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5/22)

2.

“안녕하세요.”

402호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채언은 교탁 옆에 앉아 있는 강사에게 인사한 뒤 오른쪽 줄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두꺼운 교재를 꺼내 책상에 내려놓고 멀뚱멀뚱 화이트보드를 쳐다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실 문이 열렸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수강생 네다섯 명이 줄줄이 뭉쳐 들어왔다. 채언은 책상 사이를 지나가며 묵례하는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를 했다.

평일 오전 수어 수업의 수강생은 대부분 중장년층이었다. 책상 위에 손을 올린 채언은 티셔츠 소매 속에 손가락을 숨기고 짧게 잘린 손톱을 만졌다. 수강생들과 인사를 할 때 슬쩍 강의실을 둘러보니 자리가 아직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오늘이 벌써 다섯 번째 수업이었다. 첫째, 둘째 날은 다들 눈치를 보느라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았었는데 그다음부터 앉은 자리는 암묵적인 지정석처럼 오늘까지 변동이 없었다. 채언은 첫날부터 쭉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둘씩 짝지어 수업을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혼자 강의실을 찾아와 수업을 들었다. 채언 또한 혼자 수업을 신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송 교수나 영웅은 평일 오전마다 시간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에 채언의 귀가 쫑긋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강사에게 인사한 뒤 첫째 줄 책상을 지나 채언의 옆에 와서 발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향한 인사에 채언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티셔츠에 검은 볼캡을 쓴 남자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이 영웅과 닮아 있었다. 채언은 그의 나이를 알지 못했지만 대충 20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안녕하세요.”

“저 여기 앉아도 되죠?”

“네. 앉으세요.”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채언의 옆자리에 백팩을 내려두었다. 셋째 날부터 두 사람은 나란히 앉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제 곧 수업 시작 시각이었다. 채언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바르게 앉았다.

“시간 됐으니까 출석 부를게요.”

강사가 수어로 천천히 수강생들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도 수어로 해야 했다. 수어 글자를 익히는 것 또한 수업의 일부라 출석 순서는 무작위였고, 농인들처럼 얼굴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채언은 강사의 손동작을 보는 데 집중했다.

몇 차례 다른 이름이 지나가고 ㅅ, ㅣ, ㅁ이 순서대로 눈에 보였을 때 채언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 다음다음 사람의 성은 ‘지’ 였다.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만들어지는 글자를 보면서 채언은 옆자리를 흘끔거렸다.

옆자리 남자와 일대일로 자기소개를 한 적은 없었지만 ‘지영진’이라는 그의 이름은 진작 외워둔 터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앞을 보고 있던 영진은 하필 지금 고개를 숙인 채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놓쳤나요? 다시 할게요.”

수강생들을 살펴보던 강사는 다시 한번 같은 이름을 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강사와 옆자리 영진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고민 끝에 옆으로 몸을 틀었다.

“저기….”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영진이 고개를 들어 채언을 보았다.

“예?”

조용히 되물은 그는 이내 채언의 눈짓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손가락을 움직여 강사에게 대답했다.

“네, 오셨네요. 체크.”

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으로 출석부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아직 첫째 주라 비슷한 글자를 보고 헷갈릴 수 있어요. 다른 곳에서도 수업해 보니까 특히 자음을 많이들 외우기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럼, 다음 사람.”

차례가 넘어가자 영진은 채언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거의 공기 빠지는 목소리로 속삭인 그는 다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 잃어버리셨어요?”

“그게….”

조용한 채언의 물음에 눈을 든 영진은 곤란한 얼굴로 웃다가 퍼뜩 고개를 숙였다.

“오! 찾았다.”

그가 가방 속에서 꺼내 든 것은 신용카드 한 장이었다.

“이거요. 분명 손에 쥐고 있었는데, 없어진 줄 알고.”

“다행이네요.”

“그러니까요. 아, 진짜 놀랐네.”

영진이 휴우, 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채언은 덩달아 안도했다.

“수업 시작할게요. 진도 나가기 전에 알파벳만 잠깐 복습해볼까요?”

채언은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 알파벳이 적혀 있는 부분을 펼쳤다. 교재를 받은 이후, 자신의 이름과 영웅의 이름을 수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외우기 위해 몇 번이나 들여다본 페이지였다.

채언은 강의실 안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가끔 집중이 풀리는 때가 있기는 했다. 필기하다가 자신의 못생긴 글씨체가 눈에 들어올 때 그랬다. 그럴 때면 채언은 잠시 멍하니 볼펜을 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십 분 쉴게요.”

텀블러를 든 강사가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가자 수강생들이 기지개를 켜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연달아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던 채언은 책상 위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밖에 나와 있을 때면 영웅에게 자주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기 때문이다.

“저기요.”

“네?”

옆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채언은 핸드폰을 집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영진을 보았다.

“아까 출석 감사합니다. 제 이름 알고 계셨네요?”

“…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않은 사이에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그에게 이상하게 느껴질까 봐 채언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몇 번 보니까 다른 분들 이름도 조금씩 외워지더라고요.”

“그쵸? 사실 저도 그쪽 이름 외웠거든요. 재언, 심재언 맞나?”

이름을 외웠다고 했으면서 영진의 입에서는 틀린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채언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들었다.

“채언이요. 성은 맞아요, 심. 심채언이에요.”

“재가 아니라 채구나. 혹시 나이가?”

채언이 나이를 말하자 영진은 책상을 한 번 탁 치고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오, 저는 한 살 더 많아요. 우리 편하게 말 놓을래요?”

책상 위에 올리고 있던 팔을 내린 채언은 손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편하게 하세요.”

“오케이! 너도 말 놔.”

영진의 쾌활한 목소리를 듣고 잠시 눈을 굴리던 채언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어, 그건 존댓말인데요?”

채언의 대답에 눈을 끔뻑거리던 영진은 덩달아 존댓말을 사용했다.

“사실 제가….”

사실 자신은 존댓말이 더 편하다고 영진에게 털어놓으려는 찰나, 채언은 예전 일을 떠올렸다. 오래 알고, 친해졌을 경우를 전제로 두기는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알던 사람들과는 편히 말을 놓고는 했다. 중고등학생 때 알던 친구들보다 어쩌면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 이들을 떠올리며 채언은 주먹을 쥐었다.

“응. 말 놓을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 필요가 있었다. 나이가 비슷한 친구를 사귀어 본 게 너무 오래전이라 이런 과정이 멋쩍기는 했지만, 영진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어색한 반말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 수업 되게 열심히 듣더라. 혹시 이쪽으로 뭐 준비해 보려는 거야?”

“준비요? 아뇨, 아니. 일단은 배우러 왔으니까 그냥 열심히 해보려고.”

채언의 말끝에 속삭이듯 ‘요’ 자가 따라붙었지만 영진은 듣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는.”

“정각이니까 수업 다시 시작할게요.”

수업 시작을 알리는 강사의 목소리에 말이 막힌 영진은 채언을 보며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채언은 다시 손에 볼펜을 쥐었다. 처음으로 수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바로 집에 가?”

가방 속에 교재를 챙겨 넣던 채언은 영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영웅이 일찍 퇴근하고 집에 오기로 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같이 갈 곳이 있다고 했다.

“뭐 타고 가? 아니면 걸어서?”

“집이 근처라서 그냥 걸어가.”

“난 오늘은 버스 타는데. 아까는 카드 잃어버린 줄 알고 진짜 놀랐네.”

가방을 앞으로 멘 영진은 옆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아까 찾아서 앞주머니에 넣어둔 신용카드를 지갑에 꽂아 넣었다.

지갑이 있는데 왜 카드를 가방에 막 집어넣은 거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채언은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손에 쥔 뒤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멨다.

자연스럽게 함께 복도를 걷게 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영진이 묻고 채언이 대답하면 또 영진이 말을 꺼내는 식이었다.

“우와. 그럼 유도 선수 되는 거예요?”

채언은 반말을 사용하기로 한 것도 까먹고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영진을 보았다. 그는 유도 특기생으로 대학교에 들어가 올해 졸업했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층 알림을 보고 있던 영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선수이긴 했지. 근데 다른 거 하려고. 조금만 더 놀다가 내년부터는 공시 준비할 거야.”

“공시면 공무원 시험이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드라마에서만 봤고, 실제로 준비하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라 채언은 어쩐지 영진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응, 그런데 너 반말 진짜 못한다.”

그제야 채언은 자신이 계속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에 섞여 그 안에 올라탄 채언은 다시 눈앞의 문이 열리면 정말로 영진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3층, 2층, 1층. 띵-. 문이 열리자 작은 박스 안에서 조용했던 사람들이 옆 사람과 대화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로비에는 나이와 성별이 다양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걸어간다고 했지?”

“응.”

그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온 채언은 고개를 돌려 건물 안쪽을 바라보다가 가방끈을 매만졌다.

가방 안에 교재가 들어 있어서 그런 건지, 딱 한 살 많은 사람과 걷고 있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반찬 만들기 수업을 들었을 때와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대학교에 다니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뭐 두고 왔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채언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낮은 울타리가 둘린 정문을 빠져나오자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난 여기서 버스 타.”

영진이 턱짓으로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자 채언은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나는 이쪽으로.”

“그럼 내일 보자.”

영진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왼손을 흔들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응.”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진은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오른쪽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는 길일 뿐인데 기분이 붕 떠올랐다.

“아.”

물결치는 입술을 단속하던 채언은 문득 오늘은 쉬는 시간에 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서둘러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자 역시나 그에게 연락이 와있는 것이 보였다. 수업을 잘 듣고 있냐는 물음에서 약간의 걱정이 느껴졌다. 잠시 후면 집에서 영웅을 볼 예정이었지만 답장을 보내놓기로 했다.

그런데 답장을 뭐라고 보내지? 오늘 일을 뭐라고 설명하지?

“저 오늘 친구….”

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액정을 두드리던 채언은 길 위에 멈춰 서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하는 것은 너무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며칠 옆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영진을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채언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수업 듣고… 집에 가는 중이에요.”

글자 옆에 깜빡거리는 커서를 보던 채언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얼마 걷지 않았는데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데리러 갈까요? 나도 집에 거의 다 왔는데.

영웅의 목소리가 들리자 채언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저도 금방 가요.”

채언은 혹시 근처에 영웅의 차가 있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알겠어요. 그럼 집에서 봐요. 오늘은 뭐 배웠어요?

“알파벳 복습이랑…, 그런데 있잖아요.”

-응?

“저 오늘.”

가방끈을 매만지던 채언은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응? 오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다 말해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는 건 좀 부끄러웠다.

-뭐지?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한데요?

“이따 만나면 집에서 말해드릴게요. 그런데 별일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럼 집에서 말해줘요.

“네, 저 금방 갈게요.”

-뛰지는 말고요.

걸음을 빨리하다 아예 뛸 준비를 하던 채언은 곧바로 걸음 속도를 줄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집 근처에 계신 거 맞죠?”

-우리 자주 가는 카페 앞 막 지났는데. 왜요?

함께 자주 가는 카페라고 하면 정말 집 바로 코앞에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서 있는 이곳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오늘은 아무것도 안 알려주네.

서운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 채언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정말로 별거 아닌데…. 사실은 제가 뛰어가려고 했는데 그때 딱 뛰지 말라고 하셔서 놀란 것뿐이에요.”

-어어, 그럼 별것 아닌 게 아닌데요.

“지금은 안 뛰어요. 다시 걷고 있어요.”

채언은 일부러 터벅터벅 발소리를 크게 내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핸드폰 너머에서 영웅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차 돌리려고 타이밍 재는 거 아니죠?”

-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정말 그러려고 한 건지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그러지 말라며 가볍게 웃었다.

“앞으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돼요. 그러니까 집에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하루에 이만큼도 안 움직이면 정말로 몸이 굳어버릴지도 몰라요.”

-알겠어요. 그럼 뛰지 말고 천천히 와요.

“네.”

쪽, 소리를 들은 채언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자신이 먼저 전화를 끊지 않으면 영웅은 아마 자신이 집에 들어갈 때까지 통화를 이어갈 사람이었다.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터득한 바 있었다.

그나저나 앞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처럼 영웅이 자신에게 서운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그랬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정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날이 온다면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았다.

혼자 길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울적해질 뻔했지만, 채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른 집에 가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웅에게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이언, 저 왔…는데. 어디 있지?”

채언은 아무도 없는 거실을 보고는 혼잣말을 했다. 아까 집에 도착했다며 소파에 누워 찍은 셀카를 보내왔던 영웅이었다.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부엌에도 그는 없었다.

갑자기 마시고 싶어져서 사 온 집 근처 카페의 음료가 든 캐리어를 식탁에 내려놓은 채언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영웅은 소파에 누워 있다가 졸음이 밀려와 잠시 낮잠을 자러 들어간 걸지도 몰랐다.

조심히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지만, 침대 위에도 영웅은 없었다. 단번에 입꼬리가 처진 채언은 문고리를 잡은 채 불안한 얼굴로 서 있다가 침실 발코니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리듯 들려왔기 때문이다.

채언은 서둘러 발코니로 다가갔다. 다행히 영웅은 발코니 의자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유리문을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한 채언은 조용히 안도하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음료를 마시며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여태 메고 있던 가방을 식탁 의자에 내려놓은 채언은 캐리어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한 모금 빨아 마셨다.

두 칸짜리 음료 캐리어에는 영웅에게 주려고 사 온 뜨거운 커피와 카페 직원이 서비스로 준 작은 비스킷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자잘한 오렌지 과육을 씹어 삼킨 채언은 주스를 내려놓고 비스킷을 하나 들었다.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달아서 많이 먹지도 못하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음료보다 서비스로 받는 이 비스킷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영웅과 산책하던 중에 몇 번 비스킷이 먹고 싶어서 카페에 가자고 했더니 그가 또 몇 박스나 주문하려고 해서 겨우 말렸다.

그때를 생각하며 작게 웃은 채언은 투명한 비스킷 봉지 귀퉁이를 찢었다. 그런데 너무 끝부분을 잡았는지 모서리 끝 쪽만 살짝 뜯어지는 바람에 옆쪽을 다시 뜯어야 했다. 찌익- 듣기 싫은 비닐 소리와 함께 채언의 미간이 좁혀졌다. 비닐 문제인지 힘을 잘못 준 탓인지 비닐은 뜯어지지 않고 귀퉁이가 조금 늘어난 상태였다.

채언은 입을 꾹 다문 채 손에 든 것을 뒤집어보다가 아래쪽 귀퉁이를 뜯어보기로 했다. 지익- 이번에는 얇게 잘 뜯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순간 파삭, 비스킷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멈춘 채언은 그 상태로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펼쳐보았다. 귀퉁이 세 곳이 찢어진 투명한 비닐 안에 중간이 뚝 부러진 갈색 비스킷이 보였다. 작게 벌어지던 채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별것 아닌데. 정말로 별것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채언은 비스킷이 부러진 것이 속상했다. 세 번이나 제대로 뜯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도 속상했고, 고작 비스킷 봉지도 제대로 뜯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서 속상했다. 꾹 다문 채언의 입술 아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채언 씨? 언제 왔어요.”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던 영웅은 식탁 앞에 서 있는 채언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물었다.

“저는… 방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채언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물기 어린 까만 눈동자를 본 영웅은 천천히 식탁 쪽으로 다가가 채언의 몸을 껴안았다.

“여기서 뭐 해요? 난 잠깐 전화 좀 하고 왔는데.”

자연스럽게 식탁 위를 살핀 영웅은 채언의 목에 코끝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안 해요.”

채언은 손에 든 것을 숨기듯 주먹을 쥐었다.

“커피는 나 주려고 사 온 거예요?”

“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웃으며 채언의 볼에 입을 맞춘 영웅은 팔을 뻗어 커피를 집어 들었다. 적당한 온도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식탁 위에 컵을 다시 내려놓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등 뒤의 체온이 사라지자 채언은 식탁 위에 비스킷을 내려놓았다. 잠깐 쥐고 있었을 뿐인데 여기저기가 자잘하게 더 부서졌는지 찢어진 비닐 사이로 부스러기가 굴러떨어졌다. 손 안에도 까끌한 비스킷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다.

그냥 주스만 마실걸. 후회하는 채언의 등 뒤에 다시 따듯한 체온이 닿아왔다. 어깨에 실리는 무게감에 고개를 살짝 틀어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는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채언 씨, 손.”

채언이 무슨 말이냐는 듯 궁금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자 영웅은 채언의 손에 가위를 쥐여주었다. 가위 손잡이를 함께 잡아준 영웅은 다른 손으로 귀퉁이가 찢어진 비스킷을 잡더니 채언에게 천천히 가위질을 유도했다.

그제야 영웅의 뜻을 알아차린 채언은 제 손으로 가위를 움직여 비스킷 봉지 윗부분을 깔끔히 잘라냈다.

잘린 비스킷 봉지를 바라보던 채언은 잠시 후 조심히 가위를 내려놓았다.

손으로 뜯어지지 않으면 가위로 잘라내면 되는 건데, 왜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재빨리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다.

더는 눈 안쪽이 뜨겁지 않았고, 목 안쪽이 울컥 치솟아 오르지도 않았다. 속상하던 마음이 점점 평온해져 갔다.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보는 채언의 얼굴을 살핀 영웅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비스킷 조각을 털어냈다. 채언은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가끔 이렇게 멍한 모습을 보였는데 영웅은 그것을 불안히 여기지 않았다. 약 기운에 졸려 하거나 멍해지는 것은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 이상 조금은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이었다.

영웅은 손 위의 비스킷 조각 중 하나를 들어 채언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순한 눈으로 그를 돌아본 채언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말랑한 입술 사이로 비스킷을 넣어준 영웅은 나머지 조각을 자기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독오독 소리가 들렸다.

마음 깊숙이 찐득하게 달라붙은 감정을 단번에 끌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은 영웅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언은 정말로 나아지고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방금 부서진 비스킷을 손에 쥐고 숨기려 했던 것처럼 마음을 숨기려 할 때도 있었지만,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면 금방 말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봐 오곤 했다.

“왜에?”

영웅은 턱은 움직이지 않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채언을 보다가 눈썹을 올렸다. 채언은 비스킷을 입에 물고만 있었다. 단순히 입 안에 든 것이 씹기 귀찮아진 탓이었다.

“먹기 싫어졌어요?”

응?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조여 안으며 몸을 살짝 흔들어보다가 웃으며 한쪽 손을 들었다.

“아아.”

소리를 내며 엄지로 말캉한 입술을 살살 쓸어주자 채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입술을 벌렸다. 영웅은 엄지를 채언의 입술 안쪽으로 넣어 아랫니를 누른 뒤 입을 더 벌리게 했다. 채언의 입술이 적당히 벌어지자 영웅은 손목을 움직여 자신의 검지를 따듯한 입 안에 밀어 넣고는 축축해진 비스킷을 꺼냈다.

“아?”

입 밖으로 꺼내진 비스킷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채언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목소리를 냈다. 이어 영웅의 입 안에서 작게 비스킷 씹히는 소리가 들리다 사라졌다.

“그거 제 건데요?”

“그래요? 어쩌지. 이미 삼켜버렸는데.”

능청스럽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영웅을 보던 채언은 캐리어로 손을 뻗었다. 안에 들어 있는 비스킷을 꺼낸 뒤 귀퉁이를 찢자 아까처럼 모서리만 작게 뜯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옆을 찢어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가위를 들어 윗부분을 잘라냈다. 그리고 비스킷 가운데를 뚝 부러뜨린 뒤 조각 두 개를 손바닥 위에 꺼내놓았다.

“한 개 더 드실래요?”

채언이 비스킷이 든 손바닥을 올려 보이자 영웅은 채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나는, 음….”

두 조각 중 하나를 고를 듯 검지를 빼 들고 고민하던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콕 채언의 볼을 찔렀다.

“여기, 채언 씨 입 안에 들어가는 걸로 한 개 더 먹고 싶은데.”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채언은 그대로 손바닥을 들어 자기 입에 비스킷을 모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입 앞을 막고 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한 조각 안 줘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영웅이 묻자 채언은 뒤돌아 식탁에 허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입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손등 위로 보이는 볼에는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입 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채언은 그제야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양옆으로 활짝 펼치며 말했다.

“다 삼켜서 없어요.”

채언의 의도치 않은 꽃받침을 보던 영웅은 웃으며 몸을 숙였다. 그가 그 상태로 식탁 위에 양손을 짚자 채언의 몸이 뒤로 밀렸다. 허리가 꺾이지 않으려면 팔을 뻗어 영웅의 목을 안는 수밖에 없었다.

목 뒤로 팔이 감기자 영웅은 한 손을 들어 채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식탁을 짚은 손에 단단히 힘을 준 그는 비스킷 가루가 묻은 채언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사이를 혀로 갈라 열었다. 어떤 반항도 없이 입술을 벌린 채언은 얌전히 눈을 감고 달콤한 혀를 받아들였다.

둘 다 비스킷을 먹은 탓에 입 안은 건조하고 달았다. 그래서 혀와 혀가 문질러질 때마다, 고개 각도를 틀며 입술과 입술이 물고 늘어질 때마다 들리는 물기 어린 소리가 평소보다 더 끈적했다.

입술로 채언의 아랫입술을 문 영웅은 천천히 눈을 떠 얌전히 감겨 있는 채언의 눈을 보았다. 혀로 말랑한 입술 위를 핥자 코로 숨을 쉬던 채언이 입으로 숨을 합,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매일 입을 맞추고 몸을 섞으면서 전보다는 스킨십에 능숙해진 채언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서툰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춥, 채언의 입술을 놓아준 영웅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듯이 깨물었다. 이렇게라도 참지 않으면 채언의 몸 여기저기를 깨물고 씹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채언의 길고 예쁜 손끝부터 입 안에 넣고 씹어 삼키고 싶었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벅차오를 때마다 그랬다.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뗀 영웅이 금방 되돌아오지 않자 채언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 저기….”

손가락에 닿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까만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영웅의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안 돼요.”

“뭐가 안 돼요?”

“우리 어디 가기로 했잖아요.”

며칠 전부터 오늘 점심에 어딘가에 함께 가자고 했던 영웅이었다. 채언은 어딘지 모를 장소로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수어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서 만나자고 했던 그였으니 지금부터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유혹은 조금 곤란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 준비를 하다 스킨십이 짙어져 시간이 모자랐던 영웅이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과 코끝을 스치는 향수 아닌 바디워시 향기가 그 증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안 될 것 같은데요.”

영웅을 안고 있던 손을 푼 채언은 한 손으로 뒤에 있는 식탁을 짚은 뒤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과 바짝 맞닿아있는 영웅의 배를 밀었다. 차마 그 아래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만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게 밀어내는 채언의 손짓에 영웅은 눈을 끔뻑였다. 딱히 지금 키스 이상의 스킨십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조금 억울한 감이 있었다. 허리 아래의 사정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시도 때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손이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숨 쉴 때 폐가 부풀듯이 아래쪽도 이렇게 부피를 키울 뿐이었다.

“채언 씨.”

손가락 두 개로 영웅의 벨트를 만지작대던 채언은 네?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영웅은 고개 숙여 채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 라니, 뭐가 네? 란 말인가. 욕망이 짙어진 하반신을 바짝 밀착해 붙어 있는 상황에서도 채언은 유순했다. 매번 그랬다.

아침에 화초에 물을 주는 뒷모습이 보기 좋아서,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든 재미있다고 바라보는 옆모습이 귀여워서, 막 씻고 나온 얼굴이 뽀얘서, 잠들기 직전 눈꺼풀에 가려지는 눈동자가 아쉬워서 채언을 불러보면 귀찮은 티도 내지 않고 매번 네? 하고 대답해 왔다. 그런 다음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여기저기 지분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꾹 참아볼까 했다. 나가서 채언에게 맛있는 걸 사 먹인 다음 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영웅은 식탁을 그러쥐듯 손가락을 움츠렸다.

영웅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머리카락에 볼을 기대고 있던 채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몇 시에 나가야 해요?”

영웅은 시선을 내려 식탁을 짚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아직 나가서 점심 먹을 여유는 있어요. 한 시간 정도?”

채언은 영웅의 셔츠 깃에 코끝을 문지르며 그의 향기를 맡았다. 향수 냄새가 섞이지 않은 체향은 베개에서 맡아지는 향기와 비슷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혹시 점심 먹을 식당 예약해두셨어요?”

“안 했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럼… 그냥 샌드위치 같은 거 먹으면 될 것 같아요.”

“샌드위치?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아직 차가 막힐 시간은 아니니까, 그런데 뭐 해요?”

아래쪽에서 들리는 차칵 소리에 영웅은 머리를 들었다. 그의 벨트를 풀고 있던 채언은 잠시 손을 멈추고는 영웅의 어깨에 포옥 얼굴을 묻었다.

“가볍게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채언은 다시 손을 움직여 영웅의 벨트를 완전히 풀어냈다.

“샌드위치 먹으면, 된다구요….”

시간이요.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영웅은 입술을 지르물었다. 왜 매번 채언에게 맛있는 걸 사줘야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일이 이렇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참아보려고 했는데, 이미 자신의 앞섶에 손을 댄 채언을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가볍게.”

상체를 숙인 영웅은 채언의 턱 밑에 입을 맞췄다.

“네. 가볍게.”

채언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자 영웅의 입술이 그의 턱 아래 목울대 근처까지 내려왔다.

바지 버클이 풀리는 느낌에 채언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눈을 떴다. 깨끗하고 하얀 천장이 보였다.

채언은 조금 전 영웅의 벨트 위를 만지던 것처럼 그의 속옷 밴드 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자세가 조금 불편했다. 식탁을 짚고 있는 것보다 허리에 둘린 영웅의 팔에 의지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자세를 바꾸려는 채언의 손에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비스킷 봉지를 자를 때 사용한 가위였다. 고개를 돌려 가위의 존재를 확인한 채언은 영웅의 드로어즈에서 손을 뗀 뒤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여기서 말고요.”

채언의 목에 쪽, 쪽 입을 맞추던 영웅은 매끈한 턱선을 깨물 듯 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로 가면 샌드위치도 못 먹을 텐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채언은 단단한 가슴 위에 얹어놓은 손을 움츠렸다. 잔뜩 흥분한 영웅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정말로 침대 근처에는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점심이 아니라 저녁을 먹게 될 터였다.

“뒤에 가위가 있어서 위험해요.”

“아아. 가위가.”

“어?”

여전히 허리에 단단한 팔이 둘려 있었지만, 갑자기 영웅의 몸에 몸이 밀린 채언은 반사적으로 팔 하나를 올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툭, 의자 위로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제 가위 없어요.”

“그런데 여기 아직 음료수랑 꽃병이 있, 아…!”

채언의 속옷 안으로 들어온 커다란 손이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가볍게 할 거니까, 그런 건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으응….”

채언은 슬리퍼 신은 발끝을 바닥에 그으며 입술을 물었다. 식탁을 짚고 있던 손을 떼자 영웅의 목을 안은 팔에 체중이 실렸다. 하지만 그 정도 무게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지 영웅의 몸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아, 하으….”

“나도 만져줘요.”

저릿저릿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채언은 영웅의 요구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벨트가 풀려 벌어진 바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얇은 속옷 위를 넓게 감싸 잡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성기가 손 안에서 더욱 부피를 키워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천천히 속옷 위를 문지르자 귓가에 낮은 숨소리가 퍼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웅은 이런 상황에서 감정을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채언은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할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좋았다. 애무하는 손짓에 달아오른 체온을 나누는 것도 좋았다. 영웅의 솔직한 흥분감을 끌어내는 것은 채언에게 묘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마른 입술을 핥은 채언은 성기의 윤곽이 도드라진 영웅의 속옷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겨우 얇은 속옷 한 장이 사라졌을 뿐인데 맨손에 닿는 묵직한 살덩이는 조금 전에 만져본 것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하아….”

영웅은 채언의 허리 위쪽으로 팔을 옮겨 안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안 그러면 정말로 채언을 식탁 위에 눕혀놓고 일을 치를 것 같았다.

자세가 조금 바뀌었다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가 편해진 채언은 쿵쿵 뛰는 영웅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크게 숨을 마셨다.

C자 모양으로 말아 쥔 손으로 뜨거운 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자 펄떡이는 핏줄이 느껴졌다. 이미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것이 자꾸만 부피를 키워가는 것을 느끼던 채언은 문득 지금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궁금해졌다.

“으음….”

이런 상황에서 물어볼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물어볼 기회가 생길까 싶었다. 시선을 내리자 붉은 선단을 매만지는 손가락 끝에 투명한 액체가 묻어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채언은 지금 분명 자신의 볼도 저렇게 붉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라이언.”

“응?”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 읏, 물어보는 건데요.”

“뭔데요?”

영웅은 채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하반신을 채언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그런 뒤 손을 크게 벌려 기둥 두 개를 한 번에 움켜쥐고는 채언의 손가락까지 슬쩍슬쩍 건드렸다.

“으….”

누구에게서 흘러나온 건지 모를 투명한 선액이 서로의 성기와 손 이곳저곳에 옮겨 묻었다. 점성 있는 액체가 흘러내리는 일이 잦아지자, 찔꺽, 마치 젤을 뿌린 것처럼 끈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 뭐가, 궁금한데요.”

채언은 영웅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가락을 움츠리며 꼴깍 침을 삼켰다.

“…그게, 앗! 그으러니까.”

자꾸만 말을 막고 터져 나오는 신음에 눈 밑이 달아오른 채언은 조금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게… 이렇게 크면 좀, 불편하지 않, 않은지….”

영웅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채언의 말을 되풀이해 보면서 계속 손을 움직였다. 함께 붙잡아 딱 달라붙은 뜨겁고 축축한 성기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아래로 훑어 내리자 야릇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혹시 채언이 손을 말한 게 아닐까 했다. 채언은 짙은 스킨십에 꽤 적극적으로 따라와 주면서도 입으로는 절대 수위 높은 말을 뱉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언은 자신의 손에 관심이 많았다. 소파에 함께 앉아 있을 때나 안고 있을 때면 자주 손가락을 만지작거렸고, 가끔 새벽에 잠에서 깨면 조용히 맞잡은 손만 만지다 다시 잠드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이 크다고 해서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 덕분에 한쪽 팔로 채언을 안고 나머지 손으로 동시에 서로의 것을 만져댈 수 있었으니까.

채언의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영웅이 그다지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잠시간의 침묵을 오해한 채언이 먼저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지를 살 때라든가, 어, 걸어 다닐 때요? 좀 말이 이상한가…, 그런데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움칫, 영웅의 손 움직임이 멈췄다.

길어지는 그의 침묵에 채언은 등에 삐질 땀이 흘렀다. 역시 이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것 같았다.

슬쩍 올려다본 영웅의 얼굴은 평소보다 붉어져 있었다. 침대 위에서 잔뜩 흥분하면 그도 피부가 달아오르곤 했다. 하지만 보통날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영웅의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수줍어하는 표정인 건지….

초록색 눈동자는 자신을 똑바로 보지 않고 옆으로 비껴 나가 있었다. 눈 아래 볼이 붉은 것과 다소곳이 닫힌 입술 끝이 올라가 있는 것이 부조화스러웠다.

불현듯 그의 짙은 초록 눈동자가 채언을 향했다. 채언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았다. 영웅의 성기 선단에 맺혀 있던 액이 채언의 손바닥과 이어져 즈윽 늘어났다. 이러고 있던 와중에 그런 말을 했다니! 채언은 눈을 꽉 감아버렸다.

“잘못 물어봤어요. 없, 없던 일로 해요.”

영웅은 자신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숨기는 채언을 내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하, 이런.”

단번에 야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직 한국말로 돌려 말하는 건 잘하지 못하는지라 채언의 마음을 한 번에 알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고개를 숙여 채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영웅은 말랑한 귓불을 한 번 물었다 놓은 뒤, 은밀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네? 앗, 무슨, 무슨 말을!”

영웅이 귓가에 쏟아내는 말에 채언은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허리에 둘린 팔에는 더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검지로 선단의 작은 구멍을 슬쩍 긁어오는 손길이 노골적이었다.

“으읏….”

채언의 귓가로 직설적이고 음란한 말이 쏟아졌다. 그것에 더해 점차 타악, 탓, 빨라지는 영웅의 손길에 채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말하! 흐윽.”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던 손이 주륵 미끄러져 하얀 와이셔츠 가슴팍을 꼬옥 쥐었다. 조금 전까지 영웅의 성기를 쥐고 있던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움직임을 멈춰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채언은 자꾸만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다리가 풀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등이 둥글게 휘며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자꾸만 바닥을 그었다.

그 와중에도 은밀하게 속삭여지는 영웅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상태였다.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속삭이는 것은 반칙이었다. 허리를 움찔 튀게 만드는 쾌감에 입술을 물던 채언은 영웅의 가슴팍을 콩 때렸다.

“그, 으으… 그만하라니까요!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만하라면서 이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어떡해요. 손바닥이 벌써 끈적거리는데.”

채언은 가쁜 숨을 쉬며 영웅의 손목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떨리며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상태였다.

손날에 걸리는 영웅의 시계와 그 아래 핏줄이 선명한 손등, 마디가 굵은 손가락 등을 차례로 이어 본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영웅의 활짝 벌어진 손가락 사이에는 귀두가 붉게 물든 성기 두 개가 한 번에 잡혀 있었다. 뻐끔거리는 작은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액체로 그의 손가락이 온통 번들거렸다.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챈 영웅은 손가락마다 힘을 주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즈윽, 즈윽, 끈적한 소리 뒤에는 어김없이 서로의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채언은 영웅의 가슴팍에 볼을 문지르면서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목을 살살 긁었다.

“시계가, 하아… 망가지면 어, 떡해요.”

검은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영웅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채언의 귀를 핥았다. 그러자 채언이 움찔 튀며 단단한 품에 몸을 더 기대어 왔다.

뒤이어 몸을 숙인 영웅이 채언의 허벅지 뒤쪽을 잡아 안았다. 채언을 식탁 위에 앉힌 그는 향긋한 살 내음이 나는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마시더니 코끝으로 목선을 살살 그었다.

“이 시계, 물에 젖어도 돼요.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스쿼팅 해도 괜찮아요. 조용히 속삭인 영웅의 말에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영웅이 두 손으로 채언의 바지와 속옷을 힘주어 끌어내렸다. 그런 뒤 말랑한 엉덩이를 꽉 잡아 자신에게로 당겨 안았다. 속옷 밖으로 완전히 끄집어내진 성기 두 개가 빈틈없이 맞닿으며 서로에게 꾸욱 눌렸다.

식탁 끝에 겨우 몸을 걸치고 앉은 채언은 마치 삽입하듯 허리를 움직이는 영웅에게 몸을 기댄 채 짧게 숨을 헐떡였다. 종아리 아래 뭉쳐 구겨진 바지와 속옷 때문에 다리 사이가 벌어졌지만, 발목은 붙어 있었다. 그래서 영웅의 허리에 다리를 감을 수 없었다. 이미 배꼽까지 올라붙은 그의 것과 조금 더 닿기 위해 허리를 휘어 안겨야 했다.

맞닿는 성기의 느낌이 미끈거리고 질척했다. 손으로 만지지 않고도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몸 곳곳에 퍼져나갔다. 영웅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던 채언은 고개를 틀어 그의 목과 턱선 사이를 잘근거렸다.

“아, 아읏, 으….”

활짝 벌린 채언의 허벅지 안쪽으로 몸을 붙인 영웅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풀어진 벨트가 흔들려 식탁을 쳐댔다. 타악-탓, 둔탁한 마찰 소리에 이어 옷과 옷이 닿으며 슥슥 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차오르는 사정감에 눈가를 찌푸린 채언은 영웅의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넥타이를 붙잡아 당겼다. 짙은 욕망이 서린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밭은 숨을 쉬느라 달싹이던 채언은 그대로 넥타이를 더 끌어당겨 가까워진 영웅에게 입을 맞췄다. 쭈웁, 춥. 다급히 빨리는 입술 사이에서 선액에 젖은 성기끼리 문질러질 때 들리던 질척한 소리와 비슷한 마찰음이 들렸다.

“으음, 응….”

아랫배와 허벅지 근육이 움찔 떨리며 긴장되는 간격이 짧아졌다. 구겨진 천 뭉치에 움직이기 불편한 발목을 꺾으며 사정감을 참아내던 채언은 겨우 타액을 삼켜내다가.

“아…!”

끝내 영웅의 아랫입술을 물며 사정했다. 채언이 뱉어내는 더운 숨이 영웅의 입술 사이로 들어가 혀끝에 고였다.

“으, 으응.”

채언은 눈가를 좁히며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막 사정해 예민한 몸에 아직 사정하지 못한 영웅의 성기가 계속해서 문질러지고 있었다. 탁, 탓. 딱딱한 식탁과 벨트 부딪히는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흣.”

이미 사정을 마친 채언의 성기에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던 영웅은 두 손 가득 채언의 엉덩잇살을 쥐며 미간을 좁혔다. 선단의 움찔거리는 구멍에서 희뿌연 정액이 여러 차례에 걸쳐 흘러나왔다. 사정하는 동안에도 천천히 허리를 흔든 영웅은 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의 잔잔한 끝까지 즐기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다만 여전히 맞붙은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섞이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키스를 하는 동안 딱 붙은 혀처럼 끈적하게 붙어 있던 두 개의 성기 아래로 희뿌연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쪽, 쪽. 채언의 젖은 입술에 가볍게 뽀뽀한 영웅은 양쪽 손으로 식탁 위를 짚었다. 그의 볼에 자신의 볼을 대고 문지른 채언은 눈을 감으며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둘 다 거칠어진 숨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영웅을 안은 채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채언은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살짝 눈을 든 영웅은 자신의 몸과 채언의 몸을 번갈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과 바닥, 입고 있던 옷에까지 정액이 튀어 지저분했고 채언의 다리에 뭉쳐 있던 바지는 한쪽 발목에 걸려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옷 갈아입으러 갈까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안겨 오는 몸짓에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채언의 몸을 안아 들었다.

드레스룸이 딸린 침실 안으로 걸어가던 영웅은 거실 화초에 잠시 시선을 던진 뒤 금방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늑장을 부렸는데 얼른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지저분해진 식탁 근처를 닦는 것은 우선 옷을 갈아입은 후의 일이었다.

“그거 맛있어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막 입에 넣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채언의 무릎 위에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지가 놓여 있었다.

욕실에 함께 들어간 게 문제였다. 씻으러 들어간 곳에서 또 서로 여기저기 물고 빠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에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할 여유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비닐봉지 가득 든 인스턴트 제품과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채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영웅은 마뜩잖은 표정을 짓다가 푸스스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굴 탓할까 싶었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식당 간판이 보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을 삼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이거 좋아했어요.”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채언이 서둘러 말했다. 최근에는 편의점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지만, 예전에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식당보다 더 자주 이용했던 것이 편의점이었다.

“그랬어요?”

“인기 많은 건데.”

채언은 손에 든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계란 샐러드와 딸기잼이 발린 샌드위치는 출시되었을 때부터 화제가 되어 온갖 편의점에 카피 제품이 깔릴 정도로 인기를 끈 것이었다. 조금 달긴 했지만 채언의 입에도 잘 맞았다.

샌드위치를 한입 더 베어 문 채언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운전석에 앉은 영옹을 흘끔 쳐다보았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며 집에서 과일과 다 식은 커피만 조금 먹고 나온 그였다.

“이런 샌드위치 드셔보신 적 없죠?”

“편의점 샌드위치요?”

“네.”

“먹어본 적 있는데.”

“어떤 거요?”

“음, 토마토랑 치킨, 풀…, 풀 들어간 거. 샐러드 먹을 때 넣는 그거,”

아마 양상추를 말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채언은 서둘러 샌드위치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얼른 먹고 쓰레기를 봉지 안에 넣어 묶어버릴 생각이었다.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이미 차 안에 샌드위치 냄새가 가득했다.

“그때 먹은 게 맛없었어요?”

“토마토 들어간 샌드위치요?”

“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기억 안 나는 거 보면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뒤로는 드신 적 없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샌드위치는 집에서도 만들 수 있으니까.”

영웅이 핸들 돌리는 것을 바라보던 채언은 집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만드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스트라이프 무늬 앞치마를 입은 그는 토마토와 양상추를 직접 씻고 썬 다음 미국 맛이 나는 소스를 발라 샌드위치를 만들었을 것 같았다. 이름이 특이한 햄도 잔뜩 넣어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건 귀찮잖아요. 샌드위치는 재료도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야 하고.”

채언의 말에 영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건 아니라서요.”

먹는 걸 중요하게 여기며 살지는 않았던 터라 간단한 파스타나 굽기만 하면 거의 완성되는 스테이크 같은 요리 외에는 뭔가 많이 해보지 않았던 영웅이었다.

집 청소를 해주거나 음식 재료를 사다 놓는 사람 없이 혼자 살 때는 귀찮으면 식빵 사이에 땅콩버터를 바르고 감자 칩이나, 피클 정도를 끼워 먹고는 했다. 매끼를 그렇게 먹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영양이 모자란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샌드위치 만들어주시면 안 돼요?”

하지만 자신이 샌드위치랍시고 만들어 먹었던 것을 채언에게 만들어주자니 내키지 않았다.

“점심으로 샌드위치 먹고 저녁으로 또 샌드위치…. 괜찮겠어요?”

영웅의 망설이는 말투에 채언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쥐고 있던 샌드위치 조각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자 볼이 불룩해졌다. 짭짤하고 단 맛이 입 안에서 뒤섞였다. 이것도 맛있긴 하지만 영웅이 만드는 것은 더 맛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준 건 다 맛있었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이따 집에 갈 때 재료도 사가는 걸로 해요.”

“네.”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음료수를 꺼낸 채언은 샌드위치를 감싸고 있던 비닐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빵가루가 묻지 않은 새끼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창문을 더 내려 열었다.

잠시 환기를 하며 바깥 구경을 하는데 눈에 보이는 풍경에 나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정말 어디 가는 거예요?”

영웅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땅 보러요.”

한참을 달려 차가 멈춰 선 곳은 경기도의 어느 커다란 농장 앞이었다.

“초롱 농장?”

채언은 눈을 끔뻑이며 차창 밖을 살폈다. 농장이면 작물을 사고팔기 위해 큰 차 몇 대가 오고 갈 주차장으로 충분할 텐데 이곳 주차장은 관광지의 그것처럼 넓었다.

“농장에는 왜요? 여기 화분 같은 거 파는 곳이에요?”

“여기에 땅이 있거든요.”

“여기가 다 라이언 땅이라고요?”

어리둥절한 채언의 물음에 영웅의 입에서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 말고 아주 조금. 그리고 내 땅 아니고 채언 씨 거.”

“제 거요? 저는 땅 같은 거 없는데.”

“일단 내려요.”

손가락으로 채언의 볼을 톡 친 영웅은 먼저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던 채언도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채언이 차에서 내리자 미리 조수석 쪽으로 돌아와 있던 영웅이 팔을 뻗어 허리를 안아 왔다. 허리에 둘린 손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뒤늦게 이곳이 바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영웅의 팔을 잡아 내렸다.

“제 땅이라는 게 무슨 소리예요?”

채언이 영웅의 가디건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말 그대로 채언 씨 땅이 생겼다는 거죠.”

“저는 땅이 없다니까요?”

두 사람은 주차장을 벗어나 농장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채언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뭔가 체험하는 곳인데 영웅이 말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작은 건물 쪽으로 걸어가자 사람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

차와 건물에 가려져 있던 넓은 땅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구역을 나눠 팻말을 꽂아놓고 각자의 작물을 돌보고 있었다.

“여기 무슨 체험 하는 곳이에요?”

“응? 채언 씨, 잠깐만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영웅은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채언의 손을 잡았다.

“저기 맞는 것 같은데. 이리 와요.”

손을 잡아끄는 영웅을 따라간 곳은 작물이 심어진 농장 옆의 건물이었다.

“여기 주말농장이라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주말에만 와도 되는 곳은 아니고 매일 와도 된대요. 우리 자리도 하나 분양받아 놨는데, 앞으로 거기다 채언 씨가 심고 싶은 거 심으면 돼요. 처음에 어떻게 땅을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설명도 잘 해준다고 했어요.”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영웅을 보던 채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몸이 끌어당겨졌다.

그 뒤로 농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략한 설명을 듣고 분양받은 땅을 살피기까지 일사천리였다.

영웅의 말대로 주말이 아닌 평일에 와도 되는 곳이었다.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역마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어플로 실시간 작물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스프링클러가 있으니 따로 물을 길어올 필요도, 비가 오지 않아 작물이 말라 죽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직원은 베테랑 농부가 옆 건물에 상주 중이니 뭘 심을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문의하러 오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살펴볼게요.”

“그러세요. 아이, 한국말 참 잘하시네. 조금 걱정했는데.”

직원이 손을 흔들며 멀어진 후에도 채언은 별말이 없었다. 영웅의 가디건 소매를 잡고 말없이 ‘채언이네’라고 쓰인 팻말과 검은 토양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나름 깜짝 선물이었던지라 채언에게 주말농장에 관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던 영웅이었다. 조금 놀라더라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묵묵부답에 당황한 그는 채언의 표정을 읽어보려 애썼다. 혹시 분양받은 구역이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더 이상 무언가 키우는 데 관심이 없는 걸까?

진원과 함께 알아보니 겨울에는 농장 이용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 주말농장은 보통 초봄부터 분양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미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워진 터라 자리가 빈 농장을 찾는 것부터 일이었다. 다행히 차로 이동하면 멀지 않은 곳에 주변 시설이 괜찮고 원하는 기간만큼 계약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지만, 겨우 찾은 곳이라도 채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용없었다.

“채언 씨.”

이름을 부르자 채언은 잡고 있던 옷소매를 놓고 주륵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영웅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포도 농장에서 돌아온 채언은 한동안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로 생활했지만, 피부는 금방 원래 색을 되찾았다. 떨어져 지낼 때 불안정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긴 했지만 잘 버티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들게 된 이후, 드물지만 이유 없이 울면서 잠에서 깬 적이 몇 번 있었다. 몸에 맞는 약을 더하고 빼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였다.

서울로 돌아온 채언은 포도 농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낮 동안 대동에 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마음 깊이 팬 상처에 새살 돋는 일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리 없었다.

꾸준히 약도 먹고 상담도 받으면서 여름을 살아낸 채언은 점차 나아졌지만, 토마토 화분이 깨진 자리에 새 화분을 두지는 않았다. 이미 있는 화초를 돌보는 것이 다였다. 자신이 선물하는 꽃다발을 물 채운 화병에 꽂아두고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그건 화분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아직 무언가를 싹틔우는 것에 두려움이 남은 것일까. 아니면 혹시 또다시 겪게 될지 모를 시듦에 손대길 꺼리는 것일까.

하지만 채언이 어느 쪽을 두려워하든 상관없었다. 깊이를 모르는 구덩이에 함께 빠져버린다 해도 먼저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영웅이 주먹 쥔 손을 펴고 무릎을 굽히려 할 때였다. 흙을 보고 있던 채언이 앉은 채로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영웅은 반사적으로 채언의 손을 꽉 쥐었다.

“정말 제가 여기다 아무거나 심어도 괜찮아요?”

맑은 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가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던 영웅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아 채언과 눈높이를 맞췄다. 입꼬리는 점차 호를 그렸다.

“마음대로 해요.”

채언은 입 안쪽 살을 잘근거리다가 영웅을 따라 웃었다. 억지로 웃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참다 웃음이 터진 듯했다.

“오늘 샌드위치 재료 사러 가기 전에 원예 도구랑 씨앗이랑 모종, 아! 장화도 사야 하나? 음, 그건 안 사도 되겠죠? 여기는 질척거리는 땅이 아니니까. 그런데 저 편한 신발을 한 켤레 사야 할 것 같아요. 막 신을 걸로요. 이것 보세요, 운동화가 벌써 흙 때문에 까매졌어요.”

채언은 재잘거리는 도중 혼자 히- 웃었는데, 그때마다 동그랗게 올라온 볼에 보조개가 선명히 패었다.

“그런데 뭘 키워야 할까요? 겨울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올해는 좀 빨리 자라는 걸 심어보고 내년에는 오래 두고 자라는 걸 심어야겠어요.”

질 좋은 토양을 맨손으로 꾹꾹 눌러보던 채언은 영웅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잘 키울 거예요. 저 이번에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영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너무나 소중했다.

“잘 모르겠으면 물어볼 사람도 있고, 여기는 흙도 좋아 보여요. 영양제를 안 놔줘도 될 테니까 욕심 안 낼 거예요. 그런데 하나 말고 여러 개 심어볼래요. 이 땅은 화분처럼 작지 않아서 많이 심을 수 있잖아요. 그럼 뭘 심어도 열 개 중에 하나는 잘 자랄 거예요. 올해가 너무 빨리 가면 내년을 기다리면 되고. 그때는, 제 생일에 맞춰서 새 씨앗을 심을래요.”

조곤조곤한 채언의 목소리를 듣던 영웅은 조금 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언은 자신의 손을 잡고 구덩이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로 이 손에 끄집어내진 것이 자신이었다.

“잘할 수 있어요.”

영웅의 단단한 목소리에 미소 지은 채언은 그의 커다란 손을 꽉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잘 갈린 흙과 팻말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여기 제 이름만 들어가도 괜찮아요?”

“여긴 채언 씨 땅이니까요.”

“혹시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세요. 팻말에 이름 넣어드릴 테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채언은 곧바로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옆에 앉아 있던 영웅이 위를 올려다보자 채언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우리 이제 가요.”

얼떨결에 몸을 세운 영웅은 깔끔한 채언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더 안 둘러봐도 되겠어요?”

“네, 내일 또 와도 되니까요. 어차피 아직 뭐 심을지도 안 정했고.”

영웅의 손에서 그의 가디건 소매로 손 위치를 바꾼 채언은 붙잡은 소매 끝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우리 지금 차로 가야 해요.”

“차에? 뭐 두고 왔어요?”

영웅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채언은 아까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며 이상하게 재촉하는 기색을 보였다.

“알겠어요. 가요.”

각자 땅에 자란 작물을 돌보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나온 두 사람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뭘 두고 온 거예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지만, 영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걸음이 급하지? 스마트 키를 사용해 미리 차 문을 열어 놓았음에도 채언은 자꾸만 제 손을 끌고 앞서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덩달아 걸음을 빨리 해 차 근처로 온 영웅은 운전석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영웅의 가디건 소매를 놓지 않고 있던 채언이 손을 잡아당겨 왔다.

“이쪽이요.”

달칵, 채언이 뒷좌석 문을 열고는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여기요.”

영웅은 채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얌전히 뒷좌석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차 문을 잡고 서서 주차장을 둘러보던 채언은 영웅이 얌전히 시트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여 같은 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음? 아, 내가 더 안쪽으로 들어갈까요?”

타악. 시트에 손을 짚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던 영웅은 갑자기 들린 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몸 위로 실리는 무게에 눌려 상체가 기울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차 천장이 보여서 그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내렸다. 차 문은 닫혀 있었고 채언은 자신에게 와락 안겨 있었다.

“채언 씨?”

“고마워요.”

자세를 추슬러 영웅의 목을 껴안은 채언은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곧바로 다가올 영웅의 손길을 기대하며 눈을 감자 역시나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왔다.

“토마토 말고 다른 것도 꼭 심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옅은 미소를 지은 채언은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니트 가디건에 볼을 문질렀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는 말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냐고 물어봐 준 것이 고마웠다. 너무나 그다운 말이었기 때문에 잘못 말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할 일이 너무 많잖아요.”

자세를 좀 더 편안하게 바꾼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안은 뒤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뭘 키울지 정해야 하고, 그다음에 제가 키울 수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화분을 산 다음에 씨앗이랑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니까요. 시간이 정해진 수업을 듣는 게 아니니까, 언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래서….”

고마워요. 덧붙이는 목소리는 물기 없이 산뜻했다.

갑자기 생긴 작은 땅은 흙 담긴 화분만 집에 들인 것과 같았다. 날씨와 기온을 체크해 씨앗이나 모종을 준비하려면 집 안의 화분보다 바깥 땅이 더 까다로웠지만.

언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랬다는 말이 영웅에게는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채언은 단지 준비할 것이 많아 화분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채언 혼자 머뭇거렸을 날들을 떠올릴 때마다 영웅은 조금만 더 빨리 채언과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내년에는 조금 더 큰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더 큰 농장이요? 여기도 충분히 넓은데요.”

채언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꽂혀 있던 공간을 떠올렸다. 시기만 괜찮았다면 수박을 키웠어도 될 만큼 넓은 곳이었다. 커다란 수박이 주렁주렁 열린 밭을 생각하자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영웅은 해사하게 웃는 채언의 얼굴을 보며 마당이 넓은 전원주택을 떠올렸다. 이렇게 일정 기간 동안 잠시 빌리는 작은 땅이 아니라 평생 살 수 있는 집. 채언이 옥수수밭을 일궈도 좋을 만큼 큰 뒷마당과 허브나 토마토를 심어 취미처럼 가꿀 앞마당이 있는 곳으로.

그런 곳에 살면서 가끔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하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면 채언이 따로 회식을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수박은 어떨까요?”

망상에 빠져있던 영웅은 채언의 목소리와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어? 못 들었어요. 미안해요, 뭐라고요?”

“내년에 수박을 키워볼까요?”

“수박? 워터멜론?”

채언의 귀가 쫑긋했다.

“네, 워터멜론이요….”

왜 워터멜론은 조그맣게 말해요? 물어보려다 만 영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거실 창가의 빈자리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올해 뭐 심을지는 충북 아저씨나 사장님한테 먼저 조언을 들어봐야겠어요.”

“토요일에 같이 포도 농장에 갈까요?”

“아니에요. 전화해서 여쭤보면 돼요.”

“그럼 전화 말고 주말에 뭐 하고 싶은 건 없어요? 우리 오랜만에 어디 놀러 갈까?”

“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으음, 우선은 이러고 조금만 더 있어요.”

“좋아요. 조금만 더 이렇게.”

두 사람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번갈아 말하면서 한참이나 뒷좌석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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