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1권
1.
채언은 욕조를 닦고 있었다. 물때도 끼지 않은 깨끗한 욕조였다.
집주인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곤 했다. 샤워는 매일 하는 듯했지만 욕조에 몸을 담그며 욕실에 오래 머무는 타입은 아니었다. 또 음식은 차려놓은 대로 먹었고, TV는 종종 보며, 거의 매일 정장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가끔 큰소리로 혼잣말인지 연기인지를 하는 듯했다.
채언이 이 집에 머물면서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방음이 좋은 집이라 매번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채언은 그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방문을 살짝 열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국말로 해야 하나?’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 나와요. 아니 진짜 나오지는 말아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망설이던 채언이 문밖으로 한발 내디딜 때면, 집주인은 이내 거실에 잔잔하게 클래식 같은 것을 틀어놓고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직업은 몰랐다. 연극하는 사람인가.
그럴 때면 채언은 그냥 조용히 문을 닫았다.
채언은 아직 그와 직접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집주인이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자신에게 제공된 방에 들어가 얌전히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ㄷ자로 지어진 집이었다. 채언의 방은 복도 끝에 마련되어 있었고, 화장실도 딸려 있었기 때문에 퇴근 시간 이후에 굳이 방을 나설 이유가 없었다. 집주인의 방은 반대편 복도 끝에 있었다.
채언은 집주인이 곱게 벗어 놓은 옷이나, 먹고 둔 그릇, 방 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으로 집주인의 성향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연극 대사를 외우듯 뭐라고 떠들어대도 이제는 그냥 또 저러네, 하고 말았다.
채언이 이곳에 입주 도우미로 들어온 것이 오늘로 딱 한 달째였다.
그동안 집주인과 트러블이 발생한 적은 없었으니 장기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계약은 집주인과 한 것이 아니었다. 집주인의 대리인과 했다. 정장을 입은 차가운 인상의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심채언입니다.’
‘서영원입니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채언을 살펴본 영원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옅은 사람이었다.
1차 서류 심사에 통과하고 이루어진 면접은 실습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자기소개를 했고, 간단히 한식을 차려서 맛 평가를 받기로 했다.
‘장 봐오는 것부터 시작하죠.’
‘장이요?’
‘보면 알겠지만,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요.’
영원의 말대로 집 안은 휑했다. 거실에는 크고 검은 소파와 텔레비전이 한 대 놓여있었고, 부엌에는 냉장고와 식탁이 있었다. 가구만 친다면 정말 있어야 할 것만 있는 집이었다.
‘뭐가 있는지 잠깐 확인 좀 해도 될까요.’
소금이나, 고춧가루 같은 것이 있나 봐 둬야 무슨 음식을 할지 정할 수 있었다. 채언의 물음에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부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 안에는 물과 술 등의 음료가 정렬되어 있을 뿐이었다. 뭘 먹고 사는 거지.
영원은 채언에게 카드를 한 장 주면서 장을 봐 오라고 했다.
채언은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을 해야 하나, 무거워도 삼계탕같이 제대로 된 음식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 먹던 것보다 약간 호화로운 식사를 차리기로 했다.
요리 관련 자격증은 없었지만, 자취 기간이 나름 길었기에 웬만한 음식은 할 줄 알았다.
채언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영원의 운전기사가 태워다주는 차를 타고, 근처 백화점과 연결된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소금, 계란, 어묵 등등 평소 장을 볼 때는 용량이 많이 든 것을 골랐는데, 이런 건 누가 사는 걸까 싶을 정도로 적게 든 것들을 샀다. 쌀은 20kg짜리 세 포대를 샀다. 다른 재료는 조건이 걸려있지 않았는데 쌀은 영원이 무게를 지정해서 사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장 본 것은 채언이 직접 들고 와야 했다. 그가 어깨에 쌀 포대를 짊어지고 오는 것을 영원은 소파에 앉아서 지켜봤다. 곧바로 음식을 만드냐는 채언의 물음에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뭐. 괜찮네요.’
음식 맛을 본 영원은 자신의 비서에게 조용히 말을 전달한 후 집을 나섰다. 비서는 도우미 업체와 전화 통화를 하고는, 채언에게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앞으로 이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 것이라고 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지만 양식 말고 한식을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너무 전통적인 음식일 필요는 없고 보통 때 먹는 음식 정도로. 그것도 하루에 저녁 한 끼만. 아침은 전날 빵이나 샐러드용 채소를 사다 챙겨놓으면 됐다.
이 밖에도 생활비가 제공되는 카드로 장을 볼 것, 집주인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말 것, 옷 세탁은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면 세탁업체에 맡길 것, 냉장실 첫 번째 칸은 개인적으로 사용 가능함 등등. 계약서에는 채언이 입주 도우미로 지내며 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었다.
평범한 조건들 중에서 비서가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다면, 집주인이 있을 때 집에서 큰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랄만한 소리는 금지라고 했다.
그래서 채언은 집주인이 많이 예민한가 보다 생각했다. 깜짝 놀랄만한 소리라니, 집주인이 자고 있을 때 청소기를 돌리지 말라는 건가. 유리컵 같은 것을 깨지 말라고 돌려 말하는 건가. 어쨌든 채언은 조심하겠다고 대답했다.
비서가 말하기를, 집주인은 아마 바빠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집주인은 수면시간이 길지 않은 사람이니, 아침 출근 시간 전에는 강제로 깨지 않게 조용히 있어 달라고 부탁해왔다.
채언의 공식적인 출퇴근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고, 그사이 원하는 시간에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 그날 해야 할 집안일을 모두 끝냈다면 퇴근 시간은 유동적으로 조절이 가능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봤자 어차피 이 집에서 숙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채언에게 정해진 근무 시간은 별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근무에 관한 조건들은 대부분 집주인과 협의 후 조절이 가능했다.
계약서를 읽어보던 채언은 그동안 갈고 닦은 살림 실력이 이제야 빛을 보는 걸 느꼈다. 살림도 기술이었다. 역시 기술을 배워두면 써먹을 곳이 있었다.
주 5일 근무이니 어느 정도 월급이 보장되었고, 숙식까지 해결되는 곳이었다. 보통 이 정도 조건이면 채언이 이력서조차 내밀 수 없는 기업이거나, 일이 힘든 공장,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식당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이렇게 많은 월급을 주지는 않았다.
채언은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 얼마 전 월세 살던 곳 집 주인이 당장 다음 달부터 방값을 올려 받아야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제대로 된 집주인도 아닌 사람이었다. 본인도 투룸에 전세를 얻어 살면서 방 한 칸을 몰래 셰어로 내놓은 것이었다. 법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대신 보증금이 없었고, 월세도 싼 편이었다.
그 집에 들어갈 당시 채언은 언제 쫓겨나도 모를 방 한 칸에도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월세가 오른다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안 좋은 일은 줄줄이 엮여 온다 했던가, 아르바이트하던 식당마저 폐업했다. 몸은 상하더라도 숙식이 해결되는 공장에 취직을 할까 싶었다. 채언은 그때 잠시, 다달이 저축하는 금액이 너무 큰가 생각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적금 통장을 깰 수는 없었다. 돈을 모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통장의 돈은 부족했고, 남은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채언에게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목표가 하나 있었다. 그 목표는 돈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방탕하게 살지 않아도 가난이 따라붙었다, 채언은 낡은 방에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매일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온 것이었다. 예전에 일자리를 찾다가 혹시 몰라 도우미 회사에 정보를 등록해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소개비를 좀 내긴 했지만 사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자. 해외여행을 가는 데 문제는 없으나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 중졸 이상, 고졸 이하.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
이것이 입주 도우미에게 1차적으로 요구된 사항이었다. 조금 특이하다 싶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또한, 이 특이한 조건 때문에 채언에게 채용 기회가 온 것이었다.
‘계약서 내용 다 확인하셨습니까?’
‘네.’
‘그럼 도장 찍기 전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달 동안 별 무리 없이 일하신다면 일 년 단위로 계약서가 갱신될 겁니다. 퇴근했다면, 집주인이 집에 왔다고 해서 굳이 인사 같은 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조용히 심채언 씨 일만 하시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쪽으로 연락해주세요.’
그는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김진원. 010-xxx….
그리고는 곧바로 계약했다.
얼마 후, 채언은 이상한 투룸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짓고, 깨끗하고 커다란 새집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간이 흘러 오늘.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이틀 후 근무 종료였다.
채언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집주인과 딱히 트러블은 없었는데, 재계약하자는 말도 없었다. 업체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채언은 다 닦은 욕조에 샤워기로 물을 뿌리며 뱅글뱅글 도는 거품을 바라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연말이라 너무 바빠 재계약해야 한다는 것을 까먹은 걸까.
채언은 머릿속에 세 사람을 떠올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던 여자와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내밀었던 그의 비서, 그리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집주인이었다.
채언은 욕실 청소까지 마치자 할 일이 없었다. 집주인이 먹을 저녁은 이미 식탁 위에 차려두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퇴근 시간 삼십 분 전이었다.
이렇게 이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걸까. 하지만 일단 이번 달 집세를 아껴두었고, 한 달 치 월급 받을 것이 있으니 당장 나가게 되더라도 고시원에 들어간다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채언은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비서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지난달에 xx빌리지 입주 도우미 계약했던 심채언입니다… 재계약에 관한 안내를 받지 못했는데요. 내일이 마지막 근무일이라서요…. 라서요? 입니다, 가 나은가.”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내기 전에 미리 읽어보는 중이었다. 무언가 쓸 때 소리 내 읽어보는 것은 채언의 버릇이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을까. 피드백을 해달라고 하면 성실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한참 혼잣말을 하며 문장을 고치던 도중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클린케어 소속, 심채언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입주 도우미 계약 연장 때문에 연락 드렸습니다. 지난번 계약 때 명함을 드렸던 김진원입니다. 내일모레가 계약서상 심채언 씨 마지막 근무 날로 확인되는데요.
잘리는 건가. 채언은 시무룩함을 들키지 않게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
-업체 쪽으로 연락을 넣었는데 심채언 씨께서 답이 없다고 하여 직접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재계약 건에 대해 안내받으셨습니까?
“예? 아뇨. 저도 마침 그것 때문에 담당자님께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상대방이 흠, 하고 불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역시 안 좋은 소식이었던 건가. 채언은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심채언 씨, 계약 연장 가능하십니까?
“연장이요? 네!”
기쁜 소식에 한층 밝아진 톤으로 대답했으나, 상대방에게 들리는 채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진원은 채언에게 업체를 낀 계약은 이번 달로 마무리 짓고, 중간에 거치는 것 없이 새로 계약서를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 또, 시간을 두고 갱신 의사를 물어야 했는데 죄송하다며 착실히 사과의 말까지 전해왔다.
괜찮다면 7시쯤 채언이 머물고 있는 집 앞 카페에서 새로 계약서를 작성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채언은 네! 하고 대답했다. 세부적인 사항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채언으로서는 당장 집을 새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채언은 일곱 시가 되기 전에 목도리를 두르고 볼펜 하나를 점퍼 주머니에 챙겼다. 그쪽에서 볼펜을 준비할 것 같긴 했지만 혹시 몰라 대비한 것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본 뒤 신발을 들고 방을 나왔다. 집주인은 현관 바닥에 신발을 두지 않고, 고급 신발이 줄줄이 놓인 신발장에 두었다. 그곳에 허름한 운동화를 두어도 되는지 몰라 채언은 자신의 것을 방 한쪽에 두고 다니는 중이었다. 장을 보거나 쉬는 날이 아니면 딱히 나갈 일이 없어서 번거롭지 않았다.
채언이 현관에 운동화를 내려두고 발 한쪽을 집어넣을 때였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신발을 신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아직 집주인이 퇴근해서 들어올 시간이 아닌데. 마저 나머지 신발을 신고 허리를 펴자 현관 복도를 걸어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문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와 채언의 눈이 마주쳤다. 방금 숨을 들이마시던 중이었는지 남자가 흡,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외국인, 그리고 키가 엄청나게 크네. 채언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남자를 보자마자 든 첫 소감이 그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곧 뒷걸음질 쳤다. 신발 벗는 곳에서 바로 보이는 복도 벽에 걸린 그림을 확인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이 자신의 집이 맞는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누구시죠?”
채언이 남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나직한 울림이 있었고, 혼잣말을 할 때 보다 묵직했지만 집주인의 것임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채언은 일단 인사부터 했다. 입주 도우미인데요. 덧붙이자 미간을 찌푸린 남자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입주 도우미요?”
그리고는 현관 바닥을 살피는 듯했다. 시선이 잠시 채언의 운동화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언제부터요. 오늘?”
고개를 든 남자가 물었다. 이번에는 채언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아뇨. 한 달 됐습니다.”
혹시 집주인이 자신의 프로필을 받지 못했나 싶었다.
“입주 도우미라면서요.”
“네.”
입주, 입주. 작게 읊어보던 남자가 다시 물었다.
“…입주는 이 집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뜻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한 달 됐다고요…?”
“…네.”
채언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동안은 출퇴근을 하셨나요?”
“아뇨…. 아! 네.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다른 곳에 살았냐고 묻는 거예요.”
“아뇨. 그건 아닌데요.”
남자와 채언의 대화가 빙빙 돌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무언가 확인하려는 듯했고, 채언이 대답할수록 그의 표정은 굳어졌다.
“한 달 동안 이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저쪽 복도 끝 방에서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 설마 몰랐나? 설마. 채언은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몰랐네요.”
몰랐구나. 채언은 이것 또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계약서를 건넸던 여자는 집주인의 대리가 맞는 걸까? 혹시 이전 집주인처럼 이상하게 집을 셰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재계약을 따내기 위해, 한 달 동안은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더욱 조심하긴 했다. 괜히 마주쳤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다. 집주인과 아예 마주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쉬는 날이라든가, 방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다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채언이 출퇴근 시간 외에 방 밖으로 나갈 때면 남자가 집에 오지 않았다. 어느 주말에는 이 집에 있으면서 밥도 차려 먹고 했는데도, 집주인은 채언이 잠들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처럼 출퇴근하시는 분이 다녀가는 줄 알았어요.”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나긋했지만,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뻣뻣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굳었던 몸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저기. 집주인분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저희 계약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요?”
채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남자가 드디어 긴장을 풀고 대답했다.
“계약할 때 서류 가져온 사람 인상착의가 어떻던가요?”
“짧은 단발머리 여자분이었는데요. 성함은 서… 영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비서분도 함께 오셨고요. 채언은 오늘도 영원의 비서와 연락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럼 맞아요. 제가 일이 바빠서, 가족이 대신 일할 분을 구해줬는데. 전에 일하던 분이 언제 그만두고 바뀌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했네요.”
가족이라는 말에 채언은 영원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눈과 머리카락 색이 밝은 편이었다. 남자는 영원의 것보다 머리카락 색이 더 밝았다.
그때 남자가 채언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서영웅입니다.”
“심채언입니다.”
한 달 만에 제대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다른 방식으로 웃었다. 어쨌든 둘 다 안심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하아.”
채언이 나간 후 영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을 여는 순간 현관 앞에 누군가 서 있어서 놀랐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귀신이 눈앞에 보이는구나. 순간 집을 버려야 하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귀신치고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카드키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몰라 평소에는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복도의 그림까지 확인했다. 결국 그는 귀신도, 다른 집 이웃도 아니었지만.
입주 도우미라니. 분명 누나가 언질을 줬던 것 같은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처럼 자신이 집에 없는 시간에 일하는 사람이 왔다 가는 줄 알았다. 새로 들어온 입주 도우미는 놀랍도록 조용한 사람이었다. 한 달 동안 같이 지냈다니. 꿈에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영웅은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에서 어떻게 행동했지? 혼자서 헛소리도 좀 했던 것 같은데. 가끔 외로워서 AI 스피커와 대화를 하기도 했다. 땀이 배어 나온 손을 와이셔츠에 문지르며 터덜터덜 소파 앞으로 걸어간 영웅은 그 위로 풀썩 누워버렸다.
채언은 재계약 서류 작성을 하러 나간다고 했다.
영웅은 한국에서 사람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주변에서 챙겨주는 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가를 떠올려보던 그는, 심채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조용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니.
영웅은 소파에 누운 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계약서를 작성한 채언은 가뿐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알고 보니, 재계약에 대한 연락이 온 지 꽤 됐었다. 몇 달 전부터 불법 게임 광고 메시지가 주기적으로 오길래, 참다 참다 최근에서야 그 번호를 스팸 처리 해두었는데. 그게 새로운 입주 도우미 업체 담당자의 번호였다. 신경 쓰지 않던 스팸 메시지 함에 들어가 보니 불법 게임 광고와 재계약 안내 메시지가 뒤섞여 있었다. 담당자가 투잡을 뛰다가 실수를 한 듯했다.
이번에는 업체를 끼지 않고 새로 계약을 했다. 덕분에 월급이 조금 올랐다. 업체 수수료로 빠지던 금액이 채언에게로 온전히 지급되는 것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은 일 년이었고, 조건은 추가된 게 몇 개 있긴 했지만 전과 비슷했다.
전에 들은 대로 집주인은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다. 국적 또한 한국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전부 외국에 있었다. 그러니 만약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병원까지 동행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병원 동행 같은 추가 근무 발생 시 모두 시급으로 계산해 청구하면 된다고 했다.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해고를 당하더라도 법에 따라 보장받을 것은 전부 보장받을 수 있었다. 채언은 적금을 깰 걱정을 덜었다. 앞으로 일 년만 하던 대로 하면 목표치를 채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집주인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며 채언은 신발을 벗었다.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걸어가는데 어디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집주인이 TV를 틀어놨나. 목도리를 풀며 벽을 돌자 소파 위에 엎어져 누워있는 영웅이 보였다. 낑낑거리는 소리는 그가 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한쪽 볼을 소파에 대고 누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채언은 앓는 소리를 내는 영웅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잠을 잘 못 자는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저렇게라도 자게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탁 위를 보니 차려둔 저녁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금방 상하는 것들만 냉장고에 넣어둘까. 목도리를 말아 손에 쥔 채언은 우선 겉옷부터 벗고 나오기로 했다.
계약서를 짐가방 안쪽에 넣어둔 채언은 옷만 갈아입으려다가, 그냥 지금 샤워를 하기로 했다.
보통 집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씻고는 했다. 물소리가 거슬릴지도 모르고, 혹시 서로 샤워하는 타이밍이 겹쳐 각각 샤워기의 물줄기가 약해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화장실에 물을 틀어놓으면 싱크대 물이 정수기 수준이 되곤 했다.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 채언은 평소처럼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데 뭔가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식탁 위의 반찬이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일어나서 먹고 있으려나. 어차피 퇴근 시간이 지났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까. 완벽하게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낸 채언은 방 안의 빨래 바구니에 수건을 던져 넣었다. 그래도 이왕 다시 생각난 김에 한 번 나가보기로 하고,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영웅은 여전히 힘겨운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채언은 앓는 소리를 들으며 식탁 위의 보를 걷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상할 리는 없었지만, 집 안이 따듯한 편이라 나물 종류는 계속 꺼내놓기 애매했다. 반찬 그릇을 들고 살펴보던 채언이 고사리가 담긴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을 때였다.
달그락.
“…으으.”
조심히 내려놓았는데 시끄러웠나. 채언은 부엌 서랍을 열어 랩을 꺼냈다. 작게 뜯어 반찬 그릇 위를 덮고 다시 내려놓았다.
달그락.
“…윽.”
소파를 보니 영웅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자고 있었다. 심각한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아니면 어디가 아픈가. 채언은 조용히 소파 앞으로 걸어간 뒤 상체를 숙여 집주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설마 깨웠다고 자르지는 않겠지.
“저기요.”
영웅이 미간을 움찔했다.
“저기…. 사장님.”
그래도 깨지 않자 채언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보았다.
“사장.”
“헉!”
“……!”
번쩍 눈을 뜬 영웅 때문에 채언도 움찔 놀랐다.
영웅은 누운 자세 그대로 빠르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아픈 게 아니라 악몽을 꾼 듯했다.
“괜찮으세요? 자는데 좀 힘들어하셔서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또 가위에 눌렸다.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달그락 소리에 맞춰 손가락부터 힘을 주었다. 그래도 몸이 움직이지 않아 고통스러운 와중에 채언이 깨워준 것이었다. 영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깨워줘서, 고마워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영웅이 작게 기침을 했다.
“물 좀 가져다드릴까요?”
“…네.”
채언이 유리컵에 살짝 미지근하게 물을 담아와 내밀자, 영웅은 단숨에 물을 마셨다.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아낸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채언은 빈 컵을 받아 싱크대 안에 넣어두고 다시 영웅에게 다가갔다.
“저녁 안 드셨더라고요. 반찬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했는데, 그냥 둘까요?”
멍하니 앉아있던 영웅은 채언의 말을 듣고 자신의 배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냥 두세요. 천천히 먹을게요.”
“네. 그럼 저는 방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채언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소파에 앉아있던 영웅도 마주 고개를 숙여왔다.
“네. 저도. 아, 그리고 깨워줘서 고맙습니다.”
혼자 남은 거실에서 잠시 가만히 앉아있던 영웅은 TV를 틀었다. 눈에 익숙한 스포츠 채널이 나오자 잠시 화면을 쳐다보다 일어섰다.
가까이 다가간 식탁 위에는 랩을 씌워놓은 반찬 그릇이 있었다. TV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사람 손길이 닿은 식탁 위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 안에 채언이 있어 다행이었다. 평소라면 가위에 눌린 뒤 한참 만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도, 뭘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을 것이었다. 영웅은 다시 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혼자 지내도 될 정도로 나아졌지만 완벽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온 것이 그때 일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영웅은 천천히 반찬 그릇의 랩을 벗겼다.
집주인과 마주친 이후로 채언의 일상이 특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집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퇴근 시간에는 복도 끝 방으로 퇴근했다. 여전히 할 일이 별로 없는 입주 도우미 생활 중이었다.
한 달 동안은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랬다지만, 재계약 이후에도 채언이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원래 취미가 없었고, 집주인과 같이 TV를 볼 처지도 아니었으니 할 게 없었다. 가끔, 너무 심하게 가만히 있었다 싶을 때면 운동 겸 근처 위치를 익혀두기 위해 밖에서 뛰다 오기는 했다. 하지만 날이 추워져서 오래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주 조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기는 했다. 거실에 앉아 수건을 개던 채언은 다 개어진 것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영웅의 욕실에 넣어둘 수건이었다.
채언이 집 안 청소를 할 때마다 영웅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방과 연결되어있는 욕실에는 수건을 채워 넣거나, 청소를 하러 자주 들어가기는 했지만, 나름 방의 경계를 그어두고 지나다녔다. 그의 서재에는 아예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서재 청소는 할 필요 없다고, 계약할 당시 배려를 빙자한 조건을 들었다.
왜 서재는 출입하지 말라는 걸까 잠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결론은 금방 나왔다. 영웅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그의 누나 또한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둘 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력은 상당했다. 게다가 입주 도우미를 구할 때 내걸었던 조건.
-남자. 해외여행을 가는 데 문제는 없으나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 중졸 이상, 고졸 이하.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
범죄 이력이 없으면서 가방끈은 그다지 길지 않은 안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채언은 영웅의 서재에 어떤 회사의 기밀 서류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과 정말로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채언은 서재 출입 금지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채언은 품 안에 있는 수건을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하며 영웅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름의 경계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서는 욕실 안에 수건을 채워놓고 나왔다.
오늘은 채언이 적금을 넣는 날이었다. 이체는 핸드폰으로도 가능했지만, 채언은 적금을 넣는 날마다 종이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갔다. 통장 정리만 하면 되니 은행 마감 시간 이후라도 상관없었다. 종이 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것을 보는 것이 채언의 낙이었다. 지폐와 느낌은 달랐지만, 종이 통장을 넘길 때 손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채언은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두른 다음, 통장만 주머니에 넣고 외출을 했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면서 가까운 은행 지점을 찾아 걸었다. 가끔 인도에 하수구 뚜껑이 있으면,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도 잘 피해서 걸었다.
하지만 그런 뒤에는 매번 뒤를 돌아보았다. 만약 저 뚜껑이 열려 있었다면, 그때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미처 피해 걷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잠시 상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왼쪽.”
낯선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작은 베이커리가 나왔다. 통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케이크가 보였다. 겨울이라 생과일이 올라간 것은 딸기 케이크가 유일했다. 채언은 베이커리 앞에 멈춰 섰다.
한참 딸기 케이크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누군가 문을 딸랑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행, 은행에 가야지. 정신을 차린 채언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통장을 꽉 쥐었다.
찌직, 찌직.
통장 정리 버튼을 누르자 내역이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달마다 듣는 이 소리가 꼭 무언가를 찢어버리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기계는 통장을 금방 뱉어냈다. ATM의 혀처럼 내밀어진 그것을 뽑아, 새로 찍힌 내역을 살펴본 채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일 년만 더. 중간중간 갑작스레 돈을 써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만기일을 생각하며 은행 문을 열고 나갔다.
채언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아까 그 베이커리 유리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목도리에 얼굴을 깊게 묻고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채언은 당황했다. 영웅이 복도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내 서서 기다린 것은 아니고,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나와 본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리모컨이 들려있었다. 집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 반겨주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언제나 난방이 돌아가는 집 안은 바깥과 달리 따듯했다.
반짝 자동으로 켜진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기 전에 영웅이 먼저 말했다.
“채언 씨, 오랜만이에요.”
같은 집에 사는데 마주치기가 힘드네요, 하고 하하 웃는 그를 보며 채언은.
“안녕하세요.”
입술을 가린 목도리를 살짝 내리며 대답했다. 저번에 현관에서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는 않았지만, 채언은 오랜만이라는 집주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다.
“밥 먹었어요? 난 지금 먹을 건데.”
“네. 맛있게 드세요.”
“먹었구나….”
되게 빨리 먹었네요. 영웅이 중얼거리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채언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영웅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영웅은 채언이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지금 그가 신발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다는 것이었다.
“채언 씨.”
“네?”
뒤돌아본 채언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신발은 왜 들고 가는 거예요?”
그의 눈이 채언의 보송보송한 머리카락과 어깨 즈음을 흘깃했다.
“혹시 그거 젖었어요? 신발 말리는 거, 신발장 안에 있을 텐데.”
밖에 눈도 비도 오지 않았지만 영웅이 신발장을 가리켰다.
“아뇨. 안 젖었습니다.”
그럼 왜, 라는 눈으로 그는 여전히 채언을 보고 있었다.
“신발장에 둬도 될까요?”
영웅은 채언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한국분이고, 어릴 적부터 한국어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영어만큼 잘 사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은어 같은 것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신발을 신발장에 두어도 되냐고 묻는 말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는 걸까. 채언이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보아서 영웅은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네.”
영웅이 자신 없게 대답하자 채언이 그를 스쳐 가 신발장 문을 열었다.
여느 집 드레스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커다란 공간에는 집주인의 신발이 가득했다. 신발 매장처럼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구두와 운동화는 물론 슬리퍼와 샌들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채언이 가지고 있는 신발이라고는 짐가방 안에 넣어둔 여름용 샌들과 손에 들고 있는 겨울용 운동화뿐이었다. 그래서 채언은 화려한 신발장의 모습이 어색했다.
자신의 것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던 채언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구석 한쪽에 운동화를 밀어 넣고는 슬쩍 영웅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 없는 집주인을 바라본 채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까처럼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채언의 등을 보던 영웅이 말했다.
“채언 씨.”
무심한 눈이 뒤돌아보았다.
“내가 많이 불편해요?”
아직 꺼지지 않은 현관 불빛이 영웅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채언은 눈을 끔뻑였다. 불편하냐고?
“아뇨.”
거짓말은 아니었다. 채언에게 영웅은 가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별 신경 쓰이지 않는 존재였다. 지난달 영웅이 채언이 집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생각하는 정도는 비슷했다. 그는 딱히 뭘 요구하지도 않았고, 제재하지도 않았으므로.
장을 볼 때나, 방금처럼 집주인의 고급 신발 사이에 낡은 운동화를 두어도 될까? 그렇다면 어디에? 하고 고민할 때, 집주인에게 해주는 밥이니 새로운 반찬을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할 때 떠올리는 정도였다.
채언의 간단한 대답에 영웅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이네요. 혹시 불편할까 봐 걱정했어요. 우리 편하게 지내요, 편하게.”
“네.”
“그럼 이따 같이 TV 볼래요?”
영웅이 리모컨으로 등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거실 쪽이었다.
“…아뇨.”
채언은 잠시 망설였지만 확실히 의사를 전달했다.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았다.
“하아.”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영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고 삭막한 거실 인테리어를 보자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미국에서도 독립해서 따로 살긴 했지만, 집 안이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좀 더 따듯한 색으로 꾸며놓고 살았는데. 여기는 너무 까맣고, 하얗고, 휑했다. 전부 누나인 영원의 취향대로 꾸며놓은 곳이었다.
가끔, 가족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사용하던 곳이라 방 개수도 터무니없이 많았다. 귀신이 몰래 숨어 산다 해도 모를 것 같은 집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이 집에 살기 시작했을 때 솔직히 몇 번 스산한 기운을 느껴 혼잣말을 하며 괜히 뻐겨본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에 이 집에 왔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턱을 괸 영웅은 작게 들려오는 TV 소리를 들으며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쿡, 찔렀다.
TV에서는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은 이유는 그냥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해설은 전에 듣던 목소리와 달랐지만, 미국에서 보던 것과 같은 경기의 중계가 나왔다. 또 축구든 야구든 스포츠 채널은 틀어놓으면 그 경기만 나왔다. 예측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레 깜짝 놀랄만한 전개가 펼쳐지지는 않았다. 극적인 경기와 드라마나 영화의 예측 못 할 전개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영웅의 인생에 한국행은 예정이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은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
한국인인 외조부는 거의 평생을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며 살았고, 어머니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을 갔다. 사업이 커지면서 어머니는 경영학을 배웠고, 그대로 외조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후에 상황이 비슷한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핀란드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너희를 낳은 어머니는 한국에서 왔으며, 그러니 뿌리는 그곳에 있다고 교육시켰다. 남매는 아주 어릴 때 몇 년 한국에서 생활했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미국에서 살았다. 그 후로 부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가끔 여행을 온 적도 있지만 영웅은 이곳에 정착해 살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서영웅이라는 이름보다는 앤드류나 앤디가 더 익숙했다. 그렇게 불러주던 사람들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누나가 먼저 경영 교육을 받았고, 영웅도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누나처럼 아버지 회사에 입사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건이 터졌다.
그날. 영웅이 서 있었던 곳은, 마약 밀거래가 이루어질 만큼 으슥한 골목이 아니었다. 갱단이 총질을 해대는 위험한 동네도 아니었다.
레드펠터 센터의 스케이트장에서 친구 녀석이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겠다며, 지인들에게 그 모습을 촬영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웅과 친구들 몇 명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프러포즈하는 당사자가 얼음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상대방이 승낙하자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뒤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끼이익- 터엉.
영웅은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또 끔찍한 생각에 빠져들 뻔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영웅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천천히 숨을 쉬려고 노력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천천히 톡 톡 두드렸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혼자 한국에 와서 바쁘게 지내느라 정신건강에 신경 쓰지 못했다. 밝고 즐거운 것, 달고 귀여운 것들을 상상하며 영웅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하나 꺼내 방으로 갔다. 약을 먹고 잠들겠지만, 오늘도 가위에 눌릴 것 같았다. 길고 길 밤을 생각하며 방문을 잡은 영웅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채언은 문을 열고 나갔다.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문밖을 나서자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간 채언은 아무도 없는 거실에 틀어진 TV와 젓가락이 꽂힌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계란말이를 보았다. 뭐지. 식탁으로 다가가자, 아일랜드 식탁 뒤쪽에 넘어진 의자가 보였다.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였나보다. 채언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그나저나 밥을 먹던 사람만 사라졌다. 의자와 계란말이만 바닥에 던져두고.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이 정도 정리를 해놓을 만한 융통성은 있었다. 어차피 지금 청소를 하나 내일 낮에 청소를 하나 채언의 일이었다.
채언은 바닥에 떨어진 계란말이를 손으로 주워들었다.
잠시 침대에 누워있던 영웅은 안정을 되찾았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른 후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방금 내팽개치고 온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TV도 끄고 의자도 제자리에 돌려놔야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채언이 보였다.
“어.”
무의식중에 소리를 내자 채언이 돌아보았다.
“큰 소리가 나길래 나와 봤다가요. 저녁은 다 드신 것 같아서 정리해놨습니다.”
다시 눈을 돌린 채언은 수도를 잠그고, 헹구던 그릇을 개수대에 올려놓았다. 간단히 그릇 몇 개만 설거지를 하느라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상태였다. 젖은 손을 탈탈 터는데 영웅이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요?”
“자는데 시끄럽게 굴어서요.”
채언의 눈에 황당함이 서렸다.
“…아뇨. 지금 여덟 시도 안 됐는걸요.”
그리고 별로 시끄럽지도 않았다. 시끄럽게 굴었다고 해도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노래를 부르든, 연극을 하든 입주 도우미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채언 씨. 맨날 일찍 자는 거 아니에요?”
“그렇진 않은데요.”
매일 일찍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지내길래 영웅은 채언이 일찍 잠드는 타입인 줄 알았다. 그 방에는 따로 TV 같은 것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입주할 때 따로 방에 TV 같은 걸 설치했어요?”
영웅은 손으로 커다랗게 네모를 그리며 말했다. 채언은 그런 그가 약간 멍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뇨.”
“그럼 뭐 해요?”
“그냥. 할 일 하면서 지냅니다.”
채언은 조용히 말한 뒤, 목 인사를 하고는 복도를 걸어 방으로 돌아갔다.
영웅은 그날 밤, 복도 끝 방 사람이 방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잠들었다.
채언은 집 근처 주민 체육센터의 수영장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퇴근 후에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고, 건강해야 병원비가 덜 들기 때문이었다. 많고 많은 운동 프로그램 중에서 갑자기 수영 프로그램을 알아보는 이유는 집주인의 세탁물에서 수영복을 발견해서였다. 그는 종종 수영을 하는 듯했다. 처음 수영복을 발견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수영복을 보는 빈도가 늘어나던 어느 날, 채언은 수영이 그렇게 재미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에는 작은 복지센터 헬스장이 있어서 거길 다녔었다. 그런데 주변에 수영장이 있다면 수영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영복을 사야 하지만 월세도 아꼈으니 그 정도야 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채언은 수영 교실 시간표를 보다가 핸드폰 달력을 켰다. 수영 교실은 3월부터 개강이었다. 선착순이었기 때문에 신청 기간이 되자마자 신청을 해야 했다. 까먹지 않기 위해 달력에 적어놓기로 했다.
수영 신청일을 기록해놓고 달력을 넘겨보던 채언은 손가락을 멈칫했다. 다다음 주면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대동에 한 번 다녀와야 하는데. 생각난 김에 바로 다녀오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도 곧바로 쉬는 날인 내일모레는 좀 빠른가. 준비도 해야 하고. 잠시 날짜를 고민하던 채언은 다음 주 쉬는 날에 ‘대동 다녀오기’를 적어 넣었다.
대동은 채언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도시였다.
쉬는 날 채언은 처음으로 영웅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정확히는 채언이 밥을 먹는 도중 영웅이 식탁에 앉은 것이었다.
주말마다 바쁘게 어딘가를 다니더니, 오늘은 집에서 쉬려나 보다. 채언은 밥알을 씹으며 영웅을 향해 살짝 눈을 들었다. 방에서 나오는 영웅은 뒷머리가 뻗쳐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체구가 큰 데다, 딱딱하게 굳어있어 인상이 조금 차가워 보였는데 지내면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쉬는 날에는 채언이 그의 밥을 차려줄 필요가 없었다. 전날 장도 미리 봐두었고, 영웅은 꺼내먹기만 하면 되었다. 채언은 밥만 새로 해서 어제 끓여놓은 국과 남은 반찬으로 아침을 대충 먹는 중이었다. 식탁에는 의자가 네 개 있었는데, 영웅은 채언 바로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뒤로 뺐다. 빵을 토스터기에 넣은 그는 의자에 팔을 걸치며 앉았다.
영웅은 토스터기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식빵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퐁! 튀어 올랐을 때, 채언은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가 조금 놀랐다. 다행히 그릇 밖으로 흘리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영웅은 노릇노릇해진 식빵 두 쪽을 꺼내 그릇에 올려둔 뒤 잼을 발랐다. 그런 다음 다시 식빵 두 쪽을 꺼내 토스트기 안에 집어넣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미리 잼 발라놓은 것을 먹었다.
저걸 왜 보고 있는 거지. 채언은 궁금해하면서 국을 떴다.
띵- 퐁!
다시 빵이 튀어 올랐다. 이번에는 채언도 놀라지 않고 무사히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둘은 각자 음식을 우물거렸다.
채언은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가 점심 먹을 즈음 다시 돌아왔다. 단편 소설집 한 권을 빌려서 반쯤 읽다 빌려 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는데 현관 앞에 남자 두 명이 커다란 화분에 담긴 나무 한 그루를 들고 서 있었다. 문 앞에는 남자들이 들고 있는 화분보다는 작은 것들이 몇 개 더 놓여있었다.
뭐지. 멈칫하는 사이 문이 열렸다. 남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채언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무를 들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봤다가, 채언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묵례를 했다. 집주인의 가족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로 옮겨주세요. 아? 채언 씨도 왔네요. 이쪽으로 와요.”
현관 앞에는 영웅이 서 있었다. 남자들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뒤에 있던 채언을 발견하고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채언은 얼떨결에 손에 책을 쥔 채 영웅을 따라 거실로 갔다.
“어디가 나은 것 같아요? 여기, 아니면 저기?”
그는 왼쪽 벽 모서리와 TV 옆을 가리켰다.
“트리인가요?”
“맞아요.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는 다다음 주였다.
채언은 성인이 된 후에 트리를 꾸며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는 보육원에서 다 같이 장식을 하곤 했지만, 그곳을 나온 뒤로 집에 트리는커녕 화분 한 개도 둔 적이 없었다.
영웅을 흘깃 보니, 턱에 손을 대고 진지하게 위치를 고민하고 있었다.
“저쪽 벽이 낫지 않을까요. TV 옆에 두면 조금 복잡할 것 같은데요.”
영웅이 트리를 어떻게 꾸밀지는 모르겠으나, 보통은 반짝거리는 것들로 꾸며두니까, TV를 켜면 화면에 불빛이 번쩍일 것 같았다.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쪽 벽에 놔주세요.”
집주인의 지시에 남자들은 트리를 거실 왼쪽 벽에 놔두고 사라졌다.
“채언 씨는 어떤 오너먼트가 좋아요?”
영웅의 오너먼트 발음이 너무 좋아서 채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네?”
“여기에. 어떤 거 달고 싶어요?”
평소 트리 장식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데다, 갑자기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채언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은 나무를 바라보던 채언은 어린 시절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작은 손들이 나무 아래 소원 쪽지를 걸어두면 다음 날 누군가 그것들을 위아래 골고루 옮겨놓고는 했었다. 이루어질 리 없는 소원들이었다.
‘산타 할아버지, 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엄마랑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
‘글씨를 잘 쓰고 말을 잘하게 해주세요. 신문에서 내 얼굴을 다 지워주세요.’
…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세요.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산타를 믿을 만큼 어렸던 시절. 채언이 바랐던 소원은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커서는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다 자라서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바랐다. 더 이상 믿지 않는 산타와 이름 모를 신들에게.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리던 채언은 트리 장식 중 가장 흔한 것을 말했다.
“별이요.”
이제 소원 같은 것은 빌지 않았다.
채언의 대답에 영웅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 좋죠.”
같이 트리를 보던 채언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냥 오늘 대동에 다녀올걸. 다음 주에 가면 이미 그곳에도 트리가 준비되어 있을 텐데. 손에 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매만지던 채언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집주, 아니 사장님. 저 다음 주 쉬는 날을 며칠 당길 수 있을까요?”
“땡겨요?”
영웅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옅은 초록빛 섞인 그의 눈을 보자 채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너먼트. 맞다. 외국에서 왔다고 했지. 못 알아들었구나.
“주말에 쉬지 않고. 평일에 하루 쉬어도 될까요?”
채언은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말했다.
“아하. 그래요.”
이해했다는 듯 영웅이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반절 가려졌다가 원형을 되찾았다.
“날짜는 아직 안 정했는데요. 월요일에 말씀드릴게요.”
채언은 대동에 사 가지고 갈 것들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훑었다.
“네. 그래요.”
트리의 위치를 보던 영웅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채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럼 오늘 나랑 하나만 해줘요.”
키가 정말 크다. 채언은 눈을 살짝 들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영웅이 웃으며 턱짓으로 트리를 가리켰다.
아까 트리를 놔두고 간 남자 둘이 뒤이어 화분 몇 개를 더 들고 들어왔다. 문 앞에 놓여있던 것들이었다. 나머지 화분을 집에 배치하는 것은 채언과 영웅 둘이서 했다.
채언은 백화점에 입점한 잡화점에 온 것도, 트리 장식품을 사러 온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그는 검은 코트 위에 남색 목도리를 두른 영웅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갖 물건을 다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소품샵에 가까웠다.
“여기 있네요.”
영웅이 멈춰선 코너에는, 작은 고리가 달린 장식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도자기로 된 것도 있었고, 알 수 없는 재질로 반짝거리는 것도 있었다.
채언은 플라스틱으로 된 분홍색 눈 결정 모양을 집어 들었다. 거울처럼 매끈한 겉면에 얼굴이 비쳤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알루미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언은 손가락으로 장식품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장식품을 눈 가까이 댄 채 속눈썹을 관찰하고 있던 채언에게 영웅이 물었다. 채언은 눈 결정 모형을 내려놓으며 아뇨, 하고 대답했다.
“미국에 살았을 때는 항상 트리를 꾸몄어요. 어릴 때는 집 벽에도 전구를 달고는 했는데.”
채언은 영웅이 국적을 말해주기 전부터 외국에서 살다 왔다기에 자연스럽게 미국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진짜 미국에서 살다 왔구나. 미국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비행기를 타고 가도 오래 걸릴까. 여기서 대동까지는 버스를 타고….
딸랑.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채언은 맑게 울리는 방울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영웅이 황금색 종을 흔들어 보고 있었다.
“이것도 하나 달아놔야겠어요. 그런데 마음에 드는 별은 찾았어요?”
그의 말에 채언은 급히 고개를 돌려 커다란 별 모양 장식품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손가락 크기만 했다.
“아뇨. 없네요.”
이만한 정도의. 두 손으로 공간을 만들어 크기를 나타내는 채언을 보면서 영웅은 그가 어떤 별을 찾고 있는지 알아챘다. 어린애들이 트리를 그릴 때 꼭 위에 커다란 별을 그리는데, 아마 그런 것을 찾고 있는 듯했다.
둘은 매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커다란 별을 찾기 시작했다.
토끼 모양 컵이네. 세면도구로 쓰는 건가. 귀 모양 때문에 컵에 입을 대면 불편할 것 같은데. 채언은 플라스틱 컵 위로 삐죽 튀어나온 토끼 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둘의 목적은 별을 찾는 것이었지만, 별만 찾아본 것은 아니었다. 채언이 트리 장식품과 상관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 영웅은 쓱 지나가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몰래 보고 지나갔다.
“이것 봐요. 채언 씨.”
영웅은 찌그러진 모양의 분홍색 물체를 쥐고 웃었다.
“이게 뭐죠?”
“나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각자 구경을 하다가 옆을 돌아보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매장을 몇 바퀴나 돌아보았지만 채언의 마음에 드는 것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매장 가볼까요? 어차피 이 매장 안에서만 전부 살 건 아닌데.”
“아뇨. 그럴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아서요.”
채언은 영웅이 무슨 장식품을 달고 싶냐고 물어보기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잠깐 흥미가 생기기는 했지만 꼭 트리를 꾸미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나중에 큰 별을 발견하면 사다 줄게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크리스마스. 발음이 정말 좋았다. 채언은 영웅의 발음을 속으로 따라 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늦은 점심을 호텔에서 먹게 된 것은 영웅 때문이었다.
‘채언 씨. 점심 뭐 먹을래요?’
‘저는 집에서.’
‘아뇨. 집 말고요.’
트리 장식을 계산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건 영웅은 백화점을 빠져나가 집과 반대 방향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안전벨트를 맨 채언이 그를 쳐다보자, 앞을 보고 있던 영웅은 잠깐 눈을 마주쳐 웃더니 말했다. 오랜만에 놀러 나왔으니 외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한국에 친구가 없어서 맨날 집과 회사만 오갔는데 금방 들어가기 아쉽다며 채언을 졸랐다. 그리고는 채언을 데리고 나온 것은 자신이니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며, 어서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달라고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했다.
‘저… 이사 온 거라서. 이쪽 동네는 잘 모르는데요.’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던 채언이 말했다.
‘아!’
영웅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문제가 있네요. 나도 여길 잘 모르거든요.’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채언에게 못 먹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딱히 없다고 대답하자, 그럼 건물 외관이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아무 데나 골라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웅은 얼마간 주위를 살피며 운전하더니 호텔 앞에서 차를 멈췄다.
‘여기는 호텔 아닌가요?’
‘외관이 괜찮아서요.’
그는 자연스럽게 직원에게 차를 맡겼다.
호텔에서 식당처럼 음식도 파는구나. 호텔이 숙박객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채언은 오늘 처음 알았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채언의 입을 벌리게 할 정도로 비쌌다. 메뉴 하나에 십몇만 원씩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끼에 이 정도 값을 지불해 본 적은 없었다. 뷔페도 아니면서. 정말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영웅이 사기로 한 것이니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주문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메뉴가 나왔다. 채언의 앞에는 게살 볶음밥이 놓였고, 영웅의 앞에는 해산물 스파게티가 놓였다. 두 메뉴 다 통통한 새우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일단 그가 사는 것이니 채언은 먹기 전에 인사를 했다.
“네에.”
영웅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퍼서 먹는 동안 채언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았다.
아침에 각자 먹던 밥과 빵, 트리 배송. 그리고 백화점에 갔다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집주인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쉬는 날이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돈을 쓰지도 않았으니 손해를 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지.
밥을 먹는 동안 채언은 영웅이 이런저런 말을 시킬까 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새우만 쳐다보았다. 그래도 영웅은 이런저런 말을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땅콩 알러지와 유제품 알러지를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등의 말이었다. 채언은 예의상 간간이 그렇군요. 아 정말요? 하고 대꾸를 해주었다. 그러면 영웅은 네, 정말요, 하고 또 대답을 해왔다.
각자 앞에 놓인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채언이 컵을 내려놓을 때였다. 영웅이 갑작스레 물었다.
“커피 좋아해요?”
잠시 생각하던 채언은 풀어놓았던 목도리를 집어 들다가 대답했다.
“아뇨.”
“그럼 케이크 싫어해요?”
“아뇨.”
“녹차랑 과일 중에 뭐가 좋아요?”
“음… 과일?”
스무고개 하자는 건가. 채언이 의아해하는 찰나, 영웅이 직원을 불러 다시 주문을 했다. 따뜻한 커피와 생과일 케이크였다. 직원은 조각 케이크 수량을 먼저 확인해보겠다며 금방 자리를 떴다. 채언이 가만히 쳐다보자 눈을 굴리던 영웅이 변명하듯 말했다.
“집에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채언은 빨간 목도리를 다시 옆에 내려두었다.
잠시 후 직원은 따뜻한 커피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채언의 앞으로 케이크를 밀어준 영웅은 하얀 잔을 들었다.
케이크 단면에는 층층이 빵과 크림, 잘린 딸기가 보였다. 위에는 딸기 두 알이 통째로 올려져 있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 케이크였지만 채언은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딸기 별로 안 좋아해요?”
채언이 눈을 들자 커피를 내려놓은 영웅이 다시 물었다.
“아니면 졸려요?”
가라앉은 표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채언은 포크를 들었다.
“아뇨. 딸기 좋아합니다. 졸리지도 않고요.”
채언은 위에 올라와 있는 딸기 두 개를 먼저 먹어 치웠다. 볼이 불룩하게 딸기를 씹는 그의 모습을 영웅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집에 오는 동안 채언은 조용했다. 원래도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영웅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달랐다. 케이크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채언은 조각 케이크를 깨끗이 비웠다. 졸리지 않다고 했지만 힘들었던 건가? 영웅은 핸들을 돌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둘이 살기에도 큰 집이고, 각자 머무는 방이 멀리 떨어져 있는 구조인 탓에 같이 살아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상태이기는 했지만, 영웅은 비슷한 나이대의 채언과 룸메이트처럼 지내기를 바랐다. 너무 친하게는 아니라도 좀 더 편했으면 했다.
한국에 들어오며 주변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멀어진 영웅은 친구처럼 지낼 사람들이 필요했다. 친구가 된다면 더 좋았다.
미국에서 나이가 차 독립을 하고 나서는 혼자 살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큰 저택에 살았고 일하는 직원들도 몇 명 있었다. 그들과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지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문화가 다른 건가. 영웅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겨울이라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며 영웅은 바르게 조수석에 앉아있는 채언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영웅이 먼저 카드키를 찍어 현관문을 잡아주었다. 중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채언은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 문을 열어 신발을 갈아 신은 채언은 영웅의 슬리퍼도 하나 꺼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채언에게 자신이 많이 불편한가, 아닌가를 두고 한참 고민했던 영웅은 살짝 감동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인가! 울컥한 영웅이 같이 스포츠 채널을 보자고 제안하려던 찰나 채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은 영웅이 네, 하고 대답했다. 짧은 대답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차 있었다. 그런데 저번부터 왜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영웅은 아무래도 채언과 같이 TV를 보면서 호칭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돌아오는 주 화요일에 쉬겠습니다. 아마,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네.”
채언은 오늘 점심도 감사했다며 인사를 하고는 복도를 걸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웅은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대동행 버스에 몸을 실은 채언은 좌석에 앉자마자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는 앞으로 두 시간 넘게 도로를 달릴 것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채언은 두세 달에 한 번 시설에 들렀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 그곳에서 살았다. 고아였던 여자와 마찬가지로 고아였던 남자가 만나 맺은 결실이 그였다. 채언의 부모는 스무 살 동갑에 만나 스물여덟에 사고를 당했다. 세 식구는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겨울 산을 끼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던 차는 커브가 아닌 직선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채언은 그날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머리카락이 다 밀린 채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참 쓸데없는 관심을 많이 받았었는데. 버스가 흔들리자 채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이마께를 스쳤다. 천천히 눈을 뜬 채언은 눈 녹은 도로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하아. 숨을 내쉬자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사라졌다.
채언은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작성했다.
“아저씨 저…….”
[아저씨. 저 지금 서울에서 출발해요.]
깜빡 잠이 들었던 채언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부스스 눈을 떴다.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어깨를 한 번 돌렸다.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아까 보낸 문자에 답장이 와있었다.
[충북 아저씨: 그래]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언도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좌석에서 일어섰다.
“에취!”
통로를 지나가던 남자 승객이 채언의 앞에서 재채기를 했다.
“어휴. 죄송합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코 밑을 비비며 허리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서로 덤덤히 사과를 주고받고 버스에서 하차했다.
버스에서 내린 채언은 근처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또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렸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15분 정도 걷자 뒤에 포도 농장을 끼고 있는 과일가게 하나가 나왔다. 채언이 시설에 가기 전에 언제나 들르는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채언이 비닐로 바람을 막은 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난로 앞에 앉아있던 가게 주인 충북이 뒤돌아보았다.
“어. 왔어? 가져갈 건 차에 다 실어놨는데, 바로 출발해?”
“네. 바로 가죠.”
가게를 나온 두 사람은 파란 트럭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국밥집이었다.
“소머리국밥 두 개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충북이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이 물티슈로 손을 닦는 사이, 국밥 두 그릇이 상 위에 놓였다. 각자 상 위에 있는 양념을 넣어 간을 맞춘 뒤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레퍼토리였다.
채언은 주기적으로 충북의 과일가게를 찾아오는 단골이었다. 처음 본 게 5년 전이었던가. 충북은 국밥을 떠먹으면서 지금보다는 말이 많았던,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채언의 모습을 떠올렸다.
5년 전 여름. 더위에 볼이 빨갛게 익은 채언이 가게로 찾아왔었다.
드르륵. 드라마를 보고 있던 충북은 문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흰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 문을 잡고 서 있었다. 방금 드라마에서 보던 배우처럼 멀끔한 얼굴이었다.
‘사장님. 포도 어떻게 해요?’
이마를 훔치는 팔이 희었다.
‘포도는 만오천 원. 샤인은 이만오천 원이요.’
‘어… 음. 저, 육십만 원 있는데. 맞춰 주실 수 있나요?’
훤칠한데 돈도 잘 쓰네. 충북은 무게를 재서 박스에 포도를 나눠 담고는 서비스로 거봉까지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양이 많은데, 어디로 옮겨줄까요? 차 어디 대놨어요?’
육십만 원어치 포장 주문에 충북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더 친절해졌다.
‘잠시만요. 택시 부를게요.’
‘택시? 이거를 택시에 다 어떻게 실어. 이런 거는 안 태워줘~. 아니면, 미리 얘기하고 온 건가?’
‘두 대를 부르면 되지 않을까요.’
흰 손가락이 찌그러진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당황하며 묻는 채언을 본 충북은 혀를 찼다. 대책 없이 쌓여있는 포도 박스를 본 뒤 채언에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하늘의 집이요. 여기서 이삼십 분 정도 차 타고 가면 나오는 곳인데요.’
‘애기들 먹이려고?’
‘네.’
‘그러면 그쪽에 미리 말하지. 애들 태우고 다니는 작은 버스 같은 것도 있던데. 연락하면 그쪽에서 가지러 오거나, 아니다. 아니면 이거 나중에 그쪽으로 배송을 해줄까요?’
충북의 제안에 채언은 어딘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 그게, 제가 직접 가져다주고 싶어서요.’
‘어허. 이것 참 곤란하네. 애들 먹인다는데 내가 또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러면 잠깐만. 우리 집 마나님이 오늘은 집에 있는데 불러다가 잠깐 교대해 줄 테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충북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동안 채언은 시식용 포도 테이블 앞에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통화를 마치고 충북은 가뿐하게 웃었다.
‘와준다네! 애기들 먹인다니까.’
‘감사합니다.’
채언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을 충북이 앉아서 기다리라며 가게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앉어요. 안에 들어가서 앉어서 기다려.’
‘네. 감사합니다.’
또다시 허리 숙여 인사한 채언은 소파를 놔두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고 있었고, 충북이 틀어놓은 TV에서는 오래전에 종영한 연속극이 나오고 있었다.
‘이거 재밌는데. 본 적 있어요?’
‘네. 재방송 나오는 거 가끔 봤어요.’
삼십 분 정도 연속극을 보는 동안 충북은 가끔 손님을 맞이하러 문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채언은 일을 거들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러면 충북은 일하러 온 것도 아니고, 손님이면 가만히 있으라고 채언의 어깨를 눌러줘야 했다. 충북이 거봉 한 박스를 사 간 손님을 보내고 다시 들어가려는데, 파란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어. 왔네! 왔어.’
트럭에서 충북의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바빴어?’
‘똑같지 뭐.’
‘손님은?’
‘안에. 앉어서 기다리라 그랬지.’
‘커피도 한잔 타주지.’
차 한잔 타줬어? 되묻는 아내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충북은 머쓱하게 말했다.
‘그거를 생각 못 했네.’
가게 문을 열고 부부가 들어서자 TV를 보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돌렸다.
‘어우. 잘생겼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아내의 감탄사에 충북의 눈썹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의자에서 일어난 채언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트럭 가지고 왔으니까 남편이랑 같이 다녀와요.’
‘네.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같이 포도 상자를 트럭 짐칸에 옮겼다.
‘애들이 포도 한 송이씩 쥐고 먹어도 되겠네.’
충북이 웃자 채언도 작게 웃었다.
꼬르륵.
‘이게 무슨 소리여?’
웃음소리 뒤에 따라붙은 것에 충북이 웃다 말고 물었다. 채언이 눈을 굴리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제가 점심을 아직 안 먹어서요. 다녀와서 먹으려고 했거든요.’
‘여기 시식 포도도 많은데. 배고프면 그거라도 좀 먹지 그랬어요. 여보는 손님 대접도 안 하고 뭐 했어?’
육십만 원이나 팔아준 손님에게 커피도 한잔 안 타주고, 포도 맛도 안 보여줬냐며 아내가 충북을 나무랐다. 채언은 흰 티셔츠를 손으로 작게 펄럭이며 눈을 굴렸다. 목까지 살짝 붉어진 상태였다.
‘아니, 근데 벌써 세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점심을 안 먹었어요?’
‘네. 제가 버스표를 애매한 시간에 끊어서 왔거든요.’
‘다른 데 어디 멀리 살아요?’
‘네. 조금.’
채언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버스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휴, 서울 근처네. 멀다 멀어. 근데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꼬르륵.
‘아이고. 빨리 뭐 좀 먹어야겠다.’
또다시 들린 소리에 부부는 분주해졌다. 그들은 가게 안에 두고 먹던 뻥튀기나 과자 같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펴보던 충북이 냉큼 포도 접시를 들고 왔다. 청포도를 똑 따서 한 알 내밀자, 부끄러운 듯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던 채언이 감사합니다, 하고는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데가… 차 타고 조금 가면 국밥집 있는데 먹고 가요.’
충북의 아내가 남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데려다주라는 뜻이었다.
그날. 충북은 점심 도시락을 먹은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채언과 함께 소머리국밥을 먹었다. 계산은 충북이 했다.
그러고 나서 둘은 하늘의 집에 포도를 배달하러 갔다. 채언을 내려두고 가게로 돌아가기 전에 충북은 그에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 생글 포도 농장 사장 김혜옥 077-xxxx-xxxx /010-1xxx-xxxx -
‘저… 앞으로 종종 이렇게 과일을 좀 사려고 하는데요. 사장님, 포도만 하시나요?’
‘여름에는 포도, 철 아닐 때는 시내에서 과일가게 하니까. 다른 거 필요할 때~ 미리~ 말하면 빼주지요.’
충북은 땡잡았다고 생각했다. 말하는데 절로 음률이 섞여 나왔다. 이런 단골손님을 하나 잡아두면 장기적으로 가게 매출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채언에게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따로 적어주었다.
- 생글 과일가게 권충북 010-2xxx-xxxx -
핸드폰과 명함을 번갈아 보던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 성함이랑 번호가 명함이랑 다른데요.’
‘혜옥이 사장님은 우리 아내니까.’
그날부터 인연이 되어, 채언은 하늘의 집에 가기 전에 매번 충북의 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 갔다. 당시 채언은 어색하게 쭈뼛거리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딱딱하고 맥빠진 듯 굴지는 않았었다. 혜옥이 그랬듯, 딱 보면 잘생겼네! 소리가 나오는 얼굴로 가끔 애처럼 순진하게 웃기도 했다. 짓궂은 농담을 건네면 볼을 문지르며 머쓱해했지만, 사람 민망하게 거리를 두고 그러지도 않았다. 얼굴을 차근히 익힌 후에는 종종 안부 인사를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이 년 반을 알고 지내면서, 충북에게 채언은 과일을 많이 팔아주는 손님에서 아주 친근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농장 일을 도와주러 오기도 했고, 한번은 채언이 같이 사는 동생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그 동생도 얼굴 꽤나 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 년 반. 딱 거기까지였다.
갑자기 채언과 연락이 끊긴 적이 있었다. 이때쯤이면 포도를, 복숭아를, 딸기를 준비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채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명절 때도, 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더워져도. 건강 조심하시라고 안부 인사를 보내오지 않았다. 충북과 혜옥이 연락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채언이 사용하던 핸드폰 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었다가, 다른 사람의 번호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과 연락을 싹 끊었는지 같이 산다던 동생이 채언의 소식을 아느냐고 농장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충북과 혜옥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러다 작년 딸기 철에 갑자기 충북에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딸기를 좀 준비해줄 수 있냐는 채언의 연락이었다. 섭섭한 마음이 컸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커서, 충북은 질 좋은 딸기를 준비해놓고 채언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아주 낯설었다. 뭐가 싹 지워진 듯 채언은 딱딱하고 무심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너 빚졌냐?’
‘….’
‘너 동생이 여기까지 왔었는데. 이름이 건… 뭐였더라.’
‘저…! 누가 저를 찾아오면 그냥, 모른다고 해주세요.’
다시 찾아온 채언은 그 말을 할 때만 잠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었다.
‘빚진 것도 없고 누구한테 잘못한 것도 없어요.’
순한 눈이 아래로 축 처질 듯 잠시 일그러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다 먹었으면 이제 출발할까?”
“네.”
충북으로서는 채언이 연락을 끊고 사라진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서울에서 먼 곳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물어보면 채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다시는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집에 가는 동안 눈이 내렸다.
“쌓이겠는데.”
충북의 말대로 눈송이는 바로 녹지 않고 도로에 희끗희끗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채언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양손으로 살짝 잡고 창밖을 보았다.
미리 전화를 해두었기 때문에 트럭은 무리 없이 하늘의 집 정문을 통과했다.
건물 입구 가까운 곳에 채언과 충북이 귤과 딸기 박스를 내려놓는 동안 원장과 직원 몇몇이 나왔다.
“왔니? 점심은 먹었어?”
“네.”
원장은 딸기 박스를 내려놓는 채언의 옆으로 다가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안경을 쓴 그는 채언이 처음 하늘의 집에 들어올 때부터 원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
“딸기 무르니까 얼른 옮겨야 해요.”
방금 가져온 딸기가 당장 물러터질 일은 없었으나, 채언은 반갑게 인사하는 원장에게서 등을 돌리고 계속 딸기 상자를 옮겼다.
“그래. 그래야지.”
원장과 직원들이 상자를 하나씩 맡아 건물 안쪽으로 들고 들어갔다.
아직 이곳은 점심시간 전이었다. 과일은 주방으로 옮겨 세척한 뒤 아이들 간식으로 제공될 것이었다.
귤 상자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채언은 강당 문 앞에 세워진 트리를 보고 멈춰 섰다. 채언을 뒤따라오던 충북은 덩달아 멈춰서 트리를 보았다.
“왜? 저기 뭐가 있어?”
“아뇨.”
고개를 돌린 채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트리에는 아직 소원 쪽지가 걸리지 않았다. 매년 재활용하는 장식품들만 걸려있었다. 소원 종이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 하늘의 집 아이들이 트리에 걸어 놓는 것이었다.
‘여기에 소원 적은 쪽지를 달아놓으면 산타할아버지가 들어주실 거야. 물론 울지 않고 착하게 지낸 애들만이야. 산타할아버지는 욕심부리는 애들도 싫어하니까. 욕심부린 소원을 빌면 안 돼요.’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른이 한 말이었다. 그 어른의 말에 따르면 채언의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은 전부 욕심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걸 믿었었고. 채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영웅만 트리를 일찍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년 12월에는 좀 더 빨리 와봐야 하나. 내년 겨울을 생각하던 채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귤 상자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트리 꼭대기에는 낡고 빛바랜 별이 달려 있었다.
하늘의 집은 채언이 지내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식당의 식탁과 의자는 그대로였다. 채언이 지낼 때 싹 교체된 것들로, 아이를 입양해간 돈 많은 부부가 기부한 것이었다.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의 식판에는 귤이 두 개씩 담겨있었고 네 명에 한 대접씩 딸기가 놓여있었다. 아이들을 보던 채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형! 형. 이거 먹어.’
귓가에 어린 목소리가 스쳤다. 생크림 묻은 딸기를 내밀던 어린 소년. 채언을 잘 따랐던 아이는, 부잣집에 입양을 가기 전에 채언에게 자신 몫의 딸기를 양보했었다.
양쪽 손에 자신의 양부모 손을 하나씩 잡고 정문 앞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올라서,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도리에 입술을 묻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밥을 먹던 아이들 중 몇몇이 채언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채언은 매일 보는 선생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쳐다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끔은 선생님 저번에도 왔었죠? 하고 말을 걸어오는 애들도 있었다.
배식구에 서 있던 채언은 조용히 식당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충북은 과일 박스만 옮겨놓고 일찌감치 트럭에 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채언아. 가니?”
원장의 다정한 목소리가 채언의 발목을 잡았다.
“네. 다음에 뵐게요.”
“그래. 매번 고맙다.”
인자한 미소에 채언은 답해 웃어주지 않았다. 원장도 익숙한지 그냥 보내주었다. 처음 채언이 이곳에 과일을 가져다주러 왔을 때는 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직원들에게 인사도 시켜주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건물 밖 작은 운동장에는 일찍 밥을 먹고 뛰어노는 애들이 있었다. 채언이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어디선가 축구공이 날아왔다. 머리 쪽으로 날아온 것을 채언이 순간 잡아채자 손바닥에서 팡! 소리가 났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애들 몇 명이 우르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야. 내가 그쪽으로 차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안 찼어!”
애들끼리 투닥거리는 것을 본 채언은 잡고 있던 축구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괜찮아. 저쪽으로 가봐. 이거 차줄게.”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친 애들은 와하하 웃으며 멀리 달려갔다. 어른이 차주는 공이 얼마나 멀리 날아올까 기대하며 서서 기다렸다.
채언은 가볍게 공을 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축구공은 멀리, 임시로 정해놓은 골대 앞까지 갔다. 축구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감사합니다!”
트럭 쪽으로 걷는데 축구 하던 애들 중 한 명이 멀리서 소리쳤다. 그쪽을 보니 애들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채언도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트럭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북은 그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손을 흔들던 아이들이 다시 공을 차러 몰려가자 채언도 손을 내리고 돌아섰다. 트럭 문을 열려고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선생님!”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지 알지 못하고 트럭 문을 열었다.
“선생님!”
헉헉거리며 달려온 아이가 채언의 뒤에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 부른 거니?”
문을 열어놓고 차에는 타지 않는 채언을 내려다보던 충북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바깥을 살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채언은 어딘지 모르게 아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생각해보니 아까 식당에서 몇 번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았다.
“왜?”
다리를 굽혀 앉은 채언이 물었다. 숨을 고르던 아이가 키 높이가 얼추 비슷해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땅바닥을 보다, 눈을 쳐다보다 반복하던 아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어, 목도리, 몇백 원이에요?”
“목도리?”
채언은 목에 두른 목도리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이거?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빨간색이요. 우리 할아버지가 빨간색 양말도 맨날 신었었는데요. 이거 하면은 안 추워요?”
빙빙 돌아가는 말을 해석해보면 빨간 목도리가 마음에 들어서 달려 나온 듯했다.
“우리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줄라고요.”
채언이 더 묻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 크리스마스에 보러온다고 했거든요. 어, 나는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을 건데.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선물 주려고요.”
중간중간 숨을 들이마시며 말하는 게 어린애다웠다. 아이는 아마 하늘의 집에 잠시 맡겨진 듯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한 아이들이 종종 이곳에 맡겨졌다가 가정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어릴 때 채언은 이런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내가 모은 용돈으로 못 사면, 할아버지 선물 달라고 소원 종이에 쓸 거예요.”
채언은 이곳에 있는 어린애들이 불쌍하지 않았다. 부모가 없거나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불쌍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자랄 때 싫었던 것 중 하나가, 안쓰러운 애로 소개되는 것이었다. 단지, 부모가 함께 있을 수 없어 이곳에서 자라는 것뿐이었는데.
그래서 채언은 아이들을 가여운 것 보듯 쳐다보지 않았다. 과일 말고는 섣불리 애들에게 뭘 주거나 하지도 않았다. 용돈을 모아 사거나, 산타에게 선물 받겠다는 아이에게 목도리를 벗어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트리의 소원 종이는 어쩔 수 없었다.
“산타한테 목도리를 달라고 할 거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게 그거밖에 없어?”
“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면서 채언은 목도리를 풀었다.
“소원 종이에는 과자를 달라고 적어. 알겠지?”
“왜요?”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손에 쥐고 있던 목도리를 아이의 목에 둘러주었다. 산타는 과자랑 학용품밖에 안 가지고 다니거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한테는 산타가 따로 선물을 줄 거야. 할아버지가 받고 싶은 걸로.”
“어른도 선물을 받아요?”
“가끔은. 너네 할아버지 착해?”
채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네.”
아이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받으실걸.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물어봐. 할아버지 산타한테 선물 받았어요? 그러면, 응, 그렇다고 하실 거야.”
“근데. 이거 나 주는 거예요?”
폭신폭신한 목도리를 손으로 주물거리던 아이가 물었다.
“아니. 빌려주는 거야. 선생님 나중에 또 올 건데. 만약 그전에 너희 할아버지가 널 데리러 와서 우리 못 보면, 이건 다른 애한테 줘. 알겠지?”
그러니까 선물 받았다고 다른 애들한테 자랑하면 안 된다고 채언이 덧붙였다.
“누구요? 정영찬 줘도 돼요?”
정영찬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아이와 친한 애 이름인 듯했다. 채언은 살포시 웃으며, 그래 정영찬 줘. 아니면 목도리 빌려달라는 애한테 또 빌려주거나, 하고 대답했다.
“선생님 어디 사는데요? 멀리 살아서 나중에 와요?”
“응. 조금 멀어. 난 서울에 살고 있거든.”
아이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채언은 트럭에 올랐다.
“가자~”
채언이 안전벨트를 매자 충북이 트럭을 몰고 하늘의 집을 나섰다.
둘은 생글 포도 농장 앞에 내렸다. 예전이었으면 충북이 채언을 시외버스터미널 쪽에 내려주었겠지만, 몇 년 전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온 뒤로 채언은 그런 호의를 거절했다.
충북은 정이 많았다. 사이가 돈독해지고 나서부터 그는, 채언이 버스 타는 것을 기다렸다가, 떠날 때 창밖에서 손을 흔들어주고는 했었다. 채언은 그런 배웅을 거절한 것이었다.
둘은 생글 포도 농장 가게 안에 들어가 난로를 쬐었다. 충북은 TV로 연속극을 보았고, 채언은 15분 거리의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언제 오는지 핸드폰으로 확인을 했다.
“요즘 이거 재미있는데 봐?”
충북의 말에 채언이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즘 TV를 안 봐서요.”
“재방송도 자주 하는데.”
대화가 부족한 부자처럼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채언은 충북에게 선을 긋고 있었으나 예의 없이 굴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시 대꾸할 말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목이 뭔데요?”
“어 그게… 이웃, 이웃… 뭐더라?”
충북이 생각이 나지 않는 듯 턱을 긁었다. 충북을 기다려주던 채언은 핸드폰 화면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눌러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아저씨 죄송해요. 버스가 곧 온대요.”
“어어. 그러면 가봐야지.”
“나오지 마세요. 추워요.”
채언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비닐에 싸인 문을 열고 나갔다.
“에이. 오늘은 말 좀 더 시켜보려고 그랬는데.”
즐겨보는 드라마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을 리 없었다. 충북은 문가로 다가가, 걸어가는 채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채언아! 이거 드라마 제목이 이웃집 바둑이여. 재밌으니까 한번 봐봐. 어? 바둑이! 텔레비전 7번!”
충북의 목소리에 뒤돌아본 채언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채언은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길을 걸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렸지만,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손으로 패딩 목 부근을 잡아 죄었다.
눈은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길에는 아주 얕게 희끗희끗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발을 디뎠다가 떼면, 신발에 눈이 붙어 바닥에 발자국 모양이 검게 남았다. 눈송이 하나가 채언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하아.”
커다랗게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얀 흔적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을 구경하던 채언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다시 숨을 뱉었다.
“호오.”
기나긴 숨이 모양을 보이다가 사라졌다. 눈이 시려서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채언은 대동에서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터미널에 내려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차에 타 있는 동안은 따듯했지만, 내려서 걷기 시작하자 금방 몸이 차가워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패딩 모자를 벗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채언 자신이 보기에도 피곤해 보였다. 대동에 다녀오는 것은 은근히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다. 채언은 손가락으로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아까 바다에 괜히 다녀왔나 싶었다. 버스 배차 시간이 촘촘하지 않아서, 조금 이르게 출발하면 저녁 먹을 시간이 애매했다. 그래서 잠시 근처 바닷가를 돌아다니다가 혼자 밥을 먹은 것이었다. 모래사장에 오래 서 있지도 않았는데 머리에 짠 기가 스몄다. 지금도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채언은 터덜터덜 걸어 현관문에 카드키를 찍었다. 문 안으로 들어와 걷다가 바닥에 신발 자국이 남지 않았나, 뒤를 살폈다. 밖에서 발을 털고 들어온 덕분에 발 모양대로 약간 흐린 물 자국만 남아있었다.
“어서 와요. 춥죠?”
중문 앞에 서서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있던 채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영웅이 집 안 복도에 서 있었다. 채언은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녁 먹었어요?”
열 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네.”
“나도요.”
그리고 영웅은 하하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 있었다.
집 안은 따듯했다. 채언은 차갑게 얼어있던 손이 녹는 것을 느끼며 운동화를 신발장에 넣어 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웅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선 그는 채언의 곁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직 트리 안 꾸몄거든요.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 같이 꾸며요. 별은 곧 찾아올게요.”
이걸 말하려고 기다렸나. 아니, 아마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채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얘기하려고 기다렸어요. 이 집은… 혼자 있기에는 너무 크고 어두침침한 것 같지 않아요?”
채언이 보기에 집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불을 켜면 밝게 빛이 들어오는 데다 채광도 좋았다. 바퀴벌레가 들끓던 반지하에도 살아봤던 그에게 이 집은 그동안 살아본 곳 중 제일 좋은 집이었다.
채언은 영웅에게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그는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닌 듯했다. 몸이 녹으면서 으슬으슬 떨렸다. 갑자기 온기를 받고 녹은 손가락이 붓는 게 느껴졌다. 주먹을 몇 번 쥐어보던 채언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그럼 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그래요. 그런데 채언 씨.”
“네.”
“왜 나한테 사장님이라고 해요?”
그럼 뭐라고. 채언이 입을 다물고 영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음. 앤드류가 좋겠어요. 그거면 됐어요.”
채언이 보기에 영웅은 동양인보다 서양인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을 때 자연스럽게 접히는 눈 모양이나, 너무 크지 않고 오똑한 콧날 같은 것은 잘생긴 동양인의 것과 비슷했지만 머리 색이 밝았기 때문이다. 초록빛 도는 눈동자 색도 그랬다. 그런 그에게 앤드류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채언은 외국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어쩐지 민망했다. 앤드류. 속으로 발음해보자 목덜미에 소름이 오르는 것 같아서 괜히 어깨가 뻐근한 척을 했다.
“그건, 좀 그런데요. 혹시 또 다른 선택지가 있나요?”
“왜요?”
“상사를…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요. 혹시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면 다르게 불러드리겠습니다.”
영웅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직급 대신 서로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채언의 거절이 한 번에 와닿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르게 불러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에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흠. 그럼 좀 더 생각해보죠.”
“네.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채언은 영웅이 또 이상한 말로 자신을 붙잡을까 봐, 서둘러 인사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곧바로 옷을 챙겨 씻을 준비를 했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영웅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갔다. 아직 휑한 트리를 보다가 널찍한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광고가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던 영웅은 지루함을 느꼈다. 이리저리 포즈를 바꿔가며 TV를 보던 그는 일어나서 창문 앞으로 갔다. 고층이었기에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미드타운에서 보던 것처럼 반짝거리는 도시를 바라보며 그는 창문 위에 손가락을 대고 빌딩 모양을 덧그렸다.
안전하고 지루한 나라.
“적어도 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까.”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가져다 댄 영웅은 멀리 보이는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다가 손바닥으로 창문을 밀어 몸을 떼어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채언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조금 축축한 상태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책을 몇 장 넘기다가 얼마 읽지 못하고 덮었다.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선인장을 치지 않게 조심히 피해서 책을 올려두었다. 팔이 달린 듯한 모양의 선인장은 트리를 집에 들인 날 영웅이 준 것이었다.
채언은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눈 앞머리가 피곤했다. 따듯한 방 안에서 깨끗한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몸 안쪽이 시린 느낌이었다. 아프면 안 되는데. 혹시 모르니 내일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채언은 금방 잠이 들었다.
콜록. 작게 기침을 하며 채언이 잠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면서 눈앞의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TV에서는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공격수가 상대편 골대 앞까지 공을 차고 들어가고 있었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TV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채언은 눈을 깜빡거리며, 왜 방 안에 TV가 틀어져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이 방에 TV가 있었나? 그리고 침대 앞에 앉아있는 넓은 등. 누구지.
“흐음.”
채언은 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누웠다. 그리고 한참이나 천장을 쳐다보던 채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 위에 덮여있던 담요가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채언이 누워있던 곳은 방 안 침대가 아니라 거실 소파였다.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일어났어요?”
채언의 기척을 느낀 영웅이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편한 옷을 입은 영웅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지.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머리를 짚은 채언은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진동으로 맞춰둔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무거웠다.
…약국.
이따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약국에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수를 하고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부엌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영웅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밥을 먹은 뒤에는 이를 닦고 진짜로 출근 준비를 마쳤다. 다시 한번 방문을 나서기 전에 크게 기지개를 켰었는데…….
아니 이런 생각 말고! 머리를 흔든 채언은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영웅은 머리를 붕붕 휘젓는 채언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채언의 머릿속은 심각했다.
저녁때 해 먹을 반찬거리와 내일 아침 영웅이 먹을 빵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물약으로 된 감기약을 샀고, 집에 오자마자 뚜껑에 시럽을 계량해 한 번 복용했다. 냉장고 정리를 한 뒤에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로 거실을 밀던 도중에 거실 창밖으로 해가 지는 게 보였고, 그다음에는 평소보다 청소기를 미는 팔이 무거워서 잠시 앉아서 쉬기로 했던 것 같은데. 소파가 아니라 카펫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잠시 구경했다. 그리고.
채언의 기억은 거기서 끊겨있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감기약에 취하다니. 미간을 찌푸린 채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반찬을 해놓지도, 저녁을 차려놓지도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담요를 개어 소파에 올려둔 채언이 일어서자, 영웅이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요?”
“저녁 안 드셨죠? 죄송합니다. 금방 차려드릴게요.”
“괜찮아요!”
부엌으로 가던 채언이 영웅의 말에 멈춰 섰다.
“네?”
“배달시켰거든요.”
채언이 보기에 그는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나온다. 저거요.”
영웅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신선한 기름으로 튀긴~! 얌냠 치킨! 짭짤한 간장과~ 달콤한 꿀의 만남! 얌냠치킨 얌냠치킨. 신메뉴 허니허니 꿀 치킨! 지금 바로 전화하세요. 대표번호 777-7777.’
축구 전반전이 끝나고 CF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경기 시작 전에 저 치킨 광고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한국에 와서 배달 음식 시켜 본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뿌듯해했구나. 채언은 동그란 얼굴의 캐릭터가 랩을 하며 자신 있게 춤을 추는 광고를 보면서, 조금 전 영웅의 표정을 떠올렸다. TV속 캐릭터만큼이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벌써 경기가 반이나 지났네요.”
채언은 핸드폰 통화목록을 올려다보며 뿌듯해하는 영웅을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채언 씨? 왜 그렇게 보세.”
“죄송합니다. 근무시간이었는데. 저녁도 못 차려 드렸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시선을 들킨 채언은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 사과했다. 근무시간에 잠을 자다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 청소하고 밥을 하는 사람으로 고용된 것인데,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채언은 잘리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경고를 받아도 크게 받을 일이었다.
채언이 사과하자 영웅은 당황했다. 카펫이 깔려있긴 하지만, 바닥에서 자고 있는 것을 소파 위로 옮겨 편하게 자라고 담요까지 덮어준 것은 자신이었다. 채언이 깨지 않게 TV 소리도 평소보다 더 줄여놓았고 말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방에 콕 틀어박히는 사람이 이렇게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이 들어 있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채언은 꽤 유능한 입주 도우미였다. 음식도 잘했고, 청소와 냉장고 정리 등등 그 밖에 할 일들을 매일 완벽하게 처리해 놓았다. 넓은 집 안 바닥에는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살고 있음에도 영웅은 종종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채언이 이 집에서 좀 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살짝 더 풀어졌으면 했다. 지인의 범주에 포함된 사람들은 모두 미국에 있었고, 한국에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영웅이었다. 그는 채언과 친해진 다음 점차 아는 사람의 범주를 늘려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님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정리도 필요했다. 영웅은 채언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채언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시무룩한 모습을 지켜보던 영웅이 입을 열었다.
“채언 씨. 우리 얘기 좀 할래요?”
영웅은 채언을 소파에 앉혀두고 그 옆에 앉았다.
“채언 씨 편하게 자라고, 내가 소파 위로 옮겨놨어요.”
“네?”
영웅보다 작기는 했지만 채언도 180센티가 넘는 키였다. 아주 어릴 때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업히거나 안겨본 적이 없었다. 집주인이 근무 중에 잠든 도우미를 편하게 자라고 놔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소파 위로 옮겨놨다는 말에 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집주인의 체격이 듬직하기는 하지만.
“저거, 덮어준 것도 나예요.”
영웅은 소파 위의 담요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 군요.”
말투가 칭찬을 원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영웅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쳐두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채언 씨랑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당신의 친구도 소개시켜줬으면 좋겠어요. 속마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영웅이 말하는 도중 어디선가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TV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영웅이 이 집에 이사 올 때 따로 설정해둔 인터폰의 알람 소리였다.
“치킨이 왔나 봐요. 잠시만요.”
일어서는 영웅의 뒤로 인터폰에 불이 들어온 것이 보였다. 영웅은 화면을 확인한 뒤 공동 현관문을 열고는 천천히 소파로 돌아왔다.
“다시 말하지만, 조금 더 편해졌으면 해요.”
우리 사이가요. 이번에도 뒷말은 속으로 삼킨 그였다.
“지금도 딱히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사장님.”
“그렇군요.”
영웅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지르는 척하며 웃음을 감췄다. 불편하지 않다는 말에 꽂힌 그는 웃음이 터지지 않게 흠, 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는, 앤…….”
다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현관문 초인종이 눌린 것이었다.
“조금 이따 다시 얘기해요 우리.”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누른 영웅은 치킨 상자를 들고 있는 배달원의 모습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채언은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그나저나 이 집의 초인종 소리는 참 특이했다. 살면서 이렇게 잔잔하고 작은 초인종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 속 부잣집을 떠올려보면. 악- 악- 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나거나, 방금 들린 소리보다는 좀 더 큰 음악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이 집 것은 들을 때마다 너무 잔잔했다. 세탁물이 배달되어 와서 받으러 갈 때면, 집안 복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 복도를 걷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우아한 분위기의 복도를 걸어서 고작 현관문을 열러 갔다.
“콜록.”
목 안이 간지러워 작게 기침이 터졌다. 집주인이 덮어준 담요 한 장만 두르고 잤는데, 더웠는지 살짝 땀이 난 것도 같았다.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채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돌아온 영웅의 손에는 치킨 상자와 맥주가 들려있었다.
“채언 씨. 저녁 안 먹었죠? 같이 먹어요!”
이번에야말로! 영웅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잠시 눈을 굴리던 채언은 네, 하고 일어서서 식탁으로 다가갔다. 잠을 자느라 저녁을 거른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핑계 대고 빠져나갈 거리가 없었다.
들고 온 것들을 식탁 위에 올려둔 영웅은 채언의 의자를 먼저 빼주고, 자신도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런데 한국은 치킨이 이런 곳에 담겨오네요. 꼭 피자 박스처럼.”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지 영웅이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제가 할게요.”
채언은 테이프를 뜯고 뚜껑을 열었다. 치킨 무를 먹느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치킨을 처음 시켜봤으니 치킨 무가 뭔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언이 상자 안에 들어있던 치킨 무를 들자 그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영웅이 쳐다보았다.
“…치즈?”
“아뇨.”
채언이 싱크대 앞으로 가서 안에 든 물을 따라버리고 올 때까지 영웅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피클 같은 거예요.”
“아하.”
채언이 앉자 영웅이 일어섰다. 그는 유리잔 두 개를 들고 오더니 생맥주가 담긴 병뚜껑을 열었다.
“같이 마셔요.”
이래도 되나. 채언은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잔에 맥주를 따르고 있는 집주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 아까의 실수를 탓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눈앞의 맥주는 시원해 보였고, 자는 동안 뜨끈해진 목 뒤로 넘기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네.”
채언의 잔에도 맥주가 가득 차올랐다. 축구는 후반전이 시작됐다.
맥주 한 병은 금방 비었다.
“채언 씨, 술 더 마실래요?”
빈 병을 흔들어본 영웅은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 음료 칸을 열었다.
맥주 몇 잔에 취할 만큼 채언의 평소 주량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당히 배가 불렀고, 자기 전에 약을 한 번 더 먹어야 했다. 채언은 아까 낮에 먹었던, 짜 먹는 물약 맛을 생각했다. 입술에 묻은 치킨 양념 맛보다 씁쓸하고, 이상한 향이 났었다. 술을 마시고 약을 먹으면 몸에 안 좋다던데. 잠들기 직전에 약을 먹는 게 좋을까. 혼자 생각에 빠졌던 채언은 뒤늦게 영웅의 물음에.
“아뇨.”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냉장고 안을 보고 있던 영웅은 거절하는 채언의 말을 듣지 못했다.
“크흠.”
또다시 목 안이 간지러웠다. 기침을 참은 채언은 영웅이 양손에 각각 두 개씩 맥주캔을 쥐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들어와 처음 냉장고를 봤을 때, 냉장고에 맥주와 음료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음식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여기 사는 사람은 뭘 먹고 사나 생각했었는데. 채언은 식탁 위에 맥주를 내려놓는 큰 손을 보았다. 영웅은 해주는 대로 밥을 먹었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으면서, 한식을 잘 먹고 한국말도 잘했다. 게다가 이름은 서영웅. 그런데 앤드류라고 불러 달랬던가. 가끔 영어 단어를 뱉어낼 때면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발음이 좋았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이렇게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입주 도우미를 쓸 정도로 돈이 많다. 이런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새삼, 한 달 넘게 같이 살았지만 채언은 집주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웅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부자처럼 살았겠지. 채언은 혼자 결론을 내렸다.
치익- 딱. 맥주캔을 딴 영웅은 곧바로 입을 대고 마셨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모습이 꼭 소비를 조장하는 맥주 광고 모델 같았다. 거기다 눈 한 쪽을 접으며 크으, 소리를 내는 것은 반칙이었다.
결국 채언은 앞에 놓인 것을 따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같이 먹으니까 되게 좋네요.”
그렇게 말하는 영웅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말하는 도중에도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채언은 취기가 올랐다. 술을 마셔본 지 오래되어 전보다 주량이 줄어든 것이었다. 게다가 배도 불렀다. 낮잠을 오래 잤지만 또 자고 싶었다. 안주 겸 저녁인 치킨도 다 먹었고, 영웅이 식탁 위에 꺼내놨던 맥주 네 캔도 이제는 빈 캔이었다.
채언은 집주인의 말에 적당히 대답해주며 자러 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 할 얘기를 하죠.”
“예?”
낭패였다. 어쩐지 할 말 있는 얼굴로 식탁에 앉아놓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 했다. 채언은 졸린 눈을 끔뻑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술을 더 먹여볼까.
“사장님. 술 더 드시래요?”
채언의 발음이 샜다.
“어? 더 마셔도 괜찮겠어요?”
영웅이 반가운 얼굴을 하더니, 곧바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
채언은 식탁에 놓인 맥주캔을 보았다. 그가 한 캔씩만 더 가져올 줄 알았는데 또 네 캔이었다.
“마셔요.”
채언은 뜨끈한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 술은 제가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혼자 술 잘 드시나요?”
“아뇨. 혼자서는 잘 안 마셔요.”
영웅은 캔을 따서 단숨에 절반 정도를 마셨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건 아마, 누나가 전에 사다 놨던 것들일 거예요. 집을 이렇게 꾸며놓은 것도 누나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집이 너무 어둡죠.
또 그 소리다. 채언은 고개를 젓고는 따지 않은 맥주캔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영웅은 술을 마실수록 쌩쌩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그가 취해 잠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얼른 이야기를 들어주고 방에 들어가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그런데 하실 얘기라는 게 뭔가요?”
“나를 사장님이라고 안 불렀으면 좋겠어요.”
손등으로 맥주가 묻은 입술을 훔친 영웅이 말했다. 하지만 채언은 그를 앤드류라고 부르기 싫었다. 고용주를 이름으로 부르라니. 생글 포도 농장 사장님을 충북아, 하고 부르는 것과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럼, 다르게 불러드릴게요.”
“어떤 거요? 전에 말했던 대로 앤드류라고 부를 건가요?”
영웅의 초록빛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아뇨. 그건… 좀 그렇고요. 앞으로 여러 가지로 불러드릴 테니까. 그중에 마음에 드는 걸 정해주세요. 그걸로 쭉 불러드릴게요.”
채언의 입에서 느릿느릿 긴 문장이 흘러나왔다.
“여러 가지요?”
영웅은 채언의 제안에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요. 좋아요.”
채언은 되도록 영웅을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던 것도 몇 번 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필요하다면 주어를 떼고 부를 생각이었다. 아니면 처음 한 달처럼 거의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것도 가능했다. 앞으로 11개월만 그렇게 피해 다니면 되겠지.
“그리고 난 정말 채언 씨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전에 살던 집에서도 난 그랬거든요. 일하던 분들이랑 거의 친구였다고요. 한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난 정말 쓸쓸해요.”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한 그는 맥주 한 캔을 가볍게 비웠다. 빈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에는 곧바로 새 캔 뚜껑을 땄다.
“집에 친구 데려와도 돼요. 채언 씨. 대신 놀 때 나도 끼워줘요.”
영웅도 슬슬 취해가고 있었다. 난 친구가 없거든요. 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영어를 웅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웅얼거려서 채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영웅은 아까와 달리 단숨에 맥주를 마시지 않고 홀짝거리고 있었다. 따지 않은 캔 뚜껑을 매만지던 채언은 식탁 위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손에 물기가 흥건해서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런데 채언 씨.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방 밖으로 나오지 않던데, 저녁은 언제 먹는 거죠?”
식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영웅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냥, 조금 일찍 먹는 편이라서요.”
영웅은 그동안 자신이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것이 몇 시쯤이었는가를 생각했다. 보통은 7시, 가끔 빠르면 6시 반, 늦으면 8시쯤. 차가 막히거나 퇴근길에 운동을 하고 오는 날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유동적인 편이었다. 그때 들어와 저녁을 먹은 뒤에도 배고픈 날이 있는데. 채언은 소식을 하는 편인 걸까. 언제 한번 일찍 퇴근해볼까.
“방 안에 간식을 몇 개 챙겨두기도 하고요. 보통은 그걸 먹어요.”
영웅은 눈앞의 덤덤한 남자가 방 안에 간식을 잔뜩 쌓아두는 모습을 떠올렸다. 상상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채언의 모습은 곧 작은 다람쥐로 변했다. 나중에 먹을 도토리를 숨기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생각하던 영웅은 자신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저어 옆길로 새는 정신을 바로잡은 영웅은 눈을 꽉 감았다 뜬 다음 채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다람쥐처럼 눈이 까맣고 동그랗기는 했지만 진짜로 도토리를 모아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 사람은 간식으로 뭘 먹을까. 궁금해졌다.
“뭘 챙겨뒀는데요?”
“음. 마카로니라고 하면 아실까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아하! 아는 척을 했다. 메카로늬, 하고 혀를 굴려 발음하더니 되물었다. 그걸 들은 채언은 속으로 그의 발음을 한 번 따라 해보았다.
“샐러드 같은 걸 미리 해두는 건가요?”
영웅은 맥 앤 치즈나 마카로니 샐러드를 떠올렸다. 맥 앤 치즈 쪽은 따듯하게 먹는 게 더 맛있을 테니 차가운 샐러드 같은 것을 해놓고 먹는 것으로 혼자 결론 내렸다. 만약 채언이 마카로니 샐러드를 자주 해 먹는 편이라면, 저녁 반찬을 할 때 그걸 나눠줘도 좋을 텐데.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것은 힘드니까. 영웅은 취한 머리로 또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반찬 개수를 늘릴 필요 없이 채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할 셈이었다.
“샐러드요? 아뇨 과자인데요.”
“과자요?”
마카로니를 튀긴 건가. 딱딱하지 않나.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상상하는 영웅을 두고 채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언 씨, 어디 가요?”
영웅은 채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흐트러진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간 채언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버리는 건가. 영웅은 닫힌 채언의 방문 앞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씁쓸하게 돌아서려는 찰나 방문이 다시 열렸다.
채언의 품 안에는 빵빵하고 커다란 봉지가 들려있었다.
“이거예요.”
봉지 안에는 주황색, 황토색, 초록색으로 알록달록한 것들이 꽉 차 있었다.
“뭐가요?”
“마카로니요.”
진짜 과자네. 영웅은 마카로니라고 불린 과자를 살펴보다가 물었다.
“이것만 먹어요?”
“보통은요.”
“이걸 많이 좋아해요?”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익숙해서요.”
과자가 익숙하다는 말에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먹던 간식인가 보죠?”
영웅도 어릴 때 하얀 크림이 들어간 작은 파이를 좋아해서, 밥 대신 그것만 먹겠다고 아버지를 조르다가 누나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어릴 때라. 잠시 생각하던 채언이 입을 열었다. 그의 경우는 영웅과 조금 달랐다.
“예전에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때 카운터나 주방에, 아! 이게 한국 술집에서는 기본 안주로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했던 호프집에도 이게 많이 있었어요.”
채언은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쯤 아르바이트를 했던 호프집을 떠올렸다. 시급이 높아 오래 일했던 곳이었다. 젊은 사장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먹는 것에도 신경을 잘 써주었다. 바빠도 식사는 꼭 챙겨주었고, 돈가스나 감자튀김 같은 안주를 간식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때는 마카로니를 그릇에 담아, 카운터나 주방 곳곳에 놓아두고 아르바이트생들이 집어 먹을 수 있게 해줬었다.
“사장님이 마카로니는 일하다가도 그냥 먹게 해주셨거든요. 그때 배고플 때마다 먹던 게 습관이 돼서. 이젠 익숙해요.”
“그러니까, 익숙해서 과자를 먹는다고요?”
영웅은 빵빵한 과자 봉지를 안은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쳐다보는 얼굴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채언 씨.”
“네.”
영웅은 채언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편하게 지내라고 해도, 아무리 그렇게 말해줘도 이 사람은 이 집에서 마음 편히 지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원래 이렇게 방어적인 것이 그의 성격인 것일까. 그럼 뭐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배가 고프면 언제라도 거실로 나와 무언가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과자 봉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평소 뭘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왔기에. 과자가 든 봉지는 컸지만, 영양가는 별로 없어 보였다.
채언은 자신을 불러 놓고 답이 없는 영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채언의 얼굴을 쳐다보던 영웅은 과자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채언은 다시 눈을 들었다.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영웅의 얼굴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한 영웅이 마침내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채언은 봉지의 매듭을 풀었다.
“좀 드릴까요?”
봉지를 활짝 열자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네?”
“손 이렇게 해보실래요?”
채언은 마카로니 봉지를 팔에 끼고 두 손바닥을 모아 보였다. 영웅은 자신도 모르게 손동작을 따라 했다.
큰 손바닥 위에 마카로니를 쏟아주려던 채언은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위로 들다가 멈췄다. 지금 저 손에 이걸 쏟아주면 집주인은 아마 세수하는 사람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마카로니를 먹어야 할 것이었다. 알딸딸하던 정신을 바로잡은 채언은 영웅에게 거실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영웅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걷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손을 내렸다.
부엌 찬장에서 작은 밥그릇을 꺼내 온 채언은 소파에 앉았다.
“이리 와보실래요.”
그런 다음 다리 사이에 커다란 봉지를 끼고, 마카로니를 그릇에 덜어 영웅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네.”
채언은 다리 사이에 끼고 있던 마카로니 봉지를 다시 매듭지었다.
아삭아삭. 영웅의 볼에서 과자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네. 혹시 채언 씨도 맛있어서 먹는 건가. 하지만 초록색 마카로니를 입에 집어넣은 영웅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분명 얘기 중이었는데, 왜 지금은 과자를 먹고 있지?
아삭아삭. 무의식중에 손은 계속 마카로니로 향했다.
“괜찮죠?”
“네. 그렇네요. 아무 생각 없이 먹기 좋아요.”
“그럼 저는 이것 좀 다시 가져다 놓을게요. 더 드릴까요?”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던 중이었지. 뭔가 놓친 것 같은데. 아삭.
“아!”
주황색 마카로니를 입에 넣은 영웅은 조금 전 채언의 방문 앞에서 하려던 말을 생각해냈다. 그는 그릇에 남은 것을 모두 입에 털어 넣고 빠르게 씹어 넘겼다. 영웅은 마카로니 봉지를 팔에 끼고 거실을 나서려는 채언을 불러 세웠다.
“채언 씨!”
“네?”
품에 빵빵한 마카로니 봉지를 껴안은 채언이 돌아보았다. 빈 밥그릇을 든 영웅이 서 있었다.
“앞으로 저녁 같이 먹자고 그러면, 또 아뇨, 라고 할 거죠.”
“….”
영웅은 채언의 입술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그럼 추가로 돈 주면요? 나랑 같이 저녁 먹는 거로. 월급이 오르면요?”
영웅은 속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셀럽이 막장 리얼리티 쇼에서나 할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되게 재수 없는 말이었는데. 어쩌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헛소리를 한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까만 눈에 ‘한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질까 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부터 그러면 되나요?”
“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영웅은 채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저녁이요.”
“예?”
“같이 먹는 거요.”
하나하나 되짚어 말해주는 채언을 보며 영웅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울컥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 드신 거죠?”
“네. 그렇긴 한데.”
“식탁은 제가 치울 테니까 쉬세요.”
이거 놔두고 치우러 가겠습니다. 마카로니 봉지를 툭툭 친 채언은 복도를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까지 그를 따라가다가 또다시 닫힌 문을 보게 된 영웅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거실로 돌아갔다.
털썩. 소파 위에 누운 영웅은 식탁 위의 찌그러진 맥주캔을 보고 자신이 쭈그러지는 듯한 상상을 했다.
소파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있는데 슬리퍼를 신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앞으로 저녁때 채언 씨한테 연락할게요.”
채언의 연락처는 누나에게 받은 메일 속에 적혀있었다. 계약서를 스캔한 문서였다. 누나와 사적인 연락을 거의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메일도 한참 묻혀있던 것을 채언과 현관문 앞에서 마주친 후에 열어봤었다. 아마 그에게도 자신의 연락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거실로 다시 나온 게 아니었나? 영웅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채언의 까만 눈동자에 의문이 서려 있었다. 그게 ‘한심’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저녁 같이 먹으려면 시간 맞춰야 하잖아요.”
“네.”
아까 보던 축구 경기는 끝난 지 오래였다. 경기 분석 프로그램에서는 하이라이트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문득, 영웅은 아침에도 채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녁뿐만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꺼낸 그는 메일함을 열어 계약서를 살폈다. 확인해보니 채언의 출근 시간은 영웅의 출근 시간 이후였다. 아침도 같이 먹자고 하면 거절할 것 같았다.
“채언 씨. 내일 아침은 빵 말고, 밥이 먹고 싶어요.”
영웅은 아침을 간단히 먹는 편이었다. 식빵에 주스나 커피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쉬는 날 가끔 마주치는 아침마다 채언은 밥을 먹었다. 아침에 밥을 먹고 있다 보면 채언이 같이 먹어주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겼다. 같이 먹으면 밥 한 그릇만 더 놓으면 되는데, 그걸 차렸다가 나중에 또 차려 먹기 귀찮을 테니까.
“네.”
채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널브러져 있던 캔을 모으기 시작했다. 영웅도 소파에서 일어나 함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채언은 식탁 위를 행주로 닦으며 아침으로 무슨 반찬을 해놓을지 생각했다. 냉장고에 있는 채소 종류를 생각하다가 싱크대 물을 틀어 행주를 빨았다.
아침이 되자 영웅의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다.
-냉장고에 반찬 랩으로 싸놓았습니다. 국하고 같이 렌지에 돌려서 드시면 됩니다.-
채언은 나타나지 않았고, 식탁 위에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글씨가 날아다녀서 영웅은 채언의 메모를 천천히 읽어야 했다.
어제 영웅은 식탁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채언은 거실에 서서 그를 배웅한 뒤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침을 밥으로 준비해달라는 것은 갑작스러웠지만, 낮에 잠들어서 하지 못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아침에 먹을 것들을 준비해놨던 것이었다. 또, 이 정도는 집주인이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저녁, 상하지 않을 마른반찬들을 작은 접시에 덜어놓고, 아침에 먹어도 부담 없을 간단한 반찬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밥은 취사 완료 후 저어놓았고, 황탯국을 끓여놓은 냄비는 인덕션 위에 올려두었다.
채언의 메모를 읽은 영웅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계란찜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 접시에는 삶아놓은 듯한 브로콜리가 랩에 싸여있었다.
영웅은 브로콜리 접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흠.”
그리고 랩을 조금 벗겨 접시에 있던 것 중 가장 작은 브로콜리를 하나 꺼냈다. 랩을 다시 싸서 접시를 냉장고 안에 넣어놓은 뒤에는, 손에 쥔 브로콜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로 살짝 베어 물었다. 새끼손톱보다 작게.
앞니로 살짝 씹어 맛을 본 그는 손에 남은 브로콜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영웅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계란찜만 꺼냈다.
알람이 울렸다. 채언은 눈을 감은 채 손만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평소라면 쉽게 눈이 떠졌을 텐데, 술을 마시고 자서 그런가 너무 피곤했다. 실눈을 떠서 알람을 끈 뒤 몸을 일으켰다.
“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단편 소설집 한 권과 약병이 놓여있었다. 어제 약을 먹고 잔다는 걸 까먹고 그냥 잤더니, 제대로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한숨을 쉬던 채언은 다시 기침을 했다.
“아… 아.”
목이 아팠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나왔다. 평소보다 톤이 좀 낮아진 것 같기는 했다. 늦긴 했지만 약병을 열어 어제 세척해 둔 뚜껑에 시럽을 한 번 부어 먹었다. 달지만 씁쓸한 맛이 침을 여러 번 삼켜도 사라지지 않았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채언은 평소처럼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나왔다. 아침을 먹으려고 보니 식탁에 쪽지가 한 장 올라와 있었다.
- 잘 먹었습니다 : ) -
자신이 써둔 메모 뒤에 영웅이 적어둔 것이었다. 글씨가 아주 예뻤다. 어릴 때 한글 교본에서 본 것처럼 바르게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콜록.”
쪽지를 손에 쥔 채언은 국을 데우기 위해 인덕션을 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잘 안 먹었는데.”
어제 데쳐둔 브로콜리가 그대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