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2), 행복한 개발자들
“…지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을 마구 부려먹더니, 정작 정말 중요한 일에는 끼워주지도 않으셨더군요?”
권천우는 몹시 퉁명스러운 얼굴로 윤석호에게 그동안 조사한 데이터가 담긴 휴대용 기억장치를 건네주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 사람 말입니다! 진유완이 저보다 먼저 일을 끝냈다고 알려주시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제가 이 승부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아십니까? 괜히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아하. 그것 말이군요.”
윤석호는 받아든 기억장치를 손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 말을 할까 봐 말하지 않은 겁니다. 프로라면 괜히 열심히 했다든가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단 것을 잘 아실 텐데요?”
“…….”
“그리고 그걸 하는 와중에도 미스트는 열심히 플레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눈감아드린 것으로는 부족한 겁니까?”
미스트에 생길 뻔한 큰 위기를 이겨내고, 스토리도 한 챕터를 잘 넘기며 전 세계의 주목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윤석호는 요즘 얼굴에 완전히 빛이 났다. 뻔뻔함과 악랄함도 한층 더해져서 요즘 그를 상대하는 이들마다 혀를 내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뇨, 뭐. 그거면 충분한 걸로 치죠. 좋은 구경도 했으니까요.”
권천우는 그렇게 대답한 뒤 문득 그간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묻기로 했다.
“그런데 그 파일은 대체 어디다 쓰시려고 그렇게 절 고되게 일을 시키신 겁니까? 병합하실 회사라도 찾으시려는 겁니까?”
“나는 다른 기업의 꿈을 짓밟을 마음이 없습니다. 다 필요해서 찾은 것이니 쓸데없는 호기심은 접어 두었으면 좋겠군요.”
“하아, 뭐,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쨌든 전 더 이상 진유완도 이곳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김이 다 빠졌습니다. 퇴사하고 싶은데 됩니까?”
퇴사라는 말에 윤석호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의외군요. 권천우 씨는 우리 회사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요?”
“남 부장과 참 잘 놀지 않았습니까?”
“아……. 남 부장님, 좋은 분이셨죠.”
남무건의 이야기에 권천우는 약간 의욕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 성실하고 고지식하며 놀릴 때마다 단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넘어가는 때가 없는 작은 토끼 같은 남자는 그간 권천우가 회사를 참고 다니는 데 많은 낙이 되어주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통을 터트리겠지만 진심으로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분도 이젠 저 없는 곳에서 자유를 누려 보셔야죠. 제가 퇴사한다고 하면 매우 기뻐하실 것 같네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처리해 두도록 하죠. 어차피 권천우 씨는 정식 계약을 한 직원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권천우는 대답 대신 어깨만 한 번 으쓱한 뒤 지부장실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윤석호는 피식 웃은 뒤 손안에 든 기억장치를 재생시켜 보았다.
그동안 권천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찾아낸 전 세계의 모든 게임회사 리스트와 그중에서 가장 내실이 탄탄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으나 재정적인 문제나 투자 문제에 엮여 난항을 겪고 있는 회사들의 리스트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오늘부터는 이것이 내 또 다른 무기가 되겠지.’
윤석호는 가만히 그것을 정장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드디어 20개월간 이어졌던 ReL 프로젝트의 결과를 정산하여 본사에 있을 회장에게 보고하는 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왔던가.
VT 포트를 연결할 수 있는 고글을 쓰는 윤석호의 머릿속으로는 오늘 제가 발표할 사안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가 끝없이 주르륵 이어졌다.
한때는 실패하는 줄로만 알았던 ReL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데이브 A. 리는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D파에 대한 비밀들을 20년 전의 데이터를 분석하며 많이 알아내었다. 그가 알아낸 사항에 의하면 D파는 아주 적은 양을 사용하더라도 사용자의 뇌 사용량에 따라 신체에 효과를 보이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극대화될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잠시 신체 기능이 아주 저하된 듯 보이다가 다시 회복되는 특성이 있었다.
명현 현상과 비슷한 것일 뿐, 실제로는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던 때의 기쁨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으랴. 실제로도 ReL 프로젝트의 모든 참가자들은 프로젝트 종료 이후 이전보다 몸 상태가 약간씩 더 나아지는 유의미한 효과를 거두었다.
마지막까지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한 끝에 결국 아직까지 명현 현상 속에 붙잡혀 있게 된 단 한 명, 청개구리 같은 고집 센 남자만을 뺀다면 말이다.
윤석호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은 뒤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회장님은 더 이상 THE MIST의 경영 자체에 문제를 삼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지.’
대외적으로는 회장과 이사들이 대립한다고 알려져 있는 새턴이지만 실제로는 회장이 거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새턴 내에서 그의 의견은 절대적이었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그의 술수 중 하나라 보아야 했다.
그런 그를 납득시킨다면 이사들도 한동안 조용해질 것이고 그들은 그들대로, 윤석호는 윤석호대로 각자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하고자 하는 길에 매진할 수 있게 될 터이다. 윤석호는 그렇게 된 이후에 THE MIST의 기술력을 이용한 다른 게임들을 개발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시장성도, 작품성도 충분한 게임 기획들이 투자와 기술력의 문제로 좌초되는 경우를 윤석호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들 또한 그렇게 될 뻔했던 작은 개발사 출신이지 않았던가.
그런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직까지 병원에 잠들어 있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 평생에 걸쳐 원했던 일이었기에 윤석호는 그 일을 하고자 했다.
그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이 마음을 전할 날 따위는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나마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두 사람의 마음은 언젠가 합쳐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 들으면 그 윤석호 주제에 지독하게 우스운 짓을 한다고 비웃을 짓이었으나 윤석호는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만 제 사랑을 일부러 사고를 내어 차디찬 병실에 처박은 이들에 대한 원한만은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윤석호는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개발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새턴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곳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돈이라면 이제 충분히 가지고 있다. 지위도, 기술력도 충분했다. 비록 THE MIST는 새턴의 것이지만, 미래에 장제천이 깨어날 때에는 아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가 모르는 사이 새턴의 이사였던 이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사고를 겪으며 불명예스러운 퇴임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그것을 위해 여태 개발자 동료들과 열심히 구르며 몰래몰래 엿 먹일 정보들을 준비한 것이 아니던가. 그날을 상상할 때마다 윤석호는 일의 피로도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남에게 복수를 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다니, 이런 자신이 사랑하는 선배님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VT 포트가 연결되었다는 안내음과 함께 윤석호는 너른 회의실 안에 들어선 자신을 발견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새턴 지부장들과 본사의 이사, 중요 임직원, 그리고 회장까지 모두 자리한 중요한 회의. 그 한구석에는 데이브와 유프 카윗도 앉아 있었다.
- 오늘 회의를 마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데이브에게서 몰래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쪽지가 날아왔다. 윤석호는 잠시 그것을 의외롭게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소심한 천재가 과연 제게 먼저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일까. 무척 궁금했지만 그것은 회의 다음으로 넘겨도 될 것이었다.
- 여기 비밀 포트 쪽으로 옮겨와.
예정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의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날아온 쪽지 속의 주소에 따라 윤석호는 포트를 옮겼다. 그곳에는 윤석호뿐만이 아니라 유프 카윗과 장명진도 자리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멤버끼리 여기에 모이기는 오랜만이군요.”
“……부탁이 있어.”
데이브가 긴장된 얼굴로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사실, 이번에 ReL 프로젝트 일을 돕고 나서부터 D파와 관련된 자료를 이용해 원래의 설계대로 새로운 기기를… 음……. 만들고 있었거든.”
“뭐?”
장명진이 입을 떡 벌리자 유프 카윗이 애잔한 눈으로 데이브의 등을 두드렸다.
“없는 부품을 하나하나 창조해 가면서 정말 힘들게도 만들었지. 으응.”
“…그게 이제 거의 완성이 되어서……. 그래서 말인데.”
윤석호는 어쩐지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장님에게 적용해 보고 싶다. 그 말을 하려고 했죠?”
“…….”
“봐, 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
“뭐?”
헉하고 숨을 삼킨 데이브와 심드렁한 얼굴의 유프, 놀란 얼굴의 장명진의 대비가 우스울 만큼 선명했다. 윤석호는 아무래도 장명진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D파와 관련된 자료를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 데이브가 하고자 했던 일을 윤석호 또한 생각했다. 누가 그런 유혹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을 쓴다면 어쩌면 장제천이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유혹.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차이라면 윤석호는 결국 겁이 나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고, 데이브는 ReL 프로젝트 일을 해결하자마자 코뿔소 같은 저돌적인 모습을 발휘해 그 기기를 실제로 다시 한 개 더 만들어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그런 모습이 사랑하는 이에게 선택받은 면모이리라.
“……아마도 의사는 반대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일단 말을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그래도 그간의 데이터를 보면 내 생각에는…….”
웅얼거리며 말을 잇는 데이브의 안경 너머 눈동자를 보며 윤석호는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사실 말입니다, ReL 프로젝트의 결과를 의학적으로 증명 받고자 하는 시도를 회장님께서 현재 진행하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죠.”
“응?”
“그랬어?”
이번에는 장명진 외의 나머지 두 사람도 놀랐다. 윤석호는 저와 회장만이 알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비밀을 언급하며 약간의 씁쓸함과 속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이번 최종 결과가 좋았으니 금방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Mr. 리께서 만든 기기도 제대로 인정받고 실장님께 적용할 수 있게 되겠죠. 그때까지 좀 더 완벽하게 완성하는 데에 신경 써 주시는 쪽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아!”
데이브가 당장 소리쳤다. 그의 상기된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러모로 나에겐 불가능한 사랑이라니까. 뭐 이 정도가 한계인가.’
윤석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겉으로는 미소를 지어 속내를 감추었다. 그래도 이 동료들을 그는 꽤 좋아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오랫동안 장기 입원 중이었던 장제천의 병실에 난생처음 보는 낯선 의료기기가 몰래 들어섰다. 간혹 그 기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 정체는 철저히 비밀에 감추어졌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랫동안 이름이 바뀌지 않았던 병실의 명패가 드디어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것이 다른 병원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또 다른 누군가는 어느 날 깨어나 움직이는 그 병실의 환자를 보았다고도 말했다.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는 환자들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후자의 소문이 희망처럼 몰래 퍼져나가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