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나택의 목소리에 놈이 화들짝 놀라며 항아리를 떨어트렸다.
쨍그랑-!
떨어진 도기가 깨지며 파편이 흩어졌다. 놈이 창문으로 재빠르게 내달렸다.
“저기요!”
나택도 창문으로 뛰어갔다. 언뜻 놈의 옆모습이 보였지만 커다란 입 가리개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는 짓이나 행색이나 누가 보아도 작정하고 나쁜 짓을 하러 온 게 확실하다.
“거기 서!”
나택이 소리쳤다.
크지 않은 창문이었는데, 놈은 마치 퇴로를 계산해 둔 것처럼 조금의 실수도 없이 창문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놀란 나택이 뒤를 돌아보았다. 메데우스는 가만히 목욕통 속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죽…었나?
긴장으로 목이 탔다. 그때, 메데우스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하…. 살아 있네.”
죽진 않았다. 하지만 메데우스는 이 난리 속에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고 잠이 든 사람처럼.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목욕통 옆 바닥에 느리게 움직이는 길고 새카만 실루엣이 보였다. 침침한 처소 안의 불빛 때문에 형태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나택이 실눈을 뜨며 한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깨진 항아리의 옴폭한 하단부 속에서 커다란 뱀 두 마리가 기어 나왔다. 나택은 그대로 굳었다.
“저게 뭐야….”
뱀은 목욕통에 걸친 메데우스의 팔 쪽으로 기어가려 했다. 나택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어구로 쓸 만한 물건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던 천을 잡아당겨 뜯어냈다.
쿵쿵쿵-.
발을 구르며 놈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자 뱀 두 마리가 방향을 틀었다.
항아리째로 내쳐진 것에 잔뜩 성질이 났는지 파충류 두 놈이 머리를 나택에게로 꼿꼿하게 쳐들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 일반적인 뱀 같지 않았다. 삼각형 대가리….
독사 아냐?
뱀에 대해 잘 모르는 나택이 보아도 저건 백 프로 독사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티비에서나 보던 독사를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나택이 경계 태세를 갖추며 손에 쥔 천을 넓게 펼쳤다. 동시에 두 마리가 빠르게 나택에게 돌진했다.
우당탕탕-!
나택이 뱀에게 천을 뒤집어씌우고는 옆에 있던 테이블로 뛰어올랐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들어 네 다리로 천이 들리지 않게 정신없이 눌러 댔다.
“미친.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나택이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심장이 벌렁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택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생명체 중 하나가 바로 뱀이었다.
이걸 어떻게 내보내지?
나택은 뱀 두 마리와 사투를 벌이며 쓸 만한 도구가 있는지 찾기 위해 처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와 동시에 메데우스 쪽도 살폈다. 그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 같았으나 잠들어 있는 건 여전했다.
“미치겠네…!”
그런데 순간, 목욕통의 뒤쪽에서 뱀 한 마리가 또 스르륵 기어 나왔다. 놈도 똑같이 생긴 독사였다.
당황한 나택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독사는 총 세 마리였다. 뒤늦게 나타난 한 마리가 목욕통을 몸으로 쓸며 앞으로 다가왔다. 놈의 고개도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욕조통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뱀이 맘먹고 뛰어오른다면 충분히 저 속에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순간 낮에 두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집안에서 그분의 입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많았다고 하고요.’
‘다른 시종들이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이거 하나만큼은 꼭 명심하세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독사에 물렸다간 망할 고대 문명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뱀을 저대로 둘 수도 없었다. 메데우스는 최소한의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택이 다급하게 벽에 걸린 천 하나를 더 잡아 뜯었다. 그대로 살살 약 올리듯 목욕탕 근처의 놈에게 흔들자 놈이 쉭 소리를 내더니 나택에게 돌진했다.
쿠당탕탕-!
나택이 아래의 두 놈과 겹쳐지도록 세 번째 독사의 위에 천을 넓게 던졌다. 그러고는 의자로 그 위를 눌렀다.
“메데우스!”
긴급 상황 앞에서 주인님이고 나발이고 정리되지 않은 호칭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나택이 테이블에서 냅다 뛰어내려 메데우스에게 달려갔다. 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요!”
메데우스의 눈썹이 꿈지럭거렸다.
그때, 천으로 덮어 놓았던 독사 중 한 마리가 빠져나왔다. 놈은 고개를 쳐들고는 나택을 쏘아보았다.
테이블을 제외하면 도망칠 만한 높은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뱀은 세 마리지만 나택은 혼자다. 덤으로 혹까지 붙인.
3:0.5다.
이 새끼를 빨리 깨워야 했다.
“빨리 일어나 보라고!”
흔들어도 소용이 없자 나택이 메데우스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메데우스!”
독사가 나택에게 빠르게 돌진했다. 나택의 손에는 더 이상 놈을 막을 천도 없었고, 방패나 무기도 없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생존본능이 먼저 앞섰다.
나택이 메데우스가 앉은 욕조로 뛰어들었다.
풍덩-.
건장한 남자 둘을 품은 목욕통 물이 출렁였다. 물이 흘러넘치며 독사의 대가리를 쳤다. 물세례를 맞고 주춤 고개를 숙이던 놈이 아까보다 더욱 흉흉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말 못 하는 파충류지만 눈빛만 봐도 진심으로 빡 쳤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악, 소리를 내며 놈이 입을 쩍 벌렸다. 독사의 대가리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나택은 눈을 질끈 감으며 본능적으로 팔을 올려 방어 자세를 펼쳤다.
이렇게 가는구나.
억울함 반, 두려움 반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철퍼덕-!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팔에 느껴지는 고통은 없었다. 나택이 천천히 눈을 떴다. 덤벼들던 독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때, 메데우스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목욕통에서 일어섰다. 놀란 나택이 고개를 메데우스 쪽으로 획 돌렸다. 그런데 메데우스의 몸에 구렁이가 붙어 있었다.
구렁이가 왜 여기 있지?
1초 동안 나택의 머릿속은 그것을 뱀으로 인식했다. 그랬다가 2초 만에 이성이 돌아왔다.
나택은 조금 전보다 더욱 질끈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봐선 안 될 것이…. 생전 본 적 없는 광경이 코앞에 있었다.
일어선 메데우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옷을 벗을 때 손도 못 대게 하더니, 목욕통 옆에 세워 두었던 모양이었다. 달려들던 독사는 두 동강이 난 채 목욕통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가자 이번에는 천으로 덮어 두었던 남은 두 마리 독사마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놈들 역시 단단히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잔뜩 벌린 입속에서 날카로운 독니가 번쩍였다.
독사들이 목욕통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두 마리 모두 메데우스의 검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
나택이 그제야 천천히 목욕통 바깥으로 고개를 뺐다. 독사 세 마리는 모두 바닥에 동강이 난 채로 죽어 있었다.
메데우스가 휘청거리더니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눈을 비비는 놈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나택이 빠르게 일어나 메데우스를 받쳤다. 축축한 피부가 맞닿는 감촉이 영 이상했다. 메데우스의 이마가 나택의 어깨에 닿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향로.”
“네?”
“향로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