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3), 꽃밭에서
나는 멋없이 흙만 가득한 너른 꽃밭 앞에 앉아 있었다.
가을이었다면 이곳에 아름다운 해바라기들이 만개했겠지만 겨울이 막 지난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꽤 쓸쓸한 풍경이었지만 나는 어쩌면 그것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다면 보기에는 좋았겠지만, 휠체어를 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분명 굴욕적인 기분을 느끼며 그것들을 올려다보아야만 했으리라.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 지금이 더 좋았다.
“추워?”
꽃밭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을 추워서라 생각했는지 진제환이 뒤에서 조심히 물었다.
“아니.”
이미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담요까지 덮고 있는데 더 추울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준 진제환의 눈에는 아무래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으로 이 몰골이 된 건데 말이야…….’
미스트에서 마지막 전쟁을 치른 뒤, 나는 진제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마법을 썼다가 싱크로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바람에 또다시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보다 조금 더 높은 D파를 흡수하고 말았다. 여러 가지 정신적 충격이 겹친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캡슐에서 일어나자마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입원해서 검사를 하며 여러 가지 난리를 피운 끝에 현재와 같이 퇴원하여 꽃밭에 한가로이 서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참이었다.
진제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 대신 지나치게 높은 싱크로율이 유지된 상태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가 그만 부작용으로 잠깐 심장에 무리가 와 접속이 끊어졌다. 정말 큰일 날 뻔한 순간이었으나 진제환은 단 한 번도 그것을 후회한다고 한 적이 없었다. 여러모로 독하고 대단한 놈이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승조에게 연락을 했다. 퇴원 예정 날짜 즈음에 어린 시절 자주 만나 놀았던 해바라기 꽃밭이 있는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히도 오겠다는 확답은 받지 못했다.
대신 든든한 벤이 ‘엔젤 보이가 승부에서 이겼으니 약속을 지키라는 말 꼭 전달해 줄게요!’라고 답해 주었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만을 믿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꽃밭 건너편에 있는 놀이터는 내가 어렸을 때와는 구조나 기구들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풍경만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 승조를 만났고 초등학생 때에는 밥 먹는 시간보다 이곳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말하자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인 셈이다.
이곳에 온다면 승조와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만약에 안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한 고민을 말하자 진제환은 무얼 고민하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포기해.” 하고 말했다.
나 참.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면 내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승조와 함께 이 화단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했던 것을 떠올리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진제환이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타인이 내 머리를 만지는 것이었다면 내키지 않았겠지만 진제환이었기에 괜찮았다. 가만히 그 손길을 음미하고 있으려니 왠지 잠도 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만지니까 졸린데.”
“차 안에서 자. 내가 기다릴 테니.”
“……넌 그 녀석 얼굴 모르잖아.”
조용히 지적하자 진제환이 시선을 돌렸다. 오늘 승조를 보게 되면 진제환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놀랄 것이다.
원래는 데려오지 않으려 했으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한사코 옆에 붙었으니, 그 놀라움도 결국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이라 넘겨줄 예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제환의 손을 머리에서 붙잡아 내렸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어린 시절 승조가 모습을 드러냈던 골목 안쪽에서 그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훨씬 자란 승조가 코트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정말로 오기 싫은 기색이 가득한 발걸음이었던 승조가, 이내 나를 발견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휠체어 차림의 나를 보는 건 처음이겠지. 나도 가능하면 죽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보여주어야만 녀석과의 진정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신정석 의사의 충고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은 그저 그의 말이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너.”
승조가 멍하니 중얼거리다 고개를 들어 내 휠체어를 잡고 있는 진제환과 시선을 마주쳤다.
“…….”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내 휠체어가 약간 삐걱댄 것 같았다.
‘…차에 치여도 멀쩡하다던 초합성 소재인데 착각이겠지.’
“와 줘서 고맙다, 정승조.”
나는 승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예전처럼 당당해 보이도록 어깨도 쭉 폈다.
“우리 승부에서 내가 이긴 건 기억하지?”
“……그 휠체어는 뭐야.”
“이건 임시로 탄 거야. 곧 내릴 거니까 신경 꺼.”
그 말에 승조의 찌푸린 인상이 조금 펴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한 자식. 결국은 그럴 거면서 말이다…….
“이쪽은 진제환, 그리고 저쪽은 정승조. 둘 다 게임에서는 안면이 있지?”
“…….”
어색한 소개를 하는 동안 진제환과 정승조는 둘 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로만 따지면 마치 진제환과 정민후가 처음 현실에서 만났을 때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랴. 결국 나온 놈들 잘못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러면 가자고.”
“……뭘 하려고?”
승조가 조금 당혹스럽게 물었다. 나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도 나도 이젠 어른인데 뭘 하겠냐. 술 마시자.”
내 휠체어를 잡고 있던 진제환의 손 부근에서 두 번째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어설프게 뒤따라오는 승조와 휠체어를 밀고 있는 진제환의 뒤로 추억을 품은 해바라기 화단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