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대 없는 난 여기까지다
“잔악후작. 대공의 번견 같으니! 그렇게 맥이 다 빠져서 이 니카의 검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바란은 눈을 깜빡였다. 햇빛이 눈이 아프도록 들이쳤다. 위화감이 들었다. 왕국의 겨울 중에 이토록 쾌청한 날은 잘 없었다. 한눈을 판 사이에 귀청이 다 시끄러운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카 경’의 목소리였다.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바란을 내려다 보는 니카의 창백한 얼굴이 엄숙히 얼어붙어 있었다. 바란에게 미소지었던 시절은 전부 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냥 차가웠다.
‘꿈이구나.’
울컥 가슴이 문드러졌다.
“대답해라.”
니카가 일갈했다. 하지만 바란은 불덩이를 삼키고 뱉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꼭 깨물며 견뎠다.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더러운 용인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그런가? 너도 결국은 다른 놈들이랑 똑같이 구역질 나는 귀족이니까.”
무시에 질색한 니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란은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에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을 것이다. 때문에 니카의 엄숙하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콧잔등에 주름이 졌으며, 그의 검은 눈은 점차 물기로 젖어 아주 가련해졌다. 바라보기만 해도 니카의 존재가 경이로워 숨이 막혔다. 바란은 입술을 틀어막은 손바닥에 더 힘을 주었다.
“대답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바란.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바란?”
“바란 탈타미오….”
“꼬마.”
중첩된 목소리가 사방에서 돌풍처럼 불어닥쳐 바란의 의식을 뒤덮었다. 대답해서는 안 된다. 바란은 생각했다. 대답을 하고 나면 분명 꿈에서 깨어나 버릴 테니까. 그러면 더 이상은 니카를 볼 수 없다. 기억 속에서 만들어낸 이까짓 거짓 덩어리 니카마저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깨어나고 싶지 않아, 니카.’
니카는 애틋한 눈길을 접고 그저 무표정 일색으로 바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잔상이 점차 흐릿하고 투명하게 변하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란은 여전히 겁쟁이처럼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한 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은 까맣게 암전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암청색 돌로 된 단단한 천장이 보였다. 횃불을 매달 수 있는 철제 구멍들이 틈틈이 있었다. 꿈속이라고 착각할 방도가 없는 차가운 바람이 쇠창살로 세 번 쪼개진 네모난 창밖에서 불어왔다. 바란은 입술을 한번 꿈틀거릴 힘이 없었다. 고개를 내려 고통이 심한 부위를 한번 훑어보았다. 어긋난 발목과 화살에 꿰뚫린 상처, 검날을 줍겠다고 베였던 곳에까지 꼼꼼한 치료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바란은 고개를 들었다.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 누군지 확인했다. 집시 구더기였다. 바란이 원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힘없이 도로 머리를 바닥에 뉘었다. 냉기가 뻗어 올라 온몸을 괴롭혔다. 게다가 다치지 않은 쪽 발목에는 지긋지긋한 족쇄가 달려 있었다.
“우선은 식사를 좀 하셔야 합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던 게 어느덧 삼일 전 일입니다.”
지금 무슨 시시한 소리를 하는 걸까? 구더기는 지금 바란이 궁금해하는 단 한 가지가 니카의 안위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구태여 언급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지?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 치솟아서 바란은 말없이 거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팔을 조금 움직이는 것뿐인데 어깨와 팔, 그리고 그 아래에 복잡하게 얽힌 근육들이 전부 다 통증을 호소했다.
바란의 입술에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구더기는 적잖이 당황한 듯이 그를 달래고자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헬린 힐벤이 죽어서 앙살라테 드라코슨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 추세고, 그 목석같던 사사바란 공작을 비롯해서 왕자와 척을 졌던 귀족들이 죄다 눈치를 보면서 왕실에다 기부금을 쏟는 중이라 했다. 그러나 전부 다 핵심은 전부 다 빠진 이야기들에 불과했다.
묻고 싶었다. 니카는, 어떻게 된 거냐고. 살아있기나 한 거냐고. 그가 의식을 잃은 지 삼 일이 지났다면, 니카의 생사를 확인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느냐고.
“…….”
바란은 바짝 긴장한 목젖을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니카의 모습이, 그의 몸이 무너지는 돌덩이 너머로 덧없이 가리워 사라지던 광경이 자꾸만 기억에 남았다. 용기를 내어 물어보려다가도 풀썩 마음이 내려앉고 지레 좌절한다. 싫었다. 만일 최악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하….”
때마침 구더기가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란은 한숨의 의미를 유추하느라 속으로 무척이나 분주해졌다. 이윽고 바란의 심정을 투명하게 꿰뚫어 본 신통방통한 집시가 듣던 중 반가운 말을 꺼내 들었다. 여태까지의 고민이 전부 사라지는 명쾌한 해답이었다.
“거, 불쌍한 표정 그만 좀 지어요. 기사 나리 때문이라면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요.”
바란의 낯이 환히 밝아지기가 무섭게 의미심장한 꼬리가 뒤를 이었다.
“지금 그쪽이 기사 나리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진짜 위험한 게 누군지도 모르고, 불쌍하게스리.”
* * *
생채기 위에 고약이 두툼하게 펴 발라 졌다. 화가가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둔 것처럼 살갗 위로 봉긋하게 미끈거리는 뚜껑이 올랐다. 니카는 신경질적인 박자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지금 이깟 스친 상처에 약을 바르느라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기적입니다.”
“기적이에요.”
“꼼짝없이 생매장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태연히 나타나실 줄이야!”
신관들은 심심한 생활 속에서 갇혀 사는 경향이 있는 까닭인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지각변동에 유독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작위적일 정도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늘어놓으며 니카에게 놀라움을 토로했다. 그나마 입만큼이나 부지런히 손을 놀려 붕대를 감아주고 있으니 망정이지, 시끄럽게 나불대기만 했으면 니카의 인내심은 이미 오래 전에 바닥이 났을 터였다.
“아무 일 없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붕괴 속에서 모습을 감추셨을 때는 영락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셨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건 엉겁결에 대신관 자리에 올라 헬린 힐벤의 협박에 굴하던 청년이 하는 소리다. 그는 다른 용들의 신전 신관들과 같이 니카의 혈통과 용맹에 감복하였다면서, 신전 주도 하에 니카의 신변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앙살라테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목숨이 노려지는 마당에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도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건 견디기 어려웠다. 니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조심하세요.”
“대단한 상처도 아니고, 금방 낫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된다구요. 니카 님께서 용이시라 긁힌 정도에 끝난 거지만, 떨어지는 바윗돌에 깔리셨었는데요.”
대신관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말씀 낮춰주십시오.”
“…대신관님이야말로.”
“저는 적법하게 세습된 대신관도 아닌데요, 뭘. 아마 얼마 안 있어서 대신관 자리는 새로 이어받을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니카는 더 이상 대화에 흥미가 없다는 듯이 사뿐히 일어나서 벗어둔 윗옷을 집어 들었다. 애초에 바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순순히 뒤를 따랐던 것뿐이니까.
니카가 팔을 꿰어 입는 동안 주변의 신관들은 깨끗한 붕대와 끓인 물이 담긴 대야를 정리하면서 서로 간에 슬그머니 눈치를 주고받았다. 니카는 그들의 분주한 시선이 오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맨손으로 돌벽을 깨부수고 올라 온 니카에게 있어서 ‘용들의 무덤’에 홀로 갇힌다는 것은 대단한 문제도 못 되었다. 그는 예의 그 신비로운 힘을 십분 활용해서 폐허가 된 ‘용들의 무덤’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촘촘히 부서져서 짓눌린 난장판을 헤집고 나오기까지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아무튼 니카는 살아남았다.
‘헬린 힐벤이 죽었으니…. 끝났군,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니카가 기사의 이름을 갖게 되면서부터 줄곧 왕국 내에 전쟁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니카는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기사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용들의 무덤’의 붕괴에도 애틀턴 왕성은 남쪽 건축물 일부가 허물어지는 정도의 타격에 그쳤다. 전부 다 무너지기엔 애틀턴 왕성이 너무도 견고하고 거대했던 까닭이었다.
폐허를 빠져나온 니카가 이를 아득 갈며 경비병을 통해 왕자에게로 올린 귀환보고는, 놀랍게도 신전 측으로 먼저 새어나갔다. 어깨의 찰과상에서 뚝뚝 피가 흐르는 것을 보이자, 어디 서부턴가 갑자기 신관들이 나타나 다급히 니카를 치료했다.
‘큰 상처도 아니었는데. 가만 두질 않는군.’
니카의 존재를 보며 만세를 부르다가 상처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보더니 생각을 완전히 바꾼 성싶었다. 귀한 피가 흘러나오는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방방 날뛰었다. 이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신관들이 줄지어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만 끝내 니카를 이끌고 그들이 치료실이라고 부르는 허름한 방간으로 이동했다. 방 안에 놓인 구급상자를 활용해서 니카를 치료하고 그에게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최선의 조치를 취해주었다.
전할 말이 있는 듯 알짱대며 서로 간에 시선을 주고받는 신관들 사이로 니카는 걸음을 내디뎠다.
“탈타미오 후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네에? 그, 그것이….”
대답이 곧장 나오지 않자 니카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아쉬운 건 물론 신관들 쪽이었다. 그들은 다급히 소맷귀와 바짓부리에 매달려 사실대로 실토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만, 대공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던 놈이니 사형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사형. 머리가 아뜩해졌다.
‘바란을 죽인다고? 어째서?’
왕자는 응당 바란을 책임지고 보호해야 했다. 이제 와서 이렇게 입을 닦고 모른 척 할 심산일까? 니카가 멈칫 굳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있던 때였다.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검을 든 왕국기사 여럿이 들이닥쳐 니카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신관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는데, 그들을 깡그리 무시한 뒤 니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니카 경. 모시러 왔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앙살라테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물론 혈통이 공개적으로 밝혀진 순간부터 니카는 누구에게든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이 주목을 모으는 존재였다. 신전 측에서 니카를 낚아채 사라진 판에 언제까지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을 터였다.
니카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가만 빼앗길 수 없는 것은 신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관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역정을 냈다.
“니카 님의 신변은 신전에서 보호하고 있다. 이 무슨 무엄한 짓이냐!”
“니카 경은 왕국기사로서 충성을 맹세한 분이시다! 이 나라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의 부름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적법한 왕위 계승자?”
대신관은 코웃음을 쳤다. 헬린 힐벤 앞에서는 설설 기던 남자가 담대히 구는 모습은 낯설었다. 대신관은 잘 들으라는 듯이 손가락을 위로 바짝 세웠는데, 그 이상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니카는 일부러 그의 말 허리를 끊고 들어가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가겠습니다.”
“하, 하지만. 니카 님!”
니카의 귓바퀴 근처로 한 발짝 파고든 대신관은 심려가 짙은 목소리로 만류했다. 앙살라테가 이끄는 저 치들의 속셈이야 이미 뻔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는 신전 역시도 니카의 혈통에 기대어 빼먹을 것이 무언지 재어보고 있는 주제에….
대신관은 그 모순점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신전이 하는 일은 전부 대의를 위해서라고 굳게 믿는 모양으로 니카의 실소가 가진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라면 이미 질릴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신관들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니카가 조금 덜 아리송한 말로 풀어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눈치였지만, 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니카는 어차피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니카가 흘리는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입 안의 혀처럼 상냥하게 구는 건 그저 니카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가야 해요.”
고대룡 혼혈이라는 어마어마한 명패를 달고 나니 세상이 호의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것이 겉껍질에 불과함을 니카는 잘 알았다. 누구도 바닥을 기어 다니던 용인 니카와 용혈 니카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니카아….’
팔 년 전부터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볼품없는 꼬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 * *
새로운 용혈의 등장으로 상황이 배배 꼬여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지독한 헬린 힐벤이 저승길을 갔으니 그럭저럭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태까진 아니었다. 일약 유명인으로 떠오른 우리의 용인기사를 유혹할 수단이 있으니까. 앙살라테는 진하게 우린 떫은 엽차로 정신을 바짝 깨웠다.
“…절 보자고 하셨다고요.”
“그래, 수리.”
문을 밀고 들어선 수리의 목소리에는 힘은 물론이고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앙살라테는 원래 생각 많은 놈들이란 속으로 혼자 부루퉁해지기 십상이니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아마도 전에 막쉬롭에 대해 언질하며 나섰을 때 그가 수리의 주제를 일깨워주느라고 윽박지른 일에 토라진 것이리라.
“용인 얘기를 하려고 불렀다.”
“용혈 말씀이시죠?”
수리 말마따나 더 이상 용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판은 아니었다. 그녀가 정정하고 나섰으나 앙살라테는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거렸을 뿐이다. 끝까지 호칭을 바꾸진 않았다.
“네 용인기사. 그놈이랑 네가 결혼을 해줘야겠어.”
날카롭게 뜨인 눈이 앙살라테의 저의를 의심하며 길게 뺨을 훑었다. 괜스레 가려운 듯한 착각이 밀려와서 앙살라테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물론 수리 드라코슨의 첫 결혼식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말만 듣더라도 진저리가 날 법 했다.
“결혼이요.”
“그래.”
“제 인생에 두 번째 결혼은 없어요.”
“평화롭게 해결하려면 이 방법뿐이야. 그 용인기사가 너를 아주 오랜 세월 은애해 왔다는 것을 대체 왕국의 누가 모르느냐?”
수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열에 들뜬 시선이 수년 동안이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용인기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기사의 애정을 그대로 방관했던 것은 니카가 자신의 분수를 무척 잘 알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다음으로는, 보호할 대상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갖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니카는 아무리 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왕녀에게는 생채기 한번 남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상황이 예와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뺨을 맞아가면서까지 잔악후작을 변호하려던 니카 경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앙살라테가 뜻하는 바는 상식선에서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드라코슨의 레이디와 혜성처럼 등장한 고대룡의 혼혈을 결혼시킨다면 왕위 계승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뿐더러 니카의 정통성을 드라코슨의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수리는 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시는 대로 잘 안 될 거예요.”
“…난 시작하지도 않은 계획에 초장부터 누가 재 뿌리는 걸 안 좋아해.”
“그리고, 저와 단둘이서만 의논하실 문제는 확실히 아니고요. 당사자 없이 얘기해봤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이죠?”
“안 그래도 이리로 불렀어. 도착할 때가 된 거 같군.”
콰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앙살라테 왕자가 임시로 맡아 사용하고 있는 애틀턴 왕성의 응접실 문짝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가지 문제는 경첩이 뜯어지며 결국 방문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는 점이었다. 부서진 두꺼운 방문의 둥근 손잡이를 붙잡은 니카가, 당황한 표정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
짧은 시선이 오갔다. 니카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응접실 안쪽으로 망설이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로 슬그머니 문을 끼워 맞추다시피 해서 닫았는데, 손잡이 위치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문을 위아래 뒤집어다 갖다 박아넣은 모양이 됐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것은 잠시였다. 니카는 방금 굳세게 닫은 문에서 이상을 발견하자마자 바짝 다가서서 눈 깜짝할 새 도로 문을 뜯어내고 다시 맞게 끼웠다. 경첩이 박살이 난 판이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언뜻 보면 멀쩡하게 보였다.
“마침 잘 왔군, 경. 그 무덤을 뚫고 혼자 힘으로 올라왔다고 들었는데-.”
“바란 탈타미오는 어디에 있지?”
니카가 말을 끊고 물었다. 앙살라테의 이맛팍에 힘줄이 우득 돋았다.
“호오, 예의도 갖추지 않고, 다짜고짜 목청을 높이다니? 거기다 존댓말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기까지…. 천출이라고만 들어서 이렇게 ‘왕위계승권자의 삶’에 대해 적응이 빠를 줄은 몰랐네.”
앙살라테는 태연한 척 꾸짖고 나섰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드문드문 떨렸다. 니카에게서 기인한 원인불명의 압박감 때문이었다. 니카의 기분이 썩 밝은 상태가 아니라서 나타나는 현상처럼 느껴졌다.
앙살라테는 특별히 신경 써서 니카에게 살가운 미소를 날렸으나 그런다고 니카의 흉흉한 표정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 앙살라테는 거짓 호의로 물들여 애써 잡아당겨 두었던 입술을 원상 복귀하며 생각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였다. 니카도 이것에는 동의하고 있으리라 싶었다.
물론 니카가 한때는 앙살라테가 왕의 재목이라 믿어 마지않고 실제로 그 활동을 돕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상에 아무리 욕심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도 저 정도로 거대한 명분을 손에 넣고 나면 물욕이라는 것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니까.
“바란 탈타미오를 찾는다고 했나? 아쉽지만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군. 그치는 힐벤의 최측근 심복이었으니까. 처리는 경이 끼어들 바가 아니야.”
니카는 멈칫했다.
“힐벤의 심복이라고?”
“왕국에 그 사실 모르는 이도 있나?”
“어떻게 감히 바란을 그렇게 부르지.”
니카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잔악후작을 주연으로 한 왕자군의 정보전에 대해서 이미 짐작한 바가 있는 니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분노에 못 이겨 거센 기운을 입고 번들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그래.”
“경. 그런 시시한 얘기를 할 게 아니라, 우리 대화에 좀 껴 보든가 하라고. 나랑 수리는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결혼이라고?”
“그래.”
왕자를 매섭게 노려보던 니카가 어리둥절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마 수리가 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장 왕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온몸으로 펄쩍 뛸 이유가 없으니까.
흉흉하던 니카의 기세가 한풀 꺾이며 멋쩍게 눈살을 찌푸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앙살라테는 단도직입적인 제안을 꺼냈다.
“너와 수리의 결혼이 될 거야.”
“뭐?”
암만 수리 왕녀를 오래토록 은애해 왔던 니카가 여러 가지 상상을 주워섬기며 살아 왔다지만 왕족과의 결혼은 또 그 이상의 이야기였다. 수리 왕녀와 그의 결혼이라니? 염치가 있는 한은 망상으로조차도 다다르지 못하는 결말이었다. 니카 경은 흉흉한 기세를 잠시 차치해두고 무척 멍청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경도 바보가 아니니 눈치챘겠지만, 덕택에 상황이 무척 복잡하게 됐어. 게임이 끝난 줄 알았더니 체스판 끝까지 아득바득 달려온 졸이 퀸으로 둔갑한 셈이지. 경, 나는 평화주의자야.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하기에 이 나라는 많이 지쳤어. 허나 경이 드라코슨과 다른 길을 걷는 한 갈등은 끊이지 않을 테지.”
이 말은 니카를 깊은 고민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왕자의 말이 맞았다. 앙살라테와 헬린이 벌인 십 년 가까워 가는 전쟁통 속에서 백성들은 충분한 고난을 당했으며 이 나라의 경제는 구렁텅이에 빠졌다. 당장 추슬러 복원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니카의 존재로 권력이 양분되면 곤란했다.
“수리와 결혼해서 내 왕위계승을 지지해. 그러면 우리 모두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그만둘 수 있어, 경.”
신전의 은근한 지지를 받기 시작한 니카의 존재는 앙살라테에게 있어서 압박감이고 가장 큰 방해였다. 앙살라테가 가지지 못한 가장 거대한 명분을 니카가 등에 지고 등장한 탓이다. 혈통.
“그토록 원해 왔던 미래잖아?”
왕자가 말했다. 내포된 의미는 컸다. 왕녀에 대한 은애, 사람들의 관심을 열망하던 어린 시절, 영광, 기사의 자리를 지키고 이름을 드높이는 일….
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오갔다. 응접실의 세 사람은 각자 얼굴을 단정하게 갈무리 했으나 그 이면에서는 긴장감이 팽배해져만 갔다.
니카는 앙살라테가 바란의 신변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 듯이, 들끓는 분노를 한 구석에 밀어두고 살며시 존대어를 챙겨 들었다.
“…그렇게하면 바란을 풀어주실 겁니까?”
“생각해볼 문제지. 미안하지만 확언은 못 줘.”
왕자와 후작 사이에서만 오가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레이먼드까지 셈해도 이 세상에 단 세 명이었다. 어떤 경로로 니카가 바란의 정체를 알게된 건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앙살라테는 그것이 니카가 바란에게 집착하고 드는 것과 분명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했다.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나섰다.
“그래, 네 말대로 후작은 나를 위해 일했어. 하지만 아무리 명분이 좋았던들 대공의 신임을 위해 죽인 목숨이 너무 많다. ‘잔악후작’의 손에 동료와 가족을 잃은 이들은 하나같이 그가 정의의 철퇴를 맞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처형대에서 내려보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아주 거대한 대가가 필요할 거야. 원수들마저 납득시킬 수 있는 거대한 명분이 말이야.”
니카로서는 그 거대한 명분이 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간곡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늘에 맹세코, 그 방법이 뭔지 알았다면 내가 진즉 후작을 구했겠지.”
니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 없이 입을 다물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듯한 막막한 심정이 그를 괴롭혔다. 짧은 한숨을 쉬었다가, 도로 깊게 들이켰다.
“이런 식으로 후작을 토사구팽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 속 좋은 소리 말아. 그렇다면 대체 어떡하겠단 거야? 나라고 맘 편히 손절하려는 게 아니란 말이야.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실은 내가 심은 간자였노라고 아무 증거도 없이 선언해봤자 대체 누가 믿겠어? 다들 이 앙살라테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백성들은 잔악후작을 잊지 않았어. 그 악명까지 내가 안고 가는 건 불가능해.”
“비겁자.”
니카는 불덩이를 토해내는 듯이 속삭였다. 용맹 없이는 시체 취급 당하는 용병 신분으로 꽤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앙살라테에게 모욕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그는 수리의 나직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뒤덮은 분노를 다 견뎌내지 못했다. 그가 뭐라고 일갈하려는 참에 니카가 말을 낚아챘다.
“명분이 필요하다면 찾아보이겠습니다. 그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처형은 한 달 후다.”
시간이 촉박함을 의미했다. 눈이 가늘어진 앙살라테가 제안했다.
“좋아. 마지막 기회를 주지.”
* * *
“정말 이대로 떠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렇게 걱정스럽게 묻는 것은 구더기였다. 니카는 안장이 얹힌 말의 옆구리 봇짐에 어떤 물건이 들었는지 일일이 꺼내서 확인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말씨에 묻어나는 걱정스러운 감정은 표정을 이루는 이목구비 각각에도 역력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한 달이 지나기 전엔 반드시 돌아온다.”
“탈타미오 후작을 먼저 만나고 나서 출발하셔도 늦지 않잖아요.”
니카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 정도 생각을 못 해 봤을 리가 없었다. 바란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 증오스럽고 재수 없는 앙살라테 왕자에게도 설설 기어대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고작해야 그가 얻어들은 건 바란이 무사하며 체력을 회복 중이라는 이야기 뿐이었다.
바란을 만나서 상호 안위를 먼저 확인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구더기의 일리 있는 이야기에 니카는 한숨으로 응대했다.
“앙살라테 왕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언제는 허락 받은 일만 했었냐구요. 제 말은.”
“왕자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었다가 바란이 위험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아.”
“제안도 그래서 받아들이셨나요?”
“조금은.”
왕자를 만났던 날 받은 제안의 내용은 간결했다. 탈타미오로 가서 바란이 전쟁에 있어서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낱낱이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바란의 악행을 대속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잡으면 사형을 취소하거나 최소한 참작하여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는 대공파 귀족들을 법정에 세워 재판하기 위해서 조사단을 각지로 파견했는데, 탈타미오 영지까지 갈 조사단에는 아직 단장이 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애틀턴으로부터 강을 건너가, 탈타르를 경유한 다음, 북단의 탈타미오까지 가는 것은 분명히 긴 여정이었다. 게다가 유죄가 나올 게 뻔한 ‘잔악후작’이라는 굵직한 인물을 위해서 수고스럽게 꼼꼼한 조사를 감수하고 싶어 하는 인력은 구하기 힘들었다. 공석이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니카는 제안을 받자마자 이 여정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떻게든 바란의 결백을,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도덕을 증명해 보이고 사형을 면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여정에서 마편을 잡아 왕자의 휘하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속과 충성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따라서 왕자 역시 니카의 결정을 기꺼워 했다.
“바란을 부탁하겠다.”
“…부탁이라니 무슨 거창하고 염치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저도 정치범 수감해 둔 곳엔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 있어. 적어도 이제부턴 그렇게 될 거다. 바란 탈타미오에게 사람을 붙여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너의 이름을 적어뒀거든.”
“아, 뭐라고요?”
구더기가 찜찜하게 진저리를 냈다. 사전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시녀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진짜 말도 안 돼.”
“애틀턴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 뿐이야. 부탁이다.”
“그 한 사람이란 거 제 얘기인가요?”
니카 경처럼 말솜씨를 내다 판 수준의 남자가 이렇게까지 유려한 표현을 들어 애걸하는 것은 드물었다. 조금 어깨를 으쓱거리게 되었다. 이내 구더기는 자신의 활약상을 드디어 니카 경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너 말고. 바란 얘기다.”
“…….”
“그러니까 날 위해서 그를 지켜줘야 해. 알겠나?”
무슨 말을 또 할 수 있었을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혀만 졸졸 찼다.
“저기요. 실례합니다.”
구더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홀연히 나타난 어린 시종 하나가 니카의 손을 공손히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은 무늬가 없어서 소속을 좀처럼 눈치채기 힘든 플레인 베스트와 바지 차림이었고, 니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들던 ‘좋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구태여 그 ‘좋은 감정’의 이름 지어 부르자면, 존경과 사랑 정도가 알맞을 터였다. 니카는 이런 단어들에 면역이 없다. 얼굴은 물론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반응했다.
“무슨 일이지?”
“니카 경, 활약에 관해서 전해 들은 이후로 늘상 실제로 뵙고 싶었습니다. 감개무량하네요, 오늘은 심부름으로 왔지만요.”
난생처음 만나보는 사람으로부터 이유도 맥락도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산들바람처럼 오가는 간지러운 호의의 시선들이 부담스럽고 죄스럽게만 여겨졌다. 니카의 온몸은 뻣뻣하게 굳었고 사고는 무게감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따사로운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비늘이 없어지면, 인간의 것과 같은 동공을 갖게 된다면. 목소리가 조금 더 가늘어지고 등이 완벽하게 곧고 얼굴이 아름다워진다면, 하고…. 수많은 가정을 했었는데.’
그 모든 상상과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혈통의 증명’ 이후로 삶의 풍경은 송두리째 바뀌었으나 니카는 정작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뿐이었다. 아이러니였다.
“니카 경, 경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시종 소년이 말했다. 기밀을 요하는 일인지 조심스럽게 손목을 뒤집어서 붉게 인주로 표시한 가문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뱀 다섯 마리가 엉키고 설켜서 금속 방패 위에 도사리는 기분 나쁜 문장이라면 분명.
‘사사바란 공작이군.’
사사바란 공작은 대공에게 적극 가담했던지라 기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처형대에 올라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대공의 뒷배로서 자금 대는 일을 주로 했을 뿐이며, 병든 늙은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바란 탈타미오보다 너그러운 기준이 적용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가세가 기울 정도의 거금을 왕자에게 일종의 보석금으로 넘기는 대신 면죄부를 얻었다고 했다.
그래도 여태 척을 져 온 역사가 있으니 한동안은 애틀턴의 자택에서 근신 조치를 받았다는 게 구더기의 설명이었다.
그녀가 원래부터 소식에 빠르긴 했지만 윗사람들의 내밀한 사정까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눈치 빠르게 설명해 바치는 말을 들으니, 집시를 곁에 두는 것이 막쉬롭 이후로 버릇이 들기라도 했는지, 수리 왕녀는 구더기를 썩 마음에 들어 하며 어딜 가든 대동하는 것 같았다. 덕택에 높은 자리에서 오가는 정보를 속속들이 흡수한 거겠지.
“공작께서 직접 찾아오고픈 마음은 굴뚝 같으나, 근신처분 탓에 방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으세요. 이렇게 사람을 보내는 것이 불가피함을, 귀인께 호소해달라 하셨어요.”
니카가 폐허를 뚫고 일어나던 때를 기점으로 용의 혈통에 대한 입소문이 한바탕 애틀턴을 휩쓸었다. 니카를 만나고 싶다며 찾아다니는 귀족들은 사사바란을 제외하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니카는 한시가 급한 와중에 사사바란 공작의 사정을 참작해 손수 만나러 가 주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 찾아갈 수 없다고 전해라.”
“하지만….”
전장에서 검을 겨누던 이와 사근사근해지는 건 바란 탈타미오만으로 족했다. 니카는 아무런 흥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그런 무관심한 모습은 전령을 맡은 아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마 니카를 데리고 돌아가지 못하면 엄한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귓전에 속삭였다.
“정말 중요한 얘기예요. 니카 경. 토룡 혼혈로 오인당하며 삼십 년을 살아온 당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잖아요, 기억해요? 특별해졌다고요. 특별한 사람은 자신에게 걸맞은 기회를 잡아야 해요. 이건 당신이 변할 수 있는 기회라고요.”
그럴싸한 사탕발림으로 니카를 꾀어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걸까?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던 니카는 말 안장의 균형을 한번 확인하고 나서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니카의 흥미를 동하게 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라 여기는지 으쓱거리며 미소했다.
“공작은 나에게 왕좌를 제안하려는가?”
태연하게 툭 뱉어낸 문장의 무게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와르르 떤 아이는 얼굴이 시퍼레져서 주위를 홱 돌아보았다. 집시 하나가 대화를 엿듣긴 했어도 사사바란의 이름을 들이밀면 그녀를 입단속 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했는지 안색이 좀 나아졌다. 니카는 저 아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속물 같은 귀족의 성정은 죄다 갖췄다 생각했다. 아이는 주먹을 입술에 대고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니카에게 은유로 범벅이 된 긍정을 넘겼다.
“공작님은 예로부터 드라코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데 애를 쓰셨어요. 신비주의자나 남부의 집시들, 용들의 신관 등과 오랜 교류를 해 가며 고대룡 혈통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그래서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중요한 게 진정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신 겁니다.”
“헬린 힐벤을 끔찍이 따르던 이유가 기껏해야 그것이라면…. 안 된 일이군.”
“안 된 일이라니요?”
아이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니카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어깨를 으쓱이고 등자에 발을 걸었다. 눈 깜짝할 새에 몸이 위로 툭 튕겨져나가 안장 위에 안착했다. 육안으로 잘 바라보기도 힘든 순발력이었다. 니카가 툭 흘렸다.
“그건 종교고 맹신이다. 신앙으로 왕을 옹립할 순 없다.”
저 성문 가까이에 니카의 아래로 배속된 기사 수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부 다 진상규명과 조사를 위해서 할당된 인원이었고, 지금부터 강나루에서 배를 타고 탈타르로 건너갈 예정이었다. 니카의 시선은 아이에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잠깐만. 정말 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기껏해야 용인으로 살아왔을 당신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혈통이나 권력 따위가 날 좌지우지하진 못한다.”
니카는 고삐를 쥐고 말머리를 돌렸다. 뒤에 남겨진 아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고 자라는 동안 일관성 있게 배워 온 귀족의 논리가 그 아이의 세상에서는 너무나 명확한 까닭이었다. 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냐.”
“맙소사. 경은 용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세요.”
아이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콧김을 씩씩댔고 창백한 피부를 붉게 달구며 한 발을 바닥에다가 힘껏 굴렀다.
“용혈임이 판명 나 천출에서 왕위에 도전했던 사례가 역사서에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구요. 세 번째가 어려울 이유는 전혀 없단 말이에요.”
마지막 말은 한탄에 가까웠는데, 니카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멋쩍어진 아이가 말을 점차 흐려서 그런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낯을 면할 틈이 없는 구더기를 흘끗 돌아보면서, 니카는 입모양으로 일러두었다.
‘바란을 부탁한다.’
* * *
“살아 있어.”
세상에 눈부신 미소는 많았다. 그래도 구더기는 그런 웃음을 난생처음 보았다. 미열로 달구어 낸 얼굴에 아주 연한 생기가 돈다. 불편한 마음을 손톱으로 갉아내고 후벼 파는 듯이 어둡지만, 또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바란 탈타미오는 마침내 불안감을 내려놓고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흙먼지가 내려앉아 뽀얗게 변한 금발이 얼굴을 반쯤 가리며 흘러내렸다. 구더기가 탈타르에서 그를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전신에 힘을 빼고 일견 느긋하게 보일 정도로 몸을 뒤로 뉘였다.
“나의 니카.”
대단히 애절하지도 않은 소유격이 왜 듣는 이의 가슴을 이토록 할퀴고 지나가는지 모를 일이다. 부르튼 후작의 입술이 단 한 문장을 더 발음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사형수의 감사 기도를 신이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더기만큼은 이것을 똑똑히 전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또 다른 방문객이 바란 탈타미오를 찾았다. 기사들이 하나 같이 유난을 떠는 걸로 보아 예사 신분은 아니었다. 구더기는 눈치를 보며 몇 발짝 물러나 있었다. 이윽고 단단히 잠금장치가 된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헬린 힐벤의 죽음 이후로 권력과 지지를 주워 담고 다니느라 분주한 앙살라테 드라코슨이었다. 언젠가 한번 바란을 찾아가겠거니 예상을 했지만 그게 하필 자신과 같은 시간일 줄은 몰랐다. 구더기는 난색을 표했다.
“꼬마.”
정작 앙살라테는 구더기의 존재에 아랑곳없이 창살 가까이로 걸어왔다.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가 처음에는 누굴 지칭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어 구더기는 눈치만 잽싸게 살폈다. 후작이 눈을 떠 왕자를 마주하지 않았다면 대체 꼬마라는 게 누군지 한참 고민에 잠길 뻔했다.
“일 돌아가는 게 약속과 많이 달라 보이는데요. 전하.”
“그렇지. 나도 아쉽게 됐어. 네가 ‘잔악후작’까지만 되지 않았어도 별 차질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내가 역할에 너무 지나치게 이입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비슷하지. 내가 감당하기엔 네 이름값이 너무 커져 버려서.”
바란이 날카롭게 물었다.
“덕은 다 봤으면서, 이제 와 죄인 취급하시겠다고요?”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네 억울한 마음을 풀 수 있도록 특별 조사대도 조직해서 먼 길 보냈다고.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내 적당히 가석방시키면 되는 일이니까.”
왕자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대해서 얘기하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구더기는 제 낯이 딱딱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거짓말을 저렇게 못 하는 이는 처음 보았다. 아니면 애초에 거짓말이라고 들켜도 아무렇지 않다는 그 권력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콧노래로 짧은 음률을 속삭이다 가볍게 웃었고, 후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꼬마. 너한테 약속했던 보상 말이야.”
화들짝 놀란 바란 탈타미오가 고개를 들어 왕자를 마주했다. 앙살라테는 창살에 손가락을 사뿐히 얹고 그 틈바구니로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그래. 니카 경 얘기야. 정말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우리가 했던 약속은 니카 경이 용인일 때 얘기였잖아. 토룡과 인간 사이에 난 혼혈인, 천민, 용인 말이지. 그런데 이젠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 계약 조건이 이렇게 판이하게 변하게 되면 국법에서도 어느 정도 참작을 권장하는 편이지. 불공평하게 들릴지 몰라도 너 역시 내심 이해할 거다.”
“…….”
“니카 경은 수리 드라코슨과 결혼할 거야. 그들이 아이를 낳으면 내 슬하로 입양하게 되겠지. 왕국은 정통성을, 그리고…. 니카 경은 평생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행복을 얻는 거야.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고귀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남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는 삶. 듣기만 해도 평온하잖아.”
* * *
강동지역의 대도시 탈타르.
수도에서 벌어진 최후의 싸움이 이 도시에 가져온 여파는 거대했다. 탈타르에 저택을 두고 거주하는 대공파 귀족들의 수가 많으니 만큼 애틀턴 상황이 종막을 맞은 직후에 앙살라테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내전기간을 통틀어서 음악이 끊이지를 않던 풍요의 도시는 정작 종전 이후 살벌한 침묵에 잠겼다.
겨울바람만 휑하니 몰아치는 이 도시의 탄탄한 가도를 따라 여러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카는 탈타미오 저택을 찾았다. 사람 손이 닿지 않아 가시넝쿨로 범벅된 울타리와 멋대로 자란 잔디, 우거진 관목과 물이 마른 분수대가 니카 일행을 맞았다. 사용하지 않은 기간이 오랜 것만큼은 분명했다.
먼지와 거미줄로 범벅이 된 저택은 사용인조차 고용되어 있지 않아 그야말로 방치된 유령저택이나 다름없는 꼬락서니였다. 정말 이상하지, 니카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맞는 일가족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난생처음 와 보는 탈타미오 저택에서 고향에 온 듯한 어렴풋한 친밀감이 느껴지다니.
초상화에는 네 사람이 그려져 있었는데, 니카가 탈타미오 성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최근에 그려진 것으로 보였다. 바란과 그의 남동생 클라텐이 장성하여 의자에 앉은 부모 뒤편에 썩 의젓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카의 시선은 하염없이 바란의 낯 위를 누볐다. 섬세한 붓 자국으로 표현한 황금색 속눈썹과 붓을 옆으로 뉘여 뭉갠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눈에 새겼다.
“…….”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란을 만난 지 햇수로야 팔 년이라 친다지만 둘 사이에 관계랄 것이 구축된 것은 고작해야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니카는 조금 비겁하고 인간적인 생각에 잠긴다. 여기에 내 삶을 전부 걸어도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
‘너와 수리의 결혼이 될 거야.’
아주 오래토록 은애해 온 왕녀와 비로소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솔직해지자. 니카는 생각했다.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해묵은 감정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왕녀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니카의 한 구석을 달궜다. 이 기회를 못 본 척 넘기면 그야말로 바보 천치가 아니겠느냐고 다그치면서.
고대룡의 혈통이라는 니카가 진짜 용과 구분되는 이유는 그에게 인간성이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나약하고 공동체에 소속 되기를 원하는 연약한 집단생물의 욕구에 길들여 진 니카로서는 완전히 이 사회를 등질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사바란이든 앙살라테든 든든한 뒷배를 하나 골라서 몸을 웅크리고 따라야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 같은 일을 하는군. 바란을 구하는 일이 끝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낼 줄 알면서도…. 이 책임감이 온전히 사랑에서 비롯된 건가? 아니면.’
기사들이 부산스럽게 저택의 곳곳을 뒤집어엎으며 증거를 수집하는 소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난 바란을 동정하는 건가?’
어리숙한 연모에 내다 바친 바란의 시간과 노력을 안쓰럽게 여기는 까닭인가? 바란이 그때 그 꼬마라는 사실을 니카가 만약 알지 못했더라면, 굴러들어온 신분 상승의 기회도 걷어차면서 이토록 기꺼이 나섰을까?
‘그러나 바란이, 그가 죽인 모든 목숨에 앞서 동정받을 자격이 있는가?’
니카는 생각에 잠겼다. 답은 딱 떨어지지 않고 미적지근한 감정 찌꺼기만 남겼다. 곧 이딴 생각이나 주워섬기는 자신에게 환멸이 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 후작이 최근 일이 년 사이에는 저택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늘 탈타르의 전문 중개인을 통해 사람을 써서 단기 고용 기록이 남아있더군요. 마지막으로 이 저택을 방문했던 건…. 2년 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방치된 저택이었다면 대단한 증거는 없겠군.”
니카는 보고를 듣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탈타르에서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는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다. 이 길로 탈타미오 영지까지 가면 바란의 불가피한 상황을 입증할 만한, 설득력 있는 명분이란 놈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영지의 탈타미오 성이야말로 바란이 가장 많은 시간을 칩거하며 보낸 곳이니까 분명 어떤 흔적이든 남아 있을 것이다.
“탈타미오로 간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기사 하나가 말을 낚아챈다. 니카의 정체에 대한 무수한 소문이 애틀턴을 뒤흔든 이후 그에게 이렇게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는 잘 없었는데, 배짱이 대단하다고 할 만했다. 기사는 서랍장에서 찾아낸 낡은 문건을 계단 위쪽으로부터 흩뿌렸다. 니카는 제멋대로 나풀거리며 낙하하는 종잇장을 매섭게 잡아챘다.
‘대공으로부터의 작전명령서….’
“보시다시피 잔악후작은 적극적인 가담자입니다. 악인이라고요! 탈타미오 영지까지 먼 길 달려가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우리가 다루는 건 ‘잔악후작’인데요.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기사는 이미 마음속에다 진실을 정해두었다.
“당신이 그의 형벌을 면케 하고자 이 조사단에 가담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대공의 총애를 암시하는 서신들을 찾으면 찾았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기사는 옳은 일을 하는 데 한 점의 부끄럼이 없다는 듯이 턱을 높이 추어올렸다. 정의감. 이해한다. 니카 역시 한때 잔악후작의 존재를 뿌리 깊이 증오했었고 그 감정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인간 바란 탈타미오와는 사뭇 다른 인격처럼 여겨지는 저 잔악후작의 이름 아래에서 비인간적인 사건이 얼마나 무수히 많이 벌어졌던가.
약탈당한 마을과 잿더미로 변한 마을회관 인근에서는 사람들이 누구나 목놓아 잔악후작의 이름을 저주했다. 대공의 기습으로 힘없이 무너진 민간 백성들에게 그 이름이 액받이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그렇군.’
니카는 인정했다. 잔악후작은 악인인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바란 탈타미오의 모습은 그저 그 남자의 일면인지도 모른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사랑할 자신이 있나? 그는 동정받을 가치가 있는 남자인가? 니카는 생각했다.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하극상은 좌시하지 않는다. 보아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니카는 검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가 놓았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감정이 지시하는 바는 한결같았다. 우선 니카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를 작정이었다. 바란을 잃은 줄 알았을 때 얼마나 지독한 괴로움이 덮쳐 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탈타미오 영지로 간다.”
바란 탈타미오를 살릴 것이다.
* * *
그러고 보면 니카는 사랑에 빠지기 썩 좋은 상대였다. 바란은 멍한 와중에 생각한다.
바란처럼 무너지기 직전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절실히 사랑해줄 오롯한 관계를 원하게 마련이다. 니카는 강퍅하고 남들을 밖으로 내치고 마는 무뚝뚝한 성정에다 온 왕국에 유명한 순정파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전념하는 남자. 유일한 결점처럼 여겨지던 혈통 문제마저 해결되고 난 지금에야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결국 또 같은 고민이야.’
애틀턴의 수감자 처우는 잣자후보다야 훨배 나은 편이었다. 등이 시려울 수는 있어도 근육이 온통 배기거나 동상을 입지는 않았다. 바란은 벽께에 등을 기대 앉으면서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나는 사형수고, 저쪽은 일국의 왕녀. 비교라는 게 가능하긴 한가?’
바란은 니카가 그를 저버릴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바란이 그에게 수년 간 왕자의 장기말로서 살아왔으며 그에게 열띤 시선을 보내던 어린 꼬마였다는 사실을 밝혔으니까. 니카는 강직하다. 책임감으로라도 바란을 저버릴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바란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는 왕녀도 사랑했었지.’
니카는 바란과 함께한 세월에 향수를 느낀다.
‘그래 봤자, 왕녀를 처음 만났을 적의 강렬한 기억에는 비할 수 없어.’
바란이 니카에게 있어서 소중한 이유들은 전부 왕녀가 오래 전에 구축해 온 관계보다 못하면 못했지, 견줄 방도가 없었다. 몇 가지 비교해 보다가, 바란은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저울은 명백히 기울어 있었다. 한 쪽에는 사형수 바란 탈타미오,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왕녀의 부마 자리, 평생 그리고 대대로 이어질 용혈의 영예, 권력, 돈, 행복….
코가 시큰해졌다. 바란은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나이는 스물을 넘긴 지 오래였는데 어리고 무력한 소년일 적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놓아주기 싫어. 그래야만 할까? 그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까?’
바란은 아주 오랜 시간 고뇌에 휩싸였다. 며칠은 몇 주가 되고, 사형집행일이라고 점찍어 둔 날짜는 턱 앞까지 다가왔다. 실감이 나지 않다가도 해가 저물고 뼈까지 시려워지는 밤이 도래하면 두려움이 소나기구름처럼 시끄럽게 일어나서 머릿속을 현실의 공포로 달궜다.
구더기는 니카가 그녀에게 자신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나날이 비쩍 곯아가는 바란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던지 그녀는 제 깐에 무슨 충고라고 몇 마디 아뢴 적이 있었다.
“경은 후작님을 사랑하세요.”
‘나도 알아.’
“곧 돌아오실 거라구요. 지금 잠깐 자리를 비우신 것도 어차피 다 후작님을 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예요.”
‘그 얘기도 전에 이미 들었어.’
바란은 물론 그녀의 간곡한 설득을 죄다 삐딱한 태도로 흘려들었다. 마음속으로 고민 한 가지에 골몰하여 고통 받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죄다 뭣 모르는 참견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구더기는 젊은 후작이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는 니카 경을 잘라내려 하고 있는 거겠죠.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실제로…약점이라는 게 영 틀린 표현도 아니고요.”
“…뭐?”
“두 분이서 하시는 대화를 들었어요. 잔악후작을 사면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더군요. 뭘 노리는지 알아요. 니카 경이 절실할 때까지 몰아붙인 다음에 용혈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구더기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모양이나 검은 눈이 좌우로 또르륵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이 말을 꺼내는 것을 거리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출에서 왕위에 도전한 전례는 역사 속에 이미 두 차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중에 왕위에 오른 건 한 명뿐이에요. 나머지 하나는…. 노예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용의 혈통을 가진 게 판명이 나고도 노예로서 살았다는 거야?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반역죄인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용혈의 권리를 포기했다더군요. 고왕국 시대로부터 이어 온 국법에 따르면, 용혈을 가진 자가 자신의 권리를 전부 팔아서 고귀한 희생을 했을 때, 그 어떤 흉악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명분이 생겨요.”
용들의 신전이 종교 전체를 걸고 윤허하는 면죄부.
“용의 피로 대속하는 거죠.”
숨이 멎는 듯 허파가 꽉 조여들었다. 구더기와 바란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 바란은 그녀와 자신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데에 손가락도 걸 수 있었다.
“…니카도 그걸 알아?”
“아직은요. 하지만 왕자가 노리는 게 이토록 명확한 한은 시간문제예요.”
“막아야 해.”
여태 이 정도로 질겁한 적이 없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머리를 들이받으라는 대공의 지시를 수행할 적에도, 겨우 꿰매어 둔 뱃가죽을 대공에게 붙잡혀 찢길 때에도, 앙살라테를 처음 만났을 때, 심지어는 열여덟 살의 기억을 가진 니카 경이 홀로 성을 나갔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던 때보다도 더.
바란은 겁이 났다.
맹목적이고 융통성 따위는 없는 데다가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이’ 자도 알지 못하는 니카가 끝내 저 조건을 받아들이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란을 구하는 일이 그의 혈통을 포기하는 일인 줄 알고 나면 아마 니카는 무척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고민도 하고, 물론 상처도 받을 터였다. 어쨌든 고군분투 끝에, 바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말겠지. 니카는 그런 남자니까.
“니카를 막아야 해.”
니카는 서른 해의 멸시를 견디며 살아왔다. 존재를 부정당했고, 이제야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 갖춰진 참이었다.
바란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애정과 니카의 행복 사이의 줄타기에서 드디어 균형을 잡고 섰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야, 바란은 생각했다. 물론 이 ‘용혈의 권리’를 건 거래 조건을 그가 알지 못하게 한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고작해야 사형수에 불과한 바란 탈타미오가 가진 카드로는 즉위를 앞둔 왕자를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니카가 다시금 잔악후작을 경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완전히 없어질 정도로. 아픈 말과 표독스런 눈빛으로. 코웃음과 멸시로.
니카를 탈타미오로부터 도망시키던 날 그리 했던 것처럼. 바란은 목둘레를 매만지고 무거운 숨을 삼킨다. 마른침이 껄끄러운 아픔을 남기고 넘어갔다.
“…기사 나리가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릴 만큼 사랑에 빠져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거 그만두시고 맘 편히 식사 좀 하시라고 말이에요.”
구더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니카가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릴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우스운 소리였다. 니카가 바란을 얼마나 사랑하든지 간에 바란은 니카를 그 이상으로 사랑했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니카가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바란이 반길 이유는 없었다.
집시의 안타까운 한숨만 가득히 울려 퍼졌다. 탈타미오 후작은 여전히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 * *
탈타르에서 탈타미오 영지까지는 강행군으로도 열흘이 걸렸다. 애틀턴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남겨둔다 치면 탈타미오에서 증거를 훑어볼 만한 시간은 빠듯했다. 말도 사람도 지쳐 있었으므로 적당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밀도 있게 움직여야 했다.
탈타미오 성의 늙은 시녀들은 수도 애틀턴에서 보낸 조사단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미 누군가로부터 입단속이 되었던 건지, 아니면 마틸다를 비롯한 시녀들의 눈치가 원래 이토록 좋았던 건지 모르겠다.
마구간 인근을 지나면서, 죽은 소년을 떠올렸다. 이름은 빈스였다. 살가운 소년이었지, 니카는 생각했다. 레이먼드의 명령을 따라 니카를 구하려다가 바란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가엾은 소년. 니카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란 탈타미오의 죄.
‘아이가 나를 도망시키다 만일 바란이 아니라 대공의 손에 잡혔다면, 그렇게 깔끔한 죽음은 맞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죽인 걸 거야, 바란은….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바삐 변호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죄악감이 남았다.
“…….”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잔악후작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들도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겠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바란 탈타미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얼른 고개를 흔들어 떨어내고 말았지만 한여름의 햇살에 달궈진 상승기류가 끊임없이 뭉게구름을 올리는 것처럼, 니카의 마음에도 의심이 끊이지 않고 피어올랐다.
잔악후작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까?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하더니만 정작 넋을 빼고 계시는군요.”
기사 하나가 콧방귀를 픽 뀐다. 저번의 그 배짱 좋던 놈이다. 용혈인 게 밝혀지고 나서 곧장 태도를 바꾼 놈들에게 신물이 나던 니카에게는 차라리 이런 불량한 태도가 달갑게 느껴졌다. 애초에 날 선 말씨에 대단한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니었다.
“집무실과 침실 먼저 시작하겠다. 인원을 둘로 나누지. 상호 간에 증거를 은닉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해라.”
그러고 보면 니카는 열여덟의 기억만 가지고 바란 탈타미오의 성에서 머물렀던 때도 바란의 집무실에 대단한 참견을 했던 적이 없다.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모습은 으레 전문적이고 또 함부로 방해해서는 곤란하기 마련이라서였다. 거기에 더해 니카는 바란에게 자칫하면 미움을 사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늘상 시달려 왔으니 더욱 언행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집무실에 들어가는 건 오로지 바란이 그를 찾을 때만. 그게 은연중에 정해둔 자신만의 규칙이었다.
니카는 익숙한 벽지무늬와 천장의 샹들리에, 복도에 나란히 박힌 촛대, 장식품, 창틀을 빠르고 넓은 시선으로 살핀다.
이상하지. 고작 넉 달이었다. 넉 달이라고 하면 이른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니카는 이미 이 견고하고 투박해 빠진 성채에 마음을 두고 기묘한 애착을 느낀단 말인가?
“대공과 주고받은 서신을 정리해둔 서류를 찾았습니다. 원본을 보고 해석본을 따로 만들어 처리해왔던 모양인데…. 이상하군요. 대공이 외국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굳이 해석처리를 거쳐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암호체계일 겁니다. 대공파에서 사용하는 암호체계를 해독할 만한 자료를 여기서 얻을 수 있다면 대단한 이득입니다. 잔악후작 뿐만 아니라 다른 대공파 귀족들이 혼란을 틈타 뒷구멍으로 어떤 더러운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캐내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미안하지만.”
흥분해서 떠드는 두 명의 기사 사이에 또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그는 바란의 집무실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제멋대로 구김이 간 종이들을 꺼내 살피고 있었다. 기묘한 것은 그 종이들 중 절반은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된 뒷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대공이 엄청난 악필이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여기 서신의 원본들을 차곡차곡 보관해뒀는데…. 이상하군요. 보통 중요한 편지라면 다 태워서 기록을 말소했을 터인데 무슨 연애편지라도 간직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두다니요.”
“남첩이라는 얘기가 그냥 돌았던 게 아닌 모양-”
쿵! 우스갯소리에 열중하고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랄 만큼 커다란 소음이었다. 돌아보니 니카가 그저 맨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벽에는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갔는데, 실은 집무실과 벽 한 면으로 이어진 전용 서재가 이어질 만큼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헛소리나 떠들러 왔나?”
“…죄송합니다.”
니카는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에도 표정이 크게 변화가 없는 편이지만 지금 그가 내뿜는 흉흉한 기세는 단번에 상대의 기를 죽이고 오줌을 지리게 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몸서리를 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니카가 지긋이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며 한 발짝 발을 뗐다. 한숨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기사들은 그때서야 여태 숨을 못 쉬고 허덕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앗, 니카 경. 보십시오!”
“…뭐지?”
풀이 죽어 있던 기사 하나가 금이 간 벽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심각하게 식었다. 니카는 그 기사의 삿대질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너질락말락 돌가루를 흩뿌리는 벽면에는 훌륭한 그림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간신히 매달렸다는 표현이 더 걸맞았다. 벽이 너덜너덜해지면서 고정하던 힘이 흩어져 떨어지기 직전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봤더니 액자가 살짝 들린 밑으로 경첩이 달려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문서를 저기에 은닉했으리라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니카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느 틈엔가 입술도 꼭 악물려 있었다.
니카의 일갈에 기가 죽은 기사 하나는 어떻게든 깎인 점수를 만회하고 싶었는지 무척 적극적인 태도로 앞장을 섰다. 그가 알지 못하는 ‘잔악후작’의 잔혹성을 또 한 번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려웠던 니카는 기사와는 반대로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무의식중에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잠금장치가 있군요. 아주 복잡한 열쇠 구조로 작동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기사는 의기양양하게 다가가서 너덜너덜하게 구겨진 액자 금고를 훌쩍 안아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묵직하다고 투정하는 소리에 긴장감은 더해갔다. 그저 무쇠 재질이라 무거운 것이리라 속을 달래 보지만, 혹여라도 무게에 걸맞은 거대한 치부를 감춰놓기라도 했을까 봐.
이미 니카의 마음은 절반쯤 확신과 체념으로 얼룩덜룩했다. 바란을 꺼림칙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증거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채 기사들 하는 양을 구경하기만 했다.
“…이미 경께서 반쯤 부숴버리셨네요. 하하. 과연 용혈다운 힘이십니다. 이렇게 통째로 뜯어내서 부수면 자물쇠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탕발림이 귀에 거슬려 시끄럽다 핀잔을 주려고 했는데, 입안이 바싹 말라서 혀를 꿈틀댈 여유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니카의 얼굴을 재촉이라고 이해한 것일까, 기사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비밀금고의 문을 젖혔다. 니카가 뜻하지 않게 구겨놓은 틈새로 검집을 밀어넣어서 지렛대로 이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무게감이 실린 발길질 몇 번에 금고문은 나가떨어졌다. 툭, 툭, 툭!
“어라….”
안을 제일 먼저 들여다본 기사가 낮은 탄성을 냈다. 실망인지 탄식인지 모르겠다. 니카는 커다란 궁금증과는 달리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만일 저 안에서 소문과 관련된 증거가 나온다면 어떡해야 하지? 바란에 관해서 세간에 도는 악질적인 소문, 이를테면 산 채로 뺨에 구멍을 뚫어 오입질을 했다든지, 어린아이 둘을 가지고 검투경기를 붙이고 그 어미더러 남편 목숨을 판돈으로 걸게 만들었다든지 하는 말들과 관련한 증거.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네요.”
“정말 그렇군.”
“이렇게 숨겨진 금고에는 보통 가장 귀중한 것을 넣지 않던가 말입니다.”
궁금증에 일제히 달려든 나머지 기사들도 한 마디씩 소감을 보탰다. 한 기사의 팔뚝이 금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금고에 든 게 고작 말라 비틀어진 잡초라니요? 잔악후작도 참 별종이네.”
기사의 손안에 잡힌 것은 석영을 조각해서 만든 작달막한 보석함이었다. 수리 왕녀가 자신의 결혼반지를 꼭 저렇게 생긴 함 안에 보관하곤 했음을 니카는 기억했다. 섬세하게 커팅된 투명한 보석함 안에는 기사가 밝힌 것처럼, 말라붙은 파란 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기사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실바람처럼 다 니카의 귓등을 스치고 뭉그러졌다. 저희들끼리 한번 돌려보고 나서도 딱히 가닥이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보석함은 니카의 눈앞까지 매끄럽게 이송되었다.
니카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작고 묵직한 석영함을 받아들었다. 몸통 부분과 이음새가 꼭 들어맞는 뚜껑 중앙에는 뱀딸기만큼 작고 둥근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여기, 제가 열어드리겠습니다.”
니카가 망설이는 사이 함을 건네어 준 기사가 조잘대며 그 손잡이를 붙잡고 뚜껑을 열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커다란 금고에 고작 이것만 달랑 두다니? 이거 또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저 금고 자체가 함정인지도 모르겠군요. 실은 저 안에 더 비밀스러운 금고를 숨겨뒀다든가….”
괜한 말은 니카의 귓속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머리가 멍했다. 세상이 전부 암전에 휩싸인 것처럼 다른 곳에는 집중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니카는 손 안의 수레국화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말아서 매듭지은 모양이나 줄기가 투박하게 뜯겨 정리된 것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아.”
물기 띤 한숨은 목젖이 꿈틀거리는 사이에 조금 목소리를 입었다. 니카는 마른침을 삼키고,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한번 찡긋했다. 이걸 보관했어. 이걸 왜. 이깟 형편없는 들풀 따위를….
니카는 몸을 웅크렸다. 반지를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던 후작의 따뜻한 눈길이 절로 떠올랐다. 넉넉하던 어깨가 앞으로 굽어지고 전쟁통에 다듬을 틈이 없어 그런대로 길어진 흑발이 앞으로 훅 내 쏠린다. 창백한 뒷목이 훤히 드러났다.
“전부 나가.”
“예?”
“나가라고!”
기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니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오래 버티지 않고 명령대로 자리를 비워주었다. 다만 좀 전부터 삐딱하게 굴던 기사 한 명 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니카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벽께에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니카에게서 사납게 쉰 목소리가 났다.
“귀가 먹었나.”
“증거를 은닉하지 않도록 서로 감시하라고 한 건 경이지 않습니까. 이런 걸 두고 이중잣대라고 하는 겁니다.”
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렇게 바락바락 대드는 놈에게 말로 이겨서 내쫓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뻔히 알아서 진작 포기해버린 셈이었다. 그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꽃반지가 들어있던 찌그러진 액자 금고를 열어젖혔다. 하염없이 그 안을 노려보던 니카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을 가진 종이 몇 장을 발견해냈다. 얄팍한 고급 종잇장이었다. 바닥 면에 바싹 붙어 있던 바람에 마침 반지함에 시선이 팔렸던 기사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 것 같았다.
끄집어낸 종이들을 밝은 빛 아래서 살펴보았다. 검은 잉크가 어지럽게 종이 위에다 글자를 뒤덮어 놓았다. 글자를 써 놓은 펜촉의 굵기가 각기 다른 걸로 보아서는 한 번에 적어 내린 글이 아니었다. 니카는 서두를 읽다 말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이 놀랐다.
‘니카.’
그의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던 까닭이었다.
처음엔 바란이 그에게 부치려던 편지라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내용이 편지 형식에서 한참 빗나가는 변명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어 종이를 뒤집어 보았는데, 레이먼드가 처리를 닦달하던 탈타미오 영지 운영 관련 문서였다. 바란이 업무 도중에 이면지로 낙서를 끼적인 모양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는 문단을 이리저리 휘면서 온갖 말을 토해냈다.
‘니카가 기억을 찾기 전에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야. 기억이 돌아오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깜짝 놀라고 두려워서 저번처럼 자취를 감출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겠지. 나는 자신이 없다. 나는 더러운 죄인이다. 니카가 제정신으로 나 같은 걸 좋아해 줄 리가….’
‘이번엔 탈타미오. 상단을 다 죽이고 용의 뼈를 빼앗으라고.’
‘그깟 뼛조각이 다 뭐라고. 질린다.’
‘사람을 죽여도 너무 많이 죽였다. 잔악후작이라 불려도 싸다.’
‘죽기 싫다.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겠지. 이유는 너무 많아서 굳이 특정할 필요도 없다. 한 가지 문제는 지옥에는 니카가 없을 거라는 점이다. 이 내가 천국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가 지옥에 갈 만큼 커다란 죄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야! 또 이기적으로 굴긴. 난 니카가 행복한 편이 좋다. 그가 웃는 모습이 좋아.’
“니카 경? …이런.”
기사가 니카의 이름을 불렀다. 니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종이의 여백을 채운 서투른 단어들을 손끝으로 훑었다.
‘니카를 좋아해. 좋아해. 너무 좋아. 심술부리듯 굳은 표정,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 창백한 얼굴, 까만 속눈썹, 뾰족한 동공이나 비늘, 얄팍한 입술, 전부 좋아해.’
‘사랑해 줘.’
‘날 사랑해 줘.’
종이 한구석의 잉크가 물방울에 뒤섞여 번지는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기사의 낯이 께름했다. 오래 뜸을 들인 뒤에, 그가 망설이듯 니카에게 물었다.
“…웁니까?”
* * *
하늘이 맑았다. 날은 여전히 추웠지만 구더기는 봄이 훌쩍 다가왔다고 말했다. 뭐라고 대꾸했더라? 내일도 하늘이 쾌청하다면 날이 구린 것보다야 죽을 때 기분이 더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에 구더기는 웃었다. 그래, 자그마치 웃은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모든 상황을 비꼬아 보는 바란에게 말이다.
그 알 수 없도록 깊은 여유로움 때문에 바란은 배알이 꼬일 대로 꼬여 그다음부터는 구더기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 밤에 편히 주무셨으면 해서 불면을 해소하는 차를 특별히 달여왔습니다.”
“친절도 하셔라. 독살이라도 사주받았어?”
버릇처럼 한번 비꼬면서도 당장 내일 사형을 앞둔 이에게 구태여 독약을 먹일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밤마다 머리를 채워 나날이 불면이 심해 가던 것은 사실이므로 바란은 기꺼이 그 찻물을 들이켰다. 차게 식지 않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은 또 얼마 만인가 싶었다.
“니카 경은-”
“니카 얘기라면 하지 마.”
구더기는 잠잠했다. 이유를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하지 마.”
이유라면 많았다. 볼 수 없는 사람이 참을 수 없도록 보고 싶어지니까. 속으로 자꾸만 떠올렸다가는 구세주 역할을 그에게 전가하게 될까 봐. 구걸하거나 기대해버려서 끝내 니카의 어깨에 짐으로 남게 될까 봐. 거의 다 억눌렀다고 생각했던, 죽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발악하며 고개를 드니까.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괜찮다. 바뀌는 것은 없다. 욕심이라는 이름을 붙여둔 이상 바란이 그것의 손을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바란이 욕심을 부렸을 때마다 소중한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 아버지, 클라텐이 전부 그랬다. 애처럼 조르거나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는 게 바란의 인생 전반에 드리운 그림자가 주는 교훈이었다. 바란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참는 데는 언제나 진력이 날 정도로 익숙하기 때문에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수면작용이 있다는 이 찻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다음에 구더기가 어떻게 작별인사를 했는지, 감옥을 어떻게 떠났는지, 그 이후 언제 잠들었는지에 관해서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캔버스 위의 덜 마른 물감을 신경질적인 화가가 죄다 섞어 뭉갠 것처럼, 주위의 사물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꿈을 꿨는데.
니카가 울고 있었다. 탈타미오 성의 집무실 한복판에 우뚝 서서 서럽게 어깨를 떨며 울었다. 대체 왜 우는 걸까? 바란은 니카를 울리지 않기 위해서 여태 조심스러운 선택을 거듭해 왔다. 니카를 위해 최선인 방향이 무언지 고민하고 가끔은 거짓말을 동원하거나 스스로에게 상처도 거리낌 없이 주었다.
왜 울어. 바란은 입을 벙긋대며 물었다. 거의 동시에 니카의 처연한 눈이 공중으로 올랐다. 검은 눈은 물기에 젖었고 눈가와 코끝이 유독 붉게 달아 있었다. 검은 비늘이 달라붙은 왼쪽 뺨이든, 그저 발그레하게 상기된 오른쪽 뺨이든 마찬가지로 물기에 젖어 번들번들했다. 그가 바란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망연한 대답을 했다.
‘비겁한 짓을 했다. 내 감정을 재어 보려고 했어. 두려웠거든. 논리적인 이유와 책임감을 들어 후작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길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는데, 그런데.’
하염없이 눈물이 떨구어졌다. 하염없이.
‘그런데, 이것 봐. 나는 그가 필요해.’
젖어서 얼어붙은 뺨을 문지르며 잠에서 깼을 때는 지평선에서 태양이 얼쩡거리던 참이었다. 금방이라도 해넘이를 볼 듯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위가 밝아졌다. 비로소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가 일출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처형일의 아침이었다.
오전 중에는 모든 일이 여상스럽게 굴러갔다. 간수가 배식판의 검은 빵을 뒤집어 올려놓아서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바란을 조롱하려 드는 일이 있었지만 대단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란은 그 빵을 가져다가 꼭꼭 씹어 먹었다. 어차피 오늘 죽게 될 텐데 허기를 달래는 이유가 다 무언지 모르겠다. 아무튼 꼴사납게 주린 배를 웅크리고 처형대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렇게 했다.
오전 내내 창살 바깥에 시선을 처박고 있었더니만 눈치 빠른 간수 하나가 대체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었다. 원한다면 마지막 자비로서 사랑하는 이와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고 바란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라니. 그런 거 없어. 호의는 무척 고맙군.”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구는군.”
간수는 바란의 눈을 꽤 오래 들여다보았다.
“숨기지 않는 편이 좋아.”
“뭘 안다고….”
“그쪽은 숨기는 게 특기인 부류처럼 보이거든. 익숙해져서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그럴 필요 있겠어? 조금은 솔직해져. 소리도 지르고 좀 울고 그래. 어차피 곧 뒤질 인생인데 뭐 그리 복잡하담.”
잘난 척 지껄이긴.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바란은 해 질 녘에 목이 떨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겨울이라 석양이 빨리 졌다. 점심 식사를 소화시키기가 무섭게 쇠고랑을 차고 짐승처럼 끌려 나왔다. 일부러 바란을 흥분하게 만들기 위함인 듯 처형장을 둥글게 둘러싸고 앉은 관중들은 모두가 시끄럽게 양철을 두드려 소음을 내고 야유소리를 퍼부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니카는 결국 마지막까지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눈살을 찌푸리고 붉은 융단을 깔아 둔 왕좌 방향을 살폈다.
니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구더기가 자신의 처형일 전까지 니카가 기필코 돌아오리라 확언했다지만, 만일 그 말이 사실이고서야 니카가 그를 만나러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버젓이 있었다. 투박한 돌의자 일색인 관중석에서도 그나마 차양과 기타 사치스러운 구색은 갖춘 왕의 자리 인근에 왕녀의 기사 니카 경이 버젓이 서 있었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그리고 그 옆에 수리 왕녀가 앉았고, 그 뒤편인지 옆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위치에 니카가 섰다. 지긋한 시선이 바란을 향해 있었다.
“하….”
차가운 한숨을 뱉었다. 심장이 다 식는 것 같았다. 공연히 속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실망할 것 없다고, 어차피 놓아주려 했었다고. 어차피 실망하게 만들려고 했었다고.
심술이 나는 이유는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왕녀와 니카의 조합이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까닭이었다. 왕녀와 기사가 이루어지는 이야기라니, 고전적이지 않은가. 행복이 보장된 완벽한 관계 속에서 악당의 하수인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가 고개를 디밀 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해라.”
모든 의식에는 복잡한 절차가 있다. 사형 집행마저도 피해가진 못했다.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이 이렇게 고리타분하리라고는 예상한 적 없었다. 바란은 여태 자신의 죄목을 읽느라 거진 삼십 분을 쉼 없이 조잘거리던 집행관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 말이라도 좋다고 했다.
“…….”
바란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왕녀와 나란히 그를 보고 있는 니카의 모습은 그 부분만 색채가 도는 듯이 눈길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바란은 가슴 속에서 울컥 솟아나는 사랑과 고백, 그리고 참회의 말들을 누르고 눌러 가슴 깊숙한 곳에 욱여넣었다. 바란은 마지막 순간에 할 만한 이야기를 숙고 끝에 정해두었다.
저 상냥한 니카 경은, 바란이 이 모든 것에 관해 한 끗 감정만 내비친다고 해도 죄책감에 못 이겨 그렇게나 꿈꿨던 왕녀의 옆자리를 포기하고 바란의 곁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걸 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니카가 바란의 곁에 있겠다면 그는 행복할 테지만, 이건 바란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란의 행복 따위는 단 한 순간도 중요했던 적이 없다.
바란은 니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왕녀의 멸시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오랜 상사병으로 무력해진 기사의 낯을 포착한 순간부터 줄곧.
무거운 입술을 뗐다.
“…너 같은 잡종 새끼한테 홀린 연기를 하느라 구역질 참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모르겠지.”
“어서 집행해라.”
수리 왕녀가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바란을 포박한 사형집행인에게 소리쳤다. 제정신을 찾았다고 해서 바란을 향한 적대감이 가신 건 아니었다. 게다가 용혈에다 대고 ‘잡종 새끼’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세세하게 따지자면 왕족모독죄에 해당되는지도 모르겠다.
왕녀의 명령을 받은 사형집행인은 바란의 고개를 거칠게 눌러 단두대에 욱여넣었다. 셔츠 칼라를 뒤로 젖혀 하얀 목덜미가 단두대 칼날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거친 나뭇살이 목덜미에 파고들어 따끔따끔한 느낌이 났다. 등골이 서늘해짐과 동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너는, 너는 나를 기억해야 돼.”
여유를 잃는 바람에 실언을 했다. 바란은 이상하게 얼굴을 구겼다. 너무 간절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니카의 반응이 정확히 어떤지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거기다 생리적인 눈물에 젖어 든 눈알 때문에 눈앞이 온통 흐리멍덩했다. 바란은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고 나서서 거짓말을 한껏 늘어놓았다. 구차하게나 들리지 않으면 감사할 터였다.
“내가 얼마나 너를 미워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란 말이야. 네 눈, 코, 입술, 그 머리카락과 체취, 네가 준 꽃이나 같이 하던 카드, 벽 난롯불과 그 그림자, 네가 좋아하던 찻잎까지.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얼마나 극렬히 증오했는지를.”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바란은 다만 니카에게 계속 당부할 뿐이었다.
“너는 가끔씩 떠올려야 된다고….”
집행인이 바란의 머리에다가 흉측하게 생긴 자루를 뒤집어씌웠다. 흉측한 얼굴로 죽을지 모르니 배려해주겠다는 건가? 시시한 생각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뱉고 보니 웃음이 아니었다. 가쁜 날숨이 쉭쉭 대며 입술을 비집었다.
숨이 점차 가빠오며 전신의 맥박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날뛰는 게 느껴졌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달하자 그나마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바란은 발그레한 석양빛이 드리운 자루를 뒤집어쓴 채로 니카를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 갈 니카의 삶에 대해서 공상했다.
* * *
“방법이 있잖습니까.”
니카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의 검은 눈 한 쌍은 잔악후작의 무력한 몸뚱이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앙살라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곧장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이윽고 멱살을 잡을 기세의 니카 경이 앙살라테를 돌아보았다.
“물론, 없다고는 안 했지.”
탈타미오 영지까지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란의 결백을 입증할 만한 대단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고작해야 바란이 몇 글자 끼적여 놓은 자괴감으로 가득 찬 문장 따위는 엄밀히 말해 상황을 반전시킬 힘이 없었다. 잔악후작의 적극적인 가담을 입증할 증거가 지천에 널린 것과는 대비되었다.
그러다 문득, 니카는 깨달았다. 증거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바란 탈타미오가 앙살라테의 명령을 받고 일했던 것은 기밀사항이었다. 그 증거가 될 법한 것들도 어차피 앙살라테가 전부 틀어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은닉하고 나서 니카에게 시간 끌기 식으로 허튼 과제를 준 셈이었다. 급박한 마음에 생각도 없이 놀아난 꼴이다.
니카는 옆눈으로 왕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왕자는 시종이 준비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차로 입술을 축이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수천수만의 눈동자가 생사여탈권을 쥔 앙살라테 드라코슨을 향해 있었으며 주위는 기대감 넘치는 침묵으로 가득했다.
“준비해.”
앙살라테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무언가를 천정으로 끌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신호를 알아들은 집행인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두꺼운 밧줄을 끌어당겼다.
니카는 손끝을 덜덜 떨어대며 칼날을 매단 도르래가 감기는 모습을 보았다. 칼날이 아주 높은 꼭대기까지 하염없이 치솟았다.
괜찮다. 괜찮아. 아직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왕자의 마지막 지시 없이 단두대의 칼날은 떨어지지 않는다. 니카는 자기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만일 불의의 사고라도 일어나서 그가 협상을 끝마치기도 전에 바란의 목이 떨어져버린다면….
‘지금이라도 전부 죽이고 바란을 구할까? 만약 그렇게 하면…. 바란의 목숨은 살릴 수 있겠지만….’
바란은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고, 가문 대대로 살아온 영지와 후작위를 전부 몰수당하며, 더는 왕국에 발을 붙일 수 없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땅을 누비며 평생토록 방랑자로 살아야 할 터였다. 니카는 바란만 곁에 있겠다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란은? 바란은 니카만큼 고독에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니카를 사랑한다고 목놓아 말하지만 과연 그 손 안에 남은 것이 오롯이 니카 뿐일 때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원하는 게 뭐지?”
니카가 다급히 물었다. 앙살라테의 두 뺨이 불룩하게 올라가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건방지게 또 말을 잘라먹느냐고 혀를 쯧쯧 차는 것에 니카는 또 깜짝 놀라 초조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문제 삼으려는 것 같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앙살라테는 오랜 뜸들임 끝에 말을 꺼냈다.
“네가 처음이 아니야.”
“뭐라고?”
“역사 속에서 천민이 ‘혈통을 증명’한 경우는 너를 빼고도 여태 두 차례 더 있었어. 물론 드라코슨 가문이 왕좌를 독점하기 이전이니까 최소한 이백 년도 더 된 일들이지만…. 그중 한 사람은 썩 유명해. 천출에서 끝내 왕까지 되었지. 피가 아주 짙은 축에 속했던 데다가 당대 계승권자 중에서도 자질이 가장 빼어났거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깟 시시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니카는 본론만 얘기하라고 일갈했다.
“성질부리긴. 아무튼 중요한 건 나머지 한 명이야.”
앙살라테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다가 니카의 가슴을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는 용혈의 권리를 팔아 반역자를 살렸다.”
“용혈의 권리라고 하면, 왕위계승권을?”
니카가 되물었다. 앙살라테는 노예로 태어나 가장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남자에 대한 약력을 곁들여 설명했다. 끝내 무고하게 반역죄를 뒤집어쓴 노예 시절의 조강지처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권리를 전부 팔고 노예신분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왕위계승권은 시작에 불과하지. 고대룡의 피에서 비롯된 온갖 특권들을 전부 반납해야 해. 네 경우에는 기사 작위까지 내놓고 다시 천민으로 돌아가야 할 거야. 그 역시 네 반쪽 피가 가진 재주로 얻었던 자리나 다름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면 수리와는 결혼할 수 없게 돼.”
“…그렇게 하면 바란을 살릴 수 있나?”
인형처럼 자리를 지키던 수리가 눈을 치뜨고 왕자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짐승 달래는 먹잇감 따위로 치부하고 있음에 모멸감을 느낀 까닭이었다. 그녀는 뾰족한 말로 불쾌함을 표현하는 대신에 그저 웅크린 채 입을 다물었다. 순종적인 수리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앙살라테는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어디 살린다 뿐인가. 반역죄도 없었던 셈 될 테니, 영지와 작위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고, 앞으로 귀족 사회에서 배제되다시피 할 테지만 뭐, 그게 어디야?”
“그러면, 앙살라테 드라코슨.”
정해진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왕자의 평온한 얼굴에 금이 갔다. 아, 아니지. 아니지. 앙살라테가 고개를 저으며 경고했다.
“피로 얻은 특권은 전부 버려야 한다고 얘기했잖아. 이해했지? 그런데 왜 아직도 말투가 그 모양일까?”
“…왕자 전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그러면.”
니카는 굳센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왕자의 곁을 지키던 갤리거 경이 기민하게 반응하여 니카를 제지하려 들었지만 왕자가 그를 뒤로 물렸다.
왕국기사의 검. 왕국의 인장이 그려진 아름다운 검이었다. 눈이 내리던 날에, 연모하던 이를 레이디로 삼아 기사의 맹세를 읊조리면서 하사받았던 귀중한 물건. 니카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 혹은 그 이상이기도 했던, 신념의 상징.
니카는 검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니카의 무지막지한 힘 덕택으로, 왕국기사의 검은 돌바닥을 매끈히 가르고 들어가 박혔다.
“모두 가져가십시오. 내게는 전부 필요 없습니다.”
“…천민으로 사는 건 너에게 죽을 만큼 힘든 기억이 아니었나? 너의 유년기는 온통 눈물과 먼지, 따돌림, 곰팡이, 불결한 쓰레기와 폭력투성이였지. 수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그 구덩이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살았을 터…. 너는 지금 그 시절로 기꺼이 돌아가겠다 말한 거야.”
“상관없습니다.”
“정말? 작위마저 없으면 너는 그저 용인이야. 사람들 입소문에 의존하려는 거면 소용없어. 나는 내 왕국에 용혈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거고, 너는 어차피 겉보기에 완벽한 토룡 혼혈이니까.”
“상관없다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그런 일들은 이미 익숙합니다.”
앙살라테는 두 눈을 깜빡였다. 니카가 이렇게나 쉽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아주 지긋한 시선으로 한참이나 니카를 뜯어 보았다.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발치에 무릎 꿇은, 한때 왕위계승권자이자 왕녀의 기사였던 천한 혼혈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용의 피가 그의 죄를 대속하였다.”
난간 가까이 바짝 다가선 앙살라테가 외쳤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해 피에 굶주려 있던 군중의 반향은 거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점차 세력을 키웠다. 주먹을 틀어쥐고 소란을 잠재운 왕자가 제법 왕다운 목소리로 군중에게 선언했다.
“바란 탈타미오 후작을 사면한다.”
* * *
사형수가 어느 순간에 목숨이 끊기는가를 가지고 클라텐과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치기 어린 말싸움 쪽이 더 맞겠다. 책벌레 클라텐 놈은 또 어디선가 읽은 내용을 가지고 사형수가 죽는 것은 지나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이 먼저 멎어버리는 까닭이라고 말했다.
바란은 그럴 리 있겠느냐고, 칼날에 목이 떨어져야 죽는 것이라고 맞섰다. 배짱 없는 놈들이나 심장이 멎는 거라고 근거를 들었던 것 같았다.
클라텐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까지 제 말이 맞다고 따졌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제가 수집한 지식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란 탈타미오 후작을 사면한다.”
아무튼, 앙살라테가 그를 사면하기 전까지 바란의 심장은 멎지 않고 잘만 뛰고 있었으니까 바란의 말이 맞았던 셈이다. 다만 클라텐의 의견도 완전히 글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딱 앙살라테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까지가 바란이 기억하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면 선언 직후에 냄새나는 자루를 뒤집어쓴 채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복수의 발소리가 다급히 다가와 사형집행인의 손아귀에서 위험한 밧줄을 거두고 바란을 일으켜세웠다.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
눈을 떴을 때는 창백한 얼굴이 바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처럼 정적인 태도로. 감히 이름을 부르면 또 한 조각 꿈처럼 날아가 버릴까 싶어 바란은 입을 다물고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니카.
꿈인지 생신지 가늠하느라고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지긋한 눈빛에 벌거벗은 듯한 기분이 되어 멋쩍게 눈을 내리까는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엉겨 붙던 머리카락이나 먼지투성이 몸은 좋은 냄새가 나도록 씻겨 정리되었고, 몸은 포근한 솜이불에 감싸여 간만의 아늑함을 누리는 중이었다.
거대한 창문은 커튼에 가려져 있었으므로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마 애틀턴 왕성 내부겠지 싶었다. 전신이 뻐근하고 기운이 없어 손가락 하나 움찔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으려고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니카는 물에 적신 손가락으로 바란의 껍질이 일어난 입술을 덧그려 물기를 먹였다.
그때서야 바란은 목이 바싹 마른 줄을 실감하고 젖줄기를 찾아 헤매는 어린 짐승처럼 매달렸다. 니카는 바란의 어깨를 받쳐 안고서 물을 먹였다. 한참이나 꼴딱꼴딱 받아넘기다 말고 입을 꾹 다문 바람에 물이 목 언저리로 흘러 셔츠를 적셨다. 니카가 소매로 물기를 훔쳐주었다.
“콜록, 콜록! 아, 니카아.”
젖은 기침을 두어 차례 흘리며 넌지시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니카가 도통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란은 그가 단단히 화가 나 있음을 눈치챘다.
“니카. 화났어?”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했다가, 또 얼마 곱씹고 나서부터는 바란 역시도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니카의 연이은 무시에 이맛살을 한껏 찌푸린 바란이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지금 너만 화난 거 아니거든. 신전 붕괴할 때 날 밀쳐 올리고 정작 넌 돌덩이 밑에 깔려서 잠적한 거 기억하고나 있어? 어떻게 그래?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했는데, 넌 한 달이 지나기까지 날 만나러 오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그리고. 바란은 점차 조잘대는 속도를 늦추더니, 이윽고 두 쪽 입술을 꼭 맞물려 닫았다.
“좀 전에는…. 날 구하지 말았어야지. 멍청아.”
“…시끄러워.”
“왕녀랑 결혼까지 할 수 있었잖아. 행복의 문턱까지 와서 다 걷어차는 게 말이 돼?”
“듣기 싫다.”
니카는 불퉁한 목소리로 핀잔 주면서 바란의 코끝을 손으로 툭 튕겼다. “아.”하고 신음한 바란이 발끈했다.
“니카 너, 그게 걱정하는 사람한테 할 소리야?”
“그러는 너는 걱정하는 사람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데? 기억하라고, 경멸한다고? 네가 거기서 해야 할 말은 그딴 게 아니었다. 바란.”
니카의 서슬퍼런 목소리에 바란은 움찔 쪼그라들었다. 배신감으로 젖은 니카의 두 눈에 옴짝달싹 못하고 사로잡힌 까닭이다.
“날 위해서 죽겠다니. 그런 멍청한 발상은 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 거지?”
니카는 한참이나 바란의 반쪽이 된 얼굴을 쏘아보다가 점차 고개를 수그렸다. 머리카락이 쏟아지면서 드러난 니카의 귓등이 아주 붉었다.
“남겨지게 될 내 기분은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넌 늘 이런 식이었다. 거짓말로 내 시선을 돌린 뒤에 네 목숨이나 안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집어던지잖아. 그러면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던가? 그래서 자꾸 날 위해서라고 변명하면서 자기연민에 절어 사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은 됐다.”
니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실려 있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바란은 영문을 몰라 아연히 니카를 올려다보았다. 떠나는 것 같이 홀연한 뒷모습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몰려와 심장을 뒤흔들었다.
“니, 니카. 어디 가는 거야?”
“네가 다시 한번 스스로를 희생하고 나선다면 그때는 버틸 자신이 없어. 그러니.”
바란은 니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상을 찌푸렸다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가 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거라면 하나도 재미없으니 그만둬 달라고 애걸하기까지 했다. 니카는 못 들은 체 등을 돌렸다.
“여기까지 하자, 바란.”
“뭐?”
믿겨지지가 않았다. ‘여기까지’라니. 아무것도 시작한 적이 없는 그들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단어였다. 바란은 그 단어를 파악하기도 전에 지레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가, 정신이 돌아오면서 점차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니카.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다 너, 너, 널 위해서 그랬던 거야.”
“날 위해서라고?”
“그래. 너한테 더 나은 길이 뭔지는 뻔했으니까…. 왕자가 찾아와서 네가 곧 왕가의 일원이 될 거라고 했었어.”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바란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전부 다 니카를 생각해서 한 선택이었다. 화를 낼 이유가 없다. 잘 설명하면 이해해 주리라 싶었다. 항상 신경질이 난 듯 굳어 있는 니카의 표정을 통해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떠보기 위해서 억지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니카의 반응을 살폈다. 따라 웃거나 최소한 한숨이라도 내쉰다면 성공이었는데, 니카는 어쩐지 더욱 짜증이 난 듯 낯을 살얼음판처럼 바싹 얼렸다. 목소리는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왕녀님과 결혼하면 행복할 테니까?”
“그래! 네가 드라코슨이 된다면 더는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을 거고, 누구든지 너를 존경할 거야. 왕녀는…. 너 아직도 왕녀를 좋아하잖아. 왕녀와 결혼해서, 너와 그녀를 닮은 어린아이를 키우고…. 그런 게 너에게 있어서는 행복일 테니까. 그래서 그랬어.”
“만약 왕족이 되지 못하면?”
“그럼 너한테 집착하는 인간쓰레기랑 영원히 붙어살아야겠지!”
더듬거리던 바란은 니카의 반문에 와락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가쁜 숨에 어깨를 떨며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다 망쳤다. 바란은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안 그래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니카의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그런데 상상과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매정히 멀어져만 가던 니카의 걸음이 다시 바란이 앉은 침대 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니카는 화가 한 풀 꺾인 목소리로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인간쓰레기 얘긴가?”
“…….”
“바란 탈타미오. 너는 꼭 내게만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나 같은 사람 만날 이유가 없긴 너 역시 매한가지다.”
이 말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바란의 신경질을 건드렸다. 풀 죽어 수그러진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따졌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네가 뭐가 어때서.”
“남부의 천한 집시 혈통, 반은 인간이 아니고, 얼굴의 비늘, 전에는 왕국기사 작위라도 봐줄 만 했지만 이제는 기사 작위도 잃었으니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
“잠깐만, 작위가 없어? 그게 무슨-”
“몸은 말랐고, 키는 지나치게 껑충 큰 감이 있지. 얼굴에 얽은 비늘은 말 그대로 끔찍해. 사회성은 바닥, 말솜씨도 없고, 세상 그 누구도 나더러 호감 가는 사람이라고는 감히 말 못 하지. 반면에 너는.”
니카는 바란의 전체를 가리켰다.
“바란 탈타미오잖아.”
“비꼬는 거야?”
“비꼬는 걸로 보여? 수지가 안 맞는 장사라고 얘기하려는 거다.”
기가 찼다. 바란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 허리춤에 손등을 공격적으로 얹었다.
“왕녀를 걷어찬 게 누군데 수지 타령이야?”
“이해 좀 따지는 게 뭐가 어때서?”
“나는 네 껑충 큰 키도, 비늘도, 말주변이 없는 것도 전부 좋아해. 왜 멋대로 점수 매기고 깎아내리려는 거야? 사람 마음은 그렇게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 그래?”
니카가 짧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문자 그대로 기뻐서 흘러나오는 웃음은 절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바란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한숨을 터뜨리듯 웃었다면 십중팔구 시비가 걸렸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니카는 좀 풀어졌나 생각하기가 무섭게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뺐다.
“마찬가지다.”
“…….”
“내 행복은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니카는 그 한마디 남기고 훌쩍 일어났다. ‘여기까지’라던 말이 바란의 귓속에 메아리치며 전신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그건 싫다. 바란은 생각했다. 그건 정말 싫어. 이제야 비로소 니카에게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마주 보게 되었는데. 왕자도 대공의 간섭도 없이 그저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 아직 마음에 쌓아 둔 좋아한다는 말이 너무도 많은데.
“이, 이렇게 나한테서 등 돌리는 건 말도 안 돼.”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단호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정말이지 니카다웠다. 바란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걸음마도 못 뗀 아이처럼 휘청이며 걸었다. 타는 것 같이 갈라진 목구멍에 억지로 침을 삼켰다. 바란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맨발을 디딜 때 구겨졌던 침대가 원상복귀 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된다고, 알아?”
니카는 못 들은 체했다. 바란은 잰걸음을 놀려 가까스로 니카를 따라잡았다. 바란은 그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에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그 문 열지 마! 멀어지지 마, 나한테서!”
“…이제야 귀족답게 명령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군.”
“그래! 네가 한심하다고 여겨도 상관없어. 이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지쳤어. 널 가지려고 이미 바닥까지 내려왔어. 신분이든 뭐든 전부 이용할 거야.”
“이를테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되묻는 니카의 모습이 마치, 그 어떤 이야기도 통하지 않을 철옹성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숨부터 막혀 왔다. 바란은 이를 악물었다.
“네 죄책감, 책임감, 아이들을 안쓰러워하는 버릇 같은 거. 너의 약점이라면 많이 알고 있어. 그것들 이용해서 널 내 옆에 묶거나 가두는 건 어린아이 목 비트는 것보다 쉬워.”
“그러다 내가 너에게 질려버리면?”
“그래도 안 돼. 못 놓아 줘. 죽어도 내 곁에서 죽어. 그래야 해. 네가 날 구했잖아. 구제불능으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잖아. 책임을 져.”
끈적끈적하고 어두운 마음이 균열을 타고 제멋대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혼탁한 불안감과 집착이었다. 소유욕이고, 이기심이고, 욕정이었다. 바란은 언제나 이런 더러운 편린들을 니카의 눈 밖에 감추어 두고 홀로 앓곤 했었다. 그러나 더는 숨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니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할퀴고 간 자리로부터 곪은 속이 역력히 드러났다.
아뿔싸 싶은 마음이 후폭풍으로 밀려왔다. 바란은 이마를 짚고 의미 없는 음절을 더듬어 말하거나 했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겸연쩍게 툭 뱉었다.
“많이 좋아해.”
아름답기만 한 고백은 아니었다. 바란은 울상을 지었다. 가장 예쁜 말만 골라서 대령해도 니카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말까인데 거기에 대고 오랜 집착을 쏟아내다니. 니카가 묵묵히 바란의 말을 전부 곱씹어 들은 뒤에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의 눈을 마주하기가 너무도 겁이 났다. 바란의 시선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란.”
몇 음이나 위로 들떴던 니카의 볼멘 목소리는 어느샌가 평소처럼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다. 냉정한 심판의 말을 두 눈 질끈 감고 기다리던 바란은 놀라서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얼떨결에 마주친 니카의 낯은 발그레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맥이 그만 탁 풀렸다. 살짝 젖은 속눈썹이나 구겨진 미간의 세세한 주름까지도 전부 바란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니, 잘도 새빨간 거짓말을 했겠다. 바란은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니카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는지 몰라도 원하던 것을 챙기고 썩 흡족해진 눈치였다. 그는 바란을 황홀하다는 듯이 흘겨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빗어 넘기며 제 핏기없는 입술을 두어 번 깨물었다.
“네가 한 말 명심해라.”
“무슨 말?”
“못 놓아준다고 한 거.”
세상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니카의 울퉁불퉁한 손이 천천히 바란의 허리께를 더듬어 안았다. 냉정히 굴던 게 언제적 일이냐는 듯이 거친 포옹이었다. 이윽고 니카는 천천히 등을 구부려 바란의 목덜미에 오뚝한 코를 문댔다. 깊은 들숨에 목 언저리가 무척 간지러웠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바란이 당황에 물들어 이상한 신음을 냈다.
“다시는 날 놓으려고 하지 마라.”
“으응?”
“이제는 질렸다거나, 나를 위해서라거나, 그런 변명은 두 번 다시 들어줄 의향이 없다. 이다음에 나를 놓아버리려고 한다면…. 내가 구해준 목숨을 다시 이 손으로 거둬 가겠다. 바란 탈타미오.”
나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니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진지하게 확답을 줘야 한다고 했다.
“각오는 됐나?”
“언제나. 언제든지….”
바란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입술이 맞물렸다. 누가 먼저 달려들어 입을 맞추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니카는 손가락 사이에 바란의 금발을 거칠게 욱여쥐고서 허겁지겁 바란의 입술을 취했다. 눈물 맛이 나는 키스였다. 입술까지 굴러떨어진 눈물방울이 간간이 짜고 쓴 맛을 조미했다. 바란은 니카가 뺨 위로 누비며 쪼듯이 입 맞추기 전까지는 그게 자신의 눈물인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입술이 서로 떨어질 적마다 니카는 자꾸만 “좋아해.” 하고 한숨처럼 지껄였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해 할딱거리면서 자꾸만 바란의 입술에 제 것을 부딪었다.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찢어진 바란의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섞여들었다. 니카가 물기에 젖은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아쉬운 듯 떨어졌다.
“그러면 이제.”
사랑이 아니었다면 기필코 위대해질 수 있었던 남자가 눈을 휘며 웃었다. 바란의 온 삶을 통틀어 다시는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나는 네 연인이다.”
그리고 아주 값진 선물을 주었다. 바란은 이 말을 아주 오래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혀를 묶는 온갖 변명을 탈피해 자유롭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래토록 사랑해 온 상대의 얼굴인데 어쩐지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듯 생경하기만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