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안녕히 가세요.”
“네. 잘 먹었습니다.”
식당을 나오자 연호의 입술 새로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마치 눈이 내리고 있는 듯한 날씨였다. 연호가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심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도 별다른 눈 소식 없이 지나가 버릴 모양이었다.
어느덧 사회인이 된 연호에게 눈은 더 이상 예전만큼 가슴 설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호는 올해도 눈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연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연호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 어디예요?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첫마디였다. 연호가 익숙하게 근황 보고를 했다.
“지금 밥 먹고 나왔어요.”
- 점심을 이제 먹었어요?
“바빴….”
- 그 회사는 점심시간을 1시간도 다 안 주면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대요?
연호의 말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잔뜩 날을 세우는 모습이 유진의 기분을 짐작케 했다. 연호가 사회인이 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첫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는 만큼 이제 그만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연호와 관련된 일이라면 유진은 무엇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고작 몇 년의 시간이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유진의 지난날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언제라도 연호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나 버릴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연호의 애정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동안은 무엇 하나 허투루 흘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동안은 오롯이 유진만의 것이어야 했다.
그런 유진에게 익숙해진 연호가 능청스럽게 유진을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회사 돈으로 먹은 거라 공짜 밥이었어!”
- 이번 달에만 철야를 몇 번이나 시키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근로 기준법 위반이에요.
또 시작이었다. 연호의 회사에 대한 유진의 불만은 구체적이었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이래서 직업병은 숨길 수가 없었다.
“막내야! 빨리 안 오냐!”
“네! 갈…. 아, 진짜! 이제 막내 아니라니까요! 오늘은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끝나면 전화할게. 이따 봐!”
유진이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는 정말 끊어야 했다. 쪽, 쪽, 쪽! 연호가 아쉬운 대로 휴대폰에 대고 연신 입을 맞췄다.
“저 새끼 저거 또 지랄이네.”
“흉측하다, 흉측해. 차라리 결혼을 해라.”
“몇 년이나 만났다면서 아직도 그러고 싶냐?”
부장을 비롯한 회사 사람들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가 부장과 과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슬슬 연호도 한계에 다다른 참이었다. 유진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부장님. 오늘은 퇴근할 수 있어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너희 사장님한테 물어봐.”
그게 부장인 네놈이 할 소리냐. 연호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부장이 장난이었다며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저 혼자만 재미있어 했다. 모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이럴 때는 아무런 호응도 해 주면 안 되었다. 자기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고 괜히 버릇만 나빠졌다. 어느덧 사회생활 노하우가 생긴 연호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칼 같은 정색을 했다. 머쓱해진 부장이 모두가 기다리던 퇴근 소식을 알렸다.
“그럼 이틀만 더 고생하자. 요즘 같은 시대에 일이 있는 게 어디야. 힘들 내고!”
정작 사장은 가만히 있는데 부장이 더 난리였다. 이건 그냥 퇴근 예고제였다. 그마저도 퇴근은 이틀 후였다.
오늘은 정말로 퇴근할 줄 알았는데…. 뿔뿔이 제자리로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연호가 투덜투덜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너 어디 가. 일 안 해?”
“화장실 가는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너 여자 친구한테 전화 하러 가지!”
알면서 물어보기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연호가 부장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걸었다. 물론 통화는 밖에서 했다. 예상대로 유진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더는 연호의 회사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연호는 한참 동안 유진을 달래야 했다.
“저놈 저거 통화하는 시간 월급에서 까야 돼.”
“아직 점심시간이에요.”
“다들 일 하는 거 안 보여?”
“네. 안 보여요.”
연호는 하는 짓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부장이 괜히 연호에게 딴죽을 걸었다.
“여자 친구는 뭐래. 안 징징거려?”
“오늘 안으로 퇴근 안 시키면 고소한다는데요.”
“아이고, 잘들 논다. 고소가 애들 장난이냐?”
부장은 코웃음을 쳤지만 연호는 진지하게 유진이 걱정되었다. 연호가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유진은 농담을 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그런 장난을 칠 만한 유도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라 그래. 나도 실업 급여나 받자.”
게다가 그는 이제 막 등용이 된 사람이었다. 초임이라지만 매일 검찰청을 드나들고 재판을 준비하는 진짜 검사였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진짜 고소하진 않겠지.
연호는 속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는 부장을 감흥 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현장에 나갈 준비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유진을 보지 못한 지도 벌써 며칠 째였다.
사무실 매트에서 쪽잠을 자는 생활이 계속되자 몸이 한계를 호소해 왔다. 한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자는 삶을 영위해 온 연호에게 지금 같은 수면 부족은 난생처음이었다. 연호는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다시 연락하겠다는 내용이 전부인 메시지에 유진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사장님 바지 사장인 거 알아요? 회사 실 소유자는 따로 있어요.」
어쩐지. 부장한테 쪽도 못 서더라. 연호가 단번에 동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얘기는 왜 하는 거지? 따로 알아봐야 알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연호가 졸음을 참으며 간신히 답장을 보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사장님 존재감 진짜 없어요.」
「근데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많이 피곤하죠. 잘 자고 일어나면 연락해요. 이제 곧 푹 쉴 수 있을 거예요.」
숙면을 허락받은 연호가 이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연호가 퇴근을 한 건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예상보다 하루 이른 퇴근에 연호가 쾌재를 불렀다.
집에 가자마자 자야지. 숨만 쉬면서 잠만 잘 거야. 침대에서 하루도 안 일어날 거야. 연호가 끊임없이 주문을 되뇌며 빈집에 들이닥쳤다. 그간 연호가 출타한 탓인지 집 안 그 어디에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은 급한 대로 샤워부터 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왔다.
자자! 그 기억을 끝으로 연호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잔 건지 나중에는 꿈과 현실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 어디예요?
- 듣고 있어요?
- 연호야.
- 연호야, 지금 어디야.
- 지금 어디….
“…형?”
귓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연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의식중에 갖다 놓은 건지 얼굴 위에 휴대폰이 올려 있었다. 언제 전화를 받은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연호가 간신히 눈을 떴다. 방 안이 새카맸다.
-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목이 잠겨 있을 뿐, 연호는 무탈했다.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와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몰린 잠을 몰아 잤다. 연호가 능숙하게 유진을 진정시키며 지난 일과를 보고했다.
- 그래서 지금 어딘데요?
“집인데요.”
- 너….
평소라면 이쯤에서 진정이 됐을 텐데 유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나? 아닌데. 나 이상한 짓 한 거 없는데. 사태 파악을 위해 연호가 간신히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언뜻 새하얀 풍경이 보였다. 어두워야 할 창문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형! 어디예요?”
-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요. 너 어디야.
“집이라니까. 형은 어디야. 왜 안 와요.”
- …지금 집에 도착했어요. 그래서, 진짜 어디예요?
탁, 밖에서 무게감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호가 통화를 하다 말고 쫑긋 귀를 세웠다.
- 어머니한테 다 듣고 왔으니까 거짓말 할 생각 하지 말고.
휴대폰 너머로 유진이 무어라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연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숨죽이며 기회를 찾고 있었다.
- 아직 집에 안 들어갔다며.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연호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지금 어디….”
지금이었다.
“짠!”
연호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유진을 맞이했다.
“우리 유진이,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활짝 벌어진 양팔이 어색할 정도로 유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연호를 쳐다볼 뿐이었다.
“형?”
“…….”
“형, 왜 그…. 으악!”
당황스러워 할 틈도 없이 연호가 침대 위로 발랑 나동그라졌다. 품 안 가득 유진을 끌어안은 채였다. 그렇게 냅다 달려들 때는 언제고 유진은 연호의 가슴에 매달려 연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집이라며.”
“응.”
“우리 집 얘기한 거였어요?”
“그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연호가 의아해하자 유진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유진이 웃자 연호가 따라 웃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 유진은 연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았다. 유진이 애교스럽게 두 눈을 접어가며 연호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아, 완전 좋아….”
연호는 유진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 연호가 참지 못하고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혀엉. 보고 싶었어요.”
쪽, 쪽. 목소리보다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요?”
“…….”
“응? 안 보고 싶었어?”
연호가 대답을 듣기 위해 입맞춤을 멈추자 유진이 불퉁한 얼굴로 연호를 쳐다보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달콤하게 불만을 토로해왔다.
“더….”
“어?”
“좀 더….”
“뽀뽀 더 해 줘요?”
“응.”
이제 유진은 연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연호도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연호는 유진이 자신을 필요로 해 줄 때 가장 기뻐했다. 지금처럼 유진이 대놓고 응석을 부리면 연호는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다.
혀끝을 빨며 살짝 살짝 입술을 깨무는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연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유진은 어느새 연호 위에 완전히 올라타 있었다. 유진이 연호의 혀를 빨며 물었다.
“저녁은. 배고프지는 않아요?”
“안 먹긴 했는데….”
수면욕이 식욕을 이겼다. 연호가 뒷말을 우물대며 빠져나가는 유진의 혀를 붙잡았다.
“케이크 먹을래요? 와인도 사 왔어요.”
연호가 밥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유진이 케이크를 권해 왔다. 밖에서 물건 내려놓는 소리가 나더니 케이크와 와인을 사온 모양이었다.
“어머니 드린 건 다른 거니까 이것도 먹고 집에 가서도 먹어요.”
“우리 엄마 만났어요?”
“아까, 집에 갔다가…. 응….”
가볍게 혀를 빨던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다. 연호가 헐떡이며 말했다.
“엄마, 가, 티켓, 응…. 고맙대요….”
“응. 들었어요….”
“매년, 고맙다고…. 아….”
연호의 엄마는 유진을 연호와 친한 형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매년 기념일마다 연호에게 선물을 해 주고, 무료 티켓이나 쿠폰이 생기는 족족 연호의 엄마를 챙겨 주는 아주 좋은 형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연호의 엄마에게 최대한 잘 보여 두기 위한 유진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동시에 몇 년 전에 있었던 유진의 잘못에 대한 사죄의 뜻이기도 했다.
“케이크 안 먹어도 돼요?”
판판하다 못해 홀쭉해진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유진이 물었다. 연호가 케이크가 싫다고 하면 나가서 뭐라도 사 먹일 생각이었다. 이미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연호를 먹일 24시간 음식점은 차고 넘쳤다.
“안 먹을래요.”
연호는 출근 전까지 침대에서 하루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해야 했다. 이 날에 맞춰 세 달 전부터 받아 놓은 휴가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자고 싶어요.”
애초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말 그대로 쿨쿨 자고 싶다는 의미가 더 컸다.
“…응.”
쪽.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산뜻한 입맞춤과 달리 아래에서는 연호의 바지가 벗겨지고 있었다.
“나도 자고 싶어요.”
정말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모든 건 유진의 오해에 불과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오해는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연호가 허리를 띄워 속옷을 벗기는 유진의 손길을 도왔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잡아 벌리는 유진을 받아들이며 연호가 스스로 상의를 벗었다. 오랜만에 닿는 상대방의 체온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유진의 위에 올라타 있던 연호는 또다시 침대로 끌어내려졌다. 혀가 엉키고 내벽과 성기가 맞물리자 쾌감이 한층 강해졌다. 강한 허릿짓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 끝까지 내몰린 연호가 다급하게 유진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유진이 입을 맞추며 연호의 등을 안아 올렸다.
서로를 마주 안은 자세로 동시에 사정했다. 콘돔도 없이 도대체 몇 번을 한 건지 성기가 아직 들어 있는데도 안에서부터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연호가 매달리듯 유진을 끌어안았다.
“눈….”
연호를 마주 안은 유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연호가 몇 년을 기다려온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유진이 연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연호도 유진을 따라 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