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2)

3.

[사범님: 늦을 것 같아요. 채언 씨 먼저 저녁 드세요.]

흐린 눈으로 저장명을 무시하고 메시지를 확인한 채언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밥을 같이 먹자는 것이 단발성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1월 중순이었다. 그는 쭉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그리고 늦을 때는 이렇게 미리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범님이라고 저장된 사람은 영웅이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와인을 먹고 취한 채언은 영웅과 호칭 정리를 하게 되었다. 앤드류와 앤디를 고집하는 영웅에게 채언은 혹시 또 불리고 싶은 호칭이 있냐고 물었다. 취한 와중에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기 민망했던 탓이었다. 이름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영웅은 소주와 와인을 섞은 잔을 들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 사범님이었다. 어릴 때 잠깐 태권도를 배웠는데 한국인 사범님이 너무 멋있어서 사범 자격증을 따고 싶었다고 했다. 노란 띠만 따고 그만뒀지만 마음 한구석에 사범님이 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며, 앤드류가 아니면 사범님으로 불러 달라고 한 것이었다. 둘 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채언은 그 제안을 수락했고, 그 자리에서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던 ‘진짜 집주인’을 ‘사범님’으로 바꿨다. 다음 날 둘은 거실 소파와 카펫 위에서 각각 눈을 떴는데, 둘 다 전날 밤을 대충 기억하고 있었다.

영웅은 채언에게 사범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채언 또한 그를 사범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러기로 한 것을 멋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사범님이라고 불렀다. 채언이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라며 쳐다보는 영웅의 눈빛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로 민망해하며 새해가 지났고 시간이 흘러 오늘이었다.

채언은 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놓고 다시 청소기를 밀기 시작했다. 아까 거실에서 수건을 갰는데 먼지가 좀 떨어진 것 같았다.

청소기를 민 채언이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사범님: 내일 아침은 밥이 좋겠어요.]

확인해보니 또 영웅이었다.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면 그는 종종 다음 날 아침밥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채언은 연락이 올 줄 알았지, 생각하며 식탁에 올려두었던 어묵 봉지를 들고 조리대 앞으로 갔다. 손을 씻은 다음, 칼을 빼 들고 어묵을 썰며 조림에 어떤 부재료를 넣을지 생각했다.

영웅은 해주는 대로 먹었다. 아침에 반찬을 어떻게 데워먹으라고 메모를 적어두면 그 뒷장에는 항상 잘 먹었다는 답장이 적혀있었다. 정말 가리는 게 없나. 부자들은 더 맛있는 음식만 먹고 살 줄 알았는데. 드라마를 보면 언제나 부잣집 식탁에는 화려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어묵을 썰며 채언은 잠시 드라마 생각을 했다.

요즘 채언은 낮에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새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의 재방송이었다. 청소하다가 리모컨을 잘못 눌러 틀어진 TV에서, 몇 화씩 몰아서 방영해주는 것을 하필 첫 화부터 본 게 시작이었다. 제목을 보니, 전에 충북이 한창 즐겨 본다고 했던 드라마였다.

거기서 보면 재벌들이 입주 도우미에게 오늘 저녁은 무엇, 아침은 무엇으로 해달라고 지시를 내리고는 했다. 우리 애는 이런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뭘 넣은 음식은 하지 말고, 이런 대사를 하면서. 그런데 이 집 주인은 정말 가리는 음식이 없는 걸까.

삼시세끼 모두 다른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채언은 밥을 할 때마다 고민을 했다. 지금도 당장 어묵을 썰고는 있었지만, 혹시 아침 메모로 ‘이건 좀 그렇네요.’ 하는 답장이 올까 걱정되는 것이었다. 당장 어디에 집을 구해야 할까 걱정하던 때보다는 한가한 고민이었다. 채언은 헛웃음을 지으며 어묵을 썰었다.

그나저나 드라마 속 입주 도우미는 집주인을 대표님이나 회장님으로 부르던데. 채언은 사범님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묵을 썰어 한쪽에 모아둔 채언은 야채용 도마와 새 칼을 꺼냈다. 당근과 브로콜리를 어묵볶음에 넣을 생각이었다. 냉장고에서 브로콜리를 꺼내던 채언은 소분되어있는 양파와 당근을 발견했다. 이거 먼저 사용해야겠는데. 잠시 고민하던 채언은 양파와 당근까지 꺼낸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아.”

좋은 생각은 냉장고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뻐근한 목 때문에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거린 영웅은 허리를 숙였다. 벗어놓은 구두를 집기 위해서였다. 신발장 문을 열고 구두를 넣어놓은 뒤 문을 닫았다.

“다녀오셨어요.”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 영웅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앞에 채언이 서 있었다.

“네. 채언 씨.”

채언은 할 말이 있을 때, 아주 가끔 영웅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이곳에 나타났다.

“무슨 일 있어요?”

물어보는 영웅의 얼굴이 밝았다.

“네. 저, 사… 범님. 여쭤볼 게 있어서요.”

채언은 사범님을 발음할 때마다 사흐범님 하고 중간을 늘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의 입이 정확한 발음을 거부하는 탓이었다.

“예… 뭐. 우선 들어갈까요.”

밝았던 영웅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서로 민망한 얼굴을 옆으로 감추고 복도를 걸었다.

“저녁 드실 거죠?”

“네.”

호칭만 빼면 둘이 나누는 대화는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저도, 저녁 같이 먹어도 될까요?”

밥을 같이 먹고 싶다는 것을 영웅이 거절할 리 없었지만 채언은 종종 그렇게 물어왔다. 저녁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월급을 더 올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어요? 아까 메시지 보냈는데. 혹시 못 봤나.”

영웅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닌데. 아까 답장이 왔는데.”

미간을 찌푸리고 메시지 목록을 올려다보는 그에게 채언이 말했다.

“아뇨. 그냥 오시면 같이 먹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그 말에 핸드폰을 보고 있던 영웅이 고개를 들었다. 감동한 눈치였다. 채언은 그 눈을 보기가 양심에 찔려서 서둘러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세요. 차려놓을게요.”

채언이 영웅을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호칭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사범님이라고 부르기 싫다고 하면 그가 상처받을 테니, 이런 건 어떻냐고 제안할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 아까 반찬을 만들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채언은 일단 밥을 같이 먹으면서 그의 기분을 들뜨게 만든 다음 드라마 내용을 조금씩 흘릴 예정이었다.

메인 반찬으로 만들어 놓은 갈비찜을 데워 저녁 식탁을 차려놓고, 옆에는 다른 반찬들을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친 브로콜리를 올려놓았다.

곧 따끈따끈한 온기를 내뿜는 영웅이 거실에 나타났다. 살짝 젖은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급하게 씻고 나온 모양이 역력했다. 채언은 밥과 국을 퍼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둘은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반찬을 집어 먹는 영웅을 보던 채언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요즘, 낮에 드라마를 하더라고요.”

밥알을 씹던 영웅은 채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낮에 드라마를 한다는 소식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채언은 무얼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웅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되물었다.

“무슨, 내용이죠?”

채언은 아직 네 편밖에 보지 못한 드라마의 내용을 천천히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식탁 위의 음식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흥미롭네요. 마음에 상처가 있는 재벌 부부가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데, 거기서 잃어버린 자식을 만났다… 근데 부부는 그걸 모르고.”

영웅은 이런 식의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채언의 설명만 들어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언은 드라마 내용을 설명하는 중간중간, 부부의 집에 입주 도우미로 들어간 주인공이 그들을 대표님과 회장님으로 부른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웅의 눈치를 살폈다. 영웅은 밥을 먹으면서 진지하게 채언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채언은 식탁을 살폈다. 두 사람 몫의 반찬들은 골고루 줄어들어 있었다. 하나만 빼고.

“혹시 싫어하는 음식 있으세요?”

“저는, 다.”

채언은 자연스럽게 브로콜리를 초장에 찍어 먹었다. 천천히 브로콜리를 씹는 채언을 보던 영웅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다, 잘 먹는데.”

살짝 눈을 돌린 영웅은 접시 위에 있던 브로콜리 중 가장 작은 것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이미 잘라 놓은 것이라 크기는 비슷비슷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것이었다. 브로콜리를 입에 넣은 그가 턱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씹기 시작했다.

아. 이거 싫어하는구나. 채언은 지난번에도 냉장고에 그대로 남아있던 브로콜리 접시를 떠올렸다. 그래서 계란찜만 먹었구나. 그가 편식을 한다고 해서 놀릴 생각은 없었다. 감히 집주인이 반찬 투정을 한다고 놀릴 직원이 있을까. 채언은 앞으로의 반찬 목록에서 조용히 브로콜리를 지웠다.

밥을 다 먹고 식탁을 치우는데 영웅이 말했다.

“채언 씨. 내일 아침엔 빵 먹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까 문자로는 밥을 먹겠다고 한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지. 그릇에 물을 뿌리던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저녁을 같이 먹어서?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던 채언이 스펀지를 꽉 쥐었다. 진짜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나저나 남은 빵이 별로 없었다. 아까 영웅이 아침으로 밥을 먹겠다고 해서 사 오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사러 나가 봤자, 시간이 늦어 밥 대신 먹을 만한 종류의 빵은 다 팔려서 없을 테고.

영웅은 설거지를 하는 채언의 등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는 채언에게 왜 식기세척기를 쓰지 않고 설거지를 하느냐고 여러 번 물은 전적이 있었다.

스펀지로 그릇을 문질러 닦던 채언은 조심히 눈을 굴렸다. 등 뒤에 집주인이 서 있었다. 영웅이 혼자 식사를 한 뒤에 보면 그릇은 항상 식기세척기 안에 들어있었다. 그는 왜 식기세척기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었는데, 채언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게 더 마음에 든다고 이미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해야 그날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오늘도 왜 식기세척기를 쓰지 않느냐고 채언의 양쪽 어깨 너머를 왔다 갔다 하며 설거지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흠.”

혹시 제대로 안 닦였을까 봐 그러나.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입에 꾹 힘을 주자 볼에 살이 살짝 올랐다.

흠, 하는 소리에 그릇을 보던 눈을 채언에게로 돌렸던 영웅은 문득, 채언의 눈 밑을 보고는 저쯤 어딘가에 보조개가 생겼었는데, 하며 저도 모르게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에 채언은 혹시 미국에서는 손으로 설거지하는 게 더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하며 고무장갑을 낀 손을 펼쳐보았다. 고무장갑은 여러 번 쓰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릇을 헹구다가 다시 세제를 눌러 짰다. 일부러 고무장갑을 낀 손에 거품을 내고 여러 번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영웅이 떠나지 않자, 채언은 헹군 그릇 하나를 들어 물기를 탈탈 털었다.

영웅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채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계속 얼굴을 보는 중이었다.

“한번 만져보실래요?”

채언이 고개를 살짝 돌려보며 물었다.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그가 더 가까이 있어 살짝 놀랐지만, 목소리에서 놀란 티가 나지는 않았다.

“손가락으로 만져보세요. 계속 보고 계셨죠?”

곧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보던 영웅이 당황했다.

“만져 봐도 돼요?”

영웅은 망설이면서도 손가락을 들었다.

“네.”

자신감에 차 있는 채언의 눈을 보면서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자신의 얼굴을 꾹 찌른 손가락에 채언은 왼쪽 눈을 윙크하듯이 감았다 떴다. 갑작스레 다가온 손 때문에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왜, 제 얼굴을.”

채언이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가렸다.

“채언 씨가 만져보라고 했.”

당황하는 채언 때문에 더 당황한 영웅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제야 채언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가 보였다.

“아. 접시.”

“네. 저는 접시를.”

되게 뽀득뽀득하거든요, 하고 채언이 접시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고무장갑 낀 손가락과 마찰된 접시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영웅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채언의 볼을 찔러본 손가락 모양을 유지한 채 팔을 내리더니, 다른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뒤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무장갑을 벗은 채언은 팔을 들어 물 묻은 볼을 닦아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다음 날 아침. 거실로 터덜터덜 걸어 나온 영웅은 부엌과 거실의 경계에 서서 멈칫했다.

어제 싱크대 앞에서……. 영웅은 자신의 검지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제 채언과 저녁을 먹고 아침 얘기를 번복해서 다행이었다. 메모지로 채언과 대화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메모지에 무슨 말을 쓰기에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왜, 제 얼굴을.’

어젯밤 채언이 볼을 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영웅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실수를 해도 그런 실수를 하다니. 다 큰 성인 남자가 자신의 볼을 만져보라고 내밀 리가 없지 않은가.

영웅은 앨리를 불러 노래를 틀었다. 어젯밤의 기억을 떨쳐내고 아침을 새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도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직 복도 끝 방에 잠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좀 더 작게 조절했다. 느릿하게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킨 영웅은 계란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때 현관문이 여닫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계란 두 개를 손에 쥔 그는 냉장고 문을 닫고 복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일어나셨네요.”

빵이 담긴 봉지를 품에 안고 들어오던 채언과 마주쳤다. 채언은 살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I’m feeling good-. good. good. feeling good-.

작게 틀어놓은 스피커에서는 재즈 가수가 느릿하게 같은 가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채언 씨, 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아침에 빵을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어제 새 걸 사다 놓지 않아서 모자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집 앞 제과점 오픈 시간에 맞춰서 다녀왔어요. 너무 일찍 가면 빵이 없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있더라고요.”

채언은 조곤조곤 말하며 영웅에게 봉지 속의 바게트와 식빵을 보여주었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라는 듯 들떠 보이기도 했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상할 것 없는 가사였지만 영웅은 자꾸 검지에 닿았던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아서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앨리.”

스피커는 영웅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여전히 노래를 틀어놓고 있었다.

“앨리.”

네에-

채언은 갑자기 스피커를 부르는 집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영웅이 그런 채언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채언은 하던 일을 마저 하라는 의미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단계를 조절하듯 두 번에 걸쳐 입술에만 미소가 장착되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채언이 입꼬리에 힘을 주자 살짝 볼이 동그랗게 올라왔다.

“노래, 크흠, 꺼.”

영웅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스피커는 대답도 없이 노랫소리를 키웠다. 하필 또 크게 빠밤 빠밤 하더니, 느낌도 좋고, 기분도 좋다는 가사가 흘러나왔다. 요즘 스피커는 자주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설치할 때는 한국에서 최고로 말을 잘 알아듣는 인공지능이라고 했으면서. 영웅은 말을 듣지 않는 스피커 앞으로 다가가 수동으로 전원을 꺼버렸다.

“혹시 저 때문에 끄신 건가요?”

등 뒤에서 채언이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요. 이제 곧 들어갈 거고.”

채언은 봉지 속에 들어있던 빵을 식탁 위에 꺼내놓았다. 허리를 편 영웅은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노래가 그만 듣고 싶어서요. 채언 씨, 아침 같이 먹을래요?”

그는 손에 쥔 계란을 흔들어 보였다. 꽉 쥔 손안에서 계란은 살짝 금이 가 있었다.

갓 만들어진 식빵은 따끈하고 말랑했다. 영웅이 식빵을 두껍게 썰며 심란한 표정을 짓기에 채언은 마음이 불편했다. 칼에 밀린 식빵이 찌그러졌다가 다시 부푸는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토스터기에 넣고 바삭하게 구울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오픈하자마자 들어간 베이커리에서는 갓 만든 식빵을 얇게 썰어올 수가 없었다. 이건 찢어먹기 알맞게 나온 것이었다. 식기세척기 옆 커다란 오븐을 쓰면 굽는 데 너무 오래 걸리겠지. 그런데 바게트는 겉이 바삭하니까 얇게 썰릴 텐데 왜 바게트는 안 먹지. 채언은 영웅이 두껍게 잘라준 식빵에 잼을 발라 먹으며 생각했다.

둘은 계란과 샐러드도 각자 접시를 두고 먹었다.

영웅은 최대한 식빵의 질긴 겉 부분을 잡고 먹고 있었다. 방금 만든 식빵은 흰 부분이 너무 말랑했다. 촉촉한 게 어젯밤 채언의 볼을 찔러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식빵 한 쪽을 급하게 먹어 치운 그는, 다시 빵에 손을 대지 않고 계란과 샐러드를 먹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으면서 살펴본 채언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혹시 너무 이른 시간에 아침을 먹자고 했기 때문일까.

둘은 마음이 불편하게 아침을 먹었다.

채언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영웅은 식기세척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식탁을 함께 치우고는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채언은 불편했던 마음이 좀 나아졌다. 어제 그릇이 뽀득하게 열심히 설거지한 것을 그가 알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웅이 코트를 입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채언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채언이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돌아보았다.

“다녀오세요. 사… 범님.”

통유리 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채언의 검은 머리카락은 빛이 닿자 짙은 갈색으로 보였다. 그 순간 영웅은 식물과 햇빛과 채언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채언은 편해 보이는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물뿌리개를 들고 돌아보는 모습을 보는 순간, 티셔츠가 화이트 셔츠로 자동 보정되어 보였다. 유리창의 프레임이 마치 채언을 담고 있는 액자처럼 느껴졌다. 사실 채언은 사범님이라고 말할 때, 여전히 그것이 입에 붙지 않아 사… 범님하고 저만 아는 공백을 넣어 발음했다. 하지만 영웅은 방금 채언이 자신을 배웅하며 발음한 사범님이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네. 다녀올게요.”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영웅이 웃었다. 원래도 채언보다 밝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의 머리 위에 햇빛이 닿으니 금발에 가까워졌다. 채언은 그것을 보며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시골에 살러 온 부잣집 부부의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커다란 개, 바둑이가 풀밭을 뛰어노는 장면이었다.

채언은 장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외투 주머니 속에는 장 볼 거리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영웅과 아침 식사 이야기로 필담을 나눈 메모지를 재활용 한 것이었다. 매번 적혀 있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버리기가 아까워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채언은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느긋하게 걸었다.

예전에는 월세를 어떻게 마련할지, 알바 식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며 살았는데, 요즘은 어떤 반찬을 만들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오늘도 저녁으로 뭘 만들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찜닭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파, 파. 당근, 당근.”

의미 없이 저녁 재료들을 조용히 입으로 외며 걷던 채언은 주민 센터 옆을 지나치다 현수막을 하나 보았다.

‘3월 주민 센터 강의 신청’

-손쉬운 반찬 만들기-

-한지 공예-

-한글 기초반(노인 교실)-

그 밖에도 서예나 종이접기 수업 같은 것이 줄줄 적혀있었다. 반찬 만들기에 눈길이 간 채언은 현수막에 눈을 고정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런.”

오랜만에 달력 어플을 켠 채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영웅은 요즘 기분이 좋았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장 앞까지 걷다 보면 기대가 됐다. 일부러 발소리가 나도록 걸었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 굽이 닿는 소리가 울렸다.

“다녀오셨어요.”

역시나 채언이 현관 복도 앞에 서 있었다. 둘은 요즘 이유 없이 저녁을 함께하고 있었다.

밥을 입에 넣은 영웅은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면서 채언의 기분을 살폈다. 요즘 채언은 저녁마다 영웅에게 드라마 내용을 말해주고는 했다. 꽤 열심히 보는 모양이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영웅은 채언이 해주는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거의 매일 얘기를 듣다 보니 이제는 드라마 속 대표와 회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채언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차분한 얼굴은 구겨진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별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밥만 먹고 있었다.

혹시 또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영웅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채언 씨, 혹시 어디 아파요?”

그의 말에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아뇨. 괜찮은데요.”

목소리가 밝지는 않았지만,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드라마 안 봤어요?”

“예? 아….”

채언은 젓가락 끝을 잘근 씹었다. 요즘 저녁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다른 호칭을 세뇌시켜보려 해도 영웅에게 먹히지 않았다. 슬슬 포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힘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의도 없이, 밥만 먹고 얼른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재방송을 놓쳤거든요.”

채언은 거짓말을 했다. 오늘 분 재방송은 놓치지 않고 본 상태였다.

영웅의 마음을 돌리려는 작전과 별개로 드라마는 볼만했다. 막장의 요소는 갖추었지만, 드라마 자체는 꽤 순했다. 주인공은 주인집 부부가 강아지 바둑이를 부를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고는 했는데, 오늘 재방송에서는 주인공이 바둑이를 산책시키다가 문득 어릴 적 헤어진 부모님이 자신을 바둑이라고 부르곤 했던 것을 떠올렸다. 채언은 드라마 내용을 생각하며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채언은 3월에 개강하는 수영 수업 신청을 놓쳤다. 달력에 적어두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두세 달 후에 다음 수업이 열리긴 하겠지만, 채언은 힘이 빠졌다.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는 삶 속에서 가끔 소소하게 뭔가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가끔 드물게 생기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 소소한 것 하나를 놓치면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는 했다. 고작 수영 수업 하나 놓친 것 때문에 이렇게 기운 빠질 일인가. 채언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분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웅은 채언이 드라마 재방송을 놓친 게 너무 아쉬워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는 물론, 일상적인 이야기 자체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요즘 드라마 얘기를 하면서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영웅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채언이 설거지를 하는 대신 식기세척기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정리를 마친 채언은 영웅에게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식기세척기를 권장했던 집주인은 홀로 소파에 앉아 한참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있었다.

한참 동안 식기세척기가 작동하는 소리만 집 안을 울렸다.

알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채언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무기력해도 출근은 해야 했다. 방문만 열면 보이는 곳이 직장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곳이었다면 오늘은 출근하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수영 수업을 놓친 게 뭐라고. 자신이 꼭 무말랭이가 된 것 같다며, 하찮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밥도 먹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있던 채언은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야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거실엔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언은 반질반질한 잎을 살펴보다 일어섰다.

세탁된 영웅의 옷을 드레스 룸에 넣어놓고, 집 안을 쓸고 닦은 다음 거실 카펫 위에 앉았다. 채언은 침대만 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았다. 평소라면 할 일이 없어도 찾아서 했을 텐데, 오늘은 할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채언은 아예 카펫 위에 누워버렸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창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스위스….”

알프스, 치즈 퐁듀. 채언은 한참 핸드폰 액정 속 이미지를 들여다보다가 은행 어플을 켜서 통장을 확인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곧 날도 따듯해지고 해도 길어질 테니까.

채언은 팔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하듯 천천히 숨을 고르다가 느릿느릿 일어섰다.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에 들어간 채언은 식탁 위에 메모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식탁 위에는, 볼펜과 손바닥만 한 메모지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요즘 영웅은 혼자 아침을 해 먹고 나간 날에도 메모를 남기고는 했다. 보통은 ‘수고하세요 채언 씨.’, ‘이따 봐요 채언 씨.’, ‘오늘 날씨가 좋네요.’ 같이 별 뜻 없는 말들이 바른 글자로 적혀있었는데 한글 교본에 쓰이듯 반듯한 글자 옆에는 : ) 같은 표정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메모지에 적혀있는 글자가 좀 많았다.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발견한 메모지에는 영웅이 자신에게 시킬 일이 적혀있을지도 몰랐다. 채언은 메모를 훑었다.

“이게 뭐지?”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기는 한데, 뭘 사다 놓으라거나 음식을 해놓으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항목별로 숫자와 함께 적혀있었다.

채언은 메모지를 들고 TV 앞으로 갔다. 리모컨을 찾아 TV를 켜라는 것이 1번이었다.

2. TV가 켜졌으면 가운데 동그란 버튼을 누르시오.

답지 않게 문장 끝이 딱딱했다. 아마 어디서 설명서를 보고 형식을 따라 적은 듯했다. 글자 옆에는 리모컨 버튼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채언은 메모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여러 가지 목록이 떴다.

3. 화살표를 눌러서 Surflazy가 나오면 동그란 버튼을 누르시오.

Surflazy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어플이었다. 뭔지 알고는 있었지만, 매달 결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채언은 사용하지 않던 것이었다. 화살표를 세 번 눌러 목록 몇 개를 지나친 후 동그란 버튼을 눌렀다. 이미 자동 로그인이 되어있었다. 화면에 캐릭터 선택지 같은 창이 떴다. 영웅이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써놓은 듯한 프로필 옆에 채언의 이름도 쓰여 있었다. 정직하게 ‘채언씨’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4. 채언씨 이름이 나오면 동그란 버튼을 누르시오.

채언은 ‘채언씨’를 선택했다.

5. 리모컨 뒤에 뚜껑을 내리고 검색하시오!

리모컨 뚜껑을 내리라니, 채언은 손에 쥔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뒷면에 살짝 힘을 주어 내려 보았다.

“어.”

옛날 폴더폰처럼 뚜껑이 스르륵 내려갔다. 가끔 낮에 드라마 재방송을 볼 때나 TV를 틀었던 채언은 뚜껑이 내려간 리모컨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여기에는 왜 들어가 보라고 한 걸까. 뭘 검색하라는 거지. TV 앞에 선 채언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검색창에 뭘 검색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가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채언은 쭈뼛거리며 리모컨 한글 자판을 눌렀다. 드라마 이름을 검색하자 TV 화면에 이웃집 바둑이 포스터가 떴다. 82편이 전부 있었다.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뭐 이런 거까지….”

숨이 토해지듯 혼잣말이 터져 나와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에 드라마 재방송을 보지 못했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나를 신경 쓴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채언은 여전히 챙김 받는 것이 어색했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의 끝에는 부담스럽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됐다.

지난번 독감에 걸렸을 때, 같은 방에서 잠든 영웅을 보면서 새벽 내내 고민하던 채언은 진원에게 그만두고 싶다는 내용의 긴 메시지를 보냈다.

영웅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채언은 단지 그의 친절이 애달프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의 친절에 적응했다가, 1년 후 끊어 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자신을 챙겨준 만큼 보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감사했고, 일할 사람이 새로 구해질 때까지는 계속 일하겠다는 채언의 메시지에 진원은 짧게 답장을 보내왔었다.

혹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뒤, 날짜가 한참 지나있는 진원의 답장을 다시 확인했다.

영웅의 친절에 대해 많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 살던 당시 영웅은 오래 병원에 입원했던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그가 친근하게 구는 이유가 있다면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일 뿐, 그의 행동에 딱히 특별한 의미는 없으니 편히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병에 걸렸었다거나 하는 부연 설명 없이, 깔끔하게 영웅의 친절에 대한 이유가 적힌 답장이었다.

채언은 진원의 답장을 받고 나서, 서글프고 싸한 안도감을 느꼈었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랐다.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던 채언은 중얼거리며 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모 남겨두신 것 확인했습니다. 혹시 드라마 다음 내용이 궁금하세요?]

[사범님: 채언 씨가 얘기해주는 것은 궁금해요. 재미없는 때도 보세요.]

평소보다 조금 더 긴 텀을 두고 답장을 받은 채언은 머쓱해졌다. 다행인 한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재미가 없어도 드라마를 보라니. 이것도 일의 연장이었구나. 채언은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글자를 눌렀다.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채언이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그런데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불현듯 머릿속에 고민이 스쳤다. 집주인은 드라마 내용을 말해달라고 어플 결제까지 해준 사람이었다. 한 번에 몇 편씩 보고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지. 다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알겠다는 채언의 메시지를 확인한 영웅은 흐뭇하게 웃었다.

빨리 답장은 해야 하는데, 심심할 때라는 것이 한국말로 뭔지 기억나지 않아 번역기에 검색까지 해서 메시지를 보낸 보람이 있었다. Surflazy는 어제 시무룩하던 채언의 얼굴이 마음에 걸려, 결제해둔 것이었다.

그럼 재미있게 보라고 답장을 하려던 찰나, 채언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국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꽤 익숙했지만, 한글 자판을 치는 것은 영웅에게 아직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신중하게 한글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채언은 초조하게 영웅의 답장을 기다렸다. TV에는 여전히 이웃집 바둑이 내용 소개 화면이 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가족의 모습과 개 한 마리.

부우우-. 채언은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 아래 영웅의 답장이 온 것이 보였다. 답장을 확인한 채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 두 편씩 보면 될까요?]

[사범님: 하루에 두 편 가지고 되겠어요? : ) ]

채언은 어느새 수영 수업에 대한 것을 잊어버렸다. 머릿속에 밀린 드라마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82편 중 20편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62편을 보고 집주인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눈앞이 캄캄했다.

혹시 그럼 세 편만 봐도 되나요? 하고 물었다가 그 이상의 숫자를 보게 될까 봐, 그냥 아까처럼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더불어 채언은 앞으로는 집주인의 호의를 멋대로 오해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채언은 손을 깨끗이 씻고 조리대 앞에 섰다. 오늘은 밑반찬 만들기 수업에서 우엉조림과 오이무침을 만드는 날이었다.

강의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진행되었다. 주민 센터가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채언의 정식 퇴근 시간과(일이 없을 때는 유동적으로 조절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강의 시작 시각이 겹쳤기 때문에 수강 신청 전에 미리 영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는데, 영웅은 당연히 괜찮다며 허락을 해주고서는 자기도 그런 것을 배우고 싶다며 부러워했다.

그리고 화요일, 목요일의 둘의 저녁 시간은 8시 30분으로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학생. 이거 이 정도로 써는 게 맞아?”

채언의 옆에서 오이를 썰던 중년 남성이 작은 소리로 물어왔다. 그와는 첫 수업 때부터 같은 조리대를 쓰고 있었다. 첫날 자기소개 전에 그가 학생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 뒤로도 그는 종종 채언을 학생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요리를 확인받고는 했다. 강사의 설명을 듣고 따라 하는 자신의 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채언은 그가 썰어놓은 오이를 한 번 보고 자신이 썰고 있던 것을 보았다. 모양이 비슷했다.

“네. 맞는 것 같아요.”

수강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연령대는 다양했다. 자취를 하는 듯한 20대, 갓 결혼한 30대, 그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과 노년까지. 하지만 남자는 채언과 옆에서 오이무침을 만들고 있는 중년 남자뿐이었다. 자기소개 때 들어보니 그는 대학교수였고, 반찬 만들기 수업은 딸이 시켜서 신청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종종 채언이 묻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대화를 걸어왔다.

“우리 딸은 맨날 유통기한 지난 게 있으면 나보고 먹으라고 한다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채언은 ‘네.’, ‘그렇군요.’, ‘아, 정말요?’ 등등의 짧은 대답을 했다.

“다녀왔습니다.”

채언은 복도에 서 있던 영웅에게 인사했다.

“어서 와요. 채언 씨.”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영웅이 활짝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이었지만 채언은 그가 웃으며 자신을 반길 때마다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목 뒤가 가려운 것 같기도 했다.

반찬을 담아온 통을 식탁 위에 올려둔 채언은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고 말했다.

“네에.”

말꼬리를 늘여 따라붙는 그의 다정한 대답과 스포츠 채널이 틀어진 TV 속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의 함성, 따듯한 집 안의 공기. 채언은 그것들을 피해 달아나듯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채언이 끝 방을 향해 걷는 동안 자동으로 현관 불빛이 반짝 켜졌다.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채언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식탁 위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채언 씨. 이거 색깔이 꼭 나뭇가지를 끓인 것 같네요.”

영웅이 우엉조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채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영웅은 짧은 순간 채언의 볼에 보조개가 생기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래도 나뭇가지 맛은 아닐 거예요.”

“그렇겠죠.”

둘은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맞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뭔데요?”

“저한테 주신 선인장이요. 그, 머리라고 해야 하나. 머리에 작게 동그란 거 두 개가 올라왔어요.”

채언의 방에 있는 작은 선인장은 몸통에 팔이 달린 것처럼 완만한 삼지창 모양이었다. 요즘 그중 가운데 부분에 작게 뭐가 돋아나더니, 완전히 동그랗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요? 보고 싶어요.”

“밥 다 먹고 나서 가져올게요. 한번 보세요. 꼭 귀처럼… 위치가 절묘하게 생겼거든요.”

만두를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요. 채언은 젓가락으로 쌀밥을 조금 집어 먹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싹이 났다고 하는 건가요? 아니면 풀잎?”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날이 제법 따듯해졌다. 언제 또 꽃샘추위가 찾아올지 모르지만, 오늘은 봄 날씨다웠다. 채언은 환기를 하기 위해 집안의 창문과 방문을 열어놓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해도 꽤 길어진 듯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해가 짧아서 저녁밥을 먹기도 전에 해가 지고는 했었다. 집주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일에는 정말 방 안에만 콕 틀어박혀 있었는데. 채언은 기지개를 켰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처음에는 침대처럼 넓은 이 소파에 앉지도 않았다. 어느새 이 집에 익숙해진 걸까.

드라마는 요즘 같은 내용을 질질 끌고 있었다. 방영 당시 인기가 많아 일찌감치 연장 방송을 하기로 했던 드라마였다. 그래서 요즈음 몇 편은 사건이 비슷비슷하게 꼬이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그냥 틀어놓고 집 안을 돌아다니며 간간이 소리만 들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옆으로 누워 눈을 깜빡거리던 채언의 눈에 TV 옆 AI 스피커가 보였다. 이 집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한 번도 저 스피커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른침을 삼킨 채언은 용기 내보기로 했다.

“…앨리.”

속삭이듯 작게 목소리를 낸 채언이 아무도 없는 집 안을 살폈다. 스피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TV 속에서 들려오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채언의 목소리보다 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언은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목소리를 내보기로 했다.

“앨리.”

이번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가, 괜히 손가락끼리 엮어보던 채언은 다시 한번 아무도 없는 거실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앨리.”

네에-.

“어!….”

영웅이 평소에 왜 그렇게 놀라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스피커가 너무 갑자기 대답하는 바람에 채언도 순간 놀라고 말았다.

대답은 들었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영웅은 저것과 무슨 대화를 나누며 지내왔을까. 조금 자세히 들어둘 걸 그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뭇거리던 채언은 소파에서 일어나 괜히 할 일을 찾았다. 창문과 방문을 닫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닫고 나서야 얌전히 거실로 돌아와 드라마를 보았다.

그나저나 슬슬 날이 따듯해지고 있으니, 딸기 철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대동에 다녀올까 싶었다.

채언의 까만 머리카락에 햇빛이 닿아 따듯한 갈색으로 빛났다.

낮부터 하늘이 흐렸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기상캐스터 말고도 채언에게 오늘의 날씨를 미리 일러준 사람이 있었다.

어제저녁 밥을 먹을 때 영웅이 갑자기 날씨 얘기를 꺼냈다.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이 흐릴 때마다 그랬다. 한창 추울 때쯤, 눈이 내리기 전 구름이 잔뜩 끼어있을 때도 그런 얼굴을 했었다.

‘내일 저녁부터 비가 온대요. 나갈 때 우산 꼭 챙겨가요.’

그렇게 말해준 그는 우산을 챙겨갔을까. 어차피 운전해서 차를 타고 다니니 필요 없을까. TV를 틀어놓고 거실에 앉아 수건을 개던 채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드라마 내용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수건을 개어 옆에 놓아둔 채언은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신발장 옆 수납함을 열었다. 우산꽂이에는 우산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고급스럽고 튼튼한 재질의 장우산 몇 개와 비닐우산 한 개. 그중 하나는 채언의 것이었다. 이렇게 봐도 그가 아침에 우산을 챙겨갔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채언은 평소에 이 주변 먼지를 털어본 적은 있어도, 우산꽂이에 꽂혀 있던 우산 개수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산을 보던 채언은 잠시 예전 생각을 했다. 신발을 신발장에 두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채언의 비닐우산도 우산꽂이에 자리를 잡았다. 장을 보고 집에 오는데 보슬비가 내려 산 것이었다. 그때는 영웅과 같이 밥을 먹는 게 당연하지도 않았고, 또 지금처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다.

우산꽂이 앞에서 옷소매를 매만지던 채언은 핸드폰을 꺼냈다.

“우산 챙겨가셨나요.”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던 채언은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눈을 꼭 감고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 상태로 잠시 기다렸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답장이 왔었는데, 기다려보아도 꼭 쥐고 있는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혹시 무음으로 해뒀나. 슬쩍 눈을 뜬 채언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채언이 김을 뿜고 있는 밥통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사범님: 네. 채언 씨도 나갈 때는 우산 가지고 나가세요.]

글자로만 채워진 메시지에 채언은 머쓱함을 느꼈다. 웃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우산 이모티콘 정도는 보내올 줄 알았는데.

오늘 영웅이 많이 바쁜가 보다고 생각하며 채언은 김빠진 밥통 뚜껑을 열어 갓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저었다. 이따 영웅과 함께 먹을 밥이었다. 주걱을 내려놓고 밥통 뚜껑을 닫은 채언은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입었다. 반찬 만들기 수업에 가야 했다.

비닐우산을 쓰고 걷던 채언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 하늘이 더 어두웠다. 해가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늘에 구름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벌써 바지 밑단이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는데, 이따 수업이 끝나고 나올 때는 아예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채언은 고개를 돌려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을 확인했다. 흘긋 보아도 겉에 물방울이 많이 튄 게 보였다. 우산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가방을 툭툭 두드려보자 손에 물기가 흥건해졌다. 채언은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 만들 반찬은 감자볶음과 진미채 볶음이었다. 채언의 옆에는 학교에서 퇴근한 남교수가 서 있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감자 껍질을 벗겼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두 분 꼭 부자 사이 같으시네요.”

옆 조리대에서 감자를 깎던 수강생 한 명이 말했다. 남자가 둘뿐인 수업에서 부자로 지칭될 대상은 채언과 교수뿐이라, 멍하니 감자 껍질을 까던 채언의 귀가 쫑긋했다.

“우리 얼굴이 똑 닮았나?”

옆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던 교수가 감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음?”

“에이.”

되물은 것은 채언이 아니라 옆 조리대 수강생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교수와 나이대가 비슷했다.

“교수님 그건 아니죠. 저 학생은 배우같이 생겼잖아요.”

이제 다른 수강생들도 채언을 학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맞아요. 맞아.”

옆 조리대 말고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강생이 많지 않아 요리하는 동안 종종 다른 수강생들끼리 수다를 떨기도 했다. 옆 조리대 사람들과 교수도 가끔 농담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소싯적에는 잘 깎은 감자처럼 잘 생겼었습니다. 지금에야 쪼글거리는 감자 껍질 같아졌지만.”

교수가 옆 조리대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채언은 괜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자신의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부끄러울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버릇이었다.

잘생겼다는 말은 자주 들어왔기에, 오늘 또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민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채언은 김을 살짝 빼고 나서도 여전히 따끈따끈한 반찬통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오늘따라 반찬이 더 맛있게 된 것 같았다. 특히 감자볶음 간이 아주 잘되어 영웅이 좋아할 것 같았다. 가방을 메자 허리께에서 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비 오는데 조심히 가세요.”

수강생들끼리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설 때마다 채언도 허리를 숙여가며 마주 인사를 했다. 어서 가서 저녁을 먹고 싶었다. 아까보다 비가 더 쏟아지고 있었다. 주민 센터 현관 처마 밑에 서서 우산을 펼친 채언은 비 오는 하늘을 보며 어깨에 멘 가방을 추슬렀다. 젖은 땅 위로 발을 뻗는데 빛이 번쩍했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수업 중에도 몇 번이나 크게 천둥소리가 울렸다. 같은 건물에서 운동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온 사람 몇몇이 채언의 곁을 지나가며, 날씨 한번 요란하다고 옷깃을 추슬렀다.

채언의 신발이 금세 젖었다. 양말도 벌써 반이나 젖은 것이 느껴졌다. 뛰듯이 걷는 발걸음에 질척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얼마나 급하게 걸었는지 공동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가쁠 정도였다.

“하아.”

우산을 팡팡 펼쳐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공동현관문 안에 들어선 채언은 우산 꼭지를 바닥에 톡톡 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우산을 내릴 때 머리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을 보니 옷이 많이 젖은 것이 보였다. 뒤늦게 어깨를 털어보았지만 이미 빗물이 스며든 후였다. 계속 우산을 쥐고 있었던 손이 차가웠다.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지.

카드키를 찍고 현관문을 연 채언은 등에 닿는 반찬통의 온기를 의식했다. 집 안은 이것보다 더 따듯하겠지.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현관 복도를 걸어간 채언은 어떠한 기대감을 가지고 중문을 열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 한 방울이 얼굴 위로 흘렀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채언은 들고 있던 우산의 물기를 털 듯 바닥에 소심하게 콕콕 찍어보았다.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채언은 다시 현관 복도로 나가 우산을 펼쳐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대로 우산꽂이에 꽂아두면 수납장 안이 물바다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발장 안에는 신발 건조기가 있었지만 채언은 사용법을 몰랐다. 천으로 된 운동화는 너무 많이 젖어서 영웅의 고급 신발들이 놓인 신발장에 같이 두면, 그의 신발들이 상할 것 같았다. 젖은 운동화를 손에 들고 망설이던 채언은 그것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았다. 축축한 양말도 벗어낸 채언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불 꺼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센서등이 꺼지자 집 안은 정말 어두워졌다.

영웅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것인지 집 안이 조용했다. 채언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젖은 양말을 빨래통에 던져놓고 옷을 갈아입은 채언은 손을 씻고 방 안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 환해진 거실 한쪽에는 여전히 트리가 놓여있었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아직 치우지 않은 것이었다. 채언은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반찬통을 꺼냈다.

여덟 시 반까지 기다려보았지만, 영웅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혹시 많이… 음. 혹시 저녁 드시고 오시나요?”

쓰던 메시지를 한 번 지우고 새로 쓴 채언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홉 시까지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지금 먹어야 맛있을 텐데. 채언은 식탁 위의 반찬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렇게 금방, 저녁을 함께 먹는 일에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채언은 혼자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채언은 평소보다 일찍 울린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채언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앉아 핸드폰 알람을 껐다. 잘못 울린 게 아니라 어젯밤에 시간을 새로 설정해둔 것이었다. 영웅이 이쯤 일어나고는 했다. 밖으로 나가볼까 말까 고민하던 채언은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거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간 채언은 거실과 부엌의 불을 켰다. 영웅이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모르니 뭘 준비하기가 애매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들어오기는 한 걸까. 아직 자고 있을까.

채언은 영웅의 방문이 보이는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옆에서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끄는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어. 채언 씨.”

아침이라 더 낮게 가라앉은 영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에 손을 대고 있던 채언이 옆을 돌아보았다. 피곤해 보이는 영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재에서 나왔다. 집에 있었구나. 저기서 나온 것을 보면 지금까지 일을 한 걸까. 서재는 채언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잘 잤어요?”

그렇게 묻고 있는 영웅은 잠을 설친 것 같아서, 채언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네.”

너무 바빠서, 집에서도 새벽까지 일을 하느라 답장도 하지 않은 걸까. 머릿속을 흐리게 하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했다.

“일찍 일어났네요.”

채언의 옆을 스쳐 가, 냉장고 음료 칸을 연 영웅은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어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건 아닐까? 채언의 시선이 그의 손에 따라붙었다.

영웅은 주스를 마신 뒤에 식빵을 구울 생각이었다.

“아침 같이 드실래요?”

채언이 물었다.

“배가 고파서 일어났거든요.”

변명하듯 덧붙이는 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는 밥, 먹을 건데.”

손가락을 꼼질 거리며 말하는 채언의 모습에,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영웅은 꿀꺽 시큼한 침을 삼켰다.

“네. 같이 먹어요.”

“혹시 어제 술 드셨어요?”

급하게 황탯국 같은 것을 끓여야 하나 생각하며 채언은 냄비를 꺼냈다. 그 모습에 영웅이 손을 저으며 말렸다.

“아뇨. 술 안 마셨어요. 왜요?”

혹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이 초췌한가 싶어 영웅은 볼을 쓸어내리는 척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제, 늦게 들어오신 것 같길래요.”

채언은 어제 잠들 때까지 영웅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냄비를 다시 찬장에 넣어놓은 채언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영웅이 손가락을 들어 눈썹 위를 만지다 입을 열었다.

“어제 일찍 들어왔어요. 평소처럼 왔는데.”

감자볶음이 들어 있는 통을 든 채언이 영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그리고는 손에 든 반찬통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어제 기다렸어요? 메시지 남겨놓을걸. 정말 미안해요. 조금 정신이 없어서.”

“아뇨. 괜찮아요. 저녁도 제시간에 먹고 잤어요.”

채언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마카로니를 먹었다.

“다행이네요.”

영웅은 밥은 자신이 푸겠다며 밥그릇 두 개를 가지고 가서 밥통 앞에 섰다. 주걱을 든 그는 잠시 밥통 뚜껑을 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채언에게 말했다.

“채언 씨,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밥 같이 못 먹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할게요.”

접시를 꺼내 아침으로 먹을 만큼 반찬을 옮겨 담던 채언은 자신을 보고 있는 영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채언이 짧게 대답한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밥통 앞에 서 있는 영웅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그는 밥 한 그릇을 퍼서 손에 들었다.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잤어요. 제가 잘 놀라잖아요.”

잘 놀라는 거랑 몸이 좋지 않은 게 무슨 상관이지. 한국말을 헷갈려 단어 실수를 한 건가. 채언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

채언 딴에는 맞장구를 쳐주고 싶어 호응한 것이었다.

“천둥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헤드폰을 끼고 있느라, 채언 씨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그의 말에 채언은 고개를 돌려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어제만큼 구름이 끼어 있었다. 오늘은 낮까지 비가 내리고 그친다고 했다. 집주인은 현관 벨 소리를 아주 잔잔한 클래식으로 설정해두는 사람이었다. TV 소리조차 일정 볼륨을 넘기지 않았고, 놀라지 않기 위해 토스터기를 쳐다보고 있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과 천둥소리, 잘 놀라는 것과 몸이 좋지 않았다는 말. 채언의 머릿속에 갑자기 입주 도우미 계약을 할 당시가 떠올랐다. 영웅이 응급실에 갈 일이 생기면 동행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자신이 너무 무신경했다. 영웅은 그렇게 자신을 신경 써주었는데.

영웅이 밥그릇을 손에 들고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그때였다.

번쩍이며 번개가 쳤다. 쿠르릉. 작게 울리는 천둥소리에 채언이 두 손을 들었다. 따듯한 손에 영웅의 귀가 덮였다.

콰앙. 뒤이어 크게 천둥이 울렸지만 영웅은 그 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채언의 손이 단단히 막아준 덕분이었다.

영웅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초록빛 눈을 깜빡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내 채언이 고개를 돌렸다. 영웅은 놀라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뛰었다.

스르륵 귀를 막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오늘은.”

창밖을 보고 있던 채언이 다시 영웅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가 어제처럼 내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채언은 굳이 그에게 어디가 아팠는지 묻지 않았다.

이제 채언에게, 영웅은 가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별 신경 쓰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생겼다. 아는 것들에 대해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 부재했던 어젯밤 같은, 그의 사정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채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의 사회생활용 웃음을 입에 장착했다.

영웅은 채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 밑 보조개를 찾았다. 아쉽게도 보조개가 보이지 않았다. 보조개는 눈까지 살짝 접힐 정도로 웃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게요. 금방 해가 뜰 것 같죠?”

활짝 웃은 영웅은 들고 있던 밥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보통 채언은 다음 날 아침에 밥을 먹을 예정이면 저녁 늦게 새로 밥을 안쳤다. 밥통에는 어제 밥을 해둔 시간이 표기되어 깜빡거리고 있었다.

둘은 아침을 먹으면서 반찬 이야기도 하고 드라마 이야기도 했다. 언제 다 볼까 싶었던 드라마는 이제 30편 남짓 남아있었다.

이걸 다 보고 나면, 밑반찬 만들기 강의가 끝나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질까. 어제 만든 감자볶음을 입에 넣은 채언이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정체가 밝혀질 듯 말 듯 사건이 꼬이고 꼬이던데.

“빨리 대표님과 회장님이 딸이 누군지 알았으면 좋겠네요.”

“그쵸. 요즘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드라마는 중간에 연장을 했다. 채언이 요즘 보고 있는 부분이 연장 후 스토리가 조금 늘어지는 구간이었다. 지루한가. 밥을 떠먹은 채언이 영웅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지금 보고 있는 드라마가 끝나면요.”

입안에 들어있는 음식을 꼭꼭 씹어 넘긴 채언이 말했다.

“네.”

밥을 다 씹은 채언은 입술 안쪽 살을 잘근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영웅은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채언은 제일 가까이 놓여있는 반찬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영웅이 출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을 때 채언은 현관 벽에 기대서 있었다.

“다녀올게요. 채언 씨.”

구두를 신은 영웅의 말에, 벽에 기대고 있던 어깨를 뗀 채언이 대답했다.

“다녀오세요. 사….”

말끝을 흐리다 끝맺음할 타이밍을 놓친 채언이 다시 입가에 미소를 장착했다. 영웅은 또 무의식적으로 하얀 볼을 쳐다보았는데, 채언은 영웅이 흐린 말끝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줄 알고 급히 머리를 굴렸다.

“저기, 제가…….”

“네?”

채언의 눈 밑을 보고 있던 영웅이 시선을 조금 올렸다.

“호칭을 여러 가지로 불러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영웅은 사범님이라는 호칭에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아. 그랬죠.”

“혹시 이런 건 어떠세요.”

“어떤 거요?”

채언의 머릿속에 집주인이나 사장님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전자는 너무 딱딱했고, 후자는 이미 사용했던 것이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채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새로운 호칭 두 가지가 떠올랐다.

“대표님이나 회장님이요.”

“그거 바둑이죠!”

아. 바둑이였구나. 채언은 등 뒤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 드라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 호칭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영웅은 대표님을 선택했다.

채언의 배웅을 받고 기분 좋게 현관 복도를 걷던 영웅은 바닥에 비닐우산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몸을 뒤로 돌려 탁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복도를 다시 뛰어 돌아갔다.

“채언 씨!”

“네?”

영웅이 부르는 소리에 집 안 복도를 걸어가던 채언이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오며 대답했다.

“밖에 우산이 펼쳐져 있는데요.”

사실 그건 별것 아니었고 채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보고 싶어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제 쓰고 말려놓으려고 거기다 펼쳐놨어요. 거슬리셨죠. 지금 치울게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영웅이 대답하기도 전에 채언은 실내화를 벗고 현관 바닥에 놓여있던 운동화를 신었다.

“아.”

축축해서 신자마자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왜 그래요. 안에 돌 같은 게 들어있어요? 어, 그러고 보니 왜 신발이 여기 있죠?”

“그게, 어제 비를 맞고 신발이 젖어서요. 신발장 안에 넣어두기가 좀 그래서 꺼내놨어요.”

“어어? 이 안에 신발 말리는 머신 있어요. 채언 씨.”

채언은 축축한 신발에 마저 발을 끼워 넣었다.

“제가 사용법을 몰라서요.”

젖어있어 약간 뻑뻑하게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영웅이 신발장을 열고 신발 제습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용법 알려 줄게요.”

영웅은 제습기의 전원을 켜는 방법부터, 사용하고 끄는 방법까지 채언에게 차근히 설명해주었다. 어렵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한번 사용해볼게요.”

영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젠 정말 가야겠어요.”

이상하게 오늘은 현관에서 미적거리고 싶었다. 영웅은 아쉽게 무릎을 폈다.

“갈게요. 채언 씨.”

“네. 대표님.”

새로운 호칭은 전의 것보다는 채언의 입에 잘 붙었다.

영웅은 현관 복도를 걷는 도중 의문이 들었다. 채언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왜요?”

“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에 살짝 옆을 돌아본 영웅은 복도에 펼쳐놓은 우산을 접고 있던 채언과 눈이 마주쳤다.

“으음… 엄브렐라… 우산.”

그는 목덜미를 만지며 딴청을 피우느라 채언이 작게 입으로 자신의 발음을 따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영웅이 다시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또다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영웅은 길쭉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문을 밀었다. 채언이 팔을 뻗어 열린 문을 같이 밀었다. 영웅의 등에 채언의 몸이 살짝 닿았다가, 그가 밖으로 나서는 바람에 떨어졌다. 순간 영웅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채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찔러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다녀오세요.”

현관문을 어깨로 버티고 선 채언이 아까 신발장 앞에서 했던 인사를 다시 한번 건네왔다. 등을 보인 채 인사를 받은 영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네.”

채언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길쭉한 모양의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어깨로 문을 밀고 있었다.

“들어, 들어가요. 채언 씨.”

“네. 그럼… 아! 안쪽에서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놓을게요.”

채언은 눈인사를 하고도 문을 잡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얘기를 하며 살짝 웃어 보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찾았던 보조개를 본 영웅은 닫힌 문을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하늘이 흐린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제 천둥이 칠지 몰라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기 전이나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영웅은 어젯밤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는 그가 어릴 적 이곳에서 가족들과 잠시 살았을 때까지만 해도 방 이름에 걸맞은 용도로 쓰이던 곳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소리가 새어 들어오지 않게 방음 처리를 새로 한 곳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어제처럼 천둥이 치거나 해서 시끄러운 밤에 영웅이 잠을 자기 위해 만든 방이었다.

가족들 외에는 서재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 영웅은 오랜 시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몇 년 전. 친구가 프러포즈 이벤트를 도와 달라는 말에 그와 친구들이 레드펠터 센터의 스케이트장에 모였다. 친구 한 명은 유독 그 자리에 오기 싫어했는데, 결국은 참석했다.

‘라이언, 스케이트장 입구에서 우릴 찍어줘. 꽃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제이슨은 저쪽 반대편 입구. 우리가 어디로 나갈지 모르니까.’

라이언은 동쪽, 제이슨은 북쪽 입구에 서서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자신들만 아는 웃긴 표정을 지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본격적인 프러포즈의 순간 직전까지 서로의 얼굴을 화면에 담아 프롤로그 비슷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이 영상은 루크가 사라에게 프러포즈하는 순간을 담기 위해 찍고 있는 겁니다. 사라가 승낙하는 순간 다들 축하해줬으면 좋겠다고, 루크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던 친구들을 모아서 데려왔어요. 이 순간을 위해 그가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저기! 제이슨이 루크가 저에게 와달라고 부탁할 때 짓던 표정을 하고 있네요.’

라이언은 눈썹을 찌푸렸다가 웃었다 하며 우스운 표정을 짓는 제이슨에게 줌을 당겼다. 하하 웃은 뒤에는 스케이트장 내부, 사람들에 묻혀 숨어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았다.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이었다. 라이언과 제이슨 외의 친구들은, 청혼하는 당사자가 얼음 바닥에 무릎을 꿇는 순간을 찍기 위해 빙판 곳곳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게일은 오늘 모셔오기 참 힘들었어요. 컨디션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결국 와줬네요. 하이스쿨 때부터 사라를 엄청나게 아꼈거든요. 그래서 아빠의 마음으로 속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둘은 베스트 프렌드라고 할 수 있죠. 루크에게도 좋은 친구예요.’

어느 정도 영상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곁다리 장면을 찍고 나서, 라이언은 사라와 루크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루크가 준비했던 반지를 꺼냈을 때 뷰파인더 가득 그들의 모습이 담겼다. 마침내 구경꾼들의 입에서 축복하는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을 땐 화면 속 세상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는 카메라 대신 총을 빼 들었다.

타앙- 탕!

타당- 탕! 탕!

비슷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환호성이 비명으로 바뀐 것은 찰나의 정적이 지나간 뒤였다.

혼자서 고백도 하지 못하고 상대를 빼앗겼다는 일방적인 질투. 프러포즈를 승낙한 순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열등감. 고작, 혼자만의 음침한 치정 싸움에 얼음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얇게 번지기 시작한 피는 금방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던 탓에 쉽게 현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스케이트 날에 얇게 언 피가 얼음과 함께 갈렸다.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총을 든 이는 자신이 알던 얼굴을 발견하는 족족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격발하는 순간 총구에서 불빛이 비치다 사라졌다.

감정은 마음에서 발화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태운다. 쉽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 되기도 했다. 때때로 그것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는 괴물이 되었다. 질투와 열등감은 제련되지 않은 쇠와 같아서 잘 무두질 하면 좋은 쪽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잘못하면 녹슨 칼이 되어 찌르는 것마다 상처 입혔다. 살짝만 스쳐도 곪아들어 돌이킬 수가 없었다.

라이언은 뷰파인더를 통해 그 장면을 목격했다. 게일이 녹슨 칼로 자신을 찌르고 또 다른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빼든 그 순간을.

라이언은 공간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비명과 스케이트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공간 전체를 울리는 총소리가 뒤섞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살인마의 몸을 제압해 빙판 위에 쓰러트렸을 때는, 라이언의 몸이 도망치는 사람들과 자신 아래 깔려 몸부림치는 이의 스케이트 날에 곳곳을 긁힌 상태였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총을 든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고 있었다. 차가운 공간이었지만 라이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미쳤어! 이 개자식아!’

소리치는 라이언의 말도 이미 정신이 나간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몸싸움을 벌이는 짧은 순간 라이언은, 유독 이곳에 오기 싫어했던 게일의 굳어진 얼굴을 떠올렸다. 라이언의 밑에 깔려 몸을 버둥거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마주 욕을 해오던 그가 발을 들어 스케이트 날로 라이언의 허리를 여러 번 찍었다. 코트가 찢어지고 그 사이로 살이 베었다. 결국, 라이언은 잡고 있던 게일의 손목을 놓쳤다. 빙판 위로 몸이 밀려났고, 다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비명.

경찰과 안전요원들이 소리치는 말들.

타앙- 탕! 탕! 공간 전체를 울려 고막에 닿던 소리.

이미 피가 낭자한 얼음 위로 라이언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라이언은 기절하기 전에,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친구가 사살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는 레드펠터 센터 사건이 대대적으로 뉴스를 타고 나간 후였고, 친구들의 장례가 연달아 치러진 후였다. 라이언 외에도 생존자는 여럿 있었지만, 그가 알던 얼굴 중에 살아난 사람은 제이슨 한 명뿐이었다. 제이슨은 총소리가 울렸을 때 라이언처럼 스케이트장 입구에 서 있었다. 덕분에 현장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친구들을 돕지 않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수술 후 회복 중인 라이언의 병문안을 오면서 나날이 수척해진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뉴스에서 범인과 피해자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라이언과 제이슨 둘 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얼마간은 환청이 들리고 환영이 보일 정도로 심각했다. 그래서 라이언은 한동안 자신이 귀신을 보는 줄 알았다. 영안이 트인 건가 허무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상담을 받고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라이언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괜찮아?’

‘그냥.’

‘좀 어때?’

‘그럭저럭. 버틸 만해.’

‘오랜만이다. 다음엔 펍에서 볼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괜찮지?’

‘나쁘지 않아.’

‘그럼 다행이네.’

둘은 가끔 만나면 평범한 대화를 했다. 라이언은 괜찮아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죄책감에 시달리던 제이슨은 아니었다.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었음에도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그다음 해 친구들의 기일이 몰려있던 주에 제이슨은 자살했다.

‘괜찮지?’

‘XXX XX.’

‘그럼 다행이네.’

‘괜찮지?’

‘XXX XX.’

‘그럼 다행이네.’

라이언은 제이슨이 했던 말 그 사이에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여전히 좋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그를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에 빠져들고, 빠져들다 보니 라이언의 상태는 리셋되었다.

혼자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웠던 친구를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걸 알아야 했는데. 그 또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이 더해진 상태였다. 다시 1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후에도, 망가졌던 시간은 라이언의 삶에 흔적을 남겼다. 이름을 바꿔야 했고, 그의 얼굴과 예전 이름이 실린 기사는 대부분 돈을 들여 삭제했다. 아픈 사람을 보면 긴장했고, 과할 정도로 책임감을 느꼈다. 큰소리를 싫어하게 됐다. 갑작스레 울리는 경고음이나,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는 폭력적인 장면 또한 마찬가지였다. 버릇은 성격처럼 굳어졌다.

혼자 있을 때, 때때로 괴로워서 환영을 볼 것 같을 때, 그는 차라리 귀신이 정말 있는 건지 확인하듯 혼잣말을 하고는 했다. 나와 보라고 말했을 때 아무것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으니까.

앤드류. 새로 가지게 된 이름을 스스로 읊어보며 세뇌하듯 적응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전의 자신을 몰랐으면 했다.

많이 괜찮아졌으나 끝내 미국에 남지 못한 이유는 언제 다시 총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적어도 한국은 미국보다 안전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흐린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제 총소리를 닮은 천둥이 칠지 몰라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들리는 핸드폰 알림음, 초인종 소리, 빵이 튀어 오르기 직전의 토스터기 소리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귀에 거슬릴 뿐, 정신을 갉아먹는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싫어하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은 달랐다. 하지만 비가 오기 전이나 후에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채언이 이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달, 영웅은 자주 미국에 다녀와야 했다. 연이어 이어지는 친구들의 기일이 그를 바쁘게 만들었다. 일부러 휴가를 사용하지 않고 비행기에서 대부분의 휴일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많이 안정된 상태였지만 혹시 몰랐다. 그 시간 동안 몸이라도 피곤하게 만들지 않으면 영웅은 자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화요일, 목요일을 피한 어느 날마다 가끔 상담을 받으러 가고는 했다. 그럴 때면 일찍 퇴근해서 시간을 활용했다. 유동적이었지만 보통의 퇴근 시간 내에 집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눈을 뜨는 순간까지는 괴로웠으나, 오랜만에 비가 와도 기분이 괜찮았다. 긴장하기는 했지만 좋았다.

최근 몇 년간 그를 긴장하게 했던 것은 대부분 좋지 않은 쪽에 속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방금 영웅이 긴장했던 것은 기분 나쁜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띵-. 문이 열렸습니다.

채언이 잡아둔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웅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던 탓에 현관문 앞 센서등이 꺼졌다.

한참 후 천천히 발을 떼고 움직이는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켜진 현관 앞 센서등이 아무도 없는 장소를 환히 비추다가 꺼졌다.

2권에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