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메데우스가 한쪽 눈을 일그러트리며 나택을 한심하게 보았다. 메데우스의 몸이 달빛을 가리며 나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
“아누(Anu).”
“예?”
“아누라고. 신의 이름.”
“아누….”
나택이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내용은 없었다.
나택이 했던 ‘수메르의 아눈나키’라는 게임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신들을 가문으로 선택해 캐릭터를 생성하게 된다. 나택이 선택한, 흔히 이슈타르라고 알려진 이난나도, 길가메시의 어머니라는 닌순도, 릴리스라고 알려진 키스킬릴라도, 온갖 신들이 선택지에 있었지만 아누라는 신은 없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나택이 이 세계에서 ‘이난나’ 테레시로 불리듯 메데우스 역시 수호신의 이름으로 불릴까? 하는 아주 단순한 궁금증.
“혹시 그게 가문의 이름이었습니까?”
“맞아. 잘 아네. 우루크에 오기 전까지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아누 메데우스…. 니누르타라는 성보다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메데우스가 어깨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름을 버리면서 이 흔적도 같이 지워 버리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더라고.”
메데우스가 슬쩍 팔꿈치를 들어 보여 준 옆구리 위쪽에는 지워 내지 못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택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너는. 네 가문의 이름은 뭐야.”
불쑥 메데우스가 질문을 던져 왔다.
“제 가문이요?”
“그래. 너도 이난나의 혈족은 아니잖아?”
아. 그 말에 나택이 제 뺨을 문질렀다. 누가 봐도 이난나 가문의 사람들과는 생김새가 다를 테니, 자연스럽게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혹시 그게 메데우스에게 동질감을 끌어내는 걸까…?
놈이 은근히 제게 관용을 베풀던 최근이 떠올랐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보니 아무래도 그 동질감에서 기인한 아량인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럴 때 뭐라도 친밀감을 만들어 두면 적어도 놈이 저번처럼 제게 냅다 단검을 던지진 않을 것이다. 나택은 살기 위해 제 신상을 까기로 결심했다.
“네. 저도 따로…. 이름…. 가문이 있습니다.”
“네 건 뭔데.”
“이…나택이요.”
“이나택?”
“네.”
“이나택 테레시?”
나택의 미간이 좁아졌다. 멀쩡한 이름 뒤에 괴상한 게임 닉네임을 붙이니까 영 어색했다. 하지만 메데우스의 표정에 장난기가 전혀 보이질 않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나택이었습니다. 나택. 이, 나택이요.”
“어디 출신이야. 동쪽? 이름 한번 괴상하네.”
고대 인간 주제에……. 네가 현대인의 네이밍 센스에 대해 뭘 알아.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나택이 딱딱하게 답했다.
“테레시라는 이름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름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데 메데우스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또 선을 넘었나?
이 새끼의 선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별로 미안하진 않지만, 또 한 번 사과를 해야 할 타이밍 같았다.
나택이 고개를 들려는 때, 메데우스가 손을 뻗어 나택의 정수리를 눌렀다. 나택이 고개를 들려 했지만, 메데우스가 힘으로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나택.”
“…예?”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이 낯설었다.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 싶어 온몸이 경직됐다. 그림자가 더욱 가까워졌다. 메데우스는 나택의 정수리를 누른 제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곧 메데우스가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문을 모르는 나택이 물었다.
“…뭡니까?”
“내 고향에서는 애도를 표하거나 이별을 고할 때 달빛을 입에 담아 전달하는 의식을 치러.”
이해 가지 않는 말에 나택이 메데우스의 손이 닿았던 제 정수리를 문질렀다.
“너나 나나. 버림받은 이름은 잊어버리자고.”
메데우스는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섰다.
나택은 제 몸이 나신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오랫동안 그 말의 의미를 유추하며 비누칠을 해야 했다.
* * *
야밤에 그 수치와 곤욕과 노동을 당하고 난 뒤, 니누르타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택은 큰 목욕탕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정말 엄청나게 큰, 현대의 유명 온천에 견줄 만한 넓은 공중목욕탕을 말이다. 그걸 보는데 두두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참! 셋째 주인은 대형 목욕탕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쓰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한 것 같지만요.’
이 넓고 시설 좋은 목욕탕을 두고. 제 주인만 여길 쓰지 못해서, 그래서 이나택 혼자 그 개 같은 노동을 해야 했던 거다.
신분제 사회에 대해 좋은 이미지는 없었지만, 거기에 더해 출신을 따져 대는 고대 놈들의 가치관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에 비하면 메데우스는 생각보다 개방적인 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가라는 건 시대와 비교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었다.
그래도 제법 오랜만에 몸을 제대로 씻어서인지 새벽같이 일어났는데도 개운했다. 아침 일과를 모두 마친 나택과 메데우스는 빠르게 정찰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쿤가는 탈 줄 알지?”
메데우스가 고삐를 쥐며 말했다. 윤기가 흐르는 근육질 동물이 나택을 지긋이 보았다. 말보다는 작지만 절대 쉽게 탈 수 없는 짐승이었다.
“…모릅니다.”
“라가쉬에서 대체 뭘 한 거야? 쿤가도 탈 줄 모른다고?”
귀족들이 필수로 갖고 있어야 하는 기본 소양 그런 건가. 자꾸 라가쉬, 라가쉬, 거려도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였다. 할 줄 안다고 뻥 쳤다가 저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메데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삐를 나택에게 넘겼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이요?”
메데우스가 어서 고삐를 잡으라는 듯 나택의 손을 눈짓했다. 잠깐 메데우스와의 과거 대화를 짚어 보던 나택의 눈빛에 좌절과 경악이 서렸다.
‘사실 네가 뭘 할 줄 아는지는 상관없어. 자잘한 일은 저택의 시종들이 하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사사로운 것들은 모두 네가 책임을 져야 해. 그러니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습득해.’
“설마….”
“빨리 잡지 않고 뭐 해.”
나택이 느린 동작으로 고삐를 쥐었다. 나택은 다른 고대 놈들과 비교해 메데우스를 올려 쳤던 것을 곧바로 취소했다.
만약 이놈을 타고 가다가 떨어진다면, 그래서 다친다면, 노예 따위는 치료조차 받지 못한다면, 아니 치료를 받아도 미개한 방법으로 상처를 더욱 악화시킨다면, 그래서 죽는다면, 현실로 돌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저는… 걸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어딜. 자그로스산맥을?”
자그로스산맥이 뭐 한 치악산쯤 되는 곳인가?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메데우스가 제 쿤가의 고삐를 살펴보며 말했다.
“뒤에 묶여서 끌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타고 가는 게 좋을 거야.”
“…….”
메데우스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메데우스인데, 나택의 마음에서는 손바닥 뒤집듯 다른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어제까진 조금 불쌍하기도 한 못된 놈이었는데, 한순간에 그냥 빌어먹을 개새끼로 바뀌었다.
* * *
우루크 도시 안에서는 노예가 쿤가를 타고 활보할 수 없었다. 메데우스가 나택을 쿤가에 태우려 계획한 건 성곽을 빠져나가는 타이밍이었다.
쿤가 한 마리를 두고 어려운 협상이 이어졌다. 나택은 쿤가를 무서워한다는 말로 동정심을 사려 했고, 메데우스는 나택이 해야 할 노예의 의무를 거론하며 얄짤 없이 그의 말을 쳐 냈다.
그렇게 온 게 바로 지금이었다.
성곽의 동쪽 문에 도착한 메데우스가 문지기에게 손짓했다. 대번에 메데우스를 알아본 문지기들이 허리를 굽히며 성문을 열었다.
쿵-.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메데우스가 쿤가 위에 올랐다.
“순한 놈으로 줬으니까, 더 이상 토 달지 마.”
“…….”
“빨리 타지 않고 뭐 해?”
“예….”
사슴 같은 눈으로 저를 보는 쿤가를 향해 나택이 간절하게 빌었다.
우리 같이 잘해 보자. 제발, 험하게 달리지만 말아 줘.
나택은 알고 있는 모든 신을 소환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쿤가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 메데우스 님!”
누군가 메데우스를 불렀다. 성벽에 붙어 안절부절하고 있던 부부가 메데우스에게 달려왔다. 젊은 부부는 메데우스나 나택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들 역시 성곽 안에 사는 우루크 사람들과 머리카락, 눈의 색이 달랐다. 게다가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곧바로 쿤가에서 내려왔다.
“도와주세요, 메데우스 님!”
두 부부가 냅다 바닥에 엎드렸다. 그 옆에 서 있던 나택마저 그들의 절을 받은 꼴이 되었다. 나택이 재빨리 두 사람의 옆으로 비켜났다.
“뭐야.”
“구티족이 저희 딸 하크를 끌고 갔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데, 문지기들이 들여보내 주질 않습니다.”
“들여보내 주질 않으니, 저희가 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메데우스 님!”
두 부부가 무릎으로 기어 와 메데우스의 다리에 매달렸다.
저러다… 발길질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