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외전: Painkiller 2권
5.
“형!”
조수석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건영이 채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던 채언은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주차선 멀리 뒷걸음질 쳤다.
“너 머리 집어넣어. 위험해!”
“응!”
스르륵 창문이 올라가 닫히고 자동차는 이내 주차선 안에 반듯이 자리를 잡았다. 채언이 시동 꺼진 차 가까이 다가가자 조수석 문이 열리고 건영이 튀어나왔다.
“형, 잘 지냈어?”
건영의 어깨 위에 팔을 올린 채언은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잘 지냈지. 오는 데 차는 안 막혔어?”
“좀 막히긴 했는데, 엄청 막히지는 않았어.”
채언은 건영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손을 내렸다. 때맞춰 충북과 혜옥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혜옥은 검은 비닐에 싸인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오시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채언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잘 있었어, 채언이?”
“네. 저는 잘 지냈어요. 가게 일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여, 이렇게 얼굴 보면 됐지. 그나저나 여기는 들어올 때 확인을 희한하게 한다. 신기해.”
양손을 허리에 올린 충북이 껄껄 웃었다.
“그건 뭐예요? 저 주세요. 제가 들게요.”
“이거? 아니야. 아줌마가 들고 갈게.”
손을 내미는 채언을 보며 혜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거 말고 과일이랑 음식 좀 싸 왔는데 그것 좀 같이 옮겨 줄래? 여보, 얼른 가서 트렁크 열어.”
“음식이요?”
충북과 건영이 트렁크 문을 열러 가는 것을 보며 채언이 눈을 끔뻑였다.
“저녁은 저희가 대접하기로 했잖아요.”
“별거 아니야. 과일이랑 전 같은 거 조금 싸 왔어.”
“정말 괜찮은데. 힘들게 왜 그러셨어요.”
채언의 얼굴에 죄송스러움이 가득 떠올랐다. 이럴까 봐 분명 몇 번이나 건영을 통해 아무것도 챙겨오지 말라고 당부 연락을 했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었어. 저기 두 사람이 다 했거든. 그리고 명절인데 명절 음식 맛은 봐야지.”
그때 터억, 하고 트렁크에서 무거운 상자를 꺼내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많이 안 하셨다기에는 소리가 너무 무거운데요.”
“정말 많이 안 했어. 저거는 과일 박스 소리야.”
혜옥이 웃으며 품에 안고 있는 것을 추슬렀다.
“무겁지 않으세요? 제가 들게요.”
검은 봉지에 싸인 것이 역시나 가벼운 물건이 아닌 듯해 채언은 다시 한번 혜옥에게 제안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거 말고, 가서, 저거 뭐야, 과일 좀 챙겨, 채언아. 앤드류 기다리겠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채언은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 건영이 넘겨주는 상자를 들었다.
타악. 빈 트렁크 문이 닫혔다.
“다 챙겼다. 가자, 가자.”
“형, 여기서 어느 쪽이야?”
건영이 지하 주차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채언은 묵직한 상자 모서리를 매만지며 후욱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이쪽이에요. 저 따라오시면 돼요.”
1층, 2층… 그리고 22층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채언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들 얼른 왔으면 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채언이 제일 먼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뒤이어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여기예요.”
현관문 앞에 선 채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해하고 다정스러운 세 사람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꼴깍 침을 삼킨 채언은 바로 문을 열지 않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야 잠시간 영웅에게 사람들을 맞이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영웅의 목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던 인터폰에서 아무런 대꾸가 들려오지 않았다. 채언은 현관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아직 식탁을 차리느라 바쁜가? 전보다 초인종 소리를 키워놓아서 소리를 놓쳤을 리는 없을 텐데.
초인종이 눌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긴장한 채언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끊기지도 않은 초인종을 다시 한번 눌러보려던 찰나, 문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채언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영웅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신발장 너머 집 안에서만 신는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혜옥에 이어 충북과 건영도 영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건 제가 들어드려도 될까요?”
“아니에요. 이건 내가 들고 갈게요.”
활짝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는 영웅의 얼굴을 본 채언은 그 또한 자신 못지않게 긴장했음을 알아차렸다. 둘 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손님을 맞이하고 나서야 긴장한 것까지 똑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등 뒤로 닫히는 현관문을 돌아본 채언은 어깨를 돌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영웅이 자신의 가족들 앞에서 긴장했다면 그것을 달래주는 것이 먼저였다. 자신이 긴장할 차례가 아니었다.
도란도란한 이들의 뒤를 따라 현관 복도를 걸어가던 채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가족. 가족이라니. 상자를 쥔 손가락을 움찔거린 채언은 자꾸 물결치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입 속으로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영웅이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소고기 찜을 나이프로 잘라 먹으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은 영웅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맛있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채언은 영웅이 그토록 신경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들이라는 것이 좋았다. 며칠간 오늘을 위해 바쁘게 준비한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모두가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을 한 종류씩 맛보았을 즈음, 물을 한 모금 마신 채언이 입을 열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다 너무 맛있다. 고기가 연해서 안 씹어도 자꾸 꿀떡꿀떡 넘어가.”
“우리보고는 음식 준비하지 말라더니, 이렇게 많이 준비해서 그런 거였어? 아주 지금 입이 호강하고 있어.”
“다 형이 만든 거야?”
푸실리가 들어간 샐러드를 우물거리던 건영이 입에 든 것을 삼키고는 물었다.
“아니. 나는 국만 끓였어. 나머지는 다 앤디가 만들었고.”
“와아, 진짜? 음식 만드는 실력이 대단하네요.”
혜옥이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감탄했다. 옆에 앉은 충북이 그 의견에 동조하며 크림소스를 발라 구운 랍스터 살을 포크로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게 드셔주시니 다행이에요.”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영웅을 돌아본 채언은 오히려 자신이 더 들떠서는 입을 열었다.
“집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고 앤디가 며칠 전부터 엄청 공들였어요.”
네 개였던 식탁 의자를 두 개 더 준비해 여섯 개로 맞춘 영웅이었다. 레시피를 찾아본 것만 해도 여러 번이었고, 좋은 재료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지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메뉴와 똑같은 것을 그저께도 먹어보았고, 괜찮은 맛을 내는 데 실패해 오늘 식탁 위에 오르지 못한 메뉴도 몇 개나 있었다. 누가 보면 요리사가 꿈인 사람인 줄 알 것이었다.
채언이 자신이 음식을 만들겠다고 몇 번 제안해 보았지만, 영웅은 메인 메뉴를 만드는 것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혹시 양식만 준비하면 충북과 혜옥에게 부담스러울까 봐 그들에게도 익숙한 국 정도만 부탁해 왔다.
“그랬어?”
혜옥이 미소 띤 얼굴로 채언을 보며 추임새를 넣은 뒤 영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신경을 써주니까 너무 고맙네요.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겠어요.”
“아뇨. 고생은요. 그동안 채언 씨 통해 맛있는 과일 자주 보내주셔서 저도 잘 얻어먹었습니다. 감사 인사는 드려야죠.”
또박또박 말하는 영웅의 목소리에 혜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둘이 요리해서 집에서 밥 잘 해 먹고 그러나 봐요.”
“네, 자주 해 먹는 편입니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삶은 당근을 베어 먹은 채언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영웅 대신 대답했다.
“네. 같이 만들기도 하고요.”
“그래?”
혜옥은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집이 진짜 넓고 좋다. 환하고.”
이미 식사 전에 집에 대해서 한차례 감탄하고 넘어갔지만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혜옥의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창이 커서 식물도 잘 자라는 것 같고.”
그 말에 채언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요. 잘 자라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깔끔해? 넓어서 청소하기 힘들 텐데.”
포크에 찍혀 있던, 반쪽 남은 삶은 당근을 입에 쏙 집어넣은 채언이 도리질을 했다.
“넓긴 한데 힘들지는 않아요. 둘이 사용하는 공간은 한정적이거든요. 어, 각자 침실이나 여기 거실하고 부엌 정도요.”
채언은 이 집에서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침실은 하나뿐이고, 정기적으로 사람을 불러 집 청소를 맡기기 때문에 평소에 신경 써서 청소할 거리는 많지 않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청소도 요리하는 것처럼 같이 하나 보네? 전에 아저씨가 보던 드라마에 나온 사람들도 그렇게 살던데. 여러 명이 같이 사는 집에서 생활하던 거.”
“맞어 맞어. 그런 게 있었지. 그거참 재밌었지. 채언아, 너도 봤냐, 그거?”
“아뇨, 무슨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희도 같이 하고 있어요.”
“으흠. 그렇구나.”
혜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던 건영은 고개를 숙인 뒤 접시 위의 매시트포테이토를 포크로 찔렀다.
“되게 사이좋은 룸메이트네.”
작은 목소리로 끼어든 건영의 말투는 불퉁하지 않았지만 채언은 그 말에 섞인 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건영이 너, 잠옷 가져왔어?”
“잠옷?”
“응, 가져왔어?”
“가져왔어. 가방에 있어. 왜?”
“그래? 잘했어.”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웅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호텔을 예약하기 전, 채언이 건영을 통해 약속 날짜를 확정 짓는 연락을 주고받을 때였다.
‘그런데 형.’
‘응.’
‘두 분은 호텔 가서 주무시고 나는 형네 집에서 형하고 같이 자면 안 돼?’
‘집에서? 왜? 너도 호텔이 더 편하지 않겠어?’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니까. 응? 그러면 안 돼?’
애초에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려 했던 것이고 영웅에게서는 이미 허락이 떨어졌다. 건영이 집에서 자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채언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뒤늦게 영웅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그날 건영이 자는 방 옆에서 잘게요.’
무슨 일이든 채언이 마음대로 결정해도 상관없었던 영웅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아차 했다. 혼자 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구를 옮기는 중이라 잠시 침대만 합치기로 했다거나, 새벽에 잠깐 그쪽 방에 가서 대화를 나누다가 잠드는 척하면 안 되냐고 허술한 아이디어를 내보았지만 채언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오늘 밤엔 한집에 있으면서도 떨어져 자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영웅은 벌써부터 마음이 헛헛해져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옷은 갑자기 왜?”
“없으면 빌려주려고 했지.”
그 말에 건영이 킥킥 웃었다.
“뭐 빌려주게? 고등학교 체육복 바지?”
“아니거든.”
채언도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자신은 제대로 된 잠옷을 입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건영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빼고는 꼭 자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곤 했다. 전에 함께 살던 집에서도 그랬고, 상황이 안정된 후 대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체육복?”
옆에서 영웅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채언은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졸업하고 나서 잠옷으로 몇 번 입었거든요.”
“몇 번 아니잖아.”
“이젠 안 입거든? 너 감자는 왜 괴롭히고 있어. 이거나 더 먹어.”
건영의 포크에 격자무늬로 짓이겨지는 매시트포테이토를 본 채언은 다른 음식을 덜어 건영의 접시 위에 올려놔 주었다.
“나 배부른데.”
건영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얌전히 포크로 음식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래. 건영이 너, 야채 말고 고기를 좀 더 팍팍 먹어. 아무래도 얘가 몸에 철분이 부족하다니까?”
충북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오른 것을 본 채언이 물었다.
“왜요? 장건영, 너 어디 아파?”
고기를 찍은 포크를 입가로 가져가던 건영이 심각해진 채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아픈 데 없어. 아 맞다, 그게 아니라 형! 포도밭에 귀신이 있는 것 같아.”
“…귀신?”
“아이고, 참나. 얘가 또 그러네.”
충북이 손을 들어 건영의 이마와 볼을 만지며 열을 재기 시작했다. 빵 반죽을 치대듯 문지르는 거친 손길에 건영이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열 안 나요! 형, 아잇! 형! 우리 이따 다시 얘기해.”
옆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지켜보던 혜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랍스터 꼬리를 먹기 좋게 잘랐다. 건영의 접시 위에 자꾸만 음식이 쌓여갔다.
복작복작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는 계속되었다. 대화를 나누다 다 같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채언은 밝게 웃다가 조용히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사진 찍듯 순간을 머릿속에 남겼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것도 집에서 다 같이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게 이토록 좋은 일인 줄 몰랐다. 매년 명절마다 사람들이 어렵게 차표를 구해 고향에 찾아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귀성객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들뜬 마음을 따라 식탁 아래 채언의 무릎이 들썩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그거 챙겨 와놓고 꺼내는 걸 깜빡했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혜옥이 작게 손뼉을 마주쳤다.
“앤드류 술 좀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채언아?”
“네?”
고개를 갸웃한 채언은 잊고 있던 혜옥과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아, 네.”
지난번에요…. 채언은 영웅에게 지난번 혜옥과 나눈 통화 내용을 짧게 말해주었다. 영웅은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언이 여러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빴던 날의 이야기였다. 그때 얼핏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서 직접 담근 술을 몇 병 가져왔는데. 정말 술 잘해요?”
영웅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자주 마시는 건 아니지만,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혜옥이 술을 선물로 가지고 온 듯했다. 대동에서 서울까지 애써 가지고 와준 것을, 그것도 손수 만든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받기로 했다. 자신도 미국에 있을 때 마음을 표하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와인을 선물하고는 했는데 혜옥의 선물이 그런 의미인 듯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지금 맛 조금 볼래요?”
“지금요? 그게….”
나중에 채언과 함께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지금 혜옥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했다. 영웅은 옆에 앉은 채언의 허벅지를 콕콕 찌른 다음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식탁 위의 포크를 하나 떨어트렸다.
“오, 이런! 제가 실수로 포크를 떨어트렸네요.”
말투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식탁에 앉은 모두 그 점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주울게요.”
“아니에요. 채언 씨, 내가 주울게요.”
그러면서 두 사람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채언 씨, 나 오늘 술 마셔도 돼요?”
“네? 라이언이 마시고 싶으면요.”
“나중에 같이 마시기로 했는데 미안해요.”
영웅의 사과에 멀뚱히 그를 보던 채언은 이내 활짝 웃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으응, 하나도 안 서운하니까 사과하지 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술을 마시자고 하면 계속 같이 마시는 게 좋은 거 맞죠?”
“아무래도….”
영웅은 어른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 예절에 대해 묻는 듯했다. 잠시 생각하던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네.”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것보다 어른이 같이 마시자고 할 때 마시는 것이 더 예의 바른 행동일 터였다.
두 사람이 식탁 아래에서 속닥이는 동안 위에서는 충북이 조용한 목소리로 혜옥을 말리고 있었다.
“아이고, 마나님. 우리 이제 가야지, 집주인 쉬게. 시간도 늦었는데.”
충북은 혜옥의 주량을 알지 못했다. 같이 산 세월이 오래되었지만 여태껏 혜옥이 취한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부 동반 모임에서 몇 병이나 혼자 해치우는 것은 본 적 있었다. 술맛을 조금 보자는 것은 조금이 아닐 게 분명했다.
“여보, 조용히. 가만히 있어.”
하지만 혜옥은 단호했다. 오늘 꼭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초대한 채언이 저녁 먹을 장소로 레스토랑과 집이라는 선택지를 주었을 때, 집을 선택한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채언이 멀쩡한 집에서 잘 살고 있는지 눈대중으로라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영웅에게 술버릇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성품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눈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애매한 주량에 술버릇이 고약한 것보다 소주 두 잔만 마셔도 취해서 잠드는 충북처럼 술버릇 없고 주량도 약한 편이 나았다.
너무 배가 불러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건영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부부를 보며 킥킥 웃었다.
“아저씨, 이제 곧 드라마 할 시간이라 그러는 거죠?”
“아니여! 내가 연속극을 보고 싶은 거랑은 달라, 이거는. 어쩐지… 집에서 이 사람이 전 부치다 말고 주꾸미를 삶아서 챙기라고 하더니 그게 다 술안주였어.”
그때 타이밍 좋게 영웅과 채언의 머리가 식탁 아래서 불쑥 솟아올랐다.
“사장님. 그럼 제가 술잔을 꺼내 올까요?”
“어, 그래, 채언아. 그러면 일단 식탁을 조금 치우고.”
“여보, 그렇게 또 본격적으로다가 마시고 그러면은.”
“어휴! 어휴! 채언아, 이렇게 아저씨가 연속극을 좋아해. 드라마 못 볼까 봐 자꾸 가자고 그러네.”
그 말에 영웅이 하하 웃으며 채언을 돌아보았다.
“채언 씨도 드라마를 엄청 좋아해요. 그렇죠?”
초록색 눈동자에는 놀리는 기색 없이 다정함이 묻어났지만 채언은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괜히 말아 쥔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뭐어, 그런 편이죠.”
“채언아, 이따가 아저씨 연속극 좀 틀어줄래? 건영이랑 셋이 자암깐만 드라마 좀 보고 있어. 딱! 드라마 끝나는 시간까지만 마실 테니까.”
“네. 그럴게요.”
“내가 연속극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참나.”
“아저씨. 그런데 오늘 그 사람들 만나는 날 아니에요? 회장이랑 그, 그 사기꾼! 얼굴 좀 빨간 남자 있잖아요.”
드라마 이야기가 핑퐁처럼 다섯 사람의 입을 오갔다. 그러는 동안 빠르게 식탁이 치워졌고 혜옥이 가져온 음식 몇 가지가 새 접시에 담겨 차려졌다. 그중에는 주꾸미 숙회와 데친 브로콜리도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귀한 술을 내가 꽁꽁 싸매 가지고 와서 포장을 좀 풀어야 해.”
채언은 아까 혜옥이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애지중지 들고 온 것을 떠올렸다. 크기가 꽤 컸는데 술병이 그렇게 클 리 없으니 포장을 정말 꼼꼼히 해 가지고 온 듯했다.
“도와드릴게요. 혹시 가위 필요하세요?”
“아니야. 앉아 있어.”
혜옥이 채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식탁 위에는 술잔이 두 개 놓여 있었지만 채언은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옆에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걸어가는 혜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채언은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영과 충북이 소파에 앉아서 광고가 나오는 TV를 보고 있었다. 채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장소는 달랐지만, 대동에서 지낼 때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기분 좋은 이유는 여기에 영웅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싱크대 쪽으로 시선을 옮긴 채언은 셔츠를 입은 영웅의 넓은 등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라이언, 거기서 뭐 해요?”
“그냥 잠깐 생각을 좀.”
뒤를 돌아보는 영웅의 얼굴을 본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래요?”
채언은 서둘러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어디 안 좋아요? 체했어요? 왜 표정이 안 좋아요.”
하얀 손가락이 영웅의 귓바퀴를 매만지다 떨어졌다.
“내 표정이 안 좋았어요? 난 괜찮은데.”
“혹시 이 자리가 부담스러워요? 제가 오늘 너무 신경을 못 썼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언의 얼굴을 보며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영웅은 몸이 아프지 않았고,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가가 촉촉해진 이유는 조금 전 밝은 얼굴로 식기세척기 문을 열고 그릇을 집어넣던 채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을 다시 빨리 차리려면 먼저 빨리 치워야 할 것 같아서요.’
순하게 접히는 눈꼬리 아래 동그랗게 올라온 볼에 보조개가 폭 패었었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지끈했다.
하지만 채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밝은 얼굴로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는 게 나에게 너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요, 라고 말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변명을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부담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좋아서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영웅은 지금쯤 집 마당에서 뒹굴며 놀고 있을 엘리를 생각했다. 엘리는 털에 풀과 나뭇가지가 묻은 채로 뛰어다니다가도 공을 던져주면 덥석 물고 와서는 칭찬해달라고 안겨 오곤 했다. 풀썩 소리 나게, 검은색과 갈색 털을 휘날리면서. 지금 채언처럼.
“어?”
지금 채언이 자신에게 안겼다는 것을 깨달은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처럼 둘만 있는 집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집이었다.
강하게 영웅의 몸을 끌어안은 채언은 그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적거린 뒤 금방 몸을 물렸다.
영웅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마도 채언은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었나 보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정말로요?”
“진짜로.”
“이따 부모님, 아니면 카일라 님이랑 영상 통화라도 하는 건 어때요?”
무의식중에 영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좀….”
“자아! 왔어요, 왔어요. 술이 왔, 으응? 왜, 그사이에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응? 채언아, 왜 그래.”
때마침 술을 가지고 온 혜옥이 굳어진 영웅의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채언은 영웅의 손목을 잡아 식탁 쪽으로 향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났대요.”
“아이고, 그랬구나. 또 명절인데 생각나지, 그렇지.”
혜옥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는 곳이 머니까 자주 보기가 힘들 거야. 앤드류, 그래도 기운 내요. 이거 마시면 힘이 펄펄 날 거야.”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혜옥이 들고 있던 유리병 두 개가 식탁에 놓였다. 맞은편에서 의자를 빼 앉으려던 채언과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장님, 이게 뭐예요?”
“요거는 인삼주. 옆에는 송이주. 어디서 사 온 거 아니고, 아줌마가 직접 담근 거야.”
“와, 귀한 술이네요.”
술병 속의 인삼들은 금방이라도 병뚜껑을 열고 제 발로 걸어 나올 듯 뿌리가 튼실했다. 송이주는 비교적 병의 크기가 작았지만, 술 색깔이 노랗게 잘 익은 것이 보였다.
의자에 앉은 채언은 식탁 위에 있는 오렌지 주스 병을 자신의 앞으로 가지고 왔다. 딱 봐도 두 사람이 마시기에는 술 양이 너무 많았다. 술이 너무 많다 보니 채언은 오히려 술자리가 짧게 끝날 것 같다고 짐작했다.
혜옥은 정말로 영웅에게 인삼주와 송이주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했다. 아니면 마시는 방법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거나.
“그런데 이건 어떻게 마시는 거예요?”
오렌지 주스 병을 연 채언이 커다란 인삼주를 보며 물었다.
“병이 커서 그렇지, 어려울 거 없어. 페트병에 든 음료수 따라 마시듯이 마시면 돼. 채언아, 국자 하나만 가져다줄래? 혹시 이거 조금 나눠서 담아놓을 거 있으면 그것도.”
채언이 국자와 빈 유리병을 가져와 내밀자 혜옥이 인삼주의 뚜껑을 열었다. 잘 숙성된 술 냄새를 맡아보라고 권유하자 채언이 술병 가까이 코를 대고 킁킁 향을 맡았다.
“꽃향기 맡는 강아지 같네.”
혜옥의 말에 채언은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몸을 물렸다.
“술에서 진짜 인삼 향이 나요.”
“그럼, 진짜 인삼이 들어간 건데.”
부지런한 혜옥의 손길에 노란 술이 담긴 잔 두 개와 노란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 하나가 각자 주인 앞에 놓였다. 비어 있던 유리병에도 술이 가득했다.
“다음에 한 병 더 담가줄 테니까 채언이 섭섭해하지 말고, 응? 나중에 건영이도 같이해서 마시자.”
혜옥의 말에 채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안 섭섭해요.”
자신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혜옥이었다. 채언은 자신을 포근하게 달래주는 혜옥의 말이 좋았다. 나중을 기약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기도 했다.
채언의 눈동자가 거실 쪽을 향했다. 소파에 앉아 충북과 TV를 보고 있는 건영도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언젠가 충북이 지나가는 말로 언질을 주었다. 국밥집에 데려가 편히 속이라도 털어놓으라고 술을 한 병 시켜줬더니 고개를 젓더라는 것을.
채언은 웃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언젠가 다 같이 정말 편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일 날이 오기를 바랐다.
“오늘은 오렌지 주스로 같이 짠할게요.”
이윽고 허공에서 맑게 잔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채언아, 브로콜리가 맛있니?”
술잔을 내려놓은 혜옥이 아까부터 브로콜리만 집중적으로 집어먹는 채언을 보며 말했다.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언의 볼이 불룩했다.
“먹을 거면 옆에 있는 전이나 주꾸미도 같이 먹지, 왜 브로콜리만 먹고 있어. 그건 곁들이로 먹으라고 가져온 건데.”
“그게, 브로콜리가 신선해서…요.”
채언은 입에 든 것을 씹어 삼킨 뒤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식탁 위에는 맛있어 보이는 전이 몇 종류 올라와 있었지만 채언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주꾸미 숙회 접시에 함께 담겨 있는 데친 브로콜리를 다 먹어버리는 것.
중간중간 다른 것도 조금씩 집어 먹었는데 그래도 브로콜리를 너무 집어 먹었는지 혜옥의 눈에 띈 듯했다.
“여기 주꾸미도 싱싱해. 아저씨가 잡아 온 거야.”
“이걸 아저씨가 직접요?”
혜옥의 말에 놀란 채언이 접시에 담긴 주꾸미와 거실에 있는 충북을 번갈아 보았다. 먹기 좋게 썰린 주꾸미는 살이 통통하고 색도 좋았다.
주꾸미는 어떻게 잡는 걸까? 배를 타고 나가서 낚싯대로 잡아야 하나? 그물로 잡아서 끌어올리나? 혼자 고민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채언은 젓가락을 들었다. 초장도 찍지 않은 주꾸미를 입에 넣어보자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식감이 느껴졌다.
“맛있어요! 우와…, 정말 이걸 어떻게 잡으셨지?”
“맛있지? 앤드류도 먹어봐요. 혹시 주꾸미 못 먹어요?”
기우뚱 고개를 기울여 채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영웅은 바르게 몸을 세우며 대답했다.
“아뇨, 못 먹는 거 없습니다.”
다른 안주는 집어 먹으면서 브로콜리에만 손을 대지 않으면 어떠한 의심을 살까 봐 젓가락을 자주 들지 않고 있던 터였다. 이번에 먹어보라고 권유받은 것이 주꾸미라 다행이었다.
영웅은 조금 전 채언이 그랬던 것처럼 주꾸미에 초장을 찍지 않고 입으로 가져갔다. 날 것도 아니고, 브로콜리와 한 접시에 담겨 있었지만 브로콜리 맛이 나지 않아서 웃는 얼굴로 주꾸미를 씹을 수 있었다.
혜옥은 밝게 웃는 영웅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이 아까와 달리 살짝 풀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잘 먹는 거 보니까 내가 기분이 너무 좋다. 자, 한 잔 더 마실까요?”
혜옥의 말에 영웅이 공손히 술이 든 병을 들었다. 두 사람은 가득 찬 잔을 부딪친 뒤 인삼주를 마셨다. 잔이 비기 무섭게 혜옥은 양 손바닥을 착! 부딪쳤다.
“자아, 이제 술을 조금 편하게 마실까요? 내 스타일이 그래서. 매번 따라주지 말고 앤드류도 마시고 싶을 때 그냥 이렇게 따라 마셔요.”
혜옥이 곧바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에 당황한 영웅은 채언에게 무언의 도움을 구했다. 정말 내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그냥 마셔도 돼요?
곤란해 보이는 영웅의 얼굴에 채언은 열심히 혜옥의 말을 해석해보기 시작했다. 자신 또한 어른들과의 술자리를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지라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혜옥은 더는 술이 마시고 싶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영웅을 배려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부터는 마시고 싶을 때 따라 마시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채언은 영웅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더 마시지 말아요. 무언의 메시지와 함께.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옆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채언은 절반이나 비어버린 커다란 인삼주 병을 보다가 손에 든 컵 표면을 슥슥 문질렀다.
유리병에 인삼주를 채워놓고 마시다가 또 채운 것이 세 번째였다. 송이주는 동난 지 오래였다. 술상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비운 술이 남은 술보다 많았다.
분명 영웅에게 술을 더 마시지 말라고 신호를 줬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컵을 내려놓은 채언은 영웅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다가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풀린 눈으로 웃고 있었다.
당신 눈이 풀렸는데요? 라고 말하면 영웅이 민망해질 것 같아서 채언은 겨우 다른 말을 생각해냈다.
“으음, 주꾸미 맛있죠?”
술을 그만 마시라고 다시 한번 신호를 줘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아직은 괜찮아 보였지만 더 취하면 영웅이 혜옥에게 노란 띠와 관련된 이야기를 털어놓을지 몰랐다.
“네에, 맛있어요.”
“아, 정말요? …맛있어요?”
“채언 씨도 먹을래요? 내가 먹여줄.”
“아니에요! 저 배불러서요. 알잖아요, 저 오늘 많이 먹었어요.”
평소처럼 서로 이것저것 먹여주던 버릇이 튀어나오기 전에 채언은 서둘러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저는 아직 브로콜리도 더 먹어야 하고요. 아니, 먹고 싶고요. 왜냐면 브로콜리가 너무 맛있어서.”
하지만 채언의 마음도 모르고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곧바로 혜옥을 돌아보며 느린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잡아 오신 거죠? 파는 걸 사 오셨다고 해도 믿겠어요.”
영웅의 말을 듣고 웃던 혜옥은 인삼주를 홀짝인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맞아요. 사실은 사 온 거예요.”
“네? 그럼 아저씨가 잡은 건요?”
브로콜리를 집어 가지고 오던 채언의 젓가락에서 브로콜리가 떨어졌다. 술 때문에 반 박자 느리게 혜옥의 말을 이해한 영웅은 뒤늦게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주꾸미가 잘 안 팔리길래 아줌마가 장난 좀 쳐봤어.”
채언은 초장 접시에 빠트린 브로콜리를 건져 올리며 웃었다.
“잘 먹고 있는걸요. 맛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아저씨가 낚시해서 잡아 오신 건 줄 알았어요.”
“사실은 아저씨가 매년 주꾸미 철마다 친구랑 배 타고 낚시를 가셔. 올해는 낚시는 건너뛰고 사 온 건데 맛이 괜찮다니까 다행이네.”
“올해는 왜 못 가셨어요?”
“항상 같이 가던 친구 딸이 결혼을 했거든. 그 집 사위가 바다낚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저씨가 자리 양보해줬지. 대신 드라이브 가는 김에 한 박스 가득 사 왔어.”
“그러셨구나. 그래도 매년 가시던 건데 아쉬우셨겠어요.”
혜옥은 웃으며 주꾸미가 담긴 그릇을 맞은편으로 조금 더 밀어주었다.
“괜찮아. 아저씨 낚시야 나중에 가면 되지. 그나저나 입에 맞으면 철 지나기 전에 더 사서 좀 보내줄게, 이거 해 먹을 수 있겠어? 조금만 손질해서 샤부샤부 해 먹어, 채언아.”
“제가 손질할 수 있을까요?”
“그럼. 엄청 쉬워.”
주꾸미를 하나 집어 먹은 채언은 조금 전에 건져 둔 초장에 구른 브로콜리도 입으로 가져가려 했다.
“채언 씨.”
그때 영웅의 손이 채언의 손목을 잡았다.
“네?”
젓가락에 들려 있던 브로콜리가 영웅이 내민 앞접시에 툭 떨어졌다.
“이거 방금 저기에 빠졌잖아요.”
영웅을 보던 채언이 그의 시선을 따라 앞접시와 초장 그릇을 번갈아 보았다.
“매워요.”
걱정 담긴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채언은 몇 가지 반찬 실험을 통해서 그가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바 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안 매워요.”
혜옥은 맞은편의 두 사람을 보다가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는 매운 걸 못 먹는구나?”
“예?”
영웅은 빠르게 고개를 젓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서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분명 자신은 조금 전 아주 조용히 채언에게 속삭였는데,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 혜옥이 자신을 꿰뚫어 보니 당황스러웠다.
이상하게 오늘 혜옥과 마주치자마자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 얼굴을 마주했던 사이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아까부터 묘하게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오늘 정신을 바짝 차린 탓에 큰 실수 없이 저녁 식사를 마무리 지었고, 분위기 좋게 술자리도 이어 가고 있었다. 이까짓 초장 때문에 매듭을 잘못 지을 수는 없었다. 혜옥에게 초장도 못 먹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저는….”
영웅은 접시 위의 브로콜리를 노려보았다. 초장이 잔뜩 묻은 브로콜리는 딸기 시럽을 뿌린 디저트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먹을 만해 보였다.
“아뇨.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좋아해서요.”
다부진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젓가락을 들었다.
“어, 그거 뭐 하려고요? 잠깐만요!”
채언이 말릴 새도 없이 새빨간 브로콜리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형! TV가 꺼졌어, 내 다리에 눌려 가지고! 이거 다시 켜주면 안 돼? 전원 버튼 누르니까 까만 화면에 외부입력만 뜨는데!”
“어? 어어, 건영아, 옆에 다른 버튼 눌러봐봐.”
“벌써 눌러봤는데 이상해! 켜지긴 켜졌는데 이번에는 소리가 안 나와!”
“응, 알겠어. 잠깐만!”
갑자기 거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없이 대답한 채언은 서둘러 영웅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몇 번 입을 우물거리던 영웅은 꿀꺽 입에 든 것을 삼키더니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므가요?”
“안 매워요? 그리고, 그, 괜찮아요?”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는 채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술을 마셔서 혀가 둔해진 건가? 말하는 거 보니까 이미 마비된 것 같은데, 정말 괜찮나? 지금 자기가 뭘 먹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채언아.”
“네?”
영웅의 풀린 눈을 들여다보던 채언은 혜옥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저쪽 TV 얼른 켜줘야 할 것 같은데? 아이고, 난리 났다. 저 드라마 요즘에 둘이 꼬박꼬박 챙겨보는 거라.”
채언은 거실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웅의 얼굴과 거실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어지는 채언의 등을 보며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은 혜옥은 영웅에게 잔을 내밀었다.
“한잔할까요?”
“네.”
스읍, 스읍. 하. 자꾸만 터져 나오는 영웅의 작은 숨소리 뒤에는 연거푸 인삼주 따르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영웅은 자신이 와인을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담금주는 잘 몰랐다. 그래서 이미 한참 전에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취한 그는 자신이 취한 줄도 모르고 술을 계속 마셨다.
인삼주는 영웅의 입에 잘 맞았다. 매운 기를 죽이는 데 술이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이 술잔을 들면 혜옥이 웃음을 지어주는 것을 보니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혜옥이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며 주량보다 더 마셨다. 그게 문제였다.
TV를 틀어주러 간 채언은 연속극 내용에 흥분한 건영과 충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아니, 형, 봐봐. 저 사람이랑 저 사람이 배다른 남매거든? 근데 저 남자가 저쪽 집안 회장이랑 결혼해서, 이제 남매가 아니라 부모 형제가 된 거야. 아니, 내가 뭐래. 부모 형제가 아니라 아빠랑 딸! 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말이 되네? 부모 형제.”
“그게 무슨 소리야. 남매가 어떻게 부모 자식 관계가 돼.”
“채언아, 너 요즘 드라마 본다더니 이것도 안 보고 뭐 했냐. 지금 건영이 얘가 이야기를 너무 압축했는데….”
충북의 열띤 설명을 들은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말도 안 되는 전개에 한두 장면만 직접 봐야겠다고 소파에 잠시 앉게 되었는데, 그것도 문제였다.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가 나올 무렵에야 채언은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렇게 충격적인 내용의 드라마는 오랜만이었다. 앞으로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영웅과 함께 보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니 낮에 재방송을 찾아보는 게 나을 듯했다.
“건영아. 이거…, 이 드라마 제목이 뭐라고?”
“재밌지? 완전 미친 드라마라니까. 내용이 진짜 이상해.”
“미친 드라마가 뭐여어! 고품격! 이런 건 고품격 드라마라고 하는 게 맞어.”
세 남자가 거실에서 떠드는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혜옥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영웅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반쯤 풀린 눈 밑이 붉었다. 머리꼭지까지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끔벅거리는 눈에는 사나운 기가 하나도 없었다.
“사장님. 제가, 제가 꼭, 같이 작은 오징어를….”
흔들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영웅은 식탁 위에 팔을 올린 뒤 손에 이마를 받쳤다.
주꾸미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는 영웅의 입에서는 아까부터 자꾸 타이니 오징어, 베이비 오징어, 작은 생선 등등 주꾸미를 대체할 여러 가지 단어가 나왔다.
그나마 오징어가 입에 붙은 이유는 채언이 해산물 스파게티에 가끔 오징어를 넣어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이거를, 잡아드릴게요.”
“그래요. 내년에는 꼭 저 사람이랑 낚시 같이 가 봐요.”
고개를 끄덕인 혜옥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취했다고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주는 술을 모두 마신 남자가 느릿하게 털어놓은 대답은 모두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채언의 이야기만 나오면 입꼬리부터 헤실헤실 풀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포도 농장에 오갈 때 채언과 영웅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몰래몰래 짓던 웃음과 다름이 없었다.
혜옥은 한창 더울 때도 만나기만 하면 꼭 붙어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마 포도나무 잎사귀도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었다.
희한하게 저쪽 소파에 앉아 채언을 붙들고 있는 남자 둘만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고.
그래도 그 둘이 그렇게 눈치가 없는 덕분에 오늘 술자리가 성공적이었으니 참 다행이었다.
“앤드류,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아뇨.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후우,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잘 좀 부탁할게요.”
네네, 잘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영웅을 보며 혜옥은 가뿐히 마지막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여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혜옥이 충북을 불렀다. 그러자 거실에 앉아 있던 세 남자가 쪼로록 고개를 돌려왔다.
“이제 갈 준비해.”
당신, 사위랑 낚시하러 간 그 친구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어, 라는 말은 웃음과 함께 꾹 눌러 참았다.
“죄송해요. 호텔까지 같이 가드리면 좋을 텐데.”
채언은 신발을 신는 혜옥과 충북에게 죄송한 마음을 듬뿍 담아 말했다.
“아니여, 차도 있고 내비 찍고 가면 금방인걸. 아효, 그나저나 집주인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일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전에 보니까 많이 마셔도 숙취는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혹시 내일 힘들어해도 제가 챙기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채언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영웅의 허리를 단단히 안으며 대답했다.
냉장고에 치즈가 얼마나 남아 있나 생각해 보는데 목 근처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고개를 돌려 영웅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어깨에 얼굴을 파묻어 버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스스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걸 보면 잠든 건 아닌 듯했다.
“형. 이거 맞지? 책상 위에 봉투는 이것밖에 없었어.”
복도 끝방에서 걸어 나온 건영이 호텔 카드키가 든 봉투를 흔들었다.
“어, 그거 맞아. 안에 카드 잘 들어 있나 한번 봐줄래?”
봉투를 열어 본 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있어. 이거 드리면 돼?”
“응. 사장님, 제가 주소 보내드린 메시지 보시면 호수도 적혀 있어요. 혹시 지우셨으면 다시 보내드릴게요.”
봉투를 건네받은 혜옥이 감동받았다는 표정으로 채언을 쳐다보았다.
“명절에 이렇게 대접받아본 게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네.”
“대접은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채언은 머쓱하게 웃었다. 심지어 충북과 혜옥이 머물 호텔까지 영웅이 준비한 것이었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영웅이었다.
그때 혜옥의 다정한 손길이 채언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채언이 덕분에 이렇게 인연이 닿은 거잖아. 혹시 내일 일어나서 취한 것 때문에 속상해하면 우리 갈 때 배웅까지 잘했다고 전해줘, 알겠지? 오늘 저녁도 너무너무 잘 먹고 갔다고. 이건 아까 말하긴 했는데 기억할까 모르겠네.”
입술을 달싹이던 채언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건영아, 형이랑 싸우지 말고 있어.”
“안 싸워요.”
“TV 너무 오래 보지 말고. 늦기 전에 얼른 자.”
“이따 하는 영화 한 편만 더 보고요.”
“내일 집 갈 때 빠트리는 거 없게 가방에 잘 챙기고. 알겠지?”
그 말에 건영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가 뭐, 책가방 챙기는 어린애도 아니고…. 네.”
“그래, 그럼 둘 다 내일 보자. 잘 자고. 응?”
“조심히 가세요. 호텔 도착하시면 연락해주시고요.”
“응, 그럴게. 여보, 이만 가자.”
충북의 팔에 팔짱을 낀 혜옥이 남은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목석처럼 서 있던 충북이 혀를 차며 걱정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통닭 한 마리 시켜주고 갈까? 얘들 이따 배고프면 어떡해.”
그 말에 채언의 입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깨에 기대고 있던 영웅이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채언은 반사적으로 그를 안은 팔을 추슬렀다.
“건영이 배고프다고 그러면 제가 시켜줄게요. 치킨 자주 시켜 먹는 곳 있어요.”
“아까 그렇게 먹었는데 배고플 리가 없잖아요.”
황당하다는 듯 내뱉은 건영의 말에 혜옥이 웃으며 충북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저씨가 걱정이 너무 많다, 그치? 여보 얼른 가. 우리가 가야 애들이 씻고 잘 준비를 하지. 갈게, 얘들아. 논다고 늦게 자지 말고 일찍 일찍들 자. 내일 보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건영아, 나가서 현관문 좀 열어드려. 문손잡이만 바로 누르면 돼.”
고개를 끄덕인 건영이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괜찮다고 만류하는 부부를 따라 건영이 함께 현관 복도로 나가자 복작거리던 신발장 앞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채언은 영웅의 머리카락에 볼을 문질렀다.
“라이언, 자요?”
조용히 묻자 느리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자꾸 뭐라고 하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요?”
영웅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채언이 휘청이는 그의 몸을 단단히 붙잡아 세웠다. 그러자 영웅이 깊은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으음.”
“어지러워요?”
어른들을 배웅하기 전에 그를 먼저 눕히려 했던 채언이었지만 영웅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손님들 앞에서 완전히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 같아서 억지로 눕혀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취한 와중에도 그의 목적이 혜옥과 충북에게 점잖은 태도로 배웅하는 것이었다면 실패였지만, 어쨌든 고맙기 그지없었다.
“왜요?”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영웅을 마주 보던 채언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웃었다. 웃는 채언을 보던 영웅이 하얀 뺨을 향해 돌진하는 찰나, 탓, 탓! 재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형!”
“어, 어?”
채언이 고개를 돌리자 뺨을 비껴 나간 영웅의 얼굴이 채언의 어깨에 부딪혔다.
“윽….”
바로 귀밑에서 들려온 신음에 채언은 사과 대신 그의 허리를 토닥여주었다.
“어쩌지? 용돈 받았어. 내일 아침에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아저씨가 주셨어. 이거 어떡해?”
건영이 상기된 얼굴로 지폐를 쥔 손을 내밀었다. 용돈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한 채언은 건영의 손에 쥐어진 돈을 보다가 미소 지었다. 어른에게 용돈을 받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어? 응.”
“잘했어. 얼른 들어와.”
손에 쥔 돈과 채언을 번갈아 보던 건영이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 안 복도 위로 발을 디뎠다.
“내 방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나와. 나도 이 사람 좀 눕혀놓고 올게.”
“도와줄게. 딱 봐도 엄청 무거울 것 같은데.”
건영이 어깨 옆을 기웃거리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완전히 힘 빼고 있는 게 아니라서 걸을 만해.”
건영이 영웅의 팔 한쪽만 거들어주어도 움직이는 데 수월하겠지만, 거실에 있던 사진을 전부 침실로 옮겨 놓은 데다가 그곳은 이제 완전히 영웅과 함께 사용하는 방이라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얼른 씻어. 영화 볼 거라며. 나도 다른 욕실에서 씻고 올게.”
“맞다, 영화! 알겠어.”
복도 끝방을 향해 걸어가는 건영을 보다 채언도 발을 떼려는 찰나였다.
“형.”
건영이 뒤돌아보며 채언을 불렀다.
“응?”
“그런데 이거, 돈.”
“지갑에 잘 넣어놔. 잃어버리지 말고.”
“아니, 이거 형이랑.”
“얼르은.”
“이따 다시 얘기해!”
건영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채언은 웃으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영웅의 몸을 부축하느라 걸음은 느리기 그지없었지만, 자꾸만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읏차!”
안고 있는 몸을 추스르자 영웅의 머리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으음.”
눈가를 찌푸린 영웅이 고개를 들더니 다시 옆에 있는 어깨에 얌전히 머리를 기댔다.
“뭐지?”
묘한 기시감에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취했으니까. 이렇게 하고 걸어가요. 우리. 넘어질까 봐 걱정돼요.’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어지러우면 제 어깨에 머리 기대세요.’
길거리에서 그와 붙은 채로 걷고 싶어 취한 척하기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때처럼 취한 척하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술 냄새가 너무 나는데….
아니면 무의식중에 그날을 기억해낸 걸까? 아까도 먼저 술을 마시게 된 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었으니까 가능성이 있었다.
채언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에 닿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의 느낌이 기분 좋았다.
불 꺼진 침실은 어두웠지만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 덕에 그럭저럭 앞이 보이기는 했다. 조심히 발을 옮겨 침대 옆에 다다른 채언은 대충 이불을 걷고 안고 있던 몸을 침대에 눕혔다.
“휴….”
영웅이 여기까지 스스로 다리를 움직여줘서 다행이었다. 자신은 그가 해주는 것처럼 커다란 몸을 번쩍번쩍 들 만한 힘이 없었다.
채언은 리모컨을 찾아 쥔 뒤 조명을 약하게 켰다. 혹시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나 영웅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천장에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영웅이 가늘게 뜬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 보였다. 표정이 평온한 것을 보아하니 어디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사장님이랑 아저씨 가셨어요. 이제 마음 놓고 자도 돼요.”
채언은 조용히 말하며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러자 영웅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쓸어주자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자려나? 채언의 손이 영웅에게서 떨어졌을 때, 영웅의 눈이 반짝 뜨였다. 뒤로 물리던 손을 멈칫한 채언에게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졸리면 그냥 자면 될 것을 아까부터 자신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할 일이 남았다는 듯 꿋꿋이 버티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안 졸려요?”
채언의 물음에 영웅에게서 느릿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야죠.”
“그러게요. 자야 하는데, 어어? 왜 일어나요?”
갑자기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는 영웅을 보며 채언이 따라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흔든 영웅은 눈을 꽉 감았다 뜨더니 조금 전보다 또렷해진 눈으로 채언을 보았다. 그래봤자 잔뜩 취한 상태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푸우, 내뱉은 숨소리 끝에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왔다.
“무울.”
“물이요? 목말라요? 지금 가져다줄게요.”
다리를 펴고 일어선 채언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채언의 손목을 잡아 왔다.
“내가, 가져다줄게요.”
스스로 물을 떠다 마시겠다는 건가? 손목을 당기는 힘을 따라 채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영웅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볼을 맞대왔다. 간지러운 느낌에 채언은 목을 움츠리면서도 맞닿은 얼굴을 떼지 않았다.
“약… 먹어야죠.”
나직한 목소리를 들은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채언은 오늘 자신이 여러 번 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또 웃고 있으니 하루 종일 웃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챙겨주려고요?”
말을 마친 채언은 말아 문 입술을 이로 꾹꾹 눌렀다.
마음대로 약을 먹지 않아 고생한 날부터 영웅은 전보다 더 자신을 챙겨주었다. 알약을 삼키는 것까지 꼭 확인한 뒤에야 출근했고, 잠자리에 들었다.
채언은 그의 감시 대상이 된 것 같아 부담스럽다거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서운한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영웅에게 귀찮은 짐 덩어리가 된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관심사 1순위가 된 것 같아서 챙김을 받는 것이 좋았다.
‘내가 도와주게 해줘요. 미안해하지 말고요.’
미안해하지 말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듣고 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조금도 비틀지 않고.
채언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영웅의 손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피부에 닿는 체온이 뜨거웠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술 냄새.”
“…응?”
웃음기 담긴 채언의 조용한 혼잣말에 영웅의 느릿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렇게 취한 와중에도 자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기분이 좋아서 채언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채언은 조심히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까 약을 삼킨 뒤 물 묻은 입술로 뽀뽀를 해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던 영웅의 얼굴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눈을 꼭 감았으면서, 자신이 씻으려고 욕실로 가려니 또 부스스 눈을 떠 비틀비틀 따라오던 그였다. 결국 같이 바깥 세면대 앞에 앉아 이만 닦고는 다시 침대로 데려가 눕혀주어야 했다.
괜히 또 잠을 깨울까 봐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지도 못하고, 양말만 벗겨준 뒤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어주었는데 영웅이 그대로 불편한 기색 없이 잠들어 다행이었다.
조심히 침실 문을 닫기 무섭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충북의 번호가 뜬 액정을 확인한 채언은 서둘러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 뒤 거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보세요. 호텔 잘 도착하셨어요?”
-응, 채언아. 우리 잘 도착했어. 그런데 여기 너무 좋다. 구경하느라 전화도 이제 걸었네. 완전히 대통령 방 같어. 살다 살다 이렇게 좋은 방은 처음 본다야.
미소 지은 채언은 입 앞을 손으로 가리며 전화를 이어나갔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세요.”
-그래, 그쪽에는 별문제 없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일찍 일찍 자. 채언아. 위험하게 밤늦게 어디 나가지 말고.
채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이미 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어요.”
그 뒤로 네, 네, 대답하며 전화를 이어가던 채언은 잠시 후 전화가 끊기자 조용히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렸다. 거실 한편에 서서 물끄러미 트리를 바라보던 채언은 손바닥으로 팔을 가만히 쓸어 문질렀다.
끝방 앞에 다다른 채언이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형? 하고 묻는 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야. 들어갈게.”
“응.”
채언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건영이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뭐 보고 있었어?”
“이거, 여기에 뒀네? 형 방에다가.”
채언의 시선이 액자 모서리를 매만지는 건영의 손끝을 향했다. 건영과 어깨를 맞대고 찍은,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원래 건영과 찍은 사진은 거실 장식장에 다른 사진 액자들과 함께 있었다. 복도 끝방은 영웅과 침실을 합친 후 자주 들어올 일이 없었으므로 평소에는 다른 손님방처럼 깨끗이 비워두었기 때문이다. 액자는 빈방에 두는 것보다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실에 두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급히 영웅과 찍은 사진들을 치우면서 건영과 함께 찍은 사진만 거실에 덩그러니 놔둘 수가 없었다. 거기다 혹시 오늘 초대한 세 사람 중 누군가 방 구경을 시켜달라고 하면 보여줄 곳이 있어야 했다. 가장 적절했던 곳이 복도 끝방이었고, 그게 건영과 찍은 사진이 이곳 책상 위에 놓인 이유였다.
조금이나마 생활감 있는 방처럼 보이기 위해 선인장도 액자 옆에 나란히 두었고, 붙박이장 안에는 옷가지도 몇 개 정리해서 넣어두기까지 했다.
“그럼 내 방에다 두지, 어디다 두겠어. 내 건데.”
말을 마친 채언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쨌든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 멋쩍었다.
그때 액자를 매만지고 있던 건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응?”
“서울에 계속 있을 거야?”
“그렇겠지?”
“여기서 무슨 일, 해?”
“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채언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집주인이 상사라고 했잖아. 전에, 예전에.”
“그게….”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건영의 얼굴에 채언은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분명 백화점에서 건영을 만났을 때 영웅을 자신의 상사라고 소개했었다. 혜옥과 충북도 그렇게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 형은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해서.”
그때는 그게 맞는 말이긴 했지만, 지금은 영웅에게 월급을 받는 처지가 아니니 그를 상사라고 말하기 난처했다.
채언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퇴원한 이후로 누구도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물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아주 나중일 거라고 생각했고.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영웅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일 안 해.”
“일을 안 한다고?”
건영의 얼굴에 궁금증이 이는 것이 보였다. 채언은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응. 그만뒀어.”
뭐라 말하려던 건영의 입술이 벌어지다가 그대로 다물렸다. 줄곧 마주하던 시선이 비껴 나는 것에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숙인 채 책상을 문지르던 건영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작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언은 허리를 숙이며 건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영아 뭐라고?”
“아파서…, 아파서 그만둔 거야?”
“어?”
채언은 건영의 말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안 좋아?”
“건영아.”
하지만 이내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니야, 그런 거.”
채언은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영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액자 속의 두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다.
함께 붙어 있던 여름 동안은 궁금해하지 않던 것을 건영은 왜 지금에서야 물어보았을까.
채언의 시선이 고개 숙인 건영의 머리꼭지에 닿았다. 아직 뭐 하나 가벼워진 게 없구나. 아릿한 감정이 머문 까만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감겼다 뜨였다.
채언은 건영의 어깨를 주무르다 팔을 쓸어주었다.
“나 많이 좋아졌어.”
건영의 시선이 잠시 채언의 얼굴에 머물다가 금방 사진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언은 책상 위의 액자를 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잘 세워놓았다.
“그리고 아파서 일 그만둔 거 아니야.”
“그럼?”
“다른 일 해볼까 해서.”
나 좀 봐봐. 말하며 채언은 건영이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를 잡아 돌렸다.
“그런데도 내가 여전히 여기서 지내는 이유는…. 여기 집주인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 내 사정이 어떤지도 알고 있고.”
둘러 말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빈약한 설명이기는 했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언은 건영과 눈을 마주했다. 건영이 또 다른 물음을 덧붙여 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눈을 깜빡이던 건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한 사람이네. 아줌마랑 아저씨처럼.”
싱거운 반응에 오히려 진지해진 쪽은 채언이었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건영아, 왜?”
“아무 일도 없는데.”
“대동에서 지내는 거 불편해?”
“아니야.”
불편하지 않다는 대답과 달리 말하기를 머뭇거린 기색을 분명히 읽어낸 채언은 잠시 가만히 건영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 아니잖아.”
“괜찮아.”
“장건영.”
“정말 괜찮아.”
“건영아.”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건영은 눈가를 찡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채언은 섣불리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책상 위에 한쪽 팔을 올린 건영은 한참이나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 계속 있어도 되나 싶어서.”
또다시 다물린 입술을 짓씹던 건영은 겨우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 있는 게 좋은데, 좋긴 한데, 아저씨랑 아줌마는 그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건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 소리에 채언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나 월급도 받았다? 얹혀살고 있는데 일한다고 돈도 주셔. 사실 내가 무작정 찾아간 거잖아. 제대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뭐, 뭐 그전에 크게 무슨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고, 거기서 사람 구한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무작정. 두 분은 내가 안 귀찮을까? 안 싫을까?”
“건영아.”
“굴러들어 온 돌이잖아. 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데. 애초에 일을 그렇게 만든 게 나인데.”
“장건영. 형 봐봐.”
채언은 건영의 어깨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눈이 마주친 건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형은 이제 정말 괜찮아? 요즘에는 악몽도 안 꾸고 잘 자? 정말로 나….”
채언은 입술을 깨물며 건영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안 미워?”
품 안에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채언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건영의 머리를 더 끌어안자 덜 마른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물기가 옷에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아직 축축한 건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 미워.”
채언은 심장이 아릿했다. 건영은 그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이 드디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동안. 불안정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포도 농장을 찾아갈 때마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자신은 들쑥날쑥 요동치는 마음을 천천히 안정시켰다. 그런데 건영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건영은 아주 예전과 같은 태도로 옆에 있어 주었으니까.
괜찮아졌을 거라고 섣불리 짐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이제는 모든 게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
퇴원한 뒤에 영웅과 그때 일에 대해 여러 번 대화했는데 건영과는 함께 지내면서도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병실에서 짧았던 대화가 끝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복잡하게 갈라진 감정의 실금에 신경 쓰지 않게 건영이 묻어준 것이었다.
“너 안 미워, 건영아. 정말로.”
울음을 참는 듯 거칠게 숨을 쉬는 건영의 등이 오르내렸다.
“미안해. 너랑 먼저 다시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내가 무심했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던 예전에는 먼저 덥석덥석 안겨 오던 건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축 늘어뜨린 팔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네가 일을 그렇게 만든 거 아니야. 너 때문에 내가 그랬던 것도 아니고. 나쁜 건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그땐 내가 생각을 잘못 했어. 나 혼자 무거우면 되니까 다들 편안했으면 했어. 너도 사장님도 아저씨도 전부 다. 혹시 나중에 누가 됐든, 누구라도 자기 잘못이었다고 스스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심한 말을 했어. 정말로 네가 미웠던 거 아니야. 그랬는데….”
채언은 건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가 말을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렇지? 너한테 제대로 말하고 사과했어야 하는데. 내가 아팠던 만큼 너도 많이 아팠을 거라고 먼저 알아줬어야 하는데.”
“아니야. 나한테 사과하지 마….”
가만하던 건영이 천천히 손을 올려 채언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과할 일 아니잖아.”
“맞아, 사과할 일.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거, 나쁜 말 한 거, 너 눈치 보게 만든 거. 그건 다 내가 너한테 사과해야 하는 일이야.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어. 미안해.”
말없이 옷자락만 붙잡고 있던 건영이 팔을 들어 채언의 허리를 안았다.
“너 미워한 적 없어.”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눈을 감은 채언은 건영의 거친 숨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서로에게 스민 물이 천천히 말라 갔다.
진정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 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응.”
채언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
“고마워.”
“뭐가?”
“이렇게 말해줘서.”
건영에게서는 코맹맹이 소리가 났지만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채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몸 안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혼자 걱정하지 마. 알겠지?”
“응.”
“사장님이 주시는 월급도.”
“하지만….”
“두 분이 불편하셨다면 애초에 이렇게 대해주시지 않았을 거야. 너뿐 아니라 나도. 아까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셨잖아?”
그 말에 고개를 든 건영이 하,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채언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요즘 드는 생각이 있는데.”
“뭔데?”
코를 훌쩍이며 묻는 건영에게 채언은 곧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잠시 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깐만.”
갑자기 덥석 얼굴을 잡아 오는 손길에 건영의 눈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실렸다.
“많이 컸다, 너?”
“응?”
“어릴 때는 쪼끄맣더니.”
“컸지 그럼. 이제 내가 형보다 클걸?”
“갑자기 고맙네.”
“뭐가?”
채언은 대답하지 않고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건영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젖살 가득한 어린 얼굴이 생각났더랬다. 건영이 기억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 또한 비슷하게 동그란 얼굴이었을 것이다. 둘 다 몸이 이만큼 자랄 때까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준 것은 세상에 단둘뿐이었다.
자라는 과정을 다정하게 기록해 남겨준 부모는 없었지만, 그 오랜 모습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채언은 지금 자신이 이곳에 두 발을 딛고 존재하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요즘 드는 생각이 그거야? 나 많이 컸다는 거?”
“아니?”
“그럼 뭔데? 무슨 생각 하는데?”
“어떤 생각을 하냐면….”
채언은 입술 안쪽 점막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꼭 어떤 서류나 뭐든, 그런 게 없더라도 말이야. 가족,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
가족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 중 누구와도 피가 섞이지 않았고, 서류로 엮인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면 불안하지 않고 더없이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억지로 얽힌 인연보다 이런 마음이 더 자연스러운 관계의 형태를 빚어내는 것 아닐까.
“네가 내 동생인 것처럼.”
눈꺼풀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건영의 눈동자에 물기가 늘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꾹 다물린 입꼬리가 아래로 잔뜩 내려가고, 동시에 팡 터져버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건영의 얼굴을 잡고 있던 채언의 손등도 덩달아 축축이 젖어 들었다.
“왜 울어어.”
채언은 울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함께 젖어 든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눈물을 훔쳐 줄 뿐이었다.
“휴지 가져다줄까?”
“응.”
채언은 코를 훌쩍이며 대답한 건영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 가지고 왔다. 한참이나 울고 난 건영의 얼굴이 붉었다.
“물 한 잔 마시자. 잠깐만 기다려.”
채언이 방을 나선 뒤 건영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다시 혜옥과 충북을 만나야 하는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바라며 찬물로 열 오른 얼굴을 식혀야 했다. 물은 차가웠지만 후련하고 개운했다.
건영이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왔을 때 채언은 물컵을 들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거 마셔.”
“내 물 가지러 간 거였어?”
터벅터벅 걸어온 건영은 채언의 옆에 앉아 물컵을 받아들었다. 군말 없이 물을 마신 다음에는 양손으로 컵을 꼬옥 쥔 채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깨에 닿는 무게에 채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 울었어?”
“응. 그런데 나 조금만 더 안아줘.”
“그러지 뭐.”
채언은 건영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형은 너무 착해.”
건영의 어깨를 쓸어주려던 채언의 손이 멈칫했다.
“…나 안 착해.”
“착해.”
“안 착해.”
“나한테는 착한 사람이야.”
채언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건영의 머리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착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좋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상처 준 것을 뒤늦게 사과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평온해져 가는 만큼 건영 또한 평온해지기를 바랐다.
그랬을 뿐이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침묵이 어색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입을 연 것은 건영이었다.
“형. 나 어떡하지?”
“왜?”
건영은 손에 쥔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
채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영을 돌아보았다.
“나 방금 전에 형이 해준 말 듣고, 형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일부러 심한 말 했다는 거.”
“응.”
“그걸 너무 쉽게 이해해버렸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이해했다는 말에 채언의 손가락이 움칫 떨렸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 이제 괜찮아. 정말로 무슨 마음인지 알았으니까. 그래서 문제야.”
“그게 무슨 말이야?”
물컵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던 건영이 채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나도 똑같이 그랬어.”
채언은 건영의 붉은 눈가를 보다가 물었다.
“누구한테?”
말하기를 머뭇거리던 건영은 컵 바닥에 찰랑대던 조금 남은 물을 목 뒤로 넘겨버렸다. 입술을 훔친 손등에 물기가 묻어났다.
“동생한테. 전에 살던 집… 동생한테.”
건영은 입술을 깨물다가 또다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동생이라는 말에 채언은 건영의 졸업식 날 단란해 보이던 가족의 모습을 떠올렸다. 건영을 제외한 세 사람. 부부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 채언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 집…, 완전히 나오던 날에 이젠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 그러면 안 된다고. 자꾸 전화가 와도 안 받았어. 이젠 내가 핸드폰을 바꿔서 걔가 다른 전화기로 전화 걸어 봤자야.”
빈 컵이 침대 위를 뒹굴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건영은 채언의 몸을 꼭 껴안으며 어깨에 볼을 기댔다.
“형아 말대로 난 이제 다 컸지만, 걔는 진짜 애기야. 아직도 어린애란 말이야.”
건영이 보지 못하는 사이 채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애가 안쓰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채언은 건영이 안쓰러웠다.
차라리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쉽게 이해했다는 건 그만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거니까. 영영 모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
채언은 혀끝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애틋한 손길로 건영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린애라며.”
“응.”
“내가 너한테 그랬던 것만큼 심하게 말했어?”
고개를 든 건영은 열없이 웃는 채언의 얼굴을 보다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건…, 아니.”
건영의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네 형 아니니까 나한테 연락하면 안 된다고 했어. 내 방문 두드려도 이젠 못 볼 거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심한 거 맞는데?”
채언은 건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머리카락은 다 말라 있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지금 걱정하는 거야?”
“나랑 달라. 걘 너무 어리니까 그 정도도 충격적일걸. 나 집 완전히 나오기 전날에도 밤에 혼자 자는 거 무섭다고 찾아오던 애야.”
“그래도 하나도 안 심해.”
나나 그 사람들이 너에게 한 짓에 비하면. 채언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냈다.
“나중에 연락해 봐.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다음에. 네 마음부터 추스르고 나서.”
건영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떨어진 채언의 손이 침대 위를 짚었다. 손날에 차가운 컵 표면이 닿았다.
이제는 양부모를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는 건영이었다. 전에 살던 집. 그 집. 집마저도 어렵게 입에 올렸다. 양부모의 집을 나올 때 그들과 사이가 얼마나 벌어졌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어린아이 한 명과는 사이가 돈독했던 듯했다.
채언은 갑작스러운 형의 빈자리에 당황했을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의 부모는 그들의 상황을 자식에게 이해시키느라 꽤나 애를 먹을지 몰랐다. 채언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꽤나 애를 먹었으면 했다.
“너도 어려. 그러니까 너부터 챙겨, 아프지 말고.”
“나 아픈 데 없어.”
더불어 채언은 예전에 딱 한 번 얼굴을 본 그 아이가 겪었을 혼란스러움과 당황의 결과가 결국 그의 부모를 향하기를 바랐다. 건영은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니니까 원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됐다.
채언은 자신이 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손을 말아 쥐었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까 아저씨가 하신 말은 뭐야, 그럼? 포도밭에 귀신 어쩌고 하던 거. 그래서 네 포지션을 과일가게로 옮긴 거야?”
“아, 그건! 형, 내가 포도 딸 때 옆에 뭐가 슥 지나갔단 말이야.”
“뭐가 지나갔는데? 고양이? 강아지? 참새?”
채언은 충북이 그랬던 것처럼 건영의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재보고 양 볼을 잡아 주물렀다.
“나 열 안 난다고오.”
건영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채언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그리고 동물 아니야. 나도 딱 한 번 봤어. 아저씨는 내가 굴러다니던 포도 봉지를 본 거 아니냐 그랬는데.”
“그랬는데?”
“흠….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건 뭐야. 장건영, 만약에 너 또 그런 게 보이면 나한테 얼른 말해. 알겠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채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환청이 들리거나 환시가 보이는 것은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었다. 전에 영웅이 그런 증상 때문에 한참이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딱 한 번 그랬다니까. 따악 한 번.”
건영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지만 괜한 걱정을 한다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그런 일 있으면 형한테 말할게.”
“그래, 꼭 말해줘야 돼. 걱정되니까.”
불퉁하게 나와 있던 건영의 입술이 양쪽으로 활짝 벌어졌다.
“웃기는.”
눈을 가늘게 뜬 채언이 건영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뭔가 잊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채언이 건영을 휙 돌아보았다.
“잠깐만, 그런데 아까 네가 영화 보자고 했잖아. 시작할 시간 지난 거 아니야?”
“맞다. 영화! 정확한 시간 기억 안 나는데.”
“일단 나가자.”
물컵을 챙긴 채언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건영이 따라 일어섰다.
책상 옆을 지나치던 채언의 머릿속에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건영이 사과를 준 날 가지고 왔던 두 개의 액자 중 지금 이 방에 없는 나머지 하나의 행방이었다.
채언의 발이 멈추자 따라 걸음을 멈춘 건영은 채언의 시선이 머무른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위에 뭐가 있나 살피던 건영이 물었다.
“형.”
“응?”
“저 선인장은 모양이 왜 저래?”
건영의 턱짓을 따라 액자 옆 선인장을 본 채언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예전에는 작은 만두 두 개가 올라간 것처럼 앙증맞다가 조금 더 자라 토끼처럼 깜찍한 모양새를 유지했던 선인장이었다.
“저거 꼭 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뭐가 뽕뽕 올라오더니 만세 한 사람이 가운뎃손가락을 쳐든 형태가 되어버렸다.
“원래 엄청 귀여웠는데…. 애가 좀 삐뚤어졌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채언은 방문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그래도 괜찮아. 잘 자라고 있으니까.”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은 채언은 빔프로젝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이 TV를 켰을 땐 이미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지난 후였다. 혹시 몰라 핸드폰으로 찾아보니 드라마를 볼 때 사용하는 어플에 건영이 보고 싶어 했던 영화가 있었다. TV 앞에 앉아 시작한 지 한참 지난 영화를 보느니 빔을 켜고 시작부터 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집주인 자는데 바로 옆방에서 영화 봐도 괜찮아? 스피커 소리 많이 줄일까?”
“이 방은 괜찮아. 방음이 잘 되어 있거든. 밖에서 큰 소리가 나도 여기서는 잘 안 들려. 여기서 큰소리가 나도 밖에서는 잘 안 들리고.”
“오오, 이 아파트에는 원래 이런 방이 하나씩 있어? 집 지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잘 만들었네.”
리모컨을 눌러 영화를 검색하던 채언은 대답하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영웅의 개인적인 일로 방음 처리를 한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집에는 이런 방이 존재할 리 없었다.
“부엌에 팝콘 있는데 팝콘 먹을래?”
채언은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건영에게 물었다. 자동차 극장에 다녀온 뒤로 부엌 찬장에는 팝콘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웅이 주문한 것이었지만 그걸 먹는 사람은 대부분 채언이었다.
“난 별로 생각 없는데, 이도 닦았고. 형 먹고 싶으면 먹어.”
“아냐, 나도 됐어. 그럼 튼다?”
어두운 방 안의 하얀 벽 위로 영화 제목이 떠오르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형.”
진짜 영화관에 온 것처럼 건영이 속닥였다.
“응?”
채언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맞춰 목소리를 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건영의 몸이 어깨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지난번 영웅과 영화관 약속을 미룬 뒤로 자동차 극장에는 몇 번 더 가보았지만, 아직도 영화관에는 가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건영과 이렇게 마주 보니 영화관에 가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리 둘이 이렇게 영화 보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네.”
둘이 함께 살 때는 TV에 나오는 영화 채널을 틀어 두고 본 적이 있었다. 영화 채널에서는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만 나왔다. 달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터라 언제 틀어도 몇 장면은 이미 눈에 익은, 한 편을 다 본 적은 없는데 내용은 전부 알 것 같은 진부한 영화들이었다.
“그때 집에 있던 TV 되게 구렸는데, 그치. TV 뒤통수가 이만했잖아. 그게 언제 적 거야.”
건영이 손으로 두꺼운 TV 모양을 만들며 말하자 채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쓸 만했잖아.”
한 편을 놓쳐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 없는 일일 드라마처럼 뻔한 영화들에서는 예술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깊이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무겁지 않았다. 영화가 재미있었냐고 누가 물으면 재미있었다고 한두 장면쯤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는 억지로 감상을 꾸며내지 않아도 서로 툭툭 던지는 말에 공감해 웃을 수 있었다.
“그렇긴 해.”
두 사람은 그때처럼 마주 보며 웃었다. 벽에 반사된 푸른빛이 뺨에 닿아 환한 웃음이었다.
펑 터지는 불꽃이 화면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하….”
주인공이 좀비를 총으로 쏘아댈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던 채언은 옆에서 들려온 탄식에 어깨 힘을 뺐다.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댄 건영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촉촉해진 눈가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싱숭생숭해.”
“감상이 너무 간단한데 공감되네.”
“어쩌지? 노래도 좋다. 으으…, 이대로 못 자겠는데.”
건영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방금 본 영화의 여운 때문에 잠들기 아쉬워진 것은 채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각자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이 세 번 바뀌고 나서야 재생이 멈췄다. 방금 본 영화의 포스터가 벽면에 나타나자 채언은 건영에게 물었다.
“다른 거 한 편 더 볼까?”
“지금 몇 시지? 나 한 편 더 보고 싶긴 한데 두 시간짜리 또 보면 중간에 졸릴 것 같아.”
“졸리면 보다가 끄고 자면 되지.”
“중간에? 그럴까? 형, 그럼 이번에는 가벼운 거 보자.”
“그래. 가벼운 거 보자.”
채언은 코밑을 훔치며 리모컨을 들었다.
“뭐 볼까?”
어플 홈 화면으로 돌아가자 새로 들어온 영화와 그동안 채언이 본 프로그램 취향에 맞춘 추천 작품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저건 뭐야? 재밌어?”
“어떤 거?”
“저기 밑에 재생 바 길게 나와 있는 거. 형이 요즘 보고 있다고 쓰여 있는 것 중에 제일 끝에 있는 거. 보다 만 거면 저거 볼래?”
리모컨을 든 채언은 건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거? 저건 영화 아니고 드라마인데.”
건영이 가리킨 것은 채언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준 미국 하이틴 드라마였다. 영진에게 관계 정립에 관한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드라마는 다음 편을 보지 못하고 방치해 두고 있었다.
“건영아.”
채언은 화면을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옆에서 건영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드라마 포스터만을 바라보았다.
“이거 드라마 이야기인데.”
“저 드라마?”
“응.”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침을 꼴깍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저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이랑 학교 밖에서 몇 번 만났거든?”
“갑자기? 아니 뭐, 어쨌든 그래서?”
“그러다 키스도 했어. 그럼 둘은 사귀는 거 맞지?”
“으응?”
같이 보자고 드라마 내용을 설명해 주는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질문이 튀어나오자 건영이 킥킥 웃었다.
예전에도 채언은 함께 드라마를 볼 때면 이런 질문을 하고는 했다. 요즘에는 충북이 그러고 있었는데, 저녁마다 TV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게 고정적인 하루 일과가 되었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게 자신의 주변에는 드라마 광들뿐이었다.
“난 저거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 상황을 더 말해 봐봐. 갑자기 그런 질문이 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여자 주인공 친구가 사귀자는 말이 없었으면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막, 빨리 관계 정립부터 하라고 그랬어.”
“그 친구는 뭐, 계략을 꾸미는 그런 나쁜 캐릭터야? 곧 주인공 뒤통수칠 것 같아?”
“아니, 그렇진 않아. 주인공이랑 엄청 친해.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착해.”
“그래? 그럼 사귀는 거 아니네.”
“뭐? 왜?”
채언의 몸이 건영 쪽으로 기울었다. 건영의 대답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이미 영웅에게 반지를 선물할 마음을 먹고 있던 채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부정적인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친한 친구들이 그렇게 말할 때는 이유가 있거든.”
채언의 입술이 마르는 것도 모르고 건영은 태연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 많잖아. 가볍게 몇 번 만나다가 자고, 그런데 사귀는 건 아니고. 마음이 안 맞아도 다른 쪽으로 잘 맞으면 그럴 수도 있지. 키스는 그것보다 더 간단하니까.”
건영은 어깨를 으쓱인 뒤 말을 이었다.
“의외로 흔하다니까.”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진이 했던 말보다 건영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정말 그런 게 흔해?”
“응. 근데 형이 이러는 거 보면 저 드라마 엄청 재밌나 봐?”
태연하기 그지없는 건영의 모습에 채언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그러지? 먼저 마음이 맞아야 스킨십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뭘 하든 모든 일에 순서가 있는 것처럼.
한참 혼자 생각하던 채언은 별안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건영을 쳐다보았다.
“너….”
“엉?”
“너도 그래?”
“뭘?”
하암, 하품한 건영이 입술을 두드리며 물었다. 채언은 별다른 말 없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건영의 시선을 피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멀뚱한 얼굴로 빔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건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뭐야! 아냐, 나는! 그런…, 그러진 않아!”
드라마 이야기가 왜 갑자기 이런 쪽으로 튀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건영은 옆에 접혀 있던 담요를 들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성적인 단어를 내뱉은 것도 아니고 저급한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정도는 친구들과 길 걷다가도 할 수 있는 수위 0에 가까운 대화였지만 형과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좀 이상했다. 어차피 둘 다 성인이고 각자 알아서 할 거 다 해봤을 텐데도 그랬다. 생전 이런 쪽으로는 먼저 묻지도 말하지도 않던 사람이 이러니 당혹스러웠다.
채언을 흘끔거리다 눈이 마주친 건영은 헛기침을 하며 담요로 볼을 가렸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그래…, 그러지 마.”
“안 그런다니까!”
건영은 담요 자락을 꼭 쥔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 말고! 내 주변에서 그런다고 해서 말한 거야, 나는.”
“네 친구들이 그래?”
“나도 몰라. 몰라 몰라! 난 안 그러니까.”
그대로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형에게 거짓말을 하니 건영은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던 건영은 슬쩍 담요를 내리며 채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근데 왜? 형은…, 그런 사람들 안 좋아해?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방금 전까지는.”
시무룩 내뱉어진 채언의 대답에 건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네 말대로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내가 뭐라고 평가할 거리가 있나.”
머리가 복잡해진 채언은 조용히 드라마 시즌 1의 1편을 틀었다.
“너 이거 봐. 볼 만해.”
“1편이면 형 이미 본 거 아냐?”
“난 또 봐도 괜찮아.”
힘 빠진 목소리로 읊조린 채언도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근데 드라마잖아. 밤새워도 다 못 볼 텐….”
채언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말하던 건영은 입을 다물고 목을 긁었다.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빠졌지만 어쨌든 자신이 채언이 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볼 수 있는 데까지만 보지 뭐.”
채언이 침울해진 사이 드라마는 몇 편이나 재생되었다. 타이밍을 재다가 형, 혹시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려 했던 건영은 한 편 두 편 보던 드라마에 푹 빠져 버렸다.
“형, 이거 완전 재밌다. 나 이러다 오늘 이거 다 보는 거 아냐?”
“아, 진짜? 재밌어?”
소파 가죽을 긁고 있던 채언은 멍하니 대꾸했다.
“응. 재밌어.”
담요를 둘러 덮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건영의 모습을 보며 채언은 뻑뻑한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이제 조금 졸린데 먼저 들어가서 자도 될까?”
“어? 졸려? 그럼 나도 그만 보고.”
채언은 담요를 내리는 건영의 손을 잡고 다시 담요를 어깨에 둘러주었다.
“아냐. 보고 싶으면 더 봐.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니까.”
“그럼 나는 이거 몇 편만 더 볼게.”
“그래. 그렇다고 새벽 네다섯 시까지 보지는 말고. 이따 이거 끄려면 전원 버튼 바로 누르면 돼.”
“알겠어.”
“늦잠 자면 점심 먹기 전에 깨워줄게. 혹시 자기 전이나 일찍 깨서 배고프면 나 불러.”
건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채언이 방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형.”
“응?”
건영의 부름에 채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옆방에서 잘 거라고 했지.”
“응.”
“이따가 혼자 자기 싫으면 베개랑 이불 들고 가도 돼?”
내내 멍하던 채언의 눈꼬리가 휘었다.
“뭐야? 낯선 곳이라 혼자 자는 게 무서워?”
“무슨, 내가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그냥 오랜만이잖아.”
“침대 하나라 우리 둘이 자기 좁을 텐데? 껴안고 자면 모를…까.”
정말로 그 침대에서 영웅과 껴안고 잔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채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바닥에서 자면 돼.”
다행히 건영은 이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채언은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바닥에도 미리 이불 하나 깔아둬야겠다. 그럼 적당히 보고 들어와.”
건영에게 손을 흔들어준 채언은 서재를 나와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끝방으로 향하는 복도가 아니라 영웅이 자고 있는 침실 쪽이었다. 졸리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건영은 드라마를 더 보고 나온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십 분은 시간이 있었다. 채언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침실 안을 걷는 채언의 손에는 메모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건영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영웅의 반지 사이즈만 생각한 채언이었다.
그동안 영웅과 딱 달라붙은 채로 잠든지라, 먼저 일어나도 티 나지 않게 손가락 사이즈를 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침실을 나갈 때 영웅의 베개도 살짝 빌려 갈 예정이었다.
영웅이 누워 있는 침대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앞에 뭐가 있는지 식별하기 어려워졌다. 섣불리 핸드폰 불빛을 켰다가는 그가 눈을 뜰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 하늘이 어두운 데다 아까 영웅이 편하게 자길 바라는 마음에 암막 커튼 반쪽을 치고 나와 침대 주위는 더 깜깜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던 채언은 어쩔 수 없이 바닥을 향해 핸드폰을 내린 뒤 화면을 켰다. 빛의 세기를 가장 어둡게 조절한 뒤 주변을 비추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톡. 무릎에 침대가 닿자 채언은 조심히 다리를 접어 그 위로 올라갔다. 작은 숨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갈수록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영웅의 손이 어디 있을까 조심히 핸드폰 주변을 가린 뒤 침구 위를 비춰보았다. 잠결에 빈 옆자리를 더듬었는지 영웅의 팔은 평소 자신이 눕는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침맞게 왼손이 떡 하니 눈앞에 놓인 상황이었다.
채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영웅의 왼손 약지에 메모지를 두르기 시작했다. 조심히 종이를 휘는데 이게 뭐라고, 어려운 수술을 하는 의사처럼 긴장이 되었다. 긴장한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겨우 종이 구기는 소리를 내지 않고 영웅의 손가락에 메모지를 두른 채언은 남는 부분을 접어 나름의 표시를 했다. 채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러놓은 메모지를 빼서 조용히 들고 나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헉!”
조심조심 메모지를 빼내려는데 영웅의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메모지가 구겨지기 전에 급히 다른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펼쳐 막은 채언은 조급한 마음에 종이를 휙 빼내고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대로 멈춘 채 영웅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잠에서 깨지 않은 듯했다.
“휴….”
안도한 채언은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아주려 했다. 그렇게 슬쩍 손가락 힘을 빼려는 찰나, 불편한 듯 내쉬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영웅의 손가락이 채언의 손을 옥죄어 잡았다.
“어디… 어요.”
언제 깬 건지 낮고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채언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으응? 어디에….”
손을 잡아당기는 힘을 따라 채언은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안, 안 잤어요?”
너무 어두워서 주변이 보이지도 않는데, 채언은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도르륵 눈을 굴렸다.
“옆에, 없어서…, 아까부터 눈뜰 때마다.”
느릿하게 나오는 말에 어눌한 감이 있었다. 아직 술이 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영웅은 잡고 있던 손을 자신의 허리에 올려놓고는 채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제가 옆에 없어서 잘 못 잤어요?”
맞닿은 몸을 통해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던 채언이 괜히 장난스레 물었다. 그러자 머리꼭지 위에서 영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응.”
베개에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영웅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채언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채언의 머릿속에 또 한 가지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영웅의 허리를 안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채언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늘 왜 이렇게 술 많이 마셨어요? 알코홀릭 아니라면서.”
“수울… 이유가… 이유가 있, 는데.”
뭉개져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유심히 들어보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이유가 뭔데요?”
작은 바람이 채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한숨 쉬어요?”
“너무 매워….”
뭐가 맵다는 거지? 채언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뒤이어 나온 영웅의 말에 의해 금방 해결되었다.
“빨간, 브으으콜리… 으으….”
어쩐지 취해서도 정신은 제대로 붙잡고 있으려던 사람인데 잠깐 드라마를 보고 온 사이 이상하게 완전히 눈을 감고 뻗어 있다 했다. 역시 초장 그릇에 뒹군 브로콜리가 그에게는 너무 매웠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식탁 위에는 물이 없었고.
“그리고 기분이….”
“아하, 그랬어요? 매운 걸 먹어서 기분이 안 좋아서?”
어르고 달래는 말투로 그를 위로해준 채언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영웅은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것은 물론 매운 것을 못 먹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로 그가 매운 걸 못 먹는다는 것이 확정 지어졌다. 이참에 브로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한번 제대로 물어볼까 고민해본 채언은 그의 비밀 하나는 지켜주기로 했다.
채언의 볼이 동그랗게 올라온 사이, 부스스 눈을 뜬 영웅은 어둠 속에서 눈꺼풀을 끔뻑였다. 바로 코앞에서 채언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포근한 향기도 맡아지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귀여운 보조개를 보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영웅은 아쉽게 다시 눈을 감았다.
“어, 잠깐만요. 이제 안 웃을게요.”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감싸 안아 오는 손 때문에 넓은 가슴팍에 얼굴이 묻힌 채언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채언은 낑낑대며 영웅의 팔을 잡아 내리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술에 취해 힘 조절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한 개만 더 물어볼게요. 오늘 사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영웅의 대답을 기다리던 채언의 귀에 들려온 것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투정이었다.
“네? 뭐라고요?”
구시렁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언은 암호를 해독하듯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투정에 집중했다. 영웅이 내뱉는 말을 따라 해보던 채언의 입술이 점차 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사장님과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은 사장님이 아니라고 동문서답하고 있었다. 채언은 영웅이 또 사범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기 전에 그의 셔츠 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아뇨, 라이언. 그게 아니라요. 포도 농장 사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냐고요.”
라이언과 사장님을 분리해서 말해주자 투정 소리가 잦아들다가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네? 포도 사장님이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둘이 무슨 말 했는지 궁금해요.”
재차 묻는 채언의 목소리에 영웅은 몽롱한 상태로 아까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세 남자가 열띤 토론을 하며 TV를 보고 있을 때 혜옥이 술잔을 빙글 돌리며 조용히 물어온 것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영웅의 대답은 딸기 맛 초콜릿과 초록색이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웃는 얼굴이었다. 채언의 보조개는 너무 귀엽지만, 꼭 보조개가 생기지 않아도 되니 웃기만 하면 좋다고 줄줄이 곁들인 말이 한가득 있었다.
영웅은 혜옥에게 대답하다 떠올린 채언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실없이 웃었다.
순진하게 웃는 귀여운 얼굴과 트리 장식을 바꿀 때 자신을 쳐다보는 순한 눈, 햇살이 환할 때 보이는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카락,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조용히 시무룩해지는 얼굴, 들릴 듯 말 듯 노래를 흥얼거리는 목소리, 자고 일어나면 기분 좋게 따끈해지는 체온, 사진 뒤편이나 메모지에 쓰인 예술적인 글씨체 등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채언의 부분들이었다.
“왜 웃어요?”
혜옥과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더니 혼자 웃기 시작한 영웅에게 채언이 재차 졸랐다.
“기분이 좋아서.”
이번에는 영웅의 입에서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까도 기분이 좋아서 꿀꺽 술을 삼켰었다.
“사장님이 술 잘 마신다고 칭찬이라도 하셨어요?”
“아아뇨. 부탁.”
채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부탁을 하셨다고요? 무슨 부탁?”
“우리, 아기…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하다 멈춘 채언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내뱉던 숨을 더 크게 들이마신 채언은 영웅과 셔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장님이 그러셨어요? 우리…, 저를 잘 부탁한다고요?”
혜옥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아니지만 채언은 혜옥이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응.”
그랬다는 확답도 듣기 좋으니 짧은 대답도 괜찮았다.
“이미 다 커서 애는 아닌데.”
채언은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쑥스러운 마음을 눌러 삼켰다.
“한참 전에 다 컸거든요.”
웃음도 참아보려 했지만, 기분이 좋아서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채언의 웃음소리를 좇던 영웅은 기어이 채언의 볼을 찾아내고 말았다. 말랑한 볼을 깨물어대다가 아프다는 채언의 핀잔을 듣고서야 아쉽게 물고 빠는 것을 그만두었다.
익숙한 품 안에서 잠들었던 채언은 흠칫 눈을 떴다. 뭔가 잊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찝찝한 와중에도 침구는 포근했고 몸에 닿는 영웅의 체온은 따듯했다. 다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비몽사몽 간에 생각하던 채언의 머릿속에 건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건영이랑 같이 자기로 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채언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침실 한쪽에 놓인 불빛 켜진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오래 눈을 붙이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아예 흐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건영은 이미 서재를 나와 손님방 문을 번갈아 열어봤을지 몰랐다.
아까 서재를 나가서는 지금까지 뭘 하다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고민에 빠진 채언은 옆에서 들리는 곤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뭐가 됐든 일단 얼른 침실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채언은 영웅을 깨우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며 조심조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 위에 둘려 있던 든든한 팔의 무게감을 치워내자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비빈 채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륵, 어깨에 덮여 있던 이불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방 안은 춥지 않았지만 따끈하게 데워진 자리를 벗어나려니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드는 탓에 목이 움츠러졌다.
스윽 스윽. 채언이 무릎걸음으로 움직이는 동안 고급 매트리스는 값어치를 했다. 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 침대 위에 누운 영웅은 이미 잠에서 깨어나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탓에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무겁게 느껴져 얕은 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그래도 몽롱한 와중에 안고 있는 채언의 온도가 기분 좋아 얌전히 눈을 감은 채 달콤한 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잠은 오지 않고 채언만 또다시 품 안을 빠져나가 어딘가로 가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음….”
불편한 숨소리와 함께 눈가를 찌푸리며 일어난 영웅은 어둠 속에서 조심히 움직이는 인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엇?”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채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웅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허리에는 조금 전에 치워낸 단단한 팔이 감겨 있었다.
“자꾸 어딜 가는 거예요….”
채언은 어깨를 움츠렸다. 투정 섞인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와 목 주변이 간지러운 탓이었다.
움츠러든 목과 어깨 사이 좁은 틈에 얼굴을 묻은 영웅은 콧날로 보드라운 목선을 문지르며 입을 벌렸다.
“제가아, 읏!”
초옥, 입술이 다물리며 스치는 자리에 소리가 남았다. 채언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가슴을 부여잡을 수가 없어서 대신 영웅의 팔만 꼭 붙잡을 뿐이었다.
“제가,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뭘?”
잘근잘근 목을 무는 힘이 평소보다 셌지만 채언은 영웅이 마음껏 행동하도록 등 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매번 몸 여기저기를 물고 빨아도 옷 밖으로 보이는 곳에 큰 자국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니 딱히 제재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저 다른 방에서 자야 한다고요.”
그래놓고 조금 전까지 옆에서 함께 잠들어 있었지만.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입술은 목선을 타고 올라와 턱 밑 여린 살을 누르는 중이었다.
“건영이랑 아까 서재에서 영화, 보다가 먼저 나왔는데…, 저쪽 방에서 같이 자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아.”
아래턱을 깨문 이는 금방 귓불을 찾아 물었다. 채언의 곱아든 손가락이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영웅이 금방 놓아줄 줄 알았는데 몸을 안고 있는 팔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네?”
채언은 영웅의 팔뚝을 잡고 조르듯 흔들었다.
“저 얼른 저쪽 방에 가야 돼요. 안 그러면 건영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꾸욱, 볼을 눌러오는 입술 느낌에 채언은 말을 멈췄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영웅의 말에 도리어 어리둥절해진 채언이었다. 못 알아듣겠다니.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었나 곱씹어 보았지만, 영웅이 알아듣지 못할 만한 단어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직 술이 덜 깼다면 머릿속에서 단어를 조합해 해석하는 것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떤 거요? 무슨 말?”
영웅은 다정스러운 말이 흘러나온 채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전부 다.”
대답을 하느라 움직인 영웅의 입술이 다물려 있던 채언의 입술 사이를 살짝 벌려놓았다.
자신의 몸을 조여 안고 있는 영웅의 팔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생각을 마친 뒤 고개를 조금 뒤로 물렸다.
“저 오늘 건영이랑 자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다른 방으로 가야 해요.”
천천히, 그리고 간단하게 말했으니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제 팔이 풀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던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둠 속에서 덮쳐온 입술 때문이었다. 단번에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뜨거운 혀에 채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
어두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뒤통수와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자기도 모르게 영웅의 손에 몸을 맡긴 채언은 그가 밀어 눕히는 대로 얌전히 누워 눈을 감았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와 이불과 옷감 스치는 소리만이 조용한 침실 안을 울렸다.
여전히 키스할 때 숨 쉬는 법이 서툰 채언의 숨결이 거칠어지자 영웅의 입술이 말캉한 혀끝을 쭈웁, 빨며 떨어졌다.
“하아.”
크게 숨을 마시고 뱉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두 사람의 혀가 다시 얽혔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뒤쪽을 끌어당겼을 때 채언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밤마다 이러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어서 침실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영웅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황급히 팔을 풀어낸 채언은 영웅의 양어깨에 손을 얹어 힘을 주었다.
“잠, 으읍, 잠깐, 만….”
내리누르는 힘에 밀린 채언의 팔이 침대에 꾹 눌렸다.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던 영웅의 몸이 스스로 물러난다 싶었을 때, 스륵 스륵, 셔츠 벗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양 손목이 붙잡혔다. 가쁜 숨을 쉬는 채언의 가슴이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채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바짝 맞닿은 영웅의 하반신이 뜨겁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가야 하는데….”
그러나 푸르스름한 달빛에 어둑한 형체만 보이는 실루엣이 가까워졌다.
“…읏.”
움직임에 자극받은 아래쪽의 느낌이 선명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감각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난 채언 씨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귓가에 느릿하게 속닥대는 목소리가 너무 간지러워서 채언은 어깨를 비틀었다.
“제가, 뭘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채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 잠들기 전보다 말투는 분명했지만,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이제 보니 그는 정말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주정을 부리는 듯했다. 함께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본 게 한 번뿐이라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범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떼썼던 것은 이렇게 취하기 전 단계의 주정인 듯했다. 그날도 정말 많이 마셨었는데 그때보다 더 취했다니, 도대체 인삼주의 도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 아니, 송이주가 독한 건지도 몰랐다.
“죄송해요. 저 영어는 못해요.”
채언은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는 영웅의 머리에 뺨을 기댄 뒤 그의 머리카락에 볼을 살살 문질렀다. 손목이 붙잡혀 그의 등을 토닥여줄 수 없으니 나름의 방법으로 그를 달래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꾸 잠 깨워서 미안해요. 이제 옆에서 시끄럽게 하지 않을 테니까, 푹 자요.”
촉, 촉. 소리로 흔적을 남기며 올라온 입술이 채언의 턱밑에 닿았다.
“여기 있어요. 내 옆에.”
턱을 깨문 이는 말랑한 볼을 한 번 깨물고는 다시 채언의 귓가로 향했다.
“응? 여기 있어.”
낮게 조르는 목소리에 채언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내지 못했다. 어느새 입술 사이로 들어온 말캉한 혀가 꿈틀거리는 감각에 맞춰 어설프게 고개 각도를 틀어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영웅은 요령 좋게 자신의 혀를 채언의 입 안쪽 가장 깊은 혀뿌리까지 얽어왔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언은 힘이 들어간 손을 주먹 쥐었다. 분명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누워 있는데 목이 뒤로 꺾이는 기분이었다. 목 끝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켜보았는데도 더욱 숨이 막히는 듯했다.
“…으응.”
이미 빈틈없이 맞닿아 있던 하반신이 더 꾸욱 밀착되었다. 이내 서로 다른 재질의 옷감끼리 스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웅이 허리를 움직여 올 때마다 은근한 자극이 몸을 타고 올랐다. 채언은 눈가를 찌푸리며 허벅지 근육을 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편했던 잠옷 바지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점차 윤곽을 드러낸 서로의 성기는 노골적으로 문질러지고 있었지만 맨살끼리 닿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명한 양감이 속옷 안에서 발기한 성기를 스윽 훑고 지나갈 때마다 채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얼른 나가야 하는데. 건영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서재가 침실과 너무 가까운데.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면 좋을 텐데. 조금 더 꽉 끌어안고 싶은데. 꾸욱 꾹 눌리며 스치는 자극이 조금 더 셌으면 좋겠는데.
채언의 허리가 마주 들썩이려는 찰나 쪼옥, 실선 같은 타액이 늘어나며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응? 나랑 있어. 채언아.”
채언은 자신의 젖은 입술을 지르물었다. 단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온몸에 쾌감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손목 말고요…, 안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에 화답하듯 채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가락은 뱀처럼 움직여 통통한 손바닥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크게 부푼 서로의 가슴이 맞닿음과 동시에 불이 붙었다.
미끈한 혀와 입술이 격렬히 문질러지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영웅의 손은 채언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투둑. 힘 조절을 잘못한 손 때문에 단추 두어 개가 뜯어지는 것은 전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
“…흑.”
훤히 드러난 채언의 맨가슴을 영웅의 손이 세게 그러쥐었다. 이내 보드라운 살결을 타고 내려간 손이 잠옷 바지와 속옷 밴드를 한 번에 잡아 내리자 반쯤 발기가 성기가 밴드 위로 빠져나왔다. 자신의 속옷도 끌어 내린 영웅은 맑은 액이 흘러나오는 성기를 쥐고 채언의 것에 바짝 가져다 대었다.
“아!”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두른 채 어깨를 바짝 굳혔다. 오늘따라 정말 힘 조절이 안 되는 건지 여기저기 물어대는 영웅의 이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게 아니면 약한 조명도 켜놓지 않은 어둠 속에서 살결에 닿는 감각이 예민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으응… 읏.”
속옷에 감싸여 있을 때보다 뜨겁게 존재감을 드러낸 성기끼리 문질러지는 감각이 허리를 비틀리게 했다.
보드라운 목선을 타고 내려간 영웅의 입술은 쇄골을 핥고 조금 더 내려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돌기를 찾아 물었다.
“으응.”
쭈웁, 쪽 소리가 날 때마다 찌릿한 쾌감이 채언의 팔에 힘이 들어가게 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자 영웅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조명이 켜져 있었다면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과 마주쳤을 텐데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뿐이었다.
“아….”
혀가 유두를 느릿하게 핥아 올리자 채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 어떤 쾌감이 느껴질지 몰라 목 뒤가 바짝 긴장되었다.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로 사라락 머리카락이 스쳤다. 계속되는 자극에 손바닥에도 열기가 고여 조금씩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영웅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말랑한 귓불이 손가락 사이에 눌릴 때 그의 머리가 불쑥 위로 올라왔다.
“여기?”
“…흑!”
조금 전까지 가슴을 빨고 있던 혀가 채언의 귓속으로 들어와 굴곡진 모양을 그대로 핥고 지나갔다. 입술로 하는 애무와 계속되는 허리 짓에 위아래로 자극이 심해 몸이 비틀리는 것을 단단한 팔이 꽉 안아 통제했다.
찰박찰박. 물기 어린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단지 귀를 빠는 혀 때문이 아니었다. 꾹 눌리고 문질러지는 아래쪽도 이미 잔뜩 젖어 미끈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곱아드는 채언의 손가락이 펴지지 못하고 영웅의 탄탄한 살 위를 눌렀다. 짧은 손톱이 자꾸만 그의 어깻죽지를 긁어댔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끼리 문질러질 때마다 자극은 선명했지만,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게 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채언은 한쪽 무릎을 세워 영웅의 허리 옆에 대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슬쩍 허리를 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꼽 위로 바짝 올라붙은 두 개의 성기가 문질러지며 계속해서 질척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낮은 신음만이 떨리는 숨결과 함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안은 채 감각에만 집중했다. 눈을 떠도 앞이 까매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 아래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했다.
“하아, 앗… 으응.”
손도 입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점차 고조되는 쾌감이 아랫배에 열기를 잔뜩 고이게 했다. 채언은 열 오른 뺨을 영웅의 목에 문지르며 신음을 흘렸다. 배 위에 비벼지는 굵은 성기의 윤곽을 느낄 때마다 그것이 몸 안을 긁고 지나가던 감각이 떠올라 애가 탔다. 그럴수록 영웅의 탄탄한 어깨를 붙잡고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 잠깐, 흡, 읏… 흐읏! 잠깐.”
딱 붙어 비좁은 몸 사이로 커다란 손이 들어와 채언의 성기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탁, 탁, 계속되는 자극에 빠끔거리는 요도구에서 맑은 액이 흘러나와 빠르게 움직이는 손 안쪽과 두 사람의 배를 적시기 시작했다.
“아! 조금만 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쾌감에 깜깜한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앗, 하으.”
이미 잔뜩 몰려 있던 열기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주욱 위로 훑어 올린 손이 뿌리 근처까지 한 번에 내려갔을 때 채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칠게 목을 긁는 숨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사정의 여운이 가라앉을 틈도 없이 채언의 얼굴과 목 여기저기에 키스가 내려앉았다.
“하아, 하….”
영웅의 어깨를 부여잡은 손가락과 그의 허리 근처에 감긴 다리에 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몸을 꼭 안아 준 영웅은 이미 사정을 마친 채언의 성기를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성기 겉면에 흐른 미끈거리는 액체를 긁어모으듯 기둥을 훑어 올린 손가락은 음낭 아래 보드라운 살갗을 꾸욱 누르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라이언, 잠깐만, 요.”
영웅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구멍 주위에 정액을 펴 발라 누르자 나른하게 풀어지던 몸이 다시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주름 하나하나를 펼 듯 주변을 꾹꾹 눌러오던 손가락이 내벽을 밀고 들어왔다.
“더어? 더 해줄게.”
“으…, 아까는.”
채언은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손끝으로 영웅의 어깨 위를 누르듯 긁었다.
“응?”
“하나도 못…, 못 알아듣겠다고 했, 아!”
채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가락 두 개가 더 구멍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밑을 풀어줄 때면 언제나 다정하고 조심스럽던 손길이 평소와 달리 급하고 거칠었다.
채언이 허리 옆에 기대고 있던 무릎 아래쪽으로 영웅의 손이 들어와 오금을 밀어 올렸다. 벌어지는 엉덩이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낸 영웅은 상체를 일으킨 뒤 아직 사정하지 못해 꺼떡이고 있던 자신의 성기를 잡고 수음하듯 기둥을 훑어 올렸다.
“하아….”
앞이 보이지 않아 더 어지럽게 느껴지는 탓에 영웅은 머리를 휘휘 저은 뒤 미끈한 액체가 새어 나온 선단을 움찔거리는 구멍에 들이밀었다. 젤도 아니고 한 번 사출된 정액을 긁어모아 바른 것으로는 윤활제를 대신하기 충분치 않았지만, 술에 절어버린 뇌는 이성보다 본능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아니, 아니야. 아직, 안, 으, 흐윽!”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들어오는 느낌에 신음을 흘리던 채언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까만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침실 문을 향했다. 지금 집에 영웅과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건영이 아직 침실 바로 옆 서재에 있을지 몰랐다. 아니, 제발 건영은 아직 그곳에 있어야 했다. 서재는 바깥 소리가 잘 새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니까.
혹시 손님방에 자러 들어갔을까? 그곳은 여기와 거리가 멀어 방금 내지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 몰랐다.
하지만 건영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 자신을 찾으러 문밖으로 나온다거나 이제 막 서재에서 나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흐윽…!”
가장 굵은 귀두가 구멍 안쪽을 빡빡하게 밀고 들어간 뒤에는 쉬웠다. 철퍽,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후우.”
따듯하고 꽉 조이는 내벽의 느낌에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영웅은 몸을 숙여 채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기분 좋아, 초콜릿. 채언아, 응?”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채언은 정말 기분이 좋은 듯 자신의 목에 얼굴을 비비는 영웅의 행동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잠깐 자고 일어난 그는 아까보다 더 취기가 오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나 먼저 콘돔과 젤을 찾던 사람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자신의 몸을 열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콜릿은 왜 말하는 건지 몰랐다. 아파하니 달래주려는 건가. 복잡한 머릿속이 뱅뱅 돌았다.
“으응, 읏, 흐….”
손으로 입을 막은 채언은 비음이 새는 것까지 막지 못해 바짝 긴장한 상태로 몸을 비틀었다.
소리 내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불편한 마음과 달리 영웅이 거세게 허리 짓 할 때마다 힘이 들어간 채언의 엉덩이에 골이 패었다. 다시 반쯤 일어선 성기는 흔들리며 배 위에 맑은 액을 흘리는 중이었다.
“하아.”
영웅은 채언의 무릎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허벅지를 쓸고 내려가 구멍 근처의 살을 부여잡았다. 다리 안쪽으로 갈수록 살결이 더 보드라웠다.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은 영웅의 손아귀 힘에 의해 더 벌어졌다.
“흐윽! 응.”
퍽, 퍼억. 구멍 안으로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채언의 몸이 침대 위쪽으로 밀려 올라갔다.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탓에 평소보다 몸이 굳어 그를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압박감을 참지 못한 채언이 결국 입을 가리던 손을 놓고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손과 몸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와 손바닥과 살결이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아파, 아파요. 천천히. 흑.”
“대디라고 불러봐 채언아. 응?”
“지금 무슨, … 히윽!”
힘을 실어 쳐올린 허리에 굵은 성기가 쑤욱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배 속에서 내장이 밀려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 채언은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땀에 젖은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대디, 어?”
“싫, 흐윽, 부끄러운 거라고 그랬으면서.”
철썩, 채언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집 있는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살이 흔들리며 몸 안쪽까지 자극이 퍼졌다. 지금 어딜 맞은 거지? 당황한 채언이 자기도 모르게 구멍을 꽉 조이자 귓가에 조금 전보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봐주지 않고 몸속을 찔러 온 굵은 성기에 채언이 몸을 비틀었다.
“흐… 끅, 그만!”
퍼억 퍽. 그가 자꾸만 잘 느끼는 곳만 찔러오는 탓에 채언은 눈앞이 하얗게 튀는 듯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아, 흐윽, 그만.”
채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짧은 손톱을 영웅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죽죽 긁히는 자리에 붉은 실선이 남겨졌지만, 어둠에 가려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굵은 성기가 구멍 안으로 옴쭉거리며 들어갈 때마다 음모와 살에 쓸린 회음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여린 살갗이 홧홧하게 부어오르는 것은 배 속을 쳐올리는 자극이 너무 세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빳빳하게 선 유두를 꼬집어오는 손길에 채언은 마구 도리질 쳤다.
“저기에, 아직 건영이가… 흣! 으응.”
헐떡이며 내뱉은 말은 목을 콱 깨물어오는 날카로운 느낌에 흐려지고 말았다. 꼭 감긴 채언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읏, 하흐…, 윽.”
퍽퍽 쳐올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에 닿았다.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박히던 때처럼 배 안쪽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혹시 그때처럼 또 실례를 하게 될지 몰라 무서웠다. 신음을 죽이기 위해 억지로 조인 목 안쪽도 아팠다. 어두워 영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데다 평소와 너무 다른 그의 태도에 꼭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침대 위에 눕혀져 있는데 꽉 안기지 않으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처롭게 코를 훌쩍거린 채언은 코알라처럼 영웅의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자 쪽, 쪽, 가벼운 키스가 눈물에 젖은 뺨 위에 내려앉았다. 쪼옥. 웃으면 보조개가 패는 자리에는 조금 더 짙게 남은 키스였다.
“으응, 아, 하윽.”
철썩,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살갗이 끈적하게 쓸렸다.
“아파, 아파요.”
“하아, 채언아. 말해봐.”
영웅은 손을 들어 채언의 볼을 쓸어주며 귓가에는 달콤한 목소리로 꾀듯이 속삭였다.
“대디라고 해봐.”
채언은 그의 손길이 닿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가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계속해서 자신을 거칠게 다루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어린애들 아니면 이상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했으면서. 이상한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이런 요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채언의 머릿속에 이상한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떼쓰던 예전 영웅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 거기, 흐읏, 좋아… 응. 으읏”
하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질 새도 없이 퍼억, 퍽, 퍽, 뜨거운 성기가 배 속 깊은 곳을 짓이겼다.
하마터면 큰소리를 낼 뻔한 채언은 곧바로 입술을 문 채 목구멍 안쪽에 힘을 주었다. 마른침을 삼킬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갑게 느껴졌다.
채언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바깥이 신경 쓰였다. 혹시 물을 마시러 나온 건영이 넓은 집에서 길을 잃어 침실 문을 열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취한 영웅이 지난번 자신을 문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면 어쩌지.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이제는 선택해야 할 듯했다. 침대 위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면 평소처럼 다정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떨리는 숨결을 내뱉는 채언의 입술이 달싹였다.
“으응, 대디… 하아.”
가느다란 목소리를 캐치한 영웅의 눈이 어둠 속에서 희번덕 초록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뜨거운 열기로 곤죽이 된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응? 채언아, 뭐라고? 다시 말해줘.”
“대디, 대디. 으응, 흑, 아읏! 으, 천천히.”
다시 말을 뱉은 순간 채언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쑤욱 굵은 기둥이 구멍 안쪽을 파고들 때 채언의 고개가 힘껏 뒤로 젖혀졌다. 숨을 뱉지 못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였다.
채언의 붉어진 회음 근처에 영웅의 고환이 철썩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갈고리처럼 곱아든 채언의 손가락이 영웅의 어깻죽지를 강하게 긁었지만, 그는 채언의 몸 안으로 성기를 쑤셔 박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흣, 흑, 그, 그만! 그만!”
채언의 손이 단단한 영웅의 어깨를 마구 밀어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채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쳐올리는 허리 짓에 밀린 몸이 주륵 시트 위로 미끄러졌다. 끄윽, 끅, 채언의 목 안쪽에서 숨이 삼켜지다 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핏줄이 흉흉하게 선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쫀득하게 달라붙은 내벽이 함께 쓸려 움직였다.
격렬한 움직임이 계속되는 동안 맑은 액을 줄줄 흘리는 채언의 성기가 배 위에서 철퍽거리며 흔들렸다. 성기를 쥐어 잡고 만지지 않아도 박히는 것만으로도 사정감이 고양됐다. 배 속을 아프게 때리는 쾌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아윽, 읏, 흐, 앗.”
퍼억! 퍽. 강한 힘으로 꾸역꾸역 구멍 안을 파고들던 성기가 가장 안쪽 좁아지는 길을 세게 쳐올리자 흐끅, 소리와 함께 시트에 닿아 있던 허리가 번쩍 튀어 올랐다. 동시에 철썩! 배꼽 근처를 치고 튀어 오른 채언의 성기 끝에서 희뿌연 정액이 사출되었다.
영웅의 손에 붙잡힌 채언의 몸이 힘없이 흔들릴 때마다 끈적한 정액이 새어 나오는 귀두가 판판한 배 위에 부딪혔다 떨어졌다. 점성 있는 액체가 이리저리 늘어지다가 찔걱이며 살에 문질러지기를 반복했다.
“…큿!”
억지로 안쪽을 쳐대는 성기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밀리는 내벽 느낌에 영웅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찌푸려진 눈가와 달리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입술은 활짝 벌어져 호를 그린 채였다. 채언의 손목을 잡은 커다란 손끝에서 이어진 핏줄이 영웅의 팔 위로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
사정감이 차오를수록 시원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를 닮은 숨소리가 내뱉어졌다. 영웅은 하얀 엉덩이 사이로 꿈틀거리는 성기를 삽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 흐윽, 읏!”
영웅의 단단한 몸을 끼고 잔뜩 벌어진 채언의 다리 사이에서 질척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점차 빨라졌다. 그의 골반에 철썩 부딪힌 엉덩잇살이 흔들릴 때마다 채언은 목을 조여 신음을 참아야 했다.
“읏!”
자신의 아래에 깔려 헐떡이는 채언을 봐주지 않고 마구 허리를 흔들던 영웅은 어두운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숙여 채언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으으응.”
게걸스럽게 혀를 섞음과 동시에 울컥 구멍 안쪽으로 정액이 쏟아져 내렸다. 쭈웁, 춥, 길게 내어진 혀가 유연하게 움직여 뜨겁고 좁은 입 안을 탐했다.
타액이 섞이는 동안 영웅의 허리는 잘게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뒤로 빠지고 삽입될 때마다 하얀 정액이 꾸역꾸역 밀려 나와 시트를 적셨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추웁, 축축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로 눈앞, 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뜨거운 숨결을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채언은 겨우 깊은숨을 몰아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자 어떻게 알았는지 커다란 손이 눈가와 볼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힘들어요. 하아, 힘들다구요.”
몸을 섞는 내내 영웅에게 잡혀 있던 손목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겨우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영웅의 목을 끌어안은 채언은 자신의 볼을 만져주는 손에 얼굴을 문지르며 어리광을 부렸다.
커다란 고래에게 먹혔다 뱉어진 느낌이었다. 더운 계절도 아닌데 침실 안이 너무 덥고 축축했다. 그리고 이제는 영웅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열기에 들뜨면 찡그려지는 눈가나 흐트러진 옅은 색깔의 머리카락, 오롯이 바라봐 주는 초록색 눈동자를 확인하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런 채언을 달래주듯 여전히 열기가 머무는 뜨거운 손이 채언의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꿀꺽. 혀끝에 고여 있던 타액을 삼킨 영웅의 목울대 옆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감고 코끝에 닿는 보드라운 살결에 얼굴을 묻었다. 잘근잘근 깨물어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체취가 풍기는 몸이었다.
촉, 촉. 가벼운 키스가 채언의 목과 뺨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넘겨준 손이 축축한 눈꼬리를 쓸고 내려와 웃으면 보조개가 생기는 눈 밑 볼에 머물렀다. 영웅은 그 반대쪽 같은 위치의 볼에 반복적으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요.”
다시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꽉 끌어안으며 채언이 작게 웃었다. 입술이 닿아오는 볼 쪽 눈을 반사적으로 찡긋거리자 그 아래 보조개가 폭 패었다.
입술에 닿아 있는 살이 움푹 들어가는 느낌에 영웅은 혀를 내어 그곳을 핥았다.
“으, 정말 간지러워요.”
꼼지락거리는 채언의 발끝이 달빛에 닿아 하얬다. 채언은 강아지를 안아본 적이 없었지만 작은 강아지를 안아본다면 꼭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졸음이 밀려와 몽롱해진 채언이 강아지와 뛰노는 꽃동산을 떠올리는 동안 어둠에 묻힌 초록 눈동자에는 다시 음심이 돌기 시작했다. 채언의 얼굴에 폭 패는 보조개에 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문지르고 싶었다.
영웅의 엄지가 채언의 얼굴을 슥, 슥, 힘주어 쓸었다. 몸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에 채언은 눈꺼풀을 깜빡이며 영웅의 손등을 붙잡았다.
“아니, 왜 다시 커지는… 건지.”
채언의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쓰윽, 얼굴을 문지르는 손가락에도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 잠깐.”
몸을 일으키려는 채언의 허리를 꽉 잡고 놓지 않은 영웅은 말랑한 귓불을 입술 사이에 끼고 가볍게 누른 뒤 작게 속삭였다.
“쉬이, 채언아.”
“읏…, 네에.”
순하디순한 대답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이 칭찬하듯 채언의 볼에 촉, 체온을 남겼다.
“가지 마. 옆에 있어야지.”
나지막한 목소리에 채언은 뱃속이 간지러워져 반사적으로 허벅지 사이를 좁혔다. 하지만 영웅의 허리에 다리를 대고 바르작거리는 힘없는 반항일 뿐이었다. 스윽, 배를 쓸어 올리는 손길에 채언은 작게 숨을 헐떡였다.
희미한 달빛이 침실 문가를 밝히고 있었다. 문가를 보며 영웅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지른 채언은 땀이 배어 나온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아 천천히 내렸다.
“얼굴 보고 싶어요.”
조용히 죽인 목소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너무 어두워서.”
채언이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허리를 안고 있던 영웅도 따라서 몸을 세웠다.
침대 위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셔츠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 근처의 조명이 켜졌다.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채언은 예쁘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영웅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그의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얼굴 보면서 하고 싶어요….”
대디. 조용히 속삭인 뒤 먼저 입을 맞춘 것은 채언이었다.
암막 커튼이 쳐지지 않은 반쪽 창으로 새벽 푸른빛이 들어왔다.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영웅은 눈을 뜨지 않고 턱에 닿는 결 좋은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고 가볍게 도리질했다.
아직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 몽롱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얼굴에 닿는 보드라운 느낌이 기분 좋았다.
이불을 조금 얇은 것으로 바꿔볼까 싶었다. 이미 여름은 다 지났는데 날은 추워지지 않고 오히려 따듯해지는 듯했다. 아니, 침실 안이 지나치게 후덥지근한 것일 수도. 특히 이불을 덮고 채언과 함께 누워 있을 때면 더더욱.
손바닥에 착 감기는 살결을 손가락으로 쓸어본 그는 품 안의 나신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마음속에 금방 변덕이 일었다.
이불을 얇은 것으로 바꾸는 계획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혹여 채언이 감기에 들까 봐 관계 후에는 잘 씻겨 다시 잠옷을 여며주는데 가끔 이렇게 서로 옷을 입지 않고 잠드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 이불은 두툼한 것으로 유지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지금은 날이 조금 따듯해도 금방 겨울이 올 테니까 미리 예쁘고 두껍고 따듯한 옷을 사서 드레스 룸을 채워놓는 게 좋을 듯했다. 몇 벌은 같은 디자인으로 사이즈만 다르게. 그러면 가끔 채언이 자신의 것과 헷갈려 큰 옷을 입을지 몰랐다.
혼자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가 수정하기를 반복하며, 영웅은 데운 마시멜로처럼 따끈한 채언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그는 눈을 감고도 자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매일 밤 채언을 안고 잠들기 때문이 아니라,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의 체온과 향기, 촉감 때문이었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뜨이고 긴 속눈썹 아래 초록색 눈동자가 맑은 모습을 드러냈다. 영웅은 눈을 뜨자마자 보인 채언의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으음….”
이제 눈을 뜨려나? 곤히 잠들었을 때 들릴 듯 말 듯 얌전한 숨소리도 듣기 좋지만 이렇게 잠에서 깨어날 때쯤 불규칙해지는 숨소리도 귀여웠다. 어떻게 사람이 숨소리까지 귀여울 수가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벅차오르는 감정에 미간을 찌푸린 영웅은 채언을 꽉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오늘은 안고 있는 몸이 좀 더 품 안에 꽉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으, 응.”
피곤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채언은 가늘게 뜬 눈을 불편하게 깜빡이다가 침구에 얼굴을 문질렀다. 속눈썹에 엉겨 붙어 있던 정액을 대충 손으로 닦아내고 잠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눈이 잘 떠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잘 잤어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던 채언은 움칫 몸을 굳혔다. 영웅이 밤새 저 나직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던 망측한 말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거기에 동조했던 자신의 목소리까지.
“응? 다시 잠들었나아?”
배를 더 끌어당겨 안아오는 팔에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힘없이 손을 들어 영웅의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밤새 한 것도 모자라 안에 넣고 잠들었다니. 술에 취했던 건 그인데 왜 자신이 취한 것처럼 군 걸까. 너무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채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언의 한숨 소리를 들은 영웅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평소처럼 몸을 돌려 마주 안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을 밀어내기까지 하는 손길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혹시 또 상태가 나빠진 거라면.
“…으, 움직이지 마요!”
“아. 아아….”
채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영웅은 아래쪽이 조여오는 느낌에 그제야 이불에 덮인 하반신의 사정을 알아챘다. 오늘따라 왠지 안고 있는 몸이 더 꽉 맞물려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영웅의 입꼬리가 옆으로 길게 호를 그렸다.
“저, 더 이상은 못 해요.”
힘없이 등 뒤의 몸을 밀어내던 채언은 갑자기 제 안에서 또 커지는 느낌에 경악하며 꾸욱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진짜, 이제는 못 해요.”
“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능글맞은 목소리와 함께 은근한 손짓이 채언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렸다.
“저는 씻을래요.”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내가 씻겨줘야겠다.”
버둥거리는 채언을 놓아준 영웅이 일부러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으….”
몸 안에서 그의 것이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이던 채언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한참 만에야 가장 굵은 귀두가 속살을 긁으며 느릿하게 툭, 구멍 안을 빠져나왔다. 밤새 굵은 성기를 품고 있었던 구멍은 단번에 닫히지 않고 벌름거리며 정액을 토해냈다.
엉덩이 사이에서 미끈거리는 액체가 흘러나오는 느낌에 입술을 깨문 채언은 혹시 아래가 닫히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팔을 내렸다.
까만 눈동자가 보이기를 기다리며 웃고 있던 영웅의 얼굴이 채언을 마주한 뒤 점차 굳어졌다. 하얀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던 영웅은 방향을 바꿔 침대 조명을 더 밝게 켰다.
“눈부셔요. 우리 불 끄고 더 자요.”
밝은 빛이 쏟아지자 눈을 꼭 감은 채언은 고개를 틀어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그러자 오른쪽 뺨의 붉은 상흔이 더 확연히 드러났다. 아주 가느다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흐린 것이었지만 영웅의 눈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웃으면 보조개가 패는 바로 그 자리였다.
영웅이 얼어버린 이유는 항상 말갛던 뺨의 상흔 때문만이 아니었다. 채언의 목과 어깨, 가슴 등 눈에 보이는 맨살에도 온통 울긋불긋한 잇자국이 선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깨끗하던 피부 위에 이런 자국을 새긴 범인은 자신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정도가 너무 심했다. 보통은 여기저기 깨물고 싶은 것을 참고 참다가 허벅지 안쪽에만 조심히 자국을 새겨놓고는 했는데 지금 채언의 몸에 남겨진 잇자국은 ‘허벅지 안쪽에만’도 아니고 ‘조심히’ 새겨진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밤사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충격받은 영웅은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평소처럼 밤을 보내고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생각해보니 어젯밤 일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손님들을 초대해 저녁을 함께한 것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또렷한데 그 뒤가 문제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 수가 하나둘 줄어들었고, 자신은 혜옥과 단둘이 대화를 한 듯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기억이 이어진 곳은 식탁이 아니었다.
눈물을 훔쳐내듯 상흔이 남아 있는 쪽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눈을 꼭 감던 채언의 모습이 영웅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머뭇거리는 손길이 상흔이 남은 뺨에 닿았다. 채언은 베개 대신 커다란 손에 얼굴을 기대며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엄지가 조심스레 눈 밑을 쓸자 채언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볼을 붉히며 영웅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다른 방으로 도망가버린 날부터 밤마다 영웅의 태도는 꿀에 절인 듯 달콤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민망해하지 말아야겠다고 한 다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주는 태도에 아쉬워진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아니었다.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그가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혹시 내가….”
영웅의 손가락이 쓸어주는 눈 밑 볼은 그가 새벽에 마지막으로 사정한 자리였다. 아무래도 곧바로 잘 닦아 내지 못해 흔적이 남은 듯했다.
“…내가 때렸어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채언은 영웅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영웅의 초록색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았는데요.”
괜찮았다기보다는 좋았다가 맞는 말이겠지만.
엉덩이를 맞은 것보다는 어젯밤에 대한 감상 비슷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딱히 소감을 주고받을 타이밍이 아닌 듯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영웅은 그동안 참아왔던 욕구를 터트린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이성이 아닌 본능대로만 행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가끔 영웅이 술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이러는 건 너무 힘드니까 가끔씩만.
그런데 영웅의 표정은 왜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일까. 혹시 어제 너무 취해 다른 사람들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걸까? 자신도 전에 술에 취해 영웅에게 실수를 저질렀을까 봐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 내가….”
채언은 뺨을 쓸어주는 손바닥에 포옥 얼굴을 기대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나 정말, 어젯밤 일이 기억이 안 나요. 내가 이런 사람일 줄 나도 몰랐는데.”
“네?”
막 감긴 눈꺼풀이 번쩍 뜨이며 다시 까만 눈동자를 드러냈다.
채언은 영웅과 얼른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열심히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도 잊고 말았다.
고개를 갸웃한 채언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
몸에 힘을 주자 엉덩이 사이에서 울컥 정액이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어디 또 아파요?”
민망한 느낌에 고개를 숙이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그의 어깨며 허리를 붙잡아 안고는 다급히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아뇨, 아뇨, 아픈 게 아니라. 저 괜찮아요.”
갑자기 아프다는 이야기는 왜 나온 걸까. 이쯤 되니 정말로 무언가 이상했다.
채언은 자신의 몸을 더듬어대는 영웅의 손을 잡아 내린 뒤 그의 얼굴을 붙잡아 똑바로 고정했다. 영웅의 표정은 언젠가 본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안 좋은 꿈 꿨어요? 그래서 깬 거예요?”
따듯한 손이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채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걱정이 실려 있었다. 아까 잠에서 막 깨어나자마자 영웅이 했던 행동을 보면 잠든 사이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뭐에 놀란 건지 어두워지는 낯빛이 안쓰러웠다.
“미안해요….”
심호흡하듯 가슴을 들썩인 영웅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꽉 감았다 떴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영웅의 모습에 채언의 얼굴에도 혼란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그가 무슨 일로 자신에게 사과한 건지 의문이었고, 한숨 쉬는 모습에 걱정이 됐다.
“왜 한숨을 쉬어요. 네? 왜 그래요? 왜 사과하는 거예요?”
“내가 채언 씨를 때렸잖아요.”
“네? 네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웅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채언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내가 이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일 줄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내 잘못이에요.”
말하는 중간중간 감정을 억누르듯 그는 입을 꾹 물다 열기를 반복했다.
“그게 무슨, 저 괜찮아요. 안 아팠어요.”
“상처가 생겼어요. 채언 씨.”
서둘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채언은 여기저기 남아 있는 울긋불긋한 자국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술이 덜 깼거나 잠이 덜 깨 몸에 남은 붉은 흔적들을 오해한 듯했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심하게 남기지 사람이니 그럴 수 있었다.
아까 눈 밑을 쓸어주던 손길로 보아 혹시 붉은 기가 얼굴에도 남았을지 몰랐다. 볼이나 턱 근처도 그가 깨물어대기 좋아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뽀뽀해서 생긴 거잖아요.”
“다르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내가 잘못한 걸 감출 생각 없으니까.”
영웅의 입꼬리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자 고민하던 채언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영웅은 자신의 손을 등 뒤로 숨겨버렸다.
“정말 안 좋은 꿈 꾼 거예요? 왜 그래요? 네? 저 좀 봐요.”
겨우 채언과 눈을 맞춘 영웅은 걱정 가득한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 아래 상처를 보고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감긴 눈은 금세 다시 뜨였다.
“일단 상처 치료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약을 가져올게요.”
몸을 일으킨 영웅이 침대 밑으로 내려가려 하자 채언도 그를 따라가려 무릎을 세웠다.
“아, 잠깐만요.”
다리 사이에서 주륵 정액이 흐르는 느낌에 엉거주춤 멈춰선 채언은 잡고 있던 영웅의 팔을 흔들었다.
“이거 먼저 닦아야 할 것 같아요.”
채언의 부름에 뒤돌아본 영웅은 하얀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르는 액체를 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콘돔도 쓰지 않고 뒤처리도 해주지 않은 걸 보니 정말 엉망으로 채언을 대한 것이 분명했다.
더더욱 선명해지는 자신의 잘못에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느낀 영웅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놓았다.
“알겠어요. 잠깐 누워 있어요. 욕조에 물 받아줄게요, 잠시만.”
영웅은 채언의 어깨 위에 이불을 둘러준 뒤 서둘러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놀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앉아 있던 채언은 물 트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대로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욕조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영웅이 구급상자를 찾으러 가기 위해 다시 욕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밖에서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던 채언과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가 아래로 잔뜩 내려간 채언은 영웅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라이언, 등은 안 아파요?”
“…등?”
영웅의 손목을 잡아챈 채언은 욕실 거울 앞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이거 봐요. 저 때문에 상처가 엄청 났잖아요.”
거울에 비친 영웅의 등에는 얇게 그인 붉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양쪽 날개뼈 근처가 특히 심했다.
거울과 자신의 손톱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분명 매번 흰 부분이 보이지 않게 짧게 손톱을 깎는 편인데 이런 상처를 내놓다니 너무 미안했다.
“안 따가워요? 등이 그런데 엉덩이 몇 대 때린 게 뭐라고 이렇게 허둥지둥 그래요….”
하지만 영웅은 채언의 말이 귓가에 잘 와닿지 않았다. 거울로 자신의 등을 대충 확인하고도 여전히 채언의 얼굴이 걱정이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물이 콸콸 틀어진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온 물로 욕조는 반쯤 차올라 있었다.
“누워 있지 왜 일어났어요. 물이 좀 찼는데 욕조에 들어갈래요? 얼른 약 가지고 올게요.”
“자꾸 제 어디에 약을 발라준다는 거예요?”
영웅의 어깨 위로 빼꼼히 눈을 든 채언은 거울을 보았다. 그래 봤자 붉게 그인 손톱자국이 가득한 넓은 등판과 다시 마주할 뿐이었다.
채언의 몸에 손대기를 머뭇거리던 영웅은 결국 자신의 손을 또다시 등 뒤로 숨긴 뒤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때린, 채언 씨… 뺨에….”
안쓰러운 등판을 보고 있던 채언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제 뺨에, 뭘 해요?”
거울에서 눈을 뗀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암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를 얼마나 힘주어 깨물고 있는 것인지 턱이 단단히 굳어 있었고, 항상 다정함이 깃들이 있던 눈가는 붉었다. 슬픔과 동시에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를 화를 느끼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토록 음울한 분위기의 그는 본 적이 없었다. 비 오던 어느 날의 그도, 병실 문 뒤에 서 있던 그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심장이 조여들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조급증이 일었지만 채언은 나긋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꿈을 꿨나 봐요. 안 좋은 꿈.”
채언은 한 손을 들어 영웅의 귓가를 살살 만져주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내 잘못이에요.”
영웅은 등 뒤로 숨긴 손에 힘을 주며 주먹 쥐었다.
술을 마셨든 마시지 않았든 채언에게 손을 댄 건 자신이었다. 채언을 대상으로 분노해본 적도 폭력적인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평소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폭력성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편없는 자식. 영웅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다.
“…다 내 잘못이에요.”
욕조 안에 콸콸 쏟아지고 있는 물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느껴졌다. 마치 온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질끈 눈을 감은 영웅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마시는 입술이 떨리기 무섭게 채언의 양쪽 손이 그의 볼을 감싸 잡았다.
채언은 자신이 생각에 빠질 때마다 영웅이 해주던 것처럼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춘 뒤 볼을 쓸어주었다. 그래도 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쪽, 쪽, 양쪽 볼에 한 번씩 더 입을 맞추었다. 평소라면 먼저 뽀뽀하는 것이 부끄러워 머뭇거렸겠지만, 지금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제 얼굴에 아무도 손 안 댔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른 채언은 보드라운 머리카락과 귀, 볼과 턱, 코끝과 이마, 감긴 눈꺼풀과 꼭 다물린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 상태로 오래도록 입술을 맞대고 있자 그의 숨이 천천히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키스가 내려앉았던 입술에서 느리게 채언의 입술이 떨어졌다. 영웅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채언은 그의 뺨을 쓸어주며 기다렸다.
서서히, 마침내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했을 때 채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평소 그답지 않게 기죽은 듯한 안쓰러운 눈꼬리였지만 다정하고 애틋한 기색이 담뿍 담긴 바로 그 눈이었다.
영웅과 똑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채언의 입술은 점점 더 긴 호를 그리다 활짝 벌어졌다.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린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왜 나쁜 꿈을 꿨을까요? 긴장하고 피곤해서 그랬나? 인삼이 체질에 안 맞았던 걸지도 몰라요.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고.”
영웅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채언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막 자다 깨서 잘못 본 걸지도 모르고요. 제 얼굴에 상처 없어요.”
채언은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거울을 통해 영웅과 눈을 마주쳤다.
“그쵸? 없죠?”
확신에 찬 말에 영웅은 조용히 눈을 깜빡이다가 직접 채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채언의 얼굴을 살피던 눈에 왈칵 실망이 고여 들었다.
영웅의 눈빛에 당황한 채언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아니, 정말 없는데… 상처가.”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얼굴을 살피던 채언은 자신의 볼에 종이에 베인 것처럼 가느다랗게 그인 실선을 발견했다. 상처라고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옅고 가는 자국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얼굴에 존재하는 상흔이 맞긴 했다.
순간 채언의 머릿속에 어젯밤 자신의 볼을 깨물어대던 영웅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이가 맹수처럼 날카로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늘게 상처가 날 리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볼을 쓸어내리던 채언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손끝에 와 닿았다. 도르륵 검정 눈동자가 굴렀다.
“이제 보니 있긴 있는데… 이거, 제 손으로 낸 상처 같은데요.”
자신의 손톱과 영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으음. 제가, 등도 그렇게 만들어놨으니까. 얼굴에 이런 게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아요.”
채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영웅은 어느 정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채언이 위협을 느낄까 봐 등 뒤로 숨겨 잡고 있던 손이 스륵 풀리려던 찰나, 그는 조금 전 침대 위에서 채언이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영웅은 다시 자신의 손과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하지만, 채언 씨. 내가 때렸다고 했잖아요.”
나무라는 기색 없이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였다. 채언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네에. 그런데 얼굴, 뺨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영웅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채언의 몸을 살폈다.
“그럼, 그럼 내가 어디를….”
목과 쇄골, 가슴과 허벅지. 어디 하나 빠짐없이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개중 몇 개는 입술로 만든 자국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멍 자국일지 몰랐다.
심각해져 굳어진 영웅의 얼굴과 달리 채언의 얼굴은 자꾸만 붉어져 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채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까 말했잖아요. 엉덩이라고. 그리고 하나도 안 아팠어요. 라이언 어제 술 취해서 나랑 몸싸움이라도 한 줄 알고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없었다고요.”
빠르지만 또박또박 말을 쏟아낸 채언은 마치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후욱 가슴을 부풀렸다가 한 번에 숨을 뱉었다.
“내가, 내가 엉덩이를 때렸다고요?”
“…네.”
간밤에 어둠 속에서 몸을 섞을 때, 마치 다른 사람과 있는 것 같아 낯선 기분이 들었는데, 정말 그게 사실이었던 듯 날 밝은 후의 영웅은 밤에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이 말을 꼭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하나도… 안 싫었어요.”
채언은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언은 팔을 뻗어 영웅의 허리를 껴안았다. 영웅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에 채언의 손이 닿았다.
“왜 잘못한 어린애처럼 손을 숨기고 있는 거예요?”
채언은 영웅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영웅은 등 뒤의 손깍지와 어깨에 기댄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수줍음 섞인 채언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느릿하게 몇 번 눈꺼풀이 끔뻑였다. 이내 영웅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영웅의 오뚝한 콧날이 채언의 어깨, 목과 귀 사이, 뺨을 스쳤다. 여전히 콸콸 틀어져 시끄러운 물소리 사이를 쪽, 쪽, 입맞춤 소리가 비집었다. 채언은 익숙한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렸다. 드디어 영웅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끝마친 듯했다.
그와 깍지 낀 채 엄지로 그의 손가락뼈를 문지르던 채언은 저 뒤에서 줄줄 물이 넘쳐흐르는 욕조를 발견했다. 그걸 보니 잊고 있던 자신의 다리 사이 사정이 떠올랐다. 의식하고 나니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의 느낌이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놓은 채언은 영웅과 깍지 낀 손을 살살 흔들었다.
“욕조에 들어가고 싶어요.”
함께 욕조를 사용할 때마다 넓은 공간을 좁게 사용하고는 했지만, 오늘은 작은 바구니 안에 들어온 것처럼 서로 몸을 더 꼭 붙이고 있었다.
채언은 자신의 몸을 힘주어 안고 있는 팔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워서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노곤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욕조에 들어오기 전, 몸 안에 남은 정액을 흘려보내는 일은 그에게 맡겨야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벌어져 있던 엉덩이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쪽을 긁어내는 느낌에 민망함을 느끼며 채언은 괜히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고 있어야 했다.
손가락에 닿는 곳이 조금 부은 것 같다며 미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아프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영웅은 평소처럼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웃지 않았다.
그렇게 욕조에 들어온 다음에는 계속 이 상태였다. 채언은 그가 자신을 너무 꼭 껴안고 있어서 자신이 마치 부화 직전의 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니 정말 잠이 들 것 같아서 채언은 눈가를 문질렀다. 손에 묻어 있던 물이 눈에 들어가자 눈꺼풀 안쪽이 거칠게 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채언은 손가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튕겨서 털어낸 후 얼굴에 묻은 물기를 쓸어냈다.
파문이 이는 물을 멍하니 보고 있던 채언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속눈썹에 엉긴 정액을 대충 닦아냈었다.
채언은 입술 안쪽 점막을 잘근거렸다. 영웅의 성기를 입에 담아본 적은 있지만, 그가 자신의 얼굴에 사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볼에 문질러지던 뜨거운 성기의 감촉과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흐린 시야 사이로 보이던 잔뜩 흥분한 그의 얼굴이 생생했다.
침을 꼴깍 삼킨 채언은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나요?”
채언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영웅은 채언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촉촉한 살에 이마를 기댔다.
“식탁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것까지. 그 뒤에는 그냥 사진 몇 장처럼 지나가요.”
거의 술이 깨어가던 영웅이었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또다시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머리가 어지러운 건지, 정말로 다시 취기가 올라 어지러운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으음, 고민스러운 소리를 냈다.
“내가 어제 술 마시다가 실수한 거 있어요?”
채언은 어젯밤 현관 앞에서 혜옥이 해준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이 술 마시다가 실수한 거 없으니까 혹시 라이언이 아침에 걱정하면 말해주라고 하셨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고요. 호텔 가시기 전까지 표정 좋으셨어요. 식탁에서 큰소리 난 적도 없고요.”
“다행이다. 호텔에는 잘 도착하셨대요? 어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호텔까지 운전을 해드렸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요.”
초장 찍은 브로콜리가 너무 매워서요. 웃음과 함께 말을 꾹 눌러 참은 채언은 손을 들어 따듯한 물 표면을 참방거렸다.
“두 분 차 끌고 오셨어요. 그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죠?”
“아, 그랬죠.”
“호텔 도착하신 다음에 전화 주셨는데 방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셨어요. 좋은 방 찾아줘서 고마워요.”
“잘 가셨다니 그것도 다행이네요.”
채언은 영웅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영웅이 눈을 들어 채언과 시선을 맞추었다. 서로를 보며 웃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내밀어 촉,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이건 안 잊어버렸어요. 호텔 체크아웃한 뒤에 다 같이 농장에 가보기로 했죠?”
“네. 맞아요.”
“나 오늘까지 정말로 카메라 확인 안 했어요. 잘했다고 해줘요.”
채언은 활짝 웃으며 영웅의 뺨을 쓸어주었다. 채언의 보조개를 가로지르는 옅은 상흔에 영웅의 눈이 살짝 처졌지만, 그는 속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따듯한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잘했어요. 오늘 아마 그 대단한 쪽파랑 상추 실물 볼 수 있을 거예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댔다. 아랫입술을 꼭꼭 씹어보아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가 보기에는 다 자란 것 같은데, 사장님이 확실히 수확해도 되는 상태라고 말씀해주시면 진짜 뽑을 거예요. 드디어 오늘이에요. 제가 키운 거 라이언 보여줄 수 있어요. 잔뜩 가지고 올 테니까 오늘 저녁에 그걸로 반찬 해서 먹어요. 만약에 며칠 더 기다려야 하면. 으음, 진짜 쪼끔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다 자랐거든요? 진짜로! 오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이 들떠 참방거리는 채언의 손짓에 이리저리 물방울이 튀었다.
오늘 포도 농장 식구들이 대동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 같이 주말농장에 가보기로 했다. 상추와 쪽파가 잘 자랐는지 확인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채언은 며칠 전부터 오늘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상추와 쪽파는 토마토처럼 열매가 열리는 작물은 아니었지만, 다 자라 당장 먹어도 될 것처럼 파릇파릇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자라는 모습을 거의 매일 가서 지켜봤기 때문에 어느 순간 감동이 팡! 터진 것은 아니지만 농장에 다니는 내내, 꾸준히 마음이 기뻤다.
드디어 영웅에게 자신이 기른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얼른 저녁 식탁에 올려 보여주고 싶었다. 만약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 해도 실망보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이 뒤따를 것이었다.
웃는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며 따라 웃던 영웅은 별안간 채언의 어깨에 이마를 콩 박았다. 정말로 몸이 따끈해지는 만큼 체내 알코올 지수가 상승하는 것 같았다.
그가 후우, 숨을 내쉬자 채언이 옆을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직 술이 다 안 깼죠? 어지러워요? 속은 괜찮아요?”
영웅의 머리가 끄덕끄덕 움직였다.
“좀 더 자는 게 좋겠어요. 아직 시간이 이르거든요. 혹시 배고프면 제가 치즈 토스트 만들어서 가져다줄 테니까 침대에서 먹어요.”
“아니에요. 다른 날이었으면 그랬겠지만, 오늘은 같이 먹어야죠.”
“혼자 먹기 싫은 거면 저도 옆에서 먹을게요.”
채언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던 영웅은 잠시 후, 아하, 소리와 함께 어떤 결론을 내렸다.
“채언 씨, 동생은 아침을 안 먹는 편인가 봐요?”
영웅은 물에 젖어 반질거리는 채언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건영이가요?”
갑자기 나온 건영의 이야기에 채언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잊고 있는 듯 찝찝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채언의 입술이 순간 동그랗게 벌어졌다.
“건영이!”
조심히 침실 문을 여는 채언의 목에는 행커치프가 묶여 있었다. 욕실에서 가운만 걸친 채 나가보려는 것을 영웅이 붙잡아 둘러준 것이었다.
목에 밴드를 여러 개 붙여 놓으면 보는 사람의 걱정을 살 테고, 쿨팩을 붙이기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행커치프였다.
입고 있는 잠옷은 어젯밤 갈아입은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지만 영웅의 것이라 몸에 맞지 않고 헐렁하기 그지없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바깥을 살피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사랑스러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서재 문 열려 있어요?”
조용히 묻자 놀란 채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돌아보았다.
“쉿! 네, 문은 닫혀 있어요.”
속닥이는 채언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영웅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채언은 자신의 대답에 긍정과 부정이 섞인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라이언은 침대에 가서 누워 있어요. 건영이 어디서 자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토스트 만들어올게요.”
“나 지금 꼭 안 먹어도 되는데.”
“쉿.”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요.”
지금 바로 침대에 가 누우라는 듯 채언은 손을 잼잼하듯 팔랑거렸다. 머뭇거리던 영웅이 침대로 걸어가는 것을 본 채언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잡고 있는 문손잡이를 당겨 문을 더 열었다. 그때였다.
“흐아암.”
갑자기 들려온 하품 소리에 채언은 화들짝 놀라 문밖을 쳐다보았다. 서재를 나온 건영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목을 양옆으로 꺾어 근육을 풀던 건영과 놀라 굳은 채언의 눈이 마주쳤다.
“혀아, 거기서 머 해?”
하품하느라 눈에 고인 눈물을 닦은 건영이 채언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어? 어? 나 여기….”
“뭐야? 거기서 잤어?”
“응?”
“형 방은 저기 복도 저쪽 아니었나?”
팔뚝을 긁는 건영의 눈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언은 재빨리 뒤를 확인했다. 다행히 영웅은 건영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후다닥 침대 위로 뛰어든 듯했다.
“어, 맞아. 내 방은 복도 끝에 있어. 여기 아니고, 저쪽 맞아.”
“근데 왜 거기서 나와? 으음, 어제 여기 영화 보는데 바로 옆이 집주인 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한숨 비슷한 소리로 채언은 겨우 대답한 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일어나서 배가 고파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치즈 토스트를 만들어 먹으려고. 그런데, 어… 라이언도 먹을 건지 물어봤어. 아니! 그러니까 앤디. 앤드류도 먹을 건지. 너는 지금까지 드라마 본 거야? 나 방금 막 일어났는데, 저쪽 방에서. 일어날 때 보니까 옆에 너 없더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침실 문을 닫은 채언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계속 드라마 본 건 아니고. 나 보다가 여기서 잠들었어. 일어나 보니까 지금이더라.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자고 싶었는데.”
“그랬어?”
다행히 건영에게서 어떤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한 채언은 또다시 하품하는 건영을 보며 물었다.
“아침 먹을래?”
“아니, 나 조금만 더 잘래. 소파가 편하긴 했는데 그래도 소파라 그런지 너무 피곤해. 밥은 점심에 먹을게.”
건영은 두 손을 깍지 낀 뒤 머리 위로 팔을 쭉 뻗어 올렸다.
“그래, 알겠어. 얼른 가서 편하게 자.”
“나 때문에 바닥에 이불도 깔아놨을 텐데, 미안.”
“어? 아냐 아냐.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려고 베개만 옆방에서 가져왔다가 다시 돌려놓고 왔어. 아까, 언제 그랬냐면 나 일어나자마자 너 없길래. 아무래도 아직 드라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 방에 가자. 자야지.”
“응.”
채언은 건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형.”
“응?”
“좀 이상하다, 뭔가?”
“뭐가.”
태연한 척 말했지만, 건영의 말에 잔뜩 긴장한 채언의 목소리는 끝이 살짝 떨렸다.
“아니 어제, 흐음….”
“왜, 어제 뭐.”
채언은 목에 맨 행커치프를 만지며 혹시 매듭이 느슨해졌나 확인해 보았다. 혹시 목에 생긴 울혈을 발견한 건지도 몰랐다.
건영의 말을 기다리는 사이 온몸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어제 몇 번 자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크게 냈던 것 같은데 들었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형, 어제는 잠옷이 딱 맞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왜 이렇게 헐렁해 보이지?”
“잠옷, 잠옷이?”
채언은 숨을 훅 들이마시며 손등을 가리고 있던 잠옷 소매를 매만졌다. 같은 디자인이라도 영웅과 사이즈가 차이 나니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이래. 작아서 딱 맞는 것보다 널널한 게 잘 때 편할 거 같아서 살 때 큰 걸 샀어.”
“근데 어제는 이렇게 안 커 보였다니까?”
“네가 날 너무 존경해서 내가 커 보였나 보지.”
“아, 뭔 소리야. 형, 아무래도 이상해.”
건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채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너 지금 자다 깨서 퉁퉁 부었어, 네 얼굴이 더 이상해.”
“형도 퉁퉁 부었거든? 나 잘 때 라면 먹었어?”
채언은 말없이 건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복도 끝에 있는 방이 왜 이렇게 먼지 모를 일이었다.
“내 생각에는 형아 밤사이에 키가 줄어든 것 같아. 나보다 쪼끄매지더니 매일 매일 키가 줄어드는 거지.”
옆에서 건영이 킥킥 웃는 소리를 들으며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너 많이 졸리지?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자.”
“그런데 스카프는 왜 했어?”
“손수건이야.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칼칼해서.”
“아침 먹고 뭐 할 거야?”
“몰라. 먹고 나서 졸리면 낮잠 자겠지.”
“헉! 그럼 또 키가 줄어드는 거 아니야?”
“그래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아직 잠이 덜 깬 건영은 꼭 술주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포옥 한숨을 내쉰 채언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방문을 잡아 열었다.
“자라.”
“옆방에 있을 거지? 이따 깨서 배고프면 형 깨우러 갈게.”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따 봐. 상추 뜯으러 가서 졸리면 안 되니까.”
“형, 상추를 먹으면 졸리대.”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그냥, 상추 하니까 생각나서. 흐아암.”
건영이 하품하자 채언은 재빨리 손을 들어 벌어진 건영의 입가를 두드렸다. 왕왕왕왕 소리가 났다. 채언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자 건영이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뒤로 몸을 물렸다.
“얼른 들어가서 자. 나는 손 씻어야겠다.”
“내 입이 더럽다는 거야?”
“어. 아무튼, 얼른 누워, 자. 문 닫아줄게.”
채언이 건영의 등을 밀었다.
“알겠어, 알겠어.”
건영은 양손을 깍지 낀 채 팔을 위로 쭉 늘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건영이 얌전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 것을 본 채언은 조용히 문을 닫으려 했다.
“저기요, 아저씨.”
“네, 왜요.”
“불 좀 꺼주세요.”
“불 꺼져 있거든요?”
“아, 예에. 저 이제 잘 거니까 말 걸지 마세요.”
“참나.”
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복도에 혼자 남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채언은 음식을 얹은 베드 트레이를 가지고 침실로 들어왔다. 혹시 영웅이 잠들었을까 봐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는데, 기척을 느꼈는지 베개를 베고 누워 있던 그가 슬쩍 머리를 드는 것이 보였다.
“왔어요?”
“안 자고 있었네요.”
커다란 창을 반쪽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도 걷어진 상태였다.
채언은 영웅에게 베드 트레이를 건넨 뒤 자신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을 다리에 덮은 뒤 편히 앉으려는데 베개 근처를 짚은 손에 부스럭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지? 손에 닿는 것을 잡은 채언은 팔을 들다 그대로 멈췄다. 손에 잡힌 것은 메모지였다. 어젯밤 영웅의 손가락 사이즈를 재기 위해 표시를 해둔 메모지.
도르륵 검은 눈동자가 영웅을 살폈다. 그는 베드 트레이가 흔들리지 않게 위치를 잡고 있었다. 채언은 자연스럽게 메모지를 잠옷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약봉지를 숨긴 날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영웅의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채언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메모지의 느낌에 볼에 난 상처의 원인을 알아챘다. 어쩐지 손톱이나 이보다는 종이에 베인 상처 같더라니. 잘못은 메모지가 했는데 새벽부터 영웅만 억울하게 마음고생을 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침대 위에서 그에게 메모지를 보여줄 수 없어서 채언은 미안한 표정을 숨기며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단단한 팔이 채언의 허리를 둘러 안아왔다.
“동생은요?”
채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자요. 아까 복도에서 마주친 거 알죠?”
“응, 목소리 들었어요.”
“드라마 보다가 잠들었대요. 졸리다고 해서 점심 먹기 전까지 방에 들어가서 더 자라고 들여보냈는데, 이거 만들고 가서 보니까 얌전히 자고 있더라고요.”
“그럼 채언 씨도 이거 먹고 여기서 좀 더 자요.”
“안 돼요. 그러다 건영이가 중간에 깨면 아까랑 똑같은 상황 반복이라구요. 이것만 먹고 저쪽 방으로 갈 거예요.”
한껏 입꼬리를 내려 보이는 영웅의 표정에 채언은 똑같이 입꼬리를 내려 보였다. 그러자 영웅이 얼른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며 웃은 채언은 삼각형으로 자른 치즈 샌드위치를 집어 영웅에게 내밀었다. 잘 녹은 치즈가 삐죽 흘러나와 있었다.
“드세요. 평소에 먹던 것보다 치즈 더 많이 넣고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가 잘 구워진 샌드위치를 베어 물자 채언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구워 온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었다.
바삭바삭한 소리와 함께 달콤함을 꿀꺽 삼킨 채언은 들고 있는 빵 끄트머리를 조금 떼어 먹으며 말했다.
“라이언, 먹고 나서 더 잘 거죠?”
“음, 한두 시간 정도?”
“저도 좀 더 잘 건데.”
“그렇죠? 두 시간 정도는 같이 더 누워 있어도 되겠죠?”
먹고 나서 곧바로 다른 방으로 돌아가겠다던 채언의 마음이 바뀐 줄 알고 영웅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채언은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러면?”
“베개 좀 빌려 가도 돼요?”
영웅의 입술이 시원하게 벌어졌다.
“대신 제 베개 빌려드릴게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 순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서서히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느긋하고 게으르게 달콤하고 짭짤한 아침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