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2)

6.

“그럼 마지막 날 회식 참석 가능하신 분들은, 아까 말씀드린 식당 예약시간 전까지 메시지 주세요. 오늘 수고하셨고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봬요.”

짐을 챙긴 수강생들이 조리실을 빠져나갔다. 채언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수강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따끈한 반찬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학생. 학생은 회식 참석할 건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마지막 날 같이 저녁이나 한 끼 하지.”

채언은 천둥 치던 날 밤을 떠올렸다. 혼자 빈 식탁에 앉아 영웅을 기다렸었다.

“제가 없으면 집에 있는, 음, 혼자 밥을 먹어야 해서.”

“아아. 그렇지. 아까 결혼을 했다고 했나?”

“아뇨! 결혼 안 했어요.”

당황한 채언은 양손을 저으며 교수의 말을 부정했다.

“그냥, 같이 사는 분이 계셔서요.”

교수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채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요즘은 참 빠르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빠르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채언은 이번에도 잘 넘겼다고 생각하며 가방을 멨다. 두 사람은 나란히 조리실을 빠져나왔다.

“교수님은 회식 참석하실 건가요?”

“나야 참석하고 싶지만, 좀 그렇지.”

“왜요?”

“학과 행사 뒤풀이도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잘 안 가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언은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제가 대학을 안 다녀봐서요.”

“대학 얘기까지 나올 게 뭐 있어? 젊은 사람들끼리 노는데 나 같은 사람이 끼면 불편하잖아.”

“그런 자리는 아닌 것 같던데요.”

“학생도 참석 안 한다고 했으면서.”

교수는 팔꿈치로 채언의 옆구리를 톡톡 치며 웃었다. 채언은 머쓱하게 따라 웃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건물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각자 걸어갈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학생.”

채언이 인사를 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핸드폰 알림 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교수는 지갑형 케이스 뚜껑을 열고 문자를 확인했다.

“아이참. 딸한테 문자 왔네. 배고프니까 얼른 오라고.”

귀찮다며 투덜거리는 말투와 달리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얼굴이 다정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채언이 인사하자 교수가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채언은 깨와 오이를 싫어한다는, 얼굴도 이름도 모를 사람을 부러워하는 자신이 씁쓸해서 뛰듯이 걸어야 했다.

숨이 가쁘게 걷던 중에 채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자리에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낸 채언의 표정이 굳어졌다.

[010-87xx-xxxx: 연락한다고 했잖아.]

건영에게서는 꾸준히 연락이 오고 있었다. 차단했냐고 묻는 문자 후에 전화가 몇 번 왔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마 건영은 통화 연결음을 듣고 자신이 차단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채언은 건영에게 답장을 하지도, 번호를 차단하지도 않고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한동안 포도 농장이나 하늘의 집에 방문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건영은 마음먹으면 자신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영의 처지에서 본다면 자신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떠난 것이 맞으니 이렇게 연락을 해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왔어요?”

현관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영웅이 채언을 반겼다.

전에 한번 채언은 매번 타이밍 좋게 이곳에 서 있는 영웅이 신기해서 물어보았다. 혹시 퇴근하고 내내 복도에 서 있는 것이냐고. 문 열리는 소리가 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반겨주는 것인지. 그랬더니 영웅은 자기가 감이 좋은 편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채언은 아마도 그가 이 시간대쯤 현관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듣고 나오는 것일 거라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혹시 오늘 급하게 왔어요?”

“네? 그걸 어떻게…….”

정문 앞까지 거의 뛰듯이 걸어온 채언이었다.

“그냥. 그랬을 것 같아서요. 배고팠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요. 대표님 배고프실까 봐요.”

채언은 어쩌면 그가 정말 감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영웅은 채언이 돌아올 때쯤 정문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밖을 구경하다가, 멀리 그의 모습이 보이면 현관 앞으로 와서 대기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혼자 있는 집에서는 할 일도 없었다.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다음부턴 천천히 와요.”

영웅은 채언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채언은 잠시 숨을 멈췄다. 퇴근하고 들어와서 바로 샤워를 한 것인지 영웅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자주 맡아왔지만,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향기였다. 하지만 지난번 같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부터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날. 잠들기 전에도 보드랍고 폭신한 영웅의 침구에서 좋은 향기가 났는데, 개운하게 정신이 들 무렵에는 누워있는 자리가 더 포근하고 따끈해진 것 같았다. 너무 편해서 눈을 뜨기 싫을 정도였다. 하지만 채언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복도 끝 방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긴 속눈썹을 곱게 내리깐 채 잠들어 있는 영웅이었다. 왜 같이 누워 자고 있지. 방금 막 일어난 채언은 눈앞의 상황이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얼마간 더 잠든 영웅의 얼굴을 보고 있던 채언은 그가 아침때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외출할 때 뿌리는 향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딜 나가려다가 그대로 누워 잠이 든 듯했다. 깊게 잠들어 체온이 올랐는지, 옆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따끈했다. 자신이 베개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영웅은 팔을 베고 누워있었는데 잠에서 깰 때쯤에는 팔이 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살짝 깨워 베개를 머리 아래 집어넣어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대표님.’

큰소리로 깨우면 영웅이 놀랄 수도 있으니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긴 속눈썹 사이로 가늘게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베개 드릴게요.’

채언은 커다랗고 폭신한 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영웅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영어를 웅얼대기 시작했다. 엘리를 부르는 것을 보니 미국에서 키우던 강아지 꿈을 꾸는 중이거나 거실에 있는 스피커를 부르는 꿈을 꾸는 중인 듯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던 초록 눈동자가 금방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이리와 엘리.>

영웅은 눈을 감은 채 팔을 벌렸다. 눈앞을 얼쩡거리던 검은 털을 가진 따끈한 생명체를 붙잡아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건 나중에 가지고 놀자.>

몸 사이를 가로막는 베개는 옆으로 던져버린 채였다.

영웅이 부모님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면, 엘리는 영웅이 누워있는 침대로 뛰어 들어와 놀아달라고 몸을 비비적거리고는 했다. 좋아하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있는 대로 물고 와서 늘어놓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침대 위가 장난감 가게라도 된 듯 어지럽혀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기 전에 품에 안고 예뻐해 줘야 했다.

그래서 영웅은 원래 하던 대로, 커다란 손으로 보드라운 털을 마구 헤집어주었다.

한참 만에 새집이 된 머리로 영웅의 방을 빠져나왔던 낮을 떠올리며 채언은 슬리퍼에 발을 밀어 넣었다. 영웅과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모레가 마지막 수업이라고 했죠?”

“네.”

“아쉽겠어요. 다른 분들이랑 친해졌을 텐데.”

“조금요.”

밑반찬 만들기 수업의 수강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이대 상관없이 그렇게 어울려볼 일이 또 있을까 싶긴 해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특별한 걸 만드나요?”

복작복작한 수업 시간을 떠올리던 채언은 영웅의 말을 듣고 젓가락으로 밥알을 찌르기 시작했다.

“간단한 걸 만들기로 했어요. 가방에 들고 다니기 편한 거로요. 끝나고 회식을 하러 가기로 했거든요.”

“오. 다들 정말 친해졌나 봐요.”

영웅의 회사에서는 저녁 회식을 하지 않았다. 강제 회식 대신 직원들에게 복지비용을 충분히 지급했기 때문에 퇴근 후에 따로 모여본 적이 거의 없었다.

“네. 다들 친절하시거든요.”

“그럼 목요일엔 좀 늦게 들어오겠네요?”

“아뇨. 전 안 갈 거라 평소처럼 들어올 거예요.”

채언의 말에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가요?”

밥알을 괴롭히고 있던 채언의 손이 멈췄다.

“혼자 저녁 드셔야 하잖아요.”

“어. 나 때문에 안 간다는 거였어요?”

눈이 동그래진 영웅과 마주친 채언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조금 떠올렸다.

“그런 자리는 많이 가보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요.”

“괜찮은데. 다녀와요. 채언 씨.”

채언은 밥알을 입에 넣으며, 웃으며 회식을 권하는 영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녁 혼자 드셔도 괜찮으세요?”

“네!”

잠시 말없이 입안에 든 밥알을 씹고 있던 채언은 작게 입을 열었다.

“정말. 혼자 드셔도 괜찮으신 거죠…….”

“난 전혀 상관없어요!”

채언은 얼마 되지 않는 밥알을 삼키는 게 힘들었다. 한참 만에야 입안에 있는 것을 목 뒤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난 목요일에 수영이나 해야겠어요. 저번에 새로 산 것도 사용해 볼 겸.”

채언의 쇼핑백을 찾아 가지고 온 날. 영웅은 자신이 사용할 새로운 수영 물품을 함께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새로운 게 또 생겼으니, 저번에 빌려주었던 것들을 돌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빌렸던 것들을 세탁한 뒤 차곡차곡 정리해 영웅에게 돌려주었던 채언은 준 것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얼떨결에 수영용품이 두 세트가 생긴 채언은 쇼핑백에 든 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저도 수영하러 가고 싶은데…….”

눈을 굴리던 채언이 웅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를 캐치한 영웅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내일 다녀올래요?”

목요일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내일도 좋았다.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 어떻게 찍고 들어가는지 알죠? 내일 낮에 다녀와요. 채언 씨. 낮에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거든요.”

영웅은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하고 오라며 여러 가지 기구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밥알을 씹는 채언의 표정은 점점 시무룩해져 갔다.

저녁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영웅은 한참이나 소파에 앉아있었다. 의미 없이 틀어놓은 스포츠 채널에서는 자책골을 넣은 축구선수의 영상이 한참이나 반복되어 나왔다. 거실에 홀로 남은 영웅은 팔짱을 낀 채, 그날 경기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했다.

다음 날. 채언은 수영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청소를 하고 방에서 선인장을 가지고 나왔다. 커다란 화분이 높인 거실 창 앞에 앉아서 작은 선인장에 햇빛을 쐬어주었다. 어젯밤에도 건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010-87xx-xxxx: 형한테 줄 게 있단 말이야.]

이 정도 무시했으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연락해오고 있었다.

[010-87xx-xxxx: 왜 갑자기 서울로 떠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날 왜 보기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알겠으니까 이것만 받아줘 형.]

건영이 자신에게 뭘 주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집을 떠나오던 날 필요한 짐을 모두 챙겨왔으니 딱히 받을 만한 것도 받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채언은 건영이 알아서 지쳐 떨어질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인장 옆에 앉아 하늘을 보던 채언은 날이 많이 따듯해졌다고 느꼈다. 해는 전보다 일찍 뜨고 늦게 졌다. 찾아보니 선인장은 햇빛을 충분히 받지 않으면 이상한 모양으로 자란다던데, 옆에 놓인 작은 선인장은 머리 위의 만두가 조금 자라, 귀여운 토끼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채언은 보송보송한 가시가 난 선인장 위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대표님: 채언씨 수영장 갔어요?]

영웅은 곧바로 수영하는 사람 모양 이모티콘을 하나 더 보내왔다. 오늘 아침에 수영장에 갈 거냐고 물어오길래 고민 중이라고 대답했더니 점심쯤이 되어서 또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아뇨. 오늘은 그냥 집에만 있으려고요.”

채언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내일 저녁에 오래 나가 있을 예정이니 오늘은 집에서 가만히 쉴 예정이었다. 애초에 수영을 잘하지도 못하니 혼자 수영장에 가봤자 물장구만 몇 번 치다 말게 뻔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짧게 알림음이 울렸다. 답장이 이렇게 빠른 사람이 아닌데. 혹시 또 이모티콘만 잔뜩 보냈나? 열심히 핸드폰을 두드렸을 영웅이 생각나 채언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010-87xx-xxxx: 형이 어디 사는지 알아.]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핸드폰을 쥔 채언의 손이 떨렸다. 메시지가 하나 더 온 탓이었다.

[010-87xx-xxxx: 형이 정말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 주소가 그런 곳으로 적혀있는지 모르겠어.]

한참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채언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계절이 한참 지난 트리는 여전히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달고 서 있었다. 영웅이 자주 앉아 TV를 보는 소파와 조용한 클래식 벨이 울리는 인터폰. 함께 앉아 식사하는 식탁. 그리고 다시 자신의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래. 만나자.]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건배하며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자. 마셔요. 마셔!”

채언은 맥주잔 겉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2차로 온 호프집은 전에 일했던 곳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직장인이나 중장년 모임을 타깃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안주도 괜찮았고 클럽에서 틀법한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런 장소에 앉아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술잔을 쥐고 앉아있으려니 어색했다.

1차 회식 장소는 불고기 전골집이었다. 수강생 전원이 참석해서 맥주 한두 잔을 곁들여 화기애애하게 저녁을 먹었다. 슬슬 분위기가 정리되어갈 때쯤 2차 이야기를 꺼낸 것은 교수였다. 다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대로 헤어지려니 참 아쉽다며, 장황하게 2차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해서 자리가 늦어지는 것을 꺼리던 직장인들까지 교수의 말에 홀리기 시작했고 결국 수강생들 대부분이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지난번,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기 겸연쩍어하던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의 교수를 보며 채언은 어리둥절했다. 몇 사람이 불고기 전골집 앞에서 손을 흔들고 집으로 돌아갈 때 채언도 빠져나가려 했으나, 교수가 자연스럽게 옆에 끼고 보내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집에 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었으나,

‘학생은 꼭 같이 가야지. 여기서 나랑 제일 친한 게 학생인데.’

라는 말에 채언의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1차 회식만 해도 그랬다. 참석하겠다는 메시지를 밑반찬 만들기 선생님에게 보냈을 때, 잘 생각했다는 답장이 왔다. 교수가 채언 학생은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없었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는 것이었다.

자리를 옮기면서 영웅에게 귀가가 늦어질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내놓았는데 답장이 없었다. 답장을 기다리느라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더니 옆에서 누구 연락을 기다리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채언 씨. 혹시 여자친구 연락 기다리는 거예요?”

“그게.”

테이블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같이 사는 분이요.”

동거하는구나. 아무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몇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술 드실 분?”

“저요. 지금 당장 마시고 싶네요.”

답장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던 채언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메시지 알림음을 꺼놓았다.

“어? 채언 씨. 술 안 드세요?”

술에 취한 사람은 대부분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었다. 누군가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채언에게 쏠렸다. 눈을 굴리던 채언은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젊은 수강생 몇몇은 그 모습을 보며 테이블 아래서 옆 사람의 허벅지를 퍽퍽 쳤다. 나름 친한 사람끼리 붙어 앉았기 때문에 서로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배가 불러서요. 이제 맥주는 좀… 천천히 마실게요.”

“그렇지. 맥주가 배가 많이 부르지.”

옆에 앉아있던 교수는 채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주량은 아직 괜찮은가?”

“네. 취한 건 아니고요.”

인자한 물음에 채언은 이 정도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면.”

“네.”

“소주를 마시면 되는 거지.”

“네?”

채언 앞에 놓여있던 빈 소주잔에 소주가 콸콸 부어졌다. 표면장력에 의해 둥글게 채워진 소주가 넘칠 듯 찰랑거렸다.

늦어도 1시까지만. 그때는 자리를 파하자고 제한을 걸어두었더니, 사람들이 잔에 술을 따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늦게까지 마실 건 아니니까, 하는 생각에 다들 마음이 풀어진 것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수강생들은 전보다 편하게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커지다가도 작아졌고 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옆자리 사람과 소곤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로 수업 끝이라니까 정말 아쉽네요. 요즘 집, 회사, 집, 회사 반복하느라 취미 생활할 것도 없었거든요.”

“저도요. 사실 처음에는 집에서 매번 반찬 해 먹는 것도 일이라, 수업 들으면서 집에서 할 일 같이 해치우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점점 수업하러 오는 게 재미있어진 거 있죠.”

소주를 홀짝이던 채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직장 때문에 여기로 이사 오느라 친구도 제대로 못 만났거든요. 연락하는 게 고향 친구들뿐이라 좀 외로웠는데. 이렇게 사람 만나니 좋더라고요.”

다 같이 건배를 몇 번 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러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어 앉는 자리가 몇 번 바뀌었다.

“돈은 벌고 있는데 쓸 시간이 없어요. 휴가도 눈치 보면서 써야 하고.”

조금 전 집과 회사만 번갈아 다니느라 힘들다는 고충을 털어놓은 직장인 수강생이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저만 여름휴가 기다리는 거 아니죠?”

그 말에 여기저기서 외국 도시 이름이 튀어나왔다.

“전 태국에 갈 생각이에요. 발리 가고 싶은데 거긴 돈이 안 돼서.”

“사실 휴가 기간도 기간인데 돈도 문제예요. 저는 유럽 가보고 싶은데 거기 물가 완전 미쳤잖아요.”

“맞아요. 제 친구가 공무원 시험 붙고 바로 유럽 여행 갔거든요. 이 주? 유럽 도는데 몇백 깨졌다더라고요. 어디 어디 갔다 그랬지? 파리, 스페인, 스위스, 영국인가.”

“아. 저도 유럽 여행 가는 거 로망이었는데. 취직하기 전에 빚내서라도 한번 다녀올 걸 그랬어요. 현실은 내일 출근이고요. 으아. 죽고 싶다.”

“회사 얘기 하지 마세요. 저도 죽고 싶어요.”

채언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혼자 소주를 따르기 위해 병을 잡았다. 잔에 술을 어느 정도 채우고 병을 내려놓는데 앞에서 팔이 뻗어왔다.

“퉁!”

잔 위를 손가락으로 치며 낸 소리에 가라앉은 눈으로 술잔을 보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요?”

“어. 이거 우리 동네에서만 그러나? 자작하면 재수 없다잖아요. 근데 이렇게 술 따른 사람이 마시기 전에 퉁! 하면 괜찮다고 친구들끼리 그러거든요.”

신이 나서 설명하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제가 입 닿는 부분에 너무 마음대로 그랬죠?”

“아뇨. 제가 정말 이게 뭔지 몰라서 여쭤본 거예요.”

채언은 작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잔을 톡 쳤다.

“다행이다. 근데 채언 씨 모르는 거 보면 이거 정말 저만 아는 거예요? 설마.”

그러자 옆에서 자연스럽게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도 대학생 때 자작하는 애들 있으면 자주 그랬어요.”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그럼 혹시 막잔 마시면 애인 안 생긴다고, 그런 것도 전국 공통 맞죠?”

“네. 그래서 다들 막잔 안 마신다고 술을 병 바닥에 깔아놓고 새것 시키고 또 시키고 그랬다니까요. 대학생 때는 술 마시는 거에 뭐가 있었나 봐요.”

“대학교 이야기하십니까? 그럼 내가 안 낄 수가 없는데.”

“어. 교수님.”

전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교수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채언은 계속 테이블에 앉아있었음에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녹아들 수가 없었다.

“학생. 이제 술이 막 잘 들어가나 봐.”

술을 따라주면 연거푸 비워내는 채언을 보며 교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오랜만에 제대로 술잔을 주고받을 사람이 생겨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2차 술자리 계산은 자신이 하겠다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수강생들은 처음에는 환호했지만, 계속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교수와 채언의 앞에 늘어가는 술병에 질색하고는 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학생. 자! 한잔 더 해.”

“네. 그런데,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요. 저 학생 아니에요.”

채언은 점점 술기운이 올랐다.

“기억하지 그건.”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부르는 거냐고 물음표를 단 까만 눈이 깜빡거렸다.

“교수님 주변에는 저처럼 대학교 안 나온 사람이 별로 없죠?”

“왜 없겠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마다 사정이 다 다르니까.”

“그럼 왜 저한테 학생이라고 하세요?”

“그게 입에 붙어서 그런 건데, 혹시 기분 나빴나? 그러면 내가 바로 사과하지.”

“아뇨. 그냥, 제가 학생이 아니라서요. 제가 그렇게 불리면 진짜 학생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채언의 잔에 술을 따라주려던 교수가 병을 기울이던 것을 멈췄다. 대신 물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런 걸 가지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요즘 애들 말로 하면 꽈배기보다 더 꼬인 사람이지.”

교수는 자신의 앞 접시에 따끈한 국물을 한 국자 따른 뒤 채언의 앞 접시에도 국물을 따랐다.

“자. 물도 마시고 안주도 먹고.”

“감사합니다.”

교수는 채언이 물컵을 비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한잔 따라주었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긴 한데. 그래서 물어보기가 더 조심스럽고.”

채언은 조용해진 교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혹시 학생은 배우고 싶은 게 있었는데 대학을 안 간 건가?”

“…그냥. 막연히요. 어느 과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아무 언어나 배우고 싶었던 때는 있었어요.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는 채언을 보던 교수가 소주병을 들었다.

그 뒤로 교수와 채언은 다시 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네. 네. 아 정말요? 채언은 교수가 하는 말에 열심히 대답했다. 중간에 교수가 채언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었는데, 대표님에게 메시지가 와 있다며 서둘러 연락처 저장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한참 전에 온 메시지였다. 채언은 술기운 때문에 흐린 눈에 힘을 주고 화면을 두드렸다.

“채언 씨, 젓가락 떨어졌어요.”

“제가, 그거를 이따가 꼭 주울게요.”

옆에서 하는 말에 대답을 해주면서, 오타 없이 자판을 누르려고 몇 번이나 삭제 버튼을 눌러야 했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채언은 다시 교수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언의 핸드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학생, 직장에 문제 생긴 거 아니야? 아까는 대표님한테 메시지가 오더니 이번에는 전화가 오네.”

교수의 말에 다른 대화를 하고 있던 시선들이 채언에게로 쏠렸다.

“이 시간에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고요? 상사한테?”

“채언 씨. 어떡해요. 진짜 무슨 일 난 거 아니에요?”

“맞다. 아까 채언 씨 대표님 뭐라 뭐라 그러면서 메시지 보냈잖아요.”

“아. 그런 건, 아니에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쥔 채언은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원래는, 잘 전화는 안 하는 분인데. 맨날 메시지, 만 보내는데.”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취해서 어눌해진 발음으로 말을 남긴 채언은 호프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채언이 나가자 남아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대표가 미친 거 아니야? 맨날 메시지 보낸대요. 와! 저 상사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채언 씨 어떡해.

밖으로 나온 채언은 호프집 벽에 등을 기댄 채 전화를 받았다.

-채언 씨?

“네에.”

-술 많이 마셨나 봐요.

“조금요.”

-조금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많이.”

풀린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채언은 손가락을 들어 지금까지 비운 술병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채언 씨.

손가락을 접다가 영웅의 목소리가 들려서 처음부터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내 말 들려요?

“잠시만요. 제가, 이걸 세, 어야 해서.”

다시 하나, 둘.

-거기 어디예요? 데리러 갈게요.

“여기 그냥, 호프집인데요.”

-가게 이름 뭔지 알아요?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죄송해요. 사과한 채언은 한숨을 쉬고 쭈그려 앉았다.

영웅은 급히 옷을 걸쳐 입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걸어도 자꾸만 한 시에 집에 가겠다고 동문서답하는 채언을 살살 구슬려 가게 간판을 찍어 보내게 했더니 흔들린 사진이 여러 장 도착했다. 그나마 간판 글씨를 식별 가능한 한 장을 건져서 다행이었다. 차에 시동을 건 영웅은 인터넷에 간판명을 검색해 알아낸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곧바로 출발했다.

채언 없는 저녁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잠시 피트니스 센터에 다녀왔는데, 자리를 옮겼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더 늦어진다는 뜻이었다. 억지로 시간을 보냈는데도 혼자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실망감이 들었지만, 채언도 자기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회식에 다녀오라고 권장하기까지 했으니 실망한 티를 내지 않고 답장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메시지 하나로는 부족했다. 자꾸만 언제 들어오냐고 묻고 싶어져서 참고 참다가 몇 개를 더 보냈다. 하지만 한참이나 답장이 없었다.

밤은 늦어가고 마침내 날이 지났다. 창가에 이마를 대고 밖을 보다가,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가, 물을 한 잔 마셨다가, 소파에 앉아 앨리와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식탁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있던 참이었다. 드디어 답장이 왔다. 그런데 채언의 메시지를 해석할 수가 없었다. 분명 글자 하나하나가 정확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번역기를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채언은 단단히 취한 것 같았다. 그래서 곧바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서울에는 차를 댈 곳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건물 주차장마다 만차 상태였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차 댈 곳을 찾아 골목을 돌던 영웅은 목적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료주차장을 발견했다. 다른 유료주차장보다 가격이 비쌌지만, 나중에 금액이 어떻게 나올지는 신경 쓰지 않고 주차를 했다. 곧 한 시였다. 혹시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채언이 자리를 떠날까 봐 영웅은 마음이 급했다.

핸드폰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뛰어서 호프집 앞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다른 사람의 손이 끼어들었다. 거친 숨을 내쉰 영웅이 옆을 돌아보았다.

“앨리스 님?”

“죄송해요. 저희 아빠가 진짜 주책이라. 너무 부끄럽네요.”

앨리스. 본명 송지영은 자신의 부친 송병규 교수를 대신해 영웅에게 사과했다. 사과해야 할 대상은 교수와 술잔을 주고받은 채언이었지만, 그는 이미 만취 상태로 영웅에게 들려있었다. 자리를 파하고 다른 수강생들이 손을 흔들며 흩어질 때까지는 어찌어찌 정신을 잡고 있더니 마지막 안녕히 가세요, 를 마지막으로 고개를 떨군 것이었다.

“오늘은 적당히 마시라고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저희 아빠가 이래요. 오죽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킬… 하아.”

“어허. 지영아 내가 오늘은 그러지 않았대도.”

혼자 소주 몇 병을 해치워놓고 조금도 취하지 않은 교수는 뒷짐을 지고 엄한 척을 해 보였다.

“아빠, 조용히 해요. 우리는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거든요. 저분 취한 거 안보여요?”

송병규 교수는 한국 대학교 철학과 정교수로, 학생들에게 킬러B(킬러 병규)로 불렸다. 어지간해서는 A를 주지 않고 B를 뿌려대 학생들의 성적을 킬 해버린다는 의미와 드문 일이지만 강의 내용에 대해 태클을 거는 학부생이 있으면 토론 배틀을 걸어 킬 해버린다는 의미가 담긴 별명이었다. 진정한 의미는 후자였다. 송병규 교수는 토론 배틀에 걸린 학부생에게는 대학원행 형벌을 내렸다. 송병규 교수는 강의시간에 눈을 똑바로 뜨고 질문해 오는 학생들을 좋아했다. 강의 중에 ‘와 정말요?’ 하고 저도 모르게 대꾸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날로 점찍어두고 살피기 시작했다. 한창 철학에 빠져들던 자신의 젊은 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중요 학과 행사에 부르면 잘 오지도 않으면서 대학원까지 끌고 가고 싶은 학부생이 생기면 행사 뒤풀이까지 참석했다. 그리고 자신이 점찍은 학부생에게 술과 안주를 아낌없이 지원하며 계속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세뇌하는 것이었다.

“빨리 가서 숙취 해소제라도 좀 사 오세요.”

“지영아.”

엄한 목소리를 내며 교수가 딸을 불렀다.

“안 그래도 내가 지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마시는 거랑 환 중에 뭐가 더 괜찮지?”

“환이요.”

교수를 편의점으로 보내버리고 지영은 이마를 짚었다.

“혹시 그분 대학생인가요?”

“아뇨.”

지영은 얌전히 영웅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눈을 감고 있는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20대일 게 분명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대학생이 아니라면 이미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정말 죄송해요. 저희 아빠가 그분이 참 마음에 드셨나 봐요. 좀 어떻게 키워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꼭 술을 먹이거든요. 저까지 부른 거면 말 다 했어요.”

송병규 교수는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거짓말 중 딱 한 번이라도 진실일지 모르니, 취했다고 데리러 오라는 아빠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취했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고, 본인이 발굴해낸 사람이 엄청 마음에 들 때만 지영을 불러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이렇게 사람이 만취할 정도로 심하게 그러시지는 않는데. 저도 좀 당황스럽네요.”

미안해 죽겠다는 지영의 얼굴을 보면서 영웅은 잡고 있던 채언의 허리를 더 꽉 끌어당겼다.

“채언 씨.”

영웅은 잠든 채언을 깨우듯 몇 번 불러보았다. 감겨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네에….”

대답한 채언은 금방 다시 눈을 감았다.

“앨리스 님. 잠깐 저 좀 도와주세요.”

말만 하라는 듯 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부축하는 것보다 업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잠시 후, 지영은 송 교수가 사 온 것들을 채언의 가방 안에 넣어준 뒤 지퍼를 잠갔다.

“그럼 내일, 아니, 이따 아침에 회사에서 봬요.”

“조심히 들어가요.”

“네. 두 분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런데 앨리스 님. 저 오늘 출근 안 할 수도 있어요.”

“오케이. 오케이. 네. 혹시 넘길 일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영웅은 부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등에 업은 채언 때문에 허리를 숙여 인사할 수가 없었다.

멀어지는 영웅의 뒷모습을 향해 한참 손을 흔들어주던 지영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지영아. 근데 저 앤드류라는 사람이 네 직장 동료라고 했지?”

“응. 아빠. 근데 저 사람은 그냥 직장 동료가 아니에요.”

“채언 학생은 저 사람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던데.”

아까 호프집에 들어온 그가 채언을 불렀을 때 채언은 분명 그를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매일 메시지를 보낸다는 미친 대표가 저 사람? 하고 수강생들의 눈길이 쏟아지던 것이 교수의 눈에 선했다.

“그럴만한 사람이거든요.”

지영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호프집 간판 아래서 채언을 데려간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들은 교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그랬냐?”

“그래요. 그런 사람이라고요.”

팔짱을 낀 지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술 취한 채언 학생을 데리러 오지? 채언 학생은 같이 사는 사람 있다고 했는데.”

두 사람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아하.”

부녀는 각자 생각하고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영웅은 걸치고 있는 가디건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공기가 차가운 새벽이었지만 목에 와 닿는 채언의 숨결이 뜨거웠다. 업고 있느라 밀착된 등도 뜨끈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딱 붙어서 체온을 나누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채언은 얌전히 잠들어있었다.

잠버릇인 건지 지난번 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것처럼 가디건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쇄골을 가로지르는 손이 어깨 쪽까지 닿아 다행이었다. 위치가 조금만 어긋났다면 멱살을 잡힌 채 걸어갈 뻔했다.

영웅은 채언이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추슬렀다. 채언이 메고 있는 가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했음에도 움직임을 느꼈는지, 투정 부리듯 숨소리가 커졌다. 등에 얼굴을 비비는 느낌에 영웅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채언의 숨소리가 다시 작아진 후에야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호프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나. 누가 억지로 먹인 것은 아닐까. 혹시 취한 채로 쓰러져있다면? 골목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을 누가 채어간다면? 채언은 웃는 것도 귀엽고, 안 웃어도 잘생긴 사람이니까. 누구라도 혼자 있는 그를 보면 말을 걸고 싶어질 게 뻔했다.

안전하게 일행과 함께 있기를 바라며 호프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마음이 바뀌었다. 채언 혼자 있는 게 나을 뻔했다.

영웅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까만 눈을 떠올렸다. 술기운 때문에 살짝 눈이 풀려 평소보다 더 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냥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할걸. 회식 같은 건 가지 말라고. 혼자 먹는 저녁은 외롭다고. 그렇게 말할 것을. 채언에게 회식을 권했던 과오를 후회했다.

영웅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하, 숨을 내쉬었다.

“채언 씨.”

괜히 잠들어 있는 사람을 불러보았다.

“채언 씨. 오늘 재미있었어요?”

시끄럽다고 항의하듯 채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영웅은 아까보다 동작을 크게 해서 자세를 추슬렀다. 채언의 가방에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으음….”

채언은 영웅의 목 앞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대답 좀 해봐요. 오늘 다른 사람들이랑 놀아서 재미있었어요?>

장난기 섞인 불량한 어투였다.

<나는 오늘 혼자 쓸쓸하고 외롭게 시간 보냈는데?>

“…응.”

정말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편한 언어로 중얼거린 것이었는데 등 뒤에서 채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지금 응, 이라고 대답한 거예요?”

그랬더니 다시 등 뒤가 조용해졌다.

“채언 씨. 오늘 뭐 만들었어요?”

영웅은 제자리에 서서 상체를 휘휘 돌렸다.

“으으….”

반응이 있었다.

“응? 뭐 만들었어요.”

“치… 멸치.”

느릿한 목소리에 영웅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하. 멸치.”

조금 전까지 심통 났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영웅은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새벽 골목길을 걸었다.

“그런데 멸치로 뭐 만들었어요?”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영웅은 채언을 업고 걸어가는 중간중간 주변 간판을 둘러보면서, 조용히 낮춘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여긴 이런 곳이 있네요. 나중에 같이 저거 먹으러 가요.

채언은 가물가물 뜨인 눈으로 앞을 보았다. 눈앞이 흐리고 졸음이 쏟아져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자신을 업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커다란 등에 업혀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대고 있던 등에서 살짝 얼굴을 떼어보았지만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따듯한 등에 다시 볼을 기댔다.

오래전에 이렇게 업힌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시 잠에 빠지려던 눈이 뜨였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던 채언은 몇 번 목소리를 내는 것에 실패하다가 겨우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아빠.”

“어. 정말 깼네요? 진짜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

채언은 안고 있던 영웅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아빠.”

“아, 빠는 아닌데.”

영웅은 눈을 굴리며 차가 있는 유료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어눌한 발음으로 보아, 채언은 술이 깬 것이 아니라 여전히 취한 채로 잠깐 잠에서 깬 듯했다.

“집에… 집에 가.”

“그래요. 집에 가요.”

달래듯 대답하며 영웅은 천천히 새벽 골목을 걸었다. 채언의 팔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목을 조를 듯 끌어안는 힘에 영웅은 채언을 불렀다.

“저기, 채언 씨.”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웅은 서둘러 걸었다.

영웅은 차 문을 열고 채언을 천천히 조수석에 앉혔다. 가디건을 잡고 있는 손 때문에 옷이 거의 벗겨질 뻔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손을 떼어냈다. 조심히 뒤돌아, 눈을 감고 있는 채언의 몸이 움직이지 않게 뒤통수를 잡아준 뒤 가방을 벗겨냈다. 뒷좌석에 가방을 놓아두고 품 안에 있는 몸을 놓아주려는데 얌전히 감겨있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듯, 도로록 굴러가는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다 구경했어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점차 크게 뜨이는 순한 눈을 보면서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었다.

“그럼, 눈 뜨지 말고 더 자요.”

채언에게 안전벨트를 해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얌전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채언이 갑작스레 영웅의 목을 끌어안았다.

“엇!”

몸이 휘청이며 넘어질 뻔한 것을 버텨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채언의 위로 엎어질 뻔했다.

“채언 씨.”

작게 웃은 영웅은 채언의 몸을 떼어내려 했다. 안겨 오는 몸이 기분은 좋았지만 이런 상태로 운전을 할 수는 없었다.

시트에 한쪽 무릎을 대고 허리를 드는데 영웅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언이 입술이 움직였다.

“아빠.”

등 뒤로 옷을 꽉 쥐어오는 손길에 영웅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취미 생기게 하지 말아요.”

자꾸 채언이 웅얼거리는 바람에 목 근처가 간질거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채언의 숨결이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 혹시 속이 좋지 않은 건가 싶어 상태를 확인하려는데 목을 끌어안은 손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영웅은 하는 수 없이 안긴 채로 채언이 뭐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네. 집에 가요. 그런데 집에 가려면 날 놓아줘야 하는데.”

채언은 계속해서 집에 가자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영웅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 위로 손을 겹쳤다. 조심히 떼어내려는데 맞닿은 채언의 가슴이 작게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같은 말을 반복하던 목소리 위로 물기가 어렸다. 영웅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에 힘을 주어 채언의 팔을 떼어낸 뒤 몸을 일으켰다. 울고 있는 채언이 보였다.

“아무, 아무 말도 안… 안 할게요.”

채언은 겁먹은 어린애처럼 턱을 떨며 울고 있었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흐르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눈에 차오르고 있었다.

“집에 가면 안, 돼요?”

꾹 다문 입술 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덜덜 떨리는 턱 끝으로 계속해서 눈물이 모여 떨어졌다. 영웅은 자꾸만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채언의 손을 막았다.

그러자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졌다.

“나도 같이, 같이, 가면.”

채언은 헐떡이며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굳은 얼굴로 채언을 바라보던 영웅이 팔을 벌렸다.

“이리 와요.”

서둘러 안겨 오는 몸을 꽉 끌어안고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에 등을 기댄 영웅은 한 손으로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나머지 손으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난번 딸기 케이크를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얼굴을 하고도 끝내 울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날은 자신의 어깨가 축축해지도록 채언이 마음 놓고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음에도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채언이 울 때 안아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까 다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언을 보았을 때보다 더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왜. 왜 울까.”

서럽게 흐느끼는 몸을 토닥여주어도 울음이 잦아들지 않았다.

영웅은 채언이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인상을 쓰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요.”

하지만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몸을 조금 떨어트리려 하면 채언은 더 크게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며 집에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왜 우는 거냐고 물어보면 입을 꾹 다물어버려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달래주어야 했다. 아까 업고 있을 때보다 지금 느껴지는 체온이 더 뜨거웠다.

이러다 탈진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커질 때쯤에서야 채언은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영웅의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영웅은 잠든 채언을 조수석에 눕혀준 뒤 시트를 뒤로 젖혔다.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엉겨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축축한 눈가를 쓸어준 뒤 땀에 젖은 머리도 쓸어 넘겨주었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보니 세 시가 넘어 있었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거는 것이 매너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영웅은 통화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매너를 지키는 것보다 이쪽이 더 급했다.

차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귀에 댄 영웅은 고개를 숙여 채언의 상태를 확인했다.

신호음이 몇 번 반복되었다.

-…여보세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 님.”

-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이런 시간에 전화 걸어서 정말 죄송해요. 급하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새벽 도로 위를 조용히 달리는 차 안에서 영웅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행히 채언은 깨지 않고 잠들어있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가라앉은 눈으로 흘끔 쳐다본 영웅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아까 회식 자리에서 채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송 교수를 깨워 물어보았지만, 딱히 건져낸 것이 없었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한 뒤 통화를 종료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채언이 그렇게 서럽게 눈물을 쏟아낸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자리에 보내지 말걸. 평소처럼 저녁을 함께 보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계속 후회가 되었다.

집에 도착한 영웅은 채언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 뒤 겉옷을 벗겼다.

전에 같이 술을 마셨을 때는 이렇게 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채언은 그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듯했다. 혹시 혼자 자다가 토를 할지도 몰랐다. 옆에서 지켜봐 주는 쪽이 안전했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눈을 떠 다시 울음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침대에 누운 채언의 얼굴이 아까보다 편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영웅은 한쪽 어깨가 축축해진 가디건을 벗었다.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까지 다 젖어있었다. 어린애처럼 헐떡이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나서 착잡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영웅은 옷을 갈아입은 뒤 수건에 물을 적셔 가져왔다. 속상한 눈으로 잠든 채언의 얼굴을 보며 살살 닦아주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귀마개를 끼는 그였지만, 협탁에 놓여있는 작은 케이스에는 손대지 않았다.

어차피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몸에 닿는 느낌으로 보아 따뜻한 이불 속인 게 분명했다. 편안했지만, 그래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채언은 무거운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장소였다.

뭐지, 뭐지?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는 분명 밑반찬 만들기 수업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왜 또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거지.

잠에서 깬 지 오래였지만 채언은 당황스러움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데자뷔인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나 잔 건지 눈두덩이가 부어오른 것이 느껴졌다.

일단 침대를 벗어나기로 했다.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했더니 허리에 영웅의 팔 한쪽이 감겨있었다. 채언은 잠든 영웅의 얼굴을 살피며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1센티쯤 뒤로 몸을 물렸을 때였다.

정말 조심히 움직인 것 같은데 영웅의 눈이 뜨였다. 깜짝 놀란 채언은 숨을 멈췄다. 눈이 마주친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속눈썹에 음영 진 얼굴을 구경할 새도 없이 허리에 감겨있던 영웅의 팔이 채언의 몸을 깊이 끌어안았다. 몰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채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 심장 뛰는 것이 들킬까 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왜 여기 누워 잠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웅은 또 자신과 미국에 있는 엘리를 착각한 듯했다. 잠결에 하는 행동이라면 지난번처럼 빠져나가도 모를 것이었다. 채언은 눈앞에 있는 넓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슬쩍 밀기 시작했다.

“아.”

그러자 허리에 감겨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다 오히려 더 깊숙이 안기고 말았다.

“괜찮아요. 채언 씨.”

정확한 호명에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영웅은 다른 손으로 채언의 뒤통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역시나. 곧 머리에 까치집이 생길 것이었다. 어쩐지 실망감이 들었다. 채언은 대놓고 그의 가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영웅은 이런 상황을 기억도 못 할 게 뻔했다. 지난번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미국에 있는 강아지 꿈을 꿨다며 엘리와 영상통화를 한 사람이었다.

그날 살짝 흐트러진 머리로 집 안을 돌아다니던 채언은 영웅의 소파 옆자리에 앉아서 그의 노트북으로 까만색과 갈색 털이 섞인 엘리를 보았다. 까맣고 촉촉한 코를 들이미는 엘리의 옆에는 영웅의 본가에서 일하는 직원이 함께 있었다.

“저기, 대표님.”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느낌이 드는 시선에 채언은 먼저 눈을 피했다.

까만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는 모습에 영웅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정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채언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혹시 제가 어제 무슨 실수를 했나요?”

자신 없는 목소리에 등에 와 닿던 손길이 멈췄다.

“어제. 어디까지 기억나는데요?”

채언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회식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기 시작한 순간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러다 교수와 이야기를 했고 계속 술을 마셨고, 왜인지 모르게 바깥에 앉아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 찾기에 집중한 채언을 보고 있던 영웅은 살짝 긴장했다. 채언이 새벽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혹은 전부 기억한다면. 어떤 상황에 맞춰 어떻게 대해줘야 할까. 새벽 내내 잠든 그를 보며 고민했던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채언의 머릿속에 흐릿한 순간이 지나갔다.

“아빠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영웅은 채언의 안색을 살폈다. 잠든 새벽에도 가끔 눈물을 흘리길래 마른 수건을 가져와 눈을 닦아주었다. 손수건은 금방 젖어 소용이 없었다. 채언의 부은 눈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혹시 몰라 영웅은 침대를 더듬어 마른 수건을 찾았다. 부모님을 찾으며 울던 것이 떠올랐다면 새벽에 있었던 일 전부가 떠올랐다는 뜻이었다. 다시 수건을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손가락에 닿은 수건을 잡아 쥐려는 찰나였다.

“어떤 여자분이랑 같이 오셨죠? 그분이 교수님한테 아빠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물기가 사라진 또렷한 검은 눈동자였다.

“그다음은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다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기억이 안 나요.”

중간이 뚝 잘린 듯 그다음 기억은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영웅의 방 침대 위였다.

“그래서 제가 왜 여기 누워있는지 모르겠어요.”

채언은 불안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어제.”

영웅은 이에 눌린 채언의 아랫입술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자자고 했어요.”

“제가요?”

이에 눌려있던 도톰한 아랫입술이 피가 돌아 붉어졌다.

“내가요.”

“왜….”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어 보니까 무섭더라고요. 채언 씨한테 연락했더니 이상한 말만 하고.”

“제가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술주정을 한 모양이었다. 채언은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의 실수를 상상하며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네. 그래서 더 무서워져서 채언 씨를 얼른 데려왔죠. 알다시피 내가 그런 거에 잘 놀라잖아요.”

“아, 귀신.”

작게 중얼거린 채언의 말에 영웅이 서둘러 반박했다.

“아뇨. 귀신은 안 무섭고요. 어쨌든 집에 와서 혼자 자기 무섭다고 그랬더니, 그럼 채언 씨가 같이 자자고 해서.”

영웅의 말을 듣던 채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말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말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까 저한테 하셨던 말은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이렇게, 하면서.”

채언은 머뭇거리는 손을 들어 영웅의 허리에 두르고 소심하게 토닥거렸다.

“괜찮다고 하셨거든요.”

소심한 손길이 닿자 얇은 티셔츠 아래 근육이 단단해졌다. 채언의 허리 위로 팔을 두르고 있던 영웅은 그의 등 뒤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괜, 찮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날이 밝아서. 안 무서워서. 그래서 괜찮다고요. 내가.”

“아.”

“미국에서 입원하면 수술한 사람한테 곰 인형 같은 걸 빌려주기도 하거든요. 이렇게 안고 있으라고. 어제 얘기해줬더니 채언 씨가 곰 인형 해준다고 했어요.”

“기억이 안 나요.”

채언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없었지만, 영웅의 말은 그럴듯했다. 자신이 아플 때 마스크를 쓰고 옆에서 함께 잠들어준 그였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곰 인형을 자처했다면 아마 그가 심각하게 힘들어했던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까. 예전에 영웅이 사범님이라고 불러달라던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나.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빠진 채, 암막 커튼이 반쪽만 쳐진 방 안에 누워있었다. 서로 껴안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아직 술이 덜 깬 채언은 완벽하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모든 일에 그러려니, 납득하며 영웅에게 안겨있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에는 영웅의 침대가 너무 편안했다. 갑자기 멍해진 채언을 품에 안고 얼굴을 살피던 영웅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채언이 새벽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평온한 아침이었다. 얼마간 얌전히 안겨있던 채언이 갑자기 가슴에 머리를 기대왔다. 영웅의 몸이 움찔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못 해도 서로 몸이 닿는 일에는 익숙해진 건가.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에 영웅은 품 안의 몸을 꽉 안아주었다.

“흐읏.”

그러자 작게 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채언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이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난 걸까? 영웅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채언 씨.”

다정한 부름에 채언이 뭐라고 웅얼거리며 답했다.

“뭐라고요?”

까만 머리칼에 볼을 기대며 영웅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아요.”

“응?”

“놔주세요.”

밀어내는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아요, 채언 씨. 이렇게 있어도.”

하지만 채언은 기어이 영웅을 밀어내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모습에 영웅은 착잡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채언.”

“저, 토할 것 같아요.”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은 채언은 입가를 막고 영웅의 방을 뛰쳐나갔다.

채언은 입을 헹군 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하룻밤 새 퀭해진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하아.”

세면대 위로 얼굴을 타고 흐른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을 열어달라고 방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영웅은 이제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전에 한번 같이 술을 마시고 거실에서 해롱거리며 깨어난 적이 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채언은 영웅에게 더럽게 토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채언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샤워를 마친 채언이 창백한 안색으로 방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바닥에 앉아있는 영웅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있는 것이 처량해 보였다.

“문을 안 열어줬잖아요.”

“그래서 계속 여기 계셨다고요?”

“걱정되는데 어떡해요. 지금도 얼굴이 새하얀데.”

방을 나온 채언은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댔다. 바닥에 앉아있는 집주인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뻗쳐있었다.

“대표님.”

“네.”

“지금 몇 시인지 아세요?”

“몰라요.”

“회사 안 가세요?”

“안 가요.”

왜 회사를 안 간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불퉁한 말투로 보아 단단히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채언은 망설이던 손을 들었다.

“삐쳤어요.”

“안 삐졌거든요?”

채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올려다보는 영웅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연한 색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보았다.

“머리카락이요. 대표님 머리 지금 완전 까치집이거든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슥슥 빗겨주자 불만 서린 초록색 눈이 도르륵 옆으로 굴러갔다.

“제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아세요?”

영웅은 말없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자고 일어나서 머리카락이 이렇게 휘어져 있으면 뻗쳤다고 하거든요. 삐쳤다는 건 사투리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슴속에 뭔지 모를 뿌듯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채언은 영웅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그건? 그것도 모르겠는데요.”

“뭘요?”

“까치집.”

“아. 그건요. 비슷한 건데.”

채언은 다시 영웅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손이 떨어졌을 때 영웅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밥 먹을래요?”

물어보는 얼굴이 전에 본 적 없을 만큼 밝았다.

“네. 아! 맞다. 어제 만든 반찬이요.”

“멸치?”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멸치볶음 만들었는데. 만들어서 제가 가방에…….”

무의식중에 지갑을 찾듯 몸을 더듬은 채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혹시 제 가방 보셨어요?”

“앗. 채언 씨 가방 챙겼는데. 차에 두고 왔어요. 가져올게요.”

“제가 다녀올게요.”

“아니에요. 아직 속 안 좋을 텐데. 소파에 앉아있어요.”

영웅은 채언의 손을 잡고 이끌어 거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 밥 말고 다른 거 먹어요. 미국에서 술 마시면 다음 날 먹던 거 있거든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며 영웅은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채언의 가방 속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담겨있었다. 교수가 편의점에서 사다 넣어둔 숙취해소제와 오렌지주스, 초코우유, 핸드폰, 반찬통. 그리고 지금 채언은 복도 끝 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영웅이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시켜놓은 것은 치즈버거와 치즈피자였다. 미국에서는 술을 마신 다음 날 이런 걸 먹어서 속을 달랬다며 자신 있게 내놓은 것이었다. 치즈 냄새를 맡은 채언은 얼굴이 새하얘져서 다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을 게워내고 나와서 시무룩하게 방문 앞에 앉아있는 영웅에게 사과해야 했다.

‘죄송해요. 신경 써주신 건데.’

‘아니에요. 죽 사 올게요. 채언 씨, 누워있어요.’

오늘은 주말이 아니었고 그러니 쉬는 날도 아니었다. 영웅은 회사에 가지 않아도 채언은 일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숙취 때문에 이렇게 누워있다니 채언은 자신이 입주 도우미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자책했다. 또 속이 울렁거려 그마저도 얼마 하지 못했다.

베개 옆에 내려둔 핸드폰을 손에 쥔 채언은 핑핑 도는 눈으로 화면을 켰다. 어제 영웅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해볼 시간이었다.

핸드폰을 켜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교수의 메시지였다. 교수가 직접 본인의 이름을 입력했던 터라 존칭 없이 정직하게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송병규: 채언 학생.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집에 갈 때 같이 사는 분이 데리러 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을 하여서. 이쪽에서도 심히 걱정 중. 혹시나 별일 없다면 소식 부탁! 그리고 한국 대학교 평생교육원 수업~… ^^ 들어보는 것. 제안 충분히 생각해보고 말해주었으면~…]

문자를 보자 어젯밤 교수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부분적으로 떠올랐다. 정식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지 않아도 강의를 들을 방법이 있다며 여러 가지 길을 제안해주었던 것이었다. 언어 관련해서는 이런 수업들이 있는데 자신이 강의를 나가는 철학 수업도 이런 것이 있다고 계속해서 곁다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학생, 학생, 하던 교수가 채언 학생, 하고 이름까지 붙여 불러주는 것이 살짝 기분 좋아서 술을 더 마셨던 것 같다.

그러다 나중에 영웅이 교수의 딸과 함께 호프집에 들어왔고. 아빠라고 교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신은 대표님을 불렀다. 그리고 조금 속상해서 또 술을 몇 잔 마셨던 것 같다. 술을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 속이 울렁거려서 채언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울렁거리는 기운이 가셨을 때, 채언은 천천히 눈을 뜨고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영웅과 대화를 나눈 메시지 함을 열었다.

“이게 무슨…….”

[대표님. 제가 지금 술을 마시는 중이라서요. 젓가락으로 꼭 이걸 먹어야 하는데 잘 안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한시까지 젓가락을 써야 하는데요. 제가 소주잔이 잘 못 잡는 걸 하는 중이라 한 시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저녁 드셨나요? 먼저 수영하고 계시면 저도 곧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얼른 젓가락으로 한 시에 가겠습니다.]

알 수 없는 문장을 이어붙인 메시지였다. 왜 영웅이 메시지를 받고 무서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통화목록을 보니 영웅이 전화를 걸어온 흔적이 남아있었다. 통화 시간이 꽤 길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채언은 미간을 찌푸린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에 건영과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두 번이나 속을 게워냈지만, 덕분에 숙취가 싹 사라진 채언이었다. 이제는 몸 상태도 괜찮고 술도 다 깼다고 몇 번이나 어필해보았지만, 영웅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채언이 또다시 방문을 닫고 그 안에 딸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까 봐 방 안에 버티고 선 채였다.

두 사람은 복도 끝 방에서 죽을 먹었다. 채언은 독감에 걸렸을 때처럼 베드 트레이 위에, 영웅은 책상 위에 죽 그릇을 올려두고 먹었다. 거실 식탁에 놓인 치즈피자와 치즈버거는 굳어진 지 오래였다.

느긋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 채언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간밤에 제가 누워있던 침대 시트도 벗겨 빨고 화분에 물도 주고 하는 동안 영웅은 채언을 따라다니며 참견을 했다. 자신도 쉬고 싶은 날에는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데 왜 채언 씨는 그러지 않느냐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일을 하라고 고용해놓고 일을 하지 말라며 따라다니는 집주인 때문에 오히려 민망해져, 할 일을 더 찾아서 하던 채언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같이 TV나 보실래요?”

그 말에 영웅은 멈칫했다.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잠시 서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얌전히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자연스럽게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고 기다리는 그를 보다가 채언도 소파에 앉았다. TV를 보자는 것은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순식간에 조용해질 줄 몰랐다. 사실 집주인은 스포츠 채널 중독자가 아닐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채언은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구름을 보며 멍 때리던 채언의 머릿속에 예능도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다른 프로그램이 나오는 채널이 떠올랐다.

“대표님.”

하고 부르자 옆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창밖을 보던 채언도 영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거 보실래요?”

“어떤…?”

잠시 망설이던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눈 감고 계세요.”

얼굴에 물음표가 뜬 상태로 영웅은 눈을 감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진 것을 확인한 채언은 TV 음소거 버튼을 누른 뒤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채언이 틀어놓은 것은 한국의 오지 산간을 다니며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주로 지역 특산품이나 자연환경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라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자극적인 부분 없이 순했다.

긴장감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뜬 영웅은 눈앞에 펼쳐진 푸른 산의 절경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눈을 감고 있던 짧은 시간 동안, 영웅은 혹시 채언이 드라마나 영화를 피해 어린이 프로그램을 틀어놓는 것은 아닐까 잠깐 생각했었다.

“이게 보고 싶었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럼요?”

“예전에 혼자 살 때,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할 때요. TV를 틀어도 볼 게 없으면, 이거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봤거든요. 무서운 것도 안 나오고 그냥 볼만해요.”

정확히 채널 몇 번에서 몇 시에 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대충 이 시간대 공중파 채널을 돌리다 보면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전에 이런 건 누가 챙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틀어놓고 보다 보면 은근 지루하지 않게 시간이 잘 갔다. 어지간한 예능 프로그램보다 오래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니아 층도 따로 있는 듯했다.

교양프로그램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영웅은 채언을 따라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채언 씨, 저거 먹어봤어요?”

TV 화면 가득 이름 모를 약초가 튀겨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아뇨.”

“나뭇잎 맛이 날 것 같은데.”

“나뭇잎 드셔보셨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채언은 약초 튀김을 먹는 약초꾼의 모습을 보고 있는 영웅을 흘끔 살폈다. 채널 선택을 잘 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TV를 보면서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느껴질 즈음. 프로그램도 막바지를 향해 가는지 오늘의 주제였던 어느 지역 산의 모습과 지리적 특징에 대한 내레이션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약초를 찾아 산을 돌아다니던 약초꾼들의 모습도 잠깐씩 화면에 나타났다.

노을 지는 산을 배경으로, 다음 시간에 계속, 이라는 문구가 화면 아래 뜨자 채언은 리모컨을 들어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다시 눈 감으세요.”

영웅은 이번에는 긴장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TV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채언 쪽으로 돌렸다. 스포츠 채널로 화면을 바꾼 채언은 이제 눈을 떠도 된다고 말했다.

“어떠셨어요?”

영웅은 천천히 눈을 떴다. 채언이 검은 눈을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감을 비추는 것이 보였다.

영웅은 속으로 조금 전의 프로그램이 참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방송이 끝나기 직전에 노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마침 거실 창밖으로도 노을 지는 것이 보였다.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거실 불이 환해 바깥의 주홍빛이 집 안에까지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빛을 등진 채언의 머리카락 끝이 밝은 색을 띠었다.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행이에요. 스포츠 채널이 질릴 때는 가끔 이런 프로그램도 보세요.”

안도와 뿌듯함을 느낀 채언이 살짝 웃었다.

“채언 씨.”

영웅이 채언을 부른 것은, 채언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조금 더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여전히 음소거 버튼이 눌려있는 TV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

보송하게 느껴지는 간결한 대답에 영웅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채언 씨는 어땠는데요?”

채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저도, 비슷한 소감인데요. 한번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영웅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렇죠. 우리 비슷하네요.”

영웅의 웃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채언의 손가락이 움칫했다. 전기가 통한 듯 움직인 손가락 때문에 갑자기 숨을 마시고 내쉬는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대표님은 아까 그런, 그런 곳에 가보셨어요?”

이상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긴장을 했지. 채언은 몸에 들어간 힘을 빼는 것보다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더 쉽게 느껴졌다.

“산이요?”

“네.”

“미국에 있을 때 산에 가보기는 했지만. 진짜 산보다는, 가짜 돌 같은 게 박혀있는 실내 클라이밍을 하러 가는 편이었어요.”

한국인처럼 클라이밍을 정직하게 발음하는 영웅의 말투에, 채언은 조금 긴장이 풀렸다.

“미국 산하고 한국 산은 좀 다르죠?”

“조금. 가보고 싶어요?”

“어딜요?”

“미국. 어… 산?”

“산은 그다지 가보고 싶지 않지만 미국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막연히 그렇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이국적인 모습을 상상하며 말하느라 말꼬리에 꼬리가 따라붙어 길어졌다. 눈을 굴리며 말하는 채언을 보던 영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음…….”

가보고 싶은 곳. 몇 년간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라 채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외국 어디에 가려고 생각 중이라거나.”

영웅은 이 집에 한 명밖에 없는 직원을 위한 복지로, 곧 있을 여름휴가 비용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더위 보너스라든가. 영웅은 채언의 입에서 나올 장소를 기대하며 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저는.”

해를 등진 채언은 빛을 가득 받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던졌다. 외국. 가려고 생각 중인 곳. 그런 곳이라면 한 군데 있었다.

“스위스에 가려고… 아!”

말을 하다 갑자기 스스로 입을 막아버린 채언 때문에 영웅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당황한 듯 여기저기 시선을 던지던 채언은 거실 바닥을 시선의 종점으로 삼았다.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린 뒤에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회식 자리에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왜 영웅의 눈을 보고는 말이 튀어나온 걸까.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아무도 알면 안 되는데. 그래야 하는데.

아니다. 아직은 괜찮았다. 스위스에 가고 싶다는 말이 그 자체로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니까. 설렘과는 다른 느낌으로 채언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콩콩 뛰는 심장 박동 때문일까. 채언의 머릿속에 갑자기 자신이 영웅의 방문을 두드렸던 날이 떠올랐다.

“스위스. 그다음에는 더 말해주면 안 되는 건가?”

영웅은 바닥을 보는 채언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채언이 어색하게 눈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아닌 듯했다.

스위스에 혼자만 알고 싶고 혼자만 가고 싶은 장소라도 있는 걸까.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 특별한 장소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영웅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중에 채언을 살살 구슬려 혼자만 간직한 그 장소가 어디인지 꼭 알아내기로 했다.

“스위스. 좋죠. 풍경도 그렇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렇게 풍경 좋은 곳에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아까 본 약초꾼처럼 한국 어디 산 밑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영웅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약초 튀김 같은 걸 만들면서요?”

“그건 나뭇잎 맛이 날 것 같아서, 조금…….”

영웅은 장난스럽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채언이 금방 목소리를 들려주어 다행이었다.

“채언 씨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봤어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 몰랐다. 그의 앞이라고 또 다른 말이 튀어나올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가 눌리는 기분이 들 때까지 깊게.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평범하게, 얕게 호흡한 뒤 입술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아무것도?”

“네.”

“흠.”

나중을 생각할 때 채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예전에는 미래를 기대할 때, TV를 보듯 자신의 모습을 3인칭의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그려지지 않았다. 채언에게 미래란 코드를 꽂지 않은 TV 화면처럼 새까맣고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정적일 뿐이었다.

“그럼 채언 씨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내가 약초 튀김 해줄 테니까 그거 먹어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먹어보지도 않은 나뭇잎 맛이 혀끝에 감도는 것 같았다. 채언의 눈 밑에 팬 보조개를 보면서 영웅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조용하던 거실에 휘슬 부는 소리와 관객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미루고 미뤘지만 채언은 건영과의 약속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주말에서 평일로,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그렇게 옮겨봤지만 결국 만나서 끝을 보아야 했다.

약속 시각에 가까워질수록 채언의 손에 땀이 났다. 건영과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후 네 시 반이었다. 이야기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영웅이 퇴근하고 들어오기 전에 집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혹시 몰라 약속장소는 집 근처가 아닌, 지하철로 세 정거장을 타고 가야 나오는 낯선 동네로 잡았다.

채언은 낡은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고 늦지 않게 집을 나섰다.

카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채언은 밭은 숨을 쉬며 안쪽을 살폈다. 구석 자리에 건영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테이블에 엎드려 화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채언은 음료를 시키고 건영이 엎드려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어. 형!”

반가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채언은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건영 앞에 놓인 음료는 얼음이 반쯤 녹아 물과 주스 층이 나뉘어 있었다.

“일찍 왔나 보네.”

“응.”

“왜 불렀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아직 음료 안 시켰지. 내가 가서 주문할게.”

채언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부터 일으키는 건영을 올려다보았다.

“아냐. 오자마자 주문부터 했어.”

“그렇구나.”

털썩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채언은 테이블에 놓인 유리컵만 보고 있었다. 맺혀 있던 물방울 중 하나가 주룩 미끄러졌다.

“형.”

“주소. 어떻게 알았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건영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건영은 테이블에 있던 음료 컵을 들어 안에 든 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민증 봤어. 형이 두고 간 쇼핑백에 지갑 들어있었잖아.”

어쩐지 그날 백화점에서 자신을 너무 순순히 보내준다 싶었다. 채언은 테이블 위에 한쪽 팔을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화내지 마. 그거 말고는 손 안 댔어.”

혼을 낸 적도 화를 낸 적도 없지만, 건영은 미리 기죽은 투로 말했다.

“화낸 적 없어.”

채언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근데 형은 연락한다고 해놓고, 안 했잖아.”

“그건.”

“음료 나왔습니다. 이쪽에 놓아드릴까요?”

음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직원이 카운터로 돌아가자, 빈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던 건영이 입을 열었다.

“형.”

“응.”

먼저 불러놓은 사람답지 않게 건영은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손에 물기가 흥건해지고 나서야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이상한 일 하는 거 아니지?”

채언의 눈썹이 반사적으로 위로 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상한 일?”

“왜 주소가 그런 고급아파트로 되어있어?”

채언은 말없이 건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그런 곳에서 살면 안 돼?”

“그런 뜻이 아니라!”

다급히 변명하는 건영의 몸짓에 테이블이 흔들렸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형 돈 없잖아.”

건영은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보증금도 나 주고 가서…….”

작게 욕을 읊조린 뒤에는, 미안, 형한테 욕한 건 아니야, 하고 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건영은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을 미끄러트려 얼굴을 감싼 뒤 고개를 숙였다. 채언은 한숨을 쉬었다.

“합법적으로 일하는 곳이야. 숙식 제공받고.”

“정말?”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린 건영이 되물었다.

“그래.”

채언의 확답에 다시 얼굴이 핀 건영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런데 무슨 일 하는데?”

“건영아.”

“응.”

“이제 더 이상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형. 내가 줄 거 있다고 했잖아.”

건영은 채언의 말을 막으며 몸을 옆으로 숙였다. 테이블 아래 놓아두었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플라스틱 팩을 꺼냈다.

“이거.”

팩에는 커다란 사과 세 알이 들어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과일이었다.

“사과야. 백화점에서 사 왔어. 형 먹으라고.”

“이걸 왜.”

천진하게 웃으며 플라스틱 팩을 내민 건영은 잠시 우물쭈물거렸다. 테이블 위에 올린 자신의 손가락을 엮어 움직이다가 뭔가 결심한 듯 채언과 눈을 마주쳐왔다.

“미안해서.”

“뭐?”

“미안해. 형.”

“…뭐가?”

“잘 모르겠어.”

밝은척하던 얼굴이 점차 시무룩해져 갔다.

“형이 날 왜 떠났는지.”

왜 다 두고 갔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갔는지도 몰라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는데. 횡설수설 말을 잇던 건영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왜 그랬어?”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계속 궁금했어. 그리고 형이 너무 보고 싶었어.”

계속해서 만나자고 자신의 지갑 속 주소를 몰래 찾아볼 정도로 무례하게 굴어놓고.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마주한 동생은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건영은 입양을 간 뒤에도 계속해서 채언에게 연락을 해왔다. 형이 보고 싶다고.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는지 부모님에게 물어봤다고. 채언의 말이 트이기 전에도 그랬다. 건영이 전화로 말을 하면 채언은 수화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쳐서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제대로 된 대꾸도 해주지 못했는데 그게 좋다고 웃던 애였다. 자라서도 마찬가지였다. 건영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 친형처럼. 붙어있던 시간은 떨어져 있던 시간보다 길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보고 싶었어?”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채언은 마음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건영의 대답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채언은 건영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말없이 보는 시선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건영은 괜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왜 그래, 하며 투정을 부렸다. 불안한 침묵을 무마해보려는 건영의 행동에 채언은 목이 메었다. 마음을 삼켜내는 짧은 시간 동안 채언은 예전 생각을 했다. 둘이 뭐 좋은 일이 있었다고. 그다지 재미있게 보낸 날들도 아니었는데. 깊은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난 너 때문에 죽고 싶었는데.”

채언의 말에 웃고 있던 건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어?”

건영은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채언을 바라보았다. 채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응?”

다시 물었지만 채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영은 자신이 채언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왜?”

동그랗게 뜨인 눈에 충격이 서리기 시작했다.

“왜. 왜, 나 때문에. 왜?”

채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 컵을 들었다. 맛도 느끼지 못하고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음료를 마셨지만 목이 탔다. 이래서 다신 만나기 싫었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채언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었다.

“넌 기억 안 나지?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침내 결심을 내린 채언은 건영을 마주 보았다.

채언은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을 건영에게 말해주었다. 적당히 뒷부분을 쳐내고 조금 더 단순하게. 자신만큼 상처받지 않게. 너무 많이 상처받지 않게.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건영의 얼굴은 서서히 충격으로 물들었다. 벌어진 입술과 턱이 떨리는 것을 보며 채언은 주먹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내가… 내가.”

건영은 일그러진 얼굴로 채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정말 그랬어?”

끊어질 듯 작은 숨을 쉬며 혼잣말을 하는 것에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까 우리.”

“나는….”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든 건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힘겹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형은…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 정말 기억이 안 나. 그런데 그때 내가 너무.”

점차 빨라지던 말은 건영이 입술을 깨무는 통에 끊기고 말았다. 감정을 억누르느라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사실 엄마 아빠가, 아니,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

미안해 형. 미안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건영의 입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왜, 왜 그랬냐면, 엄마 아빠가, 내가 조금 힘이 들어서. 그래서.”

“알고 있었어.”

“어?”

눈썹을 잔뜩 모은 채 건영은 씩씩거리고 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켜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알고 있었다고. 너희 부모님이 나 대신 널 데려가셨다는 거.”

원장님이 말씀해주셨어. 읊조린 채언은 손바닥에 반달 자국이 생길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내가 왜 너랑 살던 집을 나왔는지 모르겠어?”

뭐라고 대답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건영의 입에서는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널 볼 때마다 내가.”

“형.”

“내가 갔으면 좋았을 텐데.”

“채언 형.”

채언의 뒷말을 막은 건영은 그렇게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일그러진 얼굴로 의미 없이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졌다. 눈 안에 반쯤 차오른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채언은 테이블 아래서 손을 떨며 손톱으로 손바닥 살을 긁었다.

두 사람 다 비참하게 시간을 죽였다. 채언의 음료 컵 안 얼음도 모두 녹았을 무렵 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몰랐어.”

건영은 손바닥으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참이나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다가 손을 내렸다.

“그런데 형. 우리 집, 별로 안 부러워해도 돼.”

가까이 앉아있던 두 사람의 낡은 운동화 앞코가 붙었다 떨어졌다.

“신발을 왜 꺾어 신었겠어.”

건영은 고개를 숙였다.

“형이 나 대신 이 집에 들어왔었어도 그랬을 거야.”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다. 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건영은 테이블 옆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지퍼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서 내놓았다.

“이거 주려고 불렀어.”

작은 액자 두 개와 두툼한 하얀 봉투였다.

액자 두 개는 겹쳐져 있어 아래 깔린 사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위쪽에 보이는 사진 속에는 지금보다 앳된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채언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두 사람이 같이 찍은 것이었다. 둘은 각자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채언은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그날 건영이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채언에게는 사진이 별로 없었다. 자라온 모습을 기록해주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의 집 후원금을 위해 찍힌 사진 말고 개인적으로 간직할 만한 것은 졸업앨범들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운동장에 혼자 서있던 채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건영뿐이었다.

‘형! 채언 형!’

채언이 뒤돌아보는 순간 건영이 품 안에 커다란 꽃다발을 와락 안겨주었다. 꽃다발은 너무 커서 안아 든 채언의 얼굴이 반이나 가려질 정도였다. 온갖 꽃이 어우러진 꽃다발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어떻게 왔어?’

사실 채언은 정말 왔네, 하고 말할 뻔했다. 졸업식 몇 달 전부터 건영은 그날 채언에게 식이 끝나도 어디 가지 말라며 꼭 자신을 기다리라고 닦달했다. 정말 올까. 아주 먼 곳에 살고 있으면서. 그런 의심을 했었는데. 지금껏 살면서 기다리라고 말해놓고 정말로 온 사람은 건영이 처음이었다.

‘기차 타고!’

그런 것을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천진하게 웃는 건영의 얼굴에, 채언은 꽃다발 위로 보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꽃에 가려진 입술 끝이 호를 그렸다.

‘저기요. 아저씨! 저희 사진 좀 찍어주세요.’

건영은 어릴 때부터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말을 쉽게 거는 성격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밝은 태도가 부러웠다. 채언은 양복 입은 아저씨에게 디지털카메라를 넘기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영을 보며 품 안의 꽃다발을 힘주어 안았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소리가 들렸다.

‘이거 엄청 비쌌지?’

채언은 이렇게 큰 꽃다발을 본적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다.

‘응. 근데 괜찮아. 용돈 좀 모았거든.’

건영은 채언의 옆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형. 이제 저쪽 봐.’

카메라 렌즈가 있는 쪽을 가리킨 건영은 채언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딱 붙여 기댔다. 아직 덜 자란 몸은 갓 스무 살이 된 채언보다 조금 작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졸업식장에서 누구보다 큰 꽃다발을 든 채언과 그 꽃다발을 주기 위해 기차를 타고 온 건영의 모습은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사진은 액자에 담겨 채언의 방에 놓였다. 몸만 눕히면 끝인 작은 방 한 칸에서, 건영과 함께 살았던 낡은 투룸으로 이사를 할 때도 챙겨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채언은 그 집을 떠났다. 반납받을 보증금을 건영의 앞으로 돌려놓고, 둘이 찍은 사진을 두고. 그 뒤로 채언은 숙식 제공되는 아르바이트 자리와 저렴한 방을 찾아 전전했다. 적금을 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뒤의 일이었다.

“갑자기 형 사라지고 나서 내가 너무 어리광부린 거 알았어. 형 살기도 빠듯한데 갑자기 나까지 떠맡은 거잖아. 이거, 형이 남기고 간 돈 하나도 안 썼어.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 돌려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하늘의 집에 맡길 수도 없고. 그 포도 농장 사장님도 못 믿겠어서. 나중에 만나면 꼭 돌려주려고. 나름 이자도 같이 넣었어.”

“건영아.”

“이제 안 찾아올 거야. 그러니까 또 도망가지 마. 그냥 거기 있어.”

건영은 빈 가방만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는 모습을 보던 채언의 시선은 건영의 발끝에서 멈췄다. 뒤축을 꺾어 신은 신발은 건영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채언이 사준 것이었다.

그날 마주한 건영의 모습은 채언의 졸업식 날과 달랐다. 입고 있는 교복의 길이도 품도 몸에 맞춘 듯 단정했던 모습과 달리, 바짓단도 자켓 소매도 짧게 닳아있던 모습. 어린애를 안고 단란한 세 가족인 듯 서 있던 양부모의 모습과 지루하게 운동장을 둘러보던 건영의 얼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있던 발.

졸업식 날 건영의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채언은 건영과 둘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잠시만 건영을 데리고 어딜 좀 다녀오겠다는 채언의 말에 다 큰 애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건영의 양부모는 쉽게 허락을 내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채언은 쎄한 기분이 들었다.

‘너, 왜 이런 날 신발을 꺾어 신고 있어? 사진에도 다 찍힐 텐데.’

채언의 물음에 건영은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네 속은 정말 모르겠다며 채언은 한숨 쉬듯 웃고 건영을 신발 가게에 데려갔었다.

그날 졸업선물로 사준 운동화였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같이 살았던 때에도 신발장엔 없던 신발이었다.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건영아.”

“갈게.”

채언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돌아보는 건영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뜨거운 불이 휘저어지는 듯했다.

“이건.”

잠시 기다리던 건영은 채언의 얼굴과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다시 가져갈게. 보기 싫을 것 같아서.”

마침내 건영은 상처받은 얼굴로 한마디를 남기고 카페를 나갔다. 채언은 끝내 떠나는 뒷모습을 잡지 못했다. 건영이 가져간 것은, 채언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찍은 사진 아래 깔려있던 다른 액자였다. 건영은 웃고 채언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던,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갑작스레 마주쳤을 때 찍힌 사진이 담긴 것이었다.

채언은 독감에 걸렸을 때처럼 힘겹게 숨을 쉬었다. 테이블을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집에 같이 찍은 사진을 두고 떠나올 때와 같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도 아닌데 앞이 흐렸다. 목구멍에 커다란 공이 걸린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린 채 평범한 호흡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확 들이마신 채언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얼굴이 아플 정도로 쓸어내리다 손안에 괴로운 얼굴을 감추었다.

곰팡이 핀 딸기가 짓눌리던 새벽. 건영의 말을 듣고 죽고 싶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건영 때문에, 오로지 그 애 때문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행한 모든 기억이 채언의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책처럼, 찢어버릴 수 없는 자신의 서사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자꾸만 기억될 것들이 채언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호프집에 가끔 찾아오는 대학생들을 보고, 멀쩡한 회사의 사원증을 걸고 있는 번듯한 직장인들을 보고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낄 상황은 아마 오래도록 자신과 함께할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몰랐다. 혹시 나중에 돈을 아주 많이 벌게 되더라도, 젊은 날 그들과 나란히 길을 걷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또다시 추악한 질투를 하게 될 것 같았다. 겉으로는 누구에게도 티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정확한 대상이 없는 질투와 혼자 속상해하는 삶을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 눈에 보이는 불행한 미래가 채언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어.’

‘내가 갔으면 좋았을 텐데.’

채언은 자신이 했던 말이 역겨워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주 어릴 때 양부모의 손을 잡고 하늘의 집을 떠나는 건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건영의 자리를 뺏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건영이 집안일로 힘들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지도 짐작되었다.

손바닥 안에 얼굴을 감춘 채언은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물고 있었다. 건영을 잡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발을 보고 알은척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건영은 계속해서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이었다. 이쯤에서 정말로 정을 떼어야 했다.

채언은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친근하게 굴던 사람들이, 한순간 차갑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차례였다. 건영이 자신을 찾지 않게 만들려면 더 무감정하고 차갑게 굴어야 했다.

건영에게는 언제나 애틋함이 남아있었다. 정말로 친동생 같은 녀석이었으니까. 진짜 가족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동생이었다.

‘내가 갔으면 좋았을 텐데.’

절반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부부의 집에 자신이 가게 되었다면. 자신은 이미 한 번 책임감 없는 부모를 만났다 버려진 적이 있으니까. 이미 겪었던 일을 한 번 더 겪는 것뿐이니까. 차라리 그때 조금만 더 빨리 말이 트였다면. 조금만 더 아이답게 행동을 했으면. 그랬으면 자신이 건영 대신 그 집에 들어가서 지금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채언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문지르듯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충동적으로 도로 위로 뛰어들었던 날. 겨우 집에 돌아온 채언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며칠을 보냈다. 왜 건영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대학교 동기들과 일이 있었다느니 했던 말은 변명이었을 것이었다. 가족들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건영의 양부모를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하던 채언은 하늘의 집 원장을 찾아갔다.

떠올리기 고통스러웠지만 기억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추억을 이야기하듯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영의 양부모 이야기를 원장에게 던졌다. 원장은 미끼를 쉽게 물었다. 부부의 후원이 끊긴 지 오래라고 했다. 그들에게 진짜 자식이 생긴 해가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모셔야 할 큰 손이 아닌 부부에 대해 말하며, 원장은 몹쓸 인간들을 떠올리듯 인상을 썼다. 원장은 채언에게, 애완동물 가게에서 예쁜 강아지를 골라가듯 부부가 너와 건영이를 저울질하다가 한 명을 택해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네 옆에 건영이가 딱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걔도 그 사람들 눈에 띈 거지. 오래된 이야기라 기억이 흐릿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걸 보면 채언이 네가 자리를 뺏겨서 그때 많이 섭섭했구나.’

채언은 원장의 말에 헛웃음을 쳤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건영이 아니라 원장이었다.

‘건영이에게 서운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둘 다 그렇게 어렸는데.’

‘그래도 네가 몇 살 더 많다고 제대로 형 노릇 하고 있는 거 보면 대견하다, 채언아.’

원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왔을 때, 둘이 같이 산다고 했지?’

‘네.’

‘그래. 예전 일로 서운해할 시기는 지났으니까. 진짜 가족보다 너희 같은 사이가 더 나을지도 몰라. 어쩜 이렇게 사이가 좋은지.’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이러지 못할 이유는 없어요.’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채언아. 안 그래도 힘들 텐데 네가 옆에서 건영이 좀 잘 보듬어줘라.’

‘무슨 말씀이세요?’

되묻던 채언은 말을 바꿨다.

‘아니, 원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건영이 매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들, 어느 순간부터 후원은 딱 끊어놓고 갑자기 찾아와서 여기 유리창 샷시를 싹 바꿔놓고 갔어. 어린애가 잘 자라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나. 쯧쯧.’

원장은 갑자기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원장실을 둘러보더니 비밀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성인이라고 해서 파양되는 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너는 지금까지 쭉 혼자 잘 해왔다지만, 건영이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있는 집에 갔다가 나오게 된 거라 씀씀이도 그렇고 좀 더 허탈하겠지.’

채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탄식도 헛웃음도 아닌 답답한 숨만 계속 터져 나왔다.

‘그런데 채언이 너, 언제 그 사람들 만난 적 있니? 그때 샷시 바꿔주겠다고 찾아와서는 그 사람들이 네 얘기를 했었거든. 뭐 뻔한 변명이겠지만. 그때 건영이가 아니라 예정대로 너를 데려갔다면 인제 와서 다시 자기들 손으로 아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소리를 하더라.’

원장의 말에 채언은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눈 안에 뜨거운 불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원장실을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채언은 하늘의 집 정문 앞에 서서 뜨거운 눈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짧은 숨을 헐떡거리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국 채언은 담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비틀거리던 건영이 흘린 말에 자신을 향한 원망이 담겨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애가 그렇게 된 이유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나만 상해도 주변이 모두 썩어버린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불행의 포자를 퍼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모님은 아이를 버리러 가다 차 사고로 죽지 않았을 것이고 건영은 다른 집으로 입양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채언은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벼락 앞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과 엮인 모든 이들에게 미안했다. 흙바닥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가 내리듯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동그랗게 젖은 자국들이 늘어났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길가를 걷다가 커다란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면, 건물 창밖을 내려다볼 때면, 맨홀 뚜껑이 열린 공사장 길을 보면 위험한 상황이 자신을 향해 무너지고 쏟아지는 상상을 했지만, 그래도 될까…….

‘이게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재수 없게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트럭 운전기사가 소리치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도 채언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채언은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보았다. 검색을 할 때마다 따라붙는 게시글이나 댓글이 있었는데 자살 유가족의 스트레스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 가족이라고는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채언이었지만, 그래도 인연이라 부를 만한 사람 몇 명은 있었다. 더는 자신의 불행에 누구도 전염되지 않기 바랐다. 실패할 확률 없이 끝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글은 꽤 찾아볼 수 있었지만, 누구의 인생도 망치지 않고 삶을 끝내는 방법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채언은 전과 같은 생활을 했다. 일하러 갈 시간에는 일을 하러 갔고, 집에 돌아와 남는 시간에는 TV를 틀어놓았다. 건영은 여전히 그날 새벽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채언에게 양부모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채언의 속은 계속해서 곪아갔다. 겉으로는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었다.

채언이 건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두 사람은 TV를 틀어놓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라마에서는 주인공과 악역의 꼬이고 꼬인 사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개 초반부답게 과거는 회상 장면으로 금방 지나갔고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잠적한 악역을 떠올리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은 참 괜찮았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우리 포기하지 말고 그 사람 같이 찾아보자. 천사병에 걸린 조연 캐릭터가 주인공의 잔에 다시 맥주를 채워주었다.

‘네가 저 사람이면 어떻게 할 거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멍하니 TV를 보고 있던 채언이 건영에게 물었다. 입안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씹던 건영은 화면을 흘끔 쳐다본 뒤 물을 마셨다.

‘저 중에 누구?’

‘아무나.’

건영은 연기하는 배우들을 잠시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됐든 나는 나 떠난 사람 안 찾을래.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싫어서 떠난 거 아냐?’

그렇게 말한 건영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빈 컵에 물을 따라 몇 잔을 마셨다.

‘잊는 게 속 편해.’

‘물 그만 마시고 이거 먹어.’

옅은 미소를 지은 채언은 건영의 앞으로 고기반찬을 밀어주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온 채언은 현관문을 열지 않고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 아파트의 커다란 문이었다. 현관 센서등이 꺼졌다. 가만히 서 있던 채언은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움직임을 인지한 센서등의 불이 켜졌다. 하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신호는 없었다. 채언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영웅이 아직 집에 오지 않아 다행이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곧바로 복도를 걸어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간 채언은 책상 위에 사과를 올려두고, 캐리어를 찾았다. 낡은 하드케이스 캐리어를 바닥에 눕혀놓고 지퍼를 열었다. 지난번에 얇은 옷을 꺼내려다가 안을 열어보고 심란한 마음에 그대로 닫아버렸던 것이었다.

채언은 건영에게 받은 액자를 옆에 내려놓고 캐리어 안에 들어있는 얇은 옷들을 차례대로 꺼냈다. 그리고 세면도구 따위를 넣으라고 준비되어 있는 작은 지퍼를 열어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그다음에는 깨지지 않게 옷과 졸업앨범 사이에 넣어 보관하던 액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캐리어에서 꺼낸 액자는 건영에게 받은 것보다 크기가 컸다. 채언은 손에 쥔 것들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채언은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캐리어에 챙겨가지고 온 졸업앨범이 다였다. 하지만 두 계절을 지내면서 가지고 있는 사진이 늘었다. 오늘 건영이 준 액자, 그리고 작년 크리스마스 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동네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찍은 여권 사진과 영정사진이 그것이었다.

채언은 고개를 숙여 눈앞의 사진들을 번갈아 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몇 년 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미소 짓던 날의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영웅이 집에 돌아왔을 때 채언은 평소처럼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저녁은 같이 먹지 않았다. 밥을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아까 혼자 수영장에 다녀와서 조금 피곤하다며, 일찍 자겠다고 말하는 채언이 정말로 피곤해 보여서, 영웅은 걱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채언은 방에 들어와서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밤새 잠을 설쳤다. 설핏 잠이 들면 곧바로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얼굴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다가와서는 뭐라고 자꾸만 속삭이는 바람에 몇 번이나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떠야 했다.

방 안에는 아까 늘어놓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결국 채언은 몸을 일으켰다. 서랍을 열어 잘 쓰지 않는 이어폰을 꺼냈다. 마음이 안정되는 노래를 검색해 틀어놓고 아침이 올 때까지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았다. 가끔 음악을 틀어놓던 집주인이 이해가 되었다.

출근하는 영웅을 배웅한 뒤 채언도 나갈 준비를 했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른 오전인데도 거리는 조용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러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버스나 택시를 잡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채언을 스쳐 지나갔다. 다들 회사나 학교에 가는 거겠지.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 다들 어디 놀러 가려는 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멍한 눈으로 채언은 주변을 살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에, 주변이 둘러막힌 건물이 나왔다. 몇월 며칠부터 언제까지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삭막한 풍경을 보자 채언은 건영이 생각났다. 자신이 그 집을 나가고 나서 건영은 언제까지 기다렸을까. 계속 그 집에 혼자 살았을까. 자신이 남겨둔 돈을 쓰지 않았다면 그동안 뭘 하면서 지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런 것이라도 물어볼걸…….

채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은 건물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상을 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너 때문에 죽고 싶었는데.’

‘넌 기억 안 나지?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눈을 감았더니 이번에는 건영을 탓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서, 채언은 귀를 막아보았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귀를 막아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이어폰이라도 들고 나올걸. 그랬으면 진짜로 다른 소리를 들어서 정신을 돌렸을 텐데. 사람이 오가지 않는 길에서 채언은 한참이나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여권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 필요한 것도 몇 개 없었다. 사용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겠지만 여권을 신청하고 나니 요즘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굳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에 흔들렸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자주 가던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할 일을 모두 마친 뒤 거실 카펫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채언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손으로 목울대를 매만지다가 부엌으로 가서 컵을 꺼냈다. 멍하니 정수기 물을 받던 채언은 컵 안의 맑은 파동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출렁이는 물이 꼭 파도 같았다.

“아!”

갑자기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컵 안의 물이 넘쳐 채언의 손목을 적셨다. 시원한 물의 느낌에 채언은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방금 작은 컵 안에 빠지는 상상을 했다. 컵을 든 채 넓은 부엌과 거실을 돌아보던 채언은 단숨에 물을 마셔버리고는 복도 끝 방으로 가서 수영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저, 수영장에 다녀올게요…….”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영웅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집을 나섰다.

물속의 채언은 팔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레인의 중간까지 와서 참고 있던 숨을 파아, 내쉬며 일어섰다.

지난번에 영웅이 조금 알려줬던 동작들과 얼떨결에 몸을 휘젓던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여 보았는데, 나름 안정적으로 물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걸 수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비슷한 흉내는 내는 것 같았다.

물안경을 벗은 채언은 통유리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보다 해가 길어진 것이 보였다. 그래도 얼마간 밝았던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리기 전에 채언은 고개를 돌렸다. 물 밖에 물안경을 놓아두고 옆에 팔을 올렸다.

전에 영웅이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은 혼자 있기에 너무 크고 어두침침하다고. 그때는 집이 넓고 깨끗해서 좋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영웅의 집은 혼자 있기에는 너무 크고 삭막한 공간이었다. 차라리 사람들이 많은 바깥으로 나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디에 가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온 곳이 수영장이었다. 젖은 팔 위에 볼을 기댄 채언은 눈을 감았다.

건영은 어제부터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얀 봉투 안에 들어있던 돈을 돌려주기 위해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보내보았지만, 답장이 없었다.

돈도 없을 텐데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제대로 머물 집은 있을까. 온갖 걱정이 채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건영도 떠난 자신을 생각하며 이렇게 애를 태웠을까. 그동안 오는 연락을 무시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상처받은 얼굴로 카페를 나서던 건영을 떠올리자 손발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듣던 채언은 숨을 들이마신 뒤 물속으로 잠수했다.

귓가가 먹먹했다. 물안경을 쓰지 않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물 안에 가만히 떠 있던 채언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공기 방울이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폐 안에 있는 공기가 모두 빠져나갔다. 숨을 쉬지 않는 채로 조용한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눈을 뜬 채 홀로 남은 방에 앉아 사진을 보던 것보다 평온한 기분이 들어서 채언은 잠수한 상태로 한계까지 버티는 중이었다. 물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금방 희석되어 퍼질 것 같았다.

“허억…!”

갑작스레 물 위로 끌어 올려진 채언은 커다랗게 숨을 마시며 기침을 했다.

“왜 이렇게 잠수를 오래 해요?”

“콜록. 네?”

휘저어진 물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영웅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콜록.”

“채언 씨가 수영장에 간다고 하길래.”

수영장에 오기 전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채언은 물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 위로 올라와 기침을 하고 나서야 폐가 아팠다.

어떻게 매번 타이밍 좋게 눈앞에 나타날까. 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이렇게. 숨 쉬는 게 아프게 느껴질 때마다 그가 눈앞에 있었다.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알려줄게요. 수영하면서 숨 쉬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채언의 대답에 영웅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얼마나 잠수할 수 있나 궁금해서 그랬어요.”

“무작정 숨을 참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데요.”

채언은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있는 영웅의 손을 잡아 내렸다.

“저 이제 수영 잘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연습 많이 했어요? 어제도 수영장에 다녀왔다고 하더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것에 채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되더라고요.”

그리고 몸을 돌려 손가락으로 레인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서 저기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어요.”

“흠.”

탐탁잖은 듯한 소리에 채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진짜예요.”

“그래도 나한테 배워요.”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요. 한번 보여드릴까요?”

“그건 끝까지 가는 게 아니잖아요.”

영웅은 채언이 벗어둔 물안경을 잡아 건넸다.

“숨 쉬는 법을 배우면 저 끝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 있어요.”

채언은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근데 채언 씨 수영하는 건 보고 싶어요.”

입꼬리를 올려 웃는 영웅의 모습이 시원해 보였다. 채언은 양손을 들어 자신의 입꼬리에 가져다 댄 뒤 입술 끝을 위로 올려보았다. 채언의 행동을 지켜보던 영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표님은, 어떻게 이렇게 웃는지 궁금해서요.”

“어떻게?”

영웅은 채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전 채언의 행동을 따라 해 보았다. 손가락을 들어 입꼬리에 가져다 댄 뒤 위로 살짝 올렸다.

“엄청 시원하게 웃으셔서요.”

“그냥 웃는 건데.”

칭찬을 받은 건가. 입꼬리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린 영웅은 채언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전에 한참 치료를 받을 때였다. 오랫동안 웃지 않아 얼굴 근육이 굳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괜찮아진 후에 거울을 보며 몇 번씩 웃는 연습을 했었다. 그때는 혼자서 거울을 보며 웃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웃으면, 내 입술이 마음에 들어요?”

장난 반, 기대 반의 물음이었는데 멀뚱히 쳐다보는 채언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이건 좀 아닌가. 영웅은 방금 그렇게 물은 것을 빠르게 후회했다.

“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영웅은 채언에게 방금 뭐라고 했냐고 되묻지도 않고 눈을 깜빡거렸다.

“대표님은 좀….”

좀? 조금? 영웅은 채언의 뒷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보통 이런 말이 나오면 뒷말은 아쉽게 끝나기 마련이었다.

“제가 이런 말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망설이는 채언을 보니 안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아까 입술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을 때, 네, 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안 좋은 말이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채언이 뭐라고 할지 너무 궁금해서 영웅은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대표님은 좀 잘생기셨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건지,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부럽기도 하고.”

말하는 채언의 머릿속에 그동안 영웅의 웃던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웃던 얼굴을 마지막으로 떠올린 뒤, 다시 현실의 그와 마주했을 때 채언은 당황하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문 영웅은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보다는 익숙해지긴 했지만, 자신도 누군가 방금 같은 말을 해올 때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볼을 문지르곤 했으니까.

“죄송해요. 이런 말은 역시.”

“채언 씨.”

나지막이 채언을 부른 영웅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뒤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하! 한숨을 쉬었다.

“네.”

“내가 잘생겼어요?”

“네… 죄송…….”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눈을 가린 손 아래로 영웅의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그 말에 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끄러워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네?”

“혹시 뭐,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냐고요.”

“없는데요.”

눈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치운 영웅은 눈썹을 모으며 입꼬리에 힘을 주었지만 결국 표정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별안간 그가 눈을 마주쳐 오는 것에 채언은 뒷걸음질 쳤다. 여전히 웃는 게 잘생기긴 했는데, 지금은 좀 그랬다.

“채언 씨.”

“네.”

“어디가요? 어디가 제일? 입술이?”

“네?”

“코는? 아니면, 눈은요? 어릴 때부터 눈 색깔이 예쁘다고 자주 들었는데.”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온 영웅이 눈을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이 내려갔다 올라가는 속도가 느렸다. 장난기 서린 농담이 분명했지만 채언은 그걸 능숙하게 받아칠 수가 없었다.

“저, 저 수영하러 갈래요.”

영웅은 옆 레인으로 가기 위해 물속으로 몸을 숙이는 채언의 허리를 잡아챘다.

“숨 쉬는 법 배워야죠.”

“그건 나중에요.”

“그런데 채언 씨, 이런 말을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면, 평소에 이런 말을 많이 들었나 봐요?”

“네? 아뇨.”

채언의 귀가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듣는 걸 안 좋아한다니 말하기 미안하지만, 나도 채언 씨가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요? 채언 씨는 진짜로.”

채언은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다가 자신의 두 귀를 막았다. 옆에서 영웅이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려 더 부끄러웠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말 안 할 거예요.”

“왜요. 더 해줘요.”

귀를 막아도 유쾌한 웃음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채언은 소심하게 물을 퍼서 영웅에게 끼얹는 것으로 복수했다.

영웅과 함께 집에 들어올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채언의 기분은 다운되었다.

방바닥에는 어제 펼쳐놓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책상 위의 사과도 마찬가지였다. 채언은 방의 불도 켜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돈이 든 봉투는 건영이에게 다시 돌려주고 사진은 캐리어에 넣어놓고. 그리고 사과는…….

고개를 숙인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머리를 흩트리다가 캐리어 앞으로 다가갔다. 꺼내진 옷 중 아무것이나 주워 입고 어질러진 방을 나왔다.

채언은 무기력함을 느낄 때마다 식기세척기를 사용했지만, 오늘 저녁 설거지는 손으로 하는 중이었다. 사용한 그릇은 별로 없었지만, 그릇을 씻는 속도는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주변을 기웃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소파에 앉아 채언을 보던 영웅은 물소리가 끊기자마자 휙!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자연스럽게 채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밥을 먹을 때 보니 채언의 눈꺼풀이 조금 무거워 보였다. 어제도 수영을 하고는 피곤하다며 일찍 잠든 사람인데 오늘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피곤하죠? 오늘도 일찍 자알….”

하지만 영웅은 소파 옆자리에 앉는 채언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조금 이따 자려고요.”

어제 많이 자서요. 덧붙인 채언은 TV를 보기 시작했다. 영웅이 리모컨을 넘겨주려 하자 채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보고 싶은 것이 있어 소파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스포츠 채널을 보면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TV 소리는 작았고, 영웅의 목소리는 낮고 편안해서 채언은 그의 말에 열심히 대꾸하다가도 눈이 감겼다. 어제 많이 자지 못한 데다, 오늘 수영을 배운답시고 어린애들처럼 영웅과 장난만 치다 들어왔기 때문에 몸이 피곤한 탓이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기 싫어서 설거지도 최대한 시간을 끌며 했던 채언은 눈이 감길 때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이 통했는지, 졸리지만 소파에 앉아 있을 만했다.

하지만 채언은 자신의 눈이 한번 감기면 꽤 오랫동안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채언은 눈을 빠르게 한 번 깜빡였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눈이 감겨있는 시간은 몇 초에서, 몇 분씩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옆에 앉은 상대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웅은 자신이 한 말에 가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다. 옆에서 채언의 고개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가 말로 대답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구나 생각한 것이었다.

영웅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였다.

툭. 영웅의 어깨에 기분 좋은 무게가 실렸다. 조용히 시선을 내리자 눈을 감고 있는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TV 속에서 선수가 점수를 올리자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줄여놓은 음량 속에서 최대한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이 깰까 봐 영웅은 소리를 더 줄이고 싶었지만, 어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역시나 얕게 잠들어 있었는지, 이어지는 함성에 감겨있던 눈이 스르륵 뜨였다.

“…네.”

그러고는 다시 검은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영웅은 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막았다.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TV를 보는 동안 자신이 한 말에 채언이 무심한 대꾸를 한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결에도 열심히 대답해준 사람을 오해한 것이 미안했다.

영웅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채언 씨.”

“…네.”

조심히 묻는 소리에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채언이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점점 깊은 잠에 빠지고 있는 듯했다.

“들어가서 자야죠.”

대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소리를 낸 후 채언의 얼굴이 살짝 앞으로 기울었다. 고민하던 영웅은 조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언의 목과 다리 사이에 팔을 넣어 몸을 들어 올린 뒤, 소파 위에 완전히 누울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조금 더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영웅은 그렇게 한참을 TV를 켜놓은 채 소파 밑 카펫에 앉아있었다.

영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화면을 바라보는 도중 간간이 잠든 채언을 돌아보다가, 결국 소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조심히 손을 뻗어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채언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보았다.

“채언 씨.”

깊이 잠들었는지 채언은 사탕을 빨듯이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고 말았다.

“채언 씨, 여기서 잘 거예요?”

영웅은 손나팔을 만들어 입가에 가져다 댄 뒤 더 작게 속삭였다. 사실 그다지 깨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불 가져다줄까요?”

똑바로 누워있던 채언은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팔을 들어 그 안에 얼굴을 숨겼다.

“그럼. 저 채언 씨 방에 들어갔다 나올게요.”

“으응….”

아까보다 더 작게 말한 영웅은 바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은 언제나 따듯했지만, 영웅은 이불 없이 잠든 채언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소파는 침대보다 불편할 테니까, 이불을 가져오는 김에 베개도 함께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채언의 방 말고 다른 곳에서 침구를 가지고 와도 될 일이었지만, 익숙한 것을 덮고 자야 푹 잘 수 있는 법이었다. 속으로 그런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영웅은 복도를 걸어 끝방으로 향했다.

채언의 방문을 연 영웅은 불을 켜고 잠시 멈칫했다. 몇 번 들어와 본 적은 없지만 언제나 깔끔하다 못해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데 전과 다르게 방 안은 어질러져 있었다. 더럽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과 비교해보자면 그랬다.

방 한가운데 활짝 펼쳐진 캐리어 옆에는 개어놓은 옷들이 꺼내져 있었고 액자 같은 것도 놓여있었다. 그 위에 벗어 놓은 건지 정리를 하다 만 건지 모를 구겨진 옷이 펼쳐져 있어서 어떤 사진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도 선인장 말고 다른 게 올라와 있었다. 이어폰과 사과. 알 수 없는 조합이었다.

이어폰이야 그렇다 쳐도 사과는 왜 포장된 채로 책상 위에 있는 건지. 혹시 새로운 비상식량 같은 건가. 고개를 든 영웅은 방 한쪽에 놓인 채언의 마카로니를 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와 양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사과가 먹고 싶어서 사놓은 걸까. 채언은 가끔이지만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사다 챙겨두는 것 같았다. 딸기 케이크도 그렇고 초콜릿도 그렇고.

어질러진 방을 둘러보던 영웅은 침대 위의 베개와 이불을 가져가지 않고 불을 껐다.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닫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 이 집이 조금 편해진 걸까. 그동안 캐리어도 풀지 않았다니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지만, 어쨌든 이제라도 캐리어 속 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채언이 이 집에 오래 있을 마음이 생겼다는 뜻인 것 같았다.

바닥에 놓여있던 액자 속 사진이 궁금했다. 어릴 때 사진이려나. 채언은 액자를 책상 위에 둘까? 아니면 침대 헤드? 오랜만에 쇼핑을 좀 해볼까 싶었다. 전부 채언에게 줄 것으로. 작은 캐리어 안에 짐이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여러 번 선물을 해주다 보면, 다시 짐을 챙기는 게 귀찮아서라도 오래도록 이 집에 있어 주지 않을까. 영웅은 이 집에 조금 더 익숙해진 몇 년 뒤의 채언을 상상하며 혼자 웃었다.

잠결에 방에 들어가겠다고 도둑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혹시 어질러진 방 안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불은 다른 곳에서 가져가기로 했다.

자신의 이불까지 가져와 바닥에 펴놓은 영웅은 거실 조명을 조절해 불빛을 약하게 켜두었다. 그리고는 이불 위에 엎드려서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업무를 보듯 진지한 얼굴로 이런저런 상품을 살펴보았다.

잠꼬대도 하지 않고 곤히 자는 채언을 가끔 살피던 영웅은 옆에 가져다 둔 베개 대신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귀마개는 여전히 케이스에 들어있었다.

채언은 방금 배송되어온 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아야 할지, 트리 옆에 놓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하던 채언은 일단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화분은 손에 든 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많다지만, 비슷하게 생긴 것들도 많겠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곧 영웅이 퇴근해 집에 들어올 시간이었다. 지금은 아마 운전 중일 것이었다. 핸드폰을 든 채언은 메시지 버튼을 누를까 전화 버튼을 누를까 고민하다가 수화기 모양을 눌렀다.

-여보세요. 채언 씨?

전화를 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대표님. 전데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집에 거의 다 왔는데.

메시지는 일상적으로 나누게 되었지만, 전화는 아직 몇 번 나누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채언은 먼저 전화를 걸어놓고도 스피커를 통해 영웅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어색해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는 영웅을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별일은 아닌데요.”

-그래요? 다행이네. 그럼 심심했어요?

별일이 없다고 말하자마자 영웅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그는 또 장난을 치려는 것 같았다. 채언은 소리 없이 웃으며 화분을 만지작거리다가 소파로 가서 앉았다.

“퀵으로 뭐가 좀 왔는데요. 이걸 냉장고에 넣어야 할지 거실에 두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뭐가 왔는데요?

“하나는 케이크 상자 같고, 하나는 화분이에요.”

-어… 혹시 보낸 사람 이름이 카일라였어요? 카일라 영원 서.

“네. 맞아요. 대표님 누나분이시죠?”

-맞아요. 혹시 그 화분…….

하아. 핸드폰 너머로 영웅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화분에 브로콜리가 꽂혀있죠?

채언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네에….”

역시 브로콜리가 맞았다. 화분에 심어져 있어서 브로콜리와 비슷한 작은 나무가 아닐까 했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잠깐만요, 하더니 영웅의 말이 잠시 멈췄다. 아마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듯했다. 채언은 얌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다시 들려올 말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매년 그러거든요. 생일 때마다.

“네?”

채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생일? 누구의 생일을 말하는 거지. 영웅이 덤덤하게 내뱉은 단어 때문에 채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카일라 님의 생일이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하하 웃었다.

-카일라 님이요? 누나한테, 님 자를 붙일 필요는 없는데.

“대표님. 그래서 누나분 생일이 맞나요?”

태평한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뇨. 내 생일인데요. 내가 브로콜리를 싫어, 아! 그게 아니라, 별로, 어… 엘리베이터가 왔네. 타고 올라갈게요!

뒷말을 흐리던 영웅은 갑자기 엘리베이터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채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손목을 움직여 화면을 들여다보았지만, 통화는 종료된 상태였다. 핸드폰 화면에는 5월 6일, 오늘 날짜와 함께 심각한 표정의 채언의 얼굴이 비쳤다.

현관문을 연 영웅은 활짝 웃었다. 막 현관 복도를 걸어 나오던 채언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채언 씨.”

“왜 말 안 하셨어요?”

채언의 손에는 브로콜리 화분이 들려 있었다. 영웅은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려 그것을 보았다.

“뭘요?”

“오늘이 생일이라는 거요.”

말을 마친 채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오늘이 그의 생일인 걸 알았다면 아침이라도 제대로 차려줬을 텐데. 아니, 퇴근 전에만 알았어도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못 견디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들어가요. 우리.”

영웅은 고개를 숙여 채언과 눈을 마주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채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웅은 넥타이를 풀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은 자켓 위에 올려놓았다. 목덜미를 매만지는 그의 눈썹이 난감한 듯 움찔거렸다. 영웅이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그러고 있는 것은, 옆에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채언 때문이었다.

“생일을 크게 챙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랬어요.”

“하지만 뭐가 먹고 싶다는 정도는… 말씀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랬으면… 지금은 제대로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고.”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브로콜리를 만지작거리는 채언을 보면서 영웅은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한국에서는 특별히 생일을 챙기지 않아도 아침에 미역국 정도는 먹는걸요.”

영웅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자신의 국적은 미국이라고 말해봤자 지금 상황에서 나아질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채언이 이렇게 미안해할 줄 알았다면 생일을 미리 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뜬금없이 내 생일은 5월 6일입니다,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하고 채언에게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원래 생일은 조용히 보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채언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영웅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면서, 생일은 조용히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니.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길래 자신의 말을 믿어주나 싶었는데 채언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영웅은 억울했다. 생일을 조용히 보내는 걸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에 스치듯 물었을 때, 채언은 오늘 아무런 약속이 없다고 했었다. 그럼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둘이 저녁을 보낼 것이었다. 그거면 됐는데.

“진짜로요. 원래 생일은 좋아하는 사람하고 조용히 보내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말한 영웅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뒤로 돌렸다. 그 상태로 몇 걸음 걸어 냉장고 문을 열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채언 씨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고. 나는 이렇게 둘이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

냉장고 문을 꽉 잡고 있는 영웅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제야 채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탁 위에 브로콜리 화분을 내려놓고 영웅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오늘 같은 날은 생일 당사자가 보내고 싶은 대로 보내는 게 제일 좋은 건데.”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영웅이 파티를 즐길 리 없었다. 채언은 조금 전 그를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아까보다 더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영웅의 눈은 크게 뜨여있었다. 하마터면 이런 식으로 멋없게 고백할 뻔했다. 실수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어 다행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당황한 표정을 숨긴 것도 좋은 임기응변이었다.

“저는 미리 알았으면 준비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죄송해서.”

채언은 여전히 냉장고만 들여다보고 있는 영웅의 뒤에서 손을 모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까 그렇게 따지듯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서운한 소리나 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서운해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채언 씨가 죄송할 건 없어요.”

긴장하고 있었는데 영웅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런데 냉장고는 왜…….”

채언은 여전히 냉장고 문을 잡고 있는 영웅에게 물었다.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시는 거면.”

“그게 아니라, 어, 술. 와인! 찾고 있었어요. 케이크랑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채언 씨도 와인 괜찮죠?”

와이셔츠를 입은 영웅의 등을 바라보던 채언은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 말이나 하며 냉기를 받고 있던 영웅은 팔을 잡아 오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와인은 와인 냉장고에 있는데요.”

냉장고 문을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은, 이제 채언에게 잡혀있었다.

“그럼 다른 거 말고 지금 바로 케이크랑 와인이 드시고 싶으신 거죠?”

와인 냉장고 앞으로 향하는 채언의 뒤를 따르며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녁은 나가서 먹자고 하고 싶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채언이 빼준 의자에 얌전히 앉은 영웅은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향긋한 멜론 케이크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가운데엔 꽃 모양 초가 미리 꽂혀 있었다. 초까지 케이크 디자인에 포함된 것이었다.

초에 불을 붙이기 전에 채언은 조명을 약하게 조절하고 돌아왔다.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던 영웅은 채언이 의자에 앉자 물었다.

“채언 씨는 생일날 조금 떠들썩한 게 좋아요? 사람 많고 그런?”

영웅은 채워진 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채언의 취향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와인 잔을 받아든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생일을 특별히 챙기진 않아서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던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까지 채언이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나. 혹시 특별히 챙기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의 생일 한정인 것일까. 영웅은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보며 채언의 모순된 말과 행동을 납득해보려 했다.

“그 말은 조용한 게 좋다는 거죠?”

“아뇨. 생일을 따로 챙기지 않는다는 건데요.”

“어어?”

와인 잔이 넘치기 직전에 병을 기울인 영웅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생일을 안 챙겨요?”

“네.”

“혹시 이유가 있어요? 종교적인 건가.”

“아뇨. 종교는 없어요.”

이거 붙여도 될까요? 채언은 손에 쥔 성냥을 흔들었다. 영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익 소리와 함께 성냥에 불이 붙었다. 꽃 모양 초에 불꽃을 가져다 대자 금방 불이 옮겨 붙었다.

성냥을 흔들어 끈 채언의 손 옆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왜 생일을 안 챙기는지 물어봐도 돼요?”

종교적 이유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결국 영웅은 채언에게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가운데 놓인 불 때문에 서로 일렁이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 이유는 없어요. 저한테는 보통날과 비슷해서.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날이 아닐 뿐이에요.”

채언이 내려놓은 꺼진 성냥에서는 탄 냄새가 났다.

“태어난 날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요.”

“채언 씨.”

녹기 시작한 초를 보고 있던 채언이 눈을 들었다.

“생일이 언제, 혹시 지난 건 아니죠?”

까만 눈에 일렁이는 붉은 불꽃이 보였다. 영웅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날이 생각났다. 전구가 켜진 트리 앞에 서 있던 채언의 얼굴. 빛 때문에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얼굴이.

“지났어요. 4월이거든요.”

마치 오늘이 며칠이냐는 질문에 답하듯 덤덤한 채언의 대답에, 영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말 안 했어요.”

“제 생일을요?”

“네.”

“그때는 제 생일을 말씀드려야 할… 이유가…….”

채언은 문장을 마무리 짓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끝맺음 되지 않은 말은 두 사람을 상처 입혔다. 말을 한 채언 자신과 그것을 듣고 있던 영웅 모두를.

그때. 채언이 자신의 생일을 영웅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생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딱히 영웅에게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고, 가끔 보너스를 챙겨준다고 해서 생일까지 챙겨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까. 채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새삼 그와 자신의 위치가 마음속에 되새겨졌다.

촛농이 떨어졌다. 꽃 모양 초가 녹으면서 하얀 크림 위에 색깔을 남기고 있었다. 그날은 멜론 케이크가 아니라 딸기 케이크가 놓여있었는데.

“조금, 서운하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채언은 왜냐고 대꾸하지도 못한 채 그를 보기만 했다.

“4월이면 우리 둘이 꽤 친해졌을 때라고 생각하는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영웅을 보자 채언은 심장이 아릿해졌다.

“아까 채언 씨가 왜 그렇게 서운해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요. 나도 미리 말 안 했잖아요.”

영웅은 식탁 위로 팔을 올려 손에 턱을 괴었다. 커다란 손에 입술이 반쯤 가려졌다. 내리깐 눈의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초록색 눈동자에 채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른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은 채언은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저도.”

케이크를 보고 있던 영웅의 시선이 채언을 향했다.

“지금은 대표님과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영웅이 대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금 말씀하신 기분이랑 제 기분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웅이 자신을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자 채언은 그의 눈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초가 녹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인 채언은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둘이 같을 것 같아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채언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빛이 일렁이는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반쪽이 가려진 그의 입술은 아까와 달리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마도요.”

영웅의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초. 얼른 부세요.”

“노래 불러주면요.”

“무, 무슨 노래를요.”

“생일 축하 노래요. 난 그 노래 안 불러주면 초 안 부는데. 사랑하는 앤드류의 생일 축하합니다, 불러줘요.”

꽃 모양 초는 거의 녹아 꽃잎의 형체가 사라질 정도였다. 이러다 초가 아예 사라질 것 같아서 채언은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영웅의 앞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기는 싫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민망해서 다른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름을, 하물며 노래를 부르면서 호명해달라니. 부끄러웠다.

“다른 거요. 노래 말고 다른 거. 다른 걸 말씀하시면 그거 들어드릴게요.”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나. 혼란스러운 표정의 채언을 보자 영웅은 조금 남아있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알겠어요. 그럼 채언 씨한테 바라는 거 말고, 이쪽에 다른 소원부터 빌죠. 뭐.”

영웅은 나머지 팔도 식탁 위로 올려 두 손을 포갰다.

“초. 같이 불어요.”

“제 생일도 아닌데요.”

“확률을 나눠줄게요. 우리 둘이 오십 대 오십으로.”

이러다 다 녹아요. 영웅은 촛불을 향해 턱짓 하며 재촉했다.

채언은 그를 따라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본 영웅은 웃으며 눈을 감았다.

“채언 씨. 어떤 소원을 빌 거예요?”

눈을 감지 않은 채언은 기도하듯 맞잡은 자신의 손 너머 영웅의 모습을 보았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채언은 자신의 마지막 바람을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맞다! 그렇죠. 나도 조용히 빌어야겠다.”

영웅이 소원을 비는 동안 채언은 다문 입 위에 맞잡은 손을 대고 있었다. 눈을 감지도 소원을 빌지도 않았다.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둔 그의 모습을, 오늘이 아닌 날 다시 볼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무는 대신 채언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소원은 스위스에 가서 평온하게 눈을 감는 거예요. 누구의 인생도 망치지 않는 방법으로 죽고 싶거든요.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나이를 넘겨서 살 생각이 없어요. 그보다는 어려야, 다시 만났을 때 그분들이 날 받아줄 것 같거든요. 고마워요. 마지막 생일은 의미 있었어요. 적어도 기억할 만했거든요.

그런 말을 한다면.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채언은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영웅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채언은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납작해진 초를 보고 있었다.

“소원 빌었어요?”

영웅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불까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채언은 그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지 않고 동시에 초를 불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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