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가 아이아가스에 달빛을 비추었다. 이번에 비춘 곳은 방금 전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다른 건물들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공터에 서 있는 흰 건물은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화려한 형태의 기둥과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인가…….”
유완이 건물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생긴 건물을 어디서 보았었는지 바로 기억이 났다. 자그레브 중앙에 위치한 루그 신전과 똑같이 생긴 곳이었다. 성안에 이렇게 큰 신전이 따로 있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아가스가 가리키는 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어쩐지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기둥들을 지나자 아마도 예배를 보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은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높은 천장에서부터 바닥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몇 미터는 될 법한 여신상이 벽면에 입체적으로 크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경외감이 절로 일어날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워 텅 비어 있는데도 전혀 폐허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이아가스가 안내한 빛은 그 여신상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끝이 났다. 이번에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문을 열자 환한 빛이 눈이 멀 듯 쏟아져 내렸다.
빛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난 것은 잘 조경된 정원이었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탁 트인 신전 기둥을 사방에 두르고 가운데에 조성된 넓은 정원에는 일부러 색을 맞춰 심은 듯한 흰 꽃과 나무들이 가득해 흡사 천국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안에 서 있던 흰 제복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샤인 나이트잖아.’
갑옷은 걸치지 않았고 얼굴도 소년티를 다 벗지 못해 어린 티가 났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 미래에 샤인 나이트라고 불릴 남자였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유완과 나를 스쳐 지나간 흐릿한 그림자가 샤인 나이트의 앞에 서서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부단장님! 부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또 여기 계셨습니까? 영애님들께서 그렇게 찾으셨는데…….”
“기도는 사제에게 하는 거지 성기사에게 하는 게 아니죠. 알면서도 찾아오는 멍청한 자들을 상대할 기력 따윈 없습니다.”
“또, 또 그렇게 무서운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저는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작은 그림자가 벌벌 떨자 샤인 나이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본래도 착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고 인텔리하게 생긴 금발의 미남이란 느낌이었지만 어린 시절은 정말 대놓고 차가운 데다 대단한 미소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 어린 나이에 부단장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원래 굉장한 위치였던 모양이었다. 샤인 나이트는 여태 퀘스트를 하며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제법 흥미로웠다.
“이런 일로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들에게 맞아 죽는 게 아니라 내 검에 베여 여신님을 뵙게 될 겁니다. 똑똑히 알아두세요.”
그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듯 작은 그림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또다시 생각에 잠긴 샤인 나이트를 보며, 작은 그림자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번에 있었던 궁중 마법사단과 다크 나이트 연련회 때의 일로 아직도 많이 심란하신가요? 그때 이후 부단장님이 계속 여기에만 계신다고 단장님께서도 걱정하고 계세요.”
“……내가요? 전혀 아닌데요.”
샤인 나이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가 대답하기 전에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가 지운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결승전 때 아깝게 지셨지만 그건 다크 나이트 쪽의 그 사람이 비겁한 수를 썼기 때문이잖아요. 부단장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애초에 마법사단의 그 빨간 머리 마법사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우승은 부단장님이셨을…….”
“그만.”
샤인 나이트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거기까지 해요. 그 말은 정말 기분 나쁘군요. 혹시 밖에서도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까?”
“예? ……당연한 거잖아요. 부단장님께서 너무 겸손하시니 그 천한 다크 나이트들도 아무 말 없이 참아주신 거죠. 다들 얼마나 분해하고 있는데요.”
“…….”
샤인 나이트의 얼굴이 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내뿜은 기세 때문에 순간적으로 주변이 다 떨리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그러지 말라고 하십시오.”
“예? 하지만…….”
“나를 그 사람들 앞에서 창피해 고개도 들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다들 신경 끄고 제 할 일이나 하라고 전해요. 그 시합 결과는 정당했습니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시합에는 운과 승패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나는 그자보다 내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지 않지만 당신들이 지금 나를 그보다 못한 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그……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부단장님은 여신님의…….”
“여신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태어난 내 말을 그래서 듣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샤인 나이트의 말에 드디어 작은 그림자가 찔끔해 물러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 그들에게 나를 위한답시고 한 마디라도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단장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그림자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도망간 이후 샤인 나이트는 홀로 남겨졌다. 잠시 땅을 노려보고 있던 그가 주먹을 쥐고 바로 옆에 있던 나무를 두드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흰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다 보이니까 거기서 나오시죠.”
그가 나뭇잎을 뒤집어쓴 채로 이를 갈며 한 말에 나를 발견한 줄 알고 놀랐지만, 그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도 없이 빠져나온 사람이 더 빨랐다.
‘다크 나이트……?’
방금 전에 보았던 기억에서는 내 가슴께에나 올까 말까 한 어린 소년이었던 그가 지금은 나와 거의 비슷한 키가 되어 있었다. 샤인 나이트와 마찬가지로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풍기는 기색이나 침착한 얼굴을 보면 그동안 상당히 많은 경험을 쌓은 듯했다.
“그쪽에서는 몰래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이 취미입니까? 참 고상하군요.”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샤인 나이트의 비아냥에도 아랑곳없이 조용히 대꾸한 다크 나이트가 품속에서 작은 편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단장님께서 빛의 기사단장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샤인 나이트가 그것을 받아 들자 다크 나이트는 가볍게 묵례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잠깐 기다려.”
“…….”
다크 나이트가 멈칫 걸음을 멈추자 샤인 나이트가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분하지 않은 겁니까? 우승한 것은 당신인데 모든 혜택은 나에게 돌아오고, 당신은 오히려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다는 게.”
다크 나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감정이란 게 없는 겁니까?”
샤인 나이트의 눈에 띄는 외모와 대비해 검은 머리칼에 검은 갑옷 일색인 다크 나이트는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생김새였다. 기사답다기보다는 평생 공부만 해온 인상에 더 가까웠지만, 그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는 신의와 능력은 단순히 퀘스트 속 인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멋있었다.
“무슨 소리를 듣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평민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 녀석에게까지 피해가 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크 나이트는 단순히 ‘그 녀석’이라고 지칭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이가 누구인지 샤인 나이트는 곧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그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본인은 신경 쓰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그때 일로 지금까지 뭔가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더군요.”
다크 나이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팔라딘 디그너티께서 기사 중의 기사라는 것은 압니다. 저와 당신의 입장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디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팔라딘 디그너티라는 호칭은 듣자마자 곧바로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크란의 퀘스트를 위해 어느 마을에 갔던 때, 팔라딘 디그너티의 전설을 통해 힌트를 얻어 퀘스트 위치를 찾아냈던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란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 한구석이 다시 무거워졌으므로 나는 억지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어쨌든, 알겠습니다.”
샤인 나이트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상관없습니다.”
“그분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신다면 어째서 가장 큰 구설수에는 대처하지 않는 겁니까? 모두가 그분을 사생아라고 부릅니다. 누가 보아도 황제 폐하와 그분은 닮아도 너무 닮았죠. 태자 전하가 그분을 견제하려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건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다크 나이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혔다기보다는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태도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죠?”
“그 녀석이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정말로 그분이…….”
“글쎄요. 그 녀석에게 가족은 이 세상에 딱 둘뿐입니다. 그것만은 변함없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다크 나이트는 몸을 돌렸다.
“그 녀석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신다면 언제든 환영할 겁니다.”
“당신은?”
샤인 나이트의 말에 다크 나이트가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는 얼굴이 어쩐지 흐릿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신과는 친구로 지낼 수 없는 겁니까?”
“평민과 알고 지내고 싶으시다면 지금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 성격 정말 짜증 나는군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샤인 나이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 나를 패하게 만든 건 당신이 처음이니까, 귀족과 평민이 아니라 똑같이 검을 쓰는 검사 대 검사로 알고 지내고 싶다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애초에 나는 자존심만 가진 몰락귀족 태생이에요. 피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나보다 뼈저리게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기 있는 바보들은 대부분 혈통 덕에 이곳에 들어와 신의 이름을 빌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쓸 뿐이지만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크 나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진 것만은 분명했다. 샤인 나이트가 처음으로 웃었기 때문이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승낙으로 생각하죠.”
“…….”
“가기 전에 이거나 받아요.”
샤인 나이트가 자신의 제복 망토에 붙어 있던 붉은 보석 핀을 떼어 다크 나이트에게 던졌다.
“앞으로 시비 거는 놈들이 있으면 보여 줘요. 전부 조용히 할 테니까.”
“귀한 물건은 받을 수 없습니다.”
“별로 귀한 것도 아니고, 대가는 대련 열 번 정도로 쳐서 받도록 하죠. 마법사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만.”
다크 나이트는 미련 없이 사라져 가는 샤인 나이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흰 나무와 꽃들이 불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인가…….’
- 그르르……르르르….
- 우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전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해 주던 꽃과 나무들이 검은 가시와 이빨이 돋아난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변해 우리를 공격하는 광경을 보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쪽은 네가, 이쪽은 내가.”
이번에는 숫자도 대량이라 손으로 대충 반을 갈라 유완에게 한쪽을 가리켜 보이자 “응.” 하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든 뒤 내가 맡은 오른쪽 지역으로 발을 들이자 기다렸다는 듯 조그만 꽃들이 고개를 쭉 내밀어 다리를 물어뜯기 위해 마구 뒤엉켜 자라나기 시작했다.
‘상대가 식물이라면 역시 불이겠지.’
“파이어 월!”
- 콰아아아!
부름에 충실하게 응답한 파이어 월이 나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즉시 발밑에 있던 꽃들이 모두 타죽고 나무가 우지직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 그럼 이제 대충 산책이나 해 볼까.
“에어리얼 서번트!”
나를 감싼 불의 벽 앞에 에어리얼 서번트를 불러놓자 보이지 않던 시야가 확 트였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나에게 달려들려던 나무들이 일제히 최대한 멀어지려 몸을 휘고 있는 것이 보여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걸 다 잡아야 보상이 나올 테니…….’
가만히 있는 사람을 먼저 공격하려 든 걸 탓하도록 해라.
마음속으로 묵념을 해준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이어 월도 내가 움직이는 대로 불길을 바꾸어 거리를 유지했다. 이 이미징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지만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나는 파이어 월이라는 벽을 온몸에 두르고 편안히 걸어다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 마법에 내가 상처 입을 리 없다는 것을 이용한 이미징이라서인지, 에어리얼 서번트까지 썼음에도 그다지 무리 없이 둘 다 사용할 수 있어 무척 편했다.
그렇게 내가 산책을 하며 적들을 태워버리는 동안 유완은 제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 확실치는 않아도 유완이 가만히 서서 검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새파란 검기가 번쩍거리며 반원형으로 날아가 나무들을 일제히 베어버리는 것을 보니 잔디 깎는 기계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웠던 정원이 모두 폐허가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10여 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후우….”
검게 그을린 나무 잔해들이 가득한 땅을 보며 파이어 월과 에어리얼 서번트를 거두자 유완이 팔을 풀며 곁으로 다가왔다. 유완의 뒤쪽에도 태풍이 지나간 듯한 비주얼의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이 사이에서 보상을 찾아야 하는데…….”
잔해가 제법 많아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유완이 도로 검을 뽑아 들어 세차게 내 쪽을 향해 휘둘렀다.
“……음?”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유완이 쏘아 보낸 작은 오러에 얻어맞은 새로운 나무뿌리가 막 검게 변해 부서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자라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큰 나무뿌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대충 보아도 평범한 성인 남자만 한 크기의 그것이 위협적으로 끝을 쳐들고서 날카로운 가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늘고 긴 수염뿌리들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어디에 저런 것이 묻혀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뭐. 그래 봤자지만…….
“플레임 스트라이크!”
- 콰콰쾅!
특별히 평소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수십 개 불러내 명중시키자 거대한 나무뿌리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금세 불타 재가 되어버렸다.
‘처리하기 쉬운 건 좋군.’
“……카프.”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유완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방금 전보다 두 배는 더 크고 굵어 보이는 나무뿌리가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엘프의 숲에서밖에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굵기의 나무뿌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채찍 같은 잔뿌리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심!”
일단 거세게 내리치는 가시 뿌리를 블링크로 피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반쯤 파이는 것을 보니 제대로 맞았다가는 무시 못할 부상을 입을 것이 확실해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기어 나오는 거지.’
게다가 죽일 때마다 몇 배로 강하고 큰 놈이 나오니 이제는 함부로 불태워 죽이는 것도 망설여질 정도였다.
“파이어 볼!”
일단 가벼운 파이어 볼을 불러내 던져 보았지만, 이번 뿌리는 껍질도 몇 배는 더 단단해졌는지 그 정도 불씨는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불에 맞은 자리에서 새로이 1미터쯤 되어 보이는 가시 뿌리가 자라나 위협적으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하니 아무리 나라도 이쯤 되면 식은땀이 살짝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에 끝장을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생각하는 와중에도 유완과 나를 노린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기에 피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해야 했다. 중간에 유완이 한 번 작은 뿌리를 잘라냈지만 잘린 자리에서 세 개의 뿌리가 더 자라나 헬리콥터 날개처럼 움직여대는 통에 영 제대로 생각을 잇기가 어려웠다.
“유완…….”
“미안.”
유완이 곧바로 사과하며 옆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정신없는 방어전이 계속되었지만 이렇다 할 처리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유완. 아무래도…….”
일단 멀리 물러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뿌리 한 개가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지만 빈 땅 위로 내리쳐진 가시가 부서져 튕기면서 뜻밖의 후폭풍을 맞아야 했다.
“읏.”
튕긴 가시의 대부분은 망토에 맞아 별로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그중 몇 개가 옷을 뚫고 들어와 몸에 박혔다.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팔이 살짝 저릿하다 싶더니 곧 상태이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부상을 입었습니다. 출혈과 중독으로 인해 마비 증상이 시작됩니다.
부상을 입어도 실제 느끼는 증상 및 고통은 훨씬 가볍다는 걸 감안할 때 이건 상당히 심한 상처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마비라니……. 이건 또 처음인데.
아무래도 저 가시는 단순히 공격용이 아니라 독성까지 품은 모양이었다.
‘설마 갈수록 진화하나?’
진화하고 있는 게 맞다면 피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오래 끌수록 우리에게는 불리했다. 공격을 하면 두 배 세 배로 강력해지는데 얌전히 피하기만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니…… 뭐 이런 게 다 있나.
“카프.”
나뭇가지를 밟고 공중제비를 돌아 내 옆에 착지한 유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시가 박힌 상처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건가?”
그야 물론 죽지는 않을 테니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쉽다고 방심한 결과가 이렇게 돌아온 것 같아 어이없는 마음이 컸다.
“……응.”
그래. 지금부터는 간단하게 상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전심전력으로 없애 주마.
나는 우선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망토와 팔에 박힌 가시를 뽑아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뽑아낸 자리에서 피가 솟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피가 난다. 포션이라도…….”
“괜찮으니 뒤로 잠깐 물러나 줘.”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저놈의 나무뿌리들에게 지옥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그런 뜻을 담아 입꼬리를 올리자 유완이 오랜만에 보는 표정으로 멈칫 굳는 것이 보였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후드 밑으로 음산하게 입만 웃고 있는 게 매우 미친놈 같았을 터였지만 유완은 다행히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나 주었다.
나는 유완이 물러나자마자 여기서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던 마법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관건은 한 방에 저놈의 뿌리 끝까지 말려 버리는 것이니 땅속까지 힘이 미칠 수 있는 큰 범위의 마법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역시 답은 땅속성과 다른 것들을 적절히 알아서 섞는 거겠지.
“스톤 엣지.”
땅속을 아예 뒤집어 버리는 이 마법은 공격 마법으로 쓰기에도, 뭔가 응용하기에도 매우 애매한 마법이었기에 실로 오랜만에 다시 써본 것이었지만 충실히 내 의도에 응답해 주었다. 지진과 함께 땅이 꺼지며 불쑥불쑥 솟아오른 바위들 사이로 당혹한 듯 꿈틀거리는 거대한 나무뿌리의 끝부분이 얼핏 보였다.
“가둬 버려.”
콰-콰-콰콰콰쾅-!!
높이 솟아오른 바위들이 나무뿌리를 포위하듯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는 통에 방금 전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났다. 뿌리는 조금이라도 틈을 벌리기 위해 발악하듯 뻗어 나갔으나, 다행히도 내 마법이 완성되는 쪽이 더 빨랐다.
나는 뿌리가 잘 포위된 것을 확인한 뒤 플라이를 써서 위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하면 나무뿌리가 하늘 높이 자라지 않는 이상 내가 다칠 일은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나무뿌리가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진화하기 전에 재빨리 진짜 목표했던 마법을 쓰는 것뿐이었다.
“너, 꽃보다 부드러운 얼음이여.”
주문이 시작됨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새하얀 냉기가 어리며 후드가 풀풀 휘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슈페리어가 만들어 낸 7서클 공격 마법 중 얼음 계열의 정수인 프리징 플라워가 시전되는 순간의 특징이었다.
“미친 바람의 자락을 타고 죽음을 피워낼 춤을 추라.”
사방이 막혀 우왕좌왕 엉켜 가던 나무뿌리가 드디어 위쪽에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 발목을 잡을 기세로 미친 듯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프리징 플라워.”
손을 들어 나무뿌리들이 새까맣게 엉겨 있는 한가운데를 조준하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하늘 쏘아져 날아간 연기 같은 냉기가 그곳에 보기 좋게 명중했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나무뿌리 끝은 그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고, 뒤이어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라난 얼음이 순식간에 나선을 그리며 뿌리를 휘감아 감싸기 시작했다.
- 후와아아아…….
1분도 채 되지 않아 수 겹의 얇은 얼음으로 촘촘하게 감싸인 나무뿌리는 거대한 한 그루의 눈꽃나무 같았다. 땅은 물론이고 그 안까지 모조리 파고들어 빈틈이란 빈틈은 전부 얼음으로 채워버린 엄청난 마법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걸 실전에서 제대로 쓴 건 처음인가.’
사실 스톤 엣지와 플라이를 쓰고 있는 상태에서 프리징 플라워까지 쓰니 마력 손실이 상당했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후폭풍이 덜했다. 이것은 모두 슈페리어가 가르쳐 준 역향의 법칙과 미스트 마법의 특성을 참고해 상성이 맞는 마법들을 썼기 때문이었다.
스톤 엣지는 자연지물을 이용한 거대 단위 마법이라, 한번 쓰면 유지하는 데에는 이미징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플라이는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보조계 마법이라는 특성상 마력 손실이 아주 적고 다른 마법과 함께 쓸 때에도 별다른 타격이 없는 대표적인 마법에 속했다.
프리징 플라워는 마력 손실이 심한 7서클 마법이지만 대신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성질이 강해 이미징을 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동시에 세 개의 마법을 썼음에도 실질적으로 내가 이미징을 하기 위해 공을 들인 것은 처음에 스톤 엣지를 불러냈을 때와 플라이를 사용해 공중에 몸을 띄웠을 때뿐이었다.
대충 이쯤 하면 스톤 엣지로 파헤친 땅속 깊은 곳까지 전부 얼음으로 꽉 찼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손을 거두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얼음이 팽창해 견딜 수 없게 된 나무뿌리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짓이겨지다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와지직, 쿵, 콰콰콰쾅!
“후….”
비록 생각했던 것보다 마력 손실이 컸고 부상도 입었지만 그래도 얻은 교훈은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겠어.’
“포션.”
기다리고 있었던 유완이 언제 꺼낸 것인지 모를 포션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빨간색이라 혹시나 했는데 마시고 나니 청량한 딸기향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것이, 어쩐지 매우 기시감이 들었다.
‘이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유완과 처음 만났던 아스가 던전 때였던가. 나머지 파티원들이 전부 로그아웃된 덕분에 보스 두 마리를 둘이서 잡고 만신창이가 되어 포션을 나눠 마셨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역시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보았던 다크 나이트와 샤인 나이트만 해도 훗날 서로 목숨을 맡기고 싸우는 사이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할 만남처럼 보였었기 때문인지 감회가 좀 더 새로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포션을 다 마시고 나자 유완이 기다렸다는 듯 포션 하나를 더 꺼내 상처에 부어주었다. 출혈은 이미 멈추었지만 덕분에 외상이 좀 더 빠르게 나을 듯해 다행이었다.
“……고마워.”
“좀 더 조심해. …퇴원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순간적으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유완이 살짝 찌푸린 채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현실의 진제환과 게임 속의 유완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민망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게임인데 뭐.”
“네가 다치는 건 솔직히 이제 더 보고 싶지 않아.”
민망함을 넘겨보려는 시도는 더 큰 민망함으로 돌아왔다.
하긴 괴한들에게 떡이 되도록 맞아 쓰러져 있는 것을 구해준 게 저 녀석이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가…….
“……알겠어.”
결국 두 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이자 겨우 유완의 미간이 평소처럼 펴졌다.
“그래도 네 마법을 오랜만에 보니 좋아.”
저 녀석이 원래 저렇게 직설적으로 부끄러운 말을 잘하는 녀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지금의 칭찬은 상황이 상황이라서인지 평소보다 좀 더 닭살이 돋았다.
“……너도.”
그래도 진심을 담아 칭찬을 돌려주자 유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있는 이가 나뿐이란 게 조금 아까워질 정도로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7서클 마법에 직격탄을 맞아 폐허가 된 정원은 운석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땅이 푹 파였다. 나는 플라이를 써서 가장 깊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 얼음 속에 반쯤 묻혀 있던 무언가를 찾아냈다.
‘이건…….’
- 띠링!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안내창이 눈앞에 반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