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길드하우스 근처의 벽에 홀로 기대어 서 있었다.
화이트 캐슬에 대한 정보를 재차 수집하기 위해 나온 참이었지만, 같이 가기로 한 키온 형이 조금 늦어 기다리는 동안 바깥바람이나 쐴 생각이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그럴 때 찾아오는 법이다.
문득 발끝에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여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저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난번에 토렐리트에서 녀석과 마주쳤던 이래, 그래도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나는 내가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다.
“…….”
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었는데.
“시저…….”
입 속으로 이름을 삼키며 앞을 쳐다보자 길 안쪽에 서서 나를 보고 있던 은발의 남자가 말없이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놈이 느릿하지만 성큼성큼 걸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전신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흐르고 머릿속으로 당장 쓸 수 있을 주문 몇 가지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작용이었다.
시저가 마침내 내 앞에 다가와 서자 위압감은 한층 더 강해졌다. 뭔가 말하려고 온 것일까. 아니면 지난번에 왜 말없이 사라졌는지에 대해 추궁하고 공격이라도 하기 위해 온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별로 말이 되어 보이는 추측은 없었지만 시저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으니 드는 것이라고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차라리 공격을 하든가 뭔가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 말도 없는 시저와 대치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전의 기억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수면 상태에서 아마도 내 이름을 부르던 정승조.
시저가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긴장감이 스멀대며 밀려왔다.
시저는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다가는 뒤쪽 골목 안에서 키온 형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자 돌아서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카르야. 여기 있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한참 찾았잖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키온 형이 멍청히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의아한 듯 “카르야?” 하고 재차 부르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 순식간에 표정이 가라앉은 형이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나는 겨우 시저가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면서 대답했다.
“방금… 시저가 왔었어.”
“무어?”
형이 순간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귀를 후비다가 표정이 변하지 않는 나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린 채 길 저편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 자식이 또?!”
화이트 캐슬에 대한 새 정보 수집이고 뭐고, 우리는 그대로 도로 자이언트 길드하우스로 돌아갔다.
“길마님 친구분들, 뭐 잊고 가신 겁니까?”
1층에 앉아 있던 깍두기 머리의 길드원 한 명이 기운 좋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만한 기분이 아니었고, 키온 형은 시저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라 그 질문을 듣지 못한 듯 유령처럼 위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그 길드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며 조용히 목례만을 남기고 형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왜 벌써 와요? 성에 가서 보호마법이 얼마나 강한지 살펴볼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던 루크레이신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어왔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나가자마자 시저를 만나서….”
“시저요?”
루크레이신의 자줏빛 눈동자가 순간 칼날처럼 예리해진 건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
“갑자기 여긴 왜요? 왔다가 그냥 갔어요?”
“…응.”
“몇 달 전부터 그 새끼 아주 이상하다니까! 자꾸 수상하게 구는 게, 뭔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키온 형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저는 목표 없이 돌아다니는 유형 같던데,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네요.”
루크레이신은 좀 더 이성적으로 뭔가 이유를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도 모르는 시저의 속을 루크레이신이라고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굳이 여기에 온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 우리가 살아 있나 보려고 그런 게 아닐까. 날을 잡아서 썰어 버리려고 염탐하러 온 거지. 안 그래도 그 새끼네 길드가 여기 있잖아.”
다른 때에는 서로 무시를 할지 몰라도 위기 상황에서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평소 같았으면 기분이 좋았겠지만 지금은 나도 심란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저의 길드가 여기에 있다고요?”
“그래. 너 모르냐, 사기꾼? 페일 나이츠 말이야.”
키온 형의 말에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 떠올려 보려 노력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 자그레브에 제대로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시저가 길드에 소속되어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 이 자식이. 그래서 내 말을 지금 못 믿겠다는 거냐? ……뭐 나도 그 자식이 왜 길드에 들어 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버럭 화를 낸 키온 형이 한때 우리들 사이에서 최대의 난제였던 그것을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흠… 길드라…… 그러면 시저 그놈은 길드 때문에 잠깐 여기에 들른 게 아닐까? 사실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 그냥 길 가다 마주친 것뿐인 거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사라진 그 얼굴로 미루어봤을 때 그런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였지만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조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이전보다 더 상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봤을 때도 이미 거기서 더 상할 곳이 없어 보였는데 오늘 마주친 시저의 눈은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깊은 어둠 안으로 침잠한 듯 보였다. 쇠구슬 같던 눈동자 색마저 짙은 색으로 보였던 건 골목 안이 어두워서 내가 착각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시저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지.”
키온 형이 결론을 내린 듯 팔짱을 끼고 앞에 나섰다.
“괜히 부딪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퀘스트를 해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카르야?”
괜히 부딪친다……라.
확실히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전에 토렐리트나 발라 모냐크에서처럼 시저와 마주친 순간 내가 그 녀석을 붙잡지 않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는 얼굴 한 번 보기조차 어렵지만, 게임에서만큼은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채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녀석과 마주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아마도 나 자신과 시저 둘 다를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
나는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밝혔다.
그 다음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수련 시간을 조금 줄이고 화이트 캐슬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7서클 전체의 수련도는 이전 서클 마법들에 비해 확실히 올리는 것이 힘들어 아직 20퍼센트대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이었다.
화이트 캐슬에 대한 정보는 쉽게 나올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찾기 힘들었다. 이전의 퀘스트들은 퀘스트지에 가면 뭔가 길이 열리거나 그 주변에서 퀘스트지에 대해 힌트를 줄 만한 사람 정도는 찾을 수 있었기에 시작부터 막막하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그레브라는 인구 최대의 대도시에서 화이트 캐슬이라는 나름대로 잘 알려진 랜드마크 건물에 대해 찾는 것이다 보니 핵심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NPC도 없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들쭉날쭉했다.
이를테면 아무 NPC나 유저를 붙잡고 화이트 캐슬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는 다른 정보를 말해 달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겠다고 하는 식이었다.
차라리 이전 퀘스트처럼 용이라거나 뭐 그런 것에 대해 조사해야 했다면 아는 사람의 범위가 매우 적어질 테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적으로 캐물을 수 있어 오히려 정보를 얻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찾는 대상에 대해 다들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게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절실히 깨달았다.
루크레이신은 늘 하던 대로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해 두었고 키온 형도 대사제로서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물어볼 수 있는 이들에게는 다 묻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화이트 캐슬에 들러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제대로 살펴볼 예정이니 뭔가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그레브의 북문 밖으로 나섰다.
최대한 다른 유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기 위해 밤에 나왔기 때문에 길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밤눈이 좋은 루크레이신을 앞에 세워두고 따라가고 있으니 아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저쪽에 유저 무리가 있네요. 밤 사냥을 나온 것 같으니까 조금 돌아서 가죠.”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루크레이신이 흐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향했다.
사실 발소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루크레이신을 어둠 속에서 따라가기란 매우 힘이 들었다. 그나마 기척이 확실한 키온 형이 중간에 있어 흰 옷자락을 보고 걸음을 옮기면 되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작은 숲과 들판을 지나 어느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바로 앞에 있던 키온 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군.”
땅만 보다 키온 형의 등에 얼굴을 박을 뻔했던 위기에서 벗어나 고개를 드니 어둠 속에서도 달빛과 별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는 화이트 캐슬이 보였다.
낮에는 그냥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성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밤에 보니 제법 신비해 보이기도 하고 운치가 남달랐다. 왜 전부터 저 건물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유저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저번에 봐서 알겠지만 저 성 주변에는 깊은 해자가 있어. 빠진다고 해서 별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뭐…… 조심해서 가자고.”
키온 형의 말대로 저번에 화이트 캐슬을 대충 살피러 왔었을 때, 성을 중심으로 맑은 물이 출렁이는 못이 파여 있는 것을 보았었다.
섣불리 걸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깊이인 그 해자를 건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유저들 중 누군가가 만들어 가져다 두었다는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뿐이었는데, 그리 튼튼하지 않은 탓에 매우 위태위태했다.
“다리는 저쪽에 있네요.”
성 앞까지 도착하자 루크레이신이 먼저 다리를 찾아냈다. 우리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물이 흐르고 있는 해자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너 성문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코르 같은 용도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아치형 문은 돌문으로 막혀 있었다. 보통이라면 하나쯤 있을 법한 샛문도 이곳에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출입구는 오로지 이 문 하나뿐이라는 뜻이었다.
“일단 주먹으로 한번 시도해 볼까.”
키온 형이 주먹을 꽉 쥐고는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며 발을 굴렀다.
“응징의 일격!”
- 쿵……!
형의 주먹에서부터 새어 나온 푸른빛이 돌문 안으로 먹혀 들어가듯 빨려들면서 묵직한 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지만, 돌문은 멀쩡했다.
“젠장, 이 정도 가지곤 아무 소용도 없다 이거냐…….”
형이 주먹을 흔들며 성문을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다음은 제 차례네요.”
앞으로 나선 루크레이신이 품속에서 액체가 출렁이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허리춤에서 뽑아낸 섀도우 나이트의 단검 날 위로 병 안의 액체를 한 방울 떨어트리자, 날을 타고 흐르던 액체가 곧 미약한 빛을 내면서 날 안으로 스윽 스며들었다.
저건…….
“뭐든지 녹일 수 있는 독이라면 저 정도 돌쯤은 단번에 녹이겠죠.”
“저 자식, 잘난 체하기는.”
루크레이신이 키온 형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단검의 손잡이를 한 바퀴 돌려 잡은 다음 힘 있게 돌문을 향해 찔러넣었다.
- 펑!!
“…….”
“뭐야, 저건…?”
이번에야말로 별수 없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이, 단검의 끝부분이 부딪친 순간 물 위로 돌을 던진 것처럼 푸른빛의 파문을 일으키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 웅웅웅웅……!
루크레이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어 단검을 찔러넣으려 했지만 문 위에 얇게 퍼진 푸른 보호막이 그것을 막아냈다. 돌문과 단검 끝부분 사이의 공간은 고작 1cm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보호막이었다.
칫 하는 소리를 내며 결국 팔을 도로 뒤로 무른 루크레이신이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문의 이곳저곳을 찍어 내리며 공격해 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디를 두드려도 푸른 보호막은 깨지지 않고 찌른 부분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파문만 보여줄 따름이었다.
이후 루크레이신은 문 외에도 성벽을 찔러 보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어디를 찔러도 결국에는 푸른 보호막이 터져 나오는 것만 볼 수 있었을 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렇군…… 뭐든 녹일 수 있는 독을 바른 단검이라도, 일단 ‘닿지만’ 않으면 된다 이건가.
독은 오로지 물질만을 녹일 수 있을 뿐 마법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은 전혀 녹일 수 없다는 것이 새로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엿 같은 문일세.”
“이 성 전체가 그 이상한 보호막에 감싸여 있는 것 같네요.”
루크레이신이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성벽을 두드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위쪽에 솟아 있는 성벽의 끝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플라이를 써서 성벽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플라이로 한번 올라가 볼게.”
“괜찮을까? 전에도 날아서 시도해 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실패했다고 했잖아.”
키온 형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날개 달린 몬스터를 테이밍한 어느 테이머 유저가 날아서 들어갈 수 있나 시도해 보았었다는 말은 저도 봤어요. 결과는 어떤 몬스터도 성 위로 날아오르려고 하지 않아서 실패였다고는 했지만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형의 마법이니 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요?”
루크레이신의 말을 듣자 역시 한 번쯤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솟았다. 나는 뒤로 조금 물러선 다음 하늘을 나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소리 죽여 주문을 외웠다.
“플라이.”
밤바람이 로브 자락을 휘감는 것과 함께 나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밑에서 나를 보고 있는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땅 밑의 것들이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오자 겨우 성벽의 끝부분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기만 넘으면…… 하다못해 위에서 내려다볼 수만 있어도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일단 최대한 위로 올라가 볼까.
나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조정해 속도를 좀 더 빠르게 해서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의 끝을 향해 날았다.
이제 곧……!
넘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성벽의 끝이 내 발밑에 있었다. 그러나 막 아래를 내려다보려던 그때,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한없이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카르야!!”
어째서.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플라이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날아올라. 날아오르란 말이다!
“플라이!!! 플라이!”
몇 번을 외쳤지만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찬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정신없이 계속해서 플라이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릿속과 내 입에서 동시에 내 의지가 아닌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레비테이션!” ]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몸이 멈추며 두둥실 떠올랐다.
“헉…헉… 하아…….”
밑을 내려다보니 땅에서 고작 5미터도 채 남지 않은 지점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플라이를 쓰다 어이없이 떨어져 사망한 유저가 될 뻔했음을 실감하며 천천히 땅 위로 내려앉는 마법의 힘에 몸을 맡겼다. 바로 옆에서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이 달려와 각자 내 팔을 하나씩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카르야. 대체 이게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키온 형이 너무 놀라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며 숨을 골랐다. 루크레이신도 답지 않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왜 갑자기 떨어진 거죠?”
“나도… 몰라.”
나는 겨우 내 발로 지탱해 땅 위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벽의 끝은 아까 전과 똑같이 희끄무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른다니?!”
“분명히 제대로 성벽 끝까지 올라갔었는데, 안쪽을 보려고 했더니…… 마법이 해제되었어.”
[ 결계야. ]
머릿속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것도 아주 강력한. ]
“결계……?”
“응? 뭐라고, 카르야? 몸은 괜찮은 거냐? 다친 곳은 없고?”
“나는 괜찮아.”
슈페리어가 내 입을 빌려 주문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 바로 죽었겠지만, 다행히도 다친 곳 없이 살아 있었다.
[ 성을 파괴하거나 침범하려 드는 모든 것들을 막아내는 결계 같은데, 보통 철저하게 준비해서 만든 결계가 아냐. 아마 이전에 코르의 레어 앞에 쳐져 있던 결계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
슈페리어가 말끝을 흐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저 안을 넘어가기 힘들 것 같아.”
“그래. 두 번 날아갔다간 네가 죽겠다. 오늘은 이만 가자.”
키온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루크레이신도 그에 동의를 표하며 성문을 향해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다른 유저들도 아닌 저희 셋이라면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약간 충격이 심했지만, 슈페리어의 말에 의하면 이 성 전체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고 하고 이곳이 퀘스트 관련 지역이니만큼 아마 그 결계를 쳐 둔 사람은 막대기 슈페리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슈페리어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뚫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몰랐다.
“아쉬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다음엔 반드시 뚫는 수밖에.”
키온 형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먹을 쥐고 성을 한 번 노려본 다음 나를 부축하며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거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을 새하얀 성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겨두었다.
지하수도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도, 대놓고 성문을 뚫고 들어가는 방법도 모두 실패하자 우리들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다들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느라 다른 말을 못 듣거나 대화를 잊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식힐 겸 슈페리어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그레브의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직접 걸어 다니는 것은 내가 언제나 제일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결계는 과거의 네가 쳐 둔 결계겠지?”
[ 그런 결계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으면 그거야말로 무서운 일이지. ]
슈페리어가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뻑이 담긴 대사를 쳤다.
“그러면 이번에도 저번처럼 네가 만든 마법을 사용하면…….”
[ 글쎄…… 아마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아. ]
“왜?”
지나가는 사람들이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나를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반문하자 슈페리어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 이전의 결계와는 달리 이번의 그 결계는 물리적인 접촉과 마법적인 접촉을 모두 막고 있었어. 그건 즉, 어떻게 마법으로 결계를 뚫더라도 들어가려 할 때는 몸 자체가 튕겨 나가 결국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지. ]
“그러면….”
[ 아마도 그건 사람이 직접 친 결계가 아니라, 내부에 뭔가 중심축이 되는 매개물을 세워두고 절대 아무도 밖에서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대범위 결계일 거야. 보통은 수많은 마법사들이 몇 달을 준비해서 겨우 집 하나에 그런 걸 칠까 말까 한 거지. ]
하지만 그 결계는 미스트에서 본 건물 중 가장 거대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화이트 캐슬 전체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물리공격을 흡수하고, 독을 바른 검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며 그 앞에서 쓴 마법을 강제로 해제시키는 엄청난 수준의 결계를 도대체 어떻게 뚫고 들어가라는 말인가. 막막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일 줄 알았는데, 설마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라니.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그러면… 그런 결계는 어떻게 해제해야 하는 건데.”
[ 밖에서는 해제할 수 없어. 안쪽에서부터 파괴하거나, 아니면 매개물의 힘이 다해야 해. ]
안쪽에서 파괴하거나, 아니면 매개물의 힘이 다해야 한다니…….
안에서부터 파괴한다는 건 일단 들어갈 수나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제쳐두고라도, 적어도 500년을 버텨 왔을 매개물의 힘이 이제 와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방법이 없군…….”
길게 한숨을 내쉬자 슈페리어 막대기에서 푸른빛이 깜박거렸다.
[ 너무 쉽게 포기하지는 마. 나도 생각해 볼 테니까. ]
막대기 안의 슈페리어가 친 결계는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사람이 친 결계이니 뭔가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낼 가능성도 슈페리어가 가장 클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을 돌아 번화가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걸어가며 생각해 보니 문득 슈페리어라면 애초에 화이트 캐슬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성,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있어?”
슈페리어는 바로 답해 주지 않았다. 4블록 정도를 직진으로 더 걸어가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곳으로 빠지고 나서야 머릿속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아. ]
“안다고?”
나는 순간 급히 막대기를 내려다보려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벽을 짚었다. 슈페리어 막대기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고 잠잠히 내 허리 벨트에 꽂혀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해 주다니…… 약간 야속한 기분이 드는데.
“정보를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 내가 아는 정보를 들어봐야 별로 소용없을 거야. ]
슈페리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그곳은 과거에 왕의 성이었거든. ]
“왕의 성…?”
토렐리트에 있는 슈페리어의 비밀 서재 안, 초상화에 남아 있는 기억 속에서 보았던 궁정 마법사 시절의 어린 슈페리어가 떠올랐다.
[ 그래. 내가 어렸던 시절에 궁정 마법사로 일했던 그 나라의 왕성이야. ]
아무나 살 수 없어 보이는 성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500년 전의 왕성이었다는 말을 들으니 과연 그래서 그런 생김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슈페리어는 들어봐야 별로 소용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을 것 같군.
이전과는 달리 이제 나에게는 슈페리어가 모아 둔 수만 권의 책이 있는 비밀 서재가 있었다. 슈페리어가 분명 왕궁 도서실에서도 책들을 가져왔다고 했었으니 그것이 맞다면 왕성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드디어 목표할 곳이 좀 확실해지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슈페리어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고 발이 닿는 대로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자그레브 전체에 가로세로로 아홉 개 정도 나 있는 대로를 따라 걸으면 각 성문의 끝에서 끝으로 갈 때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편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더 많이 걸으면서 구경하기 위해 각 집과 집 사이를 구불구불하게 훑었다.
다른 대도시들도 주거 구역과 상점 번화가 정도는 잘 나뉘어 있는 편이었지만 자그레브는 그중에서도 가장 정돈이 잘 되어 있는 도시라는 것이 이럴 때 실감이 났다.
자그레브의 주거 구역이 다른 도시에 비해 특이한 점이라면, 길드들이 매우 많아서 그런지 거의 몇 집 걸러 하나 정도는 집 앞에 어느 길드의 길드하우스라는 팻말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길드의 길드하우스는 몇 층이나 되는 거대한 대저택이었지만 반대로 또 어떤 길드는 예전의 매직토피아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작고 낡은 길드하우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돌아다니면서 대충 비교해 본 바에 의하면 팔튼 형의 자이언트 길드하우스는 평균 정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인테리어나 집을 꾸미는 데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자이언트 길드나 마법사들을 위한 연습장을 만들어둔 것 말고 겉만은 아주 평범했던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하우스와는 달리, 길을 가면서 본 다른 길드의 길드하우스들 중에는 그 길드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테리어로 정성껏 꾸며져 있는 곳들이 많았다.
어느 길드하우스는 전부 분홍색으로 꾸며진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간판과 창문 위로 빈 술병을 주르르 매달아둔 곳도 있었다. 계속해서 색이 변하는 팻말이나 커다란 홍보 플래카드 같은 건 정성 들여 꾸미는 범위에 들어가지도 않는 듯했다.
그렇게 막 고양이 모양의 팻말을 단 길드하우스를 지나 다시 대로변 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길을 돌았을 때, 나는 지금까지 본 길드하우스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을 보았다.
처음에는 어느 상점이나 신전 건물인 줄 알았을 정도로 큰 5층 규모의 대저택은 앞에 세워진 멋들어진 금빛 팻말이 아니면 길드 건물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나는 무심코 금패에 쓰여 있는 길드의 이름을 읽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Pale Knights’
페일 나이츠……?
설마 정말 그 페일 나이츠인가 의심하며 바라보고 있으려니 건물 안에서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빠져나왔다.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그 옆의 골목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벌써 가시려고요? 이거 참 섭섭하네요. 하하하.”
“…….”
“저기… 부길마님…….”
생각해 보니 저들은 어차피 나를 모르는 사람들일 텐데 왜 숨었을까. 괜스레 바보 같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며 슬쩍 그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 보니 나무와 쇠창살 문에 가린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어른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 또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희는 ㅋ……로 연결된 사이니까.”
붉은 머리칼의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의 곁에서 한 남자가 대답하지 않고 문을 빠져나왔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바보 같은 짓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다시 골목 안으로 몸을 돌렸다.
시저……!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시저를 만날 때마다 늘 했던 것 같았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독보적이었다.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이라고 해서 내가 시저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그 남자는 분명 시저였다.
숨까지 몇 번 고른 뒤 다시 그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눈을 돌리자 이제 페일 나이츠의 길드 문 앞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그 짧은 사이 벌써 사라진 건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며 그곳을 바라보다 도로 나가기 위해 발을 옮기려던 나는, 문득 목 뒤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바로 고개를 돌리며 주문을 외쳤다.
“인페르노!”
- 화르르르르!
곧바로 내 부름에 응답해 불려 나오자마자 거칠게 용솟음치며 소리도 없이 내 뒤로 다가온 침입자를 덮친 인페르노는 불꽃이 닿기 전 놀라운 점프력으로 뛰어올라 옆 건물의 지붕 위에 선 남자를 잡지 못하고 담벼락만 태우고 말았다.
아귀처럼 타오르는 인페르노의 불길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시저였다.
언제 알아차린 거지……!
지붕 위에 올라서 있는 시저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 밑으로 안광이 형형한 눈동자를 번득이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격하려는 걸까.
하지만 반사적으로 쳐다본 시저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
오른쪽 검집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시저의 검과 늘어져 있는 양손을 본 나는 고민 끝에 인페르노를 완전히 거두었다. 인페르노의 마지막 남은 불길이 사라지면서 시저와 나 사이에는 타다 남은 것들에서 나는 독한 냄새와 약간의 자욱한 연기만이 남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오가는 생각들을 정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디로 가시나 했더니, 저희 길드에 오신 손님인가요?”
고개를 돌리자 아까 시저의 옆에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짐짓 친절한 표정을 지은 채 한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오호라. 이제 보니 저희 구면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죠?”
그 말을 듣자 전에 발라 모냐크에서 시저와 마주쳤었을 때, 마지막에 시저를 찾아왔던 페일 나이츠 길드 사람이 분명 붉은 머리칼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일단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시저를 한 번 흘긋 올려다보더니 나를 겨누고 있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우리 길마님도 당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지 않으니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없어 보이네요. 그러면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라는 깍듯한 인사와 함께 남자는 정말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자신의 길드하우스로 가 버렸다.
“…….”
나는 다시 시저가 있었던 지붕 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저는 막 지붕 건너편으로 뛰어내리려던 듯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 순간 시저가 나를 해칠 생각이 없으며 그다지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도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이대로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그 뒷모습을 본 순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게임에서조차 정승조와 이야기할 기회를 또 한 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토렐리트의 분수대에서 내 귀에 익은 이름을 부르던 시저.
아니, 정승조.
그 얼굴을 떠올리자 뭐라도 좋으니 역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돌발 상황에서 떠오르는 할 말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시저가 거의 완전히 지붕 끝에 다다랐다. 막 반대쪽으로 뛰어내리려는 듯 올라서서 몸을 기울이는 것을 보며 다급히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화, 화이트 캐슬.”
“…….”
막 뛰어내리려던 시저가 멈칫했다.
젠장. 여기 오기 전에 계속 화이트 캐슬에 대해 생각했던 게 여기서 흘러나올 줄이야…….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남은 것은 뒷말을 이어 하는 것뿐이었다.
“…거기 들어가는 방법, 혹시 아냐.”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보고 천하의 멍청이라고 해도 수긍할 수 있었다. 많고 많은 대화 주제 중 하필 화이트 캐슬이라니…… 슈페리어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걸 시저라고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시저도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었다. 지붕 난간 위에 한 발을 걸치고 이쪽을 흘긋 돌아보았던 시저가 소리 없이 그대로 밑으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후우…….
난생처음으로 화술 스킬 같은 게 있다면 따로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더 말솜씨가 있었다면 다급한 상황에서 내뱉은 화제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아니. 시저라면 칼을 안 휘두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복잡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려 골목 밖으로 나섰다. 대로로 향하는 길에는 돌아다니는 유저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한 블록을 더 나아가 무심코 눈을 돌렸을 때, 나는 앞을 가로막듯이 서 있는 장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시하고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저가 내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안 갔어…?”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조용히 묻자 시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말을 하는 걸 보니…”
“…….”
“죽고 싶어서 찾아온 것 같아서.”
“…….”
저거…… 농담인가.
신중하게 시저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놈의 얼굴은 아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어둡게 그림자가 진 눈이나 담담한 말투를 보아서는 그다지 농담 같지 않았다.
상태가 조금… 평소보다 안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나로서는 그 이유를 모르니 이게 맞는 추측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난 별로 안 죽고 싶은데.”
일단 최대한 평범한 대답을 던졌지만 시저의 반응은 찡그린 표정과 짜증으로 불꽃이 확 이는 눈뿐이었다. 역효과를 불렀나.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 전에 나는 재빨리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일단 기분이 나빠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대놓고 검을 휘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은 어쩌면 그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짜내 ‘카프로스’로서 시저에게 다가갔던 것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짜낼 말도 없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오늘은, 음.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온 거야.”
“…….”
“너도 바빠 보이고 나는 화이트 캐슬에 대해 알아봐야 하니 오늘은 같이 놀지는 못할 것 같다.”
그 순간, 시저의 눈동자가 왠지 묘하게 흔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왜 나를 찾아왔던 거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지?”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대로 없었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 시저를 향해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럼 잘 가라.”
이런 상황이라고는 해도 시저에게 어깨에 손을 얹거나 하는 스킨십을 해 가며 인사를 할 만용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게임 속의 시저는 예전의 내 친구 정승조도, 현실에서 나를 거부하는 정승조도 아닌 전혀 나를 알지 못하는 유저 ‘시저’라는 것을 분명하게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 저 녀석은 시저다.
내 기억 속의 승조는 늘 뭐든 잘했고 아는 것이 많았으며 진중하지만 친절하게 친구를 챙길 줄 알고 얼굴도 잘생긴 그런 최고의 친구이자 형제 같은 녀석이었다.
3년간 쌓인 감정과 악화될 대로 악화된 현재에 와서도 내게 더 익숙한 정승조는 그때의 정승조였다.
게임 속의 무차별적인 파괴자 시저를 만나면 내가 기억하고 있던 정승조는 정말로 이젠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들어 그 시저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이끄는 것에 잠깐씩이나마 어울려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본질은 과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게임 속에서 카프로스와 시저로서 만나 보낸 정말로 아주 잠깐이었을 뿐인 그 짧은 시간에 대해 승조는 아무런 의의도 두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시저를 지나쳐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다행히 뒤에서 칼이 날아오거나 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죽으려고 작정했냐는 식으로 묻기에 조금 각오했었는데 다행이군. 여기서 싸움을 벌였다면 분명 조용히는 끝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키온 형이나 루크레이신 또한 얽혔을 테니 말이다.
이 일로 나는 자그레브가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도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머리에 새겼다.
하지만… 시저의 상태는 오늘따라 왜 그렇게 미묘했던 걸까. 정확히 상태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잘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힘을 휘두르고 다니는 인상이었다면, 오늘의 시저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폭풍 전의 고요처럼 조용한 가운데 뭔가를 꾹 눌러 참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키온 형이 요즘 들어 시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퀘스트 유저들에게도 시비를 걸었다는 소리가 딱히 들려오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해 그간 더욱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는 불길한 추측을 했었지만, 오늘의 모습을 보면 그건 결코 아닌 것 같고……. 좋은 의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시저는 과연 이전에 토렐리트에서 가수면 상태 때 했던 잠꼬대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건 정말 내 이름이었을까.
그것에 대해 시저가 과연 기억을 할지 못할지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물어서는 안 되는 사항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남은 것은 혼자만의 속앓이뿐이었다.
어서 퇴원하고 싶다…….
현실에서는 아직도 퇴원을 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퇴원을 하게 되면 곧바로 정승조에게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널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상, 내가 가진 끈기의 무게가 어느 정도쯤인지는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화이트 캐슬 진입에 실패한 이후 3일간 나는 수련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슈페리어에게 화이트 캐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거기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것 없어?”
“아 글쎄.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있어도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대는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명색이 왕성인데 비밀 통로 한두 개가 없는 쪽이 더 이상한 것 같은데.
하지만 이리 유도해 보고 저리 유도해 봐도 슈페리어는 일관적으로 ‘나는 모른다’는 대답만을 반복해 물어보는 내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약 왕성에 지하통로가 있었더라도 아마 지금은 다 없어졌을 거야.”
“하지만 정작 성은 멀쩡하게 남아 있지.”
지지 않고 대답하자 슈페리어가 찌푸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지나칠 정도로 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니, 이번은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거야? 나는 그대의 도우미라고.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당연히 알려줄 거야.”
그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슈페리어는 지금껏 나에게 무언가를 숨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화이트 캐슬은 목표를 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관련 정보를 찾아도 쓸데없는 정보만 넘쳐나는 데다 제대로 된 힌트를 줄 수 있는 NPC가 없다는 점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사람의 피를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대는 연습에나 집중해. 지금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다고 생각해?”
과연 그 말을 듣고도 슈페리어에게 더 물어볼 양심은 없었기에 나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사실 슈페리어를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붙잡게 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기는 했다. 당연히 화이트 캐슬에 대한 정보가 있을 것이라 믿고 자신만만하게 시간을 내어 찾아갔던 슈페리어의 비밀 서재에서 놀랍게도 쓸 만한 정보를 전혀 찾지 못한 탓이었다.
왕성이나 왕궁에 대한 키워드로 불러 모은 수많은 책들을 전부 훑어보았지만 대부분은 역사서였고, 그게 아니면 동화나 교양서 등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들뿐이었다.
그나마 눈에 불을 켠 탐색 끝에 [성 내부 배치 보고서]라는 책이라기보다는 손으로 쓴 일지 모음 같은 것을 하나 찾아내긴 했지만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성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리 배치와 교대 시간표를 기록해 둔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그것이 화이트 캐슬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첫 페이지에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 성의 전체 조감도 하나 덕분이었다.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 사람이 대충 일의 효율성을 알릴 용도로만 그렸다는 티가 엄청나게 나는 그것이 화이트 캐슬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지붕 형태와 주변을 감싼 해자가 미묘하게 화이트 캐슬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맞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아주 작은 희망뿐이었다.
설마하니 책이 수만 권이나 되는 서재에서 화이트 캐슬에 대한 제대로 된 책 한 권을 못 찾을 줄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마법 연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오늘치의 목표를 채우기가 빠듯할 터였다.
“형. 시오의 길드에 의뢰해서 받은 자그레브 지하수도 던전 지도예요. 유저들이 만든 거라 전부 다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연습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으로 들어온 루크레이신이 갑자기 탁자 위에 커다란 지도 두 개를 펴 놓았다.
“옆에 놓은 건 그냥 자그레브의 지도예요. 같은 축척이라 두 개를 겹쳐 놓으면 그럭저럭 뭐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 정돈 알 수 있거든요.”
“뭐야, 사기꾼.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로 지도까지 가져왔어?”
내 옆에 앉아서 몸을 풀고 있던 키온 형이 지도들을 돌아보며 매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루크레이신에 대한 키온 형의 신뢰심이 이미 옛날 옛적에 마이너스를 찍은 상태라 그런지 형은 결코 루크레이신의 순수한 호의 따위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그’ 루크레이신이었기에 키온 형이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해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루크레이신은 나의 기대를 전혀 배신하지 않는 표정으로 키온 형을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꿍꿍이라뇨. 이 지도가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얼만데?”
“유저가 만든 거라 제법 값이 나갔다고요. 물론 저는 제작자가 제게 줘서 감사히 받아왔지만, 원가로 샀다면 좀 부담이었을 거예요.”
“이런 씨발……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키온 형이 시간마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크레이신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어쨌든 이 지도부터 봐 주세요, 형. 지도를 보고 나서 왜 저번에 지하수도에서 화이트 캐슬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거든요.”
약간 흥분한 기색이 느껴지는 루크레이신의 엷게 상기된 뺨을 보며 나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다가가 두 개의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도들은 루크레이신의 말대로 비슷한 면적을 차지하도록 그려져 있었는데, 자그레브의 크기에 비해 확실히 지하수도의 크기가 비슷한 듯 더 큰 것 같았다.
“이 지도 속의 지하수도를 보면 자그레브 바로 밑에 있는 부분은 자세히 그려져 있는 것 보이시죠? 이게 남문에 있는 가장 인기 많은 입구 1번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범위예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루트라서 지도도 자세하죠. 하지만 저번에 저희가 갔던 곳을 실질적으로 루트 2라고 생각한 다음 다시 지하수도 지도를 살펴보면…… 보이세요?”
루크레이신이 지하수도 지도의 오른쪽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그 부분은 뭔가 어렴풋한 통로 덩어리 정도만 그려져 있었을 뿐 왼쪽의 자그레브 밑쪽 지하수도 범위만큼 자세하지는 않았다.
“여기가 우리가 갔던 루트예요. 하지만 지도에서는 어렴풋한 표시만 되어 있죠. 실제로 여길 왔다 간 유저가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루트인 데다 몬스터도 거의 나오지 않아서 일반적으로는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루크레이신이 이번에는 그 루트 2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희미한 범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하수도의 입구가 하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잖아요. 전 두 번째 루트 말고도 세 번째 루트를 위한 입구가 또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예요.”
“……으음.”
그야 두 번째 루트를 위한 입구가 따로 있었으니 실질적으로 화이트 캐슬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지하수도 입구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자그레브 지도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세 번째 입구는 어디쯤에 있는데.”
“그건 아직 모르죠.”
루크레이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거든요.”
나는 루크레이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루크레이신은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분명 지하수도가 화이트 캐슬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키온 형의 생각은 어떨까.
나는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엉?”
루크레이신을 한껏 불만스러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던 키온 형이 내 부름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화이트 캐슬에 진입할 방법.”
“마법도 안 통하고 다른 공격도 안 통하니 일단 직접 들어가는 건 현 상태에선 어렵지. 하지만 저 자식이 말하는 새 입구는 또 어디서 찾으란 말이야? 자그레브 북동쪽 들판을 다 뒤져서 찾아야 하냐?”
형의 말은 내 생각과 거의 비슷했다. 실질적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무리라면 루크레이신이 제의한 제2안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하수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지하수도로 갈 수 있는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성가신 문제였다.
다 뒤지면 어디선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만약에 며칠이 지나도 새 입구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과연 언제까지 찾아야 할까 같은 문제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무한정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나치게 오랫동안 기력을 들여 찾을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나는 두 장의 지도를 눈에 새길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 번째 지하수도 입구를 찾아보는 쪽으로 하자.”
“잘 생각했어요.”
루크레이신이 화사하게 웃으며 양손을 맞잡았다.
“제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글쎄… 그건 해 봐야 알겠지.
“그렇게 됐으면 차암 좋겠구만. 저번처럼 개고생만 실컷 하고 입구도 못 찾으면 화병으로 드러누울 테니까.”
키온 형이 큰 소리로 영혼 없는 비웃음을 흩뿌리며 침대 위에 턱을 괴고 누웠다. 어차피 지금은 저렇게 말해도 다 같이 가면 형이 제일 열심히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는 건 다 알고 있으므로 루크레이신이나 나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부터 갈 거냐, 카르야.”
형이 나를 향해 다정하게 질문했다.
“이번에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지.”
“찾는 건 내일부터라도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각자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찾는 범위를 최대한 줄이려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키온 형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레이신. 이전의 입구는 어떻게 찾은 건지 말해 줘. 우리가 찾을 때에도 참고해야 할 것 같으니까.”
“찾는 건 간단해요.”
루크레이신이 밝은 얼굴로 대꾸하며 지하수도가 그려진 지도를 집어 들었다.
“이전의 지하수도 길이 끝나는 부근의 지상을 뒤지는 거예요. 땅을 샅샅이 뒤지다 보면 돌뚜껑이나… 지하를 향해 뚫려 있는 구멍처럼 지하로 내려가 볼 수 있겠다 싶은 빈틈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 보면 끝이죠.”
아마 세 번째 수도도 그런 식으로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루크레이신의 얼굴을 보며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전의 지하수도 길이 끝나는 부근의 지상’이라….
내 기억에 의하면 이전에 루크레이신이 찾아냈었던 두 번째 지하수도의 마지막 부근은… 지도상에서 화이트 캐슬에 거의 겹칠 듯 말 듯 한 지척에 있는 땅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하수도 입구는 화이트 캐슬 근처에 있다는 소리인가?
“화이트 캐슬 근처에 그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의견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보자 루크레이신이 새삼스럽지 않느냐는 듯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분명 그 근처일 거예요.”
뭘 믿고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루크레이신의 추측이 들어맞으면 제일 감사해야 할 것은 나니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루크레이신이 가져온 지도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저거, 한 장씩만 있는 건가…….
“아. 지도는 제가 복제 스킬로 두 장씩 더 만들어 놨으니까 지도창에 등록해 놓고 보세요. 먼저 드린다는 걸 잊었네요.”
내 눈빛 속에서 지도에 대한 갈망 아닌 갈망을 읽어냈는지 루크레이신이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같은 지도를 꺼내 키온 형과 나에게 한 쌍씩 나누어 주었다.
“복제 스킬……?”
처음 듣는 스킬 이름에 시선을 돌리니 키온 형도 매우 낯설고 찝찝해 보이는 얼굴로 루크레이신이 내민 지도를 받고 있었다.
“밤에 하는 일 종사자 유저들에겐 필수 스킬 중 하나예요. 저도 제대로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믿기는 힘들지만 여기저기서 상당히 유용하다는 그 스킬은 준비된 재료와 복제 대상의 난이도에 따라 만들어진 복제품의 유지 기간과 품질에 차이가 난다고 했다.
“이런 지도 같은 경우는 난이도가 쉬운 편이라 저처럼 그 스킬을 별로 안 써본 사람이라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복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다른 건 어려워요. 만들어 봐야 눈속임이나 겨우 할걸요. 한 시간이나 가면 다행이죠.”
“흐음…….”
정말 미스트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스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구나.
신기한 스킬이라 조금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지도를 받아 아이템창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띠링 하는 안내음이 울려 퍼지며 안내창 하나가 눈앞에 휙 떠올랐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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