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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기억은 탑처럼 생긴 건물의 거대한 복도가 종착점이었다. 왼쪽에는 넓은 창이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섬세하게 조각된 기둥과 벽면이 보여 길을 걷는 내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일이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지만, 아무도 걸어다니는 이가 없는 지금은 그 거대함이 오히려 악몽에나 나올 법한 곳처럼 느껴져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아가스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따뜻한 햇살이 복도에 그려진 아름다운 기하학적 무늬를 돋보이게 만들고, 쉴 새 없이 걷고 뛰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또 시작이에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하여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며 창밖을 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검은색 일색으로 몸을 두른 남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크 나이트가 다 같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가 싶어 나도 창 쪽으로 다가가자 공기가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고작 이것뿐이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두어 명,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이 또 그 주변에 몇 명. 그리고 산더미처럼 모여들어 원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 속에 당당히 버티고 선 이는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남자 마법사였다.
“그래 놓고 뭘 가르쳐 달라고 해? 비켜. 갈 길 바쁘니까.”
“이런 법은 없습니다!!”
이번 기억에서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슈페리어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솟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주변에 쓰러져 발목을 잡고 절규하는 이들의 사연이 더 궁금했다.
“선배 마법사는 후학들을 위해 배움의 권리를 충족시켜야 하는 법이 있단 말입니다. 최연소 8서클 수석 궁중 마법사를 상대로 저희들이 어떻게 감히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 자체가 불가한 사람을 상대로 마법을 하나라도 성공시켜야만 가르쳐주겠다니, 정말 너무합니다!”
“맞아요. 정말 해도 너무합니다!!”
슈페리어의 주변에서 울며 한탄하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전부 마법사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다크 나이트 빼고는 전부 로브를 걸치고 있었군.’
슈페리어도 도서관 초상화에서나 보았던 화려한 흰색 로브를 걸치고 옆구리에 두꺼운 책을 낀 것을 보니 진짜 궁중 마법사였다는 게 실감이 갔다.
“내가 걸음마를 할 때보다도 마법을 못 쓰는 너희들이 잘못이지. 설마 정말로 몇 년이 지나도록 마법을 성공시킨 놈이 한 놈도 없을 줄 알았겠어?”
슈페리어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당당하게 다른 마법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선 사람들 중 슈페리어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던 담력을 가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자란 놈들. 매번 내가 마법 쓰는 방법을 그렇게 친절히 보여주는데 대체 왜 그거 하나 성공을 못 시키는 거야? 이쯤 되니 정말 지겹다, 지겨워!”
“맞습니다. 그러니까 멍청한 저희들을 위해 제발 한 번만 더 보여주세요!”
“한 번만 보여주세요! 한 번이면 될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이들의 눈이 광기에 차 번들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슈페리어가 정신세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다른 마법사들과 더불어 마법을 공부해 본 경험이 없는 티가 난다고 했었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마법을 배우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거라던 말을 그때는 그냥 넘겼었는데, 이렇게 수많은 마법사들과 함께 선배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을 직접 보고 따라 하려 애쓰면서 지내는 환경이라면 적어도 이미징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을 듯했다.
“나도 마법사지만, 수석 마법사님이 올 때마다 이 난리인 건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
“나도. 하지만 대단하시긴 하잖아. 나도 파이어 볼 하나만이라도 저분처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서라. 저분은 그걸 걸어다닐 때부터 숨 쉬듯 하셨대. 우리처럼 재능 없는 녀석들은 백날 노력해도 그렇게는 안 돼.”
내 옆에 서 있던 흐릿한 인상의 마법사들이 소곤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량도 타고났다지?”
“어떻게 저렇게 가는 몸에 드래곤 수준의 마력이 깃들 수 있는지 불가사의라잖아.”
“그래서 원로 마법사님들도 저 성격 때문에 화내면서도 앞에서는 마법 한 번만 더 보여 달라고 숙이는 거지.”
“…….”
연예인이 따로 없군.
슈페리어가 독설을 하든 말든 마법을 한 번만 더 보여 달라고 무조건 매달리는 집단을 보니 어쩐지 얼마 전 자그레브에서 만났던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마법 쓰는 것을 한 번만 보여 달라던 간절한 표정들과 7서클 마법을 보았을 때의 환희 어린 모습들……. 생각해 보면 눈앞의 이 마법사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마법사 유저는 결국 마법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어쩔 수 없나…….’
똑같이 마법을 처음 사용해 보더라도, 누군가 그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나는 게 미스트의 마법이다. 선배 마법사들에게 배움을 갈구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에게는 같은 마법사로서 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휴, 정말.”
창밖에서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쉰 슈페리어가 주변 마법사들을 노려보며 손을 휘저었다.
“네놈들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책 읽을 공간도 없어. 제발 좀 비켜! 윈드 케이지!”
“으아아악!”
순식간에 어떤 거대한 손이 나타나 슈페리어의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양쪽 끝으로 밀어버린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선 채로 주르륵 미끄러져 슈페리어의 앞길을 터준 꼴이 된 이들이 놀라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또 무슨 마법입니까!”
“방금 봤어? 마법 이름 일단 받아적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 수십 명의 운동성을 마음대로 제한하면서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게끔 조절하는 저 무시무시한 이미징이라니! 나한테는 불가능해!”
“우와아아!”
슈페리어는 지겨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법사들을 향해 손을 내저어 계속 치우고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슈페리어 성격에 저런 생활을 매일 했다면…… 궁중 마법사 생활이 싫을 만도 했겠군.’
그러다 문득 이번 퀘스트는 다크 나이트와 관련된 기억이 중심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다크 나이트는 다행히 아직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슈페리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슈페리어를 부르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빛이 밝아지면서 사람들 속에 반쯤 가려져 있었던 다크 나이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다크 나이트의 표정 중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슈페리어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젊은 마법사들은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다크 나이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크 나이트는 슈페리어가 건물 안으로 들어와 사라질 때까지 단 한순간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게임 속의 인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얼굴이었다.
“여덟 번째는 조금 짧군.”
빛이 사그라지면서 도로 어둡고 컴컴한 복도로 되돌아온 뒤 유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아직도 다크 나이트의 표정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카프?”
“……아.”
뭔가 이상한 거라도 보았느냐고 묻고 싶어 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묘한 기분은 도리어 두 배로 강해졌다.
“음. 아무것도 아냐.”
순간적이지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게 저 녀석이 몇 번이나 반복했던 고백들이었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유완, 진제환이 내게 보낸 그 맹목적인 말들 속에도 다크 나이트가 슈페리어를 보며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마음이 있었을까.
나에게는 누군가를 생각만 해도 행복해졌던 기억이 없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곁에 있었던 것이라, 행복한 기분보다는 당연한 것을 떠올릴 때의 안정감이나 미안한 기분이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던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 그렇게 행복한 기분을 들게 해준 적이 있었다면…… 생각보다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다크 나이트의 미소는 내 안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
이후 평소처럼 적이 나타날 줄 알았던 패턴에서 벗어나 몇 시간 동안 일그러진 미로 안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애쓰다 분노가 폭발해 모든 공간을 아이스 스피어로 뚫고 탈출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가기 전에 조금만 쉬자.”
아홉 번째 퀘스트로 향하기 전, 마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이 느껴져 휴식을 제안했다.
여덟 번째 퀘스트 보상은 미로 출구에서 얻은 <윈드 케이지 마법서>였다. 이 보상 덕분에 몇 시간 동안의 고생도 ‘할 만했다’ 정도로 머릿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나아져서 다행이야.”
유완도 그것을 느낀 듯 내 후드 위에 손을 얹었다 떼었다.
“뭐 그렇지.”
보상이 이게 아니었다면 이런 퀘스트를 만들었을 슈페리어를 정말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일단 마법서나 조금 살펴볼까.’
나는 기분 좋게 마법서를 펼쳤다. 미스트의 마법서들은 일단 표지를 펼치면 자동으로 안내창이 떠오르며 마법이 스킬창에 입수되었고, 책 내부는 마법을 썼을 때의 효과를 장황하게 묘사한 글과 아무리 보아도 추상화 같은 마법 시전 결과 ‘예상’ 삽화, 그리고 시전 주문이 눈에 잘 보이게 적혀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슈페리어가 만든 마법서는 대부분이 알아볼 수 없는 그림문자로 쓰여 있었는데, 뭔가 뜻이나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여태 물어본 적이 없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마법 입수도 잘 되었고 7서클의 경우는 아예 아이아가스로 마법 시전하는 기억을 봐 버렸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책 안에 내용이 차 있든 안 차 있든 배우는 난이도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미스트의 마법서들은 사용자에게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윈드 케이지는 방금 전에 슈페리어가 시전했던 걸 봤으니 이미징은 일단 통과겠군.
가장 어려운 과정을 이렇게 쉽게 넘길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축복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표지를 넘기자 띠링 하는 낭랑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안내창이 눈앞에 훅 떠올랐다.
- 6서클 마법 윈드 케이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