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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19화 (19/178)

19화

순간, 나택의 머릿속에 온갖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제 인생이 아니라 픽션 속 남의 인생이 지나갔다.

꼭 가지 말라는데 고집부리고 가서 집 한 채를 홀랑 불태워 먹는 캐릭터 A

꼭 열지 말라는데 상자를 열어서 세상을 개판 쳐 놓은 캐릭터 B

꼭 가만 있으라는데 몰래 돌아다니다 나쁜 일에 얽혀서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캐릭터 C

그들을 보며 답답함에 얼마나 가슴을 쳐 댔던가. 저런 머저리가 저 상황에서 저러고 있다고, 속으로 한탄하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다들 서사가 있고 필요한 캐릭터였겠지만 그게 제가 되고 싶진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택이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쥐어 황소의 눈에 소금 뿌리듯 냅다 던졌다.

“으아악!”

황소가 방심한 사이 발을 빼낸 나택이 그대로 황소의 머리를 발로 찼다.

공격력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민첩성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포션의 효과는 착실히 발동하고 있었다.

나택에게 발로 까인 황소가 격렬하게 분노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택이 민폐 캐릭터가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음 공격을 시전하려던 때였다. 순간 살점을 찢는 소리가 차지게 들렸다. 황소의 눈에 핏발이 섰다.

메데우스가 쯧, 혀를 찼다.

“참…. 말을 안 들어.”

메데우스의 검이 황소의 등에 꽂혀 있었다. 삼나무 숲의 다섯 거인은 모두 움직일 힘을 잃은 채였다. 황소의 몸이 나택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택이 놈을 피하려 나무 쪽에 바짝 붙었지만, 생각보다 놈의 어깨가 너무 넓었다. 육중한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나택을 밀쳤다. 무방비하게 있던 나택이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HP 14% 감소

“어윽….”

대자로 넘어지면서 팔과 어깨에 충격이 가해졌다. 가슴에는 더 큰 고통이 왔다. 바닥에 있던 돌덩이가 부딪힌 모양이었다.

나택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빠각-.

돌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나택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제야 떠올랐다. 제일 첫 퀘스트에서 얻었던 오래된 편지. 메데우스가 해독해 주었던 점토판을 제가 가슴에 줄곧 품고 다녔다는 사실이 말이다.

헐. 이게 깨지면 안 되는데?

나택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옷 속에 손을 넣었다. 단단한 네모 모양이어야 할 가죽 주머니의 실루엣이 울퉁불퉁했다.

대체로 수눈키에서 시스템이 퀘스트 용도로 주는 아이템은 파손할 수 없었다. 거래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점토판이 깨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미친 거 아닌가. 이래도 돼?

나택이 상태를 확인하려 가죽 주머니를 열려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정확하게는 나택의 얼굴 옆을 스치며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뜬 시스템 문구에 나택이 메데우스 쪽을 보았다. 메데우스는 나택에게 등을 돌리고 숲 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누가 쐈지?

한 발이 끝이 아니었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곧이어 두 발, 세 발이 연달아 나택의 옆을 지나갔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연달아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나택의 선택, 결말의 분기점이 될 기로가 지금 답을 주는 것 같았다.

“쿤가 쪽으로 가!”

메데우스가 소리쳤다. 순간 화살 열댓 발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창이 미친 듯이 같은 문구를 반복해서 띄웠다. 나택이 슬쩍 시선을 돌려 나무에 박힌 화살을 관찰했다. 이건… 구티족이 지금까지 쓰던 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메데우스가 들고 있던 화살과 비슷했다.

나택이 몸을 바짝 숙여 바닥을 기듯 포복 자세로 쿤가를 향해 기어갔다. 설마, 설마 하고 넘기기에 나택은 현대사회에서 너무 많은 드라마를 봤다. 권력을 탐하고 증오를 풀기 위해 자살골을 넣는 놈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 순간 떠오르는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네놈이 그럼… 메데우스 그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시종이구나…. 쌍으로… 이것들이 나를 엿 먹이려 해…?’

저를 보며 살벌한 표정을 짓던 니누르타 가문의 첫째 아들, 루할자게시.

증거는 없지만, 나택의 마음속 용의 선상 1순위였다. 나택은 바닥을 기며 복수를 다짐했다. 너는 내가 꼭 한번은 엿 먹인다.

수풀을 굴러 내려가는데 뒤에서 메데우스가 고군분투하는 소리가 들렸다. 뭘 어떻게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쿤가에게 가야 했다. 이 상황에서 퇴로마저 막혀선 안 된다.

그렇게 쿤가 쪽으로 거의 다 와 가려는데 또 한 번 발목이 잡혔다.

“네놈…. 으….”

이번엔 가장 처음 굴러떨어지던 구티족 놈이었다. 참으로 질긴 목숨들이었다.

화살에 맞을까 봐 일어설 수는 없었다. 나택이 엎드린 상태로 놈을 떼어 내기 위해 힘껏 발길질했다.

공격력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그런데 놈이 꿈쩍도 안 했다.

HP 15% 감소

이제 누구의 체력이 깎이고 있는 건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또 한 번 알림창이 떴다.

HP 18.9% 감소

나택이 당황해서 메데우스 쪽을 보았다. 메데우스를 향해 연달아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놈은 나택이 있는 쪽으로 화살이 가지 않도록 버티며 방어만 하고 있었다.

HP 20.2% 감소

나택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 빌어먹을 새끼…!”

나택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구티족을 발로 미친 듯이 찼다. 그 순간 메데우스의 포위망을 벗어난 화살 두 개가 나택 쪽으로 날아왔다. 화살은 나택과 이어져 있던 구티족 놈에게 꽂혔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치겠네, 진짜.

나택이 놈을 떨어 내며 다급하게 쿤가 쪽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격한 움직임에 가슴이 바닥에 쓸리며 점토판이 더 잘게 부서졌다. 쿤가에게로 뛰어가려 나택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점토판이 담긴 가죽 주머니가 옷 바깥으로 흘러 내려왔다.

당황한 나택이 주머니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벌어진 주머니 입에서 부서진 점토판이 흘러나오는 게 먼저였다. 점토판의 조각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어…?

나택이 쪼개진 점토판을 집어 들자 그 사이에서 얇고 딱딱한 플라스틱이 나왔다. 나택의 시야에 밝은 빛이 떴다.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카드를 획득했습니다!

아니 이게 여기 있었다고?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줄곧 가슴에 품고 다니던 점토판 안에 캐릭터 정보가 숨어 있을 줄이야.

시스템이 눈치 없이 안내창을 띄웠다.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미쳤냐. 지금 그럴 정신이 어딨어!

나택은 정신없이 남은 점토판 조각과 카드를 챙겼다. 사람 둘이 나란히 죽게 생겼는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나택이 쿤가에게로 달려가려는데 시스템이 고장 난 것처럼 계속 안내창을 띄웠다.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이난나 테레시’의 캐릭터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아 이런 씹, 미친.

연달아 뜨는 글자가 눈앞에 가득 찼다.

“열어, 열어!”

달려가며 나택이 소리쳤다. 그 순간 나택의 옆으로 화살 하나가 더 스쳐 갔다. 또 한 번 HP 감소를 알리는 안내창이 떴다.

반복 문구는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캐릭터 정보가 줄줄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타자를 치듯 글자를 한 자씩 허공에 써 내려갔다. 번쩍거리며 정신 사납게 시야를 채우는 캐릭터 정보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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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의 아눈나키’

이름 : 이난나 테레ㅅ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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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택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HP 24.1% 감소

“윽….”

발목을 삔 건지 통증 때문에 곧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택이 몸을 옆으로 돌려 다른 쪽 발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려는 타이밍이었다. 나택을 향해 화살 세 개가 날아왔다. 이번엔 바로 나택의 가슴과 얼굴 정중앙을 향해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건… 민첩성+50, 행운 +50 정도로는 피할 수 없다. 각이 나오는 위치였다.

반쯤 드러누운 자세의 나택에게 삼나무로 가려졌던 밤하늘이 보였다. 새카만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콕콕 박혀 있었다.

별들의 사이로 캐릭터 정보가 계속 빈칸을 채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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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의 아눈나키’

이름 : 이난나 테레시 / 직업 : 노예

수호ㅅ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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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살이 제게 날아오는 모습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넘어지느라 눈높이가 낮아진 나택의 시야에 황소의 뿔들이 들어왔다. 넝마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는 구티족의 누런 황소 투구가.

‘하늘의 신…. 공정한 왕. 황금 뿔을 꺾은 용맹한 사자를 신뢰하라.’

순간 언젠가 메데우스가 해석해 주었던 점토판의 내용이 귓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부리는 별 무리가 당신의 운명을 인도해 주리니…….’

“테레시!”

마치 물속에서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듯 온 세상이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어느새 나택의 코앞까지 다가온 메데우스가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나택을 노리던 화살의 중앙이 그 바람에 파편을 날리며 허공에서 부러졌다. 나무 조각이 영화 속 장면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흩어졌다.

‘하늘의 신. 공정한 왕. 황금 뿔을 꺾은 용맹한 사자를 신뢰하라. 그가 부리는 별 무리가 당신의 운명을 인도해 주리니. 격전 속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리라.’

완성된 캐릭터 정보창을 사이에 두고 메데우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황소 무리를 물리치고 별빛을 등진 용맹한 사자와.

회색 홍채에 눈길이 닿는 순간,

강제로 메데우스와 목욕을 해야 했던 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무슨 문양이에요?’

‘내 수호신이었던 놈의 문양.’

‘신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아누(Anu).’

‘혹시 그게 가문의 이름이었습니까?’

‘맞아. 잘 아네. 우루크에 오기 전까지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아누 메데우스.

나택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아누…!”

시스템 창에서 오색의 폭죽이 터졌다.

당신의 수호신 ‘아누(Anu)’를 발견했습니다!

[수호신의 행방]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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