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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9화 (9/178)

9화

나택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엎드려 빌지도 못한 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무기를 찾지 못한 루할자게시가 가판대에 놓여 있던 줄을 손에 감았다. 그러고는 채찍처럼 그 줄을 나택에게 내리쳤다.

나택이 순간적으로 팔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기어코 이렇게 채찍질 한번을 당하게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츠리는데 희한하게 느껴지는 고통이 없었다.

나택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앞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루할자게시가 소리쳤다.

“메데우스! 네 이놈이!”

“큰형님. 시장 한복판에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대체 언제 온 건지 메데우스가 서 있었다. 휘둘러진 채찍은 메데우스가 내민 검집에 칭칭 감겨 있었다.

“네놈이 시킨 거로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저는 그냥 지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지나가? 하필 이 순간에? 네놈의 노예가 나에게 한 짓을 보아라! 내 옷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어!”

루할자게시가 대로하며 제 옷의 얼룩을 가리켰다. 테레시의 형 타르타르지는 옆에서 제 소매로 주인에게 묻은 과육을 훔쳐 내고 있었다. 과즙이 두 사람의 옷감에 스며들었다.

메데우스가 노발대발하는 루할자게시를 내려다보았다.

“보아하니 그 얼룩은 이 녀석이 아니라 과육의 즙이 만든 흔적 같은데. 왜 엄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러십니까.”

“뭐, 뭐라?! 뒤집어씌워?!”

“하지만 형님이 그걸 저와 제 시종의 탓이라고 우기신다면…. 비록 저희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사죄를 드려야겠죠. 큰형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가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마, 망할 놈의 새끼가…. 네 시종이 저지른 짓을 이곳 사람 모두가 보았는데!”

“죄송합니다, 큰형님. 앞으로는 제 시종을 더욱 호되게 가르치겠습니다.”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이 움찔거렸다.

……이건 우연한 사고였단 말이야. 가르치긴 뭘 가르쳐.

“그나저나 옷이 더러워져서 어쩌죠.”

메데우스가 제 형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타르타르지는 여전히 주인 옷에 묻은 과즙을 지우려 애를 쓰고 있었다.

가판대를 스치는 메데우스의 손이 물이 담긴 작은 항아리에 닿았다. 큼지막한 손에 항아리가 쥐어졌다. 얼룩을 지우는 데 신경 쓰느라 루할자게시와 타르타르지는 등 뒤로 감춘 메데우스의 손을 보지 못했다.

“제가 깨끗하게 씻겨 드리겠습니다.”

촤르르륵-.

항아리에 담긴 물이 그대로 루할자게시의 옷 위로 쏟아졌다. 얼룩을 지우던 두 놈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추었다.

메데우스가 태연히 말했다.

“더러운 손으로 백날 문질러 봐야 지워지겠어요? 오히려 손에 있는 것까지 옮겨붙겠지.”

루할자게시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메데우스…. 너 이 새끼……. 네놈이 감히….”

메데우스가 강아지처럼 처진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며 제 형에게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형님. 독물은 아니니까요. 제가 방금 부은 항아리에 뱀 같은 건 없었잖아요.”

독물, 그 한마디가 나택의 귀에 벼락처럼 꽂혔다.

그 밤에 나를 개고생을 하게 만든 새끼가 저놈이라 이건가?

메데우스가 허리를 폈다. 루할자게시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씩씩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메데우스. 네놈의 이 경거망동한 행동을 귀족 회의에서 낱낱이 고발할 것이다.”

“그럼 그날도 형님의 고자질이 주요 안건으로 오르겠군요. 국사를 논해야 할 자리에서 어리광이라니.”

메데우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나택을 차갑게 바라보는 홍채가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택은 시선을 모로 내리며 메데우스를 뒤따라갔다. 여전히 오물을 닦아 대는 타르타르지를 지나쳐 가려는데, 나택의 눈에 옆에 놓인 가판대가 들어왔다. 그 위의 나무통에는 흙탕물에서 헤엄치는 작은 갈루어가 있었다. 갈루어는 죽은 것을 달여 먹을 때는 효능 좋은 약 취급을 받지만, 살아 있는 것은 끔찍한 생김새 때문에 신의 저주라 불렸다. 때문에 갈루어를 파는 상인은 백정과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갈루어를 발견한 순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나택은 슬쩍 손을 뻗어 가판대에 깔린 천 가장자리를 쥐었다. 몸으로 사람들의 시야를 가린 채 천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계속했다. 그러자 천과 함께 슬금슬금 끌려오던 나무통이 가판대 기둥에 툭 걸리며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택이 얼른 손을 놓았다.

엿이나 먹어라.

촤르륵-!

갈루어가 담긴 나무통이 그대로 루할자게시의 머리 위로 엎어졌다. 루할자게시에게 집중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탄식을 터트렸다.

“세상에, 신의 저주가!”

갈루어가 루할자게시의 옷 위에서 팔딱거렸다. 교묘한 나택의 역공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나무통을 포악하게 집어 던지며 루할자게시가 고함쳤다.

“메데우스으!”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루할자게시가 이마를 짚으며 뒤로 넘어갔다. 타르타르지가 주인님! 하고 외치며 쓰러지려는 주인의 몸을 부축했다.

쌤통이다.

나택이 힐끔거리며 루할자게시를 비웃었다. 그러나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는 웃음기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메데우스가 나택을 빤히 보고 있었다.

“......”

메데우스는 이 갑작스러운 전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볍게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얌전히 따라와.”

* * *

따라오라는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전에 일어난 시장통의 사건이 온통 머리를 뒤덮었다.

시종들에게 양아치처럼 구는 건 그렇다 쳐도, 시장 한복판에서 제 형이라는 사람한테 저렇게까지 하다니. 원한을 살 만했다. 아니, 살 만한 정도가 아니다. 만약 제가 저런 일을 당했다면 놈의 말을 듣기도 전에 주먹부터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메데우스와 나택의 반도 안 되는 루할자게시의 체격을 생각해 보면 놈이 주먹질하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가긴 했다.

이런 속내를 메데우스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찌 되었건 놈이 저를 구해 준 모양새가 되었으니, 일단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메데우스가 불쑥 물었다.

“물건은 어디 있어.”

“무슨 물건이요?”

나택의 답에 메데우스가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네게 뭘 시켰었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피막과 망토는 두 개씩. 가죽 수통은 네다섯 개면 충분하고, 그 외에 부피가 작은 마른 과일도 조금씩. 가죽 노끈도 최대한 가볍고 튼튼한 거로 두 개를 구해 와. 거래는 내 인장을 써서 물표로 하도록 해.’

…점술사 놈 때문에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인장은.”

“…….”

나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메데우스가 거래할 때 쓰라고 줬던 인장은, 지금 아마도 점술사의 손에 들려 있을 터였다.

“인장은 어딨냐니까.”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잃어버려서….”

“…허.”

메데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잃어버려?”

“…….”

“테레시.”

“…예.”

“이번에야말로 내가 네놈의 목을 쳐도 할 말이 없겠지?”

황당한 나택이 입만 뻐끔거렸다.

저딴 새끼 살려 주지 말았어야 했나.

몸까지 던져 가며 놈을 살려 준 게 갑자기 후회됐다. 하지만 만약 그 상황에서 메데우스를 살려 주길 포기했다면 제 안의 인간성에 균열이 났을 것이다.

나택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메데우스 저놈은 인간이길 애저녁부터 포기한 놈 같았다.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지만 사람 친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하다니. 심지어 나는 네 은인이라고.

나택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으니. 나택은 일단 사죄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 망할 점술사를 다시 찾아가면 인장을 가져올 수 있다. 분명 놈의 히든 스킬은 24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오는 거였으니, 내일 이 시간쯤 점술사를 찾으러 가면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오겠대?”

메데우스가 허를 찔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오겠습니다.”

“…됐어.”

하지만 목을 치겠다고 협박한 것이 무색하게 메데우스는 곧바로 흥미가 없다는 듯 무신경한 답을 했다.

가문의 인장을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건가? 아, 물론 그래 주면 나야 고맙긴 하지만.

나택이 메데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인장은 어차피 가문의 것이야. 그걸 줍는 놈이 있다 해도 함부로 쓸 순 없겠지. 하지만 네 죄를 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어.”

“…예.”

“심부름을 보냈는데 대체 왜 그 골목에서 튀어나온 거야?”

메데우스가 언제 나타난 건가 했더니, 나택이 점술사를 잡으러 골목에서 튀어나올 때부터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택은 바로 직전에 나누었던 인장을 핑계로 둘러댔다.

“인장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예.”

“그 골목에는 점술사의 가게 말곤 없을 텐데.”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습니다.”

식은땀이 흘렀다. 나택을 의심스럽다는 듯 게슴츠레 보던 메데우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넌 늘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군.”

그게 어떻게 내가 달고 다니는 게 되는 거냐. 사건 사고가 자꾸 나한테 달려들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 말 역시 내뱉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자 메데우스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의 뺨에는 어제 나택이 휘갈긴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힘 조절을 좀 할 걸 그랬나, 잠시 잠깐 후회가 됐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런 재수 없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그래도 저 강아지 같은 얼굴에 제가 만들어 놓은 자국이 밉게 남아 있는 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

* * *

정말 고된 하루였다. 이곳에 오고 나서 고되지 않은 날이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오늘은 유독 더 고됐다.

여기서 더 절망적인 건 시장에서 진을 쏙 빼고 왔음에도 나택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현실이었다. 이게 바로 노예의 삶이었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망토를 받아 들었다.

“목욕물을 받아 오겠습니다.”

“테레시.”

허리를 숙이며 다음 미션을 수행하러 가려는데 메데우스가 나택을 불렀다.

“문 닫고 이쪽으로 와.”

뭐 때문에 부르는 거지. 하도 저지른 일이 많아 예측되지 않았다. 안 좋은 예감이 밀려왔다.

나택이 도로 문을 닫으며 느릿느릿 메데우스에게로 다가갔다.

“더 가까이.”

나택이 긴장한 채 침상 앞에 서 있는 메데우스 쪽으로 두 걸음을 더 내디뎠다.

메데우스가 몸을 숙이더니 침상 아래로 팔을 뻗었다. 침상 밑에 깔려 있던 양탄자를 들추자 바닥에 긴 홈이 보였다. 큰 벽돌 두 개 정도의 크기였다. 메데우스가 차고 있던 검을 홈에 찔러 넣어 들추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면 같았다. 메데우스가 커다란 바닥 조각을 들춰내자 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꺼낸 메데우스가 다시 돌을 끼워 넣고 양탄자를 덮었다. 그러고는 침상에 앉아 나택에게 눈짓했다. 누가 봐도 제 옆에 앉으라는 신호였다.

귀족의 침상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도 되는 건가.

메데우스의 허리에 붙어 있는 검을 잠시 보던 나택이 결국은 그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비밀스러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라고 물어보려던 나택이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노예는 질문 금지. 그 말을 되새기면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초들이야.”

메데우스가 상자를 열었다. 커다란 상자는 모눈처럼 아주 작고 일정한 크기의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칸마다 희한하게 생긴 이파리와 유리병들이 꽂혀 있었다.

“이파리 한 장에 집 한 채 값을 하는 것도 있고, 10년에 한 번 피운다는 꽃의 잎도 있지. 여기 두 개는 이집트에서 어렵게 구해 온 거야.”

자랑을… 하고 싶은 건가. 며칠간 지켜본 메데우스의 성격으로 보건대, 이런 걸 굳이 꺼내서 자랑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나택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는데 메데우스가 이파리 중 하나를 집어 나택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나택도 알고 있는 잎이었다.

“어…. 이건 루도초 아닙니까?”

낮에 시장에서 보았던 루도초였다. 빌어먹을 시종 놈이 가져다준 향로에 담겨 있던 그 풀.

“맞아.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루도초를 돌려놓은 메데우스가 또 다른 약초를 꺼내 나택의 앞에 가져다 댔다.

“이건 모니호라는 꽃의 잎이야. 피부에 바르면 잠시 통각을 마비시켜 주는 역할을 해.”

마취제 같은 건가…?

“좋게 쓰면 약으로도 쓰일 수도 있지만,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독으로 쓸 수도 있어. 가령 예를 들어… 이걸 물에 개어 화살촉에 바르면, 화살이 박히는 동시에 독소가 내장을 뚫고 들어가게 되지. 모니호 독화살이 폐에 꽂히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져. 독이 다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메데우스의 설명을 듣자 보물 상자가 폭탄 상자로 보였다. 대체 이런 걸 왜 보물단지처럼 모아 두고 있는 걸까. 일종의 수집인가? 수집용으로 보기엔 물건들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았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는 나택도 점점 익숙해지는 이곳 생활의 규칙이 하나 있었으니,

노예는 뭐다? 질문 금지였다. 홍길동도 아니고 궁금한 것을 묻지도 못하는 제 처지가 이럴 때마다 개탄스러웠다.

나택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빤히 지켜보던 메데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해도 좋아. 허락할 테니.”

…확실하다. 오늘의 메데우스는 어제보다 한층 유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런 호의를 거절할 나택이 아니었다.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건 왜 모아 두고 계신 겁니까.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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