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 큰 성인 남성의 목욕 시중이라니.
그 장신의 몸을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물 뿌려 주고 씻겨 주라는 건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나택은 몸에 털이 자라날 나이쯤부터 다른 사람과 목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공중목욕탕, 찜질방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남이 씻는 걸 구경하거나 도와 본 적도 없었다. 모든 건 나택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나택은 살면서 키, 팔다리의 길이, 심지어는 말단의 발육까지 누구에게도 뒤처져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 성장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몸에 털이 나질 않았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풍성한데 딱 귀밑에서부터 모근이 실종된 것처럼 피부가 민둥민둥했다.
목욕 시중의 범위를 짐작해 볼수록 걱정이 앞섰다.
설마 나도 벗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나택이 머리를 흔들었다. 몇 회차씩이나 수눈키를 했지만 외설적인 장면이나 헐벗은 캐릭터들을 본 기억은 없었다. 나택의 걱정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 * *
어느새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게 아니니, 강에서 메데우스의 처소까지 몇 번이고 물을 길어 날라 목욕통을 가득 채우고 나니 이 시간이었다.
나택이 지친 한숨을 뱉으며 양동이를 목욕통 옆에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몰아치듯 연달아 터진 사건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놈은 언제 오는 거지.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
나택이 물 온도를 확인하려 목욕통 안을 휘저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난나 가문의 노예. 안에 있느냐!”
야비한 목소리가 호통치듯 나택을 불렀다. 문을 열자 니누르타 가문의 시종 하나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셋째 주인님께서 쓰실 향로와 향유다. 받아라.”
시종이 퉁명스럽게 청동 쟁반을 건넸다. 쟁반 위에는 기름병 하나와 구멍이 송송 뚫린 청동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로의 뚜껑을 슬쩍 열어 보는 나택의 손동작에 서투름이 묻어났다. 시종이 앙칼지게 물었다.
“설마 향 피울 줄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데요.
“안에 불을 넣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기가 막히는군. 라가쉬에서는 유향도 안 쓰나? 다 태울 일 있어?!”
시종이 한심하게 보며 향로의 바닥을 잡았다. 단지의 하단부가 서랍처럼 열렸다. 안에는 돌덩이 같은 유향 덩어리가 가득이었다.
“셋째 주인님께서 오시면 이 유향에 불을 붙이도록 해. 향로 속의 약초 잎이 타지 않게 조심해서 불 조절하고!”
시종은 사나운 말투였지만 의외로 제법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줬다. 나택이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재차 한마디를 강조했다.
“꼭 목욕 시작하실 때 맞춰서 켜 둬! 그래야 진한 향이 오래갈 수 있으니까!”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살다 살다 남자의 목욕 수발을 드는 날이 오다니. 여전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청동 쟁반을 물끄러미 보는데 의문 하나가 스쳐 갔다.
설마 향유도… 내가 발라 줘야 하나?
* * *
메데우스는 캄캄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나택은 그사이 식은 물을 다시 데우고 붓느라 한순간도 앉아 있지 못했다.
메데우스는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허리에 찬 띠와 검을 풀었다. 나택이 그걸 받아 들려는데 메데우스가 흘끔 보더니 건조하게 말했다.
“검에는 손대지 마.”
……아. 예.
나택이 무안한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메데우스가 옷을 한 겹씩 벗기 시작했다. 저것도 받아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메데우스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나택을 돌아보았다. 드러난 상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탄탄했다. 백날 운동한다고 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계속 구경만 할 건가?”
메데우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택이 빠르게 다가가 옷을 받아 들었다. 나택은 인간 옷걸이처럼 뻣뻣하게 서서 메데우스가 벗는 옷을 팔에 걸쳤다.
메데우스는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꼴을 했다. 눈 둘 곳을 몰라 나택은 죄 없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목석도 너보단 낫겠어.”
한 소리를 뱉은 메데우스가 실소를 흘리며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찰랑이는 물이 밖으로 넘쳤지만, 아래에 깔린 두꺼운 양모 양탄자가 그 물을 흡수했다.
일단 놈을 물속에 집어넣었으니, 다음 스텝은… 향로를 켜는 건가?
나택은 아까 시종이 일러 준 대로 촛불을 향로의 유향 덩어리에 붙였다. 기름을 굳힌 것 같은 유향에 불이 붙고, 처소 안으로 진한 허브향이 퍼졌다.
“테레시.”
갑자기 불린 호칭에 나택의 어깨가 튀었다.
“예?”
“향유를 가져와.”
메데우스는 목욕통에 양손을 얹고 턱을 괴며 나택을 보고 있었다.
이것도… 내가 발라 줘야 하는 거구나.
옷을 받아 드는 것도 모자라 기름칠까지 해 줘야 하다니. 이러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의 처음을 죄다 놈이랑 치르게 생겼다.
나택이 조심스럽게 목욕통으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목욕통 속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은 향유병에 집중했다.
그런데 꽉 닫힌 병이 잘 열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그제야 병뚜껑이 열렸다. 반동 때문에 속에 든 향유가 세게 출렁였다. 나택의 손에 기름이 흘러넘쳤다.
당황한 나택이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배가 불룩한 향유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향유와 병이 목욕통 안으로 떨어졌다.
첨벙-.
“…….”
나택이 굳었다. 메데우스가 옷을 벗고 들어앉은 목욕통에 손을 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둘 수도 없다. 나택이 입술을 꾹 깨무는데 메데우스가 건조한 움직임으로 향유병을 건져 올렸다.
병을 헐렁하게 들고 있는 손끝이 까딱였다. 나택이 병을 돌려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공손히 내밀 때였다.
쪼르르륵-.
메데우스가 병을 나택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속에 든 물이 나택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택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시원하게 병을 비워 낸 메데우스가 나른하게 목욕통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자존심 같은 거 세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기 싫으면 차라리 말로 해.”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했습니다.”
“실수라.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정말 실수였습니다.”
메데우스가 억울한 나택의 표정을 흘끔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걸로 쳐.”
메데우스가 내밀고 있는 나택의 두 손바닥 위에 향유병을 던지듯 놓았다.
아니 진짜 실수였는데. 눈이 달려 있으면 봤을 거 아냐.
하지만 나택은 더 변명하지 못했다. 놈이 갑자기 눈 뒤집혀서 칼을 뽑아 들지 누가 알겠는가.
나택이 입술을 깨물며 메데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놈의 표정이 좀 지쳐 보였다. 낮에는 사람 하나를 난도질할 것처럼 사나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는데.
“라가쉬로 돌아가고 싶나.”
메데우스가 대뜸 물었다.
라가쉬. 이는 이난나 가문이 다스리던 도시의 이름이었다. 즉 메데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냐 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돌아가고 싶다. 라가쉬 말고 진짜 내 고향으로.
속마음을 굳이 말로 풀어내진 않았다. 나택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메데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놈은 기이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너도 라가쉬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돌아가고 싶나?”
그 말에 나택이 제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거울을 본 적이 없다. 몸은 현실의 제 것과 같은 게 맞는 듯한데. 얼굴도 원래의 모습과 똑같은 건가?
뭐, 얼굴은 어찌 됐든 상관없다. 그냥…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택이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데우스가 나른하게 늘어지며 눈을 감았다.
“그래. 이방인 취급을 받아도 노예보다는 귀족이 낫겠지.”
메데우스의 말끝이 조금씩 느려졌다. 잠에 취해 가는 것 같았다. 낮에 뭘 하고 돌아다니기에 이렇게 금방 뻗어 버리지?
나택은 여전히 빈 병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슬슬 발가락에 쥐가 나려고 했다. 이제 일어나도 되나, 타이밍을 엿보는데 메데우스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내일은 너도 같이 시장엘 가야 해.”
…시장!
나택이 마음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두 번째 퀘스트를 받던 장소가 분명 시장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나택이 물었다.
“그럼 뭘 준비하면 될까요.”
“네가 해야 할 일을 왜 나한테 물어.”
모르니까 묻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뭘 할지 몰라 멍청하게 구는 것도 위험했다. 못 써먹을 놈이라며 메데우스가 또 제게 칼을 날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멍청한 노예여서는 안됐다. 놈이 조금이라도 나른해진 지금이 기회다. 나택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응이 될 때까진 말씀을 해 주셔야… 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려 주시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택의 말에 메데우스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가?”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떠보는 건가?
나택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택의 입이 뇌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뭐든 잘하도록 만들라고 한 건….”
너잖아요.
그러나 뒷말이 미처 매듭을 짓지 못했다. 메데우스가 묘한 눈으로 나택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작 메데우스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않다. 메데우스가 다시 눈을 감으며 목욕통에 기대더니 테두리에 얹은 팔을 귀찮다는 듯 내저었다.
“나가 있을까요?”
“가서 밤바람이라도 쐬면서 그 멍청한 표정 좀 어떻게 하고 와.”
뭘 보고 멍청한 표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거절하고 눌러앉을 이유도 없었다. 나택은 곧바로 저린 다리를 일으켜 처소를 나왔다.
* * *
나택은 메데우스 처소의 담장까지 걸어 나갔다. 캄캄한 하늘의 달빛을 올려보는데 대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현타가 왔다. 여전히 꿈이 아닐까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몇 번이고 제 뺨을 때려 봤지만 역시나 아프기만 했다.
밤바람을 맞으며 나택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처음 받은 퀘스트로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오래된 편지’에는 개소리만 쓰여 있었다. 메데우스의 반응을 보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도 같지만, 현실로 돌아갈 방법에 대한 단서는 아니다. 탈락.
‘초보자용 단검’은 그냥 누구에게나 주는 기본 아이템이다. 탈락.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번째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시장에 답이 있을 것 같다.
하루만 더 버텨 보자. 내일 시장에 가면 뭐든 알아내는 게 있을 거다. 나택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길게 입바람을 불었다.
이러고 서 있은 지 30분 정도는 지났을 것 같았다. 우루크의 밤은 쌀쌀했다. 나택이 제 몸을 끌어안고 팔을 쓸었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 정도 지났으면 목욕도 끝났겠지….
놈을 재워야 저도 잘 수 있으니, 슬슬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처소를 돌아보는데 메데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서 밤바람이라도 쐬면서 그 멍청한 표정 좀 어떻게 하고 와.’
“어이가 없네. 어딜 봐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나택이 눈에 힘을 주며 처소를 향해 쿵쿵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려 나택이 문을 잡아당겼다. 정확히는 잡아당기려 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느껴지는 저항이 없었다.
처소의 문이 열려 있었다.
“분명 닫고 나온 것 같은데….”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처소 안에 침입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나택이 소리를 죽이며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향로에서 흘러나오는 허브 냄새가 실내에 진동했다.
출입구와 목욕통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불투명한 휘장 너머로 누군가 있었다. 나택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서 있는 사람은 큰 항아리를 메데우스가 앉아 있는 목욕통 안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메데우스는 기절한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