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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나와 떨어져 있게 되면 네 목숨 장담 못 해.”
닥치고 따라오라는 소리였다.
고삐를 건네받은 나택은 앞장서는 메데우스를 따라 걸었다. 괜히 긴장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손바닥에는 땀이 모여들었다.
혹시 뭔가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되나. 쿤가나 잘 챙겨서 어디 숨어 있으면 될까. 숨는다면 어디로? 역시 나무 뒤가 좋겠지?
나름의 퇴로를 계획해 두어야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예전에 메데우스에게 독사를 부어 넣고 도망치던 놈처럼 말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한차례 시뮬레이션까지 끝내고 나니 각오가 굳어졌다. 목표 첫 번째는 살아서 나가는 거고, 목표 두 번째는 메데우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거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시스템 안내창이 번쩍 떴다.
자그로스산맥의 ‘삼나무 숲’에 진입했습니다.
혹여나 퀘스트에 관련된 내용일까 놀랐는데 그냥 뻔한 안내 문구였다.
나도 알아….
온 지천이 똑같이 생긴 삼나무투성이니 모를 수가 없다.
삼나무 숲까지 오는 내내 나택은 생각했었다. 수눈키를 할 때 ‘수호신의 행방’이라는 퀘스트가 있었던가? 하고 말이다. 어제까지는 제가 스킵했던 퀘스트 중 일부였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숲에 오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만한 거리를 이동하는 퀘를 이렇게까지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나택을 고대 문명 속 캐릭터로 완벽하게 고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퀘스트 같았다.
그런 의도의 퀘가 맞겠지?
확신이 없는 나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 순간 무언가 번쩍거렸다. 동시에 메데우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메데우스가 손목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택이 사인을 알아채고 재빨리 다가가 귀를 붙였다. 메데우스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신호 보낼 때까지는 쥐 죽은 듯이 있어.”
나택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갯짓으로 답했다.
메데우스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손은 허리춤에 찬 검에 얹어 두고.
세상에 이렇게 긴장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대학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때도, 대박 꿈을 꾸고 로또를 산 뒤 세 자리 번호까지 당첨 번호와 같은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때도 지금처럼 심장이 뛰진 않았다.
쿤가들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발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얌전했다.
그때, 또 한 번 바닥에 작은 빛이 번쩍거렸다. 그냥 빛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시스템이 보내는 홀로그램을 닮은 불빛이었다.
동시에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수상한 상자가 나타났습니다.
왔다.
왔어!
두 번째 퀘스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신호였다.
수호신의 행방. 나택의 길잡이가 되어 줄 놈을 알아낼 단서.
긴장하고 있던 나택의 심장에 부담이 가중되었다. 나택은 뛰는 제 가슴을 고삐와 함께 세게 움켜쥐었다.
상자를 열어야 해.
느린 걸음 때문인지 메데우스는 아직도 나택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있었다.
움직여도 될까. 저걸 열어야 하는데.
그때, 빛이 또 한 번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메데우스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였다.
수상한 상자2가 나타났습니다.
어?
그리고 곧이어 왼쪽으로 돌린 시야에 또 다른 빛이 들어왔다.
수상한 상자3이 나타났습니다.
나택은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냥 풀어 주는 단서가 아니었다. 선택지에 따라 다른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선택형 퀘스트였다.
빌어먹을. 왜 이 중요한 시점에서 저게 나오는 거지?
수눈키 속에서 상자를 열어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은 다양하다. 보통은 포션, 무기 강화 재료, 단서가 들어 있지만, 꽝이 들어 있을 때도 있다.
메데우스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나택이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민하고 있는데 재촉하는 시스템의 안내창이 또 한 번 시야를 밝혔다.
수상한 상자의 내구도가 점점 떨어집니다.
“…….”
장착용 템도 아니고, 무슨 내구도가 떨어져. 기가 막혀서 한 소리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앞을 잴 수 없는 처음 보는 퀘스트. 사라져 가는 상자.
놓치면 큰 단서를 영영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앞으로 나택의 고대 문명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메데우스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나택은 고대인이기 전에 현대인이었으니까. 나택이 쿤가를 슬쩍 돌아보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너네들 조용히 있어야 한다.
왠지 게임 속 말이라면 알아들을 것 같아서 괜히 한번 얘기해 봤는데, 놈들은 정말로 나택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숨소리만을 내며 얌전히 있었다.
나택은 고삐 두 개를 바로 옆 나뭇가지에 걸쳤다. 그러고는 상자를 선택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수상한 상자의 내구도가 점점 떨어집니다.
…재촉하지 마라.
하는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할 수밖에.
나택이 결심을 굳히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숲에 심어진 나무가 죄다 침엽수 삼나무인 덕분에 낙엽 밟는 소리 따위는 나지 않았다.
나택이 조심스럽게 상자 하나에 다가갔을 때, 메데우스는 저 앞에까지 가 있었다. 나택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상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귀신같이 알고 시스템이 의사를 물어 왔다.
수상한 상자를 여시겠습니까?
열어.
마음속으로 그렇게 답했다. ‘열어’라는 대답을 내뱉는 순간 열 받는 점술사 놈의 ‘열려라, 참깨’가 떠오르는 것을 꾸역꾸역 눌러 담았다.
수상한 상자를 정말 여시겠습니까?
“…….”
뭐지?
내가 말한 게 안 먹힌 건가? 아니면 그냥 다시 한번 물어보는 건가? 경고 차원에서…?
그러나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사달이 벌어지기 전에 열어야 한다.
그래. 열어. 열라고.
그러자 달칵,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안에서 스멀스멀 안개가 새어 나왔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기묘한 포션’을 획득하셨습니다!
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연달아 안내 문구가 번쩍였다.
24시간 동안 포션의 효과가 지속됩니다.
공력력이 50 증가하였습니다.
방어력이 50 증가하였습니다.
민첩성이 50 증가하였습니다.
행운이 50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뜨는 문구에서 나택은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뻔한 것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당신의 주인 ‘니누르타 메데우스’와 HP가 연동됩니다.
뭐?
잠깐. 뭐라고?
빛이 사라졌다. 시스템이 남긴 안내 문구도 흔적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황한 나택이 그대로 굳었다. 상자는 어느새 세 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택은 그대로 목석이 되었다.
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나택은 자신에게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아니, 시스템에게 물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시스템은 나택이 필요로 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메데우스와… 피 통이 연동된다고…?”
몇 번을 되새김질해도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저 앞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용히 있던 쿤가들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나택이 빠르게 쿤가들에게 다가갔다. 가는 동안 발꿈치는 최대한 들어 소리를 죽였다.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나택의 머리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1. 쿤가가 소리를 낸다.
2. 인기척이 들린다.
3. 누군가, 그러니까 구티족이라는 놈들이 그걸 눈치챈다.
4. 공격이 들어온다.
5. 메데우스가 다친다, 혹은 죽는다.
6. 이나택도 죽는다.
나택이 쿤가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애원하듯 놈들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있어. 제발 가만히 있어 봐.
어르고 달래고 토닥이는데, 메데우스가 있을 뒤쪽에서 더욱 크게 바스락 소리가 났다.
휙-!
동시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나택의 건너편에 있는 삼나무 줄기에 꽂혔다.
퍽-!
화살이 이렇게 묵직한 소리를 냈었나.
나택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관찰했다. 실루엣은 화살이 아니었다. 부메랑인지 낫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형체가 박혀 있었다. 애써 진정시켰던 쿤가들이 놀라 히힝 소리를 내며 어두운 허공에 앞발질했다.
동시에 메데우스가 전진하던 방향 쪽에서 크게 구르는 소리가 났다. 나택이 고삐를 꼭 잡고 쿤가를 진정시켰다. 근육질의 동물 몸을 토닥이며 돌아보는데 돌덩이가 바닥을 구르며 누워 있었다.
삼나무 잎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돌덩이를 비추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놈의 팔뚝은 나택의 두 배만 했고 다리통 역시 나택의 허리둘레만 했다. 수북한 턱수염과 산발인 머리를 하고 있는 놈은 다리를 부여잡고 어찌할 줄 모르며 끙끙대고 있었다.
저게 구티족이구나.
그제야 우루크가 그 견고한 성곽으로 도시를 두르고도 구티족에게 절절매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택도 현대에서는 힘깨나 쓰는 편이었는데 얼핏 봐도 저놈과는 체급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잠깐, 근데 메데우스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