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쳐다보지도 않고 입도 뻥긋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감이 들짐승 같은 놈이다.
“답이 없는 걸 보니 입도 장신구인가 본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일단 나갈까? 곡식에 핏방울이라도 튀면 곤란해지니까.”
남자는 봄 햇살처럼 싱그럽게 생긴 얼굴을 하고서는 포악스러운 말만 골라서 뱉었다. 남자가 나택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핏방울로부터 보호해야 할 곡식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들 기세다. 나택이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자, 잠깐만요.”
일단은 대화로 시간을 벌어 보자.
“무슨 짓을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그럼?”
“저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이 난관을 지나갈 수 있나.
일단은 남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야 했다. 악의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몸에 탑재된 생존 센서가 아무 말을 지어냈다.
“제가… 아니,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그래서 와 본 겁니다.”
“부르는 소리?”
통했나?
“네. 그래서 확인을 해 보려고요.”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소리였냐면….”
나택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노예! 빌어먹을 놈이 감히 도망을 쳐?!”
순간 밖에서 털보의 외침이 울렸다. 놈이 발을 쿵쿵 울리며 창고로 들어왔다.
“망할 놈. 감히 허락도 없이! 딱 걸렸다 넌. 정신이 들 때까지 매질을…. 헉. 세, 셋째 주인님.”
채찍을 팽팽히 당기던 털보의 움직임이 싸늘한 남자의 시선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털보가 머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주, 주인님께서 어찌 이곳까지 발걸음 하셨습니까.”
“내 집의 곡식 창고를 확인하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어깨를 웅크리던 털보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택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어찌 저놈과… 혹시 놈이 무슨 결례라도 범한 것입니까?!”
각자의 위치로 배정될 때까지 노예들의 관리와 책임은 털보에게 있었다. 나택의 멱살을 쥔 남자를 보며 털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가 나택을 놓아주며 털보에게 돌아섰다.
“결례는 네가 범했지. 내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을 잘랐어.”
“그,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용서해 주십시오!”
털보의 머리가 다시 발끝까지 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알 만하다. 나택도 남자를 대면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제 목 떨어질 걱정을 하는 판인데, 놈들은 오죽할까.
그러나 정작 이 상황을 만든 남자는 털보의 반응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남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으니까 데려가. 자리가 배정된 것 아닌가?”
털보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놈을 주인님께 데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털보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나택에게 손짓했다.
뭐. 나보고 어쩌라고. 제 쪽으로 오라는 소린가. 그런데 놈이 가리키는 방향이 이상했다. 왜 자꾸 남자 쪽으로 손짓을….
“어서 인사드려라! 오늘부터 네가 모시게 될 메데우스 님이시다.”
나택은 저도 모르게 눈을 껌뻑거리며 옆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안내 문구가 떴다.
새로운 시작! ‘니누르타 메데우스’에게 귀속됩니다!
“…….”
“건방진 놈이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는 게야!”
털보가 후다닥 와서는 나택의 뒤통수를 잡고 눌렀다. 강제로 숙인 머릿속으로 엿들었던 시종들의 대화가 스쳐 갔다.
‘셋째 주인님은 허울뿐인 가짜 귀족이잖아? 가짜를 모시는 노예라니. 이 저택 내에서 놈의 위치는 바닥 중의 바닥이 될 테지.’
바닥 중의 바닥으로 당첨된 건 나택이었다.
* * *
나택이 보리알을 방패 삼아 목숨 부지하려 했듯, 털보는 나택을 방패 삼아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 털보는 메데우스에게 나택을 붙여 놓고는 도망치듯 가 버렸다.
이렇게 준비고 뭐고 할 새도 없이 떠미는 게 보통인가?
나택에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정작 주인이라는 메데우스는 이번에도 심드렁했다.
나택은 따라오라는 메데우스의 말에 숨죽이며 놈을 따라갔다. 곡식 창고에서 나왔지만, 다행히도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메데우스의 처소였다. 정사각형의 흙벽돌로 지어진 그의 처소는 단조롭고 정갈했다. 어느 정도냐면 나택이 우루크 시장통에서 보았던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나택이 처소 안을 훑어보는데 메데우스가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짧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단검을 회전시켰다.
설마 여기서 해치우려는 건가.
나택이 주춤 물러나자 메데우스가 그만큼 더 거리를 좁혔다.
“손.”
“…예?”
메데우스가 묶여 있는 나택의 손을 눈짓했다.
“손목째로 잘라 줘?”
“아닙니다.”
나택이 얼른 팔을 쑥 내밀었다. 슥, 슥 소리가 나며 줄이 썰렸다. 드디어 나택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쓰린 손목을 문지르는데 메데우스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나태…. 테레시입니다.”
저도 모르게 본명을 말할 뻔했다. 제 입으로 뱉는 테레시 세 글자가 아직은 어색했다. 메데우스가 단검을 청동 테이블에 던졌다.
“할 줄 아는 건?”
자연스럽게 취조가 시작됐다. 광범위한 질문에 나택이 머뭇거리자 메데우스가 곧바로 부가 설명을 붙였다.
“노예로서 해야 하는 일. 그것들 중에 잘하는 게 뭐냐고 묻고 있는 거야.”
나택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청소라면 자신 있는데.
“굳은살 하나 없는 걸 보니 검을 잡아 본 적은 없는 것 같고. 그 꼴을 하고서도 손끝에 묵은 때 하나 껴 있지 않은 걸 보면 험한 일도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데. 할 줄 아는 걸 말해 봐.”
메데우스가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탐색을 마치고 저를 이만큼이나 파악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메데우스의 태도나 질문은 꼭 면접관 같았다. 빌어먹을 고대 시대에 와서도 자기 어필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나택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정리 없이 나열했다.
“청소는… 자신 있습니다. 검은 써 본 적이 없지만, 몸이 둔한 편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택의 말이 끝나기 전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택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나택이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팅-.
나택이 획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를 스쳐 간 것이 흙벽돌에 꽂혀 있었다. 나택의 손목에 자유를 선사했던 단검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테이블 위에 있는 걸 봤는데. 대체 저걸 언제 다시 쥔 거지.
“움직임은 확실히 괜찮네. 쓸모가 있겠어.”
저 미친놈이. 지금 그 말을 확인하려고 검을 던졌다고?
메데우스가 긴 다리를 꼬더니 발끝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실 네가 뭘 할 줄 아는지는 상관없어. 자잘한 일은 저택의 시종들이 하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사사로운 것들은 모두 네가 책임을 져야 해. 그러니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습득해.”
“…네.”
뭘 습득하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대답부터 했다.
“알았으면 가져와.”
메데우스가 나택의 뒤를 손짓했다. 나택은 저를 죽일 뻔한 단검을 벽에서 뽑아 친히 폭군의 앞에 대령했다.
“여기……!”
두 손으로 단검을 놈에게 건넬 때였다. 몸을 숙일 때 벌어진 상의 틈으로 옷 속에 숨겨 두었던 점토판이 흘러나왔다. 나택이 재빠르게 팔을 몸에 붙였다. 길고 납작한 초보자용 단검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지만, 점토판은 수습해 볼 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동시에 메데우스가 빠른 움직임으로 덩어리를 잡았다. ‘오래된 편지’가 정확하게 메데우스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이건 뭐야.”
메데우스가 점토판과 나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
빌어먹을…. 뭐라고 쓰여 있는지를 모르니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내용에 반역 모의가 있을지, 사랑 고백이 있을지 추측도 불가능했다.
메데우스가 파리해진 나택의 낯빛을 보더니, 점토판에 새겨진 글자들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낮은 목소리가 점토판을 읽어 내렸다.
“하늘의 신…. 공정한 왕. 황금 뿔을 꺾은 용맹한 사자를 신뢰하라. 그가 부리는 별 무리가 당신의 운명을 인도해 주리니…….”
메데우스의 목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안내 문구가 떴다.
‘오래된 편지’가 해독되었습니다!
[편지의 진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인도자’ 키워드를 획득했습니다!
나택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연달아 뜨는 시스템 문구를 응시했다.
한참이나 글자를 만지던 메데우스가 나택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표정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나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메데우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반역 모의를 꾀하는 내용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우선은 저걸 도로 되찾아와야 할 것 같으니….
나택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여기 올 때 챙겨 온 겁니다.”
“네가 쓴 건가?”
“아뇨. 제가 쓴 건 아니고…. 받았습니다.”
“언제?”
“그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오래전이라는 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
메데우스가 느린 움직임으로 점토판을 나택에게 돌려주었다. 돌려받은 점토판은 그새 뜨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족에게 받은 건가.”
“아니요. 가족…은 아닙니다.”
“흠…. 그래?”
이난나 가문을 증오한다는 집안이니 일단 남에게 받았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저런 건 왜 묻는 걸까.
메데우스는 점토판을 챙기는 나택의 움직임을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빤히 보았다. 이쯤 되니 ‘오래된 편지’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택은 또 한 번 후회했다. 퀘스트 영상을 대충 보는 게 아니었는데.
메데우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내게 귀속된 기념으로 그건 돌려주지.”
“…감사합니다.”
“이미 사라진 과거에 얽매이지 마라. 귀족이었다는 알량한 자존심 따위도 내세우지 말고. 넌 이제부터 나의 종일 뿐이다.”
“…네.”
그 뒤로 어떤 질문을 받든, 나택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네, 뿐이었다.
* * *
처소에서의 취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데우스는 다녀올 데가 있다며 나택을 두고 자리를 비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두두가 그 틈에 나택을 조용히 찾아왔다.
“작은 주인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두두가 물었다. 메데우스에게 귀속된 나택과 다르게 두두는 저택을 두루 관리하며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으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주인님이라고 하지 마. 들켰다가 둘 다 맞아 죽을 것 같으니까.”
“예….”
두두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두두가 울상을 지었다. 하루아침에 주인이었던 사람을 노예 취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택은 친절하게 가이드를 주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테레시라고.”
“그…. 네…. 테레시… 님….”
두두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나택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이 틈에 우선은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두두. 정확히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일러 주는 사람이 없나요?”
“없어. 그냥 시키는 건 뭐든 잘하도록 만들라던데.”
“…….”
두두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두두가 나택에게 바짝 붙었다.
“주인님. 아, 아니. 테레시 님. 잘 들으세요. 아마 오늘이 지나면 저도 주인님을, 아니, 테레시 님을 도와드리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선은 니누르타 가문의 상황부터 아셔야 할 것 같아요.”
“얘기해 봐.”
“듣자 하니 니누르타의 셋째 주인은 측근으로 두는 시종이 한 명뿐이랍니다.”
“그건 알고 있어.”
종일 놈의 주변에 얼씬거리는 사람 하나가 없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왜인지도 아시고요?”
“아니.”
두두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이 집안에서 그분의 입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많았다고 하고요. 시종들이 셋째 주인을 매우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메데우스 역시 그들을 신뢰하지 않고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곁에 두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뒀다고 해요.”
“…….”
다른 귀족들은 여러 명의 시종을 부리기 때문에 마치 팀처럼 역할이 분담되고 체계가 있지만, 메데우스에게 귀속되는 시종은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 했다. 한마디로 나택이 이 저택에서 제일 하드한 자리에 배정됐다는 뜻이었다. 나택이 이마를 짚었다.
“주인마다 주의해야 할 것이 다른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메데우스에 대한 건 테레시 님께서 직접 알아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세요. 제가 또 알아내는 게 있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뭔데?”
“제가 주인님께 해 드리던 것들이요!”
그걸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야….
나택이 속으로 제 가슴을 쳤다. 눈만 깜빡거리는 나택을 보며 두두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아침에는 세숫물을 들인 후 식사를 챙기고, 오후에는 일정을 확인한 후에 식사를 챙겨 드리세요. 빨래는 공용 시종들이 하겠지만 이부자리는 직접 챙기셔야 합니다. 저녁에는 취침 전에 목욕 시중을 들어 주시고요.”
“목욕… 시중?”
그때,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놀란 두두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참! 셋째 주인은 대형 목욕탕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쓰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한 것 같지만요. 처소 안에 작은 욕조가 있다고 하니, 거기에 따뜻한 물을 채워 두세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다른 시종들이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이거 하나만큼은 꼭 명심하세요!”
“왜, 왜 믿지 말라는 건데?”
나택이 물었지만 두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곤 마치 제가 맡은 것 외에는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 NPC처럼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목욕 시중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