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빨리 걷지 못해?! 이 파렴치한 가문의 핏줄들아!”
털보 노예 상인이 냅다 이나택의 등을 발로 찼다. 힘없이 걸어가던 나택은 그대로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고꾸라진 시야에 환영처럼 안내 문구가 떴다.
가문의 몰락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습니다.
동시에 털보가 채찍 하나를 들고선 우렁차게 소리쳤다.
“오늘부터 너희는 위대한 우루크 니누르타 가문의 노예다!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나택이 콜록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손발에 묶인 줄에 피부가 쓸렸다. 쉬지 않고 반나절을 꼬박 걸었더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거기다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온몸이 익을 것 같았다. 나택이 느린 움직임으로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또 한 번 메시지가 떴다.
[메인] ‘노예의 서’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돌아 버리겠네.”
나택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에 들어간 흙먼지를 뱉어 냈다. 눈앞에는 흙으로 만든 네모진 건물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과일, 채소, 바구니 따위가 가판대며 바닥에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니 시장통인 듯했다.
사람들은 죄다 길거나 짧은 스커트 차림이었다. 얼핏 보면 로마나 그리스의 복식과 닮아 보였지만 이것들은 카우나케스(고대 수메르나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사용하던, 겉에 술 장식을 하고 층이 지게 한 천. 허리에 감거나 어깨에 걸쳐 입었다)라고 불리는 고대 수메르의 의상이었다. 즉, 나택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란 뜻이었다.
“대체….”
나택이 황당하다는 듯이 또 한 번 중얼거릴 때였다. 굼뜬 나택의 움직임을 본 털보가 말아 쥔 채찍을 푸르며 다가왔다. 그때 옆에서 웬 놈이 랩을 하듯 다급하게 속삭였다.
“테레시!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나까지 처맞게 하지 말고 빨리 걸으란 말이야!”
나택이 말을 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곱슬머리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나택을 노려보고 있었다. 놈은 나택이 빙의한 ‘테레시’의 형이었다. 나택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놈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시 외쳤다.
“빨리!”
나택은 일단 몸부터 움직였다. 놈의 말에 따라 주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 있다간 털보에게 매질 당할 확률이 백 퍼센트였다. 맞는 건 싫다. 더군다나 회초리도 아니고 채찍이라니.
나택의 걸음이 빨라지자 함께 줄줄이 엮여 오는 노예들의 속도도 올라갔다. 털보가 다시 채찍을 말아 쥐며 행렬의 저 앞으로 멀어졌다. 털보가 멀어지자마자 곱슬머리가 나택을 보며 이를 갈았다.
“테레시, 이 빌어먹을 놈아. 한 번만 더 나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간 네놈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염장해 버릴 거다.”
나택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곱슬머리를 흘겼다.
테레시. 이 이름은 나택이 닉네임을 지을 때나 게임 캐릭터를 생성할 때 늘 써먹는 세글자였다. 이나‘택’의 한 글자를 딴 이름으로 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그리고 테레시라는 이름. 두 단서를 한데 붙이고 나니 나택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곳이 제가 얼마 전까지 했던 롤플레잉 게임 ‘수메르의 아눈나키’ 속이라는 걸 말이다. 극악의 난이도로 매번 공략에 실패하고 파멸 엔딩만을 보았던….
나택이 벙 찐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자 곱슬머리가 짓씹듯 윽박질렀다.
“똑바로 대답 안 해?!”
나택의 입에서 허, 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대체 내가…….
“내가 뭐라고 대답해 줘야 되냐….”
“뭐라고?!”
말아 먹어 가는 게임 속 고대 도시에서, 그것도 노예로 눈을 뜨게 됐는데.
내가 너한테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 * *
실려 온 노예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웅장한 대저택은 사면이 백색의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 털보가 기세등등하게 노예들을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던 저택 내 시종 몇이 털보에게 허리를 숙였다. 노예 상인인 줄로만 알았던 털보는 이제 보니 저택의 노예 관리인의 역할도 하고 있는 듯했다.
정원과 안채, 안뜰을 지나고 볼품없는 흙벽돌 창고 앞에 도착했을 때 털보가 한 손을 들었다. 그 신호에 노예들이 줄줄이 멈추었다.
나택을 비롯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노예들은 전부 죽을상이었다. 지나다니는 저택 내의 사람들이 그런 노예들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끌려오는 동안 나택이 느낀 피로함과 고통은 여전히 생생했다. 게다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질 않고 있으니, 이제는 이게 허상이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 했다. 나택은 생각했다. 일단은 눈앞의 말도 안 되는 상황부터 파악해 보자고.
나택이 플레이하던 ‘수눈키(수메르의 아눈나키 줄임말)’는 극악의 난이도로 악명이 높은 게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6개 도시국가를 통일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키워, 최종적으로는 히타이트의 침공을 막아 내야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
그러나 나택은 한 번도 수눈키의 엔딩을 본 적이 없었다. 나택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시키는 단계에서 늘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여섯 개 중 마지막 도시 하나를 죽었다가 깨어나도 점령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눈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배경으로 했지만, 고증이 엉망이었다. 때문에 역사서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다섯 번째 도시까지는 성공했었는데….
나택은 노예 관리인 털보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오늘부터 너희는 위대한 우루크 니누르타 가문의 노예다!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우루크’는 플레이 초반에 첫 번째로 점령해야 하는 도시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튜토리얼 수준의 초 하급 난이도였다.
나택은 이곳에서 눈을 뜨기 직전 플레이 하던 캐릭터 정보를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분명 나택은 공격력에 스텟을 몰빵한 가문 ‘이난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가문의 성격대로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올인해서 도시를 키웠다. 그렇게 키운 도시 라가쉬가…….
‘우루크에게 패한 상황이라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가문이 노예가 되었고? 이건….’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나택이 입술을 악물며 눈을 질끈 감는데 옆에서 누군가 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둘째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옆을 돌아보자 통통한 남자가 걱정스럽게 나택을 보고 있었다. 꼭 쥔 두 손은 긴장으로 벌벌 떨렸다.
나택이 한숨을 쉬자 곱슬머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두. 이 버러지에게 신경 쓸 여력이 있다면 와서 여기나 좀 긁어. 가려워 죽겠네.”
“예, 첫째 주인님.”
두두라 불리는 종이 곧바로 곱슬머리의 뒤로 가서 묶인 손으로 낑낑대며 등허리를 긁어 주었다. 어느새 털보는 사라지고 없었다. 짐작해 보건대 노예들이 배치될 자리를 확인하러 간 듯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정말 꿈이 아니라고?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는 있나.
혹시 게임의 엔딩을 보면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유일한 희망 회로를 돌려 보았지만 이미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됐는데, 엔딩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답이 없다. 나택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깊은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때, 나택의 새카만 시야 앞으로 또 한 번 선명한 메시지가 떴다.
정체 모를 기운이 안채의 창고에서 흐릅니다.
눈을 번쩍 뜬 나택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지나쳐 온 건물 중 하나에서 푸른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저 빛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설마 저기에 출구가 있는 건가.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줄 단서?
나택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또 한 번 문구가 떴다.
정체 모를 기운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나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로 푸른빛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뭔진 몰라도 반드시 저곳으로 가야 한다. 일단 가고 봐야 한다. 정체 모를 빛은 이 상황에서 나택에게 유일한 길잡이였다.
* * *
빨리 가야 하는데. 양발을 이어 놓은 줄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에 묶인 줄은 제 것만을 결박했지만, 다리에 묶은 줄은 다른 노예들의 것과 느슨하게 이어져 있었다.
나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잘라 낼 만한 물건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나택의 발밑에서 작은 빛의 점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반짝였다. 이건 수눈키에서 아이템의 위치를 짚어 줄 때 보내는 신호 중 하나였다. 나택이 얼른 발 앞꿈치로 흙바닥을 헤집었다. 그러자 작고 날카로운 금속이 나왔다.
앞뒤로 서 있는 노예들은 다들 절망에 빠져 혼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나택이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비통한 심정에 빠진 사람처럼 쭈그리고 앉는 자세는 자연스러웠다. 나택이 느린 동작으로 작은 날붙이를 쥐었다. 그러고는 발목을 묶은 끈을 조심스럽게 잘랐다. 꽁꽁 묶인 손목의 밧줄을 끊는 것은 작은 날붙이로는 역부족이었으나 다리가 자유로워진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냄새나는 노예들이 몰려있는 탓인지 사람들 모두가 창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나택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감시하는 이가 없는 틈을 타 나택이 조용히 노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눈치 빠른 두두가 자유로워진 나택의 다리를 보고는 둘째 도련님 어디 가시냐며 나택을 붙잡았다. 하지만 볼일이 급하다는 말에 모르는 척 그를 놓아주었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말은 시대를 불문하고 통하는 핑계 같았다. 어쩌면 한때는 귀족이었을 테레시의 체면을 위해 종이 보이는 충성심일 수도 있겠다.
푸른빛이 눈에 띄게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람들을 피해 기둥에 몸을 감추며, 혹은 태연하게 저택의 사람인척하며 걷다 보니 뛸 수가 없었다. 묶인 손 역시 민첩하게 움직이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나택의 걸음이 조급해졌다.
빛이 나는 자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이 건물 하나만 지나면 된다. 나택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경보할 때였다.
쿵-.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나택이 흠칫 놀라 옆을 보았다. 푸른빛에 정신이 팔려 정작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게 맞나? 일단은 냅다 고개부터 숙였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바닥 저 밑에 깔릴 정도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답을 했다. 좆 됐다. 엎어져서 싹싹 빌기라도 해야 하나.
“죄송…….”
“목숨이 몇 개나 되나 보지. 형님들이었다면 바로 목이 날아갔을 거다. 조심히 다녀.”
남자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나택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남자가 먼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 나택의 몸에 쌓여 있는 경험과 기억의 데이터가 그러라고 시키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자가 먼저 나택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한고비를 넘긴 맥박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택이 얼른 다시 창고로 가려 한 걸음을 뗀 찰나였다.
“잠깐.”
그대로 떠나는가 싶던 남자가 나택을 불러세웠다. 얼음처럼 굳은 나택의 앞으로 남자가 돌아왔다. 그 덕에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나택보다 키가 큰 남자는 반듯한 코에 매끈한 턱선, 처진 눈을 하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에 회색 눈은 이국적이었다. 얼핏 봐도 이곳의 사람들과 다른 외모다.
나택을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줄로 묶인 손목에서 멈추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노예인가?”
“……네.”
“이름은?”
“이나….”
맞다. 여기서는 테레시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나택이 말을 정정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아, 하고 짧은 추임새를 뱉었다.
“이난나 가문의 사람인가 보군. 오늘쯤에 도착할 거라더니.”
얼결에 뱉은 답인데 위화감 없이 대화가 흘러갔다.
“이난나 가문의 사람이라면 더욱 조심하도록 해. 이 집안 놈들 모두 그쪽 가문에 쌓인 게 많으니까.”
마치 남 얘기를 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빨리 저 푸른빛으로 가야 하는데. 나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자 남자가 미련 없이 다시 나택의 뒤로 사라졌다.
인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나택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빛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았다.
정체 모를 기운이 사라져 갑니다.
안 돼. 꺼지면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