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눈을 감았다 떴다.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제일 먼저 비친 것은 아름다운 풍경, 뺨을 스치는 바람, 맑고 비린 풀 향기와 그리고.
“기다렸어.”
검은 갑옷을 걸친 유완이 내민 손.
나는 유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위치는 마지막으로 내려서 로그아웃했던 자그레브 근처의 평야 그대로였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자그레브 성벽 끄트머리를 보자 마음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내가 미스트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상태는 어때.”
나는 일단 유완에게 제일 먼저 그것을 물어보았다. 물론 괜찮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받아온 질문이라 지겨웠겠지만 유완은 아무런 내색 없이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 하고 답했다.
“…정말 고마워.”
내가 유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그저 이 말뿐이란 것이 미안했다. 유완은 나를 위해 하지 않았어도 될 수많은 일들을 해 주었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신경 쓰지 마. 시간이 없으니 목표를 우선해.”
유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지만 나를 보는 눈빛만은 다정했다. 누가 과연 저 얼굴을 보고 현재 인간이 뇌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참을 수 있는 싱크로율의 최고도라는 43%를 견뎌내는 중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도록 도와준 윤석호도, 다른 이들도 유완의 인내심과 탁월한 신체 능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여기에 들어오기까지는 거의 만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윤석호는 거의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빈 회의실에서 급히 공수해 온 일반 캡슐과 내가 본래 썼던 캡슐 두 개를 놓고 끊임없이 조정하는 과정을 직접 수행했다.
지금 당장은 대신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제가 하는 수밖에요. 그렇게 말했지만 기계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을 것처럼 냉철하게 생긴 그가 직접 정장 셔츠를 걷어붙이고 부품을 고치며 컴퓨터를 두드리는 광경을 보는 것은 상당히 낯선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윤석호가 미스트의 초기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자연스럽게 달고 다니긴 했지만 한 번도 진짜 실감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에서야 정말로 그가 이 게임을 만든 남자가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개발자로서의 윤석호의 모습이 평소 보이던 지부장으로서의 윤석호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를 도와준 금발의 남자는 자신을 미스트의 총 시나리오 담당자, 유프 카윗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기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윤석호를 돕지 못했지만 대신 지부장실과 회의실을 번갈아 드나들며 윤석호에게 다른 누군가와의 의견 교환을 전달하는 것을 계속 도와주었다.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그 지부장실 안쪽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윤석호는 나를 다시 미스트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몇 가지 제한을 걸었다. 첫 번째는 무조건 모든 접속을 새턴 내의 캡슐을 둔 그 회의실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고, 접속 시간은 하루 세 시간 이내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끝낼 기한은 2주로 제한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번째는 반드시 접속할 때에 진제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캡슐 옆에 마련된 일반 캡슐은 진제환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그때 알았다.
「두 분을 임시로 운영부서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등록해 두기로 했습니다. 입을 맞춰두기 위해 진짜 운영부서 팀장 중 한 분이 잠시 오셔서 여러분과 얼굴을 보고 가실 테니 너무 놀라지 말아 주세요.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피로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윤석호가 불러온 남자는 놀랍게도 내가 이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직원이었다. 퀘스트 동영상의 출연 건으로 계약을 하려고 나에게 연락을 했던 운영부서 3팀 남무건 부장은 앳된 인상에 충격을 가득 담고 달려와 윤석호의 설명을 들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건가 했더니, 정말 미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도 이미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으니 그만해. 아무튼 피곤하니 일단 이 두 분을 임시 직원으로 등록해 주고, 나머지 서포트는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네.」
부하 직원치고는 상당히 친근하게 윤석호를 갈구는 그 남자가 나는 정말로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나를 알아본 뒤 엄청나게 놀랐지만 이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임시 직원용 신분 등록과 인식을 해 주었다.
나보다 앞서서 먼저 캡슐 안에 들어간 진제환이 서로 연결된 두 개의 캡슐이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접속했다 로그아웃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초조하게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윤석호는 진제환이 견딜 수 있는 싱크로율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본 뒤, 그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지점까지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드물게 순수한 감탄사를 흘렸다.
「운이 좋군요. 베타 테스트를 할 때에도 이런 수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전 세계의 모든 미스트 유저들을 통틀어도 이 정도 수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열 명도 안 될 겁니다.」
하고자 하는 일은 간단했으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내가 특수 캡슐에 접속하기 위해 필요한 높은 싱크로율과 그에 동반된 D파 사용으로 인한 과부하 일부를 진제환에게 옮겨 내 쪽의 부담을 줄이자는 계획은 서로 연결된 캡슐들의 아주 미세한 수치 하나하나까지 조정해 가며 맞춰야 하는 극한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밤을 새워 가며 몇 번이나 반복해서 조정을 한 끝에 결국 윤석호는 그것을 해냈다. 중반 이후부터는 그가 하는 작업을 눈대중으로 파악한 진제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마구 써대며 그와 공동 작업을 한 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데에 꽤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다시 미스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된 지 며칠만의 일이었다.
“거기, 방문자!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가 자그레브 성문을 통과하려 했을 때, 허둥지둥 달려온 치안 경비대가 앞을 막아서고 경계심 어린 눈빛을 했다.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당혹했지만 유완이 나서자 일이 곧바로 해결되었다.
“세이버스 길드다.”
유완이 망토를 젖혀 안에 달린 배지를 보여주자 경비대원의 표정이 금세 부드럽게 풀렸다.
“아, 그 길드 분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그건 뭐냐?”
내가 들어오지 못한 사이 뭐가 생긴 건가 싶어 물어보자 유완이 안에 매달아 놓은 배지가 잘 보이도록 다시 한번 망토를 들추어 보여주었다. 그것은 불꽃이 검은 드래곤의 머리를 감싸 불태우고 있는 형상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였다.
“길드원의 표식.”
“언제 그런 게 생겼어?”
“3일 전부터.”
현실에서 바쁘게 나다니는 와중에도 유완은 나름대로 세이버스 길드를 위해 협력을 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던 것과 많이 달라진 자그레브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전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골목에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고, 긴장된 분위기와 함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이들의 수가 이전의 몇 배로 늘어나 있었다.
워프 포인트가 파괴되어 무너진 광장도 사람이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간혹 날개 달린 몬스터를 타고 날아와 내리는 사람들 정도였지만 이전에 워프 포인트를 타고 이동하던 사람들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그 수가 적었다.
나는 도시를 걷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유완이 단 것과 같은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검집에, 망토 위에, 하의 벨트에, 소매에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달고 있는 그 배지는 투박한 생김새임에도 무언가 힘을 느끼게 했다.
재미있는 건 같은 길드라는 표식을 달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서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도 그것이 오로지 마신 타도를 위한 목적만을 위해 모였다는 길드 특성상 특정한 친목을 하지 않아서 생긴 효과가 아닐까 하는 예상을 했다.
“이제 어디로 가려고.”
“길드하우스가 있다.”
광장에서 빠져나온 유완은 나를 이끌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갔다. 망토로 얼굴을 잘 가린 덕분에 유완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각양각색으로 꾸며진 길드하우스들을 돌고 돌아 마침내 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생각보다 작지만 그래도 2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 저택 앞에 ‘세이버스’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유완은 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제 조용했느냐는 듯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선빵을……!”
“톨랑에서 가입자가 오늘 몇 명이나…….”
“거기는 아직도 동맹을 맺을지 말지 확답이 없대? 언제까지 기다리란 거야!”
“길마님! 여기 오늘자 동맹 확인서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소리 높여 무어라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도 모두 몸 어딘가에 세이버스의 표식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단기간에 모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수의 길드원들과 수완 좋게 구한 길드하우스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잠깐, 잠깐. 한 사람씩 좀 오…… 카프?!”
잠시 그 모습들을 보고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 덩어리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나를 불렀다. 게임 속인데도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인상의 크란이 나를 향해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이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카프!! 드디어 왔구나! 하하하!”
나는 순식간에 크란의 팔에 들린 채 다리가 붕 뜨는 경험을 했다. 내가 크란보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180은 되는 입장에서 보자면 약간 굴욕적이었으나 당사자의 표정이 워낙 행복해 보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잘 왔어, 잘 왔어! 미리 연락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어떻게 된 거야?”
“사정이 좀 있었어.”
그 많은 사정을 도저히 남들이 있는 곳에서 짧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간략하게 한마디로 끝냈으나 크란은 다행히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지금 완전히 정신이 없어. 밀려드는 가입 처리하랴, 조직 개편하랴, 동맹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다른 길드들 상대하랴 난리도 아니거든. 차라리 퀘스트나 하고 사냥이나 하던 때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란은 결코 지금 어깨에 짊어진 이 짐을 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가 어떤 상황이든 나서서 총대를 메고, 그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는 녀석이니까.
“저 잠깐 옆방에서 얘기 좀 할 테니까 들어오지 말아요!”
“그러면 이건 누가 다 처리해요?”
아까 전부터 옆에서 뭔가 엄청나게 많은 종이를 든 채 골머리를 앓고 있던 사람이 크란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곧 부길마님이 올 테니 그 형한테 부탁하세요.”
“알겠어요.”
“가자, 카프. 깜장검사 너도.”
크란이 우리 둘에게 눈짓을 해 옆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놀랍게도 소리가 단숨에 전부 차단되어 조용해졌다.
“휴우.”
“…고생이 많다.”
한숨을 내쉬는 크란의 등을 두드려 주자 반짝이는 눈동자가 따라왔다.
“그렇지? 누가 봐도 내가 제일 고생하고 있지? 접속해서 내내 하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데 키온 형님네는 내가 너무 느리다는 거야. 아 정말 서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투덜거린 크란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로브 위에 얹었다.
“자, 배지. 일단 이거부터 달아. 이걸 달아야 우리 길드원이란 걸 확인할 수 있고 길드원 전체에게 닿는 전용 스킬을 쓸 수 있거든.”
“전용 스킬?”
건네받은 배지를 달면서 묻자 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마스터 전용 스킬이 몇 개 있어. 특정 범위 내에 있는 길드원들에게 한 번에 잘 들리게 소리를 칠 수 있다거나, 파티를 맺지 않아도 협력 모드를 강제로 걸어서 같은 적을 상대하기 편하게 하거나, 길드원의 전체 명단과 구조를 볼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거.”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완전히 옷에 부착된 배지를 내려다보았다. 불꽃에 감싸인 검은 용의 머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이걸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는 매우 궁금했었다.
“이 문양, 누가 만든 거야?”
“아 그거 정말 잘 만들었지. 팔튼 형님네 길드원 중에 그런 거 만드는 게 직업인 사람이 있다더니 잘 파 오셨더라고.”
크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 옷깃에 매달린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카프 네가 와 줘서 정말 든든하다. 네가 오면 바로 부탁하려고 미뤄 둔 일이 몇 개 있는데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을까?”
나에게는 하루 세 시간, 게임 내의 시간으로 아홉 시간씩밖에 여유가 없었기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대충 생각은 미리 다 해 놓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크란을 도와 세이버스 길드의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것 또한 있었다.
크란은 미안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좋았어. 첫 번째는 지금 우리가 애를 먹고 있는 마법사 길드들 쪽에 가서 동맹 영입을 좀 해 줬으면 하는 거고, 두 번째는 길드원들 앞에서 너에 대해 소개할 기회를 달라는 거야. 뭘 먼저 할래?”
동맹 영입과 길드원들 앞에서 소개를 당하는 것 사이에서라면 당연히 전자를 먼저 하고 싶지 않겠는가.
“…영입은 어떻게 하면 되는데?”
“흐흐. 역시 그것부터 택할 줄 알았어. 자, 이쪽으로 와 봐.”
나는 크란이 부르는 손길을 따라 방의 바깥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창으로 향했다. 1층이기는 해도 전망이 꽤 좋아서 주변에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제법 훤히 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저기 3층짜리 빨간 지붕 건물, 보여?”
“응.”
“저기가 미스트에서 지금 제일 큰 마법사 길드인데, 저 녀석들이 지금 동맹에 들어올 듯 말 듯 우리 애간장을 태우고 있단 말이야. 들어오지는 않더라도 일단 페일 나이츠 놈들 쪽에 붙으면 안 되는 집단이라서 어떻게든 이쪽으로 끌고 오거나 하다못해 중립 선언 정도는 받아두고 싶어. 저 길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작은 군소 마법사 길드들도 행동을 같이 할 가능성이 크거든.”
나는 크란이 가리켜 보인 빨간 지붕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는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마법사 유저들은 카프 네 존재를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는 경우도 많아. 아마 저 길드에서 우리 길드와의 동맹을 망설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가능성이 커. 그러니까 직접 가서 능력 좀 보여 주고 거기 길드마스터랑 한번 쎄게 이야기를 해 봐. 그렇다고 진짜 싸워서 적대 상황이 되면 안 되고. 알겠지? 혹시 모르니까 깜장검사도 데려가.”
크란이 여태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유완을 향해 눈짓을 했다.
“너, 너도 오자마자 할 일이 산더미인데 내가 일단 보내 주는 거야. 허튼짓 말고 카프를 잘 지켜. 알겠어?”
“…….”
유완은 역시나 대답을 하지 않았고 크란은 잠시 열 받은 표정을 했다가 도로 풀었다.
“카프. 내가 저 녀석을 우리 길드의 근거리 공격대 총 지휘로 삼을 생각이라고 이야기했었던가?”
이전에 병원에 단체로 왔었을 때에 했던 말이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완을 쳐다보았다.
“지금 근거리 공격대를 대충 조합별로 나누는 건 다 끝나가고 있는데, 저 자식이 그 자리를 맡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게 문제야. 저 자식이 아니면 우리 중에서 정석적으로 검 쓰는 놈이 또 누가 있어? 큰맘 먹고 저 자식의 부족한 리더십을 내가 메워줄 각오를 하고 시키겠다는데 도움을 안 줘, 도움을!”
음…….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나더러 유완을 함께 압박해 달라는 뜻이겠지. 슬쩍 시선을 돌려 보자 유완은 태연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윤석호는 가능하면 함께 게임을 하는 쪽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캡슐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고, 되도록이면 부상을 입거나 죽는 등의 큰 충격을 받지 않음으로써 싱크로율과 D파의 작용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크란의 말마따나 그러한 역할을 맡을 만한 이가 그리 흔치는 않다. 유완은 다크 나이트 퀘스트 소유자이니만큼 실력도 출중하고,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리더십이 필요한 일이라도 일단 본인이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는 해낼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강렬한 눈빛 하나로 제 말을 듣게 만드는 성격까지 합해 생각해 보자면 수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놓기에 아주 적절한 놈이라 할 만했다. 사적인 악감정을 제외하고도 크란이 굳이 유완을 쓰고자 했던 이유를 나 또한 충분히 이해했다.
“왜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일단 유완에게 이유나 들어볼까 싶어 물어보았다.
“네 보호가 우선이니까.”
“카프는 오늘 일이 끝나면 곧바로 길드에서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을 거라고. 어차피 길드에 있을 건데 대체 뭐가 불만이냐, 네놈 자식은.”
크란이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하자 유완이 정말이냐는 듯 나를 보았다. 병원에서 했던 말이라 사실 아직까지는 정말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할 수는 있을지 별다른 자신이 없는 상태였으나 나는 일단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크란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데 나만 놀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있는 한은 돕고 싶어.”
“들었냐, 깜장검사? 이게 바로 올바르고 눈물 나는 정상적인 대응이지.”
크란이 크게 비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유완의 눈빛이 살짝 음침하게 변했고, 나와 크란 둘 다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쭈. 날 노려봐? 네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카프 어깨에 손 올렸다고 지금 노려보는 거냐? 뭐라고 좀 해 봐, 카프.”
“…그냥 너도 하는 게 어때.”
“…….”
비웃으면서도 눈 밑에 고생의 흔적이 가득한 크란이 가엾어 한마디 보태 주자 유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이지? 그러면 당장 여기에 승인해.”
그러자마자 내 옆에서 곧바로 빠져나간 크란이 허공에 손을 올리며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댔다.
“나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마스터 크라토스는 길드원 유완에게 근거리 딜러 총공격대 대장 및 검사단장을 일임한다. 이에 동의하는가?”
크란의 손바닥에서 뻗어나온 푸른빛이 흐릿하게 안내창 같은 모양을 만들며 떠오르자 유완이 잠시 침묵하며 그것을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
파아앗! 짧은 빛이 새어 나온 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안내창은 곧 파훼되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유완이 크란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며 말은 안 해도 현재 놈이 크란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끈질기군.”
“하. 내가 끈질김 빼면 시체거든.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너만 카프 옆에 붙어서 꿀을 빨려고 해? 내가 절! 대! 그 꼴은 못 본다.”
평화로운 두 사람의 모습을 간만에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너무 컸는지 뒤를 돌아본 크란이 나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웃었지? 카프, 지금 웃은 것 맞지? 하아. 역시 네가 있어야 뭘 할 맛이 나는 것 같아. 정말로 잘 돌아왔어.”
크란의 따뜻한 환대는 고마웠지만, 지나치게 치대는 것은 약간 부담스러웠기에 결국 나는 한 손에 파이어 볼을 소환해야만 했다. 나와 유완은 잠시 후 우리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세이버스 길드원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빨간 지붕…… 빨간 지붕……. 아, 이쪽이군.’
빨간 지붕 건물은 몇 분 정도 걸어가자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앞에 서고 나서야 이곳의 지붕을 보았을 때 왜 그렇게 기시감이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긴…….’
매직토피아 길드. 선명하게 새겨진 명패를 보며 잠시 침묵하고 있으려니, 마침 밖으로 나오던 길드원 한 명이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응? 누구십니까? 앗. 그 배지는!”
내 가슴에 매달린 배지를 알아본 그가 곧바로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도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네다섯 명쯤 되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도대체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예요? 우린 마법 수련만으로도 바빠서 당신네 길드하고 계속 상대할 여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대표로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치자 주변의 다른 이들이 동조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 지겨워 죽겠어! 길마님이 결론을 내셔야 얘기를 하든가 말든가 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불공 맛 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이거나 먹고 꺼져, 파이어 볼!”
화르륵! 순식간에 공중에서 생성된 불꽃이 나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나는 그것이 내 쪽을 덮치기 전에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디스펠.”
날아들던 불꽃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사라졌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충격으로 얼룩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 다시 나를 보았다.
“……디스펠이라면…… 5서클의, 그 마법?”
“맙소사.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볼 좀 꼬집어 줄래? ……아야야야얏!”
“디, 디스펠이라니. 아니지? 다른 스킬이지? 내가 잘못 본 거야, 그렇지?”
서로 볼을 꼬집으며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아앗 하는 소리를 내며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오, 옷이 달라져서 설마 했는데, 서, 설마. 설마……!”
“…….”
그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와 떨리는 눈으로 속삭였다.
“…FM님이십니까?”
나 참. 그 호칭도 정말 오랜만이군.
나는 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그가 소리를 지를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제 손으로 틀어막더니, 엄청난 표정을 하고 길드하우스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뒤흔들렸다.
“뭐, 뭐야, 대체. 저 녀석 왜 저래?”
“…당신, 마법사예요?”
경계심 많은 작은 동물들이 몰려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마법사들이 어쩐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 사이로 심상치 않은 술렁임이 번졌다.
“5서클을 쓸 수 있는 데다 저 길드 소속 마법사라면…….”
“설마…….”
“우와아아! FM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수많은 이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뛰쳐나왔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했는지 유완이 순간적으로 앞에 나서서 검을 뽑으려 했을 정도였다. 나는 간신히 유완의 팔을 잡아 막은 뒤 나를 보고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의 속에서 예전에 봤던 기억이 나는 사람을 한 명 찾아냈다.
“오랜만입니다.”
“세상에! 입고 계신 로브가 아주 멋진 걸로 바뀌셨네요! 하마터면 정말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FM…? 그 FM님이라고?! 진짜?”
맨 처음에 공격하려 했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그들 사이에 뒤섞여 매직토피아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카프로스 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복도 안쪽에서 기쁨에 찬 고함이 들려오더니, 매직토피아의 길드마스터 아르카나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녀는 이전에 보았던 것과 다른 디자인의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또 와 주셨네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손발에 찬 액세서리나 머리카락을 동여맨 끈 같은 아이템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카나가 미안해하는 얼굴로 사과를 했다.
“저희 길드원분들이 요즘 좀 늘다 보니 카프로스 님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도 많아서 실례를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혹시나 이럴까 봐 이전에 입고 오셨던 옷과 인상착의를 낱낱이 외우게 해 뒀는데 설마 다른 옷을 입고 오실 줄이야… 제가 방심했어요. 휴.”
아르카나와 내 주변을 삼삼오오 에워싼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은 유완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오로지 나만을 호의의 눈빛으로 보는 경험을 이전에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겪으니 새삼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저는 그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드디어 5서클 마법을 네 개나 익혔어요. 주문 없이 쓸 수 있는 것도 두 개나 돼요. 6서클 마법도 하나는 알아 두긴 했지만 아직 시도를 못 해서… 후후. 카프로스 님 앞에선 번데기가 주름 잡는 격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뵈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앗, 저도 길마님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저번에 보여주신 시범을 보고 너무 감동받아서 열심히 연습한 결과 3서클이 되었어요!”
“저, 저도 이제 2서클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열심히 제 성과를 말해대는 마법사 유저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한눈에 보기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마법을 통해 성취를 이루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를 같은 마법사 유저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모습들이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전부… 열심히 하셨군요.”
무어라 대답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다 그렇게 말하자 재잘대던 마법사들의 한마디가 순식간에 뚝 끊기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뭔가 잘못 말한 것인가 싶어 걱정했으나, 몇 초 뒤 터져 나온 고함으로 인해 그런 걱정은 순식간에 접을 수 있게 되었다.
“으아아아! FM님이 나보고 열심히 했다고 말씀해 주셨어!”
“난 이제 죽어도 좋아!”
“젠장!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나가서 죽자!”
방금보다 두 배는 더 크게 터져 나오는 아우성 속에서 나는 대체 언제쯤 본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그나마 제일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길드마스터인 아르카나였다.
“다들 조용!”
다행히 길드원들은 길드마스터의 말을 매우 잘 들었기에 금방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뵌 것이 너무 기뻐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미처 물어보지 못했네요. 간만에 그냥 저흴 보러 오신 건 아니실 테구요.”
“실은… 동맹 영입을 하러 왔는데.”
“동맹요? 아. 설마?”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아르카나가 그제야 새삼스럽게 발견했다는 듯 내 가슴에 매달린 배지를 보았다.
“그… 세이버스인가 하는 길드에 계신 거였어요?”
“응.”
그러자 길드원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속삭임이 순식간에 커졌다. 아르카나 또한 무언가 굉장히 질문하고 싶지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망설이더니, 결국 호기심이 이긴 듯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혹시……. 그 길드에 있는 누군가가 마법으로 토렐리트를 침공했던 마물들을 전부 죽였다고 주장한다는 게, 카프로스 님 이야기였던 건가요?”
나는 아르카나를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응.”
아르카나의 눈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또다시 난리 법석이 일어났다.
“우와아아악! 거봐! 내 말이 맞지! 난 그게 FM님일 거라 했었잖아!”
“젠장! 당연히 거짓말일 줄 알았는데!”
“FM님이 다른 길드에 계실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내기는 무효야, 전부 무효!”
“조용, 조용!”
아르카나가 뒤돌아서 손짓을 하자 길드원들이 간신히 흥분을 누르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카프로스 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러면… 그, 얼마 전에 나왔던 검은 용을 죽이는 마법사 영상도 그러면…….”
“그것도 나야.”
그 순간의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의 눈빛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열광의 시선 속에서 멋쩍음을 느끼며 아르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르카나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기에 결국은 다시 매직토피아 길드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저는 이전부터 페일 나이츠와 그곳의 길드마스터 시저와 반대되는 입장의 퀘스트를 하느라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것이 마무리되어 같은 퀘스트를 해 온 동료들과 길드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그들을 막을 활동을 펴고자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매직토피아 길드에서도…….”
“할게요!!”
아르카나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게 소리쳤다.
“동맹, 할게요! 당장 하게 해 주세요!”
“와아아아아! 우리 길마님 최고다!”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외쳐댔다. 아르카나가 상기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저희는 아직 페일 나이츠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어요.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세이버스 길드를 무작정 믿기도 힘들었고, 카프로스 님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르는 마법사가 그곳에 있다는 말도 믿고 싶지 않아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흑룡을 죽이고 토렐리트를 구했다는 그 마법사가 카프로스 님이시라면 저흰 더 망설일 것이 없어요. 저희는 카프로스 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괜찮아?”
오히려 내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에 묻자 아르카나가 자신 있는 얼굴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당연하죠! 그동안 우리 매직토피아는 미스트 대륙 마법사 유저들의 구심점이 되었다구요. 성장 가능성이 적어 무쓸모한 노가다 직업이라고만 평가받던 우리 마법사 유저들의 자존심이자 우상인 분이 하시는 일을 도울 수 있다면 뭘 망설이겠어요? 이날을 위해 수련해 온 마법인걸요!”
“옳소!”
아르카나의 뒤에서 몇몇 이들이 크게 부르짖었다.
“혹시 우리 길드에 이 결정을 반대하는 분은 없으시겠죠? 있으시다면 지금 나가 주세요.”
아르카나가 마지막으로 길드원들을 돌아보며 물어보았지만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장일치라는 뜻이었다.
“자, 결정됐네요. 동맹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나는 그제야 나도 동맹을 정확히 어떻게 맺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아마 크란도 내가 이렇게 단번에 승낙을 받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음……. 세이버스 길드에 사람을 보내서 말하면 될 것 같은데….”
“좋아요. 그럼 저랑 같이 가주시는 거죠?”
“앗! 길마님 이 틈을 타서! 부러워!”, “저도 가고 싶어요!”
뒤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아르카나는 상쾌하게 무시하고 일어났다. 나는 결국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하우스에 방문한 지 30분도 채 안 되어 길드마스터를 데리고 도로 세이버스로 귀환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그쪽이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마스터세요?”
“아…… 네. 크라토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쪽이 그,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마스터시군요.”
또다시 피곤한 얼굴로 옆방으로 끌려온 크란이 아르카나의 정체를 깨닫고는 입을 딱 벌렸다가 간신히 도로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아르카나라고 해요. 우리 매직토피아 길드는 세이버스 길드와의 동맹을 수락할 생각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요.”
“그거라면… 마침 저희 둘 다 길마이니 그냥 동의를 주고받는 정도로도 편안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와아, 그래요? 잘 됐네요.”
아르카나는 몹시 기쁜 기색으로 크란과 살짝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잠시 후 동맹을 맺기 위한 상호 동의절차가 끝나자 크란이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나와 아르카나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30분 만에 매직토피아와 동맹을 성공시키다니.”
“…너, 역시 날 보낼 때 그냥 한번 찔러 보는 심정으로 보낸 거지.”
내 말에 크란이 약간 찔리는 얼굴로 아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아니. 그냥, 마법사 유저분들은 실력주의가 강한데 너보다 강한 마법사는 현재 아무도 없으니까 널 보내면 잘 될 것 같았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아?”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전 카프로스 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절대로 동맹 수락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봐봐. 이분도 그렇게 말씀하시잖아……. 가 아니고, 원래 카프와 아는 사이셨어요? 언제부터?”
크란이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하기는 나와 매직토피아 길드 사이의 인연을 아는 건 당사자들뿐이니 다른 이들은 놀랄 만도 하다 싶었다.
“꽤 되었죠. 지금의 저희 매직토피아가 있는 것도 모두 카프로스 님 덕분이니까요. 카프로스 님이 계신 한 저희 길드는 뭐든 협력할 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시원시원한 아르카나의 태도는 크란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아르카나는 크란에게서 내가 세이버스 길드의 마법사 지휘단장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제 길드도 그 아래 들어가고 싶다고 주장해 나를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오로지 마법에밖에 관심이 없는 길드의 마스터다운 태도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모습이었다.
“좋아요. 그럼 좀 더 자세한 건 다음에 다시 와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카프로스 님, 저희 길드하우스는 저쪽에 있으니까 언제든 찾아와 주세요!”
폭풍같이 크란과 한바탕 앞으로의 마법사단 구조 개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아르카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먼저 떠나갔다. 나는 지쳐서 늘어진 크란과 목석처럼 내 뒤에 서 있는 유완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해야 할 일 하나는 빨리 끝내서 다행이네.”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 사람도 정말 대단하더라. 나는 지금껏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하면 좀 나이가 있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설마 그렇게 어린 사람이 올 줄이야.”
하긴, 그것은 나도 예전에 의외라고 생각했던 바였다. 10대 소녀인 아르카나가 수많은 마법사 유저들의 가장 위에 설 수 있는 건 그 솔직하고 당돌한 성격과 중요하다 판단한 것 이외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시원한 면 때문이 아닐까.
“자랑은 아니지만 나와 저 깜장검사, 그리고 네가 동시에 서 있는데 그 사이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어. 보통은 한쪽에 치우쳐 호의를 보이거나, 아니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겁을 먹거나 셋 중 하나일 텐데.”
크란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마법사 유저들이란 오로지 자나 깨나 마법 생각뿐이라더니, 그게 정말인가 봐. 난 지금껏 카프 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자나 깨나 마법 생각이라…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이 대체로 다 그런 분위기이기는 했지. 나는 크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도대체 언제 그런 사람들하고 친분을 다 만들고 다닌 거야? 덕분에 이번 일은 정말 잘 풀리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겨우 몸을 일으킨 크란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좋아. 널 우리 길드원들에게 빨리 소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도 좋지. 나가자. 슬슬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온 우리 길드원분들이 집합할 시간이니까.”
“……집합?”
처음 듣는 말에 의아해하며 묻자 크란이 씩 웃었다.
“길드원분들 중 본인이 일을 돕고 싶다고 말한 사람들에 한해 길드원 모집과 다른 도시에서 거점을 만드는 일, 조직도를 개편하는 일, 그리고 각지에서 발견되는 페일 나이츠 길드원이나 마신 추종 세력을 추적해 관찰하는 일을 하도록 하고 있거든. 매일 저녁마다 대표자급인 분들이 여기로 되돌아와서 각자 보고를 하곤 해.”
어느새 그런 체계적인 시스템까지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나는 크란의 수완에 새삼스럽게 몹시 놀랐다.
“자, 어서 가자.”
크란에게 떠밀려 나가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길드하우스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서 하는 게 아냐?”
“아니. 사람이 좀 많다 보니까 여긴 너무 좁아서 어쩔 수 없이 바깥에서 하고 있어.”
바깥……?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해 회의를 할 만한 공간이 이 도시 안에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나의 의문은 크란이 도착한 곳에 섰을 때에 새로운 놀라움과 함께 깨어졌다.
“길마님 오셨다!”
“크란 님~!”
“이쪽으로 오세요!”
워프 포인트가 파괴된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디를 보아도 같은 배지를 단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그저 작은 일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 모든 이들이 오로지 크란을 보며 믿음으로 눈을 빛내고 환호하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왠지 전율이 들었다.
너무나 환호성이 커 범인이라면 주눅이 들 법한 분위기였으나 크란은 심호흡만 한 번 하고는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계단 위의 파괴된 워프 포인트가 있던 장소로 올라갔다. 그러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올라와.’
크란이 내 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크란을 따라 계단 위를 올랐다. 유완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올라와 주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혼자 시선이 집중되는 일은 없었다.
“카르야! 언제 온 거냐!!”
계단 위에 올라서자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더욱 잘 보였다. 나는 그 속에서 유난히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큰 흰 사제복의 전투사제를 보고 피식 웃었다. 키온 형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교묘하게 얼굴을 가린 루크레이신도, 못 보던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쓴 운오도 있었고 어디서 보든 언제나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한 개 이상은 불쑥 튀어나와 있는 팔튼 형도 있었다.
나란히 선 것은 아니지만 전설의 영웅들과 관련된 퀘스트를 한 일곱 명이 모두 이 한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그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나는 묘하게 벅찬 기분을 느꼈다.
“세이버스의 여러분! 오늘 하루도 열심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과로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크란이 내뱉은 목소리는 별달리 소리를 치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광장 안에 깊이, 그리고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이게 길드마스터 전용 스킬을 쓴 상태인 건가?’
목소리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진중하고 무게감이 있어 보이는 크란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하하하 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기에 어수선한 분위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이곳의 분위기는 질서가 있었고 밝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오늘은 보고 이전에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저와 함께 세이버스를 세운 여섯 분 중 마지막 두 사람입니다! 이쪽은 앞으로 모든 근거리 공격조의 총 지휘와 검술단의 단장을 맡아줄 다크 나이트 유완, 그리고 이쪽은……!”
내 쪽으로 손을 뻗은 크란이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유명한 토렐리트의 마물들을 한 방에 저세상으로 보내 준 바로 그 사람! 새턴에서 공개했던 마지막 영상 속에서 드래곤을 단신으로 죽인 그 마법사! 카프로스입니다!”
소개가 끝났지만 사람들이 조용했기에 나는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의심할 뻔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런 의심을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의 폭발적인 환호와 박수가 넓은 자그레브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 하늘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진짜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긴 했구나!”
“이름이 뭐라고? 카프로스?”
“얼굴 좀 보여주세요!”
그것은 내가 태어난 이래 받아본 모든 환호 중 가장 크고 거대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교검도대회 결승전의 그날도 이 정도였었던가? 이제는 기억이 흐릿한 그날에 느꼈던 감각이 억눌렸던 가슴속에서 조심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전신이 진동으로 울릴 정도로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얼떨떨함과 뒤섞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맛보았다.
유완도 나도 얼굴을 가린 상태인지라 사람들은 안의 생김새가 어떤지 매우 궁금한 것 같았다. 크란이 내 쪽을 흘긋 쳐다보기에 절대로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젓자, 알겠다는 듯한 끄덕임과 함께 타깃이 유완 쪽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으니 네가 대신 벗어, 깜장검사.”
“…….”
“이럴 때 카프 대신 한 몸 바쳐 희생해. 넌 여기서 카프가 저걸 벗었으면 좋겠어?”
“…….”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완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손을 올렸다. 단순히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망토 뒤의 후드를 젖힌 것뿐인데도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은 그 동작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천이 내려가고 유완의 검푸른 머리칼과 잘생긴 얼굴이 드러난 순간, 여기저기서 엄청난 비명 소리와 환호가 더욱 강하게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대부분이 유완의 얼굴에 넋을 잃은 유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헛기침을 해서 참아냈다.
크란은 그 이후 우리를 먼저 내려보내고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짧게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조직도가 완전히 정해지는 대로 페일 나이츠와 마신의 편에 선 NPC 집단들을 쫓는 일에 집중하자는 말로 회의를 끝냈다.
수많은 이들의 환호성이 대지와 공기를 울리고 내 몸도 울렸다.
“카르야!”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진 뒤 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피해 유완과 함께 사람이 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신같이 내 위치를 쫓아 달려온 키온 형과 다른 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다시 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리는, 이제 괜찮아진 거냐?”
“응.”
다리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처럼, 돌아온 것도 갑작스러웠다는 말을 하자 키온 형은 마냥 좋아할 것은 아닌 듯하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내 등을 두드렸다.
“오랜만이다. 간만에 보니 왠지 더 마른 것 같은데? 게임 안이라 그런가?”
“하하…… 네.”
팔튼 형이 씩 웃으며 후드 위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워낙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머리 위에서 누르는 손의 압력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무릎이 꺾일 뻔했을 정도였다.
“…….”
묵직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의 힘 때문에 벽을 짚었을 때, 내 옆에 서 있던 유완이 순간적으로 입술을 꾹 깨물며 어깨를 살짝 굳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평소라면 나오지 않았을 움직임임을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내게 가해진 압력 때문에 순간적으로 유완에게 부담이 가해졌나?
“…유완?”
괜찮으냐는 뜻으로 이름을 부르자, 잠시 후 고개를 든 유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섰다. 나는 조금 더 그의 몸 상태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뒤늦게 달려온 크란을 포함해 다른 이들이 바쁘게 나의 건강과 미스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리고 방금 전 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름을 밝혔으니 아마 시저와 페일 나이츠 측의 암살자들이 형을 많이 찾아다닐 거예요. Born 쪽도요. 얼굴을 안 밝힌 건 잘한 일이죠.”
“이런 좋은 날에 꼭 그렇게 분위기 잡치기부터 해야겠냐, 사기꾼 새끼야?”
루크레이신이 웃는 얼굴로 재수 없는 소리를 하자 키온 형이 즉각 응징을 위한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루크레이신은 곧바로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는 스킬을 썼기에 주먹은 허망히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으아악, 저 자식 진짜 툭하면 저걸로 숨어 버리는데 시저만 해결하면 그 다음은 너부터 죽일 거다!”
“아하하하. 사제와 암살자의 대결이라니,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걸요.”
“누가 궁금해해서 싸운대?!”
키온 형의 그림자 안에서 모습을 스르르 드러낸 루크레이신이 너무나 즐거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 틈을 타 루크레이신에게 살짝 물었다.
“Born도 나를 노릴 거란 건… 그쪽이 결국 시저 쪽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단 뜻인가?”
“그렇긴 한데 말하자면 조금 길어요.”
루크레이신이 웃음을 조금 거두고 대답해 주었다.
“제 최종 퀘스트가 뭐였는진 기억하죠?”
“너와 비슷한 수준의 암살자를 처리하는 거였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그쪽 본거지에 잠입해 있는 동안 꽤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죠.”
NPC만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암살자 단체 Born은 그간 시저와의 협력 여부를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꽤 치열하게 의견대립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반대 쪽으로 의견이 거의 기울었을 때 갑작스럽게 협력 반대파가 대부분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결국 그들은 시저와 손을 잡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잠입한 시기가 하필 반대파 몰살 직후라 때가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찬성파를 조금 손봐 주고 남은 반대파들을 거기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 퀘스트를 끝냈죠, 뭐.”
별것 아닌 일을 해냈단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루크레이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도망친 이들은 그러면 어디로 갔는데?”
“어디겠어요?”
루크레이신이 옷자락에 달린 세이버스 길드 배지를 가리켜 보이며 고양이처럼 웃었다.
“제가 능력이 좀 출중해야죠.”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녀석은 곧 다시 무어라 욕을 하며 달려드는 키온 형을 상대하러 멀어졌기에 나는 더 궁금한 건 다음에 묻기로 했다.
“저 사람들은 무시하죠. 몸이 나아지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형.”
가까이 다가온 운오가 어른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얼굴을 반쯤 가릴 만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운오를 보며 마지막으로 미스트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어른티가 나게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1년이 지난 것뿐임에도 사람은 이렇게나 많이 변할 수 있다. 이제는 약간 독설가 기질이 있기는 해도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운오에 더 익숙해져서 처음 만났을 때의 여유가 없고 날이 잔뜩 서 있던 운오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운오는 현재 발라 모냐크 쪽을 맴돌며 세이버스 길드원을 모집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퀘스트를 하면서 만난 이들이 대부분 그쪽에 있어 활동하기가 쉽다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운오의 퀘스트 동영상에 시라비 렌이 나왔었지.’
나는 시라비 렌도 발라 모냐크에서 만났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오가 그에게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쪽에 인맥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저는 유저들보다는 NPC들을 위주로 상대하고 있는 중인데, 그쪽에서도 현재 흑룡이 죽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화제예요.”
“그래?”
흑룡이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정도의 NPC들이라면 엄청난 능력을 가진 NPC들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놀라자 운오는 덕분에 길드에 도움을 약속받기도 쉬워졌고, 호의를 가지고 대해 주는 NPC들이 많아져서 일하기가 편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형은 마법사들 쪽을 책임질 거라고 들었는데, 그 외에 다른 일은 안 하실 예정입니까?”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그것도 2주 안에 끝내야 할 일들이 말이다. 정확히 어떤 일이냐고 물으면 조금 곤란할 뻔했지만 다행히 운오는 그것이 곧 일어날 마신과의 전쟁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자, 모처럼 한꺼번에 다들 모인 건 좋지만요.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죠.”
처음에는 간략하게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자 바깥쪽에서 혹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없나 살피고 있던 크란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현재까지 각지에서 수집해 온 정보를 보면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지금 대도시가 아니라 일일이 찾기도 힘든 소도시와 작은 마을들에까지 인원을 분산해 숨어 들어가고 있어요. 대충 뭘 하고 싶은지 짐작은 가지만 뭐… 우린 우리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죠.”
“그것도 그거지만, 대체 마신 그놈은 언제쯤 등장하는 거야? 그 자식들이 뭘 기다리는지 모르겠어서 짜증이 난단 말이지.”
키온 형이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며 투덜거리자 팔튼 형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 것까지는 너네 여신이 안 알려 주냐? 쓸모가 없네.”
“알려 주겠냐? 우리 여신님은 정작 정말 필요한 정보에서만 항상 입을 다문다고.”
“자자, 형님들. 다음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세요. 이 이상 여기에 있다간 쓸데없이 시선을 끌 것 같거든요.”
크란이 붙임성 있는 얼굴로 두 형들의 등을 떠밀었다.
“후아암. 그럼 오늘 할 일도 끝났으니 전 이만 로그아웃할래요. 여기서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형.”
루크레이신이 나른하게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손 키스를 날렸다. 물론 내가 뭐 하는 짓이냐고 묻기 전에 재빨리 로그아웃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도 다시 발라 모냐크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거기서 이곳까지 걸어서 이동하려면 꽤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괜찮은 거냐?”
워프 포인트가 파괴된 상황이라 빠른 이동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갈 생각인지 궁금하여 묻자 운오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거라면 저는 발라 모냐크에 집이 있어서 그곳까지 바로 갈 수 있는 특수한 고대 마법 아이템을 갖고 있으니 괜찮아요.”
그게 바로 제가 발라 모냐크 담당을 맡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하고 말하는 운오는 제가 게임 속에서나마 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매우 기분 좋고 뿌듯해 보였다.
“집을?”
“네. 정말 큰마음 먹고 샀어요. 나중에 일이 다 마무리되면 한번 놀러오세요. 형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운오의 미소를 보며 나는 진심으로 언젠가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 꼭 갈게.”
아. 2주 후에도, 1년 후에도 내가 건강히 미스트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 내에서는 되도록 현실 생각을 하지 않고 목표에만 매진하기로 마음먹었었지만 역시 조금만 방심해도 막은 둑이 터진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나는 모두가 각자의 일을 위해 골목을 빠져나간 뒤 함께 남겨진 유완을 돌아보았다. 유완은 여전히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만을 보고 있었다.
“아까, 싱크로율이 튀었던 거지? 괜찮아?”
“그 정도는 문제없어.”
유완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언제 동요했던가 싶게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완전히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다른 것들과의 접촉을 좀 더 신경 써야겠군.’
미스트를 다시 시작한 지 1일째. 내가 얻은 것은 그러한 교훈이었다.
***
“예상보다는 성공적인 편이었습니다.”
윤석호는 우리의 첫 번째 접속 결과를 그렇게 자평했다. 그는 우리가 접속해 있었던 세 시간 동안 단 1분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충혈된 눈 위로 평소처럼 멋지게 빗어 넘기지 못하고 흐트러진 앞머리칼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평소의 윤석호와는 백만 광년 정도 동떨어져 보였지만 그래도 본판이 잘생긴 덕인지 그조차도 분위기가 있어 보여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조금 더 조정해야겠군요. 그리고 진제환 씨는 곧바로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2주간 매일매일 예약을 잡아 두었습니다.”
나라면 귀찮아서라도 그 이상 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진제환은 군말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조정하는 건으로 저와 잠시 이야기를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윤석호가 굳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진제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을 돌려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제환은 잠시 내가 신경 쓰이는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윤석호를 따라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두 개의 연결된 캡슐과 함께 홀로 남겨졌다. 캡슐에서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매만져 보았던 오른쪽 다리는 이전과 똑같이 적당히 둔하게 촉각에 반응했다. 더 나빠진 것도, 좋아진 것도 없었다. 우리의 목표가 잘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흐음. 벌써 세 시간이 다 끝난 건가요? 수고했어요. 여기, 물 마실래요?”
그때 맞은편 문이 열리며 양손에 작은 컵을 든 금발의 외국인이 들어왔다. 나는 이제 그가 미스트의 초기 개발자 중 1인인 유프 카윗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묘한 쾌활함은 아직까지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가 내민 컵을 받아 마시자 물이 달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유프 카윗은 아까 전까지 윤석호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털썩 걸터앉아 나를 보았다.
흥미로 가득하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닌 호의의 시선.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해서요.”
그는 부정조차 하지 않고 태연하게 나의 질문에 답했다.
“뭐가 신기합니까?”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실제로 클리어해 낸 사람을 만났는데 당연히 신기하죠. 게다가 당신은 슈페리어 퀘스트 유저잖아요.”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시나리오 담당이었지.’
“그는 내가 만들어낸 미스트의 모든 중요 인물들 중 가장 가엾은 사람이죠. 개인적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시나리오 담당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게임 속의 인물을 마치 친근한 주변 인물처럼 언급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묘한 기분과 함께 오늘 만나지 못한 슈페리어 생각이 났다.
내일은 꼭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미스트 속에 있는 인물의 수가 몇천 명은 더 넘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당신이 만든 겁니까?”
생각난 김에 궁금한 점을 묻자 유프 카윗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나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의 뼈대를 잡고 그 인물들이 활약할 시대를 꾸몄을 뿐이에요. 나머지를 채워 넣는 건 다른 팀원들과 미슬이가 했죠.”
다른 팀원들까지는 그렇다 치고, 미슬이? 이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대체 미슬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느라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더니,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프 카윗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었다.
“미슬이는 우리가 개발할 때 도움을 받은 인공지능 컴퓨터예요. 원래 이름은 THE MIST인데, 우리 동료 중 한 명이 한국식 이름을 부여한다고 그렇게 만들어 버렸죠.”
으음. 한국식 이름이라……. 뭔가 다른 것 같았지만 즐거워 보이는 유프 카윗의 얼굴을 보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녀는 정말 완벽한 동료였어요. 우리는 4년 넘게 함께 세계를 구성했는데, 현재의 THE MIST의 세계로부터 5000년 전부터 시작해 랜덤 수치로 구성된 역사를 빠르게 돌려 현재와 같은 세계를 완성해 낸 것도 그녀죠. 하루하루가 경이로운 나날들이었어요.”
“…원래 다들 그렇게 합니까?”
뭔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보자 미소와 함께 ‘당연히 아니에요. 보통은 그러기 힘들죠. 하지만 우린 보통이 아니었거든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후후. 괜찮다면 언젠가 당신과 함께 제가 만든 인물들은 어땠는지, 시나리오는 괜찮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네요. 아쉬운 일입니다.”
유프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약속한 것도 아닌데 타이밍 좋게 윤석호와 진제환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내일 오실 때도 가능하면 함께 와 주시거나 같은 시간대에 와 주시고, 출입은 아까 받으신 카드로 처리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오늘 일정이 밀려 이만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유프, 당신도 와 주세요.”
“꼭 그래야 할까? 난 이제 더 할 일도 없다고, 윤. 막간을 틈타 유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뭐가 나빠? 미래를 위해선 이런 의견 교환도 꼭 필요하다고.”
유프 카윗이 투덜거렸으나, 그는 곧 윤석호의 엄한 표정을 본 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래. 알겠네 알겠어. 내일 봐요, 나의 소중한 퀘스트 유저 두 분.”
“아뇨. 내일부터는 못 볼 겁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바라던 할 일이 있으니까요.”
“할 일? 또 무슨 할 일?!”
두 사람이 무어라 투닥거리며 사라진 뒤 나는 진제환을 돌아보았다.
“바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
윤석호와, 하는 주어를 말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이다. 진제환은 윤석호와 유프 카윗이 사라진 쪽을 살짝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
“…그냥, 어떤 일을 좀 처리해 달라고.”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진제환이 몸을 돌려 먼저 나갔기 때문에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진제환은 나를 먼저 집에 데려다준 뒤 윤석호가 예약해 두었다는 병원으로 홀로 향했다.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해 보았지만 어차피 검사는 혼자 해야 하고 금방 끝날 테니 괜찮다고 말하는 단호함 앞에서는 파고들어 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진제환은 내가 병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상대였으니까.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13일.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머릿속으로 세워 둔 계획은 있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대체할 예비 계획들을 떠올리면서 그날 하루가 저물어 갔다.
세이버스 길드에 있다는 토렐리트의 몬스터 침공을 막아낸 마법사.
새턴에서 공개한 여덟 번째 영상 속의 마법사로도 알려진 그는 너무나 압도적인 능력을 보인 탓에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었으나, 세이버스의 길드장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공표했다.
‘그 유명한 토렐리트의 마물들을 한 방에 저세상으로 보내 준 바로 그 사람! 새턴에서 공개했던 마지막 영상 속에서 드래곤을 단신으로 죽인 그 마법사! 카프로스입니다!…….’
자그레브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검은 케이프 로브 차림의 마법사는 입술 위쪽으로는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 가족이 본다 해도 그가 누구인지 알기 힘들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태껏 카프로스라는 유저를 전혀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미친 듯이 찾기 시작했지만 나오는 정보는 전혀 없었다.
혹시 저 이름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생각으로 별 능력도 없는 사람을 데려다 세운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런 의심도 했지만 다음 날 미스트에서 제일 큰 마법사 길드인 매직토피아가 공개적으로 세이버스와의 동맹을 맺겠다고 선언하면서 반응은 또다시 뒤집히고 말았다.
마법사 유저들은 그 어떤 다른 직업을 가진 유저 집단보다도 깊고 끈끈한 유대로 맺어진 집단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이미징이라는 특수하고도 힘겨운 작업을 거쳐 마법 실력을 키워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 자부심만큼 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 마법사 유저들에 대한 유대도 깊었다.
그것은 여태 마법사 유저 중 검사나 다른 직업 유저들만큼 강하고 압도적인 실력을 내보였던 대표 유저가 거의 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는데, 같은 이유로 인해 철저한 실력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 길드원을 오로지 마법사, 혹은 마법을 서브 직업으로 배운 사람들만 받는 것으로 유명했던 매직토피아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길드마스터인 아르카나가 만약 자신보다 강한 마법사가 나타나 길드마스터의 자리를 놓고 1:1 싸움을 요청한다면 그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바로 마스터 자리를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한 일은 거의 전설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카프로스가 나타나자마자 세이버스와 동맹을 맺은 것은 그의 실력을 직접 보고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다른 유저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고, 여태 눈치만 보던 다른 마법사 유저들이 세이버스로 대거 흘러들어 가 가입을 신청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어떤 이들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인하여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야, 용아. 너, 너 내가 보내준 영상 봤어?”
도서관 구석에서 논문 준비에 시달리고 있던 대학원생 김용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제게 달려온 친구 이영혁을 보고 퀭한 눈을 돌렸다.
“뭐. 난 지금 그딴 거 볼 시간 없어.”
“그딴 거? 지금 그딴 거라고 했냐?! 일단 봐! 보면 그딴 말을 못 하게 될 거다!”
“나 지금 3일 밤샜으니까 꺼…….”
꺼지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영혁이 들이댄 VT 홀로그램 화면이 얼굴 위로 휙 덧씌워졌다. 덕분에 김용은 잘생긴 금발의 성기사가 웃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서 검은 케이프로브를 쓴 남자의 이름을 소개하며 환호성을 듣는 짧은 영상을 전부 다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상이 꺼진 뒤에도 김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봤어?! 어때?”
“……방금 그거, 진짜야? 합성 아니고?”
“진짜야, 진짜!”
친구가 흥분에 가득 찬 눈으로 김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프로스! 그 사람 맞지? 우리가 미스트에서 봤던 그 엄청난 사람!”
두 사람은 미스트를 함께 플레이하는 친구였다. 김용의 미스트 속 이름은 ‘롭’, 그리고 친구 이영혁의 미스트 속 이름은 ‘초우’였고, 두 사람은 제법 합이 잘 맞는 검사 콤비로서 모험을 즐기는 데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들의 평범했던 게임 라이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몇 달 전. 우연히 사냥을 위해 들렀던 오르겐 산맥에서 한 엄청난 마법사 유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여태껏 게임 내에 그런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고 떠나간 그 마법사 유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카프로스라고 밝혔다.
그날부터 그들은 그 유저가 혹시나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내었을까 싶어 여러 번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다시는 그를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말이다.
“역시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혼자 돌아다녔을 리가 없었어! 그 길드가 페일 나이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라는 건 봤어? 길마부터 시작해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그동안 새턴 영상에 나왔던 유저들이고, 실력도 그 영상에서 봤던 것만큼 강하대. 완전 난리도 아냐.”
요즘 논문 준비에 치여 제정신이 아니었던 김용과 달리 그의 친구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그 틈을 타 이리저리 요즘 미스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탐구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 길드에 가입하면… 그 사람도 또 볼 수 있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마침 지금 대대적으로 가입을 받고 있더라고.”
김용의 질문에 이영혁이 답했다.
“그래?”
김용은 제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종이 뭉치와 참고자료를 읽기 위한 단말기들을 전부 가방 안에 마구 쓸어 넣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캡슐방 가자.”
“그렇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캬캬캬! 가자!”
악마 같은 친구 녀석이 손뼉을 치며 김용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두 사람은 당장 학교 앞에 있는 미스트 캡슐방으로 들어가 접속을 했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작은 도시를 벗어나 토렐리트로 향했다.
얼마 전 수많은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당했었다가 이제는 워프 포인트마저 파괴당한 토렐리트는 이전에 비해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으나 사람은 오히려 늘어난 듯 보였다. 작은 도시나 마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유저들이 불안감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대도시로 이동하는 추세라더니, 그래서 그런 모양이리라고 김용, 이제는 롭이라는 이름의 검사가 된 남자는 추측했다.
“아, 저기다.”
초우가 토렐리트 광장 한쪽에 있는 게시판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이며 롭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길드 가입이나 여러 가지 공고를 낸 사람들의 전단이 붙어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은 오로지 가장 왼쪽에 붙어 있는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원 모집 공고에만 향해 있었다.
“흐음. 길드원이 되고 싶다면 그냥 토렐리트에 있는 길드하우스 분점으로 찾아가면 된다는 거지?”
“좋아, 가자고.”
간략하게 길드하우스의 위치를 설명해 놓은 전단을 읽은 두 사람은 기세 좋게 그곳으로 향했으나, 정작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줄을 서서 가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약간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거, 가입하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원래 이렇게 가입이 힘들었나?”
“나도 잘 몰라.”
“큰일이네. 가입만 하고 나가서 바로 다시 도서관에 가야 되는데…… 앗.”
“아얏. 이렇게 좁은 길에선 눈 좀 똑바로 달고 다녀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줄어드는 줄을 따라가다 보니 미처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롭은 실수로 부딪친 여자를 향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앞을 못 봐…서……?”
“응……?”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롭은 상대방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눈매,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부메랑, 그리고 특징적인 파란 머리칼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혹시 블루레이디 님……?”
“뭐야, 롭 님과 초우 님이었네요. 여기 서 계신 건 세이버스에 가입하려고 오신 건가요?”
역시 그녀는 블루레이디가 맞았다. 롭은 예전에 카프로스를 만났던 때에 파티원 중 한 명이었던 그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 몰랐기에 몹시 당황했다. 놀란 것은 초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필 카프로스가 있다는 길드에 가입하러 왔을 때 그녀와 마주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어, 어어. 네. 그러면 블루레이디 님도……?”
“전 이미 가입했죠! 두 분처럼 결정이 느리지 않아서요!”
블루레이디가 자신 있는 얼굴로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웃는 모습을 보자 롭은 부러운 마음과 함께 반가움이 샘솟았다.
“아, 그럼 역시 블루레이디 님도 그… 그분을 보시고……?”
“맞아요.”
블루레이디가 깔끔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두 분도 뵐 줄은 몰랐는데, 뭐 이것도 운명이겠죠. 전 이제 자그레브로 갈 거예요. 거기에 그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호호호.”
“앗, 정말입니까? 그럼 저희와 같이……!”
“제가 왜요? 전 에반 님하고 갈 예정이었는데요?”
롭과 초우는 그 이름을 듣고 서로의 얼굴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바라보았다. 에반이라니. 그 또한 카프로스를 만났던 때에 파티원으로 있었던 성직자가 아니던가! 그와 블루레이디가 아직도 인연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에, 에반 님도 같이 여기 오셨단 말입니까? 그러면 더더욱 같이 가야죠! 이것도 다 인연 아니겠습니까!”
“아 정말, 귀찮게 왜 이래욧?”
블루레이디는 야멸차게 그들을 거절했으나 롭은 모처럼 만난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일행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다시 파티를 맺고 세이버스 길드원이 되어 자그레브를 향해 길을 떠났다.
카프로스의 정체가 공개된 동영상이 올라온 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자기.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무료하게 TV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서재에서 간만에 VT넷을 하는 듯했던 연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부름에 의아해하며 일어나 다가가자 간만에 보는 상기된 얼굴의 연인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거 봐. 이 사람들! 우리 고객님들이잖아. 그렇지?”
그가 홀로그램 화면으로 높이 띄워 둔 창에는 제 이름을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마스터 크라토스라 밝힌 금발의 성기사가 검은 후드를 눌러 쓴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검은 망토에 이어진 후드로 얼굴을 가린 검사를 소개하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크라토스, 유완, 그리고 카프로스.
그들의 이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상착의들은 하나같이 몹시 기억에 남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연인의 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머릿속에 그들을 만났던 기억이 주르륵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가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저 두 분이 한동안 우리 저택에 안 오신다 싶더니 저쪽에 계셨군.”
남자의 이름은 최견호, 그리고 연인의 이름은 신연서. 평범한 직장인이자 동거 중인 동성 커플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그들은 함께 취미로 가상현실게임 THE MIST를 플레이하는 유저 아풀론과 휘아신스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꿈이었던 멋진 가게를 게임 속에서나마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워서 시작했었지만 규모가 커진 덕분에 한동안은 그곳에서 들어온 아이템들을 거래해 쏠쏠한 부수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페일 나이츠라는 길드가 갑자기 그들의 집이 있었던 키잘키르스텀을 점령하면서 도시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 이후부터는 게임 속의 저택 밖을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둘만의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하는 것이 재미있을 리 없었으므로 요 며칠간은 접속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는데 설마 그사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페일 나이츠에게 대항해서 만든 길드래. 어떻게 생각해?”
신연서가 기대로 가득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흐음…….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이미 네 마음은 정해진 것 같은데?”
최견호가 반문하자 신연서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들켰나? 난 저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 재밌을 것 같잖아. 하는 김에 우리 장사를 망친 페일 나이츠 놈들한테 복수도 좀 하고.”
“네가 원하는 게 곧 내가 원하는 것과 같아. 하고 싶은 대로 해.”
“좋아. 그러면 한동안 저택과 가게 문은 닫아 둬야겠네.”
신연서의 눈이 서재 한쪽에 놓아둔 두 개의 캡슐 쪽으로 향했다. 최견호는 연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한다면 뭐든.”
거의 모든 유저들이 떠난 뒤에도 꿋꿋하게 남아 있었던 얼마 안 되는 가게 중 한 곳이자, 희귀한 아이템을 암거래하기 위해 오는 이들에게 암암리에 명성이 높았던 아풀론과 휘아신스의 가게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가게 문 앞에는 잘 보이게 쓴 ‘잠시 세상을 구하고 옵니다. 아풀론♡휘아신스’라는 글씨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이 비슷한 이유로 세이버스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파괴적인 게임 플레이를 좋아하는 유저들은 반대로 페일 나이츠를 찾아갔는데, 그쪽은 이미 진작부터 합류할 이는 대부분 합류한 상황이었기에 세력이 눈에 띄게 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세이버스에 합류하는 이들의 숫자는 매일 놀랄 만큼 늘어나 어느새 전 세계 미스트 커뮤니티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큼의 규모가 되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가는 긴장감. 곧 터질 것 같은 화약고를 등 뒤에 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승리의 여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모두가 그것을 궁금해하는 가운데 세이버스와 페일 나이츠는 침묵을 지키며 각자의 준비를 묵묵히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당신의 형님과 관련된 일이죠.」
당신 형님이 그간 건드린 이가 저만이 아닌 건 아마 알고 있을 테고, 설마 거절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윤석호는 그것을 대놓고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진제환은 충분히 그의 눈 속에서 의중을 읽어낼 수 있었다.
윤석호는 진제환만을 불러낸 자리에서 짤막하게 그동안 제가 해 온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그간 사적인 정보 수집과 범죄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진서환을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현재 고소를 해 둔 상태였다. 수집된 증거나 정황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진서환이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싸움임에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일을 은폐하고 있어 골치가 아프다는 넋두리를 아주 능청스럽게 늘어놓은 뒤, 윤석호는 본론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니 이런 대응 정도로는 조금도 포기할 위인이 아니더군요. 귀찮지만 이 한국에서 언론과 법조계를 비롯한 인맥을 더 잘 잡고 있는 건 현재 그쪽이니 어쩌겠습니까. 빠른 해결을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장 원하지 않을 방법으로 허를 찔러줄 수밖에요.」
「…그게 저라는 뜻입니까.」
「그렇죠. 한국에서 명성 높은 메이지 소프트 회장 일가의 집안 사정이 상당히 콩가루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던걸요? 전 당신도 어차피 저와 비슷한 목적을 원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윤석호는 강무헌이 있을 회의실 안쪽을 흘긋 보았다.
「아무튼 본래대로라면 천천히 차근차근 밟아줄 생각이었습니다만, 요즘 상황이 예상치 못한 부분으로 흘러가는 탓에 빨리 해치우는 쪽이 낫겠다 싶더군요. 강무헌 씨를 위해서라도 더더욱요.」
「…….」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그렇지 않아도 벌써 두 번이나 저 대신 해를 입은 전적이 있는 분에 대해 그쪽에서 더 눈치채게 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 지금은 더더욱 화근이 될지 모를 사항을 사전에 차단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능숙하게 화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화법. 윤석호의 의도가 완전히 순수하지만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진제환은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강무헌이 또다시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은 결코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재 진제환이 강무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메이지 소프트 본사 사장실 앞에 서 있는 이유였다.
“사장님께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진제환은 비서의 공손한 목소리를 들으며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인상마저 주는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진전성 사장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만이구나. 무슨 일로 왔느냐?”
둘째 아들의 존재를 없는 것처럼 취급했던 것이 고작 몇 년 전까지의 일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인자해 보이는 미소. 평범한 사람이라면 깜박 속아 넘어갈 만큼 진심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진제환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내게 할 말? 흐음. 그래, 좋다. 들어보자꾸나.”
진전성이 흔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용으로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진제환은 그의 앞에 앉아 미리 가져온 종이 몇 장을 내려놓았다.
“그게 뭐지?”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사건과 관련된 서류입니다. 먼저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진전성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대로라면 그에게 그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겠으나 상대는 현재 가장 그의 흥미를 끌고 있는 아들이었다. 탐나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얻기 위해 한 번의 귀찮음 정도는 감수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서류를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사실이냐?”
“의미 없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진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를 낼 것처럼 씰룩이던 그의 입술이 잠시 후 꾹 다물렸다. 그는 분노를 참는 기색으로 손을 움직여 바깥의 비서실과 연락하는 홀로그램 창을 불러냈다.
“필라디아 개발팀에 연락해 진 팀장을 올라오라고 전해. 지금 당장.”
싸늘한 그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창에 모습을 드러낸 비서도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창을 지운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곧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사장님.”
“들어와.”
왜 아버지가 자신을 불렀는지 알지 못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들어선 진서환은 바로 앞에 진제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네가 여기는 왜……!”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팔자가 좋구나.”
큰 소리를 내려던 진서환의 입이 아버지의 차가운 한마디에 곧바로 우뚝 멈추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걸 봐라.”
진전성은 진제환에게 건네받았던 종이를 앞으로 휙 던졌다. 그것을 받아들어 읽기 시작한 진서환은 잠시 후 종이를 든 손을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의 앞에서 불안과 초조에 젖어 소심해져 있던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진제환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얼굴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이건… 네가 가져온 거냐?”
“…….”
“이런 식으로 비겁한 고자질을 하다니!”
일변한 표정의 진서환이 높이 손을 들어 종이를 집어 던졌다. 진제환은 제 발치 밑에서 구르는 종이 뭉치에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들어보십시오. 모두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우리 메이지 소프트를 위해서……!”
“회사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진전성 사장의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진서환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으나 그의 호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래도 얌전히 필라디아 개발에만 힘쓰고 있는 것 같아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어도 참작하려 했다. 조용하다 했더니 뒤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짓이나 하고 있었어!”
“아버…… 아니, 사장님! 정말로 이것들은 모두 오해입니다!”
“어디를 봐서 오해란 말이냐. 대체 언제까지 내게도 정보를 숨길 생각이었지?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도 언론의 입을 다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감히 회사와 연결된 인맥들을 이런 짓을 하는 데 써? 내가 네게 그러라고 허락한 적이 있었나?”
그 서류 안에는 진서환이 그동안 감추고 몰래 은폐하려 했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분명 진제환이 가져온 게 틀림없는 서류들. 대체 이 모든 것들을 그 녀석이 어떻게 손에 넣었단 말인가?
‘설마 내 뒷조사를 했어? 아니면 누군가 날 배신한 건가? 대체 누가?’
혼란 속에서 진서환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건 모함입니다! 저를 필라디아 개발팀장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자들이 벌인 수작이 분명합니다.”
‘저를 개발팀장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이’가 지칭하는 건 당연히도 진제환이었다. 얼굴이 닮았다는 것 외에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의 동생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소름 끼치는 무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안에 든 시커먼 속내를 반드시 여기에서 까발리지 않는다면 당하는 것은 제가 될 터였다.
어떻게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을까!
“사장님께서도 제가 그동안 얼마나 메이지 소프트를 위해 헌신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사장님과 회사를 욕보이려 한 적이 없습니다. 비록 의욕이 조금 지나친 면모가 있었던 것은 인정합니다만, 지금 보신 서류 속의 헛짓들은 전부 아랫사람들이 제 의도를 잘못 파악하여 저지른 일들이고 저 자신은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법적으로 다투어 보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날 일입니다. 혹여 사장님께 걱정을 끼칠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해결되고 나면 전부 말씀드릴 예정이었습니다!”
진서환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아버지의 침묵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추측하려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솟았다.
“그렇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한참 뒤 흘러나온 아버지는 진서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진제환에게 말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은 진서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설마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저 반푼이에게 말을 걸다니. 아버지는 정녕 저를 버리고 반푼이를 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반푼이에게 제 처분을 묻기까지 하는 모욕을 줄 작정이란 말인가.
진서환은 순간적으로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진제환의 검은 눈동자가 그의 그런 모습을 무심히 훑어내렸다.
“제게 이 정보를 넘겨준 것은 새턴 쪽입니다.”
“…….”
진전성 사장의 눈썹이 또다시 위로 움직였다. 그는 제 둘째 아들이 라이벌 회사와 접촉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능력에 더욱 감탄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둘째 아들이 지금껏 정확히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어떤 이들과 접촉하고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으나 워낙 겹겹이 비밀을 쌓아 둔 탓에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설마 그 새턴과 이렇게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아올 정도의 사이였다니.
어쩌면 지금껏 아무도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그자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데다 꼬리까지 제대로 밟힌 멍청한 큰아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건 그쪽의 경고라는 거냐?”
이번 한 번은 참작해 줄 테니 적당히 물러나라는 물밑 경고. 그러한 뜻을 담아 진전성이 물었다. 진제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은 채 차갑고도 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만을 원했습니다.”
“흐음.”
진전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대로 해결하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뜻이구나.”
늙은 호랑이는 이내 선택을 마쳤다. 그의 눈이 분노로 떨고 있는 큰아들을 향했다.
못난 놈. 입 안으로 중얼거린 목소리는 그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큰아들은 마치 그것을 듣기라도 한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래. 어차피 이런 것은 모두가 하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멍청하게 꼬리를 밟히는 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지. 상대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관대하게 벗어날 길을 마련해 주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아주 감사할 일이군그래.”
“아……. 아버… 아니, 사장님……!”
진서환이 고개를 저으며 부르짖었다. 진전성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청한 놈. 네 그 아둔함이 언젠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개발에나 집중하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진전성의 차가운 목소리 속에는 혈육을 향한 단 하나의 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왜 제 말은 믿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사장님! 단 한 번의 실수가 아닙니까! 억울합니다.”
“한 번의 실수라. 내가 그동안 네놈이 저질러 온 덜떨어진 일들을 몇 번이나 덮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진전성이 조용히 대꾸했다. 순간 진서환이 칼에 찔린 듯 얼어붙었다.
“3대를 지켜온 회사가 앞으로 더욱 거물이 될 놈들에게 약점을 잡혀 추락하는 것보다는, 너 하나를 정리하는 쪽이 훨씬 나아 보이는구나. 이번 일을 감싸 준다고 해서 너의 아둔함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뭐, 라고요…….”
“요즘 네가 필라디아 개발팀에서 벌이고 있다는 도를 넘어선 거친 업무 지시들도 이사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사내의 분위기가 너 하나 때문에 1년이 넘게 계속 엉망이야. 몇 번이나 만회할 기회를 주었는데 넌 네 편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어. 그런데도 내가 널 용서하고 또다시 묵인해야 하느냐?”
“…….”
큰아들의 벌린 입술 사이로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한 것을 확인한 뒤 진전성은 냉정한 얼굴로 고갯짓을 했다.
“내 후계자라는 이름에 도취해 그 어떤 것이든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이것으로 끝이다. 진서환 팀장, 널 오늘부로 해임한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올 필요는 없다. 이번 일은 메이지가 아닌 너 혼자의 독단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해 두마.”
아무리 진전성 사장이 회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고는 해도, 진서환이 반발하고자 한다면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진제환이 판단하기로는 그러했으나,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만 편히, 그리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남자는 그의 판단보다 훨씬 연약했다.
진서환의 눈 속에서 실낱같이 살아 있던 빛이 툭 꺼지는 것을 보며 진제환은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윤석호의 말을 떠올렸다.
‘당신과 같은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정도로도 당신의 생물학적 형님은 아마 오줌을 싸며 까무러칠 겁니다. 저는 그런 자들에 대해 아주 잘 알죠. 바라는 걸 위해서는 타인의 목숨 따위 아무렇지 않지만, 붙잡을 끈이 사라지는 순간 놀랄 만큼 작아지는 자들.’
그리고 정말 그 말대로였다.
지금쯤 윤석호는 모든 무장이 해제된 진서환이 떨어져 내려올 곳을 노리며 독사의 이빨을 쩍 벌리고서 즐겁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진서환이 잠시 주저앉을 듯 비틀거리다 인사 없이 사장실을 뛰쳐나가는 것을 보며 진제환이 미간을 찌푸리자, 진전성이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전부 지운 양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지금쯤 했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
“모자란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잘된 일이지. 대충 이 정도로 저쪽 선에서도 만족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한 뒤 진전성은 진제환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다정한 아버지 같은 미소였다.
“그런데 너는 대체 언제부터 새턴 쪽과 그렇게 선을 대고 있었던 게냐?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말이야.”
진제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연관이 있다……. 그렇군. 뭔가 의뢰라도 받고 있는 게냐?”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전성은 그것이 긍정이라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후 하고 만족스러운 숨을 흘렸다.
“그쪽에서도 알아줄 정도의 능력이라니, 대단하구나. 1년 전 모자란 녀석이 굳이 널 써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에는 이유를 몰랐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겠군. 어차피 이 세계는 전부 실력과 결과로 말해야 하지. 넌 충분히 내게 그것을 알렸다. 훌륭한 성과야. 칭찬해 주마.”
“…….”
“그쪽에서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쓴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야. 내게도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진제환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해 꽂혔다. 마치 제가 30년 정도 더 나이를 먹는다면 그렇게 변할 것 같은 수려한 중년 사내의 얼굴을 보며 진제환은 약간의 메스꺼움과 혐오를 느꼈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제 얼굴을 보기 좋다 칭찬한다 해도 단 한 번도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품고 있는 욕망, 냉혹함, 비정함 같은 것이 진제환의 눈에는 너무나 선명히 잘 보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과 회사가 얼마나 승승장구하는지 뿐이었다. 아내도, 아들도, 주변의 그 누구도 그에게는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모든 것은 수단일 뿐이었으니까.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제 안에도 그 씨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메스꺼웠다.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직도 필라디아의 개발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방금 전 그것을 담당하던 사람을 해임한 상황에서 건넬 말이 아니다. 진전성 또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는 것은 어떻게든 진제환을 제 손안에 넣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끊임없이 상대를 시험해 그가 똑똑한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싶다는 욕심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진제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쉽구나.”
진전성의 입가에 더욱 욕심 어린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몇십 년은 더 이 자리에 있을 테니 오래 기다려도 상관없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도록 해라. 너라면 곧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둘 테니까.”
진제환은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을 나섰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드디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윤석호가 바랐던 대로 진서환을 쳐냈다. 진전성 사장은 직접 그런 일에 손을 대는 타입이 아니니 적어도 앞으로 윤석호를 스토킹한다거나 강무헌에게 불똥이 튀는 일은 없으리라.
이것으로 모든 것이 곧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서환이 혹시나 정신을 차려 복수를 꿈꿀지도 모르니 그것도 경계해야 하고, 사사건건 저를 노릴 진전성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에는 적당히 오늘처럼 이용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진서환의 행동을 끝까지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 줄곧 묵인했을 진전성에게도 그 나름의 분명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셈이었다. 윤석호 또한 그가 그럴 생각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진서환만을 처리하는 것으로 넘기려 했으리라.
인정하기는 싫지만, 윤석호의 대응에는 분명 진제환이 배울 만한 점이 있기는 했다.
여태까지는 사람을 상대하는 이런 귀찮은 일에 진심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다. 복수나 제재를 하기에 진제환은 타인에게 너무나 관심이 없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진전성과 메이지 소프트라면, 지금까지와 같아서는 안 된다.
진제환은 제가 손에 쥐고 있었으나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꾹 말아쥐었다.
메이지 소프트를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아버지도, 형도 아닌 단 한 사람. 강무헌의 존재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공식적으로 메이지 소프트에서 진서환 팀장이 해임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진서환이 저지르고 은폐해 온 범죄들 또한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메이지 정도 되는 회사의 후계자가 새턴과 윤석호, 그리고 다른 이들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 행위에 모두가 놀랐다. 메이지의 진전성 사장은 아들의 행동을 조금도 감싸주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진서환이 수많은 기자 사이에 둘러싸인 채 넋이 나간 듯 초췌한 얼굴로 법정에 출석하다가 공교롭게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은 익명의 해커가 전 세계에 뿌린 덕에 수많은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한편 새턴 한국 지부장 윤석호는 이 사건에 대해 드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진서환과 그가 저지른 행위를 비난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이 사실은 미스트에 널려 있는 수많은 스파이들과 그 뒤에 있을 이들을 향한 경고임을 모두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일들이 화제가 되는 동안 진서환이 저지른 일에 미스트의 유저 강무헌이 입은 피해나 그의 이름은 교묘하게도 잘 가려졌다. 모든 것이 윤석호가 약속한 대로였다.
***
미스트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두 번째 날.
나는 혼자서 자그레브를 떠나 토렐리트의 슈페리어 탑으로 갔다. 유완은 당연히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아이아가스를 이용해 슈페리어 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라, 그냥 크란과 함께 하루 정도는 얌전히 길드를 조직화시키는 일이나 도우라고 말했다. 크란은 나와 유완을 소개한 때를 찍은 동영상이 올라간 이래 이전보다 더 엄청난 속도로 길드 가입 희망자가 몰려 정신이 없었기에 차마 따라오고 싶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했다.
“로드 타워 텔레포트.”
오랜만에 아이아가스를 쥐고 말해 본 주문은 곧장 효과를 발휘해 나를 목적지로 이동시켜 주었다. 그저 눈 한 번 깜박였을 뿐인데 아무런 반동 없이 곧바로 목적지로 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편한 일이었다.
“후우…….”
나는 끝도 없이 책장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도서관을 죽 둘러보며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이 비현실적인 공간은 이전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후드를 벗고 조금 걸어서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앉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슈페리어.”
[ ……. ]
한 번 불러서는 응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슈페리어 막대기의 문양이 새파랗게 빛나며 천천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 오랜만에 나를 부르네. ]
“그동안 조금 정신이 없었거든.”
[ 그래. 마신의 부활을 돕는 자들을 막을 길드에 합류하느라 말이지. ]
슈페리어가 조금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 흥미로워. 이렇게 대대적으로 같은 의도를 가진 이들을 모으려 드는 시도는 나로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거든. 그런 시도가 눈에 띄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건 더욱 놀라웠어. ]
음… 그건 우리가 유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겠지. 나는 대답 대신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부른 이유는 뭐야? ]
“흑룡을 죽였을 때, 당신이 사용했던 마지막 마법과 관련된 기억을 봤어. 오늘은 그것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거야.”
[ 과연. ]
짧게 대답한 슈페리어는 어쩐지 이미 나의 목적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했다.
[ 그래. 그 마법의 이름은 들었어? ]
그 마법의 이름……. 나는 상당히 의외였기에 여태 머릿속에 잘 남아 있었던 그 이름을 천천히 입에 담아 보았다.
“…THE MIST.”
그래. 이 대륙의 이름이자 게임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얻은 마법창을 보면 이름이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단 말이지……. 대체 왜일까.’
나는 마법창을 켜 보았다. 맨 아래쪽에 있는 단 하나의 미지의 마법은 여전히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