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나택은 앞뒤 잴 것 없이 창고로 돌진했다.
내부에는 곡식이 담긴 항아리가 가득 차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 꺼지기 직전의 빛이 스며 나왔다. 나택이 허겁지겁 달려가 항아리 속에 묶인 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담겨 있던 보리알이 넘쳐흘렀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동시에 메시지가 떴다.
‘초보자용 단검’을 획득하셨습니다!
‘오래된 편지’를 획득하셨습니다!
묵직한 덩어리 두 개가 나택의 손에 잡혔다.
“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택이 손을 끄집어냈다. 손바닥만 한 단검과… 흙덩어리가 딸려 올라왔다. 덩어리를 뒤집자 그림 같은 문자가 새겨진 면이 드러났다.
“미친…….”
점토판이었다. 쐐기 문자가 적힌 점토판.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편지의 진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오래된 편지’를 읽을 수가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까?
“장난하나….”
나택이 실재하지 않을 허공의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분명 게임 플레이 초반에 ‘오래된 편지’를 얻는 퀘스트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현대어로 된 읽을 수 있는 편지였고, 내용에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택은 항상 편지가 뜨는 부분을 빠르게 스킵하곤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여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돌아 버리겠네….”
나택이 짜증스럽게 눈을 감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점점 창고 쪽으로 다가왔다. 망할 게임, 생각할 시간조차 주질 않는다. 나택은 낑낑대며 단검과 점토판을 옷 속에 감췄다.
어디로 숨지.
일렬로 늘어선 항아리의 저 끝에 좁은 공간이 보였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나택은 재빨리 움직여 항아리 뒤로 몸을 숨겼다.
사락 소리를 내며 갈대로 엮은 문이 열렸다. 말소리가 선명해졌다.
“전부 목을 따 버렸어야 했는데. 역시 우리들의 엔시(군주)는 마음이 넓으셔. 이난나 놈들을 노예로 거두어 주시다니!”
“그 자식들 콧대를 확 눌러 버리자고. 특히 그 집안의 아들놈들! 여기서는 더 이상 귀족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닫게 해 주겠어.”
대체 이난나 집안의 아들놈들이 뭘 했다고 저렇게까지 미워하는 걸까. 이난나 가문의 아들로 빙의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택은 억울했다.
시종 한 명이 대화를 이었다.
“근데 우리가 놈들을 부려 먹을 일이 있을까? 아무리 봐도 두 놈은 작은 주인님들 시종으로 배정될 것 같은데.”
“아. 그렇겠네. 꼴에 귀족 출신이라고. 젠장! 놈들을 발밑에 깔아 놓고 바닥을 핥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셋째 주인님의 시종으로는 누가 배정될까?”
“난들 아나. 누가 될진 모르겠지만, 셋째 주인님 시종으로 들어가는 놈은 이난나 가문에서도 가장 운이 없는 놈일 게 틀림없어. 셋째 주인님은 허울뿐인 가짜 귀족이잖아? 가짜를 모시는 노예라니. 이 저택 내에서 놈의 위치는 바닥 중의 바닥이 될 테지.”
“쉿. 조용히 해. 셋째 주인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시종이 자라처럼 목을 빼더니 창고 바깥쪽을 힐끔거렸다. 시종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뭘 조용히 해야. 솔직히 니누르타 대저택 안에서, 셋째 주인님이 평민만도 못한 취급 받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생긴 것부터 불길하잖아. 허연 피부에 물 빠진 머리카락 하며, 눈깔 색까지도 야만스러워.”
“그건… 그렇지. 그렇긴 해.”
“거봐. 게다가 우루크 출신도 아니고, 니누르타 가문의 핏줄도 아니지. 뿌리도 모르는 미개한 야만족 태생이 어떻게 우리의 주인으로 있냔 말이야! 마음 넓으신 엔시께서 거두어 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돌 맞고 땅속에 묻혔을 놈이. 게다가 그 더러운 성질을 보라고. 그런 게 건방지게 우리의 위에 있다고?”
듣고만 있던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주인님…?”
나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눈키 속 메소포타미아는 도시가 곧 국가인 도시국가 체계였다. 그래서 한 가문의 최고 우두머리가 곧 군주가 되었고, 군주를 엔시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놈들의 얘기를 듣자 하니 지금 뒷담화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이 가문의 셋째 아들인 것 같았다. 게다가 우루크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 출신. 입양인가? 이런 설정이 있었던가?
한참 고민하던 나택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략하기 쉬운 난이도라고 퀘스트며 영상을 모조리 스킵했으니 기억에 남는 게 있을 턱이 없다. 불성실한 태도로 게임에 임한 과거의 제 손을 쥐어박고 싶었다. 그때 내용들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보았다면 우루크 내의 상황을 파악하기가 조금은 수월했을 텐데.
시종 중 목소리 큰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셋째 주인…. 아니, 메데우스 그놈은 분명 이 땅에서 축출될 거야. 그때는 지금까지 당했던 치욕을 모조리 되갚아 주…….”
“뭐 하러 그때까지 기다려. 지금 해 보지 그래?”
시종 두 명의 말이 순식간에 끊겼다. 언제 온 건지 장신의 남자가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세… 셋째 주인님…. 어, 언제 오셨….”
“허울뿐인 귀족님께서는 방금 오신 참이지.”
“......”
멀리서 몸을 숨기고 있는 나택에게까지 긴장감이 전해졌다. 장신의 남자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홀로 문가에 기대서 있을 땐 늘씬하게만 보였는데, 시종 둘에게 가까이 다가선 남자는 두 시종을 합한 것만큼이나 체격이 컸다. 남들보다 긴 팔다리 때문에 착시라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멀리까지 갈 필요 있나. 지금 해 봐. 기회를 줄 때 잡도록 해.”
남자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한 바퀴를 돌리더니 손잡이 쪽을 시종에게 내밀었다. 시종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 기다리던 남자가 손에 쥔 검을 까딱 흔들었다.
“내가 네게 준 치욕을 갚아야 할 것 아냐. 그렇지?”
“세, 셋째 주인님…. 오해십니다. 그건….”
“설마 어떻게 치욕을 당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건가?”
“그….”
시종들이 우물쭈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시종 중 하나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다 기억하는데.”
남자의 처진 눈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검이 다시 남자의 손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칼끝이 방향을 바꿔 시종의 고간으로 향했다. 무릎까지 오는 놈의 스커트 끝자락이 칼등에 걸려 쓸려 올라갔다.
남자가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좆같이 구는 새끼인데. 좆이 달린 건지 아닌지 봐도 모르겠다고 했었고.”
허벅지까지 올라가던 옷자락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떨어졌다. 칼끝이 이번에는 시종의 어깨 한쪽에 닿았다.
“머리가 달려 있긴 한데. 속에 든 게 없는 건지 텅 빈 항아리 소리만 난다고도 했었지. 또 뭐라고 했더라?”
반듯한 칼의 너른 면이 시종의 턱에 닿았다. 남자가 느리게 검으로 시종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이 달려 있긴 한데 눈치란 게 없는 걸 보니, 쓸모없는 눈알은 뽑아 버려도 될 것 같다고도 했던 것 같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넌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너무 많아. 나댈 상대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새끼가 몸에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있어. 말 나온 김에 쓸모없는 것들은 내가 예쁘게 다듬어 줄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셋째 주인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음으로 사죄를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시종이 바닥에 바짝 엎드려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다. 옆에 있던 다른 시종 역시 처절하게 빌었다.
남자가 꼴 보기 싫다는 듯 엎드린 놈들을 발로 툭툭 밀었다.
“기분 잡 치게 하지 말고 꺼져.”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시종들이 굽신거리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바람처럼 내빼는 놈들이 사라지자 창고 안에 적막이 흘렀다.
셋째 주인이라는 저놈…. 아무리 봐도 성깔이 보통이 아닌 놈 같다. 물론 시종들이 못된 짓을 하긴 했지만, 이 저택의 사람이라는 것들도 저 지경으로 당하는데. 그들과 척을 졌다는 이난나 가문의 노예가 걸린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숨 쉬는 것도 참아 가며 나택이 남자가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와.”
남자가 칼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너무 놀라 순간 나택의 입에서 딸꾹질이 터졌다.
“딸꾹-.”
아……. 망했다.
“항아리가 되고 싶다면 그대로 있어도 좋고. 팔다리 예쁘게 다듬어 주는 건 내 전문이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택이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까딱거리며 눈짓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나와.”
망했다. 개망했어.
나택이 어두운 낯빛으로 걸어 나왔다. 시선은 바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흠, 하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나택을 탐색했다.
“이 집안 놈들이 이난나 출신의 노예에게 곡식 창고를 맡겼을 리는 없고. 여긴 왜 들어온 거지?”
“…….”
뭐라고 설명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가문의 복수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나. 불이라도 지르게?”
“아닙니다!”
나택이 획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있다간 억울하게 누명까지 쓰게 생겼다. 똑바로 마주 본 얼굴은 낯이 익었다. 회색 홍채에 긴 속눈썹, 처진 눈꼬리는 순한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거기다 굴곡 하나 없이 매끈한 턱선은 소년으로 착각할 만큼 앳돼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방금 나택이 창고 근처에서 어깨를 부딪친 사람이었다. 생긴 것과 하는 짓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그래? 아쉽네.”
남자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
뉘앙스가 이상하다. 뭐가 아쉽다는 거지.
남자가 나택이 숨어 있던 항아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 틈에 나택이 곁눈으로 남자를 관찰했다. 나택의 지금 체격은 현실 세계의 것과 똑같은 듯했다. 이곳에 오고 나서 거울을 본 적이 없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익숙한 손가락이 그랬고 시야의 높이도 그랬다. 키가 큰 축에 속했던 나택은 어디 가서 체격으로 꿇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곡식 창고를 휘둘러보는 남자는 나택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옷소매 밖으로 드러난 아래팔에는 짜임새 좋은 근육과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곧고 너른 어깨를 보니 옷 속에 숨겨져 있는 몸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몸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간….
그래도 손만 묶여 있지 않았다면 해 볼 만할 텐데.
어느새 짧은 정찰을 마친 남자가 나택에게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특별히 사라진 것도 없고. 정말 뭐 하러 온 거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아까 뛰어가는 폼을 보니 길을 헤매는 사람 같진 않던데.”
나택의 손이 축축해졌다. 나택은 어깨를 움츠리며 옷 속에 숨긴 아이템 두 개를 더욱 가슴 쪽으로 꼭 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템만큼은 빼앗겨선 안 됐다. 메인 퀘스트에서 주는 아이템을 빼앗기면 이어지는 다음 퀘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빼앗기게 되더라도 최소한 점토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확인해야만 했다.
기절시키고 일단 도망갈까?
하지만 상대는 칼을 가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이 상황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오래된 편지’의 다음 퀘스트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분명 우루크의 ‘시장 탐색’이란 퀘스트였다. 시장으로 가면 두 번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택은 눈알을 굴려 남자를 제압할 동선을 계산했다. 여차하면 몸으로 밀쳐서라도 도망칠 계획을 상상하고 있는데.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나택의 턱을 쥐더니 우악스럽게 들어 올렸다.
“네놈의 머리도 장식인 모양이군. 감히 내게 덤벼들 생각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