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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11화 (11/178)

11화

그렇게 말하면서도 놈은 활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

아는데 어쩌겠다는 거지. 왜 활은 안 치우고 계속 저러고 있는 건데.

이대로 몸을 일으켰다간 제가 화살에 맞든, 놀라서 푸드덕거리는 시종들이 화살에 맞든, 누구 하나가 제대로 다칠 것 같았다. 그래서 나택 역시 조용히 제스처를 보냈다. 워워, 마치 화가 난 호랑이를 진정시키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찔렀다.

저 밑에 있을게요. 수그리고 있을게요.

그러자 메데우스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눈짓했다. 나택이 잽싸게 두두의 머리를 누르며 몸을 깊게 숙였다.

휙-!

동시에 화살이 날아왔다. 경쾌한 진동 소리를 내며 화살이 대추야자 나무에 박혔다. 정확하게 시종들의 정수리 위에 닿는 높이였다.

놀란 시종들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으악! 이게 무슨……. 헉. 세, 셋째 주인님….”

그제야 나택도 두두와 함께 일어섰다.

메데우스가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놈이 느린 배속으로 재생하는 영상처럼 다가왔다. 아침 해를 받아 긴 그림자를 만드는 속눈썹, 유순하게 처진 눈에 맑은 눈동자, 굴곡 없이 매끈하게 뻗은 콧대와 턱선, 거기에 중앙이 도톰한 얇고 긴 입술, 탄탄한 몸까지.

껍데기 속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는 나택의 눈에도 메데우스는 성별을 뛰어넘은 미인이었다. 저대로 현대에서 태어났다면 연예인 프리패스 하고 떼돈 벌어 명성을 자자하게 넓힌 뒤 돈방석에 앉았을 상인데. 어쩌다… 이런 세계에서 태어나 가는 데마다 욕이나 들으며 살고 있는 건지.

어느새 다가온 메데우스가 손을 뻗어 박힌 화살을 쥐었다. 메데우스의 아래팔에 힘줄이 돋아나는 동시에 깊게 박힌 화살이 빠졌다.

메데우스가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일은 안 하고 여기서 여유를 부리고 있네.”

앞뒤 없는 질문에 나택은 눈만 껌뻑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내가 일어나기 전에 세숫물을 떠오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아닌가?”

제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메데우스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택은 일어나야 할 시간에 맞춰 일어났을 뿐이다. 메데우스가 그보다 빨리 밖으로 기어 나온 게 잘못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메데우스가 시종들의 바구니에 화살을 담았다.

“다음엔 좀 더 바짝 붙어 있도록 해. 그래야 한 방에 두 놈을 맞출 수 있잖아.”

“죄, 죄송…. 죄송합니다, 셋째 주인님.”

메데우스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턱짓했다. 저리 꺼지라고.

두두 역시 자연스럽게 시종 둘에게 껴서 사라졌다.

또 나택과 메데우스만 남았다. 이 저택 내에서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딜 가든 두 사람만 따돌림을 당한다. 그럼 남은 둘이 힘을 합해야 하는데, 결국에는 메데우스와 나택도 서로를 경계만 하고 있었다.

나택이 그제야 조용히 말했다.

“농땡이 핀 거 아닙니다.”

“그럼.”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요. 저는 전달받은 게 없어서, 그걸 물어보려고 했던 겁니다.”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말문이 막힌 나택이 육성으로 허, 소리를 뱉었다. 이 순간만큼은, 20년 넘게 몸에 밴 민주국가 시민의 본성이 참지 못했다.

“어떻게 물어봅니까. 그런 일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저는 회의 일정이 있다는 걸 조금 전에서야 알았습니다.”

“테레시.”

“예, 주인님. 말씀하십쇼.”

“한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려?”

“…예?”

뭘 당했다는 거지.

“놈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해 줄 거라고 정말 믿는 건가. 향로의 일을 잊었어?”

“…….”

제가 무심코 받았던 향로와 향유. 거기에 향유를 쏟는 나택의 실수가 더해져 메데우스에게 사달이 날 뻔했다. 그래. 놈들 역시 믿을 만하지 않다.

나택이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자 메데우스가 팔짱을 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정은 매일 아침 내가 전달해 주는 것만 들어.”

“…미리 알려 주실 순 없습니까.”

“그러기엔 아직 너를 신뢰할 수가 없는데.”

나택이 시선을 올렸다. 무슨 소리야. 해야 할 일을 미리 언질 좀 달라는데, 거기서 신뢰가 왜 나와.

메데우스가 나택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대추야자 나무에 메데우스의 등이 닿았다. 메데우스가 마구간을 보며 말했다.

“네가 오기 직전에 내 시종이었던 자는 나와 10년을 함께한 자였어. 나를 어릴 때부터 돌보아 준 보모이기도 했지.”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택은 주의 깊게 들었다.

“그날은 북부의 초소에 가야 하는 날이었는데,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었어. 놈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내게 가는 동안 먹을 식수와 식량을 챙겨 주었지. 그런데 말이야. 수통에 순서를 정해 주더라고. 제일 왼쪽 것부터 차례대로 먹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쓰는 놈인 걸 아니까.”

메데우스의 시선이 나택에게로 내려왔다.

“수통을 비우고 초소 근처에 다 와 갈 때쯤에 마지막 수통의 물을 마시려고 했거든. 근데, 뭔가 이상한 거야. 특별한 냄새도 나지 않고, 수통의 모양이 다른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어. 내 감은 맞았지. 그 수통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아뇨.”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왠지 얼추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이 닿는 자리에 독물이 발려 있었어. 그것도 구하기 매우 어렵다는 효과 좋은 독으로.”

“…….”

“아마 진작부터 계획했던 짓일 거야. 놈이 혼자 저지른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어. 마지막 수통에만 독을 발라 두었다는 건 나를 어떻게든 우루크 땅 밖에서 처리하고 싶다는 의미였지.”

나택이 속으로 경악했다. 아무리 역사와 사극 속에서 궁중 암투가 판을 쳤다지만, 이건 좀….

“나와 10년이나 지냈던 놈마저 결국엔 나를 치려는 검날로 돌아오는데. 너의 뭘 믿고 이야기해 주지?”

“…….”

나택이 검지로 코밑을 훔쳤다. 험악한 고대 문명 속에 끌려온 저도 저지만, 대체 얘는 여기서 무슨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나이도 어린 놈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택 역시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마른 입 안을 다시며 나택이 말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알긴 뭘 알아.”

“저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라니?

메데우스가 몸을 완전히 나택 쪽으로 돌렸다. 그가 만드는 그늘에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나택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한 발자국 더 바짝 다가갔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내게 신뢰를 보여 줄 건가? 아니면 너도 그놈과 같은 길을 걸을 건가?”

“저는 그….”

놈과 배가 맞닿을 정도로 몸이 바짝 붙었다. 그게 불편해 나택이 두 걸음을 더 뒤로 물렸다. 나택의 등에 창고의 벽이 닿았다. 이렇게 타인과 바짝 밀착해 있는 자세는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당황한 나택이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입은 다급하게 나불댔다.

“제가 그, 신뢰를… 저를 믿으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신뢰를 보여 주겠다?”

“예.”

나택의 대답과 동시에 메데우스의 손이 천천히 나택의 목으로 다가왔다. 나택의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손바닥이 아래턱을 스쳤다.

뭐지. 이 시대에서는 신뢰를 보여 주는 방법이 가까이 접촉을 하는 건가?

왜 이래. 왜 이렇게 바짝 붙어.

나택의 눈이 당황하여 여기저기를 맴돌았다. 메데우스가 바닥을 긁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보여 줄 건데?”

“차차,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라고 말씀하셔도 당장 보여 줄 방법이 없는데,”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뭘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

메데우스의 허벅지는 어느새 나택의 다리 사이를 누르기 직전까지 붙어 있었다. 나택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꾸 가까이 오시니까….”

메데우스가 나택에게서 훅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에는 풀숲에 숨었을 때 붙은 이파리가 붙어 있었다.

“머리에 이상한 걸 붙이고 있길래 떼 주려고 한 것뿐이야.”

아니,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괜히 무안해진 나택이 메데우스를 흘긋거렸다.

“아무리 우루크가 성생활에 관대한 도시라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남자를 안는 데 취미가 없어. 그러니 안심하도록 해.”

메데우스가 이파리를 허공으로 던지며 돌아섰다. 멀어지는 메데우스의 등에 대고 나택이 기가 찬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놈이네. 야. 나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

* * *

귀족 회의가 있는 장소는 니누르타 저택의 외부에 있었다. 정확히는 니누르타 저택과 신전 사이에 있었는데, 그곳 역시 사각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니누르타 저택의 미니어처 같았다.

회벽칠한 입구와 담장 벽에는 색색으로 칠한 그림이 있었다. 마치 벽화처럼 생긴 그림들이었다.

메데우스를 지나가며 웬 남자가 말했다.

“꼴에 귀족이라고 네놈도 기어이 오는구나.”

나택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놈은 메데우스의 첫째 형인 루할자게시였다. 루할자게시의 옆에는 나택의 형, 그러니까 테레시의 형인 타르타르지가 있었다.

이 세트를 여기서 또 보네.

루할자게시는 메데우스에게 냉소를 보냈고, 타르타르지는 나택에게 비린 웃음을 흘렸다. 저 타르트 새끼….

나택이 놈을 차갑게 보는데 메데우스가 응수했다.

“큰형님께서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차림을 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다고 머릿속까지 화려해지진 않을 텐데.”

그 말에 루할자게시가 눈알을 부릅뜨며 주먹을 쥐었다.

“네놈이 언제까지 그리 자신만만하게 구는지 한번 보자.”

루할자게시가 긴 스커트 자락을 풀썩이며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두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가 보시면 알겠지만…. 그곳에서도 아마… 테레시 님이 제일 가시방석 같으실 겁니다.’

‘왜 가시방석인데.’

‘가 보시면 알 겁니다. 메데우스 님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감이 좀 오실 테고….’

지금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이보다 더한 뭐가 있는 건가.

메데우스를 따라 걷던 나택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쳤다. 이렇게 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는 처음인데, 혹시 해선 안 되는 행동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왜 해외여행을 갈 때도 이건 하지 마라, 저건 하지 마라, 같은 주의 사항을 한 번씩 숙지하고 가지 않는가. 게다가 상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곳은 신분제가 있는 사회이고, 저는 그 최하층민인 노예였다. 이런 자리에서 큰 실수를 했다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다.

나택이 메데우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혹시… 제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무슨 주의 사항?”

“뭐 해선 안 되는 일이라거나…. 아니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나택의 말을 듣는 메데우스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엔 우뚝 멈추었다. 메데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택을 응시했다.

“네가 하는 말과 태도를 보면 한 번도 노예를 부려 본 적 없는 사람 같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라가쉬의 귀족으로 살지 않았나? 그곳에서도 국사를 논하는 회의는 주기적으로 열렸을 텐데. 우루크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지냈던 시간을 다 잊어버렸어?”

뜨끔한 나택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곳으로 넘어온 건 노예가 된 이후의 시점이다. 그 전을 어떻게 알겠냐고.

“네가 시키던 일들을 그대로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머저리같이 굴어.”

갑과 을이라는 게 있다면 나택은 철저히 을의 생을 살아왔다. 사람을 노예처럼 부려 본 적이 없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성을 잡고 말을 고르고 골랐다.

“네. 다 잊어버렸습니다. 과거는 잊으라고 하셨잖아요.”

설마 놈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될까 싶어 얼른 뒷말도 마저 붙였다.

“그리고 라가쉬와 우루크는 서로의 문화가 다르지 않습니까. 비슷해도… 다른 면이 분명히 있죠. 그러니까 만약을 위해 언질을 주셨으면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당당하게 물어보는 폼은 전혀 잊어버린 태도가 아닌데.”

“…….”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화려한 장식과 복식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회의장 건물로 들어갔다.

메데우스가 걸음을 늦추며 나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안에서 누가 시비를 걸어도 대꾸하지 마. 질문을 받더라도 답하지 말고.”

“…예.”

“그리고, 여기저기 눈알 돌리지 마. 내가 시키는 일을 할 때 외에는 내 팔이 닿는 범위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게 네가 저 안에서 유의해야 할 점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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