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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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잡았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에서 사모님의 놀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어머나. 무헌아? 무슨 일로 아침부터 전화를 다 했니? ]

“아침부터 죄송해요. 사부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 그이는 아직 아침 명상이 안 끝났는데, 어쩌지?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구나. ]

사모님이 미안한 표정으로 건너편 쪽을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새벽마다 명상을 하는 사부님의 일과는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끝나실 시간을 가늠해서 건 것인데, 아무래도 내가 조금 일렀던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조금 이따가 다시 걸겠습니다.”

[ 아니, 그러면 네가 귀찮아지잖니. 그이는 곧 나올 테니까 꼭 그이한테만 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면 나하고 먼저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

사모님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두 분 모두에게 여쭈어 보려고 했었으니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사실은…… 저번에 승조와 만났다고 말씀드렸을 때 미처 여쭤보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어서요.”

[ 물어보지 못한 것? 혹시 안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

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으로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아니에요. 음… 저는 이제 그 녀석을 원망하는 마음도 다 사라졌고, 가능하다면 과거의 은원을 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승조는 뭔가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아직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예전에 있었던 일? ]

이것을 정확히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나는 이전에 만났을 때 승조가 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너야말로 모든 걸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관둬. 늘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 갑자기 성자처럼 굴겠다고? 내가 왜 고2 때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는지 알고 있어? 대회 때마다 너에게 지면서 들었던 비웃음들은? 나에게는 일상이었지만 너는 기억에 없겠지. 그런 건 네가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나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들 때문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조가 고2 때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우리 사이에 어떤 문제를 만들 만한 사항이었다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때 대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 승조가 왜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었는지조차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승조와 이전에 만나서 그 말을 들은 뒤 틈이 날 때마다 계속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것이 딱히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오늘 사부님과 사모님께 연락을 드린 이유였다.

“…혹시 승조가…… 예전에, 그러니까 전국대회 전 여름에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던 걸 기억하고 계세요?”

[ 전국대회 전 여름……? 아. 그랬었지. ]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모님이 무언가 떠오르셨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대회 출전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그 아이 부모와 친척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던 시기였어. 그 애도 부모와 많이 싸웠다고 들었고……. 그런데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을 정도였었니? 그것까지는 몰랐구나. ]

“네?”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대회 출전을 하느냐 마느냐라니… 승조는 대회에 당연히 참가하는 위치였잖아요. 실제로 그때 나왔었고…….”

[ 응. 그랬었지. 그런데 그게……. ]

[ 그 녀석 부모가 대회 때까지 한국에 있게 두고 싶어 하지 않았어. ]

사모님이 무어라 말씀을 하시려던 순간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땀에 젖은 사부님의 얼굴이 화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부님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 그때 그 녀석 부모가 완전히 한국을 떠나는 쪽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들었거든. 아마 그래서 승조를 빨리 그쪽으로 부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게 연락해서 어떻게든 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으니까. ]

완전히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고? 그래서 승조를 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 했었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명실상부하게 그 녀석과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생각해 왔던 내 기억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생각을 거듭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일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없습니다. 승조도 제게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승조의 부모님은 고1 때 미국으로 갑작스레 떠나셨다. 당시 나는 그것이 사업과 관련된 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무역과 관련된 사업을 크게 하셨던 분들이시니 미국에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시지 않았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딱히 그것에 대해서 승조에게 더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승조는 부모님과 살던 집에서 혼자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밥을 먹고, 학교를 갔고, 나와 함께 놀고 검도를 했다. 집에 와서 같이 놀다가 자지 않겠느냐고 묻는 날들이 늘어났던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부모님이 없다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전국검도대회 직후 사고가 났던 그 순간까지도 언제나 태연했기에 설마 녀석의 부모님이 대회 출전을 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거기에 더해 아예 미국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승조가 당연히 나에게 한마디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우린 거의 형제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언제나 함께였는데…….

“전 정말 한마디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 …그때 넌 전국대회를 앞두고 하루 종일 수련에만 매달려 있었으니까, 괜한 말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

사모님이 조심스럽게 대답해 주셨다.

[ 네가 승조에게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전국대회가 끝난 다음 알려주어도 괜찮을 거라 여겼었어. 그런데 그 아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

[ …정말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거냐? ]

사모님의 말에 이어 사부님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나는 아마도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표정을 관리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모님이 입을 살짝 막았다.

[ 무헌아, 혹시 승조가 예전 일에 집착한다는 게 그것 때문이니? ]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승조는 나를 이기는 것이 꿈이었지만 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분했다고 말했다. 사고가 났던 날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 보아도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당시 승조에게 있었던 일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게 없는 일이 되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문득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전국대회 몇 달 전부터는 집에 놀러 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없었어. 훈련에 참가를 잘 하지 않는 건 그냥 원래 좀 예민한 녀석이니 다른 곳에서 따로 훈련하느라 그런 줄 알았고……. 연락이 뜸해진 것도 그래서인 줄 알았는데…….’

그때의 나는 전국대회 우승을 목표로 모든 신경을 그곳에 쏟고 있었다. 온종일 사부님과 검도 연습을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학교에도 굉장히 많이 빠졌지만 다행히 내가 다녔던 학교는 무예 특기생에게 많은 특례를 주었으므로 수업이나 출석을 잘 하지 않아도 그리 어려움 없이 출석 인정이 되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승조도 아마 그렇게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가정형을 쓰는 이유는 당시 승조가 사부님의 검도장에 다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와 처음 만난 이후 다니던 검도장을 때려치우고 사부님의 검도장으로 와 몇 년간 함께 배웠던 승조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또다시 검도장을 다른 곳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승조가 나와 함께 훈련하지 않아도 으레 그 녀석이 다니는 검도장에 있겠거니 하고 넘기고는 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였으나 그와 동시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승조는 내가 그 녀석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당연히 전국대회 결승에서 승조와 붙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오히려 그 녀석에게 향하는 신경을 끊으려 노력했다. 라이벌이 개인 연습을 하는 모습 같은 것을 봐 보았자 신경 쓰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승조는 내게 제가 받았던 비웃음들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그 녀석이 신경 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오히려 놀랐다. 우리 둘이 대련했을 때 승자는 늘 나였지만, 나는 한 번도 승조를 쉽게 이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를 이기고 싶다며 도전했던 수많은 사람 중에 그 녀석만이 내가 진심으로 상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간발의 차로 만년 2등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에서 무어라 한마디씩 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제나 제 실력에 당당했고 나를 상대할 때도 진심을 다했던 정승조가 제 실력과 노력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리라고 대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는 정승조는 누군가 자신을 비웃으면 그 비웃음을 두 배로 돌려주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더더욱 최선을 다해 그 녀석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언제나 진심으로 그 녀석을 이기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이 오히려 승조가 가장 예민했을 순간에 상처를 더해준 꼴이 되었던 것일까?

승조는 내게 제 부모님이 이민을 생각하고 있고, 저를 부르려 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부님과 사모님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알아내려고만 했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도 있었다.

내가 훈련 때문에 일부러 상대방에게 관심을 끊지 않았다면.

승조가 뭔가 이상하게 구는 모습을 눈치채고 물어보았더라면.

하다못해 사부님과 사모님께 승조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했었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가정엔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왠지 내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하다못해 나는 사고가 난 이후 승조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 녀석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다. 만약 그때 사부님과 사모님께 정승조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나는 어쩌면 조금 더 빨리 그 녀석에 대한 모든 의문과 미움을 해결하고 다시 마주할 생각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빈 퍼즐 조각처럼 남아 있었던 자리가 드디어 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빨리 두 분께 그 녀석에 대해 여쭤보았어야 했어요.”

[ 무헌아. 괜한 자책은 하지 마라. 혹시 승조가 그때의 일로 네게 원망을 갖고 있다면 거기엔 곧바로 말해 주지 않은 우리 탓도 있고, 무엇보다도 결국 그 사고가 났을 때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친 데다 돌아와서도 너와 제대로 이야기 한번 하려 하지 않고 있는 건 그 녀석이야. 도망만 치면서 누구를 원망할 수 있단 말이냐. ]

나를 위로해 주시려 하는 마음이 너무나 잘 느껴졌으나 도망치고 외면만 한 주제에 원망까지 했던 것은 과거의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전에 벤을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나였다면 어쩌면 사부님과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들어버린 이상 나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3년간의 정승조. 내가 죽었다고 짐작해 미국에서 줄곧 괴로워했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그 녀석.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승조가 정말로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만 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사고 자체는 그 녀석 탓이 아니다. 그때 차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고 길 한복판에서 싸움을 한 것은 우리 둘 모두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을 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고,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그러니 이제 그만 과거를 과거로 놓아주고 우리 둘 다 지금의 자리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 된다고.

단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을 뿐인데…….

“사부님. 저는 괜찮습니다. 자세히 말씀은 아직 다 못 드리겠지만, 저희 둘 사이에 여기저기 좀 오해가 많았던 것 같아요. 이제 다 알았으니 승조와 다시 한번 잘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 …그래. 그 녀석이 혹시 또 도망치려고 하거나 시비를 걸면 그땐 그냥 주저 없이 때려눕혀라. ]

사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 네가 갖고 다니는 지팡이, 단순히 땅 짚는 용도만은 아니지 않느냐? ]

“……하하. 네. 그렇죠.”

과거에 그 지팡이로 내게 접근했던 수상한 놈들을 두들겨 팼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 친구라고 봐주지 마라. 아무리 힘들어도 할 말은 해야 해. 난 널 그렇게 가르쳤다. ]

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래. 사부님은 어릴 때 잠시 승조와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 번쯤은 져 주어야 하나 고민했던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친구가 소중하다면 봐주지 말고 오히려 더욱 최선을 다해서 지지 말라고.

나는 지금도 사부님의 가르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승조와 재회한 뒤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힘들고 두려워 물러설 때마다 그 녀석은 그것을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내게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내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무조건 쓰러트리려 들었다. 그 녀석에게도 물론 저만의 이유와 생각이 있겠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제 나는 승조에게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오로지 진심을 다해 상대할 생각이었다.

사부님과 사모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나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밖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집 밖을 나서기 전 혹시 몰라 벤에게 정승조가 집에 있느냐는 메시지를 보내 보자 몇 분 지나지 않아 곧 답이 도착했다.

[ 승은 오늘도 집에 있어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무헌! 오늘 올 생각이에요? 엔젤 보이가 온다는 건 비밀로 해 둘까요? ]

“…으음.”

승조가 집에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마지막에 붙은 엔젤 보이라는 말은 참 적응이 되지 않는다.

[ 네. 곧 출발할 생각입니다. 제가 간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

[ OK, GOOD. 기다릴게요. ]

엄지를 내민 발랄한 이모티콘이 잔뜩 붙은 메시지를 끈 뒤 나는 다리를 절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세심하게 노력하면서 현관을 나섰다.

[ 다녀오세요, 강무헌 님! ]

진제환의 하우스 컴퓨터가 날리는 발랄한 인사를 흘려들으며 나선 바깥은 어제 보았던 예보대로 날씨가 모처럼 무척 좋았다.

타고 있는 택시 차창 밖을 빠르게 스치는 길을 보면서 작게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은, 승조의 집이 보일 즈음이 되자 더욱 크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 그사이 승조가 갑자기 밖에 나가려고 하진 않겠지. 벤이 잘 붙잡아 주고 있어야 할 텐데.’

기다리겠다고 했던 걸 보면 알아서 잘 잡아 주겠거니 싶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승조가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현관에 서서 호수를 누르고 올라가고 싶다는 뜻을 알리는 버튼을 누르자, 거의 1초 만에 확인했다는 벨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잘 말할 수 있어.’

“후우. 하.”

마지막으로 세 번 심호흡을 끝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차가운 철제 현관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문을 살짝 두드렸다.

“와우, 일찍 왔네요! 반가워요!”

그러자마자 곧바로 문이 벌컥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벤이 함박미소와 함께 나를 꽉 끌어안았다. 힘이 너무 세서 곰에게 끌어안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기에 나는 그의 등을 살짝 마주 두드려 주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자 그동안 벤이 승조를 열심히 돌봐 주었는지 깨끗한 집 안 풍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에는 빛이 잘 들어오도록 열려 있는 커튼이 달려 있었고 바닥에도 굴러다니는 술병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왜 이렇게 안 왔어요? 승이 은근히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정말입니까?”

벤의 말을 듣고 놀라서 묻자 벤이 씩 웃었다.

“말은 안 했지만 뭐… 내 생각은 그래요. 무헌과 만난 뒤로는 날 때리지도 않고, 욕도 좀 덜 했고, 게다가 요즘은 그 엿 같은 게임도 거의 안 하고 방 안에서 뭔가 열심히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면 지금도……?”

“네. 저 방 안에 있어요.”

벤이 굳게 닫혀 있는 방문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내가 들어가려고 하면 엄청나게 화를 내지만 당신이라면 승도 받아들이겠죠. 나는 내 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요.”

나는 그동안 한국어 실력이 좀 더 늘어난 티가 나는 벤에게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인 뒤 깊이 심호흡을 하고 승조가 있다는 방문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방 같았다.

승조를 부르는 게 나을까, 아니면 내가 들어가야 할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려 보자 뜻밖에도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열린 틈새 사이로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벤. 들어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빛이 들어올 유일한 창문을 짙은 커튼으로 가린 채 침대 위에 느슨하게 누워 있는 한 남자. 나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큰 기계가 미스트 접속 캡슐임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방 안에는 침대와 미스트 캡슐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어 휑해 보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사람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인지 방 주인을 닮은 서늘한 향이 곳곳에서 풍겼다.

한때는 나에게 무척이나 익숙했던 체향.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놀러 갔었던 승조의 방에서 이런 냄새가 났다는 것이 그 순간 기억나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벤?”

누워 있던 승조가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못 볼 것을 본 듯 그대로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벤은 다른 방으로 갔어.”

조용히 설명해 주었으나 승조는 여전히 나를 크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거나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부디 긍정적인 신호이기를 바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승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을 떼어 승조와 거의 가까이 마주한 위치까지 다가가자 승조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보았다.

“여긴 왜 온 거야.”

“저번에 말했잖아. 다시 올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은 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너, 아직도 벤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거냐? 널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에게 그딴 식으로 대하지 말라고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벤은 정승조가 저를 안 때리고 욕도 덜 한다고 말했었지만 방금 전 들은 말을 생각해 봐서는 아무래도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있을 때 잘해. 그런 친구가 있는 건 인복이니까.”

벤에 대한 미안함과 정승조의 미래 걱정이 합쳐져 한마디를 더 덧붙이자 정승조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선생질이나 하려고 여기 온 거면 꺼져.”

“싫은데.”

약간 유치한 대꾸를 하자 정승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 알아내서 왔거든. 저번에 네가 말했던 것.”

승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메마르고 초췌한 인상이 더 커서 좀 덜하긴 하지만 확실히 입을 다물고 있을 때의 녀석은 참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모 덕에 어릴 때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곧바로 호감을 사고 공부도 곧잘 했던 승조를 나는 약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정작 정승조는 나를 한 번이라도 이기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2 때 네가 왜 학교에 잘 안 왔었는지, 알아냈다고.”

“…….”

승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일단 확인차 먼저 질문을 하나 하기로 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부모님에 대한 것. 검도에 대한 것. 그리고 내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를 너 자신에 대한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을 함축하여 물은 질문에 승조가 작게 피식 웃었다.

“너라면 말하고 싶었을까?”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

설령 기대했던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따라 이 나라를 떠나게 된다 해도 그것이 정승조와 내가 친구가 아니게 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라면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하자 정승조가 문득 약간 그리운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네게 말하지 않은 거야.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목소리만은 방금보다 확연히 낮고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뭐가 이상해?”

“나는 싫었어.”

짤막하게 말을 토해낸 승조가 잠시 후 낮게 웃으면서 어깨를 떨었다.

“그 대회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싫었고, 그 대회마저 네게 진 채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건 더 싫었어. 차라리 이곳에 혼자서라도 남아 있게 되길 바랐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거 알아? 그날 나는 처음부터 시합이 끝나는 대로 미국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어. 그게 겨우 내가 타협해서 얻어낸 결과였다고. 그런데 그걸 말하라고? 말하면 뭐가 바뀌었을까. 질질 짜며 아름다운 마지막 시합이나 한 뒤에 손 흔들면서 퇴장하는 것? 그 다음에는 과거의 패배자로 남아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끝이 났겠지. 그런 구역질 나는 엔딩이 될 걸 알았기 때문에 난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나도, 승조도 스무 살이 넘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눈앞의 승조는 아직 고등학생 때의 그날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충격의 더 컸던 건 어쩌면 나보다 저 녀석이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전이라면 저 가시 박힌 말투에 상처를 입고 물러났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3년 전 그날부터 줄곧 이해할 수 없는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었던 승조가 지금의 내 눈에는 다 큰 것처럼 굴어도 사실은 무력하고, 그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해 주변의 모든 것을 마구 밀어내고 마는 10대 소년 그 자체로 보였다.

예전엔 승조가 나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또래 녀석들과 곧잘 어울리는 나와 달리 승조는 말수가 적고 감정 변화가 크지 않았으며 늘 담담하게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사고가 일어났던 날 녀석이 보인 변화에 충격을 받았었지만, 눈앞에 씌워져 있던 막을 한 겹 벗어내고 나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우린 서로에 대해 잘 몰랐나 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때 사고가 나지 않아서 네가 그대로 떠났다면 내가 널 곧바로 잊고 잘 지냈을 거라고?”

담담하게 대답하자 승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올려 나를 보았다.

“날 그런 자식이라 생각했다면 여기서 널 반드시 한 대 패고 갈 거다.”

나는 승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사실 다리가 안 좋은 상태에서 이렇게 한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 중 하나였기에 무릎이 조금 시큰거렸다.

“정승조.”

“…….”

승조가 가까워지는 나를 두려운 것처럼 쳐다보았다. 떨리는 눈동자를 보자 과거의 친구를 향한 해묵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결국 우리 둘 다 서로를 완전히 원망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었던 게 사실이야. 난 내가 살아 있고, 네가 살아 있으니 그걸로 되었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 과거에 집착하는 걸 포기해. 지금의 나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제 그만하고 정신을 차려.”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마음?”

정승조가 느릿하게 반문했다.

“넌 이제 와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강무헌?”

“가능하지 못할 건 또 뭔데.”

승조는 모르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다시 만난 이후로도 생각보다 잘 지낸 전적이 있었다. 나는 구석에 놓여 있는 미스트 캡슐을 향해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도로 승조를 보았다.

승조는 미스트에서 만난 슈페리어 퀘스트 유저 마법사가 나인 줄 몰랐지만 나를 죽이지 않고 그런대로 잘 지내 주었다. 내가 그때 시저와 함께 도시를 걷고, 아무렇지 않게 닭꼬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했던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아마 이런 말을 그리 쉽게 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다시 제일 친한 친구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그 정도로만이라도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다면 나나 승조에게나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지 않을까.

“……넌 아무것도 몰라.”

정승조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둠이 그 위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저번부터 자꾸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말하는 정승조는 대체 내가 뭘 더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기가 상당히 꺾인 것은 분명한데도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를 밀어내는 모습을 보니 울컥한 마음이 샘솟았다.

“그래? 내가 뭘 그렇게 모르는데? 어디 알아나 보자. 말해 봐.”

“…….”

정승조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힘을 주어 말을 이어 나갔다.

“대회 때문에 정신이 없어 친구를 신경 써주지 못한 것? 그거라면 정말 미안했고, 네가 한 번도 날 이기지 못했다고 주변에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널 쉽게 이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말에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너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또, 승자는 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었나?”

나는 정승조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나를 보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 네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대회 준비를 그렇게 미친 듯이 할 일도 없었겠지. 난 언제나 널 상대로 상상하면서 수련했어. 결승전에 올라올 게 당연히 너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에서 벗어났던 것은 단 한 번. 결승전 때에 극도로 집중하다 보니 무아의 경지에 접어들어 눈앞의 상대를 망각하고 내 검만 보았던 때뿐이었다. 힘을 주어 노려보자 정승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나는 처음으로 보는 승조의 멍한 표정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래. 사고가 나던 날 정승조는 내가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라서 자신이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 검에 재능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재능만 가지고는 어느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언제나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건…….

“항상 이기기만 하는 게 정말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정승조 네가 있었으니까 나는 검도를 계속 좋아할 수 있었던 거야. 결승전 때 무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네가 상대가 아니었다면 어려웠겠지. 너는 내가 억지로 져 주어서 이겼다면 과연 진짜 만족했을 거냐? 네 자존심에 그걸 용납할 수 있었을까?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 이겨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

“라이벌을 이기고 싶어서 질투하는 건 당연한 감정이야. 네가 날 줄곧 이기고 싶어 했다는 말이 나는 오히려 기뻤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니까.”

정승조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말을 하나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런 선택의 기회도 없이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미 검도를 하고 있었어. 훈련은 힘들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금세 이겨 버리는데 무슨 재미가 있었을 것 같아? 그래서 가끔은 사부님께 더 이상은 하기 싫다고 떼를 쓰기도 했었어. 그때 널 만난 거야.”

그래. 만나자마자 내게 졌는데도 그렇게 도전적으로 따라오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승조는 빠르게 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보다 좋은 피지컬과 더 큰 키를 이용해 위협적인 라이벌이 되어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거의 사부님께 1대1로 배우거나 나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들과만 대련을 했기에 또래와 함께 검도를 하는 재미를 잘 몰랐다. 지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이기고,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을 잊을 만큼 노력하는 즐거움. 승조는 내게 그 재미를 알려 준 첫 번째 상대였다.

“널 만난 이후 한 번도 검도가 하기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그게 네가 내게 가진 의미야. 그걸 위선적이고 비웃는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나는 정승조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승조는 여전히 나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얼굴이 뚫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뭘 모르는데?”

뭐든지 들어볼 테니까 말하라는 기색을 강하게 담아 내뱉자 정승조가 침묵을 지키던 입술을 드디어 천천히 열었다.

“……억지로 이겨 봤자 의미가 없다는 말은, 내겐 상관이 없어. 왜냐하면 나는…….”

잠시 입을 다문 승조의 눈 속에 내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가질 수 없다면, 이기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 무렵에는 그 생각만으로 꽉 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매일 너에게 이겨서 내 발밑에 꿇리는 꿈만 꿨으니까. 네가 내 옆에서 자고 있을 때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이 내 머릿속에는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말이 잠시 후 이해가 되었을 때,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오싹함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뭘 가질 수 없다는… 건데.”

겨우 목에 힘을 주어 반문하자 승조가 소리 없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나는 승조가 손을 내밀어 천천히 내 뺨에 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차가운 손가락이 눈 아래쪽과 뺨, 입술을 천천히 더듬듯이 내려가 목젖 쪽을 움켜쥐듯이 그 위에서 멈추었다.

쿵. 쿵. 쿵. 긴장감을 느낀 목 안에서 맥이 마구 뛰어댔다.

“네 빛을.”

승조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를.”

“…….”

목을 조르고 싶은 것을 참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이 잠시 후 아쉬운 기색으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 중인 몸과는 별개로 방금 들은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두 마디를 합치면 결국 승조가 하려던 말은.’

내 빛을, 나를 가지지 못할 바에야 이기고 싶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완성된 순간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싶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승조의 말을 들을 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은 예전에 진제환과 마주하고 있을 때 종종 느꼈던 기분과 상당히 닮아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고백인지조차 몰랐던 고백을 받았던 때의 기분과.

설마… 정말 설마의 가정일 뿐이다. 내가 얼마 전에 민후에게도 고백을 받았던 적이 있어 약간 모든 상황을 그런 쪽으로 해석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승조는 어릴 때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아 왔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그런 녀석이 설마.

“…너, 설마…… 아니다.”

아무리 나라도 옛 친구에게 다짜고짜 나를 그런 의미로 보고 있느냐고 말할 만큼 철판이 두껍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 추측이 맞으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내가 승조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마지막 한 조각이 그러한 감정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걸 받아줄 수 없을 테니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승조가 그것을 시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녀석은 실로 상태가 좋지 않다. 감정이 격해졌다고 사람 목을 물어뜯고 병으로 때리며 싸웠던 기억을 떠올린 뒤 나는 곧바로 발언의 진의를 확인하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내 친구지만 정승조 저 자식도 눈이 돌아 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뵈는 게 없는 놈이니 혹시라도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멍하니 보고만 있는 승조를 향해 한숨을 한 번 쉰 뒤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마를 문질렀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도 한 번 쳐다보았었던 승조의 미스트 캡슐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음. 그거라면.’

어쩌면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미스트 속의 마법사라는 것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생각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정승조. 만약에… 나와 다시 한번 싸울 수 있다면 할 거냐?”

승조는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야. 너는 이미…….”

“내 몸은 그렇다 치고, 할 수 있다면 할 거냐고.”

승조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 생각이 있다는 뜻이리라.

“…….”

“좋아. 그러면 하자. 그 승부에서 내가 이기면 넌 그동안 가졌던 나에 대한 감정을 잘 정리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걸로. 어떠냐.”

“내가 왜 그런 조건을 들어야 하는데.”

“날 이기고 싶다며?”

자신만만하게 반문하자 승조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걸.”

“…뭘로 승부하자는 거야. 검, 못 쓰잖아.”

승조가 낮게 물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승조의 미스트 캡슐 쪽으로 다가가 그곳에 손을 대었다. 승조가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로.”

그 말을 들은 순간의 승조의 얼굴을 대체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어안이 벙벙해진 승조를 보자 오늘 처음으로 큰 웃음이 터졌다.

“너, 요즘 게임 안 한다며. 벤에게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니거든.”

“강무헌 네가… 미스트에 있다고?”

승조가 멍하니 반문했다.

“언제부터. 아니, 무슨 이름으로…….”

“그건 비밀. 넌 모르겠지만 난 거기서 널 본 적이 있으니까 승부하고 싶으면 여기로 찾아와.”

굳이 승부하려 하지 않아도 승조가 시저로서 미스트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내가 슈페리어의 후인인 카프로스로서 플레이하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시저에게 1:1로 이길 수 있을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제안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하.”

승조의 꺼져가는 불씨 같던 눈 속에서 처음으로 불꽃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오늘 온 목표는 모두 달성한 듯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저기에서 승부를 하자고. 배짱인 거냐, 아니면 질 생각인 거냐, 강무헌.”

“자신감이지. 질 생각 따윈 없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난 이제 간다. 다음에 볼 때는 이런 음침한 방 말고 좀 밖에서 보자. 그리고 하는 김에 얼굴도 좀 관리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 초췌해 보이잖냐.”

기껏 잘생긴 얼굴로 태어났는데 막 쓰이고 있는 것이 아까워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승조의 표정이 아주 묘해졌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나갔다. 정승조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내게는 벤의 번호가 있으니 언제든 마음대로 정승조의 동향을 알 수 있고 불러내기도 수월하다. 나는 그 장점을 아주 잘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내 다리가 조금이라도 더 멀쩡할 때 말이지…….’

“…이걸로 끝이다…….”

유프 카윗은 마지막 자료를 내려놓으며 책상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너무나 피곤해서 이대로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가 찾아낸 수십만 개의 자료 사이에서 자료의 일치도와 정확성을 가려내고, 그것을 다시 분류해 직접 전부 읽는 작업은 보통 집중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3일 내내 한 시간씩 자면서 철야한 경험은 이전에 THE MIST의 오픈을 앞두고 미친 듯이 일했던 때 이후 처음이었다.

유프 카윗의 옆에 있는 데이브 A. 리도 다른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 거의 죽은 것처럼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의 눈빛이 아직 형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거의 6일을 철야했는데 오히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눈빛이 살아나다니. 과연 데이브답다고 해야 할지…….’

이런 데이브를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히려 피곤을 잊고 집중력이 깊어지는 전형적인 천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 일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즉…….

‘그만한 뭔가를 깨달았단 건가…….’

3일간 이 연구실에 처박혀 데이브를 돕기는 했지만 유프는 아직도 정확히 그가 어떤 것들을 찾아냈고, 어떤 결론을 냈는지 알지 못했다.

유프가 건넨 마지막 문서를 훑어본 데이브가 그것을 놓고 엉망이 된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그 때문에 유프는 몹시 놀랐으나, 다행히 데이브는 넘어지지 않고 책상 모서리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 섰다.

“…가야겠어.”

“……응? 집에?”

“무슨 멍청한 소릴 하는 거야.”

데이브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로 유프를 노려보았다.

“서울에 갈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아버지를 만나야겠어.”

“어… 설마 지금?”

“지금 당장.”

데이브가 짧게 말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외투 하나를 걸쳐 입었다. 내버려 두었다간 정말로 이대로 회사를 나갈 기세라 유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아 저도 모르게 끔찍한 신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데이브를 막는 것이 더 급했다.

“잠깐, 잠깐 데이브. 서울이라니. 넌 지금 6일간 밤을 샜고, 우리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상부에서 반드시 의심할 거야! 윤에게 할 말이 있다면 간접적으로 전달해도 되잖아. 아니, 그리고 회장님은 갑자기 또 왜?”

한 박자 늦게 서울에 간다는 말만큼이나 심각한 다른 쪽 말을 떠올린 유프가 황급히 질문하자 데이브가 피로한 얼굴로 눈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보안도가 가장 높은 수준의 비밀 포트는 같은 지역에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어. 여기서는 안 돼. 그리고 할아버지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확인하고 싶은 거라니…….”

유프는 잠시 아연해졌다.

“꼭 그걸 지금 해야 해?”

“이 사실을 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더 일찍 확인했을 수도 있었겠지.”

“확인하려는 게 대체 뭔데? 불안하니까 일단 나한테 먼저 알려줘! 안 그러면 절대 못 가게 할 거야!”

힘겹게 양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는 유프를 보며 데이브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프 카윗의 성격상 본인이 납득하기 전까지는 결코 자리를 피하지 않을 위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버릴 여유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유프. 내가 처음에 보여 주었던 D파 제어의 실체화와 관련된 논문. 기억나? <전신을 제어하는 특수 뇌신경계 물질 생성에 기여하는 파동의 발견>.”

“응.”

“그것과 미스트 캡슐의 프로토 타입 관련 자료 사이에서 겹치는 이름을 발견했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너무 신경 쓰여.”

“겹치는 이름?”

그런 게 있었던가? 유프는 재빨리 기억을 되돌려 보았으나 너무나 많은 텍스트를 한꺼번에 본 탓인지 오히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뭔데?”

“D. S. 장. 한국 이름은 장대성.”

데이브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전신을 제어하는 특수 뇌신경계 물질 생성에 기여하는 파동의 발견>을 쓴 제1저자야.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을 프로토 타입 설계도 아래에서도 발견했지. 혹시나 싶어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더니 같은 이름을 가진 학자가 오래전 새턴 메디컬센터에서 연구소장으로 일했다는 기사가 나오더군.”

“새턴 메디컬……? 그건……!”

유프가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지 읽은 것처럼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최초로 세웠던 회사야. 지금 새턴의 전신이기도 하지.”

유프는 어째서 데이브가 지금 당장 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말한 것인지를 그 순간 이해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장대성이라는 이름의 성씨가 그리 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데이브.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혹시, 그 장대성이란 사람은 그러면…….”

“그 이름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체란 하나뿐이지. 너도 알고 있잖아.”

데이브는 딱히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프는 그것이 단순히 설명이 귀찮거나, 아니면 불필요하다 여겨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걸고 만들어 낸 게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서 있던 두 사촌 형제의 이름도.

「우리 아버지가 그쪽 일을 하셨어.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유품 중에 만들다 만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혹시나 싶어서 속을 한 번 들여다봤더니 이게 아주 물건이더란 말이지. 원래는 다른 용도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셨던 것 같지만 난 게임이 만들고 싶으니까 게임으로 고쳐 만들기로 했어. 언제가 되었든 완성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분명 최고의 게임이 될 거야. 그렇지 않아?…….」

아주 오래전, 씁쓸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장제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본래 다른 용도로 개발된 프로그램. 그 다른 용도란 것이 무엇인지 그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때는 그 말에서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못했었다. 아. 어째서 그때 더 물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THE MIST 접속 캡슐 구동의 근간이 되는 최초의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쓴 30년 전의 논문. 그가 일했던 새턴 연구소. 그리고 장제천의 아버지.

전혀 연관 없는 것들이라 생각했던 요소들 사이에 갑작스레 그어진 연결선들을 보며 유프는 전율했다. 그 모든 연결선들이 정말 동일한 결과를 가리키는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불길하고도 놀라운 예감이 심장을 두드리며 유프 카윗을 기묘한 기분 속에 밀어넣고 있었다. 유프는 데이브 또한 저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이걸 확인하는 게 윤에게 가는 것보다 먼저라고 한 이유를 알겠군.’

“…데이브, 너 혼자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같이 가자.”

“집 안까지는 못 들어올 거야.”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집에 오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의 얼굴은 유프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했다. 유프는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연구실 옆에 딸려 있는 자동식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좋아. 일단 그 전에 좀 씻고 가자고. 지금 그 모습으로 가면 너희 할아버지가 널 만나 주기는커녕 곧바로 축객령을 내릴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럴 시간 없어…….”

“머리는 떡지고 몸에선 냄새까지 풍기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대단하다. 빨리 옷이나 벗어. 에잇.”

“싫다니까……!”

유프는 강제로 데이브의 안경과 겉옷을 벗기고 샤워 부스 안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씻지도, 먹지도 않고 일만 하다 쓰러지기 십상인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그 최첨단 샤워 부스는 안에 들어간 주인을 붙잡아 자동으로 옷을 벗기고 씻기는 편리하고도 값비싼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곧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이브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으나 유프는 그것을 못 들은 척하며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씻겨주는 이 좋은 걸 사용하기가 싫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목욕을 마친 뒤 유프는 한층 기운을 차렸다. 그는 축 늘어진 데이브를 데리고 무인 운전 택시에 실어 새턴 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임스 리 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데이브는 놀랍게도 거대한 성문을 연상케 하는 집 앞에 도착하자 깨우지 않았는데도 바로 눈을 떴다. 그가 제 할아버지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알고 있던 유프는 비척거리며 집 안으로 사라지는 이를 택시 안에서 배웅하며 부디 용건이 끝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럼 나는 데이브가 돌아올 때까지 눈을 조금만 붙여 볼까…….’

극도의 피로가 유프를 꿈의 나라로 손짓했다. 뒷좌석에 누워 잠이 든 유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데이브?”

“…….”

데이브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이상하게도 한기를 느꼈다. 뻐근한 몸을 일으킨 유프는 무인 택시 안에 떠 있는 홀로그램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그보다, 회장님과 이야기는 했어? 뭐라고 하셔?”

유프의 앞자리에 탄 데이브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끈질기게 그의 대답을 기다린 끝에 유프는 겨우 작고 가느다란 한마디를 들었다.

“한 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을 네가 되찾아왔을 때, 내가 느낀 희열을 너는 알지 못할 거다.”

“…….”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웃으셨어.”

유프 카윗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잠시 후 두 사람이 탄 무인 택시가 소리 없이 방향을 돌려 공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하루 뒤 새턴 본사는 그들의 핵심 개발자 두 사람이 나란히 전자 서류로 제출한 휴가계를 받아들어야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영상은 갑자기 게시되었다.

여태까지도 그러했었지만 그 영상이 THE MIST의 유저들에게 던진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한 명의 유저가 자유자재로 땅을 뒤집고 하늘을 누비며 제 몸보다 몇십 배는 더 큰 드래곤을 죽였다. 그 광경을 어떻게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미스트의 유저들 중에는 지금까지 대륙 내에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태 전 세계의 모든 서버를 통틀어도 그런 실력을 가진 마법사 유저가 있다는 사실은 드러난 적이 없었기에 그 영상이 던진 파문은 더욱 컸다.

마법은 일반적으로 미스트의 유저들에게 있어 배우기가 제일 어려운 직업 중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검이나 다른 무기, 혹은 주먹을 사용하는 유저들의 경우 심심치 않게 대단한 실력자들이 등장해 유명세를 떨치고는 했으나 마법사 유저들 중에는 그러한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1서클의 가장 기본 마법인 파이어 볼조차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그것을 전투 상황에서 원활하게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마법을 쓰기만 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어려웠다.

그런 것을 영상 속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리며 감히 몇 서클인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엄청난 대범위 마법을 펑펑 사용했으니 그것이 미스트 내의 마법사 유저들에게 준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유저라고? 아니. 그는 분명 NPC일 거야. 새턴에서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서 만든 특별한 NPC인 거지! 북미 서버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유저가 그런 글을 게시했다.

그가 진짜 우리들과 같이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장 그를 신으로 모실 거예요. 중국 서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마법사 길드의 길드마스터는 그렇게 천명했다.

그런 실력을 가진 자가 어째서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거기엔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유명한 게임 칼럼니스트는 영상이 공개된 당일 기고한 칼럼에서 그런 의문을 제시했다.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그 악명 높은 페일 나이츠와 시저도 단신으로 전부 죽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의 미스트 커뮤니티들은 새로운 희망에 들끓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모든 이들이 그 영상의 주인공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상 속에 드러난 그의 모습만으로는 성별 이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를 안다고 나선 유저조차 한 명도 없어 더욱 큰 의문을 낳았다.

엄청난 논란 속에서 그나마 그의 정체를 논리적으로 추리한 듯한 글이 떠돌았다. 여덟 번째 영상의 주인공이 얼마 전 한국 미스트 커뮤니티에 올라와 제법 화제몰이를 했던 영상의 인물과 같은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그 영상은 마물들에게 습격당한 토렐리트 상공에 떠올라 있던 한 유저가 마법으로 보이는 스킬을 사용해 빛을 터트린 뒤 한 번에 모든 마물들이 터져 죽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너무나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우연에 의한 착각이거나 혹은 마법이 아니라 마법처럼 보일 만큼 강력한 특수 스킬이라는 추측이 본래 더욱 우세했었다.

그 영상 속에서 사용한 것이 정말 마법이라면, 여덟 번째 영상의 주인공이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추측이 힘을 얻었을 때에 몇몇 사람들은 몇 달 전 잠시 길드전에 나타나 반짝 인기를 끌고 사라진 누군가의 영상을 기억해 냈다.

5서클 마스터로 추정되는 마법을 사용해 커뮤니티에서 화제몰이를 하다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잊혀졌던 그 사람도 분명 검은 후드 망토를 눌러 쓴 마법사였다. 그의 별명이 최초의 5서클 마법사라는 뜻의 FM이라는 것까지 기억해 낸 사람들은, 어쩌면 그때의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실력을 발전시켜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극적인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토렐리트 영상 이후에 페일 나이츠에서 세이버스라는 길드를 잡겠다고 갑자기 날뛰어 댔었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이버스라는 길드 소속인 것일까? 혹시 그 길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누군가가 그런 글을 올리자마자 수없이 많은 추측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날개를 달고 전 세계에 훅 퍼져나갔다.

드래곤을 단신으로 죽인 마법사.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신규 길드. 한국 서버의 재앙이 된 페일 나이츠의 길마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수많은 추측이 얽히고 얽히며 불어난 관심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전 세계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한국 서버에서만 일어나던 소모전에 흥미가 없던 외국 서버 유저들도, 혹은 전투 플레이에 관심이 없어 그저 하루하루 미스트 속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채우던 라이트 유저들도 갑자기 모두 이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일어난 모든 일들.

그 소용돌이 속에 의문의 마법사 유저가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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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어때?”

“……뭐가?”

크란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비밀스럽게 물었다. 뭐가 어떠냐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몇 초의 시간을 두고 반문하자 크란이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등을 두드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네 영상 때문에 그렇게 난리가 났는데!”

“아…….”

그것 말인가.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떠냐고 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난다고 해도 내게 감흥이 생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GM 무건이 장담했던 대로 내 영상은 매우 멋지게 나왔다. 실제로 그때 흑룡을 죽인 나조차 멀리서 잡은 앵글로 마법 쓰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정말 내가 했던 일인가 의심할 정도였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내가 NPC인 줄 오해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상이 잘 나온 것과 남들이 그것을 보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키잘키르스텀에 있었고, 다른 유저들을 만나지도 않아서 분위기가 대충 어떤지 알지도 못했다.

내 영상은 넓은 공간 전체를 활용해 마법 쓰는 모습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인지 대부분 화면을 아주 먼 곳에서 잡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자그레브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커다란 후드가 달린 로브로 전신을 감싼 나를 그 영상 속의 주인공이라고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으리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시저였다.

‘승부하기로 했으니 분명히 나타나긴 할 텐데…….’

퀘스트가 끝난 지금은 시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볼 수 없어 그가 어디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있는 곳이 키잘키르스텀이라 페일 나이츠들의 움직임을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그것을 통해 시저의 움직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카프 네 영상 뜬 뒤로 내 영상을 보고 연락하던 녀석들이 전부 뚝 끊긴 거 알아? 나 참. 언제는 내가 너무 쎄고 멋있어서 놀랬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더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란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말과는 달리 연락이 안 와서 너무 좋고 편하다는 마음이 실로 투명하게 비쳤다.

크란은 나 바로 이전에 퀘스트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 다니는 대학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던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연락을 받은 것 같다고 우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 다니는 대학에서는 과대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님들에게까지 그와 관련된 말을 들어 많이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받지 않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크란의 사교성과 인맥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할 만치 신비로웠지만… 본인에겐 당연한 일인 것 같아서 약간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흠… 이제 슬슬 깜장검사가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안 오네.”

크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을 가늠해 보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우리는 현재 키잘키르스텀에 있는 루그 신전에 숨어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돌아왔을 때에는 사람이 거의 떠난 곳에서 어떻게 루그 신전을 찾아 치료를 부탁할 수 있을지 좀 막막했었는데, 우리 일행 중 팔라딘이란 호칭까지 받은 크란이 있다는 것이 그때 상상 이상으로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가 키잘키르스텀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부터 크란을 찾아 마중 나온 키잘키르스텀의 NPC 루그 사제들과 마주쳤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라니…… 알고 보니 크란은 루그의 모든 성기사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라서 루그의 성기사, 사제들끼리만 사용 가능한 연락 스킬을 통해 NPC 사제들을 부를 수 있었다.

자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인가. 덕분에 우리는 NPC들끼리 아는 뒷길을 이용하여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루그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크란이 괜히 그렇게 당당히 이곳에서 내려가면 곧바로 루그 신전부터 가서 치료를 받자고 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현재 완벽하게 치료된 몸으로 시간을 보내며 페일 나이츠가 언제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번갈아 가며 밖에 나가 동향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오늘은 유완이 그 담당이었다.

승조가 게임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알아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었다.

그때,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묘하게 묵직한 발걸음이 유완 특유의 기척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호오, 양반은 아니네. 원래 상놈이었으니 당연하지만 말야.”

크란의 빈정거림과 함께 유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크란의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유완이 가까이 다가와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녀왔어.”

“오늘은 어때.”

키잘키르스텀에서 시간을 보낸 지 현실 시간으로 3일. 미스트 내에서는 9일이나 지났다. 만약 오늘도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 사이에 큰 반응이 없다면 우리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 했다.

“큰 움직임은 없었지만…….”

“에휴, 역시나.”

크란이 지루한 얼굴로 엎드렸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유완이 이은 말 때문에 곧바로 다시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처음 보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더군.”

“뭐야?!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우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그 신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 신전의 아래쪽에는 암시장으로 유명한 키잘키르스텀의 건물 아니랄까 봐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지하 통로가 있었다. 우리를 여기로 데려와 준 NPC 사제들은 이런 공간이 키잘키르스텀의 거의 모든 건물에 위치해 있으며, 원한다면 언제든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친절한 말은 덤이었다.

“좋아… 대충 이쯤에서 올라가 볼까.”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한참 걷다 보니 출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크란이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편 다음 천장을 막고 있는 돌덩어리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옆으로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그곳을 향해 머리를 내밀고 주변을 둘러본 크란이 다시 안쪽으로 내려와 손짓을 했다. 나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크란의 뒤를 따라 나간 바깥은 여전히 사람의 모습이 씨가 마른 것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정돈되어 있는 넓은 도로와 양옆으로 늘어선 상점 건물들 때문에 이곳이 키잘키르스텀의 중심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먼 하늘에서 날개 달린 마물 몇 마리가 불길한 울음소리를 작게 흘리며 빙글빙글 맴도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는 수백 마리가 이 도시 안을 제집처럼 돌아다녔었지만 내가 흑룡을 죽인 이후 무언가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지, 다시 돌아온 뒤에는 이전처럼 많은 마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다행이지만 이 도시가 여전히 인간과 마물 둘 다를 피해 다녀야 하는 까다로운 곳임은 여전했다.

“유완. 앞장서.”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의 이상 행동을 보고한 장본인에게 길 안내를 부탁할 셈으로 고갯짓을 하자 유완이 작게 끄덕이며 맨 앞으로 나섰다. 나와 크란은 발소리를 죽여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완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넓은 길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걷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게 귀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저긴… 워프 포인트가 있는 광장 쪽이군.’

키잘키르스텀은 대륙 동서남북과 중앙에 하나씩 위치해 있는 워프 포인트가 존재하는 대도시였다. 이전에는 북부의 대도시라는 명성답게 쉴 새 없이 워프 포인트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어야 할 그곳은 현재 완전히 봉쇄된 채 마물과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에 의해 교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그랬어야 할 터인데, 이전에는 네다섯 명 정도밖에 없었던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지금은 워프 포인트 근처에 수십 명이나 북적대고 있었다.

“깜장검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못 보던 놈들이 좀 돌아다니는 정도라고 했잖아! 이건 완전히 페일 나이츠 놈들 반은 출석한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벽 안쪽으로 몸을 숨긴 우리들 중 크란이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유완을 비난했다.

“…아까 전에는 그랬었는데, 뭔가 상황이 바뀐 모양이군.”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크란이 차마 크게 소리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열 받아 했지만, 그사이 갑작스레 바뀐 상황을 우리라고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섣불리 나가기는 좀 그렇고… 일단 여기서 지켜보자.”

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한마디 하자 크란이 겨우 진정하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이럴 때 쓰기 편리한 마법 1위인 에어리얼 서번트를 사용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에어리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이쿠? 설마하니 이런 곳에 불청객들이?”

파앗, 챙! 퍼퍼펑!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 것과 뒤이어 무기가 부딪치면서 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진 것은 그야말로 1초도 채 차이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쇄도한 유완과 크란의 검을 양손에 쥔 소검 두 개로 각각 막아낸 붉은 머리칼의 남자를 보았다.

‘…말도 안 돼.’

그 유완과 크란이, 비록 오러를 씌우지 않았다고 해도 평범한 유저들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할 위력의 검을 날렸는데 그걸 정확히 보고 너무나 쉽게 막아내기까지 하다니. 서로 마주친 우리 셋의 시선 사이로 날카로운 긴장감이 흘렀으나 남자는 태연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한 번씩 훑어본 뒤 “이거 참.” 하고 넉살 좋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더니, 한 분은 확실히 이전에 새턴에서 공개한 동영상에 나왔던 루그의 성기사 씨네요. 그러면 설마…… 나머지 두 분도?”

“…….”

유완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짓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겁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는 것처럼 대범해 보였다.

‘아니면 제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는 놈이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의 얼굴이 조금 눈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저런 선명한 붉은 머리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내가 저 남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여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게임해 왔고, 만난 이의 숫자도 현저히 적었던 나의 좁디좁은 게임 인생에서 저렇게 눈에 띄는 놈을 만났다면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남자를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도 나에게서 무언가 흥미를 느낀 듯 시선을 똑바로 향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자꾸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지……. 저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던가요?”

저놈도 나를 본 것 같다고 느낀다는 건 진짜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리라. 둘 다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매우 짧고 그다지 의미 없는 만남이었겠지. 그런데 그런 적이 있었나?…….

내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크란이 짜증스럽게 검날에 흰 오러를 씌우며 남자와 맞붙어 있는 검을 힘주어 밀어냈다.

“헛소리 말고 정체나 밝혀. 넌 페일 나이츠 길드원이냐?”

“뭐, 당연한 일이겠죠? 이 도시에 남아 있는 건 우리 길드원들 말고 거의 없으니까.”

놀랍게도 남자는 오러를 씌운 크란의 검도 약간 힘겹게 밀리긴 했지만 어쨌든 여전히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나는 그의 소검 날 위에 눈으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붉은 오러가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보통 실력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유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자다.”

“응?”

크란이 유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았던 못 보던 얼굴. 이자라고.”

“……아, 그래? 가 아니잖아. 이 자식아. 네가 분명 그 뉴페이스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어? 지금 이놈은 혼자인데 그러면 나머지 놈들은…….”

어디에 있단 거야, 하고 크란이 말하려던 순간, 지붕 위쪽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내리꽂혔다.

“실드!”

펑! 펑!!

반사적으로 실드를 외친 덕에 날아온 공격들은 우리에게 닿지 못하고 전부 튕겨 날아갔지만, 그 덕에 나는 적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어버렸다.

“마법사?!”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적들은 총 세 명이었다. 그들이 당황한 얼굴로 웅성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심하고 있을 때에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대지의 숨결, 천공의 손길. 동정 없는 시선을 적의 발자국에게, 윈드 케이지!”

“우와악!”

“와앗! 뭐야!”

윈드 케이지는 바람을 이용해 물리력을 행사하기에 최적화된 마법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물 모양으로 촘촘히 엮은 바람 줄기가 적들의 전신을 덮쳐 벽을 향해 밀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붕 날아가 벽에 큰대자로 처박힌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둥거렸지만 거센 바람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트 님, 저 자식……컥!”

“읍! 으으음!!”

그 와중에도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놈이 있어 바람으로 아예 입까지 감싸 버리자 놈들이 좀비 같은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혹시라도 외침을 듣고 다른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몰려오면 큰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의 마법을 그렇게 쉽게 쓰다니……. 이런 광경을 제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군요.”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제 동료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역시 당신들이 토렐리트에서 저희 길드원들을 전부 죽였다던 그 사람들인가요? 세이… 어쩌구 하는 그 길드 말입니다.”

“세이버스다, 이 자식아.”

크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가 한층 살기등등해지며 남자가 막아내던 검이 뒤로 휙 밀렸다.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도 같네요. 처음 들었을 때엔 어디서 당하고 들어와서 변명은 영화급으로 해 댄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들은 진실만을 말했단 것을 비로소 믿겠습니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긴장감 없는 얼굴로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그를 전에 보았던 때의 기억이 거의 날 듯 말 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입을 막았던 놈들이 저놈을 뭐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아. 거트라고 했었나……?’

거트… 거트라는 이름을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비로소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전 이분 길드의 부길드마스터를 맡고 있는 요거트라고 합니다. 하하하. 제가 요거트를 좀 많이 좋아해서 이름을 요거트라고 지었지만, 다들 거트라고 부른답니다.」

발라 모냐크에서 갑작스레 시저를 만나 꼬치를 얻어먹었을 때 그를 데려가기 위해 나타났던 넉살 좋은 페일 나이츠의 부길마.

「오호라, 이제 보니 저희 구면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죠?」

자그레브 길드하우스들 사이를 걷다 시저와 마주쳤을 때에도 그 남자는 페일 나이츠 길드하우스에 있다가 잠시 얼굴을 내밀어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는 사라졌었다.

페일 나이츠의 부길드마스터 요거트. 그의 정체를 내가 완전히 떠올렸을 때에 남자 또한 나를 기억해 내는 데 성공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드디어 기억났습니다. 당신, 저희 길마님과 몇 번 같이 있었던 그분이시죠?”

“…너희들 길마라면, 시저 놈 아냐?”

“그렇죠. 친구분이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희에게 적대하는 길드셨다니, 제 마음이 지금 상당히 애석하군요.”

“친구……?”

친구라는 단어의 심상치 않은 뉘앙스 때문인지 크란이 묘한 표정이 되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완도 나를 쳐다본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크란과 유완을 향해 놈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내게 시선이 몰린 틈을 타 요거트가 순식간에 저를 짓누르는 두 개의 검을 흘려보내고 뒤로 껑충 물러나는 것이 더 빨랐다.

“엇……!”

“후후. 아무리 강해도 방심은 금물이죠.”

여유로운 얼굴로 팔을 툭툭 털어낸 요거트가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도 여러모로 그 시저에게 대놓고 이상한 말을 잘도 해 대는 간 큰 놈이다 싶었지만 이제 보니 그 성격은 딱히 시저에게만 발휘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요거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이 기억났다. 이름이 분명… 요거트였지. 페일 나이츠의 부길마.”

“네. 맞습니다. 거트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은데요.”

나는 놈의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페일 나이츠의 부길마라면 꽤 중요한 인물일 것이고 실력도 꽤나 있어 보이는데, 요거트는 여태 페일 나이츠가 쌓아온 수많은 악명에 비해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였다. 정보에 밝은 크란이나 유완도 그를 모르는 것을 보면 이는 아주 명확했다. 그를 토대로 나는 두 가지 추측을 했다.

첫 번째는 요거트가 대외적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본래는 이런 상황에선 싸워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고…….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서로에 대한 정보라도 좀 교환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건 저 뒤에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잔뜩 몰려와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짧게 반문하자 요거트가 의뭉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그걸 알고 싶으시다면 정보 교환을 해 보시죠. 그러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실로 너구리 같은 놈이다. 내 감이 그렇게 말했다.

페일 나이츠는 미스트를 플레이하는 누구나 알고 있을 유명한 길드이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 보다 규모가 큰 적을 상대하면서 우리 쪽의 정보를 넘겨주는 것은 자살 행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조건에 동의할 일이 없지만…….

규모에 비해 생각 외로 알려진 게 적은 그들의 정보를 여태 대외적으로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부길마 거트가 직접 알려줄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으니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저희에 대해 알게 될 기회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장담하죠. 질문은 여러 개 할 수 있지만 답은 다섯 개씩만 답변해 주는 쪽으로. 어떻습니까? 대답하기 싫다면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면 되니 그쪽에서도 편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할까.’

나는 크란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경우 나보다는 크란의 판단이 더 정확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크란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요거트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시 후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역시 크란도 이 기회를 놓치긴 아깝다고 생각했군.’

“…좋아.”

“거래 성립이군요.”

“단, 다섯 개는 너무 많으니 세 개로 하지.”

요거트의 옆쪽에서 크란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가 엑스를 긋고 세 개를 다시 펴는 모습을 보며 눈치 빠르게 말을 잇자 요거트가 흠 하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잘했어, 카프!’

크란이 입모양으로 크게 나를 칭찬했다.

“그러면 그 전에, 저쪽 벽에 묶어 두신 우리 길드 녀석들은 좀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죽이지 않으실 거라면 말입니다.”

풀어 달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죽여도 상관없다는 듯한 그의 말과 표정이 나는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죽여도 상관없단 건가?”

“어차피 죽어도 접속금지 3일로 끝 아닙니까. 실력이 없어서 죽는 것인데 제가 무어라 하겠습니까.”

요거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정떨어지는 소리를 해댔다. 벽에 묶여 있는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히익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들도 요거트의 말에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동료 의식이라는 게 전혀 없는 이들. 그런데도 길드원이라는 관계로 묶여 있을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매우 신선했다. 물론 나는 저런 이들과 전혀 동료도, 친구도, 단순히 얼굴을 아는 사이일 뿐인 길드원도 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윈드 케이지를 거두었다. 그러자 벽에 붙어 있던 세 명의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바닥으로 털썩털썩 쓰러져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헉, 헉, 허억……!”

“저, 저 괴물 자식…… 대체……!”

“조용히 해. 요거트 외에 다른 녀석이 입을 열면 즉시 입을 막고 땅속에 파묻는다.”

또다시 큰 소리를 낼까 싶어 조용히 경고해 주자 놈들이 순식간에 히익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 놈은 엉덩이를 끌며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바닥을 기었다.

…협박이 맞긴 한데 너무 효과가 좋아도 좀 그렇군.

“이쪽으로 오시죠. 대화를 하려면 좀 모여 있어야 편할 테니까요.”

나는 유완, 크란과 함께 요거트의 맞은편으로 갔다. 그는 우리 셋을 앞에 두고도 아주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겁이 없는 놈인지…….’

“어느 쪽부터 시작할까요?”

“우리부터 하겠어.”

나 대신 가운데 선 크란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혹시나 상황이 이상해지면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유완도 검집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가 정말 페일 나이츠의 부길드마스터라면 반드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본래 페일 나이츠의 길마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저에게 길마 자리를 넘겼다는 사람이 너냐?”

‘아…… 그런 이야기도 들었었군. 그러고 보니….’

나는 크란의 기억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나는 요거트를 직접 만나고도 떠올리지 못했었던 그 이야기는 예전에 자그레브에 처음 가서 키온 형과 팔튼 형을 만나고 그 도시 내의 길드전 상황에 대해 들었을 때 지나가듯 들었던 것이었다.

본래 페일 나이츠의 길마였던 사람이 갑자기 시저에게 길마 자리를 넘겨주고 부길마로 물러났는데도 길드 내에서는 아무런 반발도 없어 이상하다고 했었지…….

그 두 사람은 자주 길드전에 참가했었으니 만약 지금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요거트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워졌다.

“네. 그건 제가 맞습니다. 페일 나이츠는 본래 제가 만든 길드죠.”

답을 망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요거트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크란의 질문에 긍정의 답을 했다.

“거트 님!”

그의 뒤에 있던 세 명의 길드원 중 가장 말이 없던 이가 낮게 부르짖었지만 요거트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건 추가 질문이니까 다음 질문으로 넘기세요. 그럼 이제 제 차례군요.”

여유롭게 대답한 요거트가 우리를 둘러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 그 실력에 단 세 명만으로 여기까지 오는 자신감을 보면 단순히 페일 나이츠에게 반목하기 위해 만든 길드는 아닌 것 같단 말이죠. 세 명 다 새턴 동영상에 나왔던 사람들 맞습니까?”

“맞아.”

크란의 즉답은 방금 전 요거트의 답만큼이나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그 순간 요거트의 뒤에 숨어 있던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우리를 호기심과 두려움, 불신과 살의가 뒤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와 유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크란의 얼굴을 알아본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넘겼더라도 어차피 저 남자는 그것까지 계산하여 무언의 답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란처럼 그냥 빨리 대답해 버리는 쪽이 나았다.

어차피 우리가 퀘스트 동영상에 나온 유저들이란 건 곧 밝혀질 사실이기도 할 테니까.

“역시 그랬군요. 흥미롭네요. 음… 아까 했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아무래도 제가 길마님께 자리를 넘긴 이유와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사실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뜬구름 잡는 소린 좋아하지 않아. 분명하게 말해.”

크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하자 요거트가 쿡쿡 웃었다.

“시저 님은 <마신의 기사의 복수를 잇는 자>죠. 그리고 저는 <마신의 부활을 돕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마신의 부활을 돕는 자……? 요거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저의 퀘스트명을 말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다음에 말한 것은 더욱 놀라웠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의 말대로 우리 셋은 곧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 외에 또 다른 퀘스트 유저가 있었다고……?’

“제가 알기로 저 같은 사람이 미스트 유저들 중 알게 모르게 상당히 많습니다. 다만 본인이 그 퀘스트를 어떻게 깰 수 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이가 대부분일 뿐이죠. 저는 마침 우연히도 퀘스트를 얻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저 님을 만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역할은 그분을 돕는 것이고, 그래서 길드마스터 자리를 양도하고 나서 저는 제 할 일을 했죠. 그뿐입니다.”

별것 아니죠? 하고 요거트는 간단히 말했지만 그가 말한 것들은 전부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표정에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크란을 흘긋 보았다. 다행히 크란도 그다지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이럴 때만은 참으로 냉철하고 든든한 녀석이야.’

몰래 안도하는 사이 요거트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이제 다시 제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출연한 그 동영상들, 전부 진짜 플레이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 겁니까?”

“…….”

뭔가 좀 더 심각한 질문이 나올 줄 알았던 크란의 표정이 잠시 삐끗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뭐 문제라도?”

“아뇨. 뭐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에 발표된 게…… 좀 많이 믿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하하.”

요거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의 뒤에 있는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덤이었다. 나는 꿀릴 것이 없었으므로 움직임 하나 변함없이 그들의 시선에 맞섰다.

“아무튼 진짜 플레이한 내용 기반이라니 제 궁금증이 좀 덜어졌군요.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질문 주시죠.”

크란이 과연 마지막 질문을 무엇으로 택할까. 나는 예상 가는 것이 없어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요거트를 바라보던 크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서 뭘 하려는 건지 말해. 그게 마지막 질문이다.”

“거트 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넘기세요.”

요거트의 뒤에 있던 남자가 또다시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내가 슬슬 입을 막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을 때, 뒤를 돌아본 거트가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길마입니까?”

“아… 아뇨……. 하지만…….”

“아니면 조용히 해야죠. 저기 있는 무서운 마법사님에게 파묻히기 전에.”

“히, 히익.”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고 요거트의 뒤에 숨었다. 으음. 내가 하려던 일을 대신 해 준 셈이지만 어쩐지 전혀 고맙지가 않군…….

“잠시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곧 확인하실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그것을 질문으로 하실 생각인가요?”

곧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크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들의 입으로 듣는 쪽이 좀 더 확실할 테니까.”

“하하. 좋습니다. 그렇다면 답해 드리죠.”

요거트가 미소와 함께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이곳에 길마님이 돌아오십니다. 그러고 나면 저희가 할 일은 하나겠지요?”

나는 재빨리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모여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전부 워프 포인트 근처에 있었던 건, 그렇다면 설마……!

“모든 일은 순서대로 진행되도록 이미 말을 모두 끝내 둔 상태이니, 이제 와서 당신들이 나선다 한들 별 소용은 없을 겁니다. 벌써 시작되었으니까요.”

요거트가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말을 이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저 멀리서 뭔가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수의 인원들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너. 설마 시간을 끄는 걸 노리기 위해 이런 짓을 제안한 건가?”

크란이 요거트를 노려보며 묻자 요거트가 “반반이라고 해 두죠.” 하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지막 질문은 답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 마법사님은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있던데,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요? 후드를 한 번 벗어주셨으면 좋겠는데.”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요청은 곧바로 거절하겠다.”

대답한 것은 나도, 크란도 아닌 유완이었다.

검을 뽑아든 유완이 나를 보호하듯이 앞으로 나서는 것과 동시에 요거트의 뒤에 있던 페일 나이츠 길드원 중 한 명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 펑!!

매캐한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좁은 뒷골목 안에 가득 퍼지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하하하. 과연 눈치가 비상하시군요. 아쉽지만 저희도 바쁜 몸이니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대단하신 분들!”

“더스트 윈드!”

연기를 걷어내기 위해 더스트 윈드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광풍이 몰아쳤다. 시전자인 나조차 피해가기 힘든 좁은 공간에서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등 뒤에서 다가온 손이 내 어깨를 감싸 품에 단단하게 안아주었다.

연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유완이라는 것을 나는 어쩐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가슴 쪽을 손바닥으로 살짝 두드리자 등을 감싼 손에 힘이 조금 더 강하게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더스트 윈드가 검은 연막을 완전히 걷어내어 날려 버렸다. 그러나 드러난 골목에 남아 있는 것은 우리 셋밖에 없었다.

“젠장. 그 자식들 정말 쥐새끼같이 빠르네. 잡을 수 있었는데…….”

크란이 험한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린 뒤 나와 유완을 보고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카프한테 수작질이야? 당장 못 놔?”

“…….”

나는 유완이 나를 그냥 팔로만 감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망토까지 끌어당겨 덮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약간 머쓱하게 그 안에서 빠져나오자 크란이 심각한 얼굴로 눈짓을 했다.

“아까 들었지? 그 요거트란 놈이 말한 정보들.”

요거트는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상당 부분 알려주었다.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 치고라도 그의 말들이 여태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찌른 것은 사실이었다.

“진짜로 그 자식이 마신의 부활을 돕는 퀘스트를 가지고 있어서 시저를 도왔다면, 그리고 그 비슷한 퀘스트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이 있다면 이전에 시저가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서 선동질을 했던 것도 이해가 가. 그런 짓을 해서라도 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 자기편이 될 놈들을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테니까. 난 사실 시저가 왜 그 짓을 했는지 아직까지 의문이었거든.”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대부분 그런 놈들일까.”

조용히 물어보자 크란이 “글쎄…….” 하고 중얼거리며 턱을 문질렀다.

“전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비율이 높은 건 사실일 거야. 물론 그 녀석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그렇다면 그 반대도 존재하겠군.”

그때, 갑자기 유완이 끼어들었다.

“그쪽을 돕는 퀘스트가 있다면 이쪽을 돕는 퀘스트도 존재하겠지. 서로 대립하기를 원하면서 한쪽에만 치우치게 만드는 경우는 없으니까.”

나는 크란이 유완의 말을 듣고 무어라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크란은 의외로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리가 있네. 여태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건 퀘스트 내용을 비밀로 하고 활동하느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니까.”

“퀘스트의 중요도와 비중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체 분포도를 따지면 분명 5:5 정도가 될 수 있도록 배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퀘스트를 뿌려놓아도 그것을 찾아내어서 여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최종적으로는 비율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크게 차이 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방향이 일반 유저들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냐…. 너 진짜 이런 쪽 일 많이 해 본 놈이구나?”

크란이 새삼 유완의 얼굴을 진지하게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덕분에 놀란 것은 내 쪽이었다.

‘유완이 뭘 하는 녀석인지 크란도 알고 있었던가? 언제부터?’

알고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유완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둘이서 서로에 대해 정보를 나누기는 한 모양이었다.

‘전에 민후하고 얘기를 제대로 해 보라고 해서 한 건가? 아무튼 다행이긴 하군…….’

“생각해 보면 시저는 하나고 우리는 일곱. 거기에 대륙 전체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라고 해도, 자신과 관련이 없으면 아무래도 좋단 식으로 흥미를 가지지 않는 유저가 더 많을 테니까 해결할 수 있는 밸런스 패치가 필요하기는 했겠지. 그걸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구만.”

이리저리 중얼거리며 결론을 낸 크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결정했어. 일단 그놈들이 시저와 함께 다시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서 다른 도시로 가자. 그리고 우리도 대대적으로 길드원 모집을 하는 거야.”

“어느 도시로?”

크란이 생각해 둔 곳이 있나 싶어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역시 길드의 도시 하면 자그레브 아니겠어?”

카프. 이제 퀘스트도 다 끝났으니까 날 도와줄 거지? 그렇게 말하는 크란의 목소리에는 거부하면 안 된다는 약간의 압력과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카프가 하면 저 자식은 그냥 부려먹을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좋아. 그럼 가 볼까?”

“잠깐. 그 전에… 조금 살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뭘?”

크란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조용히 대답했다.

“시저가 정말로 나타나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시저는 위험한 상대다. 할 수 있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나으니 이대로 크란의 말처럼 자리를 피하는 쪽이 낫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승조가 나와 했던 약속을 위해 다시 되돌아온 것인지 내 눈으로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안 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가볼 생각이었는데, 크란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확인할 만한 문제지. 그러면 어디…….”

주변을 둘러보던 크란의 시선이 근처에 있는 높은 건물에서 멈추었다.

“저 위쪽 정도면 보기 편하겠지? 가자.”

나는 처음에 크란이 지붕 위로 올라가자고 하는 줄 알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려 했으나 잠시 후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크란은 조용히 그 건물까지 다가간 뒤, 문을 강제로 발로 차 열어 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빠르고도 강력한 한 방이었다.

“들어와, 카프!”

“…….”

아무리 대부분의 주민들이 탈출한 도시라고는 해도… 저건 성기사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방법이 딱히 힘을 쓰지 않고 광장을 관찰하기에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크란을 따라 비어 있는 건물의 꼭대기층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음, 역시 나야. 여기가 제일 잘 보이네!”

본래 상점 겸 집으로 쓰였던 것 같은 이 건물 맨 꼭대기에는 짐으로 가득 찬 다락방이 있었다. 지붕과 연결되어 있는 창문은 생각보다 큰 편이어서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어도 충분히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가능했다.

‘…생각보다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 숫자가 정말 많군.’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곳만 보면 키잘키르스텀이 유령 도시가 되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떠들썩하게 모여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드디어 누군가 나섰다.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붉은 머리 덕분에 나는 그가 요거트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워프 포인트가 있는 계단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크란이 단번에 미간을 푹 찡그렸다.

“저 자식 정말 별로야. 닉네임도 이상해. 키도 멀대같이 큰 놈이 이름은 쓸데없이 깜찍한 요거트라니, 뭐야 대체?! 완전 기분 나빠!”

“…요거트를 좋아해서 지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심코 그가 예전에 말했던 정보가 떠올라 중얼거리자 크란과 유완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쏠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카프. 시저랑 몇 번 같이 있었다는 건 무슨 얘기였어? 저 자식도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던데 대체 언제 그러고 다녔던 거야? 페일 나이츠의 길마와 부길마를 동시에 만나고도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줄 수가 있어?!”

“별건 아니었는데…….”

“별것이 아니라면 말해 주면 좋겠는데.”

“그래! 별게 아니라면 어서 말해 줘!”

말끝을 흐리자 유완이 크란의 말에 힘을 보탰다. 거기에 반색하는 크란을 보면서 나는 두 녀석 다 이 사안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엄청 궁금했나 보군…….’

듣고 나면 정말 별것 아님을 저 녀석들도 깨달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시저를 만날 때마다 일행들에게 대충 꼬박꼬박 이야기도 했었으니까.

“그냥, 도시에서 지나다니다 우연히 시저를 몇 번 마주쳤었는데…….”

“우여어언? 첫 마디부터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카프? 그 자식은 우리 위치가 전부 보이는 것 같던데 그런 녀석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고?”

뭐,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시저가 의도해서 나를 찾아왔던 때와 정말로 우연히 나를 마주쳤던 때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주쳤을 때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며 꺼지라고 말하거나, 무시하고 가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녀석이라고 항상 우리 위치를 감시하진 않는 것 같던데. 정말로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는 보자마자 꺼지라고 하기도 했었고…….”

“뭐?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 자식이?! 보자마자 칼을 뽑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이상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해. 한 번은 먹을 것도 사줬고…….”

내 안에서 시저는 시저라는 유저라기보다는 내 친구였던 승조로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예전 이미지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약간 찔리는 기분으로 중얼거리자 크란이 입을 딱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먹을 거?! 시저한테?! 대체 언제? 나랑 있었을 때는 아니지?”

“아니야.”

키온 형하고만 다녔던 때였으니 그것도 벌써 몇 달 전이다.

크란의 눈 안에 정말로 이 이야기를 믿어도 되는가 하는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나도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식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우릴 볼 때마다 검 들고 썰어 버린 건 언제고 너한테 그렇게 친하게 굴어?”

사실 일방적으로 친하게 군 쪽은 시저가 아니라 내 쪽이다. 꼬치도 내가 사 달라고 말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는 밝힐 수 없었다.

“그러면 요거트 저 자식은 언제 본 거야?”

“두 번 봤어. 한 번은 시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내가 실수로 페일 나이츠 길드하우스 근처에 갔을 때.”

“실수우?!”

크란이 몇 번 숨을 몰아쉬다 유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깜장검사, 너… 알고 있었어?”

“아니.”

유완이 짧게 대답하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뭔가 매우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페일 나이츠 길드하우스… 그래. 길을 잃은 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거기서 시저에 요거트까지 만나고도 무사히 돌아왔단 건 정말… 천운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어!”

음… 그 정도로까지 표현할 말인가? 나는 약간 의심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시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너한테 좀… 흥미가 있었나 보다. 설마 얼굴을 들킨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크란은 노골적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것만 아니면 됐어. 그 미친놈조차도 널 쫓아다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가 정말 걱정이 되어서 살 수가…… 응?”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크란이 갑자기 내 어깨 너머를 향해 고개를 쭉 뺐다.

“저거, 시저 놈 아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까지는 요거트가 있었던 계단 위에 지금은 한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짧은 은발과 검은 갑옷, 그리고 눈에 띄는 진한 붉은색 망토를 두른 남자를 본 순간 나는 그가 시저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에어리얼 서번트!”

심장이 뛰는 것과 동시에 입이 냉정하게 주문을 외쳤다. 내 몸속에서 빠져나온 바람 한 줄기가 순식간에 창밖으로 빠져나가 광장 쪽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두 개로 나뉜 시야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시저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웃는 방법 따위는 모를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이전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좀… 의욕이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방금 말한 대로 움직인다. 이상.”

내가 너무 늦게 에어리얼 서번트를 썼는지, 시저는 그것만을 말하고 나서 요거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요. 길마님 말씀대로 기왕이면 우리 쪽이 이겨서 새턴을 한번 놀래켜 봅시다. 하하! 그러면 앞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입장!”

“와아아!”

요거트가 웃는 얼굴로 손을 들자마자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일제히 달려서 워프 포인트 안으로 들어갔다.

“토렐리트로!”

“자그레브로!”

“발라 모냐크!”

“톨랑!”

각기 다른 도시의 이름을 외칠 때마다 길드원들의 몸에서 빛이 나며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저게 뭐야? 저 녀석들, 뭘 하려는 거지?”

나는 옆에서 크란이 그 모습을 보고 외치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그 모습을 잔뜩 집중한 채 보았다. 광장에는 수많은 길드원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전부 워프 포인트를 타고 사라지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길드원들이 사라질 때까지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거트가 낮게 웃으며 시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몰래 에어리얼 서번트를 그의 뒤에 붙여 뒤를 따랐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네요. 더 늦으시면 저 혼자 진행하려고 했는데 막판에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마신의 기사가 있는 것과 아닌 건 위력이 다르죠. 저는 대놓고 앞으로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요거트가 텅 빈 광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희의 일은 당신 없이는 완전하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저드 타워의 NPC 마법사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아실 텐데요. 이번에도 당신이 오자마자 그동안 그렇게 애를 먹었던 진공의 돌을 단번에 찾아내 주신 덕분에 오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걸 찾으려고 여길 무리해서 점령하느라 말은 안 했어도 꽤 힘들었으니까요.”

“…….”

진공의 돌. 위저드 타워의 마법사들. 나는 처음 듣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잘 새겨 넣었다.

“그건 그렇고, 깨워서 길들여 보시려던 흑룡도 죽었다는데 다음은 뭘 하실 겁니까?”

요거트의 질문에 시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아까 전 시저의 눈에서 의욕이 살아난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시저는 처음 보는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찾아낼 상대가 있어.”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로 본 것뿐이지만 순간 내 몸 전체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시저의 눈빛은 새파랗게 불타고 있는 중이었다.

“…흠.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네요. 누군가요? 당신을 그렇게 의욕적으로 만든 상대가? 유저입니까? 아니면 NPC?”

“나에 대해 쓸데없는 관심은 집어치우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그랬죠. 하지만 우리 길마님께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부길마로서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누굽니까? 말해 주시면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하는데요.”

“닥쳐.”

시저는 그 말만 남긴 뒤 홀로 워프 포인트 안으로 들어갔다.

“토렐리트.”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시저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사라져 버렸다. 이제 광장에는 요거트밖에 없었다.

나는 요거트도 워프 포인트를 타고 어디론가 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뜻밖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은은하게 불길한 붉은빛을 내고 있는 검은 돌덩어리였다. 빛을 조금 내는 것 말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그 돌을 햇빛에 비추어 보며 한 바퀴 돌려 본 요거트가 잠시 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워프 포인트 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딪친 돌이 몇 번 튕기고 굴러 워프 포인트의 진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요거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앞에 서서 가만히 안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났을까.

언제나 선명한 빛을 내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던 워프 포인트의 빛이 갑자기 전파가 잡히지 않은 TV처럼 지직거리더니, 잠시 후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흔들리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뭐야, 저게……?”

옆에서 크란이 그것을 보았는지 신음소리를 흘렸다. 요거트는 없어진 워프 포인트를 보고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그 위로 올라가 제가 던졌던 돌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 돌은 이제 아무런 빛을 내지 않았다.

“토렐리트.”

요거트가 중얼거렸지만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 깨져서 사라진 워프 포인트의 빛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하하. 성공이군.”

요거트가 웃음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돌을 다시 뒤로 휙 던져 버렸다.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이용해 그 돌을 감싸고 다시 내 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도록 시켰다. 에어리얼 서번트에게 미약하지만 돌멩이 하나 정도는 들 수 있는 물리력이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후우.”

잠시 후 열린 다락방 창문 안으로 무사히 되돌아온 에어리얼 서번트가 돌을 내 손안에 떨어트린 뒤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 돌을 향해 쏠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돌은 또 뭐고?”

“아직은 몰라. 단지……. 이게 키잘키르스텀의 워프 포인트를 파괴한 아이템인 것 같아.”

“이게?”

크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돌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아이템창 안에 넣었다.

“가져가서 이게 뭔지 확실히 알아내야겠어.”

“시저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었어? 저놈들 대체 뭘 할 계획인 거야? 단체로 몰려가서 뭘 어쩌려고?”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크란의 눈을 보았다. 제가 알지 못할 수많은 다른 유저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정. 언제 보아도 나는 크란의 그런 면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했다.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네 도시로 나뉘어 떠났어. 그 다음에 뭘 할 생각인지는 몰라. 다만 요거트가 시저에게 말한 걸 들어보니… 그 녀석들이 이 도시를 점령했던 건 뭔가를 찾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뭘?”

“진공의 돌.”

“돌? 방금 네가 가져온 것도 돌 아냐? 그럼 그게 그 진공의 돌이려나?”

사실 나도 크란과 같은 추측을 했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돌의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이상 쉽게 추측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말을 아꼈을 뿐이었다.

“…아마도.”

“흐음. 그러면 페일 나이츠 녀석들은 진공의 돌을 찾기 위해 키잘키르스텀을 점령했고, 드디어 찾아내서 떠났단 거네. 그 진공의 돌이란 게 카프 네가 가져온 돌이 맞다면 그 돌에는 워프 포인트를 파괴하는 힘이 있단 뜻이고……. 잠깐.”

열심히 추리해 나가던 크란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 돌이 꼭 방금 가져온 하나뿐이라곤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 페일 나이츠 놈들이 굳이 네 팀으로 나뉘어서 나머지 대도시들로 떠난 이유가 그 녀석들도 진공의 돌을 가지고 워프 포인트를 파괴하기 위해서였다면……?”

진공의 돌이 사실 다섯 개이고, 키잘키르스텀의 워프 포인트를 파괴한 것처럼 나머지 대도시의 워프 포인트도 동시에 파괴한다……? 일견 말도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추리에는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

“굳이 한 곳만 파괴할 이유가 없으니 그쪽이 맞겠군.”

유완도 그렇게 생각한 듯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대륙 사방을 순식간에 오갈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가 사라지고 나면 느린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반발하는 이들이 집결하기도 힘들어질 테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페일 나이츠 놈들은 미리 팀을 짜서 각 도시별로 어떻게 무너뜨리고 어떤 경로로 나아가 다시 합류할지 전부 사전에 이야기를 해 두었을 테니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유저들은 그렇지 않잖아. 게임 내에서 빠르게 결집해 모일 수단이 없어진 거야.”

거기까지 말한 뒤 크란이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네. 지금 당장 우리도 여길 떠나 자그레브로 가야 하는데 너무 늦으면 어떻게 하지!”

“…그 말대로라면 아마 지금 당장 뭔가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크란과 유완의 추측, 그리고 시저와 요거트의 대화를 들었던 것을 머릿속에서 종합해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떠난 놈들은 마물을 데려간 것도 아니고, 순전히 유저들만 간 데다 네 팀으로 나뉘어 있어. 워프 포인트는 바로 파괴했겠지만 각 대도시 유저의 수에 비하면 놈들의 수가 너무 적어. 게다가 시저도…….”

“맞아. 시저 그놈은 어디로 갔어?”

크란이 황급히 물었다.

“제일 위험한 놈을 잊고 있었네!”

“시저는 토렐리트로 갔어.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과 당장 합류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뭐? 왜?”

그건 아마도 나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는 대신 그저 애매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찾을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

“찾을 사람~?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먼저 죽이고 가려고 그러나? 누군지 몰라도 정말 안됐네.”

그 안된 놈이 바로 네 눈앞에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일단 그럼 이제 그만 일어나서 이동하자. 어떻게 해야 제일 빨리 갈 수 있으려나……. 역시 주인 잃은 말을 몇 마리 데려와야 하나?”

크란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자그레브로 갈 방법을 궁리하는 동안 나는 몸을 돌려 도로 창가로 향했다. 요거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남은 것은 아직도 하늘을 맴돌고 있는 마물 몇 마리뿐이었다.

‘마물이라…….’

그러고 보니 우린 저놈들을 타고 빠르게 서쪽 사막까지 다녀온 아주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마법에 의해서 말이다.

나는 잠시 그놈들을 바라보다 씩 미소를 지었다.

“…어라? 이상하게 왠지 소름이 돋는데……? 내가 상태이상에 걸렸나?”

내 얼굴을 보지 못했을 크란이 왠지 소름 돋아하며 팔을 문질러 댔다. 아마 크란은 마물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안전하고 빠르게 세 명이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을.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약간의 소란 끝에 우리는 이블 아이로 정신 지배에 성공한 마물의 등에 탄 채 키잘키르스텀을 떠날 수 있었다.

흑룡을 죽일 때 거의 죽었다 다시 살아난 뒤로 처음 써 본 7서클 마법이라서인지 이블 아이를 사용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리가 찌릿하고 아팠었지만, 나는 그것이 간만에 높은 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느라 무리한 탓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 고통은 아주 짧았다가 금세 사라졌으므로 접속을 종료했을 때에는 내 머릿속에 이미 남아 있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접속을 종료하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어쩌면 그것이 내가 무시해서는 안 되었던 고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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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분명 평소처럼 접속 헤드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오른쪽 다리에서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어깨를 땅에 세게 부딪친 탓에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 정신을 차리고 오른쪽 다리를 매만져 보았지만 그것은 마치 내 몸에 달려 있는 나무토막 같을 뿐, 꼬집거나 때려도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움직여 보려 해도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만지면 만지는 대로 겨우 굽혔다가 펴지는 것만 가능할 뿐이었다.

여태까지 느껴 왔던 수많은 고통보다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상황이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한참 동안 다리를 더듬거린 뒤 이것이 일시적인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겨우 전화를 써서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컴퓨터, 구급차를 불러줘. 지금 당장, 빨리.”

[ 알겠습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제가 최대한 도와 드릴게요! ]

“다리…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어.”

[ 안심하세요. 피가 잘 통하도록 다리를 펴 주시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전부 해결될 거예요. 지금 강무헌 님의 호흡이 너무 빨라서 과호흡이 올 염려가 있어요. 자, 절 따라서 천천히 심호흡을 해 보세요! ]

진제환의 하우스 컴퓨터가 이렇게 의지가 되는 존재로 느껴지기는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몸을 어렵사리 움직여 컴퓨터가 지시한 대로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 방금 호출된 구급차가 20분 내로 도착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내 휴대폰이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는 진제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 그렇지. 이 녀석 집에서 호출한 거라 안내가 가나.’

진제환의 이름을 보자 겨우 약간 침착함이 돌아왔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한 뒤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이지, 무헌? ]

연결이 되자마자 곧바로 다급히 묻는 진제환의 등 뒤에서 차가 달리는 것 같은 세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그것을 듣고 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너 설마… 지금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거냐?”

[ 네게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가는 건 당연하니까. ]

아니. 당연한 게 아니지. 나는 속으로 태클을 건 뒤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도리어 내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주고 있었다.

“오지 마. 구급차가 20분 내로 온다고 했으니까.”

[ 곧바로 병원에 가 있는 쪽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

“…….”

뭐라고 말해도 올 생각인 거군, 이건.

그냥 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저 녀석에게도 분명 바쁜 일들이 많을 텐데 진제환은 그것을 전부 제쳐두고 나를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주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런 상황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고통을 홀로 참고 병원도 혼자 가는 것이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이 나를 곧바로 걱정하고 함께해 준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무헌! 갑자기 왜 대답이 없는 거지? 그 사이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라면……! ]

“아니. 괜찮아. 꼭 걱정된다면 병원으로 와서 만나는 쪽으로 하자.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뒷말을 이었다.

“고맙다.”

진제환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주먹을 한 번 가만히 쥐어 보자 방금 전까지는 싸늘하기만 했던 손이 도로 따뜻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는 구급대원들의 들것 침대에 실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몇 번째 와 보는 응급실이었지만 이곳을 가득 채운 다급함과 절규, 울음소리는 언제 겪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이곳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

들것이 막 접수 카운터를 넘어갔을 때, 그 근처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진제환이 나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날듯이 달려온 진제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양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 간절히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무헌.”

그저 내 이름만 한 번 불렀을 뿐인데 지나치게 잘생긴 녀석이 엄청나게 사연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부르짖으니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다. 곁을 지나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가던 길을 멈추었고, 울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으며 나까지 졸지에 시선이 몰려 드라마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진제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나는 시선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상당히 굴뚝같아졌다.

“대체 이건…….”

진제환의 시선이 내 다리와 얼굴을 어지럽게 맴돌기를 반복했다. 어디가 문제냐고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접속을 해제한 뒤부터 이쪽이 안 움직여.”

나는 오른쪽 다리를 가리켜 보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각도 없고.”

“그건…….”

진제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그와 내가 아마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접속기기에 받는 영향이 드디어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가.’

윤석호는 미스트 접속기기가 절대로 사용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지금 내 다리에 생긴 문제는 그러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윤석호와 만나기로 했던 날은 내일이었다. 아직도 하루나 남아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여러모로 막막했다.

“저어, 강무헌 님의 검사를 위해 이제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보호자 분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와 진제환이 동시에 생각에 잠긴 동안 침묵을 견디지 못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 예.” 하고 대답했다. 진제환이 무표정하지만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멀어지는 나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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