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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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이전에 입원했었던 병실과 호수까지 똑같은 1인실로 곧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에 하도 자주 왔더니 자동으로 인계 및 이동 시스템이 적용되는 것은 좋았지만, 가능하면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평생 살고 싶었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거지?”

병실까지 따라 올라온 진제환이 질문했다. 겉보기에는 평소처럼 침착해 보였지만 눈을 보면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초조함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밤이라 바로는 안 돼. 내일 아침에 결과가 나오고 나면 담당 의사가 오겠지.”

아마 신정석 의사도 상당히 놀랄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내일 상담을 위해 방문했어야 했을 내가 하루아침에 이런 상태가 되어 입원했으니 말이다.

‘후우. 그건 그렇고 내일 윤석호를 만나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VT포트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군. 어떻게 한다.’

“뭔가 걱정되는 점이 더 있는 건가? 안색이 좋지 않아.”

진제환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진제환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내일 만날 사람이 있었는데.”

“취소해.”

진제환이 곧바로 즉답했다.

“그러고 싶다만 그 사람이 윤석호라서 말이야…….”

“…….”

드디어 내가 고민하는 이유를 깨달았는지 진제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중요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던 거라 가능하면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비밀 포트를 써야 해서 여기서는 안 돼. 약속을 미루자고 연락할 수단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중요한 이야기란 건 캡슐에 대한 건가?”

진제환이 느릿하게 반문했다. 역시 진제환이라면 이 정도만 들어도 곧바로 이유를 추측해낼 줄 알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가 가겠다.”

“일반적인 약속이라면 부탁하겠지만… 비밀 포트에는 지정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나는 그 질문을 들은 진제환이 매우 가소로운 말을 들었다는 듯 스르르 사나운 미소를 머금는 것을 보면서, 내가 그의 직업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런 걸 뚫는 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 뒤 진제환은 잠시 후 더욱 든든한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쉬도록 해.”

진제환의 모양 좋고 단단한 손에 비해 내 손은 뼈만 울퉁불퉁 불거져 남은 몰골인 데다 시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어 참으로 꼴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꽉 잡고 있는 손의 온기가 고마웠기에 나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마주 잡았다.

만약 진제환이 없었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고마워.”

두 번째로 고마움의 말을 전하자 진제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는 잠시 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

듣기 좋은 목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지다가는 입술이 닿았다. 닿은 것은 입술뿐인데도 어쩐지 차가웠던 심장이 더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왜 이런 상황에서 키스를 나누는지 그 이유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진제환은 내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으로 인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검사가 끝나고 나서 맞았던 주사 때문인지 몸이 조금 나른해지자마자 곧바로 참을 수 없이 수마가 몰려왔다. 나는 처음으로 병원에서 누군가가 손을 꼭 잡고 지켜보는 가운데 잠이 드는 호사를 누렸다.

강무헌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진제환의 표정에서 부드러운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힘없이 늘어진 손목에 앞뒤로 빼곡하게 붙어 있는 긴급 영양 보충용 패치 스티커를 내려다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끌어당겨 강무헌의 몸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고 나서 몸을 돌렸다.

바이크를 끌고 어두운 밤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방금 전까지 강무헌이 머물고 있었던 그의 작업실이었다.

[ 오셨군요, 주인님! ]

“오늘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녹화된 영상부터 재생해.”

[ 알겠습니다. ]

평소와 달리 빠릿하게 움직인 컴퓨터가 금세 진제환의 눈앞에 홀로그램 영상을 재생해 주었다.

‘…….’

영상은 강무헌이 접속 헤드를 벗고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한쪽 발을 먼저 내디뎌 일어서려 했던 강무헌이 다른 쪽 다리를 뻗으려 하자마자 그대로 힘없이 무너져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잠시 충격을 감내하는 듯 어깨를 붙잡고 웅크리고 있던 강무헌이 제 몸의 이상을 깨달은 듯 오른쪽 다리를 더듬거리다 꼬집고 때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이후에는 제 다리를 손으로 붙잡아 굽혔다 펴 본 다음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각도의 문제로 얼굴 표정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진제환은 그 모습을 본 순간 평소에는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심장이 거세게 뛸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강무헌은 잠시 후 전화를 받았고, 이후 시간이 흘러 집 안에 들어온 구급대원들의 손에 이끌려 들것에 실려 나갔다. 영상은 거기에서 끊어졌으나 진제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시트가 흘러내린 침대 쪽으로 향했다가, 낯선 발자국이 찍힌 바닥으로 옮겨 가기를 반복했다.

[ 청소… 할까요? ]

“소독까지 해. 그리고 무헌이 이전에 이 집에서 VT포트 접속기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나?”

[ 아, 네에. 정확히 6일 13시간 29분 전 사용하셨습니다. ]

“꺼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잡지 더미 사이에 파묻혀 있던 청소 로봇이 팔을 쳐들고 뚫고 나왔다. 진제환은 그 안에서 빠져나온 VT포트 접속용 고글 세트를 집어 든 뒤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쓴 뒤 품속에서 꺼낸 VT수첩을 펴자 두 개의 기계가 순식간에 서로 연결되며 짧은 전자음이 몇 번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 …포트 관리자 모드로 진입합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

진제환은 대답 대신 수첩을 든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랫동안 스스로 커스텀한 뒤 수족처럼 사용해 온 수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슈퍼컴퓨터이자 불가능한 작업이 거의 없는 만능 도구이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VT포트 접속용 고글이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링크를 역추적해 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비밀 포트의 주소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고 수준의 보안으로 겹겹이 감싸 흔적을 지운 주소이지만 진제환은 지금까지 그런 것을 수백 번은 더 파헤쳐 왔다. 시간은 약간 필요하겠지만 VT수첩 안에 내장된 해킹 프로그램이 돌기 시작했으니 몇 시간만 기다리면 결국 그것은 진제환의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진제환은 고글을 쓰고 앉은 채 잠깐 선잠을 자기로 했다. 기계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처리하는 동안 인간은 조금이라도 쉬어 두는 쪽이 나중에 일 처리를 더 빠르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자야 한다고 마음먹었을 때에 몇 초 내로 잠들지 못한 적이 없었던 그가 지금은 몇 분이 지나도 제대로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잠깐 잠에 들려 할 때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심장을 두드려 자꾸 다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이런 비이성적인 경험은 진제환에게 있어 아주 드문 것이었다.

잠시 그 이유를 되짚어 보던 진제환은 강무헌이 있는 병실을 떠나올 때부터 계속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

강무헌과 있었을 때에도 이 비슷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지만 그때에는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쉬웠다. 그를 보고 있으면 진제환은 언제나 기분 좋고 고요한 늪 속에 잠기는 편안함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없다. 그는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는 불명의 세계에 빠져 차가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그의 감은 눈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잠겨 있던 늪이 메말라 가고 진제환은 강제로 그 안온한 공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가만히 자문해 보자 곧 대답이 떠올랐다.

이것은 분노. 불안감. 초조함. 걱정.

그리고 두려움이다.

‘나는 지금 두려운 건가…….’

그가 쓰러지는 순간에 곁에 있지 못했던 것이 두렵다. 그를 지키려 했던 결심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더 큰 두려움을 준 것은 그가 너무나 맥없이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차가운 사실이었다.

미스트에서 기운차게 움직이던 그가 너무나 강해 보여서 깜박 잊고 말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너무나 메마르고 초췌해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사라져 버릴 존재 같아서, 차마 손을 잡는 것 이외에는 감히 아무것도 만질 수가 없었다.

진제환은 감은 눈 안쪽으로 그의 모습을 덧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깊은 불안과 분노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해가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에 진제환이 원했던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고 눈앞에 강무헌이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비밀 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평범하게 만들어진 비즈니스용 VT포트 사무실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진제환이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앉자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VT포트 안에 접속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들어섰다가는, 진제환의 얼굴을 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양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너구리 같은 성격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화술로 이름 높은 새턴의 한국 지부장 윤석호가 그렇게 솔직하게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을 본 이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그를 아는 수많은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을 땅을 치고 아까워할 만한 표정을 지은 윤석호가 잠시 후 겨우 놀란 얼굴을 갈무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생각해 보니 당신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 법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긴 강무헌 씨만이 알고 계신 곳인데요. 설마…….”

“무헌은 현재 입원 중입니다.”

진제환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윤석호가 두 번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인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원인은 아직 불명이지만.”

진제환은 그다음의 문장이 눈앞의 남자에게 충분히 전달되도록 똑똑히 힘을 주어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저는 그것이 당신들이 만든 게임 접속기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윤석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진제환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려는 것처럼 몇 번이나 시선을 맞추었지만 결국 그것이 진실이라는 판단을 내린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요.”

“증거는 이미 무헌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제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석호를 바라보았다.

“무헌의 접속기기를 계속 분석한 것은 저입니다. 덕분에 일반 캡슐과는 다른 영향이 사용자에게 흘러가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그보다 더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곧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제환은 허튼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기술이라도 인간이 만든 이상 같은 인간이 풀어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언젠가는 강무헌이 갖고 있는 특수 접속기기의 비밀을 전부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필요한 시간이 현재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무헌의 몸이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원인을 알아내야 합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

윤석호는 진제환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어떤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는지 진제환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해 보였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은 단순히 현실의 얼굴을 인식하여 투영할 뿐인 VT포트 속에서도 감출 수 없이 지친 티가 났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VT포트 내에 들어올 때부터 윤석호는 이미 밤을 며칠은 샌 것 같은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저는 오늘 강무헌 씨를 이곳에서 만나면 당신이 방금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을 말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윤석호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정말로 당신의 그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현재 강무헌 씨의 몸 상태에 대한 검사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그분께 모든 것을 말하고 사과해야 하죠. 그리고…… 좀 더 이 사태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더 이상의 위험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현재 사용 중인 게임 접속기기 또한 수거를 요청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진제환은 그렇게 말하는 윤석호의 눈빛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윤석호가 그에게서 혹시 모를 거짓을 가려내려 하고 있는 것처럼, 진제환 또한 그에게서 거짓을 가리기 위해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게 보이나요?”

윤석호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졌다.

“새끼 호랑이는 생각보다 성장이 빠르군요. 이전에는 전혀 눈치가 없어 보였었는데 그사이에 대범하게 사람 속을 읽는 흉내를 내고 말입니다.”

그가 낮게 웃으며 한쪽 손안에 턱을 괴었다.

“그래요. 사실 나는 가능성의 여파라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개발하는 동안 셀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해 보았던 부분이었고,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어렵겠다는 것도 깨달은 참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윤석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진제환 씨. 이전의 연락 이후 저는 당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이곳보다 오히려 VT넷 상에서 더욱 유명하더군요. 진유완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해 왔던 수많은 업적들을 보았을 때엔 메이지 소프트를 위해 일했던 것이 당신 입장에서는 정말로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조사를 의뢰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도 당신만큼 뛰어난 VT 프로그래머 겸 해커를 찾기란 아주 힘들 것이라고들 말하더군요. 그런 평가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으로 넘어온 화제에 진제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불쾌해졌으나 윤석호의 눈빛은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일단 상대가 진지하다면 이쪽도 진지하게 답변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도.”

“그렇군요. 다른 이들의 평가에는 신경 쓰지 않는 독고다이 타입이란 말도 있었죠. 그 말대로군요. 오로지 흥미가 가는 일만 하는 기묘한 자라고 말입니다.”

“…….”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이쪽도 나름대로 진지합니다.”

진제환의 싸늘한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윤석호가 한마디를 더했다.

“진제환 씨. 당신은 강무헌 씨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은 메이지 소프트와 일적으로 어떠한 관계도 없고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할 셈이냐는 의도를 담아 진제환이 바라보자 윤석호는 처음으로 얼굴에서 모든 웃음기를 지웠다.

“그렇다면 뛰어난 VT 프로그래머로서의 당신, 진유완 씨에게 말씀드리건대, 당신과 특정한 목적을 위한 짧은 계약을 하나 맺고 싶습니다. 이것은 새턴 한국 지부 지부장으로서가 아닌 THE MIST의 개발자 중 1인인 윤석호로서의 요청이며, 한번 계약 내용을 듣게 된다면 무조건 계약을 해 주셔야만 합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윤석호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빨랐다. 그것은 그에게 그만큼 이 사안이 중대하며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고, 아마도 이 기회를 거절할 경우 같은 제안은 두 번 다시 들어오지 않을 것임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무헌에게 도움이 됩니까.”

“됩니다. 정확히는, 이 사태를 확실히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합니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의 뒤를 캔 뒤 내미는 불쾌한 계약 따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VT 프로그래머로서의 진제환은 진유완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익명으로만 의뢰를 받고 일을 처리해 왔기에 더욱 그랬다. 상대가 누구든 도전 의식을 느끼게 하는 어려운 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내는 데에 의의를 둔다. 돈에는 한 번도 연연한 적이 없었으므로 유지해올 수 있었던 삶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이 거래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회사 하나나 게임 하나 따위가 아니다. 바로 진제환이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상대의 목숨이었다.

애초에 그가 걸려 있는 이상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계약 내용은 뭡니까.”

한번 결정한 이상 마음 정리는 빨랐다. 진제환이 곧바로 질문하자 윤석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간단합니다. 새턴 한국 지부 지하에 있는 슈퍼컴퓨터 THE MIST의 내부를 뒤져 그 안에 숨겨져 있을 특정 데이터를 찾아주십시오.”

새턴 한국 지부 지하에 있는 슈퍼컴퓨터. 진제환은 잠시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다 천천히 반문했다.

“그런 위치에 있다면 당신이 직접 하는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윤석호의 얼굴 위로 깊은 피로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는 거기에 직접 손을 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장치를 심어 두었기에 그것을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몹시 힘들죠. 그 정도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그리고 당장 일해줄 수 있는 이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은 지금으로선 당신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가 거절했다면 윤석호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잠시 그런 의문이 짧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진제환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보았자 의미가 없었으니까.

“찾아야 할 데이터의 정보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당장 내일부터 새턴 본사로 찾아와 주시면 고맙겠군요. 제가 당신을 특수 서버 전문 수리업자로 계약한 것으로 위장처리 해둘 테니 절 만나지 않고 곧바로 서버실로 가면 될 겁니다. 그리고 찾아야 할 데이터에 대해서는…….”

윤석호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말로 하기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보로 드리는 쪽이 낫겠죠. 어디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진제환은 대답 대신 허공에 손가락을 들어 글씨를 썼다. 그리는 궤도를 따라 암호화된 수신 포트 주소가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오로지 보내온 메시지를 수신밖에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철저히 보안 유지가 가능한 주소였다.

“이곳으로 보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정리해서 바로 보내드리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저희는 서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혹 다른 사람에게 들키더라도 저는 당신의 존재를 부정할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어차피 여기까지 들었을 때에 그 정도 말쯤은 예상했다. 진제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헌은 이전에 입원했던 병원의 똑같은 병실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만.”

접속을 해제한 뒤 진제환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가상 공간 속에서 새턴 지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방을 모두 청소하고 소독한 청소 기계가 발치에서 언제든 VT포트 접속용 고글을 접어 넣을 수 있도록 안을 열고 대기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VT수첩이 작게 새로운 메시지가 수신 포트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윤석호가 진제환에게 보낸 것은 짧은 메시지와 한 개의 파일이었다.

‘찾아내야 할 것은 컴퓨터 내에 저장되어 있는 D파와 관련된 모든 정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최대한 오래된 것부터 우선적으로 찾아 주십시오.’

진제환은 그것을 읽고 나서 윤석호가 보낸 파일을 열었다. 그것은 오래된 텍스트 파일을 전자화한 암호 파일이었다. 순식간에 파일을 읽어내 조합한 VT수첩이 이내 완성된 모습의 홀로그램을 눈앞에 띄웠다.

전신을 제어하는 특수 뇌신경계 물질 생성에 기여하는 파동의 발견. 긴 제목을 가진 논문이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진제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연락해 보려던 분과 우연히 좀 더 빨리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니 흔쾌히 받아 주시더군요.”

비밀 포트에서 빠져나온 윤석호의 앞에는 흐릿한 홀로그램 화상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 안에서 얼굴을 내민 유프 카윗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 사람이 미슬일 뒤지는 거지? 실력은 어느 정도야?”

“다방면에 뛰어나지만 특히 감춰져 있는 것을 찾아내고 파헤치는 분야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Mr. 리보다 이번 일에 한해서는 그 사람이 더 낫겠지요.”

“정말 그렇네. 딱 지금 필요한 인재잖아. 어떻게 잡아온 거야?”

윤석호는 그 말에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사람을 가장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 존재할 때이다. 윤석호 자신이 그러한 상황이기에 상대의 약점을 그만큼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유프는 무어라 말할까.

“아무튼 도움을 받기로 했다니 이제 안심하고 데이브를 좀 진정시킬 수 있겠네. 아까도 몰래 호텔을 빠져나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부리던지. 하아~”

“정신이 없었을 와중에도 행선지를 제주도로 택한 건 당신의 천재적인 한 수였습니다, 유프.”

“그래. 날 더 칭찬해. 백번 칭찬을 받아도 아깝지 않지, 암.”

유프가 화상 너머로 고개를 단호히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윤석호는 그저께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연락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윤! 우리가 지금 어딘지 알겠어?」

일을 하는 와중에 며칠째 밤을 새며 자신이 혹시 그동안 뭔가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느라 윤석호의 정신이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던 때였다.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윤석호는 전화 너머에 유프와 데이브가 있으며, 그들이 현재 제주 공항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미국에 있어야 할 분들께서 갑자기 왜 한국에… 눈에 띄는 움직임은 피하자고 그렇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어쩔 수 없었어. 너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최고 수준의 보안 루트는 반드시 같은 지역에 있을 때에만 열 수 있으니까 이쪽으로 온 거야. 섬이긴 해도 이곳도 한국이잖아.」

「직접 오기까지 해서 전해야 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위쪽에는 두 명이나 자리를 비운 이유를 무어라 말씀드리고 온 겁니까?」

「비행기 안에서 휴가계를 냈지. 지난번 한국 지부 감사를 나갔을 때 좋은 제주도 리조트에 대해 알게 되어서 꼭 그곳에 묵고 싶다는 이유를 적어서 보냈으니까 일단 어느 정도는 속아주지 않을까? 아무튼 이럴 시간이 없어. 나머지는 데이브와 이야기해 봐.」

윤석호는 자신만큼이나 곧 죽을 것 같은 퀭한 눈을 하고 있는 데이브를 보았다. 그는 윤석호를 보다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지난번에 당신이 나한테 캡슐 설계도를 받아간 이후 연락이 없어 감이 좋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조사했어. 혹시 캡슐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찾아보다 보니까… 아무래도 진짜 우리 캡슐에 나조차 몰랐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그가 정확히 윤석호가 찾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윤석호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짓는 것을 잊었다.

「당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이야기하고 싶어. 루트를 개설해서 보낼 테니 당장 들어와.」

그가 보낸 루트를 통해 들어가면서도 윤석호는 반신반의했다. 윤석호가 찾고 있는 것은 그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영역에 있었다. 하물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할 그가 정말로 정답을 찾아내어 이곳까지 온 것일까?

「일단 받아.」

최고 수준의 보안을 겹겹이 두르고 개설된 비밀 포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데이브가 윤석호에게 파일을 몇 개 전송했다.

「이건…….」

「이 논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어?」

데이브의 그늘진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평소에는 스스로 식사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만큼 생활력이 떨어지는 데다, 겁 많고 말수 적고 사회성은 바닥을 기는 전형적인 외톨이 천재 타입인 그이지만 아주 가끔은 저런 눈빛을 보일 때가 있었다. 주로 개발할 때에만 제대로 돌아가던 뇌를 간혹 다른 곳에 사용하고 있을 때 그러했다.

적어도 윤석호는 미스트를 오픈하고 나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그분’이 어째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일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눈동자. 윤석호는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묘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논문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죠.」

인간의 뇌에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파동의 존재를 다룬 논문. 윤석호는 그것이 자신들이 만든 게임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역시 그랬어. 그래서 네가 1년 전에 그런 일들을 했던 거였어.」

데이브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넌 그때 본사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갑자기 그런 행동을 했었지. 어째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

윤석호는 그가 1년 전 있었던 일들의 진실에 드디어 접근했음을 깨달았다. 머리는 똑똑하지만 감정에 서투른 천재란 다루기 번거롭다. 마치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 윤석호는 입가에 미소를 올린 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단순히 이걸 전달해 주기 위해서 오신 것만은 아니었군요, Mr. 리.」

「할아버지지? 할아버지와 뭘 약속했어? 무슨 말이 오갔던 거야!」

제 할아버지이자 새턴의 회장인 제임스 리 회장에 대해 언급한 순간 데이브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그가 제 할아버지를 죽도록 어려워한다는 것은 과거 그와 함께 미스트를 만들었던 초기 개발진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가 자금난에 시달리던 장제천을 위해 먼저 할아버지를 찾아갈 결심을 했던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이었던가. 그 결정으로 인해 그들은 자금난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대로 된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었지만, 또한 그로 인해 모든 재앙이 시작되었다.

윤석호는 데이브의 얼굴 위로 제임스 리 회장의 얼굴이 스르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선이 가늘고 어린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는 데이브와 호랑이 같은 기백이 있는 회장. 그들은 닮지 않았으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장제천과 장명진이 사촌치고는 친형제처럼 닮은 생김새였던 것처럼.

그래서 윤석호는 데이브를 볼 때마다 여러 가지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약간의 동정, 그보다 조금 더 많은 답답함, 그리고 가슴 언저리에서 가끔 걸리적거리는 오래되고 해묵은 부정적 감정들이 그의 얼굴 위에서 어른거리다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마도 그는 이 세상에서 윤석호가 가장 제 뜻대로 대하기 힘든 사람일 터였다.

제게 없는 것들을 갖고 있는 남자. 윤석호의 인생에 유일하게 원했던 사람을 손에 넣은 남자. 그리고 그 사람이 당한 모든 일들의 원인을 제공한 남자.

만약 당신이 그때 당신의 할아버지께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윤석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가에 띤 기계적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회장님까지 만나고 오신 겁니까? 쓸데없는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군요.」

「쓸데없는 말이란 게 뭔데! 당신은 대체 할아버지와 무슨 일을 한 거야.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라.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저 순진한 남자는 제가 어떤 존재를 불렀는지 아직 무엇 하나 알지 못할 것이다. 윤석호는 그의 무지를, 그리고 순수함을 결코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데이브 또한 윤석호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왜 그런지 이유는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는 것이 그에게도 나았다. 왜냐하면 결국 아무리 밉더라도 윤석호가 하려는 일에는 그가 필요했으므로.

「듣고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다면 말씀드리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회장님께 무슨 말을 듣고 오신 것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

윤석호의 말을 듣고 움찔한 데이브는 잠시 후 괴로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캡슐 프로토 타입 설계도와 방금 당신에게 준 논문에 똑같은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걸 발견했어. 찾아보니 그 사람이 예전에 새턴 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해서 혹시나 싶어 할아버지께 확인을 해 보려고 갔는데…….」

과연. 그 정도라면 그리 큰 사고를 친 것은 아니다. 윤석호는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논문의 저자이신 줄은 몰랐지만 캡슐 프로토 타입을 설계한 사람은 아마 당신이 짐작하셨을 그대로입니다.」

장대성. THE MIST의 시작을 만든 장제천 실장의 아버지. 그는 미국에서 연구자로 일하다 어느 날 갑작스레 한국으로 외아들을 데리고 단둘이서 귀국했다. 왜 그리 갑자기 한국에 돌아온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사고로 부모를 잃은 형의 자식인 장명진을 집에 들인 이후에도 그가 거의 모든 시간을 방 안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연구하면서 보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장제천은 같은 집 안에 있는데도 언제나 틀어박혀 얼굴을 볼 수 없는 제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 감정을 중학교 때 만난 후배인 윤석호에게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15년 전쯤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으나, 장제천은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THE MIST 접속 캡슐의 프로토 타입 미완성 설계도와 그가 남긴 연구 데이터가 담긴 인공지능 컴퓨터였다.

장제천이 갑작스레 그것으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과 같은 날은 결코 없었으리라. 씁쓸함과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뒤섞였다.

「어째서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거야? 당신도, 장 실장님도, 선배도, 모두!」

그것을 당신이 이야기하는가.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모두 평생 모르고 살았어도 좋았을 일들인데도. 윤석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땐 그런 과거의 일들을 굳이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게다가 전 굳이 말하자면 제3자의 입장에서 조금 보고 들은 바가 있을 뿐이라 남의 가족사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배 본인이 당신께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걸 알려드려야 했을까요?」

할 말이 없어졌는지 데이브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머리는 좋지만 말로 싸우기에는 한참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내뱉은 말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라 윤석호는 상당히 놀랐다.

「내가 그때 할아버지께 투자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잖아.」

「놀랍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그 설계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잃어버렸던 것을 내가 되찾아주어서 정말 기뻤다고 말했지. 하지만 본래는 의료용으로 개발되어야 했을 것을 우리가 바꾸어서 게임용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당연히 도로 바꾸고 싶어 했겠지. 그렇잖아.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런. 본인의 할아버지를 얼마나 악당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모처럼 똑똑한 말을 하기에 기대했더니, 잘 나가다 삐끗했다. 한 가지밖에 볼 줄 모르는 탓에 전체적인 그림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윤석호는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틀리진 않습니다만 회장님은 어디까지나 저흴 도와주신 쪽입니다. 직접적으로 제천 실장님께 손을 쓴 자들은 따로 있다고 전에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

데이브가 전에 다 함께 닭갈비집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던 날을 떠올린 듯 입을 벌렸다.

「그러면…….」

「목적은 같지만 취한 행동이 다릅니다. 새턴의 이사파들은 우리의 개발을 중단시키고 결과물을 빼앗아 본래의 용도로 되돌리고 싶어 했습니다. 실장님은 혼자서 그걸 막으려다 사고가 났죠. 모두가 그분이 죽었다고 생각해 개발을 포기하려 했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달콤하리만큼 낮아진 윤석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데이브가 입술을 떨었다. 윤석호의 눈동자 속에서 그가 가진 감정의 깊이를 약간이나마 읽어낸 것이다.

그 게임은 윤석호가 장제천과 만들어 낸 유일한 결과물이었다. 제가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결과물. 오랫동안 지킨 장제천의 꿈이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을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을 포기했는지, 그저 장제천의 꿈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만 만족하기로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윤석호는 제가 장제천의 한 발짝 뒤에 있는 것에만 만족하던 사이 목줄기를 물어뜯으러 나타난 적들의 존재에 타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모두가 장제천의 죽음을 확신했으나 그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탄 차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져 완전히 불탄 상태였으나 안에서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가 죽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윤석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주변의 모든 도시를 이 잡듯 뒤졌다. 그리고 정확히 8일 만에 사고 지점에서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작은 도시의 병원 한구석에서 무연고 환자가 되어 누워 있는 장제천을 발견했다. 그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적들이 또다시 손을 쓰려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손을 써 비밀스럽게 다른 병원으로 옮긴 뒤 모든 것을 숨겼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새턴 회장실에 쳐들어가 회장과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회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팀은 제가 이어받을 것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픈시키겠다고.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거셨죠.」

마냥 기다리기만 하려니 갑갑하군. 1년 안에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제시할 수 있다는 증거를 가져와. 그러면 손자의 얼굴을 봐서 아무 일 없던 것으로 하고 다시 지원을 시작하겠네.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던 늙은 호랑이 앞에서 윤석호는 제가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이사들과 같은 것을 원했지만, 손자와의 약속도 가능하면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즉 게임으로서의 개발과 의료용으로서의 개발을 모두 해낼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가능할까. 의료용 개발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계획이었는지 모르는데. 윤석호의 이성이 머릿속에서 차갑게 소리쳤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프로토 타입의 개발정보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인공지능 컴퓨터 THE MIST 안에서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장제천뿐이었다. 그가 없는 지금 그 정보는 컴퓨터 안에 잠긴 채 고이 보관되고만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의료용으로 다시 개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 놀랍게도 윤석호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이 한창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던 때에 장제천이 지나가듯 했던 한마디를.

-우리 게임이라면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플레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쪽을 잘만 이렇게 고친다면 이론적으론 가능할 텐데.

‘아아. 그래. 맞아. 그때 선배가 냈던 아이디어는 지금의 나도 꺼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는 팀원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데이브라면 그때 남긴 아이디어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빠른 시간 내에 몸이 불편한 이들도 이용할 수 있는 접속기기를 개발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라면 분명 회장에게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될 만했다.

윤석호는 곧바로 그 계획을 정리해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회장은 만족한 얼굴로 크게 웃으며 결과를 낼 때까지 20개월의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20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윤석호는 장제천이 남긴 아이디어 메모와 낙서처럼 남겨진 설계 계획을 찾아내어 재정립한 뒤, 데이브를 설득해 특수 캡슐을 따로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개요를 만든 뒤에는 혹시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지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극비리에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쳐 마침내 완성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다시 한 번의 인생을. 통칭 Re LIFE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목표는 오로지 20개월 안에 그 캡슐이 유의미하게 의료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수치를 뽑아낼 것. 여기서 유의미하다는 것의 수치가 아주 클 필요는 없습니다. 미약하더라도 도움이 된다는 확증만 나오면 게임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저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장제천 실장님이 남긴 설계를 더 발전시키기보다는 안정성을 높이는 쪽에 주력했습니다. 그래야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최악의 경우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할 뿐이지, 그 이상의 문제는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중 이사파들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아는 수준이었으나 무언가 더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사건건 윤석호에게 시비를 걸어 댔다. 윤석호는 제가 인공지능이 포함된 THE MIST의 개발용 슈퍼컴퓨터를 가져가려는 것조차 의심스러워하며 막으려 드는 그자들 때문에 절대로 그 컴퓨터를 서버 관리 용도 이외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선서하고 짐승처럼 몸에 접근 방지용 장치를 심고 나서야 그것을 들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모욕적인 일들을 장제천 또한 실장으로 있을 때 수도 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제천은 어땠을지 몰라도 윤석호는 그런 공격 정도로는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언젠가 장제천이 다시 깨어나는 날까지 보란 듯 그가 만든 게임을 성공시키고 그를 그렇게 만든 적들을 거꾸러뜨리겠다는 목표가.

그러기 위해서는 회장에게 인정을 받고, 전 팀원들의 힘을 모아야 했다. 이제 그 목표는 거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데이브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상 제일 먼저 했어야 할 질문이었다. 윤석호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제 계산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만든 특수 캡슐을 사용한 이들이 현재 모두 상태가 악화되었거든요.」

「뭐?」

「이전에도 운영자용 캡슐을 사용 중이던 이들에게 현실의 육체에도 회복 효과가 나타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운영자용 캡슐은 특수 캡슐의 시스템과 약간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싱크로율을 낮춘 후에는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긍정적인 오류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번 일은 정말로 원인을 알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제게 없는 자료까지 찾으러 당신께 요청했습니다만 아무리 해도 답을 찾지 못해 솔직히 초조했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주신 이 논문을 보니… 드디어 새로이 파 보아야 할 부분이 나타난 것 같군요.」

이것을 주기 위해서만 여기에 온 것은 아니라지만 윤석호는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제 원하시는 부분은 다 들으셨습니까? 그러면 유프와 함께 제주도에서 적당히 노는 척하다 돌아가세요.」

「방금 그런 말을 해 놓고 모른 척하라고? 그 캡슐을 만들라고 한 건 너일지 몰라도 실제로 완성시킨 건 나야! 내가 만든 것에 문제가 생겼다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어?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해!」

데이브의 얼굴에 붉은 열이 올랐다.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역시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윤석호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본사에서 이사파들이 눈을 새빨갛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서울에 와서 절 돕기라도 하실 겁니까?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이죠.」

「애초에 당신이 운영자 캡슐로 생긴 문제를 인식했을 때부터 내게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좀 더 빨리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때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당신은 최대한 저희가 하는 일을 모르는 채로 남는 쪽이 도움이 됩니다. 제가 왜 실장님의 생존 소식을 당신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알렸다고 생각합니까?」

데이브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THE MIST의 핵심 기술 개발자였다. 진짜 핵심 기술을 개발한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장제천의 아버지 장대성이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결과로 정돈하여 만들어낸 것은 데이브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현재 모조리 감시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사파들은 특히나 그를 당장 다른 의료 개발 쪽으로 밀어 넣고 THE MIST의 접속기기 따위보다 더 대단한 것을 만들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가 회장의 손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 그렇게 되었으리라.

그는 제 할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어려워하지만, 결국 회장은 아내와 외아들 부부를 잃고 남겨진 하나뿐인 손자를 어쩔 수 없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것이 늙은 호랑이 나름대로의 방식이라 문제이지만 데이브는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회장의 남모를 비호 아래 의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혼자서 대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거야? 당신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선 나보다 잘 해결하지 못하잖아. 그렇다고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윤석호는 문득 어떤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윤석호의 문제는 최초의 캡슐 설계와 연구에 대한 정보가 잠들어 있을 슈퍼컴퓨터 THE MIST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권한이 있었더라면 보다 쉽게 특수 캡슐을 개발할 수 있었을 테고, 이 사태의 답을 알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었다.

권한만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물리적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 뒤라 애초에 그것을 뒤져 볼 방법을 생각하지조차 못한 상태였는데, 만약 그 부분을 대신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군요. 괜찮은 생각이네요.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어요.」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하겠다니까!」

「이 문제의 답을 찾으려면 이제 두 가지 방법뿐입니다. 하나는 ReL 프로젝트 당사자들의 몸 상태를 의학적으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제천 실장님 외에 아무도 뚫지 못하도록 설정된 벽을 강제로 해킹한 뒤 슈퍼컴퓨터 THE MIST 내부에 있을 최초의 실험 데이터와 정보를 뒤져 여태까지 모아 온 프로젝트 결과와 대입하는 겁니다. 당신은 그중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데이브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뿐이었고, 그는 곧 자신도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해킹을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위험 부담을 질 정도는 아니다. 윤석호는 곧바로 그의 말을 무시한 뒤 비밀 포트 연락을 끊어버렸다.

날뛰는 데이브를 유프에게 잘 막아 달라고 부탁한 뒤 윤석호가 찾은 것은 얼마 전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조사했었던 한 남자에 대한 정보가 담긴 파일이었다.

본명 진제환. 프리랜서 해커 및 VT 프로그래머로서의 활동명은 진유완. 게임 THE MIST 속에서는 다크 나이트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완’이란 유저로 활동 중인 그는 윤석호를 간간이 골치 아프게 했던 경쟁사 메이지 소프트의 관련자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언젠가 더 큰 화근이 될지도 모를 이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 둘 요량으로 찾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그 정보가 반대로 윤석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윤석호를 도울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은 백지로 돌아가겠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시도라도 해 보는 쪽이 나았다.

그러나 윤석호가 그에게 먼저 연락하기 전, 예상치 못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쪽에서 먼저 윤석호를 찾아오게 되어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 안에 타는 용암 같은 분노를 가득 품은 그를 이성적으로 되돌려 결국 도움을 받아내기로 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머물고 있다는 리조트는 좀 괜찮습니까? 불편하다면 다른 곳을 수배해 줄 수도 있으니 편히 말씀해 주세요.”

“아니, 난 정말 좋아. 이게 언제 느낀 평화인지 모르겠어. 우린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휴가를 다녀온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유프는 아늑해 보이는 마사지 침대에 누운 채 화려한 칵테일 한 잔을 옆에 놓고 씩 웃었다.

“윤, 나보다 널 걱정해. 잠은 좀 자고 있는 거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인걸.”

“제가 말입니까? 당신에게 그런 말을 다 듣다니 반성해야겠군요.”

“진심이야. 데이브 정도는 내가 잘 막을 수 있으니까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은 자면서 일을 해. 복수도 좋지만 몸 상태가 망하면 전부 꽝이라고.”

유프 카윗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기 힘든 괴짜이지만 의외로 상식적이고 주변 사람을 챙기는 다정한 남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데이브는 아마 진작 영양실조로 백 번 정도는 실려 갔을 것이라고 모두 말하고는 했다.

사실 그를 시나리오 담당으로서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윤석호의 공이 컸기에 윤석호는 늘 그에게 미약한 미안함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오랫동안 숨겨 왔던 장제천에 대한 윤석호의 마음을 눈치챈 거의 유일한 팀원임을 상기하면 완전히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없기도 했다.

어딘가에 떠벌릴 성격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그는 너무 눈치가 빨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늘은 이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좀 눈을 붙여 보도록 하죠.”

이따가 갈 곳도 있고, 하는 말을 삼키며 중얼거리자 유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러면 난 이만 끌게. 혹시 우릴 호출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쪽으로 전화하고.”

그 외에도 몇 마디 잔소리 같은 걱정을 중얼거리던 유프가 잠시 후 전화를 끊었다. 얼마 전 한국에 왔을 때에 장제천을 본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요즘 들어 걱정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후우.’

윤석호는 조용해진 사무실을 둘러보다 들리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조금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곧바로 강무헌 씨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 다음은 방금 건네받은 논문을 읽고… 내일 회의 자료를 체크하고…… 그 다음에는….’

쉬겠다고 말했지만 눈을 잠시 감고 있어도 그 다음에 할 일들이 계속해서 머리에 줄을 이어 떠올랐다. 과연 언제쯤이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쉴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겠지. 윤석호는 지금도 병원에서 홀로 잠들어 있을 장제천을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를, 눈동자를 보지 못한 지도 어느새 연 단위가 넘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15년을 넘게 매일같이 보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억이 휘발되는 속도는 쏜살같이 빨라서, 이제는 일부러 떠올리려 노력할 때가 아니면 그가 있었을 때 어땠었는지가 때때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일어나 이 상황을 보신다면 제게 무어라 말하셨을지.

윤석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난히도 피곤한 하루였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다.

진제환과 인사를 나누지도 못한 채 돌아가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지만 그 외에는 어쩐지 놀랄 만큼 기분이 침착했고 머릿속도 명확했다. 오른쪽 다리를 슬쩍 꼬집었을 때 아직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 침착함은 완전히 절정에 달해 있었다.

“무헌아.”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신정석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내 상태를 꼼꼼히 살핀 뒤 짧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니?”

“괜찮습니다.”

“그래. 그러면 바로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하마.”

그가 품속에서 꺼낸 펜 모양의 도구를 달칵 누르자 그에 반응하여 눈앞에 홀로그램 차트 화면이 휙 떠올랐다.

“일단 어제 넘어지면서 입은 타박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아. 관절이 살짝 비틀어지면서 무릎 주변이 조금 부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란다. 문제는 네가 전혀 근육을 사용하지 못하고 감각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인데…….”

신정석 의사가 펜을 쥐고 허공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어 다리 모양의 그림이 나타났다. 나는 지금껏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오면서 저 그림을 정말 많이 보았다.

분명 일주일 전에는 유의미하게 늘어나 있지 않았던 회색 부분들. 무릎을 중심으로 약간 퍼져 있을 뿐이었던 그것이 지금은 오른쪽 다리 거의 전체에 걸쳐 짙은 회색이 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현재 네 우측 다리의 상태는 이렇단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의 네 근육량이나 신경, 뼈 등에는 문제가 없어. 오히려 일주일 사이 변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근육량이나 다른 부분들이 좋아지기까지 했지. 수치만 보면 왼쪽 다리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말이다.”

그가 화면을 꾹 눌러 옆으로 이동시키자 사람의 전신 모양으로 생긴 그림이 옆에 하나 새로 나타났다. 그 그림 속 두 다리는 거의 비슷한 색과 수치를 가진 그래프로 덮여 있었다.

그가 그 이후에도 무어라 설명을 했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와 이해된 것은 아주 간결하고 짧았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변화가 없는데 아무 이유 없이 제가 인지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는 거군요.”

“현재로서는 뇌의 인식 부분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된단다. 내일 다시 뇌 정밀검사를 해 보고 나서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신정석 의사가 하는 말들을 신중히 들었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열심히 말을 한 뒤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말렴. 꼭 원인을 알아낼 테니까.”

“네.”

내 대답을 들은 신정석 의사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다시 미소를 되찾은 뒤 병실을 나갔다.

‘결론은 뇌의 문제로 추정될 뿐 원인 미상이란 건가…….’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나 나무토막처럼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게 뇌의 문제일 뿐, 사실은 아무 문제도 없다니.

이런 다리로는 목발을 쓰기도 어려우니 하는 수 없이 휠체어를 타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밖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냥 오늘 하루는 조용히 안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휴대폰만은 챙겨 가져온 덕분에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사부님과 사모님께는 지나친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 갑작스럽지만 병원에서 검진을 좀 한 뒤 컨디션 조절을 위해 며칠 쉬고 싶다는 연락을 드렸고, 민후에게는 오늘은 미스트에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웬만하면 나를 기다리지 말고 할 일을 먼저 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진제환에게는 한참 망설이다 어제는 잘 들어갔느냐는 한마디를 써서 송신했다. 그러자마자 휴대폰 화면이 밝게 빛나며 음성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발신자는 진제환이었다.

“…여보세요?”

당혹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면서 먼저 입을 열자 전화 너머에서 시끄러운 바람 소리와 차가 달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진제환은 지금 어딘가에서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모양이었다.

[ 나는 괜찮아. 오늘 몸은 어때. ]

그 말이 내가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이라는 걸 알고 나니 뭔가 급한 용무라도 있어서 바로 전화를 건 것인가 생각했던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나는 긴장을 풀고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아 스피커 모드로 바꾸었다.

“나도 괜찮아.”

[ 검사 결과는… 나온 건가? ]

“응. 다리에는 이상이 없어.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라 내일 또 검사를 해야 하지만 뭐…….”

그래도 일단 다리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니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행은 다행이다. 그런 뜻을 담아 중얼거리자 진제환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바로 가져다줄 테니까. ]

“괜찮아. 이젠 여기도 집 같은 수준이니까.”

너무 집 같다 못해서 따로 준비한 물건 없이 입원을 했음에도 전혀 긴장감이 들지 않을 만큼 말이다. 나는 병원 매점에서 파는 물건 품목이나 입원 환자의 케어를 담당하는 사람들과의 연락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사람 중 하나였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런 곳에서 대충 마련하면 될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윤석호 지부장한테는 어떻게…….”

나 대신 연락을 하는 데 성공했느냐는 뜻을 담아 말끝을 흐리자 진제환이 잠시 후 “만났어.” 하고 대답했다.

“그래……. 직접 찾아간 건 아니지 설마?”

농담을 담아 묻자 진제환이 웃었는지 작게 픽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화상 전화를 자주 써서 음성 전화로만 대화할 일은 거의 없는데, 음성 전화에는 상대의 작은 목소리에도 집중하게 하는 나름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제대로 VT포트를 통해서 만났으니 걱정 마. 그리고 그 사람과 나눈 대화에 대한 부분은……. ]

진제환이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조용해졌다.

[ 스스로 너를 찾아가 설명하고 싶다고 해서 입원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아마 오늘 찾아갈 것 같으니 너무 놀라지 말도록 해. ]

윤석호가 또 나를 찾아온다고? 상황의 심각함과는 별개로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쪽이 낫기는 할 듯했다.

“알겠어. 나 대신 연락해 줘서 고마워.”

[ 네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

부드럽게 대답한 진제환이 잠시 후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내일부터는 할 일이 생겨서 며칠간 낮에는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연락할 일이 있다면 메시지로 남겨 줘. ]

“일?”

[ 본업. ]

본업이라면 컴퓨터와 관련된 일인가……. 나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응. 사부님과 사모님께는 내가 며칠 컨디션 난조로 쉴 거라고 했으니 나중에 검도장에 갔을 때 말 좀 맞춰 줘.”

가벼운 부탁인 척했지만 사실 그다지 가벼운 마음으로 한 부탁이 아님을 진제환도 느꼈는지 진중하게 그렇게 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진제환의 전화를 끊고 그사이 도착한 메시지 답들을 살폈다.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는 몸이 많이 안 좋으면 부르라는 말씀을, 그리고 민후에게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걱정은 말고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달라는 다정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것을 보며 피식 웃는 순간 병실과 연결된 컴퓨터가 작게 알림 소리를 내며 환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 현재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예보에 의하면 내일 아침까지 비가 계속될 예정이니 옥상이나 산책로의 출입을 되도록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갑작스레 몸에 이상을 느끼셨을 때는……. ]

내 병실은 나처럼 바깥 환경에 예민한 몸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1인실로, 굳이 창을 열지 않는 이상 기온이나 날씨 차를 거의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며 보통은 창을 전혀 열지 않아도 자연광에 가까운 조명과 자연 바람에 가까운 환기 시설을 통해 편히 쉴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나는 그 메시지를 볼 때까지 비가 오는 줄도 몰랐다.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조작해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를 움직여 보자 과연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지 모를 빗소리가 창틀을 후두두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원래는 순식간에 무릎이 아프거나 몸 상태가 나빠졌어야 했을 텐데, 지금은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어서인지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아서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리 감각이 없으니 아예 비가 와도 느낄 수가 없나 보군. 언제나 바랐던 일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되다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잠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비바람에 두들겨 맞는 나무들을 보다 도로 블라인드를 내렸다. 아무리 아무 감각이 없다 해도 역시 비는 싫었다.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간호사인가 했으나 소리 없이 문을 열며 등장한 것은 단정한 사복 위에 모자를 쓴 윤석호였다.

“안녕하세요, 강무헌 씨. 몸 상태는 좀 어떠신지요.”

“아…….”

나는 그에게 인사를 바로 답해 주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놀랐다. 윤석호는 여태까지 보아 왔던 빈틈 하나 없는 정장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옷 곳곳이 빗물로 젖은 데다 앞머리칼도 넘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상태여서 이미지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런. 제가 사복을 입어서 못 알아보셨나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남의 시선이나 미행을 피하려면 이런 전통적인 방법이 의외로 잘 먹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진짜로 나도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인가 했었으니 신빙성이 아주 없는 말은 아닌 듯했다. 많이 쳐 줘도 20대 후반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얼굴 위로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만이 그나마 이전의 윤석호와 제일 똑같아 보였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쉰 뒤 그에게 눈짓을 해 앞에 있는 의자에 앉도록 했다.

“앉으십시오. 고개가 아프니까요.”

“감사합니다.”

윤석호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가 내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갑작스럽게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검사는 해 보셨습니까?”

“당연히 했습니다. 다리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제 뇌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하더군요. 자세한 건 내일 뇌 검사를 다시 해 볼 예정입니다.”

“뇌……. 그렇군요.”

윤석호는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따라 되뇌었다.

“저는 그동안 강무헌 씨의 말을 듣고 나서 계속해서 캡슐 설계 부분에 제가 놓친 어떤 부분이 있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직까지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결론이 난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는 뭐냐. 그런 뜻을 담아 쳐다보자 윤석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워졌다.

“조사 결과 강무헌 씨 이외에도 모든 특수 캡슐 사용 유저분들께서 현재 어떤 이유로든 접속이 불가능할 정도의 컨디션 난조를 겪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입니까?”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물어보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입니다.”

“총 몇 명이나 되는데 그런 겁니까.”

“강무헌 씨까지 총 열 분입니다. 그중 강무헌 씨처럼 입원해 계신 분이 세 분, 게임을 접속하기 힘들 정도의 컨디션 난조가 여섯 분, 컨디션 난조로 인해 한국을 떠나 장기 요양을 가신 분이 한 분입니다.”

“그렇다는 건…….”

말을 하는 동안 손끝이 차가워지고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캡슐이……?”

“지부장으로서, 그리고 개발자로서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음에도 아직도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질타를 받을 일이고, 사과를 드려야 할 이유가 충분하겠지요.”

그렇게 말한 뒤 윤석호는 잠시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속내 모를 가면 같은 미소 대신 나는 그의 얼굴에 피로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과연 제 말이 강무헌 씨에게 얼마나 신뢰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상황을 원했거나 예측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것만은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반드시 원인을, 그리고 해결책을 알아내어 제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지금 겪고 계신 불안과 깨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압니다. 분명히 원인과 결과를 밝힌 뒤 원하시는 방향에 따라 어떤 사죄든 하겠습니다.”

윤석호가 조용히 내뱉은 그 말이 내 가슴속에 커다란 파문으로 번졌다. 그의 말대로 그가 이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는 것도, 시간을 주면 해결하겠다는 말도 나는 완전히 믿기가 힘들었다. 만약 정말 캡슐이 내 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맞다면, 사과를 한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을 대체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눈앞에 보이는 살풍경한 병원 풍경에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결코 내 집과 같아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저는 여전히 저희가 만든 캡슐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믿습니다만, 눈앞의 결과가 제 생각만 믿고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강무헌 씨를 포함한 열 분의 특수 캡슐 사용자분들께 모두 연락을 드려 상황을 알려드렸고,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이 이상의 게임 접속은 자제할 것을 부탁드린 참입니다. 캡슐 또한 모두 수거했습니다.”

캡슐을 모두 수거했다는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윤석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강무헌 씨께 드렸던 휴대용 접속기기뿐입니다.”

“…수거해 가면 언제 다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내 말에 윤석호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모든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캡슐과 접속기기가 사용자의 육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 될 겁니다. 만약 정말 그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면 고치는 방법을 찾은 뒤가 되겠지요.”

맞는 말이다.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끝내는 데에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한 달?

그러면 이제야 겨우 모든 퀘스트를 마친 카프로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제야 겨우 승조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그곳에 없다면 승조는…….

“…….”

나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내가 이것을 보면서도 오늘 내내 침착했던 것은 바로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이런 순간 이런 일이 찾아온 것일까.

나는 미스트를 잃은 채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멍하니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윤석호는 가만히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역시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하고만 있자 드디어 윤석호가 먼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해합니다. 한창 중요한 시기이셨으니 지금 당장 끝내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시겠지요.”

“…….”

“사실은 다른 캡슐 사용자분들도 모두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언제쯤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지, 언제까지 게임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몸 상태만 괜찮다면 다들 미스트로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아예 캡슐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말입니다. 믿을 수가 없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 윤석호가 내 질문을 듣고 묘한 얼굴을 한다 싶었던 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가 싶었다.

“그분들이 하나같이 하셨던 말씀 중, 미스트는 이미 본인의 또 다른 삶이자 구원이 되었기에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결코 놓을 수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강무헌 씨에게도… 그렇습니까?”

또 다른 삶이자 구원.

나는 신정석 의사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윤석호에게 그 말을 했을 이들의 심경을 고통스러울 만큼 공감할 수 있었다.

윤석호의 앞에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네.”

“…영광이군요.”

윤석호가 소리 없이 눈을 휘어 웃었다.

“여러분들께서 일반 유저들보다 게임에 대한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계산하여 만들어진 프로젝트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제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가 될 줄은…….”

“프로젝트……? 단순히 판매한 게 아닙니까?”

듣던 중 갑자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 반문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드리려 했는데 늦어졌군요. THE MIST의 특수 캡슐은 처음부터 아무에게나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용 기기와 달리 그것은 오픈을 몇 달 앞두고 조금 급하게 생산 계획이 잡힌 탓에 만들어진 기기의 수가 아주 적었죠. 사용자 개개인에게 맞춰야 하는 특성상 대량 생산도 어려웠기 때문에, 저는 처음부터 그것을 대대적으로 판매하기보다는 가장 기기 사용에 적합한 상대라 판단되는 분들부터 사용하도록 하여 결과를 보고 생산량을 차차 늘려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개발자이자 무슨 일이 생겨도 가장 기민한 대응이 가능한 제가 있는 나라에서 우선적으로 판매를 시작하되, 대상을 철저히 고르고 사용하는 동안의 추이를 1년간 관찰하여 결과를 정리한다. 그것이 제가 진행해 온 특수 캡슐 프로젝트의 초안이었습니다.”

1년. 그 숫자를 입 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결과라는 건, 무슨 결과를 말하는 겁니까.”

“그 캡슐을 사용한 유저의 육체적 회복 변화 추이에 대한 것입니다.”

윤석호가 하는 말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웠다.

캡슐을 사용한 유저의 육체적 회복 변화 추이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의미심장한 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회복 변화 추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특수 캡슐을 오래 사용할수록 사용자의 육체에 근육 및 신진대사의 유의미한 활성화 및 회복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는 뜻입니다.”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캡슐을 오래 사용할수록 근육과 신진대사가 회복되는 기능이 있었다는 겁니까?”

“그럴 거라 예측하고 만들었습니다. 테스트를 할 때에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죠. 근육과 신진대사의 회복이라고 해 보아야, 평소보다 기력이 솟고 피로가 빨리 회복되며 운동을 한 것처럼 근육이 좀 단단해지는 효과가 나타나는 정도이긴 합니다만.”

“단순히 그냥 게임만 할 수 있게 만든 게 아닙니까? 왜 그런 기능을…….”

“그것이 바로 몸이 불편한 분들도 게임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의 핵심 기술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 나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최악의 경우 접속이 안 되거나, 아니면 신진대사 활성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정도를 예상했었죠. 혹시나 하여 관련된 사항을 다른 특수 캡슐 사용자분들의 사용 약관에는 적어두었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강무헌 씨만은 정식으로 캡슐을 구매하신 분이 아니라서…….”

물론 직접적으로 적어둔 것은 아닙니다만, 하고 윤석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곧 1년이 지날 테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고 생산량을 좀 더 늘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문득 윤석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그의 VT포트로 찾아간 나에게 돈도 받지 않고 캡슐을 선물로 보내주었던 그의 얼굴. 나만이 약관에 대해 몰랐던 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캡슐을 주었던 것일까.

“저에게 캡슐을 주었던 것도 그러면 그… 프로젝트 때문이었습니까?”

“글쎄요. 말하자면 전후 관계가 반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강무헌 씨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강무헌 씨를 예전에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날 본 적이 있다고? 언제 말인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표정을 찌푸리자 윤석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때의 경험이 한창 막혀 있던 THE MIST의 개발을 다시 지속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개인적으로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 분이 저를 찾아오셨단 걸 깨달았을 때, 기념 삼아 몰래 선물 하나 정도는 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고요.”

“저는 전혀… 기억이…… 아, 혹시 몇 년 전에 제가 다니던 검도장 앞에서 찍혔던 그 사진이 그것과 관련된 겁니까?”

나는 몇 달 전 지나가던 길에 깡패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사진을 떠올렸다. 그걸 처음 봤을 때는 그 사진으로 인해 내가 당한 일 쪽에 더 집중하느라 윤석호가 그때 왜 찾아왔었는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넘어갔었는데. ‘설마…….’

“기억해 내시지 않는 쪽이 나을 거라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늦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그러면 그가 나에게 캡슐을 주고 이리저리 편의를 봐 주었던 것은 그냥… 정말로 단순히 일방적인 호의에 의한 것뿐이었단 뜻인가. 언제나 수상한 꿍꿍이가 있어 보여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었던 데 반해 그쪽은 진심으로 나에게 줄곧 호의를 보였단 것이 놀라웠으나, 새삼스레 내가 왜 여기에 입원해 있게 되었던가 하는 것을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꿍꿍이가 있었던 것도 맞긴 했군.’

오픈 몇 달 전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특수 캡슐. 까다롭게 골랐다는 구매자. 그들을 한 명 한 명 관리해 온 듯한 윤석호. 한 나라의 지부장이란 위치를 가진 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이 캡슐을 만들기로 한 이유는 뭐고, 프로젝트는 왜 하게 된 것이지?

“윤석호 씨.”

“네.”

“왜 그런 일들을 해야 했는지 물어보면 말씀해 주실 겁니까.”

윤석호는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밤이라 희미하게 가라앉은 불빛이 그가 쓴 허름한 캡모자와 검은 머리칼, 꼿꼿한 등, 흰 얼굴을 비추었다. 어디를 보아도 누구나 잘생겼음을 인정할 미남이었지만 나는 그가 어쩐지 몹시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당연히 궁금합니다.”

너라면 몸 상태가 이 모양이 되었는데 궁금하지 않겠느냐 하는 뜻을 담아 짧게 대꾸해 주자 윤석호가 피로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라고는 해도 고작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린 것뿐이라 그다지 웃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런 순간조차 억지로라도 웃고자 하는 그 프로 근성에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뭐, 저의 개인적 사정도 약간 포함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강무헌 씨라면 듣고 나서도 절 생각해 다른 곳에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조금 방심했다고 곧바로 친한 척을 하다니.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되는 성격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다른 데다 말할 만한 상대도 없긴 했지만 짜증이 나 한마디 쏘아붙이자 내 생각 따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윤석호가 후후 하는 소리를 낮게 흘렸다.

“예. 제가 또 불쾌하게 해 드린 모양이군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도로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기분이 나쁘시다면 그냥 이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윤석호의 흠뻑 젖은 옷자락 끝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다 마르지 않은 그 옷을 보면 이 날씨에 그가 얼마나 급히 달려왔을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병실 안의 공기와 습도는 훈훈한 편이었지만 바깥은 영하의 날씨다. 얼음 같은 비를 맞으며 도착했으니 아마 지금도 뼈가 시릴 만큼 추울 터였다. 그래도 그런 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윤석호는 역시 독한 너구리였다.

“…앉으십시오.”

나는 결국 내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윤석호는 잘생긴 눈을 한껏 접어 싱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강무헌 씨의 그런 면을 제가 참 좋아합니다.”

“지금이라도 도로 나가라고 할까요.”

“아뇨, 아닙니다. 하하.”

윤석호가 내 곁에 앉았다. 그에게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젖은 비 냄새와 냉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조금 차가워졌다. 겨울, 그리고 비. 역시 어느 쪽이든 나는 그것들이 참 싫었다.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윤석호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선은 내 다리를 감싼 침대 시트 쪽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지 알 수 없을 먼 곳을 한참이나 헤매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어쨌든 대답을 해 준다고 했으니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는 관대하게 기다려 줄 셈이었다.

“…THE MIST의 캡슐은, 본디 게임용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시작했다.

“어느 천재 학자가 어떤 목적으로 개발하던 도중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죠. 그런데 게임 개발자가 꿈이었던 그의 아들이 유품 정리 도중 그걸 발견하고는, 문득 그걸로 게임을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THE MIST의 시작입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윤석호의 이야기는 간단하면서도 알아듣기 쉽도록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랜 세월을 들여 힘들게 개발한 게임이 완성을 거의 앞두고 총 개발실장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중단될 뻔했던 것, 그로 인하여 윤석호가 상부와 거래를 해야 했다는 것까지 그는 대부분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THE MIST의 접속 캡슐에 쓰인 기술을 단순히 게임 접속기 따위로만 쓸 수 없다는 주장을 꺾을 순 없었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THE MIST를 완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특수 캡슐을 따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책임지기로 하고 한국 지부에 부임하여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전까지 단순히 개발팀 일원이었을 뿐인 그가 단숨에 한 나라의 지부 전체를 책임지는 지부장이 되다니. 엄청난 낙하산 인사가 아닌가. 뭔가 윤석호가 새롭게 보이는 기분이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 맨 처음에 개발했던 사람의 아들이 윤석호 씨입니까?”

“아뇨. 저는 그분의 그냥 학교 후배였습니다. 그분이 총 개발실장이 되셨죠.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윤석호의 눈빛이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부드럽게 누그러졌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저 능구렁이 같은 남자에게도 순수한 학생 시절이 있었을까 싶었지만 뭐 나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과 지금은 천지 차이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러면 결국 윤석호 씨가 그렇게 급히 캡슐을 만들고 이 모든 일들을 해야 했던 건 결국 전부 그… 사고를 당하셨다는 총 개발실장이라는 분 때문이란 거군요.”

이야기를 듣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결론이 좀 이상하시군요. 보통은 THE MIST를 위해 했다고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의 완성만을 위해 했다기엔 윤석호가 그 사람을 언급하던 때마다 지었던 눈빛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결국 윤석호가 THE MIST의 개발에 참여하게 된 것도, 앞으로 나서서 지부장이 된 것도 그 사람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뭐,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윤석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윤석호의 누군가를 향한 가감 없이 순수한 웃음이었다.

‘정말로 존경하는 사람이었나 보군.’

나는 문득 그 총 개발실장이라는 사람이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좀 궁금해졌다. 죽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은 걸 보면 살아 있는 게 맞겠지만 앞으로 나서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 이후 은퇴라도 한 것일까.

“이제 강무헌 씨께서 원하셨던 것에 대한 답은 전부 드렸습니다. 제가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끝이 되어 가는군요.”

손목시계를 흘긋 본 윤석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무헌 씨께 드린 접속기기는 어떻게 수거해 가면 되겠습니까?”

윤석호에게 캡슐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 순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그리고 카프로스는…….

“강무헌 씨. 그곳에 기록된 접속 로그와 바이오 기록 같은 것들을 보아야 저희가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영원히 접속하시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니 부디 몸 상태를 먼저 생각해 주세요.”

윤석호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를 평소라면 기분 나빠 했겠지만 지금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결국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차피 그 접속기기를 주지 않는다 해도 몸 상태가 이렇게 된 이상 한동안 쓸 수 없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냥 최대한 일이 빨리 해결될 것이라 믿고 넘기는 쪽이 어느 모로 보나 낫겠지…….

“제가 머물던 곳에 있으니 새턴 쪽으로 보내라고 부탁해 두겠습니다.”

아마 진제환에게 부탁해야 하겠지만 그것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윤석호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하다면 최대한 빨리 원인을 분명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누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 중얼거리자 윤석호가 머리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강무헌 씨께서는 뇌 검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비밀 포트를 통해 연락하시면 될 겁니다.”

“……네.”

윤석호는 왔을 때처럼 조용히 떠나갔다.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불을 껐다. 병실에 혼자 있는 것에는 지겨울 만큼 익숙한데도, 오늘따라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내일부터 나는 미스트에 접속할 수 없는 것이다.

‘……퀘스트라도 다 끝내 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일 미리 연락을 해 두어야겠다. 왜 갑자기 접속할 수 없게 된 것이냐고 물으면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한숨을 담은 채 밤이 깊어 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서버실 방문.”

진제환은 제 앞에 선 로봇을 향해 간단히 목적을 밝혔다. 붉은빛을 쏘아 진제환의 얼굴을 판별한 로봇이 잠시 후 맑은 소리를 내며 통과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띄웠다.

“환영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새턴 본사 건물은 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선 두 개의 건물 사이로 사다리 게임처럼 생긴 복도가 몇 개의 층에 걸쳐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그중 하나는 의료부가 쓰는 건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게임부가 쓰는 건물이었는데, 조용한 의료부와는 달리 게임부에는 쉴 새 없이 사람이 드나들었기에 모자로 깊숙이 얼굴을 가리고 안경을 쓴 진제환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제환은 거침없이 1층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VT수첩과 연결된 특수 안경 위로 목적지로 가기 위한 최적의 루트와 건물 구조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안경을 쓴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정보로, 일을 할 때 보조 용도로 쓰기에 좋았으므로 진제환은 그것을 자주 쓰고는 했다.

3층에 있었던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1층에 도착했다. 진제환은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하 3층을 눌렀다. 그곳에는 주차장 이외에 서버실밖에 없는 곳이었다.

“잠깐만요.”

막 문이 닫히려던 순간,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버튼을 눌러 도로 문을 열었다. 190에 육박하는 진제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장신에 붉은 머리칼이 눈에 띄는 강렬한 인상의 남자였다. 진제환은 그의 목에 걸린 것이 새턴 전자사원증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운영 1팀 권천우라고 쓰여 있는 글씨가 각도에 따라 반투명하게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름은 낯설지만 얼굴은 어쩐지 낯이 익다. 진제환은 그를 어디서 보았었는지 기억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음?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재빨리 올라탄 남자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진제환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어디서…… 아!”

남자가 탄성을 지른 순간 진제환 또한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하하. 이거야 원. 게임 속에서 봤던 상대를 현실에서 다 보네요.”

그는 며칠 전 게임 속에서 보았던 페일 나이츠의 부길드마스터, 요거트였다.

“설마 당신도 새턴 직원인가요? 이런 우연이 다.”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진제환의 입장에서는 귀찮기 그지없는 상대였지만 남자는 매우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댔다.

“유난히 잘생긴 분이라 바로 기억이 나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말 당신 같은 직원이 있었다면 지나가다 한 번만 봤어도 제가 바로 기억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냥 단순히 방문만 하신 건가요? 아니면…….”

거기까지 들었을 때 문이 열렸다. 진제환은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잠깐. 잠깐 기다려요. 이렇게 본 것도 인연인데 잠시 이야기 좀 하고 가지 그래요?”

그러나 남자는 자신도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계속해서 진제환을 쫓아왔다. 등 뒤에서 노골적으로 찔러 보려는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거침없이 걸어 복도를 꺾자 주차장과 반대쪽 방향에 서버실이라 쓰여 있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미리 윤석호에게 언질을 받았을 경비원이 한 명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진제환이 그저 평범한 서버 수리공이라 검사를 위해 방문한 줄 알고 있는 상태로, 경비원을 지나친 뒤에는 수많은 전자 보안으로 감싸인 서버실을 단신으로 들어가야 했다.

목표가 있는 곳까지 향하기 위한 최적의 루트 및 정보는 어제 윤석호가 보낸 논문 파일 속에 비밀 메시지로 짧게 첨부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용의주도한 남자였다.

“당신, 지금 설마 저 서버실로 들어가려는 건가요?”

붉은 머리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제환의 뒤에서 노골적으로 웃음기 띤 목소리를 흘렸다. 아주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안은 나조차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인데……. 대체 뭐 하러 온 거예요? 허락을 받긴 한 거죠? 누가 당신을 불렀습니까? 그 정돈 말해줄 수 있지 않나요?”

진제환은 드디어 서버실의 닫힌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자 남자 또한 덩달아 등 뒤에서 멈추는 기색이 느껴졌다. 진제환은 고개만 돌려 그를 본 뒤 짤막하게 한마디만을 말했다.

“서버 수리공.”

“……응?”

“입니다. 그러면 이만.”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고 눈앞의 남자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곧바로 바깥의 소리가 전부 차단되었다.

귀찮은 남자와 마주친 것 같지만, 설마 일을 모두 끝내고 나올 때까지 그가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제환은 그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안을 향해 걸어갔다. 약간 졸린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두드리고 있던 경비 차림의 직원 한 명이 진제환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서버 수리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아, 아아. 그러고 보니 두 시에 온다고 했었죠.”

남자의 눈길이 진제환의 얼굴에서 손에 든 평범한 가방까지 죽 내려왔다. 되도록 평범한 서버 수리공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진제환은 몇 가지 도구가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제일 중요한 물건은 작은 VT수첩뿐이었다. 침묵 속에서 방문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홀로그램 화면을 몇 번 두드리기를 반복한 뒤 그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진제환에게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1분도 안 늦고 정확하게 오셨네요. 들어가세요.”

진제환은 그를 지나 새로운 철문 앞에 섰다. 방문 승인 허가가 나면서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쏘아져 날아온 푸른빛이 전신을 한 번 더 훑었다. 실로 철저한 보안이었다.

진제환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서버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안은 생각보다 서늘했다. 조명이 어둑했지만 걸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으로 머리 위에서 조명이 더 켜지며 아래를 환하게 밝혔다.

2층으로 된 공간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서버들이었다. 족히 2미터는 넘을 법한 거대한 기계가 일렬로 끝도 없이 정렬되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으나 진제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천장까지 서버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곳의 중앙에 놓여 있는 테이블 하나. 의자가 없이 선 채로 쓸 수 있게끔 되어 있는 스탠딩식 테이블 위에 오래된 모니터와 수동식 키보드가 하나 놓여 있었다. 흠집 가득하고 촌스러운 구식 모니터에 변색된 키보드까지, 무엇 하나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꾀죄죄한 생김새였으나 그 덕에 오히려 그것들은 이 공간 안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진제환은 천천히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화면이 검게 꺼져 있는 모니터는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누군가 버리고 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진제환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평범해 보이는 테이블 위와 아래, 바닥에 미세하게 그려진 홈, 모두 같은 모양의 타일로 덮인 천장에 숨겨져 있는 작은 구멍들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인식조차 할 수 없겠지만 저 컴퓨터 하나를 중심으로 이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보안 시설이 지금 이곳에 숨죽이고 있었다. 만약 제대로 보안 인가를 받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이 공간 안에 갇혔으리라.

“…….”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은 진제환은 그 안에서 VT수첩을 꺼냈다. 모니터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낡은 전원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조금 밝아졌다.

삑. 삐비빅. 삑. 삑…… 삐-

마침내 검은 화면이 사라지고 흰 화면이 나타났다. 진제환은 그 안에서 반짝이는 커서를 보다 천천히 손을 키보드에 올렸다.

단순한 명령어 몇 줄이 이내 화면에 나타났다. 그러나 엔터를 쳐도 컴퓨터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다음에 쓴 명령어도, 또 그 다음에 쓴 명령어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제환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지고 온 VT수첩을 열었다. 강제로 이 컴퓨터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 과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만큼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일 수는 없다.

수첩을 두드리는 진제환의 얼굴 위로 복잡하고 작은 홀로그램 창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허용된 시간은 하루에 최대 다섯 시간 정도. 그 안에 무엇이든 유의미한 결과를 뽑아내어야만 했다.

입원 이틀째.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 혼자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미스트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나니 마치 삶의 반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미스트를 다시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되고 나니 여러모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전 내내 복잡하기 짝이 없던 정밀 뇌 검사를 하느라 진이 전부 빠져버린 탓에 더 그랬다.

[ 무헌아. 오늘은 접속할 수 있어? ]

그때, 휴대폰이 짧은 수신음과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 창을 띄웠다. 아직 내가 어떤 상황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민후의 메시지를 본 순간 씁쓸한 기분이 차올라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제 언제 다시 들어가게 될지 모르니까… 제대로 어떤 상황인지 알려 줘야겠지.

[ 미안. 한동안은 어려울지도 몰라. ]

[ 왜? ]

[ 입원했거든. ]

곧바로 올 것이라 예상했던 민후의 답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진동과 함께 화상 전화가 왔다는 알림이 울려 퍼졌다.

[ 갑자기 입원이라니, 무슨 소리야? 설마 또 전처럼……! ]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다급하게 외치는 민후를 향해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 거 아냐.”

아무래도 민후의 머릿속에서 이전에 내가 괴한들에게 두들겨 맞고 입원했던 일이 너무 크게 남은 모양이었다. 그런 일로 입원한 건 인생에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냥…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져서 입원했어. 나아지면 돌아갈 거지만 언제쯤이 될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 언제 나아질지 모른다는 거야?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 건데? 아니다. 내가 그냥 지금 갈게! ]

민후가 휴대폰을 든 채 벌떡 일어났는지 화면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민후의 뒤쪽에서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정민후! 이 자식, 하던 일은 다 하고 가야지. 이 바쁜 시기에 과대가 가긴 어딜 가! ]

[ 미안. 너희들끼리 좀 하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

화면이 쉴 새 없이 출렁대는 통에 약간 멀미가 날 것 같아 눈을 흐리게 하고 잠깐 먼 곳을 보고 있는 사이, 겨우 밖으로 빠져나왔는지 다시 민후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민후는 겉옷을 입은 채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 무헌아. 어느 병원이야? ]

음……. 괜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미 나오는 것을 봐 버린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타이밍은 한참 지나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병원 이름과 호수를 말했다. 이전에도 와 본 적이 있었던 민후가 잠시 멈칫하고는 곧 가겠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말로 30분쯤 뒤, 민후가 내 병실에 도착했다.

“무헌아. 아니 이게…….”

민후가 들어서자마자 말을 잃고 나를 보았다. 나는 민후가 어디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대체!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닌데…….”

뭐 비슷하긴 한가. 나는 현재 내 오른쪽 다리 전체를 감싸 움직이지 못하도록 받치고 있는 기계를 보았다. 그것은 광택이 나는 흰 플라스틱 같은 것으로 다리 전체를 두껍게 감싼 형태였는데, 옷 위로 착용했음에도 보기와는 달리 바람이 잘 통하는 편이라 갑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기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눈에 잘 띄어서 매우 부담스러웠다.

내가 현재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는데, 오늘 뇌 검사를 마치고 나서부터 달기 시작한 터라 아직까지는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신정석 의사는 내가 다리를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주의하더라도 무의식중에 관절이 상하는 방향으로 다리를 움직이거나, 혹은 상처를 입어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해준 뒤 이 기계를 착용할 것을 권해 주었다. 본래의 다리 움직임을 파악해 최대한 부담이 가지 않도록 유지하는 장치이니 근육과 관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착용하긴 했지만 이 장치가 깁스보다도 훨씬 눈에 띄는 효과가 있다는 걸 예상치 못한 건 불운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그냥… 갑자기 이렇게 됐어.”

“갑자기?”

민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 다리를 내려다보며 곁에 앉았다. 나도 믿기 힘든데 저 녀석은 오죽할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니 더 말할 거리가 없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어서 원인을 찾으려고 입원한 거야. 그래서 나아질 때까지는 미스트에 접속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럴 수가……. 그 녀석도 이걸 알아?”

그 녀석이라면… 진제환을 말하는 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민후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원인을 찾아서 다 나을 거야.”

“……응. 고마워.”

나는 민후에게 캡슐과 관련되어 내 몸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렵게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짓자 민후의 표정이 더욱 안 좋게 변했다. 표정 관리를 너무 못해서 그런가 싶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을 때, 민후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밝게 말을 걸었다.

“무헌아. 그럼 나을 때까진 계속 여기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혼자 뭐 하고 놀아?”

“글쎄…….”

예전에는 주로 책을 봤다. 바로 이전에 입원했던 때에는 휴대용 접속기기를 받아 지루한 시간들을 미스트를 하며 잊을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산책을 했었다.

이번에는 미스트도, 산책도 할 수 없으니 남은 건 책과 병실에 연결되는 VT넷을 통해 세상 소식을 구경하는 것뿐인가 생각하며 말을 흐리자 민후가 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내가 매일 올게. 나랑 놀자.”

“괜찮아. 그렇게까지 안 해도…….”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혼자서 심심한 것보다는 낫지 않아? 물론 나도 학교를 다녀야 하니까 진짜로 매일 오진 못하겠지만, 그 외엔 시간 많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응? 어때? 괜찮지?”

고맙긴 하지만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을 부담스러워서라고 생각한 듯 민후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부담스러운 거면 이틀에 한 번, 아니. 사흘에 한 번 정도로 할까? 오기 전에 연락도 꼭 하고 올게. 나랑 놀면 재밌을 거야.”

지금도 말야, 이거 갖고 왔다고! 하면서 민후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트럼프 카드가 담긴 작은 상자였다.

“나랑 이걸로 원카드 하자. 어때? 재밌겠지?”

나는 그 카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민후의 웃는 얼굴이 너무 밝아서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응? 몰라?”

민후가 잠시 멍하니 내 얼굴을 보다가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 모를 수 있지! 나도 누나들이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야!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한번 해 보자. 간단하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정말일까.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민후는 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침대 옆에 달려 있는 간이 테이블 위에 카드를 죽 펼쳐두었다. 나는 민후가 설명하는 카드게임 룰을 듣고 함께 따라 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었지만 몇 번인가 게임을 반복해 보니 정말로 룰이 간단했고 생각보다 재미도 있었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세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곧 저녁 식사가 올 것임을 알리는 메시지가 내 침대 위에 떠오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민후가 시계를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번 판까지만 할까?”

“…응.”

“그래도 생각보다 재미있었지? 어땠어?”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친구와 놀았던 게 너무 오랜만이라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했다는 것뿐이었다.

“재미있었어.”

고마움을 담아 대답하자 민후가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됐어.”

민후는 카드를 도로 상자에 담아 품속에 넣었다.

“아, 맞아. 무헌아. 우리가 미스트에서 자그레브에 내린 뒤에 접속을 끊었었잖아.”

“응.”

그랬었다. 나는 이블 아이를 이용해 마물들을 조종하여 자그레브에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근처 평야까지 간 뒤에 마지막 접속을 끊었었다.

본래는 거기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예정이었지만 한동안은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난 오늘 먼저 자그레브에 들어갈 거야. 그러고 나서 우리 길드의 길드원 모집을 대대적으로 시작하려고.”

“혼자서?”

그곳으로 향한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는 뜻을 담아 묻자 민후가 씩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혼자는 아니지. 자그레브 안에는 팔튼 형님네 자이언트 길드가 있고, 바깥엔 키온 형님이 있잖아. 키온 형님이랑 같이 들어갈 거야. 그 형님 한 분이면 뭐…… 일당천이니까.”

“형과 합류하기로 한 거구나.”

“응. 사정 설명을 하니까 마침 하고 있던 일이 다 끝났다고 바로 달려와 준다고 하시더라고.”

과연 그렇군. 키온 형이라면 얼굴도 많이 알려져 있고 실력도 출중하니 여러모로 두려울 게 없겠다. 나나 유완과 함께 하는 것보다 길드 홍보라는 측면에서는 형이 더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나도 함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담아 쳐다보자 민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해야 할 일들도 많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낫는 것만 생각해. 아, 그리고 우리의 예상대로 페일 나이츠 놈들이 대도시 워프 포인트를 전부 파괴한 건 맞았는데…… 그 이후의 행보가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응. 파괴만 해 놓고 어딘가 숨어서 다들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 틈을 타고 들어가 길드 모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긴 한데… 아무튼 그놈들이 뭔 생각인진 아직 잘 모르겠네.”

그건 확실히 경계할 만한 점이기는 하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는지 알려면 이쪽에서 먼저 한 번 휘저어 볼 필요성을 느꼈겠지. 아마 그래서 민후가 길드원 모집을 지금 이 타이밍에 해야겠다고 말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민후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대화를 멈춘 것은 내 저녁밥을 담고 굴러온 작은 로봇이 문 앞에 나타났을 때였다.

“아, 그러면 난 이제 갈게. 저녁 잘 먹고 무슨 일 있으면 꼭 바로 연락해 줘! 곧장 날아올 테니까.”

일어나서 눈을 찡긋한 민후가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당장 미스트를 하진 못하더라도 소식은 놓치지 마. 가능하면 미스트 커뮤니티들을 항상 켜 두고 체크하고 있어. 그래야 다시 접속해도 곧바로 우리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알겠어.”

아마도 저 말은 진심이 반, 그리고 심심하게 혼자 있어야 할 나를 배려한 뜻에서 우러나온 것이 반이리라.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후가 만족한 얼굴로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병실에서 떠나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맛없는 병원 밥을 먹으면서도 어쩐지 오늘 아침만큼 울적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진제환은 아직까지 일하나. 연락이 없군.’

식사를 끝내고 나서 본 휴대폰은 수신된 메시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오늘부터 뭔가 일을 하느라 바쁠 것 같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평소와는 달리 뭔가 묘했던 진제환을 떠올리며 VT넷을 연결하고 미스트베이 월드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지난 이틀 사이 뭔가 변한 것은 없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 오늘 접속했는데 앞으로 대도시끼리 이동 못 하나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 [2938]

[ 테이머들만 땡잡았네요 돈받고 이동시켜주기 알바하면 되니까 ] [1826]

[ 페일나이츠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럴수록 더 짜증만 나는데 ] [4991]

전체 글 중 현재 가장 반응이 뜨거운 글을 모아 둔 실시간 베스트 게시글 란은 대도시끼리 연결해 주던 워프 포인트가 사라진 일로 완전히 난리가 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투가 일어났다거나 하는 말은 없는 것을 보면… 과연 민후의 말대로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각자 흩어져 워프 포인트만 파괴한 뒤 사라졌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워프 포인트를 없애는 즉시 나뉘어 주변을 공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금세 워프 포인트가 없는 생활에 적응하고 대체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아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손을 쓰는 것이 최선일 텐데……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을까?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던 도중, 갑자기 베스트 게시글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었다는 알림이 아래쪽에 미친 듯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글 여러 개가 눈앞에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 방금 자그레브에서 대박사건! 영상 첨부! ] [998]

[ 자그레브에서 페일 나이츠에 대항한다는 연합길드 나왔네요! ] [1112]

[ 세이버스 길드?? 들어보신 분?? 합류하실 건가요???? ] [685]

[ 와 대박!! 이전에 새턴 동영상에 나오셨던 분들이 페일 나이츠 대항길드 만드심! ] [934]

이건…… 민후가 예고했던 길드원 모집을 돌아가자마자 바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맨 위에 있는 글을 클릭해 보았다. 그 글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래쪽에서 엄청난 스피드로 댓글이 달리고 있다는 알림이 올라오고 있었다.

[ 방금 자그레브에서 대박사건! 영상 첨부! ]

와 오늘 중앙광장에서 수다 떨고 있길 잘했네

대박사건 구경하고 바로 찍어서 올림~~!

페일 나이츠에 대항하는 연합길드를 만들 거라는데 길드 있으신 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참여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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