이를 가볍게 뻥 찼던 큰누나. 고작 한 칸짜리 계단 아래 서 있었을 뿐인데도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지. 내가 계단 위에 있고… 놈들이 나보다 아래 있으니까 말이야!’
따로 뭔가를 배운 건 아니더라도 이런 누나들과 부대끼며 20년 넘게 살다 보면 나름대로 몸을 움직이는 데 이골이 난다. 정민후는 그대로 자신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것을 팔을 들어 막고, 그대로 계단의 난간을 붙잡은 채 몸을 가볍게 날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의 가슴을 있는 힘껏 차서 밀어버렸다.
“큭…!”
“윽, 으악!”
주먹을 막아낸 팔목이 시큰했지만 다행히 놈들은 서로 엉킨 채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가 있었다. 정민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몸을 웅크려 틈새 사이로 빠져나가 빌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오래지 않아 놈들이 그를 뒤쫓아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계속해서 도망 다니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고 있는 현재에 이른 것이다.
‘빌어먹을. 대체 그 안에서 난 소리는 뭐냐고. 비명을 질렀던 사람이 무헌이였으면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놈들을 피해 도망가면서도 강무헌이 걱정이 되어 도저히 이 빌라 주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민후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땀에 젖은 앞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시큰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코트 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일단, 신고. 신고부터 해야겠지…….’
그러나 화면에 나타난 버튼 위로 가져다 댄 손가락이 사정없이 떨렸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112를 누르려던 손은 결국 미끄러져 위에 자동완성 번호로 떠 있던 것들 중 하나를 눌러버렸고 아차 하는 사이 순식간에 전화가 연결되어 버렸다.
이런 젠장. 욕을 내뱉으며 취소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다급하게 움직이던 손이 기어코는 휴대폰을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
안 돼. 도로 주워야 하는데. 당혹해 숨을 몰아쉬며 겨우 다시 집어 든 순간, 취소 버튼을 누르기 전에 휴대폰의 스피커 부분에서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민후 너냐? ]
“주열 형님…!”
헐떡이는 숨소리에 섞어 낮게 부르짖은 목소리가 민후 자신의 귀로 듣기에도 볼썽사나울 만큼 잔뜩 쉬어 있었다.
[ 갑자기 웬 음성전화를 하고 그래. ]
적응 안 되게. 평소였다면 영상으로 보였을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전주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거칠고 껄렁한 어투였지만, 정민후에게는 현실 같지 않은 이 상황을 함께할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다. 강무헌을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무헌아, 제발……!’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정민후는 간신히 전화기를 붙잡고 피를 토하듯 외쳤다.
“형님, 무헌이가, 집이 이상해요. 수상한 놈들이 있어서 간신히 도망쳤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 잠깐, 잠깐. 야. 팔등이 넌 잠깐 닥쳐. ……뭐라고? 잘 못 들었으니까 똑바로 다시 말해 봐. ]
떠듬거리며 무작정 말을 내뱉고 있는 동안 반대쪽에서 잠시 가볍게 소요가 일어나다가는 조용해졌다. 소란스럽던 잡음이 모두 사라지고 들려오는 전주열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싸늘한 저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 내가 지금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무헌이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지금 무헌이네 집 앞인데, 무헌이가……!”
“좋은 말로 할 때 나오는 게 좋을 거다!”
젠장할. 언제 여기까지. 정민후는 즉시 몸을 낮추어 주차되어 있던 차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한 시간대의 주택가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소리를 낸다면 들키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럽게 선팅된 유리 너머로 슬쩍 들여다본 길 너머에는 고작 5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두리번거리며 정민후를 찾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정민후는 도로 주저앉은 뒤 조금이라도 행인이 많은 큰길가로 빠져나가기 위해 천천히 기어서 차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결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몸놀림은 어디까지나 신속하고 재빨랐다.
[ …뭐야? 무슨 소리야, 방금. 설마 너 지금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거냐? ]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휴대폰에서 당혹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만도 하지. 방금 그걸 누가 현실이라고 믿겠어. 정민후는 이를 갈며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네. 조금만 조용히 해 주세요. 들킬 것 같으니까.”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전주열은 눈치 빠르게 곧바로 목소리를 낮춰주었다.
“저도, 헉. 잘은 모릅니다. 아무래도 무헌이가 위험한 것 같으니 집으로 한번 가 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을 뿐인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후우. 무헌이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려고 했더니 갑자기 집 안에서 이상한 비명 소리가 나고, 이상한 놈들이, 튀어나와 절 공격해서…. 그다음은, 쫓기다 지금처럼 된 거예요. 막 신고하려던 참, 허억, 후…… 이었는데 전화기가 잘못 눌리는 바람에, 형님에게 연결되어서….”
“잡히면 죽는다! 빨리 나와!!”
최대한 빠르게 설명하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고함 소리에 묻혀 도로 조용해졌다.
정민후는 잠시 차 사이로 기던 것을 멈추고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기다렸던 것처럼 전화 너머에서도 전주열의 대꾸가 들려왔다.
[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
“무헌이를 걸고 거짓말할 놈으로 보여요, 제가?”
[ 거기 어디야. 무헌이 집이라고? 주소 불어. 당장 갈 테니까. ]
빠르고 단호한 목소리를 듣자 겨우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정민후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이곳의 위치를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B시, U동… Y병원 앞 대로 32번로로 올라오면 있는 빌라예요. 이름은… ㅇㅇ빌라… B동 103호……!”
[ 간다. 넌 적당히 알아서 도망가. 이거 끊고 곧바로 신고부터 때리고. ]
이런 일을 대단히 많이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침착하고 서늘한 전주열의 조언을 들으며 정민후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갑자기 옆에서 제3자의 목소리가 불쑥 나타나 끼어들었다.
[ 아, 잠깐만. 옆에서 들어보니까 왠지 좀 심각한 일 같아서 그러는데 나도 한마디 좀 하자? ]
그가 선정우, 미스트 내의 이름으로는 팔튼이라는 것을 정민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위치를 보니 다행히 가까운 곳이긴 한데, 아무래도 가는 동안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사이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 좀 돌리려고 하거든. 그런데 경찰이 끼면 약간 곤란하니 신고는 좀 나중에 해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신고해도 오늘 같은 날은 바빠서 경찰들도 바로 가진 못할 거고, 내가 아는 놈들 쪽이 더 빨라. ]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더없이 느긋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정민후는 도대체 경찰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는 그 아는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빨리 와주셨으면 합니다. 저 혼자서는… 이 이상 어떻게 해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숙인 정민후의 귓가에 선정우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래. 쓸데없이 잡혀서 재수없게 얻어맞거나 하지 말고 몸조심하라고. 그럼 조금 이따 보지. ]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정민후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고 벽에 떨리는 손을 대 몸을 기댔다. 아직까지도 거친 숨이 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무헌아….”
제발 별일이 아니어서 무사하기를. 이쪽이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위험 신호를 울리는 몸의 본능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차갑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겨우 숨을 돌린 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킨 정민후의 머릿속에 급박한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의 얼굴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 자식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
갑작스럽게 전화해 느닷없이 강무헌에게 가 달라고 부탁씩이나 하던 남자의 목소리. 이 상황이 되고 나니 새삼 재차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정민후는 강무헌이 남아 있을 집 쪽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걱정과 초조함, 의심과 흥분이 범벅이 되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멈추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오늘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진제환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그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여기에도 제법 익숙해졌을 텐데.”
“…….”
“정식으로 우리 회사로 들어올 생각이 있느냐?”
그의 말마따나 짐작하지 못했던 용건은 아니었다. 진전성의 눈에는 진제환이 그간 충실히 진서환의 밑에서 일해 온 것처럼 보일 테고, 얼마 전 생각 외로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그런 제안을 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할 터였다.
그리고 진제환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와 동시에 진전성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두 아들의 능력을 한계까지 짜내어 비교해 관을 씌워줄 이를 고르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 또한 불을 보듯 뻔했다.
“너만 괜찮다면 당장 어디에든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
그 정도 힘이 있는 정도를 넘어, 이 회사의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말이었다.
평소의 진제환이었다면 이 제안에 대해 몇 분쯤 생각해 보는 척 정도는 해 주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이라고는 한시라도 빨리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강무헌의 집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시간은…….’
흘깃 바라본 벽시계의 시간은 그가 이곳에 온 지 벌써 15분 정도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구석을 보인다면 눈앞의 눈치 빠른 늙은 사자가 바로 무언가를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다. 진제환은 무감정하게 내리깐 눈을 깜박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에든 가능하다……는 말씀은 신작 개발팀에도 해당되는 것입니까?”
“‘필라디아’에 관심이 있었나? 몰랐군.”
진전성이 턱 끝을 문지르며 예상치 못했다는 듯 반문했다. 속내를 짐작해 보고자 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왔으나 진제환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원한다면 필라디아 팀이라도 들여보내 주지 못할 것은 없지.”
진제환의 반응을 가늠해 보려는 듯 뜸을 들인 끝에 진전성이 천천히 대꾸했다.
“원하는 건 그쪽뿐인가?”
그쪽이든, 저쪽이든 진제환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VT 프로그래머로서의 진제환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쪽보다는 파헤치고 보완하는 쪽에 더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가 새삼 관심도 없는 개발팀에 들어가고 싶어 할 리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로지 이곳에 있는 진전성과 진서환뿐이었다.
욕심이 많은 이는 눈에 비치는 모든 이들이 다 자기 같다고 생각하지.
언젠가 외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진제환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그러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진제환의 말에 진전성이 흐음 하고 낮게 목을 울렸다. 그다지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신중함은 괜찮은 미덕이지.”
“…….”
“한 달의 기한을 주마. 제대로 생각해 보도록.”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제환은 그 말을 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몇 번 다녀가는 동안 얼굴이 조금 익은 비서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걸려는 것이 보였지만 진제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밑으로 내려갔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층수의 숫자가 1이 될 때까지 VT수첩에 내장된 음성 통화 기능을 이용해 계속해서 강무헌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여전히 상대방의 수신이 불가능하다는 안내음뿐이었다. 예감이 정말로 좋지 않았다.
-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맑은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로비가 나타났다. 진제환은 주변을 한 번 죽 둘러본 뒤 중앙의 안내데스크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앞에 위치한 패스 출입기기 앞에는 늘 호신용 스턴건을 소지한 두 명의 안전요원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약간 지루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서 출입기 앞을 지나가는 많은 이들을 살펴보고 있는 안전요원들의 허리춤에 잘 보이게 꽂혀 있는 스턴건을 확인한 진제환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안전요원의 허리춤에 손을 뻗어 스턴건을 꺼내자 다른 한 명의 안전요원이 깜짝 놀라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다.
“무, 무슨 짓이냐!”
“…몇 시간만 빌리겠습니다.”
“아니 뭐, 뭐요?”
당황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안전요원에게 눈인사를 해 보이고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회전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진제환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저 사람 잡아! 도둑이야!”
“아니 자, 잠깐만요, 저분은 사장님의……!”
안내데스크 담당 여직원이 진제환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마찬가지로 당혹해 안전요원을 붙잡고 설명하려 들든 말든, 로비를 지나다니는 직원들이 진제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든 말든, 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진제환은 그대로 건물 앞에 세워둔 바이크로 다가가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폭발적으로 도로를 향해 뛰쳐나가는 바이크 위로 깊숙이 숙인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빌어먹을. 왜 아직도 아무도 안 오는 거야.
그 시각, 정민후는 초조하게 발로 벽을 차며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주열과 통화를 끝낸 지 벌써 20분이 다 되어가는데 주변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칼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더욱 초조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5분만. 5분만 더 기다려 보자.’
5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때는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강무헌의 집 쪽으로 혼자서라도 뛰어갈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이가 부서져라 악물고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의 뒤쪽에서 갑자기 폭발할 듯한 바이크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바아아아아앙!
“깜장검사!”
그것이 어젯밤 본 바 있었던 거대한 검은 바이크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정민후는 두 번 볼 것도 없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바이크를 향해 달려갔다.
끼기기기기긱.
다짜고짜 도로에 뛰어들어 두 팔을 벌린 정민후의 앞에서 바이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한 바퀴 돌아 급정거했다. 뒤이어 바이크에 타고 있던 남자가 헬멧 옆을 몇 번 두드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유리를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게 만들어 눈을 드러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정민후가 알아본 그대로의 남자였다.
“무헌은.”
평범한 인사나 친근한 말은 오가지 않았다. 날카롭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민후는 오늘 하루 내내 응축되었던 울분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말아쥔 주먹을 헬멧 위로 내질렀다.
“이 빌어먹을 자식. 왜 이제야 온 건데, 젠장!”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살짝 돌아갔지만 진제환은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맞을 놈이 아닌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럴 만한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는 모양이지. 정민후는 얼얼하게 아파오는 주먹의 고통을 참아내며 이를 갈았다.
“뭐 하다 이제 왔냐고 해도 대답 안 할 거지?”
“…….”
진제환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정민후는 한 번 더 놈의 얼굴을 갈기고 싶어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를 강무헌을 떠올리며 간신히 분노를 참고 강무헌의 집이 위치한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상황이 좋지 않아. …누군지 모를 수상한 놈들이 무헌이의 집 안과 밖에 있었어. 처음에는 집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안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패거리 같은 놈들이 날 패더라고. 간신히 피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겠어. 바로 간다.”
거기까지 듣고 말을 끊듯이 대꾸한 진제환이 도로 헬멧 옆을 두드렸다. 작은 소음과 함께 올라갔던 검은 창이 다시 얼굴을 가리며 드리워지는 것과 동시에 손잡이가 힘껏 당겨진 바이크에서 다시 한 번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잠깐. 지금 바로는 안 돼. 주열 형님과 정우 형님이 여기로 오신다고 했으니 다 같이 모여서…… 잠깐. 멈춰! 기다리라고 했잖아!”
대답은 보란 듯이 눈앞을 떠나가는 바이크의 배기구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대신해 주었다.
“이 미친 자식. 이럴 때 정도는 사람 말을 들으란 말이야!”
아무리 소리쳐 보아야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린 이가 대꾸할 리 없었다. 아까 전 수상한 놈들에게 얻어맞았던 배가 다시 쑤셔오는 것을 느끼며 정민후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젠장……!”
원래의 계획은 전주열과 선정우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렸다 합류해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제환이 혼자서 가버린 이상 이미 정민후의 계획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제환은 모르고 있겠지만, 집 근처에 있던 수상한 놈들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돌파할 수 없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쪽이 더 맞는 걸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강무헌의 집과 아직까지 텅 비어 있는 길거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정민후는 결국 길게 신음을 토해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빌어먹을……!”
고민은 길었지만, 행동은 짧았다.
정민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진제환이 향한 강무헌의 집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혼자서라면 절대로 돌파할 수 없겠지만, 둘이서라면 좀 나을 터였다.
‘아니. 좀 더 낫기를 바란다는 쪽이 맞겠지.’
제발 부디, 강무헌에게 별일이 더 생기지만 않았기를.
턱 끝까지 찬 숨을 헐떡이며 정민후는 그것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가 진제환을 따라잡은 것은 강무헌의 집을 코앞에 두고 있는 골목 앞에서였다. 합류할 때까지 부디 멀쩡히 눈에 띄지 않고 있기를 바랐지만, 그가 발견했을 때 진제환은 바이크에 탄 채 대여섯 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은 지금껏 정민후를 줄곧 쫓아왔던 놈들이기도 했다.
“내 말 안 들려? 여기는 지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겁을 주려는 것이 다분한 태도로 위협하듯 다가오는 남자들의 앞에서도 진제환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그저 바이크에서 내려 침착하게 시동을 끄고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한 마디 말을 던진 것뿐이었다.
“비켜.”
“귀가 먹었나? 여기서 꺼지라고 말하고 있잖아.”
밤거리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건달들과는 수준부터 전혀 다른 놈들이었다. 직접 그들을 상대해 보았던 정민후는 그 차이를 이미 몸소 느낀 바 있었다. 자신들끼리의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놈들이 평범한 건달이나 주먹패일 리 없었다.
아마도 저놈들은 조직폭력배거나, 최소 조직폭력배와 무언가 연이 닿아 있는 놈들이다. 일반인인 네가 당해낼 수 있을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바늘로 찌르면 즉시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를 눈앞에 두고서는 차마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젠장. 무모한 짓 하지 말고 내 쪽을 좀 보라고!’
정민후는 답답한 마음으로 진제환을 한껏 노려보았다. 몰래 뒤쪽에서 계속해서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진제환은 일부러인지 아닌지 결코 정민후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먼저 폭발한 것은 다수인 놈들의 쪽이었다.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냥 끌고 가서 던져버려!”
“네!”
노성을 터트린 뒤쪽 놈의 지시에 따라 제일 앞에 나와 있던 두 남자가 진제환의 팔을 잡아끌기 위해 나섰다. 정민후는 지금이라도 바로 놈들을 가로막기 위해 끼어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엄청나게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진제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쥐고는 놈들보다 먼저 앞으로 성큼 나섰다.
“비키라고 했을 텐데.”
“뭐?”
세 번째 경고는 없었다. 진제환이 손에 쥔 것을 그대로 한 놈의 명치에 주먹과 함께 꽂아 넣었다.
“으으아아아아!”
반응은 확실했다. 얻어맞은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듯 온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다가는 진제환이 손을 떼자마자 푹 쓰러졌다.
“크, 커억. 크…….”
쓰러진 채로도 거품을 물고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진제환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전기충격기……?’
저게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정민후는 멍하니 진제환이 든 스턴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망설임이 없었던 그 주먹을 보고 놀란 것은 남자들 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넌 누구야. 어디서 온 놈이냐. 소속을 밝혀!”
소속 따위가 있겠냐. 정민후는 속으로 태클을 걸며 떨리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진제환은 아직도 스파크가 튀고 있는 스턴건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적들의 질문에 대답해 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 듯했다.
“대답해!”
초조한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서자마자 진제환은 또다시 번개처럼 스턴건을 휘둘렀다.
“크아아악, 젠장!”
이번에 타깃이 되었던 남자는 다행히 팔이 스치는 정도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려 쓰러지고 말았다.
“저, 자식, 잡아!”
두 명이 연달아 쓰러지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번에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진제환에게 달려들었다.
“유……!”
저도 모르게 입에 익은 게임 내의 이름을 외칠 뻔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던 정민후는, 잠시 후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것에 놀라 이번에야말로 기절초풍할 듯이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크아악!”
“저리 비키, 으, 으아아아아!”
골목길은 좁았고, 그에 비해 달려든 이들은 많았다. 장정 두 사람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에서 여러 명이 달려들려 하니 자연스럽게 소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진제환은 바로 그 틈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전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공격을 피하며 서로 부딪쳐 소란이 일어난 사이를 틈타 스턴건으로 가차 없이 공격하는 모습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현실이라 믿기 힘들었다.
정민후가 나설 틈도 없이 순식간에 대부분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남자까지 처리한 진제환은 경련하는 적들을 길거리의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발로 짓밟고 넘어왔다. 고통에 찬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쓰러진 무리들 사이에서 힘겹게 들려왔다.
“…….”
여러 명을 쓰러트리는 동안 그가 입은 피해라고는 중간에 누군가 휘두른 잭나이프 칼날에 입고 있던 가죽점퍼가 조금 베인 것뿐이었다.
“너…… 어떻게…….”
어디서 그런 걸 가져온 거야.
그런 걸 쓰는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고.
넌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여러 가지 질문들이 혼란과 함께 머릿속에서 마구 맴돌았지만, 곁을 스쳐 지나가는 진제환에게 정민후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결국 하나도 없었다.
강무헌이 사는 빌라 현관 앞에 선 진제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라앉은 눈동자로 정민후를 바라보았다.
“따라와. 문을 열 거니까.”
정민후는 흠칫 어깨를 굳히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진제환에게 거의 다가서기 직전, 흘깃 고개를 돌려 바라본 뒤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일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을까. 강무헌에게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정민후가 알고 있는 강무헌은 절대 저런 험한 이들과 안면이 있을 만한 이가 아니었다. 조용하다 못해 폐쇄적으로까지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가 어디서 원한을 살 일이 있을까.
‘물론 내가 무헌이에 대해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냐. 그렇지만….’
모르고 산 세월이 알고 지낸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사이라고 해도 그들이 함께해 온 시간은 그 사람의 본질에 대해 깨닫기에 그리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좋아하게 되기에는 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정민후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강무헌의 집 안에서 새어 나왔던 희미한 비명 소리를 다시금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알았어. 앞장서.”
그래, 중요한 건 유완인지, 진 뭐시기인지 모를 저 자식의 정체가 아냐. 정민후는 반복해서 그것만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강무헌의 무사 안위였다.
문 앞에 당도한 진제환은 침착한 태도로 현관문에 달린 지문인식기의 캡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무어라 특정하기 어려운 소리들을 들으며 낯빛이 파랗게 질린 정민후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열고 나면 내가 적들을 상대할 테니, 너는 무헌에게 가.”
“…알, 았어. 그리고?”
“다치지 않게 무조건 바로 빠져나가.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너 따위한텐 원래 신경 안 썼어!”
잔뜩 긴장한 채로도 분노가 묻어나는 대꾸를 외친 정민후를 향해 진제환이 흘끔 눈동자를 돌렸다.
“잘 됐군. 연다.”
지문인식 부분에 진제환이 손가락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푸른빛이 캡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죽 내려가며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다는 신호였다.
정민후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온몸의 근육을 단단히 긴장시켰다. 진제환이 곧바로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꿈을 꾸었다. 전신이 아프고 숨이 막혀 고통스러웠다. 몸부림치며 허덕이다 겨우 의식을 약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귓전을 때리고 있는 엄청난 빗소리였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이런 제……!! 당장 어떻……!!”
“큰일……! 전혀 움……!”
그리고 그 속에 묻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는 다급한 외침 몇 마디.
이상하다. 여긴 어디지.
나는 힘겹게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노력했다. 몇 번이고 시도한 끝에 겨우 시야가 조금 트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왜 열리지 않는 거야.”
“저 미친 화재경보기부터 어떻게 해!”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가 반쯤 벗겨진 사이로 괴한들이 우왕좌왕 움직이며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벼락 속에서 당황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내 집인데 이 물벼락은 뭐란 말인가.
‘비가… 아니었군.’
온몸을 푹 적시고도 모자라 뺨과 입술 사이로 마구 흘러들어오는 물들을 뱉어내려 노력하며 나는 간신히 머리를 굴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렇지.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붙잡혀 윤석호와 무슨 관계냐는 심문을 받다가, 민후가 집에 와 문을 두드렸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의자를 온몸으로 뒤집은 끝에 겨우 기절했던 것이 기억나며 전신에 차게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한쪽 팔과 다리는 아직도 묶인 상태 그대로 의자와 몸 사이에 깔려 있었지만 이제는 이상하게도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모조리 둔해진 것처럼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잘은 몰라도 아마도 이런 상태가 더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가 도로 깨어난 데다 눈가리개까지 그 난리 통에 반쯤 벗겨졌다는 것을 저들이 아직 모르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 것일까. 내가 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건가? 왜 아직도 저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에 있는 거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찌푸려가며 노려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우왕좌왕 움직이는 덩치들과 그 사이에서 어두침침하게 들여다보이는 방독면 같은 마스크뿐이었다.
그때, 눈앞이 흐리도록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희미하게 컴퓨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침입자 경보. 침입자 경보. 시스템에 따라 곧… …니다….
“젠장! 일단 아무거나 창문부터 깨!”
“바깥하고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지금 가진 도구로는 이 소재의 창문을 깨는 건 조금 어려울….”
“김군. 이군. 들리나? 들리면 바로 이쪽으로 와.”
“죄다 먹통입니다. 아무래도….”
혼란스럽게 들려오는 변조된 목소리들 사이에서 대충 정보를 정리해 보면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되어 그들의 뜻과 반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
조금만 움직이려 몸에 힘을 주어도 고통의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도 흘러들어오는 물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얼굴이 전부 물에 잠겨버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고개 정도는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간신히 꿈틀거리며 힘을 주고 있을 때, 내 머리맡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를 덮은 가면 때문에 시선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방금,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젠장…….’
“정신을 차렸군.”
가면 안에서 지직거리는 전자음에 섞여 변조된 목소리가 기괴하게 흘러나왔다.
“이 녀석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 이상 얻어맞았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의 경보가 붉은색으로 확실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뻗어오는 큰 손에서 벗어날 힘 따위는 지금의 내겐 전혀 없었다.
민후는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물에 젖어 더욱 차가워진 가죽 장갑에 감싸인 손이 막 내 목을 움켜쥐기 직전에, 나는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쏟아붓는 물줄기 사이에서 문득 평소 집 문이 열릴 때 잠금장치가 풀리며 들려오던 가느다란 철컥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그와 동시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답답한 공기가 훅 빠져나갔다. 바깥에서부터 흘러들어온 빛이 괴한과 내 목 사이에 칼날처럼 드리워졌고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뒤엉키면서 엄청난 괴성이 앞에서 터져 나왔다.
쾅!
“-크아아아아악!”
“무헌아!”
물소리, 비명 소리,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 모두 한데 엉켜 머릿속이 울리는 와중에도 내 이름만큼은 어떻게든 의식을 파고들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챌 듯 목 바로 앞까지 와 있던 손이 퍽 하고 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밀려났다.
“무헌아. 정신 차려!”
다급히 곁에 앉아 허리를 깊숙이 숙인 남자가 내 고개를 들어 받쳤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온기였다. 눈동자를 굴려 흐릿한 시야를 확연히 하기 위해 몇 번 깜박이자 겨우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무헌아……!”
민후.
아까 전 집 문을 두드렸던 바로 그 민후였다.
무사했구나.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겨우 빠져나갔다. 민후가 떨리는 손으로 시야를 반쯤 가리던 눈가리개를 벗겨 내던졌다.
“이게… 이게 뭐야. 지금 당장 풀어줄게. 아파도 잠깐만 참아……!”
민후가 힘을 주어 내 몸을 받쳐 의자째로 들어 올렸다. 전신이 기우뚱 움직이며 나는 드디어 다시 앉은 자세가 될 수 있었다. 다시 피가 통하면서 짓눌려 있던 팔다리의 고통이 되살아난 것은 좋지 않았지만, 제대로 민후를 보고 눈앞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다행이었다.
민후가 숨을 헐떡이며 물에 미끄러지는 손으로 팔다리를 묶고 있던 테이프를 뜯어내는 동안 나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진제…환…….”
예상치도 못했던 진제환이 현관 쪽에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인데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주먹질이 오가는 사이사이에 빛이 타닥타닥 튀며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뭔가 무기를 쓰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됐다…… 무헌아. 움직일 수 있겠어?”
민후가 마지막으로 오른쪽 발목에서 테이프를 벗겨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움직여 보려 힘을 준 손가락은 예상대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이….’
흐리다. 진제환이, 민후가, 둘 다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눈앞이 점점 흐려져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흘려보내려 눈을 깜박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간신히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었다. 어떻게든 팔에 힘을 주어보려 했지만 찾아온 것은 둔한 격통과 무게가 쏠려 휙 늘어진 왼쪽 어깨뿐이었다.
“무헌아!”
휘청인 몸을 받쳐 감싸 안은 민후가 흠칫 손을 떨며 황급히 내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대게 만들었다.
“몸이 뜨거워… 상처가 너무 심해……!”
민후가 겉옷을 벗어 황급히 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그때에서야 나는 내가 아직도 반라 상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눈앞이 흐렸지만 손끝부터 발끝까지, 드러난 피부는 전부 성한 곳 없이 생채기와 멍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내 눈으로 들여다본 내 몸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무헌아, 일어설 수 있겠어? 빠져나가야 해. 지금 바로!”
민후가 내 팔을 어깨에 둘러 부축하면서 힘을 주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원래도 성하지 못했던 다리 한쪽에 이어 다른 쪽 다리까지 짓눌려 있었던 상태라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 푹푹 꺾이기만 했다.
“……미, 안.”
겨우 입을 열어 바람 소리 정도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속삭임을 토해내자 민후가 순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보였다.
“안 되겠어. 무헌아. 아파도 조금만 참아. 미안.”
뭘 하려고… 하는 생각을 느리게 한 순간 민후가 큰 코트에 둘둘 말아 감싼 몸을 소매 부분으로 묶은 뒤, 그대로 등과 다리 밑을 받쳐 들어 올렸다. 아무리 살이 빠졌다고는 해도 남자 한 명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통 부담이 아닐 텐데도 민후는 이만 꽉 악물고 조심스럽게 물이 찰박거리는 바닥을 헤쳐 현관 쪽으로 나아갔다.
“크아아악!”
“깜장검사, 비켜! 나갈 거니까!”
민후의 외침에 반응한 가면 남자 중 한 명이 돌아서기가 무섭게 검은 덩어리처럼 보이는 진제환이 그 등에 무언가를 깊숙이 찔러넣었다.
파지지지직!
“……으으으윽……!”
무언가 작은 빛 같은 것이 튀면서, 전신을 경련하던 가면의 남자가 진제환이 발로 찬 것과 동시에 천천히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남은 두 명이 뒤로 물러서자 진제환이 그들을 몰아붙이듯 옆으로 팔을 휘두르면서 이쪽으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
“…….”
민후가 나를 안고 뛰쳐나가는 그 잠깐의 순간뿐이었다. 토할 것처럼 기분이 나쁘고 어지러웠지만 진제환의 고요하게 불타는 듯한 시선만큼은 너무나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민후가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 휘청거리면서도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진제환의 모습도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내버려둬도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게에 저항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무헌아. 내 말 듣고 있지? 정신 차려야 해. 아마 곧 형님들도 오실 테고, 구급차도 올 테니까…. 내 말 들려? 무헌아, 무헌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말. 언제였을까. 더 이상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현실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무어라 외쳐대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뺨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손길을 느낀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여기 맞아?”
“더 빨리 쫓아오라고, 이 자식아!”
전주열과 선정우가 나타난 것은 정민후가 강무헌을 데리고 빠져나온 거의 직후였다. 늘어진 강무헌을 끌어안고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정민후는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황급히 소리쳤다.
“여기! 여기예요!”
“민후 너냐? 어디야?!”
“여기요!!”
그제야 멀지 않은 골목 안쪽에서 전주열과 선정우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하는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택과 주택 사이로 좁은 골목이 얽힌 동네에서 처음 오는 사람이 안내 없이 집을 찾아오는 것은 제법 힘들었을 터였다. 게다가 원래는 밑쪽 큰길가에서 안내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을 정민후 자신이 없었던 상황이니 더욱더.
“우리 카르……! 무헌이는!”
“…….”
황급히 정민후의 바로 앞으로 달려온 전주열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민후의 품 안에서 코트에 감싸인 채 고개를 늘어뜨린 강무헌의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본래의 색을 찾는 것이 더 힘들 정도로 멍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전주열이 약간 떨리는 손을 들어 강무헌의 부어오른 뺨과 핏자국이 묻은 입가를 매만졌다. 강무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거 심한데. 구급차는 부른 거야?”
한발 늦게 다가온 선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네….”
정민후는 강무헌의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컴퓨터가 반복해서 말하던 ‘불법 침입 의심. 신고 후 17분이 경과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Y병원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리는 예상시간은 15분입니다.’ 등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고루 다져놓은 걸 보니 확실히 이건 전문가들 솜씨야.”
선정우의 말을 들은 전주열이 번득이는 눈을 들어 벌떡 일어섰다.
“어떤 새끼들이야. 아직 여기 있냐?”
분노로 재가 될 것처럼 타오르는 눈동자가 복수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보며 정민후는 강무헌의 집 현관 쪽을 가리켜 보였다.
“안에 있습니다. 문은 아마 열려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뭐?”
전주열이 입고 있던 두꺼운 점퍼를 벗고 주먹을 푸는 것이 보였다. 한두 번 해본 것 같지 않은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안에… 그 녀석이 있습니다.”
“그 녀석, 누구?”
“깜장ㄱ…… 아니, 유완입니다.”
그 순간, 벗은 점퍼를 강무헌 위에 덮어주던 전주열과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주섬주섬 겉옷을 벗고 있던 선정우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칫 멈췄다.
“…내가 잘못 들었나? 누구라고?”
전주열의 느릿한 질문이 결코 듣지 못해서 던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유완입니….”
“카르를 저렇게 만든 놈들하고, 그 자식하고 세트로 죄다 다져 버리겠어!!!”
사자 같은 외침만을 남긴 채 전주열은 그대로 폭풍처럼 계단 위로 뛰어올라가 버렸다.
“형님! 잠깐……!”
“벌써 가 버렸잖아. 이런. 우리 쪽 녀석들이 곧 올 텐데 같이 가지.”
당황한 정민후와는 달리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쉰 선정우가 턱을 문지르며 강무헌의 다리 위에 자신의 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녀석들?’
“형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로부터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 골목 안쪽에서 12인승 정도 되어 보이는 허름한 구식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바로 앞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멈춘 차 안에서 어딜 어떻게 보아도 밤거리 일에 종사할 것처럼 보이는 근육질의 사내들이 우르르 내려 선정우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사람들은…….’
“내가 말했지. 내가 좀 아는 녀석들이 올 거라고 말야.”
선정우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의 말을 듣고서야 정민후는 아까 전 다급히 통화하던 와중에 선정우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아….”
정민후가 기억해 냈다는 것을 알았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린 선정우가 이내 웃음을 지우고 사내들 쪽으로 뒤돌아서서 서슴없이 차가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분명 나보다 먼저 도착하라고 했을 텐데, 늦은 것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다시 물으마.”
“…죄, 죄송합니다.”
“올라가서 주열이가 하는 일 돕고, 반항하는 놈들 있으면 적당히 얌전히 시켜서 데려와. 시간은… 5분 줄 테니 그 안에 전부 끝낸다.”
“네! 알겠습니다!”
“쉿. 목소리 낮추고 바로 올라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내들을 보며 정민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늘따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처음 보는 모습을 매우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았다.
‘왠지 저 사람들 중 몇 명은 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얼굴이 익숙한 녀석들이 있지?”
정민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선정우가 중얼거렸다. 정민후는 놀란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길드에 있는 녀석들이니까, 기억에 남아 있을 만하지.”
길드라니, 무슨. 그렇게 묻기 전 정민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예전에 미스트 안에서 선정우를 팔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받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팔튼의 자이언트 길드는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길드원이 유난히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그저 웃기다고만 생각하고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니까 뭘 생각하고 있든 그냥 모른 척해 줬으면 좋겠어. 이 녀석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 말과 함께 강무헌을 내려다보는 선정우의 눈이 약간 차가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정민후는 그 눈 안에 서린 감정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압도적인 압박감을 두른 선정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 금방 안에서 처리했나 본데. 저기 나오는군.”
정민후는 반사적으로 강무헌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씩씩거리며 뛰쳐나온 것은 전주열이었고, 그 뒤를 이어 얼굴 전체를 가린 방독면 같은 가면을 쓴 이들 몇 명을 짊어진 남자들이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몇 군데 생채기를 입은 진제환이었다.
“한 놈밖에 못 팼어! 젠장!”
“그래? 뭐 다음은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거니까 됐어. 그놈들은 차 안에다 대충 넣어두고, 또 다른 놈들은 없어?”
선정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주열의 분통 어린 고함을 받아넘기며 그가 데려온 이들이 타고 온 승합차를 가리켜 보였다. 정민후는 진제환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스턴건으로 지져 버렸던 놈들이 있을 골목 쪽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마, 저쪽에….”
“좋아. 가서 있는 것들 전부 수거해 와.”
“네!”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골목 안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더니 이내 진제환이 기절시킨 남자들을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
“형님. 이것 좀 보아주십시오.”
그중 한 명이 심각한 얼굴로 어깨에 짊어진 남자의 걷어 올린 팔을 들어 선정우에게 보여주자 무엇을 보았는지 선정우의 표정이 살짝 무표정하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요즘 이 구역에 저쪽 놈들이 기어들어 올 만한 일이 있었나?”
“딱히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래… 뭐, 이걸로 별문제 없이 우리가 데려갈 수 있겠군그래. 뒤에 실어놔.”
“네!”
남자들이 그의 명에 따라 쓰러진 이들의 손발을 묶어 승합차 안에 다시 던져 넣는 동안, 선정우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진제환과 전주열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놈들 전부 깔끔하게도 손봐 놨군. 네 솜씨지? 뭘 쓴 거야?”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분위기는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썰렁한 침묵만이 흘렀다. 대답을 해야 할 진제환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민후는 현관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진제환의 시선이 일관적으로 강무헌에게 붙박여 있는 것을 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저 자식 스턴건 쓰더라. 그것도 보통 쓰는 것 말고, 완전 최신형. 허가 나와야만 쓸 수 있는 그거 있잖아.”
전주열이 씹어뱉듯 말하며 진제환을 노려보았다.
“흠…. 뭐, 지금은 당장 병원부터 가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끼리 분위기 망치는 건 그만두자고. 구급차와 경찰이 곧 올 것 같으니까 나는 일단 이대로 이 차를 타고 먼저 집에 갈게. 전주열 네가 나중에 연락해.”
선정우가 그렇게 말하며 진제환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몇 초간 지긋이 바라보다 돌아섰다.
“잠깐만요. 집이라니… 그 사람들, 경찰에 데려가는 게 아닌 겁니까?”
뒤늦은 정민후의 질문에 선정우가 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돌아보며 입꼬리를 비죽 올려 웃었다. 먹이의 숨통을 막 틀어쥐는 데 성공한 사자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모른 척해 달라고 말이야.”
“형님.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이놈들아. 잠시만.”
선정우가 한 발을 올려두었던 차에서 도로 내려 똑바로 정민후를 마주 보고 섰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저놈들 전부 보통 놈들이 아냐. 마침 나도 ‘전문가’니까 경찰보다는 우리끼리가 더 말이 잘 통할 것 같거든. 경찰에게 잡혀 봐야 저놈들은 거기서 나오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나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해진 참이니까 그것만 알아내고 나면 끝낼 거야. 이해했겠지?”
“…….”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전주열한테 물어라. 그럼 이만.”
선정우를 태운 차가 곧바로 급격히 후진해 골목에서 빠져나가면서 타이어가 시멘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민후는 멍하니 전주열을 바라보았다. 전주열이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로 선정우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저 새끼! 하여간 있어 보이는 척만 잘하지.”
“…믿어도 되는 겁니까?”
정민후의 어두운 기색을 띤 질문에 전주열이 길게 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뭐…. 믿어야지 어쩌겠냐. 저 자식 집이 저런 거 밥 먹듯이 하는 데니까 한다고 한 이상 확실하게 알아낼 거야.”
“…….”
“그건 그렇고, 우리 카르가 다 죽어가는데 대체 구급차 이 새끼들은 언제 오는 거야?! 전화 다시 넣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애 얼굴이 완전히 시체 같잖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대로변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정민후는 황급히 강무헌을 받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정신을 차려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새하얗게 질린 채 감긴 눈은 다시 뜨일 줄을 몰랐다.
‘무헌아….’
“여기! 여기예요! 빨리 이쪽으로!”
전주열이 황급히 대로변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며 정민후는 강무헌을 안아든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감싸 안았다. 진제환도, 그도, 전주열도 모두 흠뻑 젖어 있는 상태에서 싸늘한 겨울 공기에 노출되어 춥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 중에서 누구보다도 추울 것은 바로 강무헌일 터였다.
전신이 흠뻑 젖은 데다 상의는 입지도 못한 상태에서 체온이 위험할 수준까지 떨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히 위에 덮어준 세 남자의 겉옷이 제 역할을 다해 준 덕분이었다.
‘병원에 갈 때까지만 제대로 버텨 줘….’
얼마 지나지 않아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전주열의 뒤를 따라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당도한 구급대원들이 능숙한 솜씨로 강무헌을 넘겨받아 들것에 눕힌 다음 고정용 벨트를 채우는 것을 보며 정민후는 겨우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이 위에 덮어둔 옷을 들춰 상태를 확인하며 무어라 외치는 목소리가 마치 외계인의 말처럼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얗게 드러난 강무헌의 상체에 얼룩진 피멍들과, 그리고….
“…….”
바로 옆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진제환뿐이었다.
“병원 안 갈 거냐? 타, 빨리!”
전주열이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정민후는 겨우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걸음을 옮겨 구급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다행히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의 사내 세 명이 타고도 남을 만큼 자리가 넓었지만 분위기는 한결같이 침울하기만 했다.
“출발합니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차가 급발진했다. 정민후는 사람 목소리를 듣기 힘들 정도로 크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버렸다.
고작 두 시간도 안 되는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치아 두 개 손상. 오른쪽 고막 부근에 상처. 갈비뼈 세 개에 금이 가고 의자에 깔렸던 왼쪽 팔이 부러졌다. 같은 쪽에 있었던 왼쪽 다리는 근육과 인대에 상처를 입었고, 그 외 전신 타박상 다수.
“……정도가 현재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정신을 차리고 나서 제일 먼저 만난 젊은 의사가 해 준 말에 따르면 그것이 지금 나의 몸 상태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의사가 내쉬는 작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어젯밤에는 열이 지나치게 높아 위험할 뻔했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손가락에는 이상이 없어서, 주무시던 사이 더러워진 깁스는 잘라냈는데 혹시 아프신가요?”
그 말에 천천히 이불 위로 늘어져 있는 손을 보자 정말로 답답했던 깁스가 사라져 있었다. 본래 다음에 병원에 와서 풀려고 했던 것이니 이것만은 정말 유일한 다행거리군.
나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의사는 무엇이 마음에 안 찼는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내 침대 난간의 버튼을 눌러 허공에 떠오른 홀로그램 차트를 보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바쁘게 눌러댔다.
“보호자 분들께 연락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면 언제든 너스콜을 눌러주세요.”
그 외에도 무어라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빠르게 머리 위에 쏟아부을 듯 말하고 난 뒤 의사는 바쁜 걸음으로 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즉 이제 내가 이 병실 안에 혼자라는 뜻이었다.
나는 천천히 온몸의 힘을 빼면서 난간 근처에 떠올라 있는 홀로그램 창을 두드려 기대어 있던 침대를 평평하게 눕히도록 만들었다.
“후우…….”
솔직히 말하자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아팠다. 주사를 몇 방 맞았음에도 전신에서 계속 열이 올라 뜨거웠지만 죽을 것 같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일단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가 깨어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해 당황했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없던 기억도 떠올리게 해줄 기세로 느껴지는 엄청난 전신의 통증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도로 침대에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히 민후와 진제환을 보았던 것 같은데, 깨어난 후에는 나 혼자 1인실에 누워 있었을 뿐 아무도 곁에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 끝에 간신히 간호사를 부르는 버튼을 누를 수 있었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일제히 몰려와 한바탕 몸을 검사하며 난리를 피운 것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 물어볼 만한 여유가 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 다음이었다.
어제 내가 실려 왔을 때의 일을 다행히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던 간호사 덕분에 나는 어제 내가 세 명의 남자 보호자들과 함께 응급실에 실려 왔으며, 내가 치료를 받는 사이 경찰이 찾아와 그들과 제법 오래 이야기를 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경찰들은 나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일단 그냥 돌아갔다고 들었다.
나를 데려왔다는 세 명의 남자 중 두 명이 아마 진제환과 정민후일 것이라는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대체 누구인지 감도 잘 오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내 보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묻자, 아침이 되기 전에 일제히 병원을 빠져나가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라 그 이상은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민후는… 아마 학교 때문일 테고. 진제환은…… 그 녀석도 바빠 보였으니까.
어느 쪽이든 아마 다시 찾아올 것 같으니 그때 자세한 사항을 물어볼 수 있을 듯했다.
그건 그렇고, 제3의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그 정체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부님 사모님께는 지금 바로 연락을 해야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홀로그램 음성 통화 기능 버튼을 눌렀다. 겨우 저번에 입은 상처가 다 나았다 싶더니 또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두 분이 얼마나 놀라실지 눈에 선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디 너무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따로 찾아오실 필요는 없으니 일만 한두 달 정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자. 그 후에는 부모님께도 연락을 하고, 그러고 나서는…….
“…….”
안 그래도 터진 입술을 꽉 깨물자 희미하게 철 맛이 느껴졌다.
윤석호.
이 모든 일의 해답을 쥐고 있을 그 남자를 떠올리며 나는 천장의 무늬가 윤석호나 된 양 노려보았다.
“카…… 아니, 무헌아! 형 왔다!”
세 번째 ‘보호자’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부모님께 걸었던 전화를 막 마치고 난 뒤였다.
“형……?”
설마 이곳에 올 줄 몰랐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당황해 반문하자, 한달음에 내가 있는 침대까지 다가온 주열 형이 링겔 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손을 와락 붙잡았다.
“그래. 나다.”
“여긴 어떻게…. 어제 나를 병원으로 데려온 사람 중에… 형도 있었어?”
“응. 요즘 학교 방학이라 일도 별로 없어서 일단 출근했다가 바로 다시 온 거야.”
형이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전신이 아픈 와중에도 형이 말한 ‘학교’라는 단어에 조금 놀랐다.
“학교…?”
“아. 내가 말 안 했나? 형 학교에서 선생님 소리 듣고 있잖냐. 흐흐.”
“……정말?”
몰랐다. 형이 선생님이었다니…….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형이 푸흐 하는 웃음을 흘리며 내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비벼 쓰다듬어 주었다.
“몸은 어때. 안 아파?”
“괜찮아.”
“괜찮긴 무슨. 얼굴이 묵사발이 되었는데!”
“…….”
거울을 아직 못 봐서 한쪽 얼굴이 부었다는 건 느꼈어도 묵사발 수준인 줄은 몰랐다.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본 형이 한숨을 푹 내쉬며 ‘역시 그 새끼들 전부 멱을 따줬어야 했다’느니 ‘지금이라도 따러 갈까….’ 등의 선생님이라는 직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될까.”
“기억 안 나? 아, 하긴 넌 처음부터 기절해 있었지.”
조심스러운 질문을 들은 형이 볼을 긁적이며 어디까지 이야기해 줘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민후 그 녀석이 네가 위험한 것 같다며 전화로 날 불렀어. 마침 정우 놈이랑 술 먹고 있던 참이라 곧장 갔지. 그랬더니 넌 이미 민후 놈이 구출해서 밖에 데리고 나왔고, 안에서는 그… 유완 그놈이 몬스터같이 가면 쓴 놈들 상대로 전기총을 휘둘러대고 있지 않겠냐. 나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게 격투 게임인 줄 알았다.”
반쯤 진심인 듯한 추임새를 섞어 설명한 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뭐…. 다 해치우고, 구급차 와서 너 태워 보내고 경찰 불러서 상황 수습하고 설명하고 그랬지 뭐. 경찰이 너 정신 차리면 다시 온댔으니 아마 이따가 또 오지 않을까?”
간결한 설명이었지만 알아듣기는 쉬웠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그런데 무헌아. 대체 유완 그 자식은 뭐냐? 현실에서도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민후놈이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밤에 들어가고, 새벽에 나도 출근해야 할 것 같아서 가봐야겠다고 했는데 인사 한 번을 안 하고 사라지더라고. 민후 말로는 애초에 일이 터졌을 때 그 녀석이 너희 집에 가 보라고 해서 갔던 거라는데, 뭐 하는 놈이야? 이건 뭐 이름 하나 통성명을 안 했으니!”
아 뭐, 물론 했어도 안 들어줬을 거지만. 형이 그렇게 덧붙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다른 말은 그렇다 치고 애초에 민후가 어제 우리 집에 왔던 게 진제환이 시켜서였다는 말은 나에게도 금시초문이었기에 놀랍기 그지없었다.
“진제환이… 민후에게?”
“아. 그 새끼 이름이 진제환이냐? 이름도 한 대 패고 싶게 생겼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냐.”
“나쁜 놈은 아니라도 패고 싶은 놈인 건 맞지.”
형이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걸 보니 진제환의 첫인상이 안 좋아도 심하게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음… 그러면 우리 집에 침입했던 사람들은 다 경찰에 잡혀간 거지?”
별 의도도 없었던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형의 표정은 반대로 순간 움찔하며 묘하게 변했다.
“어…. 그게 말이다.”
“놓쳤어?”
설마, 하며 반문하자 형이 살짝 눈길을 피했다.
“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면?”
“그……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고 들어.”
한참 동안 내 눈길을 피하며 망설이던 형이 결국 두 손을 들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잡은 건 맞아. 맞는데, 그 인간말종 새끼들은 지금 정우가 데려갔다.”
데려갔다……고?
나는 그 말의 뜻이 혹시 내가 이해한 것과 다른 것인가 의심하며 형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찰에 붙잡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목소리가 잔뜩 상해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새끼들, 전문적으로 그쪽에서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었다더라. 그런 새끼들은 경찰보다는 오히려 정우 놈 쪽이 더 잘 족칠 수 있다고나 할까… 크흠. 하여간 도움이 되거든. 그래서 경찰이 오기 전에 그 자식들을 먼저 정우 쪽으로 보냈어. 그놈들의 목적이 뭐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제대로 알아내야 할 것 아냐.”
경찰들만으로는 절대 못 알아낸다며 형이 싸늘히 대답했다.
“그러고 나면, 널 그렇게 만든 게 누구든 형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다.”
“경찰에게는, 뭐라고…….”
“도망갔다고 했지 뭐. 어쩔 테냐. 이따 경찰들 찾아오면 너도 그 건에 대해서는 그냥 모른다고 해. 어차피 기절했었으니 기억도 안 날 테고.”
“후…….”
도대체 뭐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이번 건은 정말이지 죽다 살아난 참이라 그 남자들의 배후가 어디인지 나도 정말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수를 써서든 누가 배후에서 그런 짓을 시켰는지 알아내고, 윤석호를 포함해서 전부 다 내가 맞은 것만큼 두들겨 패 수장시켜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초주검이 되도록 맞고 나서도 그렇구나 하고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성인은 아니었으니까.
마음속에서 흔들거리며 움직이던 저울추가 결국 형의 말을 묵인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서 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 선정우 형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건 주열 형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다른 건 묻지 않겠지만… 그 사람들의 배후가 어디인지 알게 되면 꼭 알려줘.”
“…알았다. 그건 당연한 거지. 정우 녀석도 자기네 구역에 침범한 간 큰 따까리들에게 관심이 큰 것 같으니…… 크흠. 크흐흠! 아, 뭐 어쨌든 사적인 궁금증도 있어 보였으니 알아서 잘 알려줄 거다. 넌 낫는 일에만 집중해.”
형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 몇 가지를 무심코 말했다가 애써 헛기침으로 넘기려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맙긴 뭘.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형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아. 무헌아. 지금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런데, 미스트에서 우리 지금 사기꾼 놈이랑 같이 남쪽에 네가 퀘스트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잖냐.”
그 말에 나 또한 내가 지금 한창 퀘스트를 위해 형과 루크레이신과 함께 여행하던 도중이었던 것을 새삼 상기해 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태면 병원에 적어도 2주 넘게는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 퀘스트는 괜찮은 건가?
모든 퀘스트는 진행자가 일정 기간 이상 게임에 접속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해제된다. 그 기간은 퀘스트에 따라 각각 다른데, 슈페리어 퀘스트의 경우는 며칠 정도까지 접속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지 정보가 없어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간 잊고 있었던 문제가 떠올라 걱정스러워진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형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면서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네 상태로는 한동안 접속하기도 어려울 테니 사기꾼 놈에게는 대충 네가 일이 좀 생겼다고 설명해서 지금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기하고 있으마. 그러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으면 퀘스트가….”
“아. 그 문제도 있구나.”
형이 나처럼 심각한 얼굴이 되어 생각에 잠겼다.
“S급 이상의 퀘스트니 접속을 못해도 한 한 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긴 한데… 사실 요즘 시저 놈이 영 조용해서 기분 나쁜 것도 그렇고, 너도 되도록 빨리 퀘스트를 끝내지 않으면 좀… 어려울 것 같긴 해. 그치?”
“…….”
“정확한 건 아마 새턴에 물어보면 확실하겠지만…. 정 안 되면 윤… 뭐시기 지부장한테라도 말해 봐. 그쪽에서도 우리랑 계약한 게 있으니 뭔가 답을 내 주지 않을까?”
나는 잠시 멈칫 몸을 굳혔다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윤석호의 이름이 이런 데서 나올 줄이야.
하긴 형은 윤석호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테니…….
내가 이런 일을 당한 이유가 아마 윤석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면 형은 뭐라고 할까.
어쨌든 일단은 윤석호에게 먼저 연락해야 할 것 같았다.
형은 그 이후에도 몇 가지 이야기를 떠들다 내가 피곤해 보인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얼굴에 떠오른 숨길 수 없는 걱정의 기색을 보며 나는 부어오른 얼굴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 줘서 고마워. 정말로.”
“무헌아….”
그러나 형의 얼굴 표정은 오히려 대번에 어두워졌다.
“입술 터졌다. 힘들여서 웃지 마.”
노력이 지나쳤는지 입술이 또 터져 피가 난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입을 다물자 형이 혀를 차며 옆에 있던 티슈로 내 입가를 조금 닦아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이게 뭐냐… 휴우. 어쨌든 잠도 푹 자고, 치료 잘 받아. 무슨 일 생기면 형한테 바로 전화하고.”
“……응.”
“그럼 형 먼저 간다. 내일 또 올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형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내 머리를 몇 번 비벼주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 좋지만 지금의 나는 한쪽 팔에 깁스, 다른 한쪽 팔에는 거대한 주사바늘이 꽂혀 있어 헝클어진 머리칼조차 스스로 다듬을 수가 없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컴퓨터, 영상전화 열어.”
- 누구에게 거시겠습니까?
눈앞에 반투명하게 떠오른 홀로그램 창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내 집의 컴퓨터 목소리보다 훨씬 맑고 낭랑했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윤석호의 전화번호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번호는… 01A, 1169…… G89SCB.”
- 01A, 1169, G89SCB. 맞으십니까?
“맞아.”
- 바로 발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부디 윤석호가 전화를 바로 받아야 할 텐데. 욱신거리는 몸에서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01A-1169-G89SCB가 고객님의 전화를 수신하였습니다. 곧 연결합니다.
열 번 정도 다이얼이 울리는 영상이 흘러가고 나서 반가운 안내음이 들려왔다. 곧 화면이 한 번 깜박 점멸하더니 익숙한 윤석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 번호는 직통이라 다른 사람이 걸 수가 없을 텐데… 아. 강무헌… 씨…? ]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말하고 있었던 듯, 잠시 다른 곳을 향해 초점을 두고 말을 하던 윤석호가 이내 나를 인식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 윤석호의 얼굴을 보니 새삼 속에서 분노가 오르는 것 같아 나는 인상을 푹 찌푸렸다.
“네. 접니다.”
[ 맙소사.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얼굴은……? 게다가 번호도 다르고… 지금 어디에서 걸고 있는 겁니까? ]
놀랐나. 그야 놀랍겠지. 나는 아직 내 얼굴을 못 봤지만, 주열 형의 반응을 봐서는 보통 심각해 보이는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다.
나는 쉰 목소리를 가다듬어 최대한 명확히 말하려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병원입니다. 보다시피.”
[ 병원이라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 네? ]
“윤석호 씨. 분명 얼마 전 저에게 두 번 다시 당신의 일로 피해를 끼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윤석호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빠져나가듯 사라졌다.
[ …네. 기억합니다. 설마……. ]
“그 설마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윤석호가 무어라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며 이를 꽉 악무는 것이 보였다.
[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 계신 병원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
평소와 같은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가라앉은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나도 그 눈을 마주 노려보며 잘 들리도록 한 음절 음절을 끊어 대답해 주었다.
“이곳의 주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