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메데우스가 들릴 듯 말 듯 욕지거리를 뱉었다.
“좆같은 새끼들….”
나택은 메데우스의 허리를 잡아 다시 목욕통에 조심스럽게 앉혀 놓았다. 그러고는 향로 쪽으로 갔다. 발바닥에 양탄자를 적신 축축한 액체가 닿는 게 소름 끼쳤다.
재빨리 향로의 하단부 서랍을 연 나택이 은은하게 타고 있는 유향의 불을 입으로 불어 꺼 버렸다.
나택이 수건으로 쓰는 하얀 천을 들고 다가갔다. 메데우스의 몸에 천을 둘러 주고는 그의 무거운 몸을 거의 끌어안듯 부축해 침상 위로 옮겼다.
메데우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일단 예의상 물어보았다.
사안이 심각한 것 같았다. 만약 나택이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다면 메데우스는 벌거벗은 채로 저세상행이었을 것이다. 이건… 살인미수나 다름없다. 그것도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을 살해하려 하다니.
메데우스가 침상을 짚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향유 병이랑 향로 가져와 봐.”
나택이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주문한 것들을 들고 갔다. 메데우스가 향로를 열어 안에 든 약초를 확인했다. 비어 있는 병에 혀를 넣어 맛을 보더니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뱉었다. 점점 붉게 부풀어 오르는 메데우스의 뺨에 시선이 갔다. 너무……. 너무 세게 때렸나.
“……사람을 불러올까요?”
나택이 물었다. 메데우스가 유리병을 목욕통 안으로 골인시키며 말했다.
“됐어. 그냥 둬. 오늘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네?”
나택이 물에 젖은 메데우스와 바닥에 널브러진 독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건가.
“…이런 일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도 되는 겁니까?”
“테레시.”
“예.”
메데우스가 숙였던 시선을 나택에게로 올렸다.
“아까는 친구처럼 나를 잘도 부르던데. 라가쉬에서는 경칭을 붙이는 법을 알려 주지 않던가.”
‘일어나! 일어나라고요!’
‘빨리 일어나 보라고!’
‘메데우스!’
그제야 조금 전 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좀 억울하다. 그건 매우 위급한 상황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온 호칭이었고, 잠든 놈을 깨우려는 마음이 앞서 나온 말인데.
“귀족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에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지는 알고 있겠고.”
“…….”
제정신이 맞는 것 같다. 메데우스는 이런 놈이었다. 어떤 성정을 가진 놈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제 마음속에 있는 인간성이 선의를 보인 거다.
메데우스는 지금 제가 베푼 인간성을 꼬투리 잡고 있었다.
이래서야 어느 누가 너를 또 살려 주려고 하겠냐.
하지만 마음속에 든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낼 수는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것은 나택이 본래 지내던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나택이 주체할 수 없는 씁쓸함을 삼키며 대답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급해?”
메데우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택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었는데, 그럼 급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나택이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낯을 숙이며 끄덕였다.
“네.”
“왜?”
되돌아온 짧은 말이 나택을 참을 수 없이 황당하게 만들었다. 획 고개를 들어 메데우스를 보았다. 그런데 메데우스는 정말로 이상한 물건을 보듯 나택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다가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대체 이 자식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저를 살리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소리야?
고맙다는 얘길 듣자고 도와준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트집이 잡혀 구박받을 거란 생각 역시 못했다. 못내 짜증이 났다. 결국, 나택의 입에서 여과 없는 어투가 흘러나왔다.
“왜…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잖아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방비 상태로 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나택의 말을 듣는 순간, 메데우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놈은 아리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택이 젖은 침구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이불이랑 닦을 걸 좀 가져오겠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는 나택의 등을 메데우스는 그저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 보는데.”
나직이 중얼거리는 메데우스의 말이 나택에게 닿을 리 없었다.
* * *
빌어먹을 고대 도시.
나택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속으로 욕을 했다.
우루크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늦잠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메데우스보다 늦게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잠도 없나 보다. 해가 뜨자마자 도착한 우루크의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델람에서 들여온 고급 목재입니다! 색감도 묵직하고 무늬도 고급스러워요! 한정 수량! 최고급 목재! 지금이 아니면 못 구하는 최상품!”
한정판은 어느 시대든 과소비를 조장했다. 상인의 외침에 시종으로 보이는 차림의 사람 몇이 빠르게 다가갔다.
과일 가게, 채소 가게와 잡화점을 지나고서도 메데우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처소에서부터 이곳까지 쉬지 않고 걷고 있으니, 슬슬 다리가 아파졌다.
목적지라도 좀 알려 주지. 메데우스는 어디로 간다 말도 없이 계속 앞만 보고 직진했다. 이러다 시장 한 바퀴를 다 돌 기세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눈키에서 받는 두 번째 퀘스트.
그게 바로 이 우르크 시장 안에 있었다.
나택은 혹시나 시스템이 보내는 신호가 있을까 싶어 지나치는 모든 가게를 유심히 살폈다.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길 중앙으로 큰 수레가 지나갔다. 수레를 피해 메데우스와 나택이 가게 쪽으로 바짝 붙었다. 동시에 나택의 귀 옆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자자, 하늘의 신도 마신다는 바로 그 약! 시든 갈대도 벌떡벌떡 일으키는 마법의 약입니다! 특별한 거사를 치러야 한다면 어서어서 오세요!”
나택이 소리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약초 가게의 주인이 가리키고 있는 가판대 위에는 불투명한 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늘의 신….”
‘하늘의 신… 공정한 왕. 황금 뿔을 꺾은 용맹한 사자를 신뢰하라. 그가 부리는 별 무리가 당신의 운명을 인도해 주리니…….’
점토판에 써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무슨 시도 아니고, 암호도 아닌 뜬구름 잡는 내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스템이 의미 없는 설명을 남발할 리가 없다. 적어도 나택이 플레이했던 수눈키는 그랬다.
흘긋 본 메데우스는 무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물어볼까.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나택의 말에 메데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묻기 전에는 의견과 주장을 낼 수 없다, 그게 자유민과 노예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지. 귀족이었던 네가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이곳으로 끌려온 시작점부터가 노예 신분이었는데. 이 시대의 노예는 궁금증도 가지면 안 되는 위치란 말인가.
그런데 곧바로 메데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뭐가 궁금한데. 말해 봐.”
메데우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나택이 얼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번에 읽어 주셨던 그 점토판 말입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네가 갖고 있던 점토판이잖아. 그걸 왜 내게 물어.”
“워낙 오래전에 선물 받은 거라…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 얘기를 좀 듣고 싶어서…….”
슬쩍 올려다본 메데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택을 보고 있었다. 제 말을 무시할 거라는 반쯤의 확신을 갖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메데우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신들의 왕이라 부르는 자에 대한 이야기야. 별의 군단을 이끌고 악을 물리친다는 신이지. 신들의 왕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이 땅의 인간에게는 직접 관여하지 않아서 존재감이 없는 신이기도 해.”
“신들의 왕…. 그게 누굽니까?”
나택이 묻는 순간 귀청을 때리는 외침이 나택을 놀라게 했다.
“불면증이 있는 우루크민들이여, 이쪽으로 오십쇼! 근심을 덜어 내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마법의 약초! 루도초! 루도초로 만든 향유도 있습니다! 함께 쓰면 효과가 두 배! 아니, 백 배! 귀한 물건이니 얼른 데려가세요!”
또 다른 약초 가게의 상인이 큰 소리를 냈다. 자연스럽게 나택의 시선이 가판대로 향했다. 작은 바구니에 보랏빛 풀잎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잎의 모양.
저건 분명….
어제 피웠던 향로에 담겨 있던 것과 똑같았다.
“루도초….”
순간 상인과 나택의 눈이 마주쳤다. 띠링, 영롱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 루도초 |
수면제의 역할을 하는 약초. 매우 극소량으로 수면제 효과를 낸다.
루도초로 낸 기름은 무색무취인 것이 특징. 루도유는 극소량을 향유에 섞어 사용한다.
*주의 사항*
향로 혹은 향유 둘 중 한 가지만 사용할 것!
중복 사용 혹은 과용 시 어지럼증과 근육 마비의 부작용이 있다.
“…….”
나택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자 메데우스의 걸음도 같이 느려졌다.
설마 어젯밤의 일은 향로를 제게 준 시종의 계획이었나? 아니면 향유를 목욕통에 냅다 쏟아부은 나택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
어느 쪽이 원인이든 간에 독사를 풀어 넣으려 했다는 명백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을 마치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듯 넘기려 했던 메데우스의 대처가 아직도 나택의 마음에 걸려 있었다.
나택이 물었다.
“어제의 그 향로와 향유에 대해 알고 계신 거죠?”
“하나만 물어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
나택이 입을 꾹 닫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메데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해?”
안타깝게도 알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였다. 주워들은 얘기와 정황을 봐서 메데우스가 그냥 두라고 하는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갔다. 아마 그 일을 크게 알린다 해도 해결된 경험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제게 마이너스로 돌아온 적이 더 많았을 것 같다.
그러나 추가로 붙는 의문이 있었다. 정황상 저를 제일 먼저 의심할 법도 한데….
긁어 부스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냥 넘길 순 없었다. 한동안은 둘이서 이렇게 계속 붙어 다녀야 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오늘의 메데우스는 제법 나택에게 유한 태도를 보였다.
나택이 다시 물었다.
“제가 그랬을 거라는 의심은 안 하십니까.”
그러자 메데우스가 우뚝 멈춰 섰다.
“어제부터 이상한 얘기만 하네. 내가 널 의심해 주길 바라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여쭤보는 겁니다. 앞으로도 매일같이 뵈어야 하는데, 제가 의심을 받는 것도 곤란하니까요.”
한참을 가만 서 있던 메데우스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로 꺼냈다. 나택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너무 건방지게 굴었나. 설마 사람이 이렇게 많은 시장통에서 칼을 휘두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