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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자택에서 책을 보며 뒹굴거리고 있던 유프 카윗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데이브 A. 리. 다른 이의 전화였다면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아느냐는 욕설과 함께 전화를 집어 던졌을 유프도 차마 그 이름을 보고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여보세요?”
[ 방금 전에 전화가 왔어. ]
약간 흥분한 어조의 데이브가 다짜고짜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평소 불만스럽게 투덜대는 경우는 많아도 이런 식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데이브를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프 카윗은 잠시 머리를 굴려 데이브를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만들 만한 인물들 리스트를 머릿속에서 빠르게 떠올렸다.
“어…… 누구한테 왔으려나. 음. 회장님인가?”
[ 할아버지는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지 않아. 윤석호야. 그 남자가 내게 방금 전 전화를 했었어. ]
“윤이?”
이것은 뜻밖의 이름이었다. 유프 카윗은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방만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윤이 어째서 이런 시간에 너에게만 연락을 해?”
[ ReL 프로젝트 때문에. ]
“ReL 프로젝트? 그게 왜?”
[ 캡슐 설계도와 관련 자료들을 전부 내가 가지고 있거든. 그걸 전부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프로젝트에 어쩌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니 봐야겠다고 하는 거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오픈하고 1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 와서? ]
“…ReL 프로젝트에 문제가? 허어.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 ……아무 말 못 했어. 그래도 자료는 보내줬어. 그러고 나서 바로 전화를 끊은 뒤에 너에게 이야기하려고 건 거야.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거야? 그 캡슐을 만든 게 누구인데! ]
“데이브. 데이브……. 일단 너는 진정하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윤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했다는 거지?”
데이브는 평소에는 얌전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제 일에 관련해서라면 더없이 자존심이 드세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제가 참여한 프로젝트에 대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극도의 패닉에 빠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더 평범하지 않았다.
유프 카윗은 윤석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남자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러한 이유로 연락을 했던 일이 한 번도 없던 이가 1년간 잘 진행해 오고 있던 프로젝트의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려 연락했다니. 그건 즉 그만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데이브. 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묻지 않은 거야? 그곳과 이곳의 시차를 알면서도 연락할 정도였다면 그건 엄청나게 급한 일이라는 뜻이잖아.”
[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 ]
잠시 말이 없던 데이브가 힘없이 대답했다.
[ 급하다고 하더니 정말로 파일을 받자마자 가 버렸다고.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는 게 더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
“아니. 그렇게 비약하지 말아. 말 그대로 급했으니까 그랬겠지. 아무튼 그 말을 들으니 점점 더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더욱 궁금해지는데. 윤은 웬만한 일로 그렇게 급히 움직이는 사람이 아냐. 너도 알잖아?”
[ ……. ]
유프의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즉 데이브 또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프는 데이브를 달랠 생각으로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네게 설명을 안 해 줄 리 없어. 아마 몇 시간쯤 뒤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 테니까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탔는데 동료끼리 이 정도 일로 흔들려서야 되겠어? 정말 문제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 ]
“우리의 소중한 사람을 생각해.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것뿐이라는 걸 늘 기억하라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지칭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데이브는 그제야 진정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인의 이름은 언제 어디서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 ……그래. 네 말이 맞아. ]
데이브가 힘없이 대꾸했다.
[ 그분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에게 뭐든 협력해야 하지. 알겠어. ]
“그래. 기분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일단 자. 내일 출근해서 만나자구. 응?”
유프는 데이브를 달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읽던 책을 도로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로지 방금 전 했던 전화 통화의 내용뿐이었다.
갑작스럽게 ReL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를 모두 가져간 윤석호가 하려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와 같이 빈틈없는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까.
‘아~ 궁금해. 대체 뭘까.’
유프 카윗은 ReL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않았었지만 그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진행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통칭 Re Life 프로젝트. 삶을 다시 한번 살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그 프로젝트의 운명은 장제천도, 장명진도 아닌 윤석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아니… 원안이 된 의견은 장제천이 냈었던가…… 잘 기억이 안 나네. 뭐, 그걸 정말로 구체화시킨 건 윤석호니까 윤석호의 프로젝트지.’
최초에 그것은 한창 게임을 개발하던 도중 가볍게 이야기되었다가 곧바로 기각되어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던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장제천은 그 아이디어에 쓰일 게임 접속기기의 원형까지는 그려냈었지만 그것을 실체화하지 않고 컴퓨터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묻힌 아이디어가 장제천 실장의 실종 뒤 윤석호의 손으로 다시 캐내졌을 때 모두는 그의 의견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윤석호는 완강했다. 게임을 완성해 발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프로젝트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실장님이 없어도, 그분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저 THE MIST 안에 있습니다. 그녀를 이용한다면 그 프로젝트에 이용할 캡슐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장제천이 남긴 슈퍼 AI와의 유일한 접속경로인 노트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던 윤석호의 형형한 눈빛에 얼마나 압도되었었던가.
만약 그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다면 실종된 장제천이 그토록 원하던 게임 오픈도 시킬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데이브가 슈퍼컴퓨터 THE MIST를 켜고 지금껏 장제천만이 쓸 수 있었던 정보들을 뒤져 ReL 프로젝트용 캡슐 설계를 도왔고, 윤석호는 정말로 그 프로젝트를 토대로 게임 오픈을 위한 최종 투자 허가를 받아오는 데 성공했다.
ReL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지금의 더 미스트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의 성공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윤석호는 그렇게까지 말한 적이 없었지만 유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윤석호는 그 프로젝트를 토대로 아마도 무언가 큰 것을 도박에 건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든 큰 문제는 아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어째서일까.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귀신처럼 벨이 울렸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제환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뭐야.”
“케이크.”
……케이크?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당황스러웠지만 진제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 상자를 나에게 내밀었다.
“먹어.”
“…오늘 혹시 무슨 날인가?”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기념일이라도 되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날은 아니었다. 진제환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할머니가 만드신 게 맛있어서 가져왔을 뿐이야.”
“음…….”
할머니라니. 진제환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았던 단어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는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물음표들을 늘어놓은 뒤 그중 가장 궁금한 한 가지를 뽑아 묻기로 했다.
“…같이 살아?”
“외조부님도 함께.”
“그러면 외할머니시구나.”
“응.”
거참. 진제환의 작업실까지 빌려 살고 있으면서 이제야 녀석이 외조부님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될 줄이야……. 조금 낯선 기분과 멋쩍은 기분이 뒤섞였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 먹을게.”
케이크를 받아들며 인사하자 진제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커졌다. 워낙 잘생긴 놈이라서인지 그것만으로도 주변이 전부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아차 싶어 다시 되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제환이 입을 열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방금 웃었군.”
“……아닌데.”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분이 좋을 때 웃는 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거야 그렇겠다만…… 네가 웃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는 건 뭔가 좀 부끄럽지 않겠냐.
“네가 웃으면 빛이 나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진제환은 기어이 그런 폭탄 같은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했다. 빛이라니……. 그건 너 같은 얼굴에 대고 해야 할 말이 아닐까.
나는 상당히 낯 뜨거운 기분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제환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 외투를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
“……음. 뭐.”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한 것이 뭔가 이상했는지 진제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무슨 일이라면 있었지. 그것도 상당히 이것저것.
그리고 그것들은 이제 내가 진제환에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해 주어야 하는 부분들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진제환이 준 케이크 상자를 냉장고 안에 넣으러 갔다.
“거기 앉아 있어. 어제 네가 알려 준 것들에 관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작업실 내에는 딱히 앉을 만한 의자가 없었기 때문에 진제환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케이크를 넣은 뒤 진제환과 조금 떨어진 침대 모서리 쪽에 다가가 몸을 내렸다.
“…….”
“…….”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고 진제환이 민후처럼 밝게 나서서 분위기를 만들어 줄 만한 성격의 위인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작 판을 깔고 나니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음…….”
진제환이 오기 전에 분명 생각을 정리하려고 명상을 몇 시간이나 했는데, 정작 닥치고 나니 참으로 소용이 없었다. 낮게 신음을 흘리며 망설이고 있자 결국 진제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하기 힘들면 나중에 해도 된다.”
배려는 고맙지만, 나중에라는 건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말을 하기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을 미루는 것보다는 어쨌든 지금 해치우는 것이 나았다.
“아니. 지금 말할게.”
그렇게 말한 뒤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조금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캡슐이 내 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궁금해했던 건 실제로 몸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야. 얼마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리 상태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변화가 시작된 시기가 게임을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걸 깨달았거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진제환의 표정은 아직 변화가 없이 침착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덜 긴장하면서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내 접속기기를 조사해 결론을 알려 주길 바랐는데…… 정확히 어떤 영향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영향을 미치는 건 맞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편하게 새턴에 문의할 수 있었어. 그뿐이다.”
이 정도면 너무 내 몸 상태를 미주알고주알 말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 그렇기를 바라며 한숨을 내쉰 순간 진제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새턴에 문의했다고? 오늘?”
“뭐… 그렇지.”
“답은?”
“내가 사용하는 특수 캡슐이나 접속기기가 사용자의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칠 일은 전혀 없다고 확신하던데. 혹시 모르니 다시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그 순간 지금까지의 무표정함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진제환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나쁜 영향을 끼칠 일은 없다…… 그렇게 말했다고.”
“…….”
“무헌. 네가 연락한 건 지부장인가?”
지부장인가가 아니라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새턴 관계자는 애초에 지부장 윤석호밖에 없다. 다른 관계자는 알지도 못하니 연락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뜻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얼음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다음에 연락이 온다면 나에게도 꼭 알려줬으면 한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서는 고마움과 부담감이 반씩 드는 말이었다. 진제환은 지금까지 나를 충분히 걱정해 주었고 캡슐도 조사해 주지 않았었던가. 그런 녀석을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더 귀찮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제환은 나의 돌려 말한 거절에도 완강히 제 뜻을 주장하고 나섰다.
“나는 의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계와 컴퓨터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반드시 알려줘. 그 남자는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될 상대야.”
진제환의 말대로 기계도, 컴퓨터도 잘 모르고 그렇다고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내 입장에서는 조언을 구할 만한 상대가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었다.
윤석호가 만만치 않은 남자이기는 해도 그간 보아온 모습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이런 심각한 사안으로 사람을 속일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굳이 진제환을 더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말은 고맙지만 내 일 때문에 널 너무 귀찮게 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아.”
“그 반대야. 내게 있어서 네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진제환을 향해 묻자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곧은 시선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너를 좋아하니까.”
이건…… 아무래도 내가 지는 질문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저히 그 단호한 대답에 대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끝에 이 싸움 아닌 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나는 한발 물러서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휴우. 알겠어. 윤석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연락을 하면 되는 거지.”
“시간은 언제라도 좋다. 그 남자와 다시 연락한다면 꼭 나에게 전화해 줘.”
진제환은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하여 부탁하고 나서야 겨우 표정을 조금 풀었다. 나는 겨우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기분이 되었다.
[ 두 분, 이야기가 다 끝나셨으면 이제 저녁 드실래요? 시간이 벌써 일곱 시가 넘었어요. 지금 먹어도 늦은 시간이에요! 늦은 저녁은 내장지방의 원인이 된다구요! ]
그때, 이야기가 끝난 것을 캐치한 하우스 컴퓨터가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나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아차리고 조금 놀랐다.
“…배가 고프진 않은데. 너는?”
온종일 돌아다니고 긴장되는 대화만 나눈 것치고는 놀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을 해서 식욕이 달아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다지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진제환에게 물어보았는데, 놈은 마치 내가 엄청나게 안 좋은 말이라도 한 양 또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몸이 좋지 않다면서 밥을 거를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식욕이 없어도 먹어야 해.”
“음. 아니,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원인불명의 변화가 좀 일어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그냥 식욕이 없을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사이 진제환은 이미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해. 2인분으로. 가능한 메뉴 중 가장 영양 밸런스와 칼로리가 높은 것으로.”
[ 그런 거라면 곰탕이 아닐까요? 마침 얼린 레토르트 제품이 있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곧 달그락거리며 하우스 컴퓨터가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진제환은 이제 되었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앉아.”
거참……. 나를 걱정해서 하는 거니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나이가 되어 부모님에게도 당해본 적이 없는 강제로 밥 먹이기를 당하게 될 줄이야.
나는 결국 진제환의 뜨거운 눈빛을 받으며 하우스 컴퓨터가 빠르게 준비한 곰탕을 먹어야만 했다. 식욕은 없었어도 의외로 먹기 시작하니 밥은 잘 들어가서 다행이었다.
“식사는 절대로 거르면 안 된다, 무헌. 특히 내일부터 다시 운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말해도 괜찮아.”
혹시라도 진제환 저 녀석이 사부님과 사모님께 내가 식사를 거르려 했다는 말이라도 했다가는 끝장이라는 묘한 압박감마저 느껴졌던 식사가 겨우 끝이 났다.
진제환은 내가 남김없이 밥을 전부 먹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제가 잘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절하게 분위기를 녹이는 미소였다.
“식사를 했으니 나는 이제 도로 돌아가 봐야 한다. 하지만 후식으로 가져온 케이크도 있으니 꼭 먹도록 해.”
“좀 봐 줘. 그것까지 지금 먹기에는 배가 너무 부르니까.”
작게 투덜거리자 진제환이 피식 웃으며 도로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 벌써 가시는 건가요, 진유완 님? 돌아가시는 길에는 밤부터 수도권 전역에 내리기 시작할 비가 오겠네요. 오늘 자정까지는 시간당 0.2ml 정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일은 종일 시간당 0.7ml가량의 비가 올 예정이니 우산과 우비를 꼭 준비하세요! ]
진제환이 돌아가려 하는 것을 알아차린 하우스 컴퓨터가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밤이라서 창밖이 전부 캄캄한 탓에 비가 오는지 몰랐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니 정말 부슬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도 했다.
“…괜찮겠어?”
비가 오고 있다면 기온도 상당히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춥게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녀석이 비까지 맞으면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무리해서 집으로 돌아가느니 일이 없다면 여기서 자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뜻을 담아 묻자 진제환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비는 아무렇지도 않아. 대비는 전부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현관에 기대어 서서 진제환을 배웅했다. 진제환은 나가기 전 나를 돌아보며 내일의 일정을 확인했다.
“검도장은 한 시까지였었지. 비가 온다고 하니 가능하면 택시를 불러서 타고 오도록 해.”
평소라면 제가 태워다 준다고 했을 텐데 택시를 타고 오라는 것을 보면 진제환도 눈과 비, 추위에 약한 바이크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사모님도 너보다 잔소리를 하진 않을 것 같다.”
민망한 기분을 쳐내려 작게 한마디 하자 진제환은 무엇이 이상하냐는 듯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분명 몸을 생각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 밖에서 버스를 오랫동안 기다릴 테니까 하는 거다.”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지만 원래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
“꼭 택시를 타도록 해, 무헌.”
진제환은 한 번 더 당부한 뒤에야 정말로 집을 떠났다. 나는 드디어 홀로 남겨졌다.
“……후우.”
혼자가 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부는 바람소리나 빗소리가 훨씬 더 잘 들리기 시작했다. 내일도 비가 계속 올 예정이라고 했었던가?
‘평소라면 벌써 무릎이 시큰거렸어야 할 시간인데 아직까지는 소식이 없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과연 내일까지도 다리가 멀쩡할지는 확신이 없었다. 아무튼 내 다리는 여태까지의 경험상 비 오는 날에 가장 약했으니까.
‘그래도 폭우가 쏟아지는 정도도 아니고… 조금 심하다 해도 약을 먹으면 출근은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으려 노력했으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예보보다 갑작스레 기상 상황이 바뀌며 시간당 50ml가 넘는 폭우가 내리기 시작할 것도, 오늘 내내 예민한 문제들에 시달렸던 내 몸이 평소보다 훨씬 정신적 피로에 지쳐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로 인해 잠에서 깨자마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무릎 통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엘프의 숲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언제나 그렇듯 모습을 드러낸 수호하는 화살, 킬 라질은 우리 일행 중 꼬마 유령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검은 밤의 숲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이루미네 님은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시지 않았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손님용 숙소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손님용 숙소라면 예전에도 묵었었던 통나무집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러겠다고 한 뒤 위치 안내는 정중히 사양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저희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옛날 슈페리어를 위해 만들어진 손님용 숙소는 아직도 만들어졌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예전에 슈페리어의 기억을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같이 왔었던 크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야, 몇 달 만인데도 왠지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안쪽도 그대로네.”
우리는 그곳에서 저장을 한 뒤 접속을 종료했다. 평소 계속 이동을 할 때는 다시 접속하는 시간을 맞추는 편이지만 이런 식으로 한곳에서 머물 때는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비교적 재접속 시간을 자유롭게 두는 편이었다.
그리고 밤에 수련이나 할까 싶어 혼자 다시 접속했을 때, 나는 때마침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킬 라질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루미네 님께서 모든 일이 끝나셨으니 당신께서 원할 때에 동굴로 오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뒤 홀로 숙소를 나섰다. 이루미네의 동굴로 가는 길은 어느새 밤이 되어 캄캄했다. 밝은 달빛에 의지해 길을 따라 들어가자 곧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루미네, 저입니다.”
목소리를 내어 내가 도착했음을 밝히며 거대한 동공으로 들어서자 아찔할 만큼 거대한 공간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이루미네가 보였다. 그녀는 앞에 처음 보는 상자를 둔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왔구나. 거기 앉아.”
“그건… 뭡니까.”
아마도 그것이 내가 받아야 했을 퀘스트 보상일 확률이 높겠지만 혹시나 싶어 묻자 이루미네의 흰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네가 예상하는 것이겠지. 열어보련?”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상자를 가져왔다.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묵직한 나무 상자는 생각보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겉에 섬세한 무늬가 음각되어 있는 것을 손끝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곱게 개켜 있는 검은 천… 아니, 옷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천으로 만든 옷이란다. 내가 직접 만들었고, 이제는 네 것이 될 옷이지.”
뭐라고? 나는 당황해 그것을 집어 올렸다. 개켜져 있던 것을 풀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후드 케이프 안쪽 옷과 비슷하게 생긴 상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을 감싸는 차이나 칼라와 검은 색상, 움직이기 편하도록 생긴 디자인 부분은 똑같았으나 옷의 촉감이나 세세한 디테일, 그리고 소매나 어깨, 가슴 부분에 새겨져 있는 무늬 등은 전혀 달랐다. 디자인은 비슷해도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촉감이 뭔가… 특이한데.’
부드러운 날개를 만지는 것처럼 하늘하늘한 천인데도 두께감이 있었고 손에 쥐고 있으려니 포근하고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구김이 전혀 가지 않을 것 같은 신비한 촉감이었다.
- 띠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