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7화 (17/189)

〈 17화 〉 마나의 각인 (2)

* * *

티타임, 이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시간이었어요.

차도 준비되어 있었고, 쿠키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질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는지 몇 번 손을 대다 말았거든요.

차는 투명하면서 오렌지와 마른 낙엽의 사이를 맴도는 색을 띠고 있었고, 쿠키는 납작하며 완전한 동그라미에 가까운 모양을 했죠.

양쪽 모두 그다지 달콤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 이번의 티타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그러니 질이 멀뚱멀뚱 탈리안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맛있지 않았나요? 가끔은 쓴 것도 먹을 줄 알아야 해요."

"아, 머, 먹을 수 있어요... 못 먹는 건 아닌데..."

"편식은 더 나쁜 거예요, 질."

"앗, 아... 먹을게요..."

탈리안의 잔소리에 쿠키와 꽤 많이 남아있는 뭉툭한 찻잔을 드는 질이었어요.

"먹으면서 들어요, 슬슬 펜던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요."

"네에..."

"펜던트의 모양이 쓸데없이 화려하죠? 그 역시 친구가 저에게 선물한 것의 레플리카예요. 그래도 그때 당시의 것보다 효과 같은 것은 더 좋지만요.

옛날 제 친구의 실력과 지금 저의 실력은 큰 차이가 있으니…. 근데 효과는 달랐어요.

으응… 옛날에 선물 받았던 펜던트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죠.

정말, 장신구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단순한 물건이었을 거에요.

그 친구가 펜던트를 건네며 하는 말이 좋아하니까 주는 거라고 했었던 게 기억나네요.

웃기지 않나요? 같은 여자끼리 좋아해서 주는 선물이라니 말이에요.

하는 말도 정말 웃겼어요, 그 펜던트가 있으면 위험할 때 언제든 자신이 도우러 올 수 있다고 했었죠."

"전혀 웃기지 않아요! 사랑에 성별은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말을 끊고 소리친 질의 모습에 탈리안은 일순간 놀라, 쿠키를 집으려던 손을 멈췄어요.

하지만 질의 말은 듣기 거북하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탈리안은 그 친구를 생각해준 질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네, 맞아요. 사랑에 성별은 상관없을지도 몰라요. 사랑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더군다나 그 친구는 성별에 얽매인 친구가 아니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말 그대로예요. 제 탓에 그렇게 되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뭐 어쨌든 실제로 펜던트 때문에 저는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것도 3번째가 마지막이었지만 말이에요. 그 3번째 이후에 이 세계로 넘어왔으니까요. 그러니 유품의 레플리카라고 보는 게 맞겠네요.

아, 이렇게 말하면 좀… 쓰는 데 불편할까요?"

질의 기색을 살피는 탈리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에서 쿠키로 시선의 방향을 바꿨어요.

목에 걸린 펜던트를 한 손으로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이번 이야기는 저번보다 짧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유품의 복제품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만 해도 탈리안이 얼마나 질을 신경 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유품이니까, 복제품이니까 사용하기 꺼림칙하고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탈리안이 무슨 생각과 감정을 품고 질에게 유품의 복제품을 줬을지….

직접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복잡한 심경일 것은 확실할 겁니다.

“몸에서 절대로 떨어트리지 않을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복제품이라지만 모양에만 한정되는 이야기일 뿐이고…. 질이 항상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완전히 다른 물건이니까요."

질은 부끄러웠는지 탈리안의 말에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고개를 들어 탈리안을 바라봤어요.

"그런데 도서관에는 정말 안 나가도 되는 거예요?"

"하루 정도 빼먹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걸요. …아마도요."

"언니는 가끔 어물쩍하게 넘어가려는 나쁜 버릇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전부터 한두 번씩 보여주었던 모습이죠.

그렇다고 마녀인 탈리안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걸 알고 있으니 굳이 탈리안도 자신의 안 좋은 버릇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저는 느긋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니."

"다, 다음부터는 매일 나가면 되잖아요,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감히 예상해보자면 탈리안을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질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없을 것 같네요.

"흠! 그래서… 질,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마나의 각인을 새기고 싶은 생각은 아직도 여전한가요?"

"해주실 거예요?"

"…이미 말했었지만 저는 해주기 싫다는 입장이에요. 그렇지만 질… 당신이 원한다면, 못 해줄 건 없어요."

한번 다짐을 했음에도 탈리안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가득 담겨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두려움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도 묻어있는 듯했죠.

당장 고열에 시달리다 이제야 괜찮아진 질에게 괜한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자책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탈리안이 마나의 각인에 대해 말한 것은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음이 아닐까요.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약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해요, 하루에서 이틀 정도…."

"제가 할 일은 없어요?"

"기다리는 게 정 심심하고 지루해서 버티기 힘들다면…. 이 집 지하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지하라는 말에 고개를 기울이는 질이었어요.

그도 그럴 게 이 집에 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질 스스로도 지하로 향하는 문이나 계단을 본 기억도 없었어요.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야 당연합니다.

"이 집은 여러 갈래의 마나의 맥이 지나는 곳 위에 지어졌어요. 그렇다면 지하에 순환하는 마나가 상당하겠죠."

"네에..."

"그러니 자연의 마나에 익숙해져 보세요. 마법사라는 것은 자신의 마나로만 마법을 쓰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 언니...? 지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

웬만해서는 보지 못하는 탈리안의 벙 찐 얼굴을 보게 됐네요.

질이라면 어떻게든 지하로 가는 통로를 봤을 것으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죠.

"어, 언니...? 뭐 하는 거예요?"

의자에서 일어나 질에게 등을 보인 채로 무릎을 꿇는 모습.

이건 그거네요, 어부바.

마법을 쓸 수 있는 탈리안이 굳이 육체노동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질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충분히 성공했네요.

"혹시 혼자 일어설 수 있나요? 하루 동안 아팠으니까 업어줄 생각이었는데요."

"...업힐게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바로 업히는 질이었어요.

마녀가 업어주겠다는데 사양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오히려 마녀라서 피할 사람은 있겠네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부엌으로 가는 복도 오른편에 있어요."

"킁, 킁."

설명하거나 말거나 질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탈리안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았습니다.

저번에 핏츠 열매의 냄새가 난다고 했던 걸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냄새에 반응해 하게 된 행동이었을 거에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온전히 탈리안의 몫이지만요.

"질, 냄새를 맡는 건 그만 해요."

"앗, 아... 네에..."

화난 목소리는 아니지만 단호하면서도 낮게 깔린 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이건 나쁜 행동이니 하면 안 돼!'라고 다그치는 듯한 부모의 목소리 말이죠.

"어쨌든…. 질, 봐요. 여기 촛대처럼 생긴 손잡이 보이죠? 앞으로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밀고, 왼쪽으로 밀면 돼요. 미닫이 형식이거든요."

탈리안이 문을 열자마자 지하로 향하는 상당히 긴 원형의 계단이 나타났어요.

그 끝이 보이지 않아 한쪽 벽면에 등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난간 아래로는 까만 점밖에 보이지 않았죠.

"또 비밀의 방이네요..."

"저만 살고 있던 집이라 누군가 들어갈 리는 없지만, 단순한 문이었을 때는 가끔 소동물이 들어갔던 적이 있어서요."

그런데 탈리안이 갑자기 난간 위에 올라섰습니다.

"...언니? 뭐 하세요? 위험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단순히 계단의 길이가 길어서 빨리 가려는 것뿐이니까요."

"저, 저.. 저는.. 오래 걸려도, 되는.. 데요...?"

“내려가서 도서관에 있는 것과 같은 문을 하나 더 만들어둘 테니 이번 한 번만 참아요.”

겁에 질린 채로 간곡하게 부탁해보는 질이었지만 이미 업혀있는 상태라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탈리안에게 업혀있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잡혀있다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질이 약간 불쌍하긴 하지만, 별수 없죠.

“언니이이이!!”

말의 의미 그대로 추락한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속도로 무섭게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계단 사이의 허공에는 질의 비명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습니다.

지면에 도착하기까지 약 5분이 걸렸을까요.

확실히 질 혼자서 걸어 내려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계단의 길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의 질에게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제일 급하겠지만 말이에요.

눈물로 얼룩진 저 얼굴, 가쁘게 몰아쉬는 숨, 탈리안의 옷을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은 부들거리는 손까지….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되네요.

“너무해요... 흑, 흡... 무섭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중간에 멈췄었잖아요?”

“그게 더 무서웠다구요...”

“앞으로 각인도 새겨야 하고, 온갖 위험도 마주해야 하는데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쨌든 다 왔으니 내려와 볼래요? 이 앞은 질이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으니까, 직접 보는 게 더 좋을 거예요.”

탈리안의 말에 따라 문 앞에 선 질이었지만, 문에는 문고리가 없었어요.

문의 형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열쇠를 꽂는 곳도, 문고리도, 잠금장치도 없었죠.

"원래 그런 문이에요, 있는 힘껏 밀어보세요."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탈리안을 바라보자 밀어서 열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질은 손을 문에 대자마자 다시 떼었어요.

"왜 그러세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놀랐어요... 몸에 확하고 바람이 분 것 같은, 근데 몸 바깥이 아니라, 몸 속에..."

"잠재된 마나의 양도 그렇고, 재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요. 이어서 열어보세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고선 얼떨결에 칭찬을 받아버린 질이었어요.

그리고 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하는데, 틈새 사이로 연녹색의 빛나는 입자들과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순간 움직임을 멈춘 질은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열었어요.

자기보다 큰 돌로 만들어진 문이라 무게가 꽤 나갈 텐데 상당히 잘 열고 있네요.

문이 활짝 열린 그곳에는 말 그대로 마나가 휘몰아치는 마나의 맥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마나의 맥은 은하, 흩어진 마나는 별과 같았어요.

전 세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별이란 별은 다 뿌려놓은 듯한 광경에 질은 시선을 빼앗겼어요.

방 중앙에 가득 찬 마나는 전등이나 촛불이 없음에도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죠.

자연의 마나가 요동치는 장소이기 때문인지 밀폐된 공간임에도 상쾌한 바람이 불었고, 답답한 느낌은 없었어요.

방의 중앙을 제외한 구석진 곳에는 마나가 천천히 맴돌아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와아...!"

정신이 완전히 팔려버린 질은 탈리안이 바로 옆에 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마음에 들었나요? 이곳이 앞으로 당신이 자연의 마나와 친숙해질 공간이에요. 저는 문을 위의 입구랑 연결시켜 놓을 테니, 처음은 마나의 옆에만 있어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마나의 맥의 중심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마세요. 위험하니까요."

"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