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채언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저게 왜 영웅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거. 어디서 나셨어요?”
“소파 밑에 끼어 있던데요.”
왜 소파 밑에 여권이….
채언은 여권을 손에 쥐고 있던 날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날, 공사장 앞에서 영웅이 쓰러지고 난 뒤에 병원에 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러고 나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다시 그에게로 달려갔으니, 만약 여권이 발견된다면 후드 주머니 속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집에 와서 무얼 했었지. 소파를 바라보던 채언의 눈앞에, 홀로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파에 혼자 앉아서 여권을 꺼내 보며 울던 그날의 자신이었다.
채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동안 안 좋은 생각은 하지 않고 편안했는데. 홀로 울던 기억에 순식간에 발목이 잡힌 기분이었다.
“채언 씨.”
“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채언은 영웅을 돌아보았다.
“여기요.”
초록색 여권을 내미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온화했다. 평범한 여권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보통은 여행을 가기 위해 여권을 만들지, 자살하러 가기 위해 여권을 만들지는 않으니까. 채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밀어 여권을 넘겨받았다. 딱 하루 쥐어 보았던 딱딱한 종이의 촉감이 낯설었다.
“표정을 보니까 채언 씨도 이게 왜 여기 있나 의문스러운가 본데요?”
“네. 잃어버린 줄 몰랐어요.”
“최근에 만든 거 아니에요? 엄청 빳빳한데.”
“네. 얼마 전에.”
채언은 손을 등 뒤로 돌려 바닥에 여권을 내려놓았다.
“어디 갈 거예요?”
“네?”
“여행 가려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오는 영웅에게 채언은 말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그냥, 만들어봤어요. 지금까지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저는 없어서.”
“그렇구나.”
쑥스러운 제안을 하듯 영웅은 목덜미를 긁었다.
“혹시 어디 갈 거면,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채언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애써 입술 모양을 일자로 유지하면서, 등 뒤에 숨긴 손가락을 손톱으로 눌렀다.
진짜로 이 여권을 가지고 그와 여행을 간다면 어떨까. 어떤 기분이 들까. 잠시 생각하던 채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영웅에게 다가갔다.
곁으로 다가와 풀썩 주저앉은 채언을 보던 영웅은 갑자기 품에 안겨 오는 몸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익숙한 바디워시 향기가 났다. 샴푸 향기도 자신의 것과 같았다. 목에 기댄 자그만 머리통에 입을 맞춘 영웅은 채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런 식으로 안겨 온 적은 없었는데. 확실히 이런저런 스킨십을 하다 보니 채언에게도 자신이 많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영웅은 기분 좋게 웃으며 채언의 머리칼에 볼을 문질렀다. 왜 자신을 끌어안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는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사실, 엄청나게 가고 싶었어요. 글램핑.”
영웅이 팔에 힘을 주기도 전에, 채언이 먼저 그를 더 꽉 안았다. 그래서 영웅은 다시 한번 까만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맞닿은 채언의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정말 가보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다음에는 누가 집에 찾아온다고 해도 받아주지 말아야겠어요. 우리끼리 놀러 가게.”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렇게 안겨있자 빠르게 뛰던 채언의 심장이 안정적인 속도를 되찾았다. 굳어있던 몸이 풀리자 급격히 허기가 밀려들었다.
전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채로 몇 끼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채언은 이런 식으로 허기를 느끼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잠시 망설이던 채언은 고개를 들고 영웅의 잠옷을 조심스레 몇 번 잡아당겼다.
“왜요?”
애틋하게 마주쳐오는 다정한 얼굴을 보며 채언은 입을 열었다.
“저… 배고파요.”
“아. 맞다! 배달시키기로 했는데. 어, 잠깐만요. 핸드폰이.”
뒤늦게 핸드폰을 찾았을 때는 이미 치킨집 영업시간이 종료된 후였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채언의 낯빛을 보고 당황하던 영웅은 아까 마트에서 사 온 유리병을 열었다.
덜어놓은 통조림 옥수수를 퍼먹는 채언을 보면서, 영웅은 구운 소시지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까 까먹고 하지 못한 말을 슬쩍 던져보기로 했다.
“채언 씨.”
영웅의 부름에 채언은 입에 든 것을 서둘러 씹고 대답했다.
“네.”
“여권 사진 말고, 혹시 다른 사진은 없어요?”
“사진이요?”
채언은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허벅지를 덮은 가운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어릴 때 사진 같은 거요.”
채언의 머릿속에 캐리어 속 액자 두 개가 스쳐 지나갔다. 독사진 하나와 건영과 같이 찍은 사진 하나.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을 바닥에 문지르던 채언은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달콤한 옥수수를 몇 알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가족사진이 하나 있어요.”
며칠간 잊고 지냈던 건영을 생각하며, 채언은 숟가락으로 옥수수가 든 그릇을 긁었다.
“가족사진 하나?”
영웅은 채언의 방에서 보았던 액자 두 개를 떠올렸다. 채언은 혹시 그가 가족사진을 보여 달라고 할까 봐 말을 돌렸다.
“그게 저, 졸업앨범도 있어요.”
졸업앨범이라는 말에 영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릇이 비어 가는 동안 지치지도 않고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영웅 때문에 채언은 소시지를 먹다가 피곤해서 조는 척을 해야 했다.
거실을 울리는 클래식 벨 소리에 채언은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버튼을 누르자 작은 화면에 초인종을 누른 사람의 얼굴이 떴다.
“안녕하세요.”
채언은 얼떨결에 인터폰을 앞에 두고 묵례를 했다. 갑작스러운 인사말에 인터폰 너머의 영원이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채언은 진짜로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조금 전의 행동을 들킨 것 같아 머쓱했다.
“문 열어드릴게요.”
점심을 먹고 피트니스 센터에 간 영웅이 돌아온 줄 알았는데,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원이 방문할 줄 몰랐다. 버튼을 눌러 문을 연 채언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른 뒤 신발장 쪽으로 달려갔다.
잠금이 풀린 문을 열고 들어온 영원은 신발장 앞, 집 안 복도에 서 있는 채언과 마주쳤다. 시선을 내려 보니 손님용 슬리퍼가 미리 꺼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채언이 인사를 건네자, 잠시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영원의 입술이 열렸다.
“작년에 뵈었죠? 반가워요.”
누구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채언은 영원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네. 면접 보았을 때요.”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고요?”
“네.”
“미안하지만, 성함이?”
“심채언입니다.”
“서영원이에요.”
악수를 청해오는 영원에게 채언도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손은 금방 떨어졌다.
“이름까진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영원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복도를 디뎠다.
당당하게 앞서 걷는 영원의 뒤를 따라 거실로 간 채언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 뒤 빠르게 액정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영원은 소파에 앉기 전에 거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전에 없던 화분이 잔뜩 있었다. 채언이 보지 못한 사이 영원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집주인은 어디 갔나 보죠?”
“잠깐 피트니스 센터에 가셨어요.”
영원은 손목을 들어 말없이 시계를 확인했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가신 지 조금 됐거든요.”
“그렇군요.”
허리를 세우고 소파에 바르게 앉은 영원과 서 있는 채언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밝은 색깔의 눈동자가 채언 쪽을 향했다.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채언은 손목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과일 드시겠어요?”
“일요일인데, 심채언 씨는 쉬는 날 아닌가요?”
영원의 말은 자신을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채언 또한 그 뜻을 알아들었으나, 영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은 입주 도우미로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선이 그인 것 같아 채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맛있는 사과가 있어서요.”
영원은 말없이 채언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채언은 영웅과 먹기 위해 사과를 깎을 때보다 지금 더 칼질에 정성을 들이고 있었다.
잠시 후. 하얀 접시 위에 두 귀가 뾰족하게 선 토끼 모양 사과가 정렬됐다.
포크와 함께 사과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언은 슬쩍 뒤로 물러나 영원의 반응을 살폈다. 껍질은 맛이 없기 때문에 귀를 조금 얇게 깎기는 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사과가 그래도 제법 토끼 같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포크를 들던 영원은 사과를 찍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내 껍질이 없는 쪽에 포크를 꽂고 눈앞으로 손을 가져왔다.
“동물 모양인가요?”
사과 모양을 가늠하는 눈이 날카로웠다.
“네.”
채언은 전에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주방에 들어가 어깨너머로 과일을 손질하는 것을 배운 적 있었다. 오랜만에 모양을 낸 거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껍질을 깎을 수 있었다. 영웅에게도 해준 적 없는 토끼 모양 사과였다.
“뿔이 두 개인 거 보니까. 달팽이네요.”
“네? 달팽….”
포크를 든 영원과 채언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곧게 바라보는 시선에 채언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네. 맞아요.”
아삭. 영원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물 때였다. 현관 쪽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거실 쪽으로 다가왔다.
“채언 씨. 누나가.”
소파에 앉아있는 영원과 옆에서 쟁반을 들고 있던 채언이 동시에 영웅을 쳐다보았다. 급하게 달려온 영웅의 머리카락은 덜 마른 데다, 숨을 몰아쉬는 가슴은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랜만이야.>
포크를 쥔 영원의 손을 보던 영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채언 씨. 그리고 누나는 생각보다 빨리 왔네.”
<몇 시에 도착 예정인지 메일 보냈잖아. 난 정확하게 왔어. 앤드류.>
“그 메일을 방금 보냈잖아.”
소파 앞으로 다가온 영웅은 습관처럼 한쪽 팔로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기 한국이야. 한국말로 해.”
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나가 저녁에 올 줄 알았어요. 메일 보자마자 최대한 빨리 뛰어온 건데, 벌써 와 있네요.”
“네에.”
대답하는 채언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영웅은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영원을 보았다.
“사과 깎아 달라고 한 거야?”
“아니에요. 이건 제가 먼저 준비해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요?”
엄지로 채언의 옆구리를 슥슥 문지른 영웅은 다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거 모양이.”
사과 하나를 집어 든 영웅은 뾰족하게 솟은 토끼 귀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채언은 기대를 가지고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모양이 꼭, 하.”
“앤드류.”
하트모양 같다고 말하려던 영웅의 말이 가로막혔다.
“스네일.”
“뭐?”
“이거. 달팽이라고.”
말을 마친 영원이 사과를 베어 물자 아삭 소리가 났다.
“와. 정말 달팽이 같아요. 채언 씨.”
사과 모양이 달팽이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영웅은 채언의 눈치를 보며 태연히 말했다.
“아… 정말요.”
“네, 정말로.”
영원은 동생을 올려다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쟁반이랑 사과 껍질 좀 정리할게요. 말씀 나누세요.”
아삭.
채언은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영웅을 밀어내고 부엌 쪽으로 갔다. 그리고 싱크대 안에 들어있던 과도를 꺼내 쟁반과 함께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영웅은 집어 들었던 사과를 내려놓고 서둘러 부엌 쪽으로 향했다.
아삭.
“채언 씨.”
“네.”
“누나랑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아삭.
“나 좀 봐요.”
채언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은 영웅은 채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방금 오셔서 사과만 깎아드렸는데, 대표님이 오신 거예요.”
“그랬어요?”
아삭.
쪽. 영웅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눈이 거실 쪽을 돌아보았다. 영웅의 시선이 채언을 따라갔다.
채언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영웅을 밀어내었지만, 영원은 이미 포크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밝은 색의 눈동자가 부엌의 두 사람을 응시하다 멀어졌다.
“서영웅. 잠깐 네 방에서 얘기 좀 하자.”
슬리퍼 소리도 나지 않는 정확한 걸음으로, 영원은 집에서 제일 큰 방 쪽을 향해 걸어갔다.
거실을 나간 영원을 보던 영웅은 채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누나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풀어지려 하자, 채언은 급히 영웅의 한쪽 손목을 잡았다.
“카일라 님이 보신 것 같아요.”
영웅의 눈썹이 위로 조금 올라갔다.
“뭘요?”
“방금 대표님이 저한테 하신 거요.”
영웅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채언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불안이 서린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는, 채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 깍지를 꼈다. 볼이 아닌 입술에 입 맞춘 뒤 다정하게 눈을 마주했다.
“이거 때문에 이야기하자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서. 그리고 누나는 애초에 다른 일 때문에 이 집에 온 걸요.”
채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 물지 말고요.”
영웅이 엄지로 채언의 입술 위를 훑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는 거, 채언 씨가 싫어한다면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싫은 건 아니에요.”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히 뒷말을 이어나갔다.
“뽀뽀해 주시는 것도, 좋아해요.”
영웅의 입술이 활짝 벌어졌다. 눈까지 접어 웃은 그는 채언의 등을 두어 번 토닥거려 준 뒤 몸을 뒤로 물렸다.
“나도 좋아해요.”
눈꺼풀 위에 한 번, 볼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세 번의 입맞춤이 채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혹시, 거실에 있기 불편하면 방에 들어가 있어도 되고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럼, 얘기하고 올게요.”
“저기.”
채언은 풀어지는 손을 잡아당겼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채언을 보던 영웅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조금 이따가요.”
잠시 눈을 굴리던 채언은 미소 지으며 영웅의 등을 밀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영웅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침대 옆에는 속이 텅 빈 채언의 캐리어가 서 있었다.
지난밤. 나란히 서서 이를 닦을 때도 영웅은 채언에게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결국 채언은 영웅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것과 복도 끝 방에 있는 짐을 이쪽 침실로 몇 개 옮기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고 제안했다. 영웅의 선택은 후자였다. 옮길 짐은 천천히 고르겠다며, 그전에 채언이 보증처럼 맡긴 것이 캐리어였다.
미소 띤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는 영웅의 눈에 침실 발코니 쪽 유리문이 반쯤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발코니 앞으로 걸어간 영웅은 팔짱을 낀 채 뒤돌아있는 영원에게 말했다.
<들어와.>
유리문이 닫혔다.
<한국이니까, 한국말 쓰라며?>
<누나도 누나 앞에서 누가 모르는 언어로 얘기하면 싫을 거 아냐.>
그 말에 영원이 고개를 돌렸다.
<너. 저 사람이랑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연애하는 거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 영원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동생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연애한다면서, 네 이름도 안 알려줬어?>
<무슨 소리야?>
<대표님이라고 하던데.>
<그건, 애칭이야.>
크흠. 영웅이 목을 가다듬었다. 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혹시, 이런 데 편견 있었어?>
<헛소리하지 마. 두 사람 어떤 사이인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혀를 찬 영원은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았다. 그렇게 잠시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영웅이었다.
<그날은 좀, 공사장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그랬어.>
영원은 난간에 팔을 기대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엔 귀마개도 안 끼고 자.>
<그런데 트리가 왜 아직도 집에 있는 거야?>
여름이 다 되었는데 거실에 트리가 있는 것을 보고 영원은 동생에게 단단히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예쁘잖아. 겨울 생각도 나고.>
영웅은 채언과 트리를 꾸미던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우리 둘이 같이 꾸몄거든.>
사랑에 푹 빠진 듯한 동생의 얼굴에 영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둘이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뻔해 보였다.
<그래. 괜찮아 보이네.>
말과 달리 표정은 여전히 찡그린 채였다.
<네가 브로콜리를 먹어서 그래.>
그 말에 영웅은 눈을 찌푸렸다.
<내가 뭐.>
<건강해 보인다고. 거실에 화분 있더라. 다 먹었니?>
영웅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내 남자친구 덕분이지.>
영원은 동생의 연애사까지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말을 돌렸다.
<거기다 뭘 키우는 거야? 시들시들하던데.>
<토마토. 곧 파릇파릇해질걸?>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채언은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남매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반가웠어요. 이만 가볼게요.”
“아, 네.”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을 뒤따라간 채언은 신발장 앞에 서서 영웅과 함께 영원을 배웅했다. 영원은 동생의 얼굴을 한 번 응시한 뒤 채언을 보았다.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드는 영웅의 옆에서 채언은 고개를 숙였다. 현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채언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탓이었다.
바닥에 놓인 손님용 슬리퍼를 바라보던 채언은 영웅의 옷소매를 잡았다.
“정말 별 얘기 안 하셨어요?”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채언 씨.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 말에 채언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해볼 일이 있었다. 아까 세 번이나 입 맞춰준 것에 대한 답이었다. 채언은 눈을 굴리다가 마침내 결심하고는, 영웅의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채언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던 영웅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얼굴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 했다. 그때 신발장 쪽 센서등이 꺼졌다.
“어?”
몸을 펴고 고개를 든 영웅 덕에 불이 다시 켜졌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센서등을 바라본 영웅은 채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단, 우리 들어가서 달팽이라도 먹으면서 마저 얘기할까요?”
뽀뽀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영웅을 끌어당기려던 채언은 맥이 탁 풀렸다. 설레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아뇨. 곧 저녁 먹어야 하니까요.”
영웅의 품 안을 빠져나온 채언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어어, 채언 씨.”
하하 웃다 채언을 놓친 영웅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지막 사과를 입에 넣은 영웅이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을 때였다. 채언의 바지 주머니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 채언은 부엌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영웅을 쳐다보았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사과를 우물거리던 영웅이 뒤돌아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입과 불룩 튀어나와 있던 볼이 함께 움직였다.
“어디 가요?”
“어. 반찬, 만들기 선생님이 잠깐만 보자고 하셔서요.”
“회식이에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채언은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냥 잠깐.”
“저녁은 집에서 먹는 거죠?”
“네.”
“알겠어요. 그럼 저녁 준비는 내가 할게요. 다녀와요. 채언 씨.”
“빨리 돌아올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영웅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언은 우물쭈물 서서 거실을 떠나지 못했다. 고기 팩을 꺼낸 뒤 냉장고 문을 닫던 영웅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채언을 보고 물었다.
“조금 이따 나가는 거예요?”
“아니, 아뇨. 지금 나갈 거예요.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요. 채언 씨.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네.”
작게 심호흡을 한 채언은 현관으로 가서 연분홍색 운동화를 신었다. 이걸 신었으니까, 괜찮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톡톡 두드리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1층이 아니라 지하 1층이 눌렸다.
고급 브랜드의 차들이 주차된 주차장을 걸으며, 채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차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예요.”
채언은 긴장한 얼굴로 영원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는 짧고 간결했다. 서영원입니다, 로 시작한 내용은, 영웅에게 알리지 않고, 지금 혼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올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타세요.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채언이 조수석 문을 잡자 영원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채언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영원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그 위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채언은 눈치를 보다 몸을 옆으로 돌렸다. 벨트를 잡아 내리려는데 영원이 그를 말렸다.
“어디 가진 않을 거예요.”
“네.”
벨트를 당기려던 손을 허벅지 위에 얌전히 내려놓은 채언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 왜 보자고 하셨는지.”
“심채언 씨.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거예요. 무례하다면 미리 사과할게요.”
마른 입술을 핥은 채언은 고개를 들었다.
“어떤….”
“시간 끌지 않고 바로 물을게요.”
“네.”
“혹시, 서영웅이.”
채언은 손을 꽉 쥐었다.
“입주 도우미 계약 기간을 두고, 심채언 씨에게 어떤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한 적 있나요?”
“네?”
“꼭 계약 기간을 두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요. 집주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부당한 요구를 한 적 있는지 묻는 거예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당황한 채언은 말을 더듬었다.
“심채언 씨가 아까 서영웅을 밀어내는 거 봤어요. 이름 대신 대표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들었고요.”
침을 잘못 삼킨 채언은 콜록, 기침했다.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는 당황한 채언의 모습에 영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후 채언의 기침이 가라앉자 영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동생이라고 해서, 그런 문제를 그냥 넘길 생각 없어요. 당장 말하기 어렵다면, 메시지 보낸 번호로 다시 연락해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 통하지 않은 내 번호니까.”
마주친 영원의 눈은 진지했다. 도대체 아까 남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채언은 조심히 침을 삼켰다.
“아까 잘못 보신 건 아니에요. 제가 대, 그러니까, 밀어낸 게 맞으니까요.”
영원의 눈가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래서 채언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싫어서 밀어낸 건 아니고요.”
채언은 잠시 마른 입술을 핥은 뒤,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주먹을 쥐었다 피었다.
“가족이시니까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가, 그래서요.”
“내가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할까 봐 그랬다는 건가요?”
“네.”
“그렇다는 건, 두 사람 사이에 내가 걱정할만한 일은 없었다는 거고.”
“네.”
흐음. 영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힘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정말 둘 사이의 애칭 같은 거고요.”
“…네. 비슷해요.”
영원은 짧은 시간 동안 채언의 얼굴과 손을 관찰했다. 초조해 보이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채언은 자신을 훑어보는 듯한 시선에 눈을 아래로 내렸다. 영웅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눈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저는 남자고. 그리고 직업도.”
“그럼 됐어요.”
“네?”
기어들어 가는 채언의 말꼬리를 자른 영원은 정면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앤드류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됐다고요. 난 동생의 연애사에 끼어들 생각 없어요. 뭘 하든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심채언 씨가 알아서 하겠죠.”
영원은 채언의 이름을 말할 때 조수석을 향해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채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영원을 보았다. 영원이 자신과 영웅의 사이를 인정해준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물어본 것과 같은 문제가 없다면, 그 밖의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앤드류의 가족으로서, 심채언 씨에게 바라는 점은 있어요.”
채언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채용조건과 다를 바 없으니까.”
“채용조건이요?”
채언은 빠르게 계약조건을 생각해보았다.
남자, 해외여행을 가는 데 문제는 없으나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 중졸 이상 고졸 이하,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 이 중에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알다시피 그 애가 걱정이 많다 보니.”
영원은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방금 한 말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채언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인 집주인의 집에서 입주 도우미로 지낼 테니 같은 성별인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을 테고.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것이나 학력에 대한 것은 왜 조건을 걸어두었는지 모르겠으나, 건강한 신체를 가진 것은 일하는 데 필요한 체력을 보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웅과 지내본 바로는, 단지 그런 이유로 건강한 사람을 찾았던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영원의 말이 그런 판단에 확신을 주었다.
채언은 공사장 소리를 듣고 쓰러지던 영웅의 모습과 서재로 둔갑한 방음 시설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흉터 위에 새겨진 문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영원은 말없이 채언을 돌아보았다.
“대표님 문신 아래에 흉터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밝은 색깔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시는 것, 그래서 천둥이 치는 비 오는 날을 안 좋아하시는 것도요.”
채언은 계속 말했다.
“서재에 책 대신 헤드폰이 있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요?”
왠지 모르게 영원의 말투가 더 건조해진 것 같았다. 채언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몸을 굳혔다. 주먹을 쥐거나,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거나, 침을 삼킨다면 영원에게 모두 들킬 것 같았다.
“대표님은, 어디가 안 좋으신 건지.”
“심채언 씨.”
채언은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네, 하고 대답했다. 영원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시트에 기댔다.
“그걸 나에게 묻는 이유는 앤드류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 말에 채언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영원은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두 사람 사이가 생각보다 많이 깊은가 봐요.”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손을 내린 영원은 다시 팔짱을 꼈다.
“앤드류가 친구들도 소개시켜줬어요?”
채언은 볼 안쪽 여린 살을 살짝 물었다 놓은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영원이 정면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채언은 갑자기 저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분 이름은 알아요.”
돌아가던 영원의 얼굴이 다시 채언을 향했다. 채언의 머릿속에 열이 절절 끓던 영웅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앓던 그의 목소리가.
“누구?”
“제이.”
영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생은 제이슨을 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명까지 하면서 과거의 일을 털어내고 싶어 했던 동생이,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에 영원은 조금 놀랐다. 그래서 조금 전, 아니라는 확답은 들었음에도 가슴속에 미미하게 남아있던 의심을 지우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은 아닌지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두 사람이 깊은 사이라고 해도 영원은 테러에 대해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만큼이나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알아서 과거의 일을 털어놓을 터였다.
입주 도우미를 구할 때 학력이나 해외와 관련된 조건을 걸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필터이자, 국외 사정에 관심 없는 사람을 고르기 위한 편견 섞인 필터이기도 했다. 채언을 채용한 이유는 그런 조건에 딱 맞아서이기도 했지만, 면접 볼 때 세상사에 무관심해 보이던 눈빛도 한몫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꽤나 초롱초롱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정말 푹 빠졌나 보네요.”
영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채언은 귀를 쫑긋했다.
“방에 캐리어가 있길래. 앤드류가 진심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영원은 아까 영웅에게 침대 옆에 있는 낡은 캐리어가 그의 것인지 물었었다. 캐리어의 주인은 지금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강요가 있었나, 확인차 채언을 부른 것이었다.
갑자기 캐리어 이야기를 하는 영원 때문에 채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같이 가기로 한 거죠?”
“네? 혹시 여행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원이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급히 주말여행을 떠났을 것이었다. 기간을 미뤄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한 그 여행이었다.
“조금, 미루기로 했는데요.”
“어디로 갈지 정했어요?”
“아직이요. 얘기를 나눈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럼 여권은 발급받았어요? 지난번에는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네? 네.”
여권을 새로 만든 것까지 알고 있는 듯한 영원의 말에 당황한 채언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첫 해외여행을 길게 떠나겠네요.”
영웅과 해외에 가기로 말한 적은 없었다. 채언은 대화가 어긋났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아까 앤드류가 말을 얼버무렸나 보네요. 두 사람이 떠나려니 정할 게 더 많겠죠.”
채언은 목덜미를 만지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정하는 게 나을 거예요. 장마가 작년보다 조금 빠를지도 모른다는데.”
“저기.”
채언은 영원에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계속 목덜미를 만지는 척 팔로 가슴 위를 꾹 눌렀다.
“대표님이 이때쯤 한국을 떠나기로 하신 건, 한참 전에 결정하신 거죠? 저 때문에 준비 기간이 조금 미뤄지는 거고.”
“맞아요. 하지만 계획이 변경되면서 기간이 미뤄지는 거니까. 굳이 심채언 씨 탓을 할 일은 아니죠.”
채언의 손이 목에서 어깨로, 그리고 쿵 쿵 뛰는 가슴 위를 스쳐 조수석 시트 위로 떨어졌다.
“네.”
“그러니까 나에게 물어봤던 건, 내가 답해주지 않아도 금방 알게 될 것 같네요.”
채언은 영원이 보지 못하는 쪽 손을 꽉 쥐었다.
“네.”
차 문을 열고 나온 채언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차창을 통해 눈인사를 한 영원은 금방 차에 시동을 걸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채언은 차가 빠져나가 텅 빈 주차선 안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채언은 여전히 영웅의 문신이 어떤 상처를 가리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영웅에게 제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는지 몰랐다. 왜 큰소리를 싫어하는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천둥 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여름이 되기 전 영웅이 떠날 줄 몰랐다. 꾸욱 아랫입술을 문 채언은 하얀 선 밖의 연분홍색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느릿하게 핸드폰을 꺼내 보니 영웅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언제쯤 돌아올 예정이냐고 묻는 그의 메시지를 보고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영원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삼십 분 남짓이었다. 고작 삼십 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그사이 세상이 뒤집힌 듯했다. 채언은 힘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십 분. 아니, 십오 분 정도 후에….”
전송 버튼을 누른 채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 위에 팔을 올린 뒤 고개를 묻었다.
눈가가 뜨거웠지만, 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아냈다. 조금이라도 울면 그가 눈치챌 게 뻔했다.
지하 주차장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 채언은 영웅에게 말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채언을 실은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22층까지 올라갔다.
채언은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영웅이 있을 부엌 쪽을 향해 걸었다. 거실 가까이 갈수록 음식 냄새가 났다. 요리를 만들면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가 조용한 집 안을 울리고 있었다.
거실 벽에 손을 짚은 채언은 인덕션 앞에 서 있는 영웅의 등을 쳐다보았다. 허리와 목 쪽에 앞치마 끈이 둘러진 것이 보였다. 아침을 만들 때나 스파게티를 만들 때는 하지 않던 것이었다.
자신이 들어올 시간에 맞춰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는지 치이익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몸 옆으로 언뜻언뜻 팬에 든 고기가 보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채언은 눈앞의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벽을 밀어낸 채언은 일부러 슬리퍼 소리를 내며 걸었다. 슬리퍼 소리를 들은 영웅이 뒤돌아보았다.
“채언 씨. 왔어요?”
자신을 보자마자 웃는 얼굴에 채언은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네. 뭐 만드세요?”
“버터에 구운 스테이크.”
영웅은 집게로 팬 안을 가리켰다. 커다란 고깃덩이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팬을 흘끔 본 채언은 다시 영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다 됐는데. 얼마나 익힌 게 좋아요? 안쪽까지 익어도 부드러운 부위니까….”
채언은 스트라이프 무늬 앞치마를 두 번 잡아당겼다. 왜 그러냐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을 마주 보다가, 앞치마의 허리께부터 손가락을 걸어 위로 스윽 손을 올렸다. 채언의 손가락에 걸려 당겨지는 앞치마 때문에 영웅은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였다. 채언은 그대로 눈을 감고 영웅에게 입을 맞췄다.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에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집게를 들고 있는 팔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채언은 집게를 든 영웅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눌렀다. 집게가 조리대에 닿자,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영웅의 허리가 펴지다 아래로 더 내려왔다. 목 뒤에 둘린 채언의 팔이 그를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조리대 위로 집게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얽히자 두 사람의 턱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치익 치익. 고기가 익고 있었다.
눈을 감고 키스하던 채언이 먼저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아쉽게 떨어지는 느낌에 영웅의 입술은 닫히지 않고 달싹였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은 채 눈동자만 움직였다. 서로의 입술과 눈을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입술은 금방이라도 맞붙을 듯했다.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두른 손 하나를 풀어 내린 뒤 인덕션의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팬의 온도가 낮아지자 버터와 기름이 튀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뜨거운 숨결을 나누는 두 사람의 온도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저.”
채언의 입술을 보고 있던 초록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눈을 마주쳐 오는 영웅을 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은 채언은 다시 손을 올려 영웅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목과 턱을 쓸었다. 천천히 까치발을 내리자 두 사람의 몸이 더 붙었다.
채언은 천천히 영웅의 볼과 귀를 만지며 끊어진 말을 이었다.
“하고 싶어요.”
채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이 맞붙었다. 조금 전보다 더 격렬해진 키스였다. 영웅이 허리를 끌어당겼지만 채언의 몸은 자꾸만 뒤로 밀렸다. 까치발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뒤꿈치가 뜬 채 걸음이 옮겨졌다. 채언의 머리에는 영웅의 손등이, 등에는 벽이 닿았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눈에 담았다. 스르륵 영웅의 팔이 풀리자 채언은 고개를 숙였다. 단단한 팔은 채언의 허벅지 뒤쪽에 다시 감겼다. 번쩍 들어 올려진 채언은 두 다리를 벌려 영웅의 허리에 감았다. 양손으로 영웅의 얼굴을 붙잡고 그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더 숙여 입을 맞췄다.
영웅의 방으로 가는 복도 위에 한 짝, 영웅의 침대 앞에 한 짝. 공중에 뜬 채언의 발에서 슬리퍼가 떨어졌다.
침대에 누운 채언은 자신의 티셔츠를 들어 올리는 영웅의 손짓을 따라 상체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상의가 벗겨지자 곧바로 두 사람의 입술이 붙었다. 더운 숨과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옷을 벗기 위해 팔을 교차한 영웅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은 여전히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무늬를 보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은 상체를 숙여 자신의 아래 누워있는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언은 얌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웅은 채언의 한쪽 손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가져갔다.
“이런 거 좋아했어요?”
옆으로 고개를 틀며 물어보는 영웅의 얼굴이 수줍어 보였다.
“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허리를 안으라는 건가? 영웅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채언의 손에 매듭이 잡혔다. 무의식적으로 앞치마 끈을 만지작거리자 영웅의 손이 떨어졌다. 잠시 멍하던 채언의 얼굴에 보조개가 패었다. 이제 보니 앞치마에 대한 로망이 있는지 물은 듯했다. 웃음이 터진 채언은 다른 팔을 마저 들어 영웅의 허리에 감았다. 손가락으로 끈을 천천히 잡아당기자, 스윽 매듭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웅의 몸에 붙어있던 앞치마가 아래로 펄럭였다. 채언은 손을 올려 영웅의 목에 걸려있는 것을 마저 풀어냈다. 앞치마가 사라지자 영웅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왔다.
“저, 이런 거 좋아하나 봐요.”
채언은 영웅의 티셔츠를 허리에서부터 슬슬 끌어올렸다. 그러자 영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채언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영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실 앞치마 따위에 로망도 없었고, 반쯤 장난이었는데 하반신이 묵직하게 닿아왔다. 채언은 잡고 있던 영웅의 티셔츠 자락을 내려놓았다. 대신 한쪽 손을 들어 영웅의 입술 위를 쓸었다.
“저한테는 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채언의 검지가 도톰한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손가락에 닿는 말랑하고 따듯한 느낌이 좋아서 채언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영웅은 가만히 채언을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입을 벌려 하얀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었다 놓았다. 하핫, 간지러운 느낌에 채언이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손가락을 문 채로 점점 상체를 숙이는 영웅 때문에 채언의 팔이 굽혀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물려있던 자리를 빼꼼 마중 나온 채언의 혀가 채우고, 다시 급하게 입술이 붙었다. 쪼옥 쪽. 소리를 내며 키스하던 영웅은 팔을 교차해 상의를 벗어 던졌다. 채언의 바지 버클 위에 손을 올리자 침대에 붙어있던 허리가 살짝 떴다. 두 사람의 하반신이 그만큼 더 꾸욱 눌렸다. 이내, 바지 한 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맨가슴이 맞닿고, 채언은 뒤통수가 베개에 닿은 상태로 턱을 위로 들었다. 영웅은 채언의 턱과 목 사이, 여린 살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바지를 벗지 않고 지퍼를 내린 뒤 그 안에서 꺼낸 성기를 채언의 속옷 위에 문질렀다. 목에서 쇄골, 가슴 위로 내려온 입술은 질척한 소리를 내며 채언의 흥분을 돋우고 있었다.
채언의 왼쪽 다리, 오금 아래 팔을 집어넣은 영웅은 채언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허리를 세운 그는 채언의 눈을 보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색이 발간 무릎부터 하얀 허벅지 안쪽까지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채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프지 않게 허벅지를 문 영웅은 두 손으로 채언의 속옷밴드를 잡아 내렸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공기에 노출되었다. 채언은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려 했지만, 이미 한쪽 다리가 영웅의 어깨에 걸려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날이 밝은 데다 아래가 훤히 보이는 자세에 얼굴이 붉어졌다.
채언은 고개를 틀어 베개 위에 볼을 문질렀다. 허벅지에 걸려있던 속옷을 마저 빼내 치운 영웅은 바닥에 한쪽 손을 짚은 채 몸을 엎드렸다. 채언이 베고 있던 베개 한쪽이 눌렸다. 지퍼가 내려가 벌어진 사이로 꺼내진 영웅의 것과 채언의 것이 닿았다.
“…흐!”
채언은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영웅은 손을 써서 아래를 만지지 않고, 허리를 움직여 자신의 것을 채언에게 비비기 시작했다. 문지를수록 형태가 단단해지고 있었다. 영웅이 허리를 뒤로 뺐다가 앞으로 움직일 때면, 두툼한 성기가 채언의 보드라운 회음부와 고환을 스쳐 기둥과 허벅지 사이 공간을 비집었다. 다시 허리를 움직일 때였다. 성기가 꺼떡이며 채언의 회음부 아래를 찔렀다.
“읏.”
채언의 허벅지가 다시 좁혀지려 했다. 어깨 위에 올려둔 다리가 목을 눌러오는 감각에 영웅은 잠시 멈칫했다. 채언은 밭은 숨을 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영웅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채언 씨.”
“…하아, 네.”
영웅은 손을 들어 어깨 위의 다리를 잡아 내렸다. 영웅의 몸은 채언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락없이 정상위로 섹스를 하기 직전의 포즈였다. 영웅은 채언의 등 아래로 손을 집어넣은 뒤 허리를 더 숙였다.
“아!”
갑자기 몸이 뒤집히는 바람에 놀란 채언이 눈을 깜빡였다. 바닥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는데, 손바닥 아래 만져지는 것은 영웅의 탄탄한 가슴이었다. 이제 보니 자신은 영웅의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갑자기 뒤바뀐 자세에 당황한 채언은 영웅의 눈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채언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한테 넣고 싶어요?”
채언은 영웅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은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넣는다니, 뭘? 어디에? 채언이 하고 싶었던 것은, 마시멜로를 먹던 날 했던 것처럼 서로의 것을 페팅하는 것이었다. 이성 간의 삽입 섹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은 알았지만, 동성 간의 섹스에 대한 지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도 괜찮겠어요?”
영웅은 채언의 손을 잡아 입 앞으로 가져갔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채언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가락에 닿는 간지러운 감각을 느끼며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욕실에서 하던 행위 또한 영웅이 자신에게 해준 것을 보고 따라 했을 뿐이었다. 귀를 애무받는 느낌이 좋아 그의 귓불을 입에 물었던 것처럼.
영웅은 팔꿈치로 침대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채언이 조금 뒤로 물러나자, 영웅은 그의 등 뒤로 팔을 두른 뒤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
“콘돔이 없어요. 나가서 사 올게요.”
영웅은 발기한 아래를 어떻게 가리고 나갔다 와야 할지 고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셔츠라도 허리에 둘러야 하나 생각하는데 어깨 위에 채언의 손이 얹혔다.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채언은 자신을 바라보는 영웅의 눈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손가락이 영웅의 단단한 어깨를 살살 문질렀다.
“혹시, 이불이 더러워질까 봐 그러시는 거면.”
욕실에서 해도 괜찮아요. 거의 소곤거리는 목소리였다. 채언은 지금까지 콘돔 없이 했던 페팅을 생각하며 말한 것이었다.
영웅은 한쪽 손을 들어 채언의 볼에 가져다 댔다.
“이불을 걱정하는 건 아닌데.”
눈을 피하는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리자 까만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같이 샤워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앞치마의 효과가 대단한 듯했다. 영웅은 채언의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짧은 키스였다.
“그럼 잠깐만요.”
그가 일어나려는 듯해, 채언은 영웅의 몸 위에서 내려와 침대에 앉았다. 침대 아래로 내려간 영웅이 갑자기 바지를 벗었다. 그를 보고 있던 채언은 고개를 숙인 채 괜히 시트를 긁었다. 옷을 편하게 벗으려고 내려간 듯했다.
그런데 영웅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영웅이 사라진 쪽을 기웃거리던 채언의 귀에 플라스틱 통 같은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욕실에서 뭔가 뒤적이는 듯했다.
혹시 수건을 가지러 간 걸까? 채언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영웅이 침대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슥 스윽. 이불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와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영웅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길래 채언은 얼른 눈을 감았다. 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입안으로 매끄러운 혀가 들어왔다. 급하지 않은, 느긋한 키스였다. 침대에 몸을 누이자 금방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이 달궈지기 시작했다.
채언이 목 뒤에 팔을 두르자 영웅은 채언의 볼을 만져주었다. 다른 손으로는 채언의 몸을 쓸었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은 가슴 위로 올라와 돌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으, 응.”
중지로 채언의 유두 주변을 빙글거리며 만지던 영웅은 검지와 엄지로 돌기를 살짝 꼬집었다. 채언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쪼옥.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영웅은 손으로 채언의 한쪽 가슴을 만지면서, 반대편 가슴을 입에 물었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유두를 핥듯이 문지르다가, 꾸욱 눌렀다. 그러다가도 다시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 흐윽.”
자연스럽게 풀린 손으로 영웅의 어깨 위를 짚고 있던 채언은 입술을 깨물다가 깊게 숨을 뱉어냈다. 그런데 영웅의 어깨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 위에 입을 맞추며 내려가던 영웅의 얼굴이 멈춘 곳은 채언의 다리 사이였다. 어깨가 아닌 영웅의 머리 위에 채언의 손이 얹혔다. 자잘한 쾌감이 쌓여 눈앞이 흐려졌던 채언은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아, 잠깐!”
영웅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렸다. 채언의 성기가 영웅의 입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흣!”
반사적으로 무릎을 세운 채언은 영웅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양쪽 허벅지가 그의 손에 단단히 잡힌 뒤였다. 팔꿈치를 세워 일어나보려 해도 몸을 세우는 즉시 허벅지가 잡혀 주륵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밀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머리를 쓰다듬는 꼴이었다. 축축하고 따듯한 입안에 성기가 문질러지는 감각에 채언의 허리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미끈거리는 혀가 기둥을 넓게 문지르다가도 뾰족하게 서서 선단을 눌러오기도 했다. 아랫배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서, 채언은 후욱 훅. 숨을 몰아쉬었다. 상체를 옆으로 돌려 베개를 꽉 쥐어보았지만,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계속해서 몸을 타고 올랐다.
“잠, 잠시. 잠시만요.”
오래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사정감이 깊어지자 채언은 영웅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머리카락이 잡힌 영웅은 입을 벌리며 채언을 올려다보았다. 영웅은 기둥 아래를 한 손으로 잡고 혀를 내밀어 채언의 귀두를 핥더니, 사탕을 빨 듯 입술을 오므려 쪼옥 빨아들였다. 적나라한 모습에 채언의 눈가가 붉어졌다.
“…키스, 키스해 주세요.”
이러다가 정말 그의 입에 사정을 할까 봐 채언은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그 말에 스윽 몸을 일으킨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안으며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채언은 양손을 들어 그의 볼을 잡고 정신없이 입술을 찾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애원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웅은 급히 입술을 빨아오는 느낌에 웃다가, 제대로 키스에 응했다. 채언의 몸을 더 끌어안으며 목구멍 근처까지 혀를 집어넣어 문질렀다. 입술이 크게 벌어지자 턱이 같이 움직였다. 섞이는 타액을 꼴깍 삼키면서도 채언은 영웅의 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영웅은 손을 아래로 내려 기둥 두 개를 같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었지만, 두 개를 한 번에 잡기는 빠듯했다. 그래서 아래를 쳐올리듯 허리를 움직이면서, 손바닥으로 귀두 두 개를 둥글리듯 문질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쿠퍼액이 흘러내렸다. 타액이 묻어 축축했던 채언의 성기와 맞닿은 영웅의 것이 같이 끈적해지기 시작했다. 질척한 소리가 입술 사이와 아래쪽에서 동시에 들렸다.
“…으음, 응.”
영웅의 손과 허리 짓이 빨라질수록 채언에게서 비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 잦아졌다. 볼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곱아들고 허리가 떴다.
“으읏…. 흑!”
힘이 들어간 채언의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손안에 진득한 정액이 사출된 것을 느낌으로 확인한 영웅은 겹쳐진 성기를 천천히 문질렀다. 하아, 하아. 짧게 숨을 뱉던 채언의 가슴이 크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긴 숨을 쉰 뒤에야 진정이 되었다. 영웅은 채언의 떨리는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채언은 사정 후 나른함에 긴장이 풀린듯했다. 풀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미소 지은 영웅은 아까 욕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을 손에 들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바디오일과 바디로션이었다. 젤 대용으로 사용하려고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어느 것이 더 나을지 몰라 두 개 모두 뚜껑을 열었다. 채언의 정액이 묻은 손에 오일과 로션을 흠뻑 짜냈다. 하얀 로션 위로 흘러내린 오일이 손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영웅은 양손을 겹쳐 액체를 비벼 섞기 시작했다.
채언은 누운 채로 영웅이 무얼 하는지 지켜보았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그의 것을 달래줄 차례였다. 질척한 유백색의 액체가 영웅의 양쪽 손에 잔뜩 묻었다. 그는 한 손을 내려 자신의 두툼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자위를 하는 영웅의 모습에 당황한 채언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후우….”
길게 숨을 뱉은 영웅은 일어서려는 채언을 막듯 허리를 숙였다. 즈윽. 즈윽.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면서 채언의 목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애무에 채언의 몸이 풀어지려는 찰나였다. 끈적한 액체가 잔뜩 묻어있던 손가락이 채언의 아래로 미끄러졌다. 음낭 아래, 회음과 엉덩이 사이였다.
“읏, 거기는.”
미끄러지던 손가락 중 하나가 꽉 닫혀있던 곳을 파고들었다. 낯설게 벌어지는 감각에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영웅의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아까 넣겠냐고 물어봤던 곳이 지금 손가락이 들어간 그곳을 말하는 건가. 당황한 채언이 다리 사이를 좁혀보았지만, 몸 사이에 자리 잡은 영웅의 허리를 꽉 조일 뿐이었다. 머릿속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아까 여러 번 의사를 물어온 영웅에게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으니 이제 와서 밀어내는 것도 이상했다.
“으, 응….”
하지만 낯선 감각에 자꾸만 몸이 비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얀 목에 입을 맞춰주던 영웅의 입술이 채언의 입을 가로막았다. 달래는 듯한 다정한 키스에 채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굵은 손가락은 계속해서 구멍 안쪽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잔뜩 묻어있던 액체가 좁은 구멍 밖으로 밀려나며 찌걱찌걱 소리를 냈다. 채언은 이물감에 허리를 비틀면서도 몸을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하나로도 빠듯하던 아래쪽의 감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채언은 고개를 틀었다. 길게 키스를 이어가던 입술을 떼어낸 뒤 이를 물었다.
“흣, 으으.”
벌어지는 감각에 고통이 따랐다. 손가락이 두 개 들어오자 채언은 눈을 찌푸렸다.
“읏, 아파,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영웅이 채언과 눈을 마주쳐왔다. 아래쪽을 파고들어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만할까요?”
묻는 도중에도 그의 손은 천천히 뒤로 빠지고 있었다.
채언은 갑작스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영웅은 자신이 그만하자고 하면 당장에라도 멈출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미련이 없어 보이지. 사실 그가 그만하고 싶은 것 아닐까. 이런 짓을 하자고 한 것 또한 자신이었다.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문 뒤에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영웅이 자신을 더 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한국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 집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으면 했다. 집으로 올라오는 내내 했던 생각이었다. 그를 더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 정도 아픈 것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채언은 영웅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양쪽 볼을 감쌌다. 먼저 입을 맞췄다.
손가락 세 개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채언의 아래쪽을 파고들었다. 영웅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언의 어깨에 간간이 입을 맞춰주었다. 땀 때문에 촉촉해진 몸이 뜨끈했다. 여전히 손가락에 내벽이 빈틈없이 달라붙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채언이 잠든 지난 새벽. 영웅이 부지런히 검색해본 바로는 아래쪽을 충분히 풀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제로 남자와 관계를 해본 적이 없어 영웅은 적절한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채언 씨, 괜찮아요?”
영웅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채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언은 아까부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해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많이 부끄러운 듯해서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지는 않았다.
“괜, 찮아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웅은 천천히 손을 물렸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로션과 젤이 섞인 유백색 액체가 시트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많이 아프면 말해줘요.”
“…네.”
“참지 말고요.”
채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를 적신 땀이 영웅의 어깨에 문질러졌다.
영웅은 채언의 한쪽 다리를 세워 잡았다. 아까부터 단단히 서 있던 자신의 성기를, 조금 전까지 손가락이 들어가 있던 채언의 안쪽에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 읏, 흐윽!”
이제 막 끝이 파고들며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채언의 몸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영웅에게 보이지 않게 숨긴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래가 찢어질 것 같았다. 채언은 입술을 물고 눈을 찌푸렸다. 후욱 후욱. 짧게 숨을 쉬며 몸이 벌어지는 느낌을 참아냈다.
빠듯하게 조여오는 감각에 영웅도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다. 젤 대용으로 발라둔 액체 덕분에 살이 쓸리는 감각은 매끄러웠지만, 손가락 세 개는 아래를 풀어내는 데 충분하지 않은 듯했다.
채언은 손톱으로 영웅의 등을 긁지 않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그에게 느껴질까 봐 손목을 꺾어 위로 들었다. 생살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에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대신 팔로 영웅을 더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하….”
영웅은 허리를 뒤로 천천히 물렸다. 한 번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채언의 몸 안으로 절반도 채 들어가지 못한 성기를 천천히 빼내었다.
오일이 든 병을 뒤집어서 손바닥을 적셨다. 그런 다음, 축축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 전체를 문질렀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는 채언의 어깨에 입을 맞춘 영웅은 천천히 허리를 내리눌렀다. 잠시 몸을 빼낸 사이 꽉 다물린 구멍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흥건히 적신 오일 덕분에 조금 전보다 움직이는 것이 수월했다. 그러나 아래를 꽉 조여 오는 몸은 여전했다.
“아프지 않아요?”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숨결이 섞여 있었다. 영웅의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픈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입술을 즈려 물었다. 채언은 간신히 엉엉 울지 않고 눈물을 참고 있었다. 영웅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언을 배려해 느린 움직임이었다. 억지로 끝까지 밀어 넣지 않았다. 욕구를 완벽히 채울 수는 없었지만, 따듯하게 조여 오는 내벽의 느낌과 연인의 몸 안에 들어왔다는 정신적인 만족감이 섞여, 영웅은 적당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채언은 입을 열지 않고 코로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맞닿은 가슴처럼, 벌어진 다리 사이로 영웅의 몸이 완전히 닿아오지 않아서, 채언 또한 그가 깊이를 조절해 삽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영웅이 허리를 안쪽으로 눌러올 때면 아랫배가 꽉 찬 듯 아팠다. 배 속의 장기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를 만족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목 안쪽에도 힘을 주며 고통스러운 신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아냈다. 영웅의 등 뒤로 꽉 쥐고 있는 손 안쪽에는 짧은 손톱에 눌린 반달 자국이 가득했다. 엉덩이 사이의 이물감과 아픔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아… 하.”
그래도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영웅의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영웅은 여전히 채언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탓에, 잘게 떨리는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 줄 수가 없었다.
“너무, 읏, 긴장하지 말아요.”
대신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채언의 허리를 쓸어내리다가, 땀이 배어 나온 몸 사이에 눌려있는 것을 손에 쥐었다. 생각보다 더 말랑하게 죽어있는 채언의 상태에 영웅은 조금 당황했다. 처음부터 뒤로 느끼기 쉽지 않다고 들었지만, 전혀 느낌이 없는 걸까. 영웅은 허리를 움직일 때, 채언의 것을 쥔 손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섹스를 하는 이유는 혼자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을 만져주자 굳어있던 채언에게서 조금 더 편안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영웅은 채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서서히 차오른 사정감에 영웅은 채언의 몸 안에서 빠져나왔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툭, 하고 구멍 안에서 나온 것은 잔뜩 젖어 번들거렸다. 굵은 성기를 물고 있던 구멍은 개폐를 반복하다 꼭 다물렸다. 체온에 녹은 액체가 다물린 구멍 안에서 주륵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언은 힘겨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앞을 만져주는 손길에 겨우 아래를 세운 상태였다. 두 사람 다, 온몸이 뜨겁고 축축했다. 영웅은 다시 허리를 내리눌렀다. 다물린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채언의 성기와 자신의 것을 함께 잡아 문지르기 시작했다.
“흣, 으.”
핏줄 솟은 팔이 움직이는 것이 빨라질수록 질척한 소리가 연달아 침실 안을 울렸다. 영웅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한쪽 눈이 찡그려짐과 동시에 사정한 그는, 아랫배를 조여 숨을 몰아쉬면서도 채언의 것을 놓지 않고 흔들었다. 영웅이 사출한 정액 때문에 처덕 처덕 질척한 소리가 더욱더 끈적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언은 영웅의 손안에 사정했다. 끝났다는 안심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찾아와 영웅을 더 꽉 끌어안아야 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도 그를 안은 팔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다, 어둠에 잠겨 들었다.
영웅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 뒤에 둘린 채언의 손목을 쥐었다. 힘 빠진 손을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다. 자신을 꽉 끌어안고 놓지 않던 채언 때문에 관계하는 내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개를 든 영웅은 채언의 손목을 쥔 채 품 안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채….”
영웅은 입술을 다물었다. 채언의 감긴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가며 볼이 온통 붉었다. 부은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잠든 채언을 내려다보던 영웅은 손등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준 뒤, 축축한 눈가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잠시 이대로 재워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영웅은 욕조에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을 채워두고 침대로 돌아왔다. 물이 적당히 식을 즈음에 채언을 깨울 생각이었다.
그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채언의 허리 위에 팔을 두르고 눈을 감았다.
채언은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는 영웅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저.”
머리 위에 있던 수건이 함께 흘러내렸다.
“방에 가서 옷을 몇 개 챙겨가지고 올게요.”
영웅은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언의 눈을 바라보다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지 않아요?”
“…조금.”
“저녁 다시 준비해둘게요.”
영웅은 가운을 걸친 채언의 몸을 끌어안고 눈가에 쪽쪽 뽀뽀를 했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몸은 보송보송하고 따끈했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둘은 같이 침실을 나왔다. 그런 뒤, 영웅은 거실로, 채언은 복도 끝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닫은 채언은 손에 쥔 핸드폰 액정을 켰다. 일기예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기사를 몇 개나 검색해 언제쯤 장마가 오는지 날짜를 찾아보았다. 6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이었다. 아직 몇 주가 남아있었지만, 채언에게는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손을 내린 채언은 책상 위의 사과와 선인장, 벽에 세워둔 마카로니 봉지를 보다가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가운을 벗고 속옷과 잠옷으로 입는 편한 옷을 찾아 입은 뒤, 여분의 옷가지와 속옷 몇 개를 찾아 품에 안았다.
방을 나온 채언은 불편한 걸음으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불이 환히 켜진 거실 가까이 가자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고 맛있는 냄새가 맡아졌다. 차가운 복도 벽에 머리를 기댄 채언은 잠시 눈을 감고 영웅의 뒷모습을 눈에 그렸다. 눈앞의 그를 놔두고 어둠속에서 그의 모습을 그려보려 노력했다.
그런데 눈을 감기 직전까지 보고 있던 영웅의 모습이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의 옷가지를 꽉 끌어안은 채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떠 진짜 영웅의 모습을 확인한 채언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다가 침실로 발을 옮겼다.
얼마 후 채언이 부엌으로 나왔을 때는 식탁에 이미 저녁 식사가 차려진 뒤였다.
영웅은 아까 팬 안에서 익고 있던 고기를 다시 데운 듯했다. 익힌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가 곁들여진 스테이크 접시가 두 개 놓여있었다. 채언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다시 데우느라 속까지 전부 익었을 텐데, 그래도 질긴 부위가 아니라 맛은 괜찮을 거예요.”
“맛있어 보여요.”
채언의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쥐여준 영웅은 식탁 위에 두 팔을 올린 채 기다렸다.
채언은 스테이크를 조금 썰어 입에 넣었다. 몸이 나른해서 입맛이 없었지만, 천천히 고기를 씹었다.
채언이 턱을 움직이자 영웅도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몇 조각 썰어 먹지 못하고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초록색 눈동자 안에는 채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멍한 얼굴의 채언은 아주 느리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고기는 종이만큼 얇게 썰렸다. 포크로 찍은 것이 접시에 다시 떨어진 것도 모르고 손을 드는 것에 영웅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내려왔다.
영웅은 자신 몫의 스테이크 접시를 앞으로 밀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 포크를 입에 넣으려던 동작이 멈췄다. 영웅은 식탁을 돌아와서는 채언의 옆자리 의자를 빼서 앉았다.
“몸이 안 좋아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포크를 내려놓은 뒤 고개를 저었다.
“나른해서요.”
“아까, 많이 아팠어요?”
채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영웅은 손을 들어 채언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아까 붉은 기가 도는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던 것이 떠올랐다.
“일찍 잘래요?”
그만 먹겠냐는 물음이 포함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접시를 보던 채언은 포크로 토마토를 찍었다. 다시 영웅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거실 유리창 아래 놓인 토마토 화분을 흘끔 보았다. 이만큼 동그란 열매가 얼른 열렸으면 좋겠는데.
“더 먹고 나서요. 배고파요.”
사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채언은 토마토를 입에 넣고 씹었다. 동그랗게 부푼 볼이 움직이는 것을 보던 영웅은 채언의 접시를 끌어와서는 고기를 작게 썰기 시작했다.
어린애가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고기 조각을 포크에 찍어서 채언의 입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채언은 천천히 입을 벌려 스테이크를 먹었다. 몇 번 그렇게 받아먹은 뒤에는 채언도 손에 쥐고 있던 포크에 고기를 찍어 영웅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몇 개를 입에 넣어도 성에 차지 않을 작은 고기 조각이었지만 영웅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채언이 내민 것을 입에 물었다.
채언은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것이 좋았다. 이 식탁에 앉아 더 많은 저녁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언은 영웅의 접시에 있던 토마토를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익어서 껍질이 벌어진 토마토가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자신이 기른 토마토가 몇 번이나 열매를 맺었으면 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영웅의 입술을 쓸어내리자 손가락에 고기 육즙이 살짝 묻어나왔다.
“저희 여행 가기로 한 거요.”
채언은 영웅의 입술을 쓸어주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6월 마지막 주에 가면 안 돼요?”
영웅은 새큼한 것을 꿀꺽 목 뒤로 삼켰다. 혀로 볼 안쪽을 쓸어내리던 그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채언을 보았다.
“…비가 내릴 텐데요. 한국은 6월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까.”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귓바퀴를 만졌다.
“비 내리는 거 싫으시죠?”
영웅은 손을 들어 채언의 손등을 감쌌다.
“그건, 채언 씨가 옆에 있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는 까만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살짝 틀어 채언의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때쯤엔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라 심한 비가 내릴 수 있잖아요. 그럼 카라반 위에 단단한 지붕이 있어도 글램핑을 즐기기 힘들 거예요.”
“그럼, 글램핑 말고 그냥 여행을 가는 건요?”
“밖에서 불 피우지 않아도 좋아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영웅의 얼굴을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6월 말에 무슨 일 있으세요?”
채언은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잘근거렸다. 영웅이 한국을 떠나야 한다면, 정말 그래야 한다면 어떡하지.
“어디… 가세요?”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계속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든, 어디라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데려가 주지 않을까. 둘이 함께. 여행지가 서울 가까운 곳이 아닌 아주 먼 곳이라도. 입주 도우미 일을 하면서 받은 월급은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다. 만약 그가 물가가 아주 비싼 나라에 간다고 해도 따라가서 몇 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스위스에 가기 위해 모으던 적금이었다. 하지만 여권에 다른 나라의 도장이 먼저 찍힌다면, 모으던 돈의 사용처를 달리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자신을 원한다면.
채언은 자신의 손바닥에 볼을 기댄 영웅을 보며 간절하게 바랐다.
“왜 여행을 6월 마지막 주에 가고 싶어요?”
다그치는 물음은 아니었다.
“이제 날씨도 따듯해졌는데. 그 전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채언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 끝에 닿는 영웅의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그게….”
영웅에게 감싸인 손을 내렸다.
“반찬 만들기 선생님께서.”
“맞다. 채언 씨 아까 나가서 선생님 만나고 왔죠.”
“네. 그러니까, 그분이. 다음… 다음 수업 얘기를 해주셨거든요.”
“다음 수업?”
“6월에 또 수업을 하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신청날짜랑 수업 날짜는 확정되지 않아서, 제가 신청 기간을 놓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네. 그래서 6월 마지막 주 전까지는 특별한 일 없이 비워두려고요.”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영원의 차에서 내릴 때 주차장에서의 만남은 영웅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거짓말 안에 어떤 물음이 숨겨져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었다. 채언은 조마조마해하며 영웅의 눈을 바라보았다.
“친절한 분이시네요. 그런 것도 미리 알려주시고.”
미소 지은 영웅은 눈을 내렸다. 양손으로 채언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선생님이 채언 씨한테만 알려주신 거예요?”
“아뇨, 어… 저는 마지막 날, 다음 수업이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부탁을 드려서. 아까는, 다른 분들도 몇 분 계셨어요. 여기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인사할 겸 불렀다고 했어요.”
자꾸만 거짓말이 불어났다. 채언은 영웅에게 잡힌 손에 땀이 날까 초조해하다가 팔꿈치를 뒤로 당겼다. 잡고 있던 채언의 손이 빠져나가자, 영웅이 고개를 들었다. 채언은 식탁 위의 포크를 들어 고기를 하나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 조각을 다시 찍어 영웅에게 내밀었다. 입을 벌려 스테이크를 받아먹은 영웅은 턱을 움직이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꿀꺽. 목울대가 움직이고, 생각을 마친 영웅은 채언에게 물었다.
“그럼, 계획을 조금 바꿔서 호텔로 갈까요?”
“그때 가는 거예요? 6월 마지막 주에요?”
포크 손잡이가 식탁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다른 데는, 아무 데도 안 가세요?”
영웅은 동그랗게 뜨인 채언의 눈을 보다 눈을 접어 웃었다.
“이렇게 귀엽게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그는 참지 못하고 말랑한 볼을 양손으로 감싸 끌어당겼다. 쪽, 쪽. 뽀뽀를 했다. 그러자 채언이 기분 좋다는 듯 소리를 내서 웃었다.
“마시멜로는 제가 집에서 구워드릴게요.”
보조개를 보이며 하는 말에 영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보조개 위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춰야 했다.
침대 위에 베개는 두 개 놓여있었지만 채언은 영웅에게 안긴 채 그의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진짜로 놀러 온 것 같아요.”
“처음 누워보는 침대라서?”
“네.”
잠들기에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복도 중간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또다시 멀어진 여행을 대신해 잘 들어오지 않던 방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잠옷을 만지작거리며 낯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청소하기 위해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새것 같은 침대 위에 누워 벽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영웅의 방에 있는 슈퍼킹사이즈 침대처럼 눕는 자리가 넓지 않아서 두 사람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영웅은 작은 침대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침대가 넓었다 해도 자리를 널찍하게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작지도 버겁지도 않게 품 안에 딱 맞는 채언을 안고 있는 것이 좋았다.
“진짜로 놀러 갈 곳은 어디로 할까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음.”
채언은 어느 지역에 어떤 호텔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난번에 계획했던 여행은 너무 급했고, 영웅이 후보지를 추려 온 터라 그중에 하나를 택했을 뿐이었다. 영웅은 고민으로 가득 찬 채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음, 하고 울리는 소리가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졌다.
“멀리 가도 돼요?”
“멀리 가도 돼요.”
“그럼. 물가 근처로… 바다나. 산은, 어….”
아직 몇 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당장 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웅은 채언이 열심히 고민하는 것을 놔두었다. 재촉하지 않을 뿐이었다.
“부산이나, 인천은요?”
고민하던 채언은 후보지 두 곳을 말했다.
“다 좋아요.”
“둘 중에는 어디요?”
“으음.”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가 좋다는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채언 씨. 사실 말 안 한 비밀이 하나 있는데요.”
“네? 어떤.”
순간 채언은 긴장했다. 영웅의 잠옷을 저도 모르게 꽈악 쥐었다.
“사실.”
“네.”
“나는 한국 도시 위치를 잘 몰라요.”
영웅은 목소리를 죽여 속닥거렸다.
“아.”
채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어요.”
지난번 글램핑장을 알아볼 때는, 가격이 높은 순으로 우선 후보를 추렸기 때문에 빨리 장소를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채언 씨가 가고 싶은 도시를 정해주면, 거기서 열심히 찾아볼게요.”
채언은 눈을 마주쳐오는 그를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넓은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조금 가쁜 숨이 쉬어졌다. 온몸에 따듯한 안정감이 퍼지는 것 같았다. 채언은 이토록 기분 좋은 감정이 가슴 안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게 낯설었다. 그래서 말없이 영웅을 더 끌어안았다. 계속 이렇게, 계절이 변할 때마다 그와 새로운 여행지를 고민하는 밤을 보내고 싶었다. 자꾸만 그런 욕심이 생겼다. 우울한 것도 아닌데 눈가가 뜨거워져서, 채언은 이마를 대고 있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둘 다 가고 싶어요.”
“그럼 하루는 부산, 하루는 인천에 갈까요?”
“엄청 멀어서 안 돼요.”
채언은 눈물을 삼키느라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영웅은 채언이 얼굴을 묻고 있는 가슴이 뜨끈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함을 느낀 그는 손을 들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손에 닿는 체온이 올라있었다.
“채언 씨.”
자신의 부름에도 채언은 답이 없었다. 아까 다른 침실에서 자신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모습이 떠올라서, 영웅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손을 내려 채언의 귀와 볼을 덮었다. 얼굴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비가 내릴 때 한 곳, 엄청 더워진 여름에 또 한 곳. 그렇게 가면 안 돼요?”
채언이 스스로 고개를 들었다.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영웅은 엄지로 눈가를 쓸어주었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가면 되죠.”
느리게 다가가자, 천천히 눈꺼풀이 감겼다. 축축한 눈가에 조용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우리, 함께 있을 텐데.”
입술이 떨어졌지만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고 깜깜한 눈앞에 색을 입히는 중이었다. 붉은 단풍잎을 밟고 있는 영웅의 모습과 하얀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렸다.
영웅은 채언에게 입술을 물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언이 행복한 듯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개 밑에서 작게 진동이 울리는 느낌에 영웅은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 얼른 핸드폰 알람을 끄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알람용 진동이 울렸으나, 다행히 채언은 깨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어제 두 사람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대화를 하느라 잠든 시각은 평소보다 늦었다. 영웅은 채언이 깨지 않게 조심히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으음.”
잠든 도중에도 옆자리가 비는 것을 알아챘는지 채언이 잠투정하듯 몸을 뒤척였다.
침대 아래로 발을 뻗고 있던 영웅은 몸을 숙여 채언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조용히 방문이 닫혔다.
자신의 침실로 들어온 영웅은 샤워를 하러 가기 전에 잠시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출근할 때 입고 나갈 옷을 미리 꺼내둘 생각이었다.
넥타이를 고르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옷이 정리된 공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영웅은 티셔츠가 개어져 있는 선반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였다.
“흐음.”
개어진 옷들을 보던 영웅은 입꼬리를 올렸다. 허리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옷 사이사이 채언의 것이 섞여 있었다. 지난번에 병실에서 입고 있던 후드도 있었다.
영웅은 입술 위에 손을 얹었다. 원한다면 안을 모두 비워 공간 전체를 내어줄 생각이었는데, 자신의 옷 사이사이 채언의 것이 섞여 있는 것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채언이 왜 이렇게 옷을 숨기듯 놓아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웅은 자신의 입에서 자꾸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입을 막은 손바닥에 가벼운 바람이 닿았다.
영웅은 어제저녁 시트와 이불을 갈아놓은 보송한 침대 위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켰다. 초록색 눈동자가 빠르게 핸드폰 화면을 살폈다.
집중한 미간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풀어졌다.
<아! 이런.>
쇼핑을 마친 영웅은 핸드폰 위에 뜬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급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영웅은 부엌에 가서 채언이 먹을 아침을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가운을 대충 걸친 몸으로 침실 문을 여는데, 딸려오는 무게감이 아까 들어올 때와 달랐다.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영웅의 입술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졌다.
“채언….”
불안한 표정으로 바깥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채언의 몸이 안쪽으로 쏠렸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끈한 몸이 영웅의 품에 안겨 왔다.
“일어났어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채언에게 스몄다.
“아직 출근 시간이 안 됐는데, 옆에 안 계셔서.”
영웅은 검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다가 채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집이 너무 넓죠?”
“네.”
“그러니까 아무래도 같은 방을 쓰는 게 낫겠죠?”
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정말….”
드디어 제대로 된 확답을 얻어낸 영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품에 안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각각 아침으로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토스트 한쪽과 주스 한 컵씩을 먹었다. 영웅은 빵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토스터기를 바라보지 않았다. 식탁 옆자리에 앉아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는 채언의 얼굴을 보며 실실 웃는 아침을 보냈다.
영웅이 출근을 하고 나서, 채언은 혼자 거실 카펫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다가 TV를 켰다. 뒤에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댄 뒤, 리모컨 버튼을 눌러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를 틀었다.
채언이 보기에 1화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냥저냥 별다른 감상 없이 2화로 넘어갈 때였다. 인터폰에서 클래식 벨 소리가 울렸다. 무심하게 TV를 보던 눈이 동그래졌다. 곧바로 일어서서 인터폰 앞으로 간 채언은 버튼을 눌러 화면을 확인했다.
“누구세요?”
출근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혹시 영웅이 집에 뭘 두고 가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기대했는데,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은 택배회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점심을 흡입하고, 잠시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다 온 지영은 사내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가는 중이었다. 카페 카운터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는데,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뜨거운 음료가 담긴 테이크 아웃 컵을 두고 통화 중이었다. 누구랑 전화를 하는 건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어떤 음료 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카운터로 시선을 돌린 지영은 미리 정해둔 메뉴를 말했다.
“오미자 에이드 주세요.”
사원증을 내밀어 결제를 마친 지영은 음료가 나올 때까지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팔짱을 낀 채 유리창 너머 하늘을 좀 보는데, 자꾸만 시선이 야외테이블로 향했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금발에 가깝게 보였다. 무슨 비밀스러운 통화를 하는 건지, 갑자기 이쪽저쪽을 살핀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흐음.”
지영은 뒤돌아서 야외 테라스를 등지고 섰다. 핸드폰 가까이 입술을 대고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그것은, 커플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랜선 뽀뽀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제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리고 있는 그 남자와 여전히 잘 만나고 있는 듯했다.
어찌 됐든 지영은 남의 연애사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빨리 음료나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미자 에이드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붉은색 에이드를 받아든 지영은 빨대를 한 번 저은 뒤 음료를 빨아 마셨다. 이제 그만 업무를 보러 갈 시간이었다. 꿀꺽 음료를 삼킨 지영이 한 걸음 뗄 찰나였다.
“오? 앨리스 님.”
통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온 영웅이 지영을 불렀다.
두 사람은 회사 복도를 걸으며 대화를 했다. 영양가 없는 농담이나 중요하지 않은 업무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아!”
뜨거운 커피를 한입 마신 영웅이 내뱉은 감탄사에 지영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혀 데었어요?”
“아뇨. 앨리스 님. 송 교수님은 수업 또 나가시나요?”
“수업이요? 그렇죠. 뭐, 교수님이니까 수업하는 게 일이잖아요.”
“교수님이 수업하시는 거 말고요. 그거요. 반찬 만들기.”
에이드를 빨아 마신 지영은 뜬금없는 반찬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반찬 만들기요? 그거 지난번에 끝났잖아요.”
“채언 씨 기억하세요? 교수님이랑 그 수업 같이 들었던.”
“네. 우리 아버지가 폐를 끼쳤는데 잊을 리가 있나요.”
그리고 조금 전에 당신이 그 사람으로 추측되는 인물과 전화 통화하는 것도 봤는데요,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지영은 그 말을 에이드와 함께 꿀꺽 삼켰다.
“채언 씨가 그랬는데 반찬 만들기 수업이 6월에 또 있을 예정이래요.”
“그래요? 우리 아빠는 그런 얘기 없던데요. 그리고 그런 건 보통 시청이나 주민센터 홈페이지에 안내가 뜨는데.”
“날짜가 확실하지는 않은가 봐요. 선생님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말씀해 주셨다는데….”
영웅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발을 멈추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잡아챘다. 반찬 만들기 수업 선생님이 채언이 사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영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발을 움직였다. 회식 날 채언이 수강생들에게 사는 곳을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또 사회생활을 잘못하고 있나 봐요. 그런 소식 모르는 것 같던데.”
또 딸이 걱정하게 만든다며 한숨을 쉰 지영은 영웅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소식 뜨면 저한테도 좀 알려주실래요? 아빠한테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네. 그럴게요.”
채언은 아까 유니폼을 입고 있던 택배기사에게 받은 택배 상자를 뜯었다. 포장된 상자 안에는 식물 영양제가 들어있었다. 택배 상자에는 진원의 이름이 적혀있었지만, 영원에게서 온 것이었다.
영웅과 통화를 할 때 택배가 왔다고 말했더니, 그는 안 그래도 누나에게 메일을 받았다고 말해주었다. 토마토에도 영양제를 놓아주라는 말에 채언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채언은 영양제를 하나 꺼내 쥐고 토마토 화분 앞에 엎드렸다. 키우기도 쉽고 잘 자란다고 했었는데, 선인장보다 기르기가 힘들었다. 얼마 자라지 않은 줄기 몇 개는 데친 시금치처럼 옆으로 휘어 늘어진 상태였다. 채언은 손가락으로 휘어진 줄기 하나를 들어보았다.
“이렇게 곧게 자라주면 좋을 텐데.”
손가락을 떼자 버팀목이 사라진 줄기가 다시 옆으로 휘었다. 채언은 노란 액체가 든 튜브 끝을 따서 화분에 꽂았다. 화분 크기에 비해 영양제가 조금 큰 듯했지만, 영양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TV에서는 자동으로 다음 편으로 넘어간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채언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엎드린 채 토마토 화분만 바라보았다.
“잘 자라라. 잘 자라라.”
케이크 촛불에 대고 소원을 빌듯이, 조용히 바랐다.
늦은 시각.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은 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며칠 전 택배 박스 몇 개를 숨겨 가지고 집에 들어온 영웅이 깜짝 선물을 해준 것이었다. 이제 채언은 그의 가운을 빌려 입지 않았다. 채언의 가운 또한 영웅과 같은 디자인으로 몇 개가 욕실과 드레스룸에 걸려있었다.
다만, 지금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다른 점이 있다면, 영웅은 위아래 세트를, 채언은 상의만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품에 바짝 기대 안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서린 눈과 마주친 영웅은 채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잘 자요. 채언 씨.”
이마 위에 가벼운 뽀뽀를 한 뒤 영웅은 눈을 감았다. 채언은 허무하게 눈을 깜빡였다. 혹시나 그가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려보았지만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반듯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영웅을 보다가 시무룩하게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벌써 며칠째였다. 영웅은 침대에 누우면 자신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출근 전에 하는 뽀뽀가 키스가 되거나, 저녁에 같이 TV를 보다가 소파 위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끝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채언은 영웅을 보며 이불 속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쓸었다. 그저께는 분위기가 짙어지다가 거의 끝까지 갈 뻔하긴 했다. 영웅이 자신의 다리 두 개를 겹쳐 잡고, 진짜로 삽입하듯 허벅지 사이로 그의 것을 밀어 넣었었다. 둘 다 사정을 마쳤을 때는 허벅지 안쪽이 빨갛게 쓸려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웅은 진짜로 안에 넣지는 않았다.
그때 자신과 했던 것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까. 처음 했을 때 뒤로는 느끼지 못했고, 많이 아팠지만, 귓가에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좋았는데.
그때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와 별개로 채언은 영웅의 기분만 신경 쓰고 있었다.
세탁물이 밀렸다는 핑계로 잠옷 바지도 입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것도 별로 효과가 없는 듯했다. 채언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몸을 돌렸다. 영웅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돌아누운 채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영웅의 손목 위를 살살 긁다가, 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으며 시시한 장난을 쳤다.
어느새 잠들었던 채언은 얽혀있던 손가락이 움직이는 느낌에 부스스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을 반만 쳐놓은 방 안이 푸르렀다. 영웅과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위로 살짝 뜨자, 채언은 졸린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더 자요. 아침 먹을 때 깨워줄게요.”
낮은 목소리와 함께 풀어지는 손가락이 불안했지만, 곧바로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느낌에 안심한 채언은 무겁게 뜨이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영웅의 팔이 빠져나간 목 아래로 폭신한 베개가 들어왔다. 익숙하고 좋은 향기가 나서 채언은 따듯한 체온이 남아있는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내일부터는 주말이니까. 아침부터 낮까지 베개 대신 영웅을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다. 채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영웅이 출근한 뒤. 채언은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냈다. 드라마를 틀어놓은 채 이른 낮 시간을 보내다가, 화분을 돌보고, 점심에는 영웅과 통화를 했다. 영웅이 출근한 뒤에는 자꾸만 몸이 축축 처져서 카펫 위에 앉아있거나 엎드려 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와 통화를 한 뒤에는 조금 힘이 났다. 그래서 전화 통화 이후에 집에 필요한 것이 있는지 체크한 다음 마트에 다녀오는 것이 요즘 반복되는 스케줄이었다.
오후에는 세탁물을 받고 집 안 청소를 조금 한 뒤에 다시 TV를 틀어놓았다. 요즘도 종종 저녁을 먹을 때, 영웅은 채언이 새로 보는 드라마 내용을 묻고는 했다. 그래서 채언은 토마토 화분 앞에 앉아 배우들의 대사를 듣고 있었다.
“이건 맛이 없어?”
채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액체가 사라진 영양제 튜브를 빼냈다. 토마토 화분에만 벌써 영양제를 두 개나 썼는데, 조금 자라는가 싶던 것은 전보다 더 시들시들해졌다. 흙 위로 올라온 것들이 전부 그랬다. 토마토는 빠르면 두 달 내에 동그란 열매가 맺힌다고 했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우는 것은 초록색 줄기가 위로 쭉쭉 자라지도 않고, 이파리조차 몇 개 나지 않았다. 채언은 여린 식물을 가볍게 건드려보다가 혹시 잎이 뭉개질까 봐 금방 손을 거두었다.
앉아서 다른 화분을 둘러본 채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영양제를 한 개만 꽂아 놓은 것들은 무럭무럭 잘만 자라고 있었다. 사실 영양제도 필요 없어 보였다. 화분의 크기가 달라서인지,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토마토 화분은 영양제를 빨아들이는 속도가 더딘 것 같았다. 그래서 채언은 다른 화분에 물을 줄 때. 토마토에는 물 대신 영양제 튜브를 손으로 눌러 짜주기도 했다. 그래서 벌써 두 번째 튜브가 텅 빈 것이었다.
혹시 햇볕이 모자란 걸까. 선인장도 방에 두었을 때보다 거실에 가끔 옮겨 햇볕을 쬐게 해준 뒤로 더 잘 자랐으니까. 토마토 화분을 품에 안은 채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몇 걸음을 걸었다, 영웅이 퇴근할 무렵 그의 차가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기 위해 서 있는 자리에 화분을 내려두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영웅은 작은 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해외에서 시킨 것이 요 며칠 간격을 두고 계속 배송되어왔다. 이제는 채언도 영웅이 상자를 들고 오면 보고도 모른 척을 해주었다. 어쨌든 상자에 가려 내용물은 보이지 않으니, 선물을 꺼냈을 때 깜짝 놀라하며 기뻐해 주는 것은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전실을 걸어간 영웅은 마중 나와 있을 채언을 생각하며 중문을 열었다. 요즘 채언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마중 나와 있었다.
“채언…! 씨.”
그러나 신발장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활짝 벌어졌던 입이 다물렸다. 머쓱해진 영웅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구두를 벗었다. 복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TV가 켜져 있는 듯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해서 거기에 푹 빠져있는 건가.
신발장 안에 구두를 집어넣은 영웅은 슬리퍼를 신고 실내 복도를 디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거실이 가까워질수록 TV 소리는 커지는데 저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데 집 안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복도를 걷는 영웅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윽고 환히 불 켜진 거실 앞에 다다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영웅은 거실 안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바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밑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구르는 느낌이 났다.
영웅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환한 거실에는 채언이 없었다.
유리창 앞에는 채언이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던 토마토 화분이 엎어져 있었다. 흙이 모두 쏟아진 상태였다. 성큼성큼 거실 중앙까지 걸어간 영웅은 부엌을 보았지만, 그쪽에도 채언은 없었다. 영웅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초조하게 고개를 돌렸다. 드라마가 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멈춘 TV 화면에는 숫자가 줄어드는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실을 나서는 발걸음에 바작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길이 갈린 복도에 서서 자신의 침실 문을 보던 영웅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복도 끝. 문틈 아래로 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불 꺼진 방. 너무 조용해서 이 집에 함께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겨울의 채언.
영웅은 긴 복도 끝까지 걸어, 닫혀있는 방문 앞에 섰다. 문손잡이를 잡은 뒤, 두 번 노크했다.
“채언 씨. 여기 있어요?”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영웅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이불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위의 이불이 동그랗게 솟아있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영웅은 망설이지 않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채언 씨.”
영웅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 위로 팔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이불 안쪽에서 채언이 몸을 더 동그랗게 마는 것이 느껴졌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닿은 몸이 들썩이고 있었다. 채언은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 아파요?”
“…안, 흐윽. 안 아파요.”
“무슨 일 있었어요?”
두 번째 물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영웅은 굳은 얼굴로 입안 여린 살을 잘근거리다가 채언이 덮고 있는 이불 끝자락을 잡았다.
“얼굴 좀 보여줘요.”
“안, 돼요….”
이불 속에서 고개를 젓고 있는지 슥슥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얼굴 안 볼 테니까, 이불 조금만 내리면 안 돼요?”
영웅은 몸을 더 낮추며 속닥였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방금처럼 이불 스치는 소리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영웅은 천천히 이불을 아래로 내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기운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채언은 팔 안쪽 깊이 얼굴을 묻고 있었다. 흙이 묻은 손에 축 늘어진 풀줄기를 쥔 채였다. 훌쩍이는 소리와 간헐적인 떨림이, 채언이 아직도 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웅은 채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끝까지 걷어낸 뒤 침대 위에 누웠다. 고개를 들지 않는 채언의 몸을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참 보듬어주자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던 영웅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채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흙 묻은 손이 움찔거렸다. 영웅은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춰주었다. 아무것도 채근하지 않는 그의 품에 안겨있던 채언은 한참 만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영웅은 억지로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채언의 손이 빠져나간 커다란 손에는 흙이 옮겨 묻어 있었다.
“…저는, 정말… 흑, 잘해보고 싶었어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좋은, 물이랑… 영양제도, 많이.”
말꼬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알죠. 채언 씨가 매일 돌봐준 거.”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채언은 영웅의 품에 깊숙이 기대며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겨우 눈물을 삼킨 채언은 발갛게 짓무른 눈을 들었다.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했다. 채언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영웅은 젖은 눈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눈물 맛이 났다.
“그런데. 뭐가 잘 안됐어요?”
입꼬리가 내려간 채언은 꽉 쥐고 있던 손을 슬며시 펴 보여주었다. 여러 개의 줄기 아래 얽힌 뿌리가 잔뜩 뭉크러져 있었다. 썩은 뿌리와 축축한 물기와 흙이 뒤섞여 채언의 손바닥이 지저분했다.
“다 소용이, 흐… 없었어요. 키우기, 키우기 쉽다고 했는데. 으읏, 저는.”
채언의 아래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젖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영웅의 퇴근 시간 즈음 채언은 거실 창문가에 서서 정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익숙한 차종이 보여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갔는데 토마토 화분이 발에 채고 말았다. 무거운 도자기가 엎어지자 묵직한 마찰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얕게 심어져 있던 것은 엎어지며 흙 위로 얇은 실뿌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잎이라도 뭉개질까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여린 식물이었다. 놀란 채언은 서둘러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것을 수습하려 했다. 정신없이 손바닥 가득 흙을 퍼 올리던 채언은 그제야 검게 뭉크러진 뿌리를 발견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남들은 키우기 쉽다고 했던, 고작 토마토였다. 빠르면 두 달 내에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자신이 키운 것은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뿌리부터 썩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흙을 헤집어보았는데 얽혀있던 것들이 전부 그랬다. 채언은 이미 죽어버린 것들을 그러쥐었다.
썩어버린 것도 모르고, 하나씩 뭉크러지는 것도 모르고. 욕심내서 영양제나 뿌려주었다니. 손끝을 타고 오른 우울감이 순식간에 채언의 몸을 사로잡았다. 한순간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스위치가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숨어버린 것이었다.
채언은 엎어진 화분의 모습을 생각하며 계속 울었다.
“다… 다, 죽었어요.”
왜 그렇게 화분을 돌보는 일에 매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은 채언이 토마토를 애지중지 아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채언은 가끔 제 손을 끌고 화분 앞으로 가서 줄기가 얼마나 자란 것 같은지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흐윽….”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보자, 영웅은 예전에 드라마가 끝났다며 울던 채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채언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작은 취미가 생기면 거기에 마음을 깊게 쓰는 듯했다. 단순히 식물을 기르는 것을 취미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토마토를 애완동물처럼 아껴준 것일지도 몰랐다.
영웅은 손등으로 채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팠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다시 키우면 되죠. 원래 이런 건 몇 번 키워봐야 하나를 잘 기를 수 있거든요.”
“다른, 흐읏… 다른 사람들은.”
채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눈가가 그렁그렁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흐으… 저는, 다, 못해요.”
“아니에요. 채언 씨. 생각해봐요.”
영웅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면서 채언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은 새우가 먹기 편하지만.”
“새우가… 흑, 갑자기 왜… 나오….”
“채언 씨.”
자신을 진지하게 불러오는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헐떡이며 울음을 삼켰다.
“네….”
“새우를 처음 먹은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흐음. 그러면.”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영웅 덕분에 채언의 눈물이 서서히 멎었다.
“지난번에 해준 스파게티 말이에요.”
“네….”
“난 요리를 엄청 못했거든요. 처음으로 파스타를 만든 날, 두 입 먹고 전부 버려야 했어요.”
영웅은 헐떡이는 몸을 토닥여주었다.
“맛있겠지 하고 한입, 한 번 더 먹으면 괜찮겠지 하고 한입. 그런데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채언은 영웅이 해주었던 스파게티의 맛과, 익숙하게 재료를 다듬어 쉽게 요리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잘 만들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재료를 버렸겠어요.”
채언은 지금 이 상황이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었다면, 이번 회차는 뻔한 감동 타임이 들어갔다고 여겼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의 자신은, 가까이서 속닥이는 영웅의 말에 꽤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기분에 눌려있던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맞아요. 엄청 맛있어요. 지금은.”
채언은 영웅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손안의 축축한 것보다 품 안의 영웅에게 마음을 기대기로 했다.
“저번에 산 토마토 씨앗. 남아있어요?”
“아뇨… 그때 티슈에 얹어, 놓은 게, 다였어요. 발아에 성공, 한 것만 심은 거고요.”
채언의 말은 딸꾹질하듯 중간중간이 끊어졌지만, 영웅은 재촉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럼, 우리 내일 씨앗 같은 거, 화분에 심을 거 사러 갈래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듯한 품에 기대 눈을 깜빡이는데, 하도 울어 부은 눈가가 이제야 피곤했다. 채언은 눈을 감고 가느다란 숨을 쉬었다.
“물 좀 마실래요?”
나직한 물음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마르기는 했지만, 지금은 잠시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렇게 안겨있은 지 몇 분 후. 헐떡임이 사라진 몸에 현실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채언은 영웅의 가슴팍이 축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젖은 얼굴 때문이었다.
우울감이 서서히 걷히자 채언은 조금 민망해졌다. 퉁퉁 부은 얼굴이 엉망일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끝까지 가지 않는 관계에 조급해하고 있었는데, 이런 얼굴을 보여주면 영웅은 앞으로도 뭔가를 더 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채언은 고개를 움츠리며 작게 입을 열었다.
“저, 씻고 싶어요.”
“알겠어요. 욕조에 물 받아줄까요?”
채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누워있어요. 물이 다 차면 데리러 올 테니까.”
젖은 볼에 따듯한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영웅은 채언을 데리고 함께 방을 나서고 싶었지만, 잠시 혼자 누워있게 둔 다음 거실을 치워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신 불은 켜놓고 갈게요.”
“네.”
채언은 팔 위에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방 안이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이 방을 나가자 채언은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다가 방 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 마른 사과가 든 팩 옆에 죽은 토마토 줄기가 놓였다.
영웅은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수건 한 장을 적셔 거실로 나왔다. 옆구리에는 빈 서류 봉투가 한 장 들려있었다. 다행히 단단한 화분은, 깨진 부분이 유리 파편처럼 퍼지지 않고 큰 조각으로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채언이 깨진 도자기에 손이라도 베었다면 자신도 이성을 잃었을지 몰랐다.
영웅은 앨리를 불러 TV를 끈 다음,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재빨리 손으로 흙을 떠서 반쪽짜리 화분 안에 담고, 서류 봉투로 바닥을 긁어 흙을 모았다. 고운 모래 같은 것들이 모였다. 사악. 사악. 자잘한 것을 긁어모으던 영웅의 손이 느려졌다.
채언은 왜 복도 끝방에 들어갔던 것일까. 그리고 왜…. 뒤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영웅의 생각 끝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무엇에 불쾌감을 느낀 것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영웅은 나쁜 기분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서류 봉투와 손바닥을 이용해 싹싹 긁어모은 것을 화분 안에 떠 넣고, 젖은 수건으로 바닥을 닦았다. 청소기를 쓴다면 채언이 거센 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휴!”
영웅은 허리에 팔을 올리고 서서 바닥을 살폈다. 손은 지저분해졌지만, 깔끔해진 거실이 마음에 들었다. 수건은 채언이 씻을 때 복도 중간 화장실에서 대충 빨 생각으로 일단 세탁실에 던져두었다. 서류 봉투를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은 영웅은 욕조의 물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게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거실을 나서기 직전, 툭, 발에 작은 상자가 챘다. 아까 집에 가지고 들어온 택배 상자였다. 영웅은 허리를 숙여 상자를 주웠다.
“흐음.”
오늘은 아무래도 사용할 일이 없을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영웅은 침실 안으로 들어가며 상자를 뜯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채언은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수건 양쪽을 잡았다.
“네.”
문이 열리고 영웅의 몸이 반만 들어왔다.
“욕조 물 다 받아놨는데. 어?”
영웅의 고개가 갸웃했다. 채언의 머리 위에 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앞머리는 젖어있었고, 얼굴은 뽀얬다.
“씻었어요?”
“세수, 했어요.”
“아. 그랬어요?”
영웅은 웃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채언은 수건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손을 잡았다.
욕실 앞에 도착했을 때 채언은 여전히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있었다. 영웅은 뭔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채언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머리만 감았다는 채언은 아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었다.
“채언 씨한테서 바디워시 향기가 나는데.”
욕실 문을 열려던 채언의 손이 멈칫했다. 영웅의 눈치를 보던 까만 눈이 옆으로 도로록 굴렀다. 결국 채언은 머리 위에 얹어 놓았던 수건을 내려야 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향기가, 몸에서는 바디워시 향기가 폴폴 풍겼다.
채언은 급히 세수만 하려고 들어간 욕실에서 거울로 본 자신의 모습이 너무 꼬질꼬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퉁퉁 부은 얼굴에, 눈물과 땀에 젖은 머리카락까지. 그래서 영웅이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그냥 샤워를 해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씻을 것이었지만 그래도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저도, 요즘 두 번 씻어요.”
영웅은 소심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는 채언을 보다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하.”
영웅은 채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욕실 문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두 번 씻어요.”
채언은 맨발로 욕실을 디뎠다. 물기 없이 마른 바닥에 서서 영웅을 돌아보았다.
“따듯한 물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나는 다른 욕실에서 씻고 저녁 준비해 놓을 테니까.”
“대표님.”
채언은 닫히려는 욕실 문을 잡고 영웅을 불렀다. 스륵 미끄러진 손은 바깥 손잡이를 잡고 있던 영웅의 손등 위를 덮었다.
“여기서, 같이 씻어도 되는데요.”
그 말에 영웅이 눈을 끔뻑였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을 보던 채언은 자신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불편하시면…….”
“그러죠. 뭐.”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손목에 걸린 시계를 풀어냈다. 욕실 바깥 세면대 위에 시계와 넥타이가 놓였다.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그를 보며 채언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티셔츠를 벗은 뒤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려는 찰나였다. 채언은 슬쩍 눈을 들어 영웅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은 바지 안에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복도 끝방에서 영웅의 방으로 옷가지를 옮길 때 속옷도 전부 가지고 왔던 터라, 아까 샤워를 한 뒤 갈아입을 속옷이 없어 그냥 겉옷만 그대로 걸쳤던 것이다.
복도 끝방 욕실에 걸려있을 자신의 속옷을 생각하며 채언은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다행히 영웅은 벨트를 풀어내느라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채언은 재빨리 바지를 벗고 티셔츠와 함께 뭉쳐 욕실 문 앞에 옷을 내려놓았다.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같이 씻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답지 않게 다시 수줍음을 타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헛기침을 한 뒤, 마저 옷을 벗었다.
채언은 욕실 선반에 놓인 하늘색 링을 보고 있었다. 전에 본 적 없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욕조 안에 들어가 앉은 채언을 보자 영웅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느긋하게 샤워 타월을 몸에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채언 씨. 몸 닦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채언은 영웅의 말에 퍼뜩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방금 씻었으니까… 괜찮아요.”
“두 번 씻는다면서요.”
“아. 그러면 먼저 씻으신 다음에 제가.”
“안 되죠, 그건. 다 순서가 있는 건데.”
그러자 눈치를 보던 채언이 욕조에서 일어섰다. 몸을 타고 흐른 물이 촤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영웅은 욕조 밖으로 나온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앗!”
갑자기 끌어당겨진 몸에 놀란 채언은 영웅의 팔을 잡았다. 거품이 묻어있던 단단한 팔에 물만 묻어있던 손이 닿아 미끈거렸다. 놀라서 동그래진 채언의 눈과 웃음기가 남아있는 영웅의 눈이 마주쳤다. 또옥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끄러운 손으로 맨 허리를 만져오는 손길이 간지러워서 채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수도 없이 입을 맞췄음에도 항상 직전의 신호는 온몸에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
채언은 영웅의 팔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어깨 위로 쓸어 올린 다음 목덜미에 둘렀다. 채언의 턱이 벌어지며 갈라진 입술 사이로 영웅의 혀가 들어왔다. 한참 울고 난 뒤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언은 목이 말라서, 입안에서 섞이는 타액을 목 뒤로 넘겼다.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다가도 상대방의 입술을 가르는 혀와 함께 가까워졌다. 추웁. 소리를 내며 입술이 빨리고, 쪼옥 쪽, 질척한 소리와 함께 미끄러운 혀가 문질러졌다.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두른 채언은 손가락에 닿는 단단한 어깨를 저도 모르게 문지르며 뜨거운 숨을 쉬었다. 바짝 끌어당겨진 허리 때문에 반쯤 발기한 성기 두 개가 맞닿아 있었다. 영웅의 커다란 손 하나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엉덩이를 쥐어오는 손에 채언은 살짝 눈을 떴다. 곱게 내리깔린 영웅의 속눈썹을 보다가 팔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더 끌어당겼다. 그러자 천천히 영웅의 속눈썹이 올라갔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채언은 눈을 감았다. 오늘은 하지 않을까? 마음속에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끈적한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키스와 달리, 둔덕을 만지던 손길은 다시 허리 위로 올라왔다. 앞으로 돌아온 영웅의 손이 아래를 쥐어오려는 것이 느껴져서 채언은 울컥하며 고개를 숙였다. 영웅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에 당황한 영웅이 눈을 끔뻑였다.
“왜… 저번처럼.”
“채언 씨?”
“저랑 했던 게, 별로 좋지 않으셨던 거죠….”
“그게 무슨.”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고 영웅의 시선을 피했다. 뒤로 돌아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위에서 쏟아진 물이 두 사람의 몸 위로 떨어졌다.
거품이 씻겨 나간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영웅은 등 돌린 채언을 가까이 다가가 몸을 껴안았다. 채언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뒤늦게 이해했다. 물기로 촉촉해진 어깨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 위에 턱을 올린 영웅은 채언의 귀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좋지 않으면, 이렇게 됐겠어요?”
매끈한 몸에서 유일하게 살집이 있는 엉덩이 사이에 발기한 성기를 꾸욱 눌렀다.
“하지만 요즘 계속.”
가슴을 가로지른 팔에 손을 올린 채언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웅이 가까이 있으면 안심이 되었지만, 그가 멀어지면 순식간에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그가 자신을 더 원했으면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버려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영웅이 출근하면 점심에 걸려올 전화를 기다렸고, 퇴근 시간 전부터 거실 창에 붙어 그의 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채언은 영웅이 자신을 원한다고 생각될 때, 그 또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제일 행복했다. 마음이 불안해질 때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채언은 조금 전 영웅을 밀어낸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떼를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채언은 영웅의 손등 위에 손을 덮었다. 영웅은 겹쳐진 손을 들어 채언의 얼굴을 살짝 잡아 돌렸다.
“꼭 채언 씨가 생각하는 그것만이, 섹스를 하는 방법은 아닌데.”
물이 닿아 촉촉해진 입술에 입을 맞춘 뒤 볼을 쓸어주었다.
“내가 불안하게 했어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잔잔하게 웃은 영웅은 몸에 남은 거품을 마저 닦고 손잡이를 돌려 물줄기를 멈췄다. 그런 다음 욕실 선반 위에 놓여있던 하늘색 실리콘 링을 가져왔다. 채언은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시콜콜한 것을 묻기엔 자신이 분위기를 너무 무겁게 만들어놓은 것 같아서 입을 열 수 없었다.
“다 씻었죠?”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물이 가득 찬 욕조를 흘끔 쳐다본 뒤,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번 들어갔다 나왔으니까, 이미 사용한 것이었다.
“네.”
“나갈까요. 침대로.”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커다란 수건을 꺼내 채언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침대 위에 바르게 누운 채언은 자신의 얼굴 양옆에 손바닥을 짚고 있는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너무 투정을 부렸어요.”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팔뚝을 문질렀다.
“그런 투정이라면 얼마든지.”
위에서 내려온 입술이 채언의 볼과 목에 차례로 닿았다.
“나랑 하고 싶어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하고 싶어요.”
쪽쪽. 채언의 보조개 자리 위로 내려앉은 입술이 떨어졌다. 윙크하듯 감고 있던 눈을 뜬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볼을 감쌌다. 다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욕실에서 멈췄던 전희가 이어졌다. 영웅의 볼을 감싸고 있던 채언의 손은 촉촉하게 젖은 옅은 색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 영웅의 것을 쥐었다. 반쯤 발기해있던 것을 빠듯하게 쥐고 문지르자, 손안의 두툼한 것이 점점 더 단단해졌다.
“하아….”
각도를 바꿔가며 키스하던 얼굴이 떨어지고 정욕에 짙어진 시선이 마주쳤다. 영웅은 다시 상체를 숙였다.
“읏….”
젖꼭지를 물어오는 느낌에 채언이 곧바로 반응했다. 그동안의 애무에 성감이 개발된 탓이었다. 채언이 허리를 비틀며 다리를 좁히려 하자, 영웅은 다리를 벌려 그것을 막았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 얼굴은 채언의 아랫배에 입을 맞추다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을 빨아들였다. 채언의 양쪽 허벅지 아래쪽으로 팔을 집어넣어 두 다리를 어깨 위에 올려둔 영웅은 보송한 살덩이를 입에 물었다.
“으응….”
채언의 것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음낭을 입에 넣은 영웅은 혀를 내밀어 그 아래까지 핥았다. 보송한 회음부에 혀가 닿자 채언의 허리가 튀었다. 아프지 않게 살을 물며 채언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영웅은 한쪽 손을 말랑한 엉덩이 아래로 집어넣었다.
“흣… 잠, 잠시만요.”
채언이 숨을 몰아쉬며 영웅을 말렸다. 다리를 접어 아래로 내린 채언은 옆에 있던 베개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엎드렸다.
“이렇게, 하고 싶어요.”
지난번처럼 아파서 굳어버릴 게 뻔했다. 또다시 영웅의 목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떨림이 전달될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베개에 얼굴을 대고 누워 살짝 돌아보는 얼굴에 영웅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요.”
몸을 숙여 채언의 배 아래 팔을 집어넣은 영웅은 매끈한 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채언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깨 사이에서부터 등 선을 따라 내려온 입술이 채언의 엉덩이를 살짝 물었다. 말랑한 빵 반죽 같아서, 영웅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이어 단단한 팔 하나가 채언의 허벅지 앞을 가로질러 잡았다. 커다란 손에 의해 말랑한 살집이 꽈악 눌러 잡혔다. 영웅은 입술을 벌리며 붉은 혀를 내밀었다.
“읏! 거긴, 잠시만요…! 흑.”
구멍 위에 닿아오는 느낌에 채언이 기겁하며 팔을 저었다. 하지만 이미 단단한 팔에 허벅지가 잡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놓아달라고 말해도, 이미 아래를 핥는 데 입을 사용 중인 영웅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초옥, 촉. 들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채언은 베개를 꽉 쥐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부끄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 질척한 소리가 저 아래쪽에서 나는 건지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하반신은 착실히 반응하고 있었다. 구멍 안에 손가락이 들어오던 느낌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흐읏… 그만, 그만….”
울먹이는 채언의 목소리에도 영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꾸만 고개를 틀어 아래를 내려다보던 채언은 결국, 베개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다른 것을 잡아챘다.
“아야. 아파요.”
머리채가 잡힌 영웅은 전혀 아프지 않은 목소리로 뻔뻔하게 아프다고 말했다. 채언은 새빨개진 얼굴로 원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이거. 하지, 하지 마세요.”
눈물이 차오른 눈에 영웅은 알겠다며 채언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영웅을 떼어내서 다행이었다. 채언은 베개를 잡고 털썩 엎드렸다. 시근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등이 오르내렸다.
토라진 게 분명한 모습을 본 영웅은 소리 없이 웃다가 손을 뻗어 협탁 서랍을 열었다. 줄줄이 딸려오는 콘돔을 뜯어낸 그는 비닐을 이로 물어 찢었다. 사이즈가 맞는 것을 어디에서 사야 할지 몰라 해외에서 배송시킨 것이었다. 침대 위에 늘어놓은 것들이 모두 같이 배송되어 온 것이었다. 영웅은 침대 위를 돌아다니는 하늘색 실리콘 링을 손에 쥐었다. 오늘은 사용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미리 세척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개의 링은 한 개씩 따로, 또 같이 겹쳐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너무 큰 물건을 가진 사람과 섹스를 할 때 성교통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용품이었다. 영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콘돔을 씌운 성기에 말랑하고 쫀쫀한 링을 세 개 끼워 넣었다.
“조금 차가울지도 몰라요.”
“…뭐가요? 흣!”
채언의 엉덩이 사이로 투명한 젤이 흘러내렸다. 아끼지 않고 짜낸 것은 덩어리져 있다가 체온에 닿아 서서히 녹았다. 영웅은 그 위를 손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엉덩이 사이와 굵은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었을 때, 손가락 하나를 다물린 구멍에 집어넣었다. 채언의 허리 근육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몸을 숙인 영웅은 괜찮다는 말 대신 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흥건하게 뿌려놓은 젤 덕분에 손가락 하나는 매끄럽게 들어갔다. 찔꺽이는 소리에 채언이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섞였다.
천천히 손가락 개수를 늘려가던 영웅은 지난번보다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힘주어 꾹꾹 내벽을 누르자 피부가 마찰하며 질척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흐…!”
어느 순간 채언의 허리가 비틀렸다. 영웅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을 빼지 않고 앞뒤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으응….”
지난번과 느낌이 달랐다. 채언은 자꾸만 움찔거리는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찌릿한 느낌이 슬슬 몸을 휘감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비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 잦아졌다. 당황한 채언은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영웅을 쳐다보았다.
“이, 이제 그만 하고, 넣어… 하아, 넣어주세요.”
눈을 들어 올린 영웅은 입술로 채언의 허리를 살짝 물었다.
“히어요.”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뭉그러진 발음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 격렬해졌다. 억울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채언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영웅이 가슴을 만져주는 것도 아닌데, 아래서 타고 오르는 묘한 쾌감이 젖꼭지 끝을 바짝 서게 만들었다. 채언은 저도 모르게 하반신을 시트에 비볐다. 빳빳하게 선 성기가 자극받는 느낌에 몸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채언의 몸이 군데군데 분홍빛을 띠었다. 마찬가지로 분홍빛이 된 발가락이 오므라들어 시트 긁히는 소리가 났을 때, 영웅은 채언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상체를 들었다. 찔꺽, 찔꺽. 야한 소리를 내던 굵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쾌감으로 움찔거리는 채언을 내려다보던 영웅은 느리게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축축한 내벽이 딸려오는 것 같았다.
“하아… 하.”
채언은 그 틈을 타서 잠시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며 숨을 쉬었다.
“흐읏…! 아, 윽.”
채언의 몸에 힘이 빠진 틈을 타서 갑자기 파고든 손가락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렬히 움직이는 손길에 다 녹은 젤이 구멍을 빠져나와 영웅의 손목에 핏, 핏, 튀었다. 채언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정수리 끝까지 찌릿한 느낌이 타고 올랐다. 한 번으로 끝나는 쾌감이 아니었다.
“그, 으으… 그만, 그, 그만.”
베개를 쥔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였다. 허벅지가 꽉 잡힌 탓에 인어처럼 발끝을 모아 비틀던 채언은 허억, 숨을 멈췄다. 턱이 덜덜 떨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짧고 얕은 숨이 터져 나왔다. 아랫배가 경련하듯 굳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침대 시트 위로 정액이 흩뿌려졌다.
구멍 안에서 손가락이 빠져나오자, 투명한 실이 늘어지다 끊어졌다. 채언의 허벅지를 그러잡고 있던 팔에 힘을 푼 영웅은 스윽, 손을 올려, 방금 사정한 채언의 것을 손에 쥐고, 정액을 쓸어 올렸다.
“…흐, 으….”
베개에 묻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채언을 보며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양쪽 손이 모두 끈적했다.
“채언 씨.”
영웅은 콘돔을 낀 성기를 손으로 훑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하아…네….”
숨을 몰아쉬느라 오르내리는 등을 보며 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손안의 것이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영웅은 제 것에 젤을 더 뿌린 뒤 천천히 몸을 숙여 채언에게 다가갔다. 즈윽 즈윽.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선단을 채언의 엉덩이 사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젤이 잔뜩 발린 성기는 이미 한 번 사정한 것처럼 번들거렸다.
“왜, 아까. 후우….”
녹은 젤이 흥건한 입구 근처를 발기한 성기로 툭툭 치자,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속옷 안 입고 있었어요?”
“…네? 아, 그건.”
우물쭈물 말을 뱉던 채언은 고개를 틀어 영웅을 돌아보았다.
“흐읍…!”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미끄러지듯 삽입된 영웅의 것이, 아래쪽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급히 숨을 들이마신 입술에 영웅의 입술이 맞붙었다. 공기가 차오른 가슴은 갈비뼈를 드러내며 올라가 있었다. 채언의 몸과 시트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영웅은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만지며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가로막힌 입술 때문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언의 몸이 크게 떨렸다.
번들거리는 성기가 뜨거운 내벽을 드나드는 동안, 찰박, 찰박, 녹은 젤이 튀어 영웅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튀었다. 주욱. 허리를 뒤로 물릴 때 타고 흐른 투명한 액은, 핏줄 선 양물이 구멍 안을 파고들 때 잔뜩 밀려 나와 채언의 회음부를 적셨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채언 때문에 영웅은 촉촉한 입술을 계속 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쉽게 혀를 얽어 부드럽게 빨아준 뒤 놓아주자, 가로막고 있던 것이 사라진 채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흐읏, 읏,…! 으응.”
끝까지 삽입되는 것을 막고 있는 링 때문에 허리를 쳐올리는 영웅의 장골은 채언의 살갗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퍽퍽 쳐대는 살덩이에 몸이 위로 밀리면서, 물 위에 파문이 일 듯 채언의 엉덩이가 흔들렸다.
“하아, 채언 씨.”
영웅은 미끈거리는 젤이 묻은 손바닥으로 채언의 가슴을 문질렀다. 살집 없는 가슴을 그러쥐다가 손가락으로 유두 위를 긁듯이 건드렸다.
“흑, 읏.”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꼬집듯 잡아당기자 채언의 어깨가 움찔 솟았다. 베개 위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던 채언은 위아래로 느껴지는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벌어진 아래쪽의 느낌에 울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몸을 떨었다.
팔을 뒤로 돌려 영웅의 팔뚝을 잡아보려 했지만, 그가 자꾸만 허리를 위로 쳐올리는 바람에 손끝에 닿는 살을 놓치고 말았다. 아래를 흥건히 적신 젤 때문인지, 한번 사정을 한 뒤 몸이 민감해져서인지 빠듯하게 벌어진 아래가 아프다기보다 간지러웠다. 지난번 아팠던 섹스와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뜨겁고 굵은 것이 아랫배를 꽉 채우고 있었지만, 영웅의 것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한 생각이 부끄러워서 채언은 눈가를 찌푸리며 밭은 숨을 쉬었다.
“으응….”
귓바퀴를 물어오는 입술에 채언은 목을 움츠렸다. 젖은 살덩이가 귓가를 핥아오는 느낌보다 끈적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드는 것에 더 큰 흥분을 느꼈다.
채언은 상체를 비틀어 영웅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입술을 찾아 스스로 물고 혀를 집어넣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귓가를 적시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쮸웁 소리를 내며 젖은 입술 사이로 타액이 늘어졌다. 자신의 목 뒤로 둘린 팔이 침대 위로 떨어지자, 영웅은 그대로 채언의 하얀 허벅지 한쪽을 들어 올렸다.
“아…! 으, 응.”
채언은 비틀린 자세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울듯이 신음해야 했다. 반쯤 돌아가며 위로 들어 올려진 다리 때문에, 내벽이 따라서 쓸렸다. 번들거리는 성기가 구멍 안으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하아.”
영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숨을 쉬었다. 내벽이 딸려 나올 듯 아래를 꽉 물고 있었다. 들어 올린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친 채 영웅은 허리를 쳐올렸다.
채언은 가슴을 들썩이며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구멍 안으로 영웅의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깜빡이는 느낌이었다. 후욱, 후욱. 짧게 숨을 들이 마셔보아도 자꾸만 허리나 가슴이 위로 뜨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쳐올리는 힘에, 발기한 성기가 철썩이며 배를 쳤다. 흘러내린 쿠퍼액과 젤이 섞여 아랫배까지 젖은 액체로 엉망이었다. 채언은 손은 쓰지 않았지만, 제 살에 닿으며 찌릿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 꼭 자위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읏, 읏. 아…!”
“후우, 흣….”
퍼억 퍽. 힘 있게 쳐올리는 것에 채언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사정 욕구가 차올랐다.
“그… 흐윽, 그, 그만. 그만할래요.”
채언은 떨리는 손을 아래로 뻗었다. 제 것을 쥐려는데 영웅의 손이 행동을 제지했다.
“조금만, 흣, 더요.”
어깨 위에 걸쳐놓은 채언의 다리를 내려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한 뒤, 영웅은 채언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젤과 땀이 섞인 손바닥이 꽈악 맞물렸다. 채언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영웅과 입을 맞췄다. 울먹이는 소리를 내보았지만, 목구멍 안쪽으로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 올 뿐이었다.
“으음, 윽…! 흐으… 읏”
발갛게 달아오른 눈꼬리 옆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 불안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채언은 손바닥에 반달 자국을 내는 대신, 영웅의 손을 꽉 쥐었다.
“읍, 흐읍….”
코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영웅의 허리 아래에 새겨진 문신에 채언의 무릎이 스쳤다. 사정하는 순간 굳어진 몸 때문에 굵은 성기를 품은 구멍이 꽉 조여졌다. 자신의 것을 쥐어짜듯 움츠린 채언 때문에 영웅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사정의 여운으로 경련하듯 떨리는 몸을 봐주지 않고 더 세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삽입을 반복하자, 구멍 주위로 하얗게 거품이 일었다.
힘 빠진 몸이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채언은 흐윽, 숨을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의 것이 구멍 안에서 즈윽- 천천히 빠져나왔다. 벌어진 구멍이 움찔거릴 때마다 안쪽에서 젤이 흘러나왔다. 다 녹은 젤이 시트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보며 영웅은 깍지 낀 손을 하나 풀어냈다. 아직 단단한 제 것을 쥐고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번들거리는 성기를 문지를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흣….”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의 잇새로 낮은 숨이 터져 나왔다. 탄탄한 가슴이 오르내렸다. 그는 사정의 여운을 즐기며 체액과 젤로 몸이 더럽혀진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축축해진 링과 콘돔을 빼낸 영웅은 반쯤 감긴 채언의 눈 아래 입을 맞췄다.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팔이 목 뒤에 둘리자 영웅은 채언의 턱 옆에 얼굴을 기댔다. 땀에 젖은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거친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영웅은 채언의 턱을 가볍게 물었다 놓은 뒤 입을 열었다.
“아직, 대답 안 해줬는데.”
“…뭘요?”
영웅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서 채언은 목을 움츠렸다.
“속옷. 왜 안 입고 있었는지.”
목이 말라 마른침을 삼키고 있던 채언은 영웅을 더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또 세탁물이 밀린 건, 아야.”
전혀 아프지 않은 목소리였다. 채언은 물고 있던 영웅의 어깨를 놓았다.
“놀리지, 마세요.”
“아프다구요. 채언 씨.”
영웅은 품 안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을 뒤집었다. 또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뀐 것에 채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영웅은 채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호 해줘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채언은 다시 영웅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단단한 어깨 위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영웅은 해외배송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했다. 배송기간이 너무 길었다. 아직 쓸 것이 한가득 남아있었지만, 앞으로는 미리미리 필요한 것을 주문해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영웅은 땀에 젖은 채언의 등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세 번 씻어야겠네요.”
그 말에 채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영웅은 동그랗게 올라온 볼에 쪽쪽 뽀뽀를 했다. 말캉한 느낌에 머릿속에 있던 해외배송의 문제 따위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뽀뽀 세례를 받던 채언은 웃으며 손으로 영웅의 입을 막았다. 손가락을 무는 장난을 치는 그의 배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그러자 영웅은 익숙하게 팔을 벌려 채언을 품에 안았다. 두 사람 다 온몸이 끈적했지만, 체온을 나누는 일이 불쾌하지 않았다.
채언은 영웅의 목과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손짓은 아니었다. 편안한 분위기에 눈이 절반쯤 감기고 있었다. 영웅의 단단한 어깨쯤을 보며 눈을 감으려는데 손가락 끝에 시선이 닿았다. 그의 어깨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채언의 눈가에 묻어있던 졸음이 달아났다. 잊고 있었는데, 수영장에서도 본 적 있었다. 문신으로 가려야 할 만큼 눈에 띄는 흉은 아니었으나, 이곳에 상처가 났던 것이 분명했다. 채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표님.”
채언의 부름에 영웅이 눈을 마주쳐왔다. 애정이 담뿍한 시선이었다.
물어봐도 될까? 지금이라면. 채언은 긴장을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을 무는 대신 영웅의 턱에 입술을 눌렀다. 가벼운 입맞춤에 영웅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답례처럼 채언의 둥근 이마에도 입술이 내려앉았다.
“왜 불렀어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요.”
영웅은 손등으로 채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넘어가며 모양이 예쁜 이마가 드러났다.
“여기에, 이거요.”
채언은 단단한 어깨 위를 조금 힘주어 문질렀다. 영웅은 고개를 틀어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어쩌다 생긴 흉터인지.”
“흐음.”
영웅은 잠시 딴청을 피우듯 눈을 굴렸다.
“말씀해주시기 그러면, 안 해주셔도 되고요.”
그러나 미련 남은 손가락은 흉터 위를 살살 쓸고 있었다.
“그게.”
영웅은 초조한 듯 입술을 핥았다.
“어릴 때… 누나랑, 다투다가.”
채언의 얼굴이 멍해졌다.
“카일라 님이요?”
영웅은 머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나는 레고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 한창 숲 같은 걸 만든 적이 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누나가, 자꾸 내가 만든 나무 대신, 그러니까 레고를 뽑아간 다음에, 하… 브로콜리를 꽂아놔서.”
영웅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던 채언은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복수의 의미로 누나의 에세이 숙제 위에 잔뜩 낙서를 했다가 머리를 쥐어박혔다고 했다. 그게 또 서러워서 레고 판 위에서 뒹굴며 울다가 어깨가 그렇게 된 거라고.
“그 정도면 다툰 것도 아니네요.”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죠.”
채언은 영웅의 어깨 흉터를 만지작거리다가, 또 다른 일은 없었는지 물었다. 또 다친 일은 없냐고. 영웅의 흉터는 하나가 아니었다. 문신 아래 있는 것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했다. 쓰러졌을 때 그 위를 꾹 누르고 있던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그때. 우리 술 마신 날, 태권도를 배웠다고 했잖아요.”
“아… 네.”
사범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던 그날을 말하는 듯했다. 다시 생각해도 손가락이 곱아드는 느낌에 채언은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누나가 먼저 배웠거든요. 난 꼭 이기고 싶었고. 뭐, 결국 같이 대련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서요?”
영웅은 채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노란띠로 그만두기 전에, 그때쯤엔 자신감에 차올라서 좀 활동적이었어요. 높은 곳에도 올라가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중간에 훌쩍 뛰어내리고. 그래서 좀 여기저기 다쳤죠.”
채언은 허리에 노란색 끈을 묶은 붙임성 좋은 어린애가 여기저기 쏘다니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미끄럼틀을 타다가 뛰어내렸다면 많이 다칠 만했다.
아무래도 흉터와 소리 사이에는 큰 연관성이 없는 듯했다. 흉터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채언은 살짝 고개를 들어 영웅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채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채언 씨는 어릴 때도 얌전했어요?”
“네?”
“어땠는지 궁금하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는 영웅의 말에 당황한 채언은 눈을 깜빡이다가 그의 품에 안겼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저도, 비슷했어요. 장난감을 좋아하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땐 자동차와 공룡을 좋아했었다. 목이 꽉 막혀오는 느낌에 채언은 콜록, 마른기침을 했다.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영웅이 품 안을 살폈다.
“저, 목이 너무 말라서.”
입가를 가린 채언의 말에 영웅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채언은 아까 한참이나 운 상태였다. 그런 뒤에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침실에서 같이 뒹굴었으니 목이 많이 마를 만했다.
“물 가져다줄게요. 그러고 보니, 우리 저녁도 안 먹었네.”
“네.”
“그럼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누워있는 채언의 어깨를 쓸어준 그는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침대 옆에 준비해놓은 티슈를 뽑아 들더니, 끝을 묶어 버려둔 콘돔을 주워 가져갔다. 침실을 나서는 영웅의 뒷모습을 보던 채언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언제 콘돔을 준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는 정신없이 베개만 끌어안고 있느라 뒤에서 벌어지는 사정을 몰랐다.
영웅이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 중인지 작게 물 틀어진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저녁을 먹기 전에 다시 샤워를 해야 했기 때문에 채언은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물컹한 게 밟혔다.
“뭐지.”
발끝을 오므린 채언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하늘색 링을 발견했다.
“읏.”
그걸 주워들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던 채언은 다시 풀썩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에 눈이 찌푸려졌다.
곧 침실로 돌아온 영웅은 침대 위에 앉아있는 채언에게 다가가 컵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컵을 쥐고 물을 마시는 채언을 보다가, 입에서 컵이 떨어지자 물 묻은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시도 때도 없는 입맞춤에 익숙해진 채언은 턱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바닥에 이건 뭐예요?”
빈 컵을 받아든 영웅은 바닥을 보았다.
“아.”
실리콘 링을 주워든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또 한 개를 주웠다. 두 개는 길이가 달랐다.
“아까 내가 끼고 있던 거요.”
“아까…?”
영웅의 눈이 아래쪽을 향했다가 올라오길래 채언도 시선을 내렸다. 무심코 마주한 두툼한 것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끝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다니, 조금 전까지 제 것에 닿아있던 게…. 생각을 마친 채언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는 채언을 보며 웃던 영웅은 손을 내밀었다. 영웅의 손을 잡은 채언이 일어서다 다리를 휘청했다. 단단한 팔이 채언의 허리를 안았다.
“배고파서 힘이 없어요?”
“그… 네, 맞아요.”
두 사람은 잠옷을 입고 식탁에 앉아있었다. 영웅이 피자 박스를 열었다. 샤워하기 전에 시킨 것이었다. 두 사람은 피자를 한 조각씩 집었다.
채언은 치즈가 주욱 늘어나는 피자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최선을 다해 맛있다는 표정을 짓고 우물거렸다. 채언이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킬 때까지 영웅의 눈에서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치즈피자 안 싫어해요.”
피자를 삼킨 채언이 멀쩡해 보이자, 그제야 영웅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베어 물었다.
“그때는 진짜 숙취 때문에 그랬어요.”
영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채언도 나머지 부분을 입에 물었다. 피자를 먹기로 정하고 나서, 토핑을 고민하는 영웅의 모습에 치즈피자를 가리킨 것이 채언이었다. 뭐가 잔뜩 올라간 것보다 기본적인 것을 먹고 싶어 고른 것이었는데, 영웅은 혹시 그때 일 때문에 그러는 거냐며 채언을 말렸다. 채언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한참을 도리질해야 했다.
“술 마신 다음 날이 아니어도 이거 자주 드셨어요?”
“네. 혼자 살기 시작한 첫날에도 치즈피자를 먹었어요. 좋아하기도 하고, 편하니까?”
빵 끝을 입에 넣고 씹던 영웅은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채언에게 물었다.
“채언 씨는 뭘 좋아해요? 나처럼 혼자 살기 시작한 날 뭐 먹었어요?”
채언은 피자 끝을 만지작거렸다.
“아, 여기 오기 전에는 가족들이랑 같이 살았나?”
채언은 영웅에게,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아뇨. 그때도 혼자 살았어요. 일찍 독립해서요.”
“그렇구나.”
“저는 짜장면 먹었어요. 한국에서는 보통 이사 첫날에 그걸 많이 먹거든요.”
그렇게 말한 채언은 손에 든 것을 한입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입안이 꽉 찼다.
채언은 혼자 살게 된 첫날, 첫 끼로 케첩에 비빈 밥을 먹었다.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사 먹을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채언의 부모님은 가끔 어린 채언에게 케첩에 밥을 비벼주었는데, 어린애 입맛에는 그게 맛이 있었다. 그다지 친근하게 굴지 않던 부모님이 해주는 것은 뭐든 좋아서 잘 먹었는지도 몰랐다. 다 큰 채언이 하얀 밥 위에 케첩을 뿌린 것은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의 일이었다. 커서 먹은 케첩 비빔밥은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해보겠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먹은 것이었으니까. 그것으로는 배가 차지 않아 밥그릇을 비운 뒤에는 진짜로 짜장면을 시켜 먹기는 했었다.
이제 다시는 먹을 일 없는 케첩 비빔밥을 생각하며 채언은 부지런히 피자를 씹었다. 조금 전까지는 맛있다고 느꼈던 토마토소스가 혀끝을 떫게 만드는 것 같았다. 채언은 콜라와 함께 입안의 피자를 꿀꺽 삼켜버렸다.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던 채언은 의미 없이 거실 쪽을 바라보다가 유리창 앞 빈 공간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하필 토마토였다. 입과 손이 멈춘 채언을 보던 영웅은 채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채언 씨. 우리 내일 화분도 새로 사고, 튼튼한 씨앗도 사요.”
영웅의 목소리에 멍하던 채언의 눈이 깜빡였다. 화분이 놓여있던 자리에서 영웅의 다정한 초록색 눈동자로 시선이 돌아왔다.
“튼튼한 씨앗이요?”
“잘 크는 거로.”
채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즈가 잘 늘어나는 새로운 피자 조각을 들어 맛있게 베어 물었다.
진짜로 잠자리에 들기 전, 채언은 잠시 복도 끝방에 들어왔다. 욕실에 걸어둔 속옷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방 불을 켠 채언의 눈에, 팩에 든 사과와 죽은 토마토 줄기가 보였다. 채언은 책상 위를 손으로 쓸다가 발을 뗐다.
붙박이장 문을 연 뒤 여분의 이불 안쪽 깊숙이 넣어둔 봉투를 찾았다. 건영이 준 돈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건영에게 이 돈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심한 말을 해서 미안했다는 사과와 함께.
이불 안에 다시 봉투를 밀어 넣는 손에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채언은 통장인지, 액자인지 모를 그것을 꺼내 보지 않았다. 적금은 계속 들겠지만, 돈이 모이면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 다른 일을 해볼까 했다.
채언은 눈을 감았다. 조금 더 먼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계획이니, 자신만 눈감는다면 목적을 바꾼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제한해 두었던 삶의 길이를 늘이면, 그러면. 건영이나 충북과도 계속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우선 사과를 하는 게 먼저였다. 채언은 이불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두 사람이 잠든 밤에 비가 내렸다.
영웅의 차가 멈춘 곳은 식물원 주차장이었다. 원예재료를 판매하는 곳으로, 식물원 자체가 크기도 컸지만, 건물 밖에는 큰 공원과 카페까지 차려져 있는 곳이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채언은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연분홍색 운동화를 신고 이렇게 멀리 나온 적이 처음이라 마음이 들떴다. 밤사이 내린 비 덕분에 공기가 맑았고, 덥지도 않았다. 올해 처음으로 반팔을 입고 나왔지만, 덥지 않다고 해서 추운 것은 아니었다. 기온은 딱 적당했다. 새로운 마음을 먹기에도, 데이트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채언은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거렸다. 술을 마신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었다.
채언은 차 앞을 돌아가서 영웅의 옆에 섰다. 가족 나들이를 온 듯한 몇몇이 주변을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차 키를 든 영웅의 손을 꼭 잡았다. 밖에서 먼저 손을 잡아오는 채언은 흔치 않아서 영웅은 기분 좋게 웃었다. 채언은 다정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름 모를 식물을 구경하고, 구역이 나누어져 있는 넓은 공원을 반쯤 걸었다. 잘 꾸며진 조형물 앞에서는 같이 사진을 찍었다. 처음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제법 뜨거워서 가끔 사람이 없을 때 맞잡는 손에 땀이 조금 나기도 했다.
채언은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으나, 요즘 자꾸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했다. 그래도 영웅과 함께 있으니 안심이었다.
“잠깐 카페에 갈까요?”
“네. 거기서 쉬었다가 화분 사러 가요.”
뭘 키우고 싶으냐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아까 본 식충식물을 얘기했다.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키우고 싶으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영웅 때문에 조금 민망해졌다.
“사실은, 오래 사는 식물을 키우고 싶어요.”
“그럼 나무를 심어보는 건 어때요?”
“우리 집에 트리 있잖아요.”
“맞다. 트리가 있었구나.”
가짜 나무였지만, 그 덕분에 계절이 바뀌어도 트리는 거실 한쪽에서 치워지지 않았다.
“진짜 나무를 심어보고 싶기도 해요.”
“어떤?”
“음. 과일나무.”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을 보았다. 햇빛이 닿은 머리카락이 금발에 가까웠다. 지금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지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낼까 고민하던 채언은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싶어 그냥 손을 내렸다.
“레몬도 나무에서 자라죠?”
“그럴, 흠, 그렇지 않을까요. 레몬트리라는 노래도 있으니까.”
레몬트리. 영웅의 낮은 목소리가 좋아서 채언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럼 저는, 카페에서 레모네이드 마실래요.”
“그래요. 그럼 나도.”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바뀌어도 영웅과 이야기할 때는 말이 끊기지 않았다.
카페는 동화 속의 집처럼 예뻤다. 하얀 벽과 초록색 지붕. 입구 앞, 네 칸짜리 낮은 계단 옆으로 쳐진 울타리처럼 생긴 난간. 문은 투명한 유리문이었다. 하얀 벽 가운데 있는 통유리창을 통해 음료를 마시며 대화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림처럼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영웅이 먼저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채언도 따라 올라가려던 찰나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벨 소리를 들은 채언은 발을 멈췄다. 한쪽 발은 땅에, 한쪽 발은 계단에 걸쳐놓은 채 고개를 들어 영웅을 보았다.
“잠시만요. 전화 올 곳이 없는데?”
스팸 전화일 수도 있지만, 왠지 핸드폰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채언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 계실래요?”
“중요한 전화예요?”
“네! 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그럼 레모네이드 시켜놓고 기다릴게요. 통화하고 천천히 들어와요.”
밝은 채언의 표정에, 영웅은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뒤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채언은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건영아!”
두 손으로 간절히 핸드폰을 붙잡은 채언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활짝 벌어져 있던 채언의 입이 점차 다물렸다.
“네, 그런데요.”
까만 눈동자에는 유리창 너머 영웅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네.”
그는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네….”
짧은 대답을 반복하던 채언의 입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잡은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언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난간을 잡았다. 나무로 된 난간을 꽉 잡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붕 뜬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영웅이 너무 좋았다.
채언은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느리게 끔뻑이던 눈이 점차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채언은 가슴이 꽉 조여와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짧게 들이마신 숨은 폐 속 깊이 전달되지 못하고 다시 입 밖으로 토해졌다. 채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발에 힘을 주었다. 올라가고 싶었다. 겨우 네 칸짜리 계단을. 새 신발을 신었으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왜 이렇게, 사는 게.
채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꽉 조여오는 가슴의 답답함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한 칸만 더 오르면 영웅이 있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잡을 수 있었다.
힘주어 마지막 계단을 디디던 발이 미끄러졌다. 모서리를 잘못 밟은 채언은 네 번째 계단에서 발목이 꺾인 채 뒤로 휘청했다. 터엉 텅. 소리를 내며 연분홍색 운동화를 신은 발이 계단을 쳤다.
파직. 넘어진 채언의 손에 쥐여있던 핸드폰 액정이 바닥에 닿는 순간 깨져버렸다. 바닥에 긁힌 팔과 얼굴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쿠웅. 쿵. 무언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영웅의 예민한 귓가에 닿았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는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뒤돌아본 영웅은 계단 아래 넘어져 있는 채언을 발견했다. 영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채언, 채언 씨!”
서둘러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간 그는, 급히 주저앉아 채언의 팔을 잡았다. 영웅의 손에 진득한 피가 묻어났다.
“넘어졌어요? 괜찮, 채언 씨.”
채언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흐윽, 새된 소리와 함께 짧은 숨을 쉬는 것이 너무 잦았다.
“흐윽, 너무… 끄흑… 너, 무… 흣… 아파… 아파요.”
상처 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채언을 붙잡은 영웅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바라보던 채언의 눈이 까무룩 감겨버렸다.
-여보세요. 건영아!
“어, 받았다.”
-…누구세요?
“저기, 그게… 이 핸드폰 주인이랑 아는 사이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여기… 대동에, 하지 해수욕장인데요. 그게, 핸드폰 훔친 건 아니고. 저희도 여기 놀러 온 입장인데요.”
-네.
“이 핸드폰이… 어제부터. 여기 모래사장 위에 있었거든요. 여기가 아직 개장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종종 있기는 한데. 이게… 그러니까. 어젯밤부터 신발이 여기에 있어가지고.”
-…네….
“핸드폰은 신발 안에 들어있었고요. 좀, 신발만 이렇게 가지런히 바다 앞에 있는 게 이상해서… 어제부터 신경 쓰여서 다시 와봤는데.”
-…네.
“혹시 핸드폰 주인분이랑 같이 있으세요?”
-….
“네? 같이 있으세요?”
-…아… 뇨.
“혹시 이분 어디 계시는지 모르세요? 전화 받은 분도 모르시면… 이거, 경찰에 신고를 한번 해봐야 할 것 같거든요.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여기 신발이… 꼭, 죽기 전에 벗어둔 것처럼. 아이참. 하도 찝찝해서.”
-…….
“저기, 여보세요?”
-….
“…여보세요?”
-….
“저기요… 읏!”
“왜? 왜 뭔데. 핸드폰 주인이랑 같이 있대?”
“아니, 큰소리 들리더니 끊어졌어. 어떡해?”
“별로 안 친한 사람인 거 아냐?”
“우리 형이라고 저장돼있었잖아. 예전 통화 목록도 이걸로 도배가 되어있더구만. 너도 아까 이거밖에 없다고 여기로 전화해보라며. 이제 어떡해!”
“야. 어쩌긴 뭘 어째. 아이씨… 우선 경찰에 신고해봐. 별일 아니면 그냥 핸드폰만 수거해가고 말겠지. 존나 찝찝하게 신발이 이따위로 여기 있냐.”
“진짜 사람 빠져 죽은 거 아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 잘못이냐? 빨리 경찰에 신고나 해. 폰도 다시 넣어놓자. 괜히 더 만졌다가 불똥 튀면 어떡해.”
파도가 밀려와 낡은 운동화 앞코를 적시고 물러났다. 끝을 꺾어 신던 모양대로 접혀버린 것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 앞에 남은 발자국은 없었다. 파도가 모래사장 위로 밀려왔다가 밀려나는 동안 젖은 모래는 계속해서 판판한 모양을 유지했다. 깨진 조개껍데기와 죽은 불가사리 같은 것이 모래를 구르다 사라지기도 했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별로 없었다. 기온이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날이었다. 새로운 마음을 먹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