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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16화 (16/178)

16화

그런데 메데우스는 부부를 발길질하지도 않고 내치지도 않았다. 항상 나른하게 쳐져 있던 메데우스의 눈매에 서슬이 맺혔다.

“하크가? 언제.”

“오늘 새벽에요. 쿤가들 먹일 목초를 구하려고…. 하필 오늘따라 일찍 나섰는데, 놈들과 마주쳤습니다!”

“메데우스 님,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오늘 새벽. 그렇다면 메데우스와 나택이 목욕을 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돌아간 이후인 듯했다.

“어느 쪽으로 갔어. 몇 놈이었지?”

“자그로스 네 번째 숲길 쪽으로 갔습니다! 세 놈이었어요!”

메데우스가 쿤가의 고삐를 쥔 채로 숲을 응시했다. 긴 속눈썹과 눈꺼풀이 회색 홍채를 반쯤 가렸다. 가늘게 좁아진 시야로 메데우스가 멀리 보이는 산맥을 길게 훑었다.

“새벽 아침이면…. 아마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숲에 들어설 거야.”

메데우스가 허리에 찬 검을 더욱 단단하게 고쳐 맸다. 그러고는 안장에 걸쳐 놓았던 활과 화살을 등에 지고는 쿤가 위에 올라탔다.

나택이 어찌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는데 메데우스가 손짓했다.

“테레시. 이리 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택의 마음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나택이 빠르게 제게 할당된 쿤가의 고삐를 쥐고는 다가갔다.

“이리 올라타.”

“예?”

메데우스가 제 앞을 가리켰다.

“전력으로 달릴 거야. 혼자서 타고 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메데우스와 함께 붙어 말을 타는….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기분을 따질 상황이 아닌 듯했다. 돌아본 뒤쪽에서 두 손을 꾹 쥐고 눈물 콧물을 쏙 빼는 부부가 보였다. 제가 늦는 만큼 저들의 아이도 위험해질 것 같았다.

나택은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꾹 감고 메데우스가 뻗은 손을 잡았다. 큰 키의 성인 남자 몸을 메데우스가 가뿐하게 당겨 태웠다.

쿤가의 고삐 두 개를 이어서 묶자마자 나택의 등에 메데우스의 가슴이 닿았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하반신도 의도치 않게 바짝 붙었다.

“떨어지면 뒤에 매달고 끌고 갈 거니까, 잘 붙어 있어.”

메데우스가 고삐를 내려쳤다.

수호신에 관한 두 번째 퀘스트 ‘수호신의 행방’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하루 종일 메데우스와 붙어 있어서 그런 건지 단서를 알리는 시스템 안내창조차 뜨지 않았다. 하지만 퀘스트에 대한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나택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승마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달리는 네발짐승의 위에 앉아 있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도 몰랐다. 차라리 그냥 남아서 기다리겠다고 말이라도 해 볼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말 그대로 늦은 뒤였다.

달리는 쿤가 위에서 나택은 제 신세를 한탄하다, 곧 맞닥뜨릴지도 모를 구티족에 대한 두려움에 떨다, 아릿한 엉덩이를 참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혀를 깨물까 봐 입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메데우스는 말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해가 중천일 때쯤이 돼서 출발했는데, 어느새 노을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려 했다. 중간에 쿤가를 한번 바꿔탔을 뿐, 쉼 없이 달린 두 사람이 자그로스 숲 입구에 도착했을 때 우루크의 성곽은 저 멀리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쿤가에서 내리는 메데우스를 따라 나택도 드디어 지상에 발을 디뎠다.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두드리는데 메데우스가 작은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받아.”

나택이 주머니를 받았다. 안에는 제 손 길이보다 조금 긴 단검이 들어 있었다.

“구티족은 호전적인 놈들이야. 야만적이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이런…. 이런 작은 거로 뭘 어떻게 대처하란 소리지? 이걸 주는 의도에 관한 질문은 참을 수 없었다. 나택의 목숨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제대로 된 검을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런 걸로 그런 놈들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그 말에 메데우스가 나택을 위아래로 훑었다.

“검을 줘도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구티족 놈들 주먹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거면서.”

“그 정도로,”

“그 정도로 사나운 놈들이야. 괜히 검을 쥐고 있다간 너까지 표적이 돼. 귀찮게 만들지 말고 쿤가들이랑 한데 모여서 잘 붙어 있어. 그건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해서 준 거니까.”

메데우스는 나택을 쿤가와 비슷한 급으로 취급했다. 말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로 짐 지킴이 용도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메데우스가 검과 활을 고쳐 매고는 숲을 가리켰다.

“따라와.”

나택은 메데우스의 뒤통수를 따라가며 손에는 쿤가의 고삐를 쥐고 걸었다.

걷고 또 걷는데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의 생사가 걱정되긴 했다. 매달리며 애원하던 부부도 그렇고. 하크라는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메데우스와 아는 사이 같았는데.

며칠 메데우스를 지켜보며 확실하게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메데우스는 저택 내의 시종에게 대하는 태도와 저택 밖을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 딴판이었다.

기준이 뭐지. 대장장이 노인의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아까 만났던 부부도 우루크의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돌이켜보니 선술집에서 보았던 주인장도 그랬던 것 같기도….

그때, 메데우스가 우뚝 멈춰 섰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평탄한 길과 다르게, 메데우스가 멈춰 선 지점부터 약간의 경사가 졌다.

메데우스가 수통 하나를 꺼내 쿤가들의 목을 축였다.

“아마 달이 떠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그 말에 나택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걸어오는 길에는 듬성듬성 심겨 있던 삼나무가 멈춰 서 있는 자리를 기점으로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높고 빼곡하게 솟은 잎 때문에 마치 하늘이 분절된 것처럼 앞쪽에만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되니까, 앞으로 그 질문은 떼고 말해.”

그럼 진작에 그냥 편하게 말하게 해 주던가. 나택이 조용히 이맛살을 구겼다. 하지만 이런 걸로 불만을 토로할 상황은 아니었다.

“왜 달이 떠야 움직일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삼나무 숲은 깊이 들어갈수록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구티족의 거주지로 넘어가려면 이 삼나무 숲을 통과해야 하는데, 길이 험해서 빛이 없이는 움직이기가 힘들지. 아마 이 앞 어딘가에서 쉬고 있을 거야.”

“잡혀갔다는 아이하고는 아는 사이신 건가요?”

“그 아이의 부족이 쿤가를 돌보거든. 우루크 내의 쿤가를 그 부족이 전부 돌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들여보내 주지 않은 겁니까?”

아이의 부모가 떠올랐다. 성문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모습이.

나택의 질문에 메데우스가 쿤가에게 물을 먹이다 말고 몸을 곧게 세웠다. 또 저 눈이었다.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저리를 보는 듯한 시선.

“대체 라가쉬에서 어떻게 살아온 거야, 넌?”

“어떤 점이…….”

“우루크민이 아닌 타 부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물어보는 거야.”

조금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택은 속으로 메데우스에게 말했다. 나는 이런 신분제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살다 온 인간이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조금만 더 이 우루크 도시의 노예라는 위치에 몰입해 보자고, 그렇게 두 눈을 꼭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쿤가를 돌봐 줄 정도의 사람들인데 그래도 나름 우루크에 중요한 사람들이지 않나 해서….”

이어지는 나택의 말에는 메데우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중요한 사람들이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거냐. 하지만 나택은 소신 있게 말했다. 그런 걸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직이라고 부르니까.

“대체할 인력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만큼 쿤가를 잘 돌보는 사람들도 없는 거고요. 그럼… 중요한 거 아닙니까.”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쿤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메데우스가 완전히 나택에게로 돌아섰다. 메데우스의 눈빛에는 어느새 봄 햇살이 사라지고 가을 낙엽을 닮은 짙은 어둠이 얹혀 있었다.

“……맞아. 그들만큼 쿤가를 건강하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은 없어. 한낱 노예도 아는 사실을, 저 성벽 안에 있는 놈들은 왜 모르는 걸까.”

“…….”

메데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의 붉은 꼬리가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크는 기량이 뛰어난 아이야. 지금은 성벽에 막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기회만 된다면 우루크의 멍청한 놈들보다 크게 성장할 거야.”

메데우스의 눈꺼풀에 날카로운 그림자가 졌다.

“이대로 잃기엔 아까워.”

“…무사했으면 좋겠네요.”

메데우스가 고쳐 쥔 고삐를 당겼다.

무사해야지. 무사할 거야.

메데우스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목을 축인 쿤가들이 기운을 차린 듯 조금 전보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택이 놈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데 메데우스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대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어?”

“안 끝났다고 하면 여기 남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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