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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12화 (12/178)

12화

내부는 연회장처럼 넓은 공간이었다. 귀족들은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 바로 뒤로 시종들이 붙어 서 있었다.

메데우스가 상석 가까이 걸어갔다.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메데우스는 앉지 않고 상석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섰다. 이제 보니 메데우스처럼 앞쪽에 서 있는 몇 명 역시 귀족인 듯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나이 많은 남자가 메데우스를 향해 밝게 웃었다. 저 얼굴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택이 수눈키에서 우루크를 정복할 때 목이 떨어지는 끔찍한 연출을 보여 주던 얼굴이었다.

그는 우루크의 엔시(군주) 니누르타 쿠샨나였다.

“어서 오거라, 나의 셋째 아들.”

메데우스가 팔짱을 풀고 인사를 했다. 나택이 이제껏 보았던 메데우스의 태도 중에 제일 싸가지 있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상석 가장 옆에 앉은 루할자게시가 매섭게 지켜보았다.

엔시 쿠샨나가 테이블을 향해 말했다.

“모두 모였는가.”

귀족들이 서로 눈짓을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회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회의장의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첫 번째 안건은 구티족의 약탈이었다. 우루크의 동쪽 ‘자그로스 산악 지대’에 살고 있는 구티족은 미개한 부족이었다. 이들의 생활 습성은 도시의 문명과 맞는 부분이 한 곳도 없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우루크 성곽까지 내려와 자유민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포악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그 습성만큼이나 타고난 체력과 전투력이 어마어마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귀족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구티족이 도시 외곽을 들쑤시고 간 것이 이제 겨우 스무날입니다. 그런데 또 기미가 보입니다. 놈들의 포악이 점점 잦아지고 있어요.”

“기미가 보인다는 불확실한 말로 불안을 조성하지 마시오!”

“뭐요? 불안을 조오오오성? 내가 말을 지어냈다는 뜻입니까? 이는 메데우스 장군이 직접 정찰을 다녀와서 전해 준 사실입니다!”

귀족들의 말을 듣던 엔시 쿠샨나가 메데우스를 보았다.

“메데우스. 그게 사실이냐.”

“얼마 전 성곽 밖으로 정찰을 다녀왔습니다. 구티족 세 놈이 근방을 기웃거리고 있었죠. 이쪽이 놈들을 정찰하듯 그쪽에서도 기회를 보러 내려온 걸 겁니다.”

“어허! 하면 그 내용을 구두로 떠들 게 아니라 소상히 적어 올렸어야 할 것이 아닌가, 메데우스!”

귀족이 언성을 높였다. 메데우스가 차갑게 그를 응시했다.

“책상머리 앞에서 고상하게 계시느라 뭘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데 낭비할 시간이면 검날을 열 자루 넘게 갈 수 있습니다.”

“뭐라? 낭비? 메데우스 장군! 지금 무어라 하였소?”

“낭비라고 했습니다.”

“뭐?!”

낭비벽 심한 귀족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루할자게시가 비린내 나는 조소를 흘렸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지고 이내 다른 귀족이 그를 거들었다.

“장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요난은 그저 필요한 절차를 밟으라 권하고 있을 뿐인데!”

메데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두 분께서 나란히 이해를 못 하시는듯한데, 나는 그 절차가 낭비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장군!”

언제 또 팔짱을 낀 건지 메데우스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메데우스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 뒤에 서 있는 나택에게서 식은땀이 났다.

딱 봐도 저보다 나이가 최소 열 살 혹은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말투라니…….

신분제가 없는 현대에서도 이런 경우는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던 낭비벽 귀족이 메데우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만족의 피가 어디 가겠소? 장군은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없소!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단 말이오!”

“그런 야만인이 지켜 주는 도시에서 발 뻗고 편히 주무시는 귀족님께서는 그럼 어떤 자격이 있나.”

“이런 무례한…!”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장군의 자리는 그쪽이 맡으시든지.”

진동하듯 떠는 주먹을 불끈 쥐며 놈이 쿠샨나를 돌아보았다.

“엔시! 저런 자에게 이 도시를 맡겨야겠습니까! 메데우스에겐 장군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쿠샨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테이블 저 멀리에 있던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데우스 장군의 언행이 다소 거칠기는 하나, 그 또한 군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장군의 자격이 없다는 건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귀족 한 명도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메데우스 장군은 지금의 우루크가 있기까지 수많은 전쟁터에서 오직 승리만을 쟁취했습니다. 장군이 처음 전쟁터에 나선 때부터 우리 우루크 도시는 무패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티족이 서슴없이 약탈을 자행하면서도 쉽게 우루크 성내로는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 역시, 메데우스 장군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맞습니다, 엔시. 귀족으로서의 품위 이전에 그는 우루크의 장군으로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 메데우스를 대신해 우루크를 이만큼이나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메데우스는 자신에 대한 옹호 의견이 나오든 비판의 의견이 나오든 개의치 않았다. 한결같이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택은 이 자리에 오고서야 알 수 있었다. 메데우스가 야만족의 피라고 배척당하고, 그렇게 욕 처먹을 짓만 골라 하는데도 귀족들이 내치지 않았던 이유를 말이다.

메데우스는 이 모든 잡음을 밟아 누를 정도로 유능한 군인이었다. 출정 이래 무패의 신화….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메데우스가 무패 신화를 기록 중인 건 나택이 이곳에 노예로 끌려와 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나택이 제일 먼저 정복했을 나라가 우루크이니 말이다.

그런 제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노예로 부려 먹다니….

귀족들의 토론을 조용히 듣고 있던 쿠샨나가 상석에서 일어났다.

“다들 어떤 의견인지는 잘 알았소. 하지만 우루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인한 병사와 그들을 이끌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 것이 사실. 우리의 우루크를 위해서는 나의 셋째 아들이자 장군인 메데우스가 필요하오. 그러니 이에 대해서 더는 언급 마시오.”

쿠샨나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귀족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상석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엔시의 첫째 아들 루할자게시의 표정도 썩은 토마토처럼 일그러졌다.

구티족에 대한 대비책을 토론하는 자리인데 테이블 위 뜨거운 감자는 메데우스였다.

* * *

회의장을 나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였다. 귀족 회의에서는 동쪽의 수비를 한층 강화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결론은 결국 또 메데우스였다.

‘메데우스. 동쪽으로 가서 수비 강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오거라. 필요하다면 군마와 소수의 군인을 대동해도 좋다.’

회의장에서 나온 뒤 나택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수눈키가 정복 전쟁을 하는 스토리인 건 맞지만, 방구석에 앉아서 마우스나 클릭하고 있는 것과 삶의 터전에 전쟁이 다가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설마 나도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메데우스를 따라가며 나택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눈치 없는 배가 나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우성쳤다.

꼬르륵-.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떨어져 걷던 메데우스가 곧바로 나택을 돌아보았다.

“배고파?”

“예…. 조금….”

회의 내내 술잔을 기울인 메데우스와 달리 나택은 회의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누구보다 나택의 배 속 사정을 잘 알 메데우스인데 그걸 굳이 확인하고 있다.

“흠.”

메데우스가 나택을 보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채비를 해야 하는데…. 뭐,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따라와.”

메데우스가 턱짓하며 앞을 가리켰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자신의 처소가 아니라 시장 쪽으로 향하는 정문 입구였다.

메데우스를 따라가는 내내 나택의 배 속에선 합주가 이어졌다. 꼬르륵, 꾸르륵, 꼬로로록.

로봇처럼 걷기만 하던 메데우스도 합주 삼창이 이어질 즈음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택의 귀가 점점 붉어졌다.

“왜 웃으십니까.”

“사람 몸에서 짐수레 굴러가는 소리가 나잖아.”

그 말에 나택이 이를 악물었다.

짐수레라니 이 망할 놈아. 사람을 종일 굶겨 놓고 웃어?

“고귀한 귀족께서…… 타인의 곤경을 보고 웃으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고귀한 귀족이 아니면 마음껏 웃어도 되는 건가?”

“......”

나택이 볼을 부풀리며 미간을 구겼다. 메데우스의 입꼬리에는 여전히 은은하게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고귀한 귀족이건 말건, 저만 배고픈 이 상황이 은근하게 약이 올랐다.

* * *

메데우스가 데려간 곳은 시장 초입에 있는 작은 선술집이었다.

“앉아.”

메데우스가 의자에 앉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노예보고… 상전과 겸상하라는 건가?

이제는 제법 제 위치를 직시할 수 있게 된 나택이다. 이게 정말 앉아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나택이 가만히 서 있자 메데우스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며 기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허락하는 거야. 앉아.”

그제야 나택이 조심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특별한 날이라니요?”

“함께 원정을 갈 병사들에게는 항상 이렇게 해. 떠나기 전에 먹고 싶은 걸 잔뜩 먹여 두지.”

영양 보충을 시켜 주는 건가? 게다가 나는 병사가 아닌데.

나택이 마음속 모든 의문을 응축해서 눈동자에 모았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말을 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거든. 마지막 밥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여한 없이 먹게 해 주는 거지.”

“저는… 병사가 아닌데 왜 제게…….”

답을 알 것 같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이번 정찰에는 너를 데려갈 거야.”

“……저를요.”

나택의 머릿속에서 댕- 괘종시계가 울렸다.

“그래. 유일한 나의 시종인데, 함께 가야지.”

“저는… 병사가 아닙니다. 검을 쓸 줄도 모르고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은데….”

“몸이 둔한 편은 아니라며. 쓸 만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을 정찰하러 가는 길에 민간인을 데려가겠다니.

나택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데우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하는데, 다른 곳이면 몰라도 구티족의 정찰은 위험이 커. 우루크는 언제나 병사가 부족해. 정예군 하나하나가 중요한 재산인데, 굳이 병사들에게 불필요한 위험부담을 갖게 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네가 대신 따라와.”

나는…. 나는 위험부담을 가져도 되냐.

나택이 부풀어 오르는 볼을 숨기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 주인장이 테이블 위에 시카르(메소포타미아에서 맥주를 부르는 말) 두 잔을 내려놓았다. 안에는 갈대로 만든 빨대가 꽂혀 있었다.

“먹어. 오늘만큼은 네 신분을 잊고 원 없이 욕망을 채워도 좋아.”

잔을 멀뚱멀뚱 내려다보는데 화가 난다. 너무 화가 났다. 하고 싶은 말은 수백 가지가 넘는데, 그걸 입 밖에 낼 수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 갑갑했다.

나택은 잔 속의 빨대를 꺼내 테이블 위에 퉁명스럽게 내려놓았다. 빈속인 것도 잊고 화를 누르기 위해 잔에 든 술을 그대로 위 속에 가득 들이부었다.

* * *

얼마나 흘렀을까.

“하…….”

나택이 고개를 푹 숙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맞은편에 앉은 메데우스는 삐뚤게 앉은 자세로 나택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후…….”

나택이 더 길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메데우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테레시.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좀 더 먹지 그래.”

나택이 늘어진 손 한쪽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뼈 잃은 근육처럼 대롱거리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후……. 저기요.”

“저기요?”

메데우스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게 술을 마시랬더니 약을 먹었나. 말조심 안 해?”

“예! 안 할 겁니다!”

“…테레시. 설마 시카르 세 잔에 취한 건 아니지?”

메데우스는 회의장에서부터 물 대신 술을 마셨고, 선술집에 와서도 쉼 없이 시카르를 들이켰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택은 겨우 시카르 두 잔째를 비웠을 때쯤부터 영혼을 잃어 가고 있었다.

사회생활 하기 어렵다는 지독한 알코올 쓰레기, 그게 바로 나택이었다. 말술과 알코올 쓰레기의 합석은 최악의 조합이었다.

메데우스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나택의 고개가 아주 조금 위로 올라갔다.

“…예. 겨우 세 잔에, 취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관이네. 고개는 좀 들고 얘기하지 그래.”

“싫습니다. 꼴도 보기 싫고요,”

“누가, 내가?”

“그래.”

“허. …어떤 점이?”

메데우스의 몸짓이나 표정에서 딱히 화난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 그저 이 무례한 노예가 제게 무슨 얘길 할까 궁금해 보이는 눈치였다.

“난… 아직 죽을 생각이 없어. 그런데 왜 네 마음대로 나를, 사지로 몰고 가려고 해. 내 목숨은 10원짜리냐?”

“뭔 짜리?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 목을 쳐 버리기 전에 일단 고개부터 들어.”

“……싫어.”

나택이 오기를 부리듯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느리게 일어나더니 나택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사각형의 테이블에서 모서리 하나를 끼고 두 사람이 가까이 붙었다.

“테레시.”

메데우스가 팔을 뻗어 나택의 뒤통수를 한번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뒤로 확 잡아당겼다. 불시에 느껴지는 악력에 나택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메데우스의 강아지 같은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자, 이제 계속 얘기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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