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요란하던 시스템 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테레시!”
암전된 어둠 사이에서 메데우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택의 멱살을 부여잡은 메데우스가 한 손으로 엎어진 나택을 일으켰다.
“머저리같이 뭐 하는 거야. 빨리 움직여!”
생각을 정리하거나 조금 전 보았던 캐릭터 정보를 곱씹어 볼 여유조차 없었다. 나택은 발목에 오는 통증을 꾹 참으며 쿤가에게로 뛰어갔다.
HP 24.9% 감소
시스템 안내창이 착실하게 나택의 상태를 읊었다. 메데우스가 바닥에 늘어진 구티족을 한 손으로 들더니 방패 대신 어깨에 지고는 쿤가 쪽으로 달려왔다. 저 무거운 걸 들고 뛰는데도 메데우스는 전혀 버거워 보이지 않았다.
쿤가 앞에 도착한 나택이 얼른 나뭇가지에 둘렀던 고삐를 풀어냈다. 쿤가에 올라타려는 순간, 나택의 본능이 몸을 1초 정도 붙들어 맸다. 구름판 없이 처음 도전하는 뜀틀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본능적인 두려움이 나택을 제지했다.
하지만 망설임조차 사치다. 포션 효과…. 민첩성 +50을 믿고 간다. 나택이 눈을 질끈 감고 쿤가에 올라탔다. 그리고 탄탄한 안장 위에 궁둥이를 붙였다.
민첩성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나택이 짧게 숨을 고르며 메데우스 쪽을 보았다. 화살의 근원지에서 조금 멀어졌을 뿐인데 화살이 잘못 날아올 확률은 반 이상으로 늘었다. 숲의 삼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날아오는 화살의 반 정도가 삼나무의 잎과 몸통에 맞아 공격력을 잃었다.
쿤가 앞에 도착한 메데우스가 방패 대신 들었던 구티족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쿤가 위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휙-!
삼나무 틈을 뚫고 화살 하나가 빠르게 날아왔다. 나택의 시야에, 그리고 메데우스의 눈에 화살촉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너무 가까이 온 상황이었다. 메데우스가 피한다면 그대로 쿤가의 몸에 박힐 터였다.
메데우스는 매섭게 화살을 노려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푹-.
HP 27.5% 감소
화살이 그대로 메데우스의 단단한 팔뚝에 박혔다. 놀란 나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괜……!”
“괜찮으니까 앞으로 좀 더 붙어.”
메데우스가 튀어나온 화살의 줄기를 꺾으며 쿤가 위로 가뿐하게 올라탔다.
“떨어지면 이번에야말로 목숨 부지하기 어려우니까, 제대로 붙어 있어.”
메데우스가 고삐를 당겨 쿤가의 머리를 숲 바깥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랴!”
고삐를 세차게 내려치자 쿤가가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질주했다. 여기까지 올 때도 그랬지만 적을 등 뒤에 두고 도망치는 쿤가는 더욱 거칠게 달렸다.
전력으로 달리는 속도에 바람이 뺨을 갈겼다. 나택은 부서질 것 같은 궁둥이를 꾹 참으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나택의 시야에 또 한 번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HP 28.3% 감소
나 때문인가? 떨어져 나갈 거 같은 엉덩이 때문인가?
HP 28.9% 감소
메데우스인가. 방금 맞은 화살 때문에….
HP 29.4% 감소
HP 29.8% 감소
HP 30.2% 감소
어? 잠깐.
안내문 한 줄이 사라지기도 전에 연달아 경고문이 떴다. HP 떨어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아까 삼나무 숲에서 그 많은 화살과 포악한 구티족들을 상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HP 30.5% 감소
잠깐, 잠깐.
점점 가속되어 떨어지는 HP를 보며 당황한 나택이 눈알을 굴렸다.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후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나? 하지만 나택은 지금 온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상태였다.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대체 메데우스의 무엇 때문에….
HP 30.9% 감소
뭐 때문이지?
나택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수눈키를 플레이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타격을 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는 공격은 독이나 저주받았을 때 같은 상태 이상인데….
HP 31.2% 감소
설마… 화살에 독이 묻어 있던 건가?
“저, 잠시만요.”
나택이 메데우스를 살펴보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메데우스가 가슴을 더 바짝 붙이며 나택의 등을 눌렀다.
“떨어지고 싶어서 그래? 앞을 봐.”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어느새 저 앞의 나무 너머로 너른 평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택이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우루크까지 가실 겁니까?”
나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숲이 끝났다. 탁 트인 평원이 보이자 그제야 메데우스가 쿤가를 멈추었다. 어느새 평원에도 새카만 밤이 와 있었다. 경계선처럼 일렬로 늘어선 삼나무들이 정확하게 평원과 숲을 케이크 자르듯 갈라놓고 있었다.
HP 31.5% 감소
또다시 시스템 창이 밝게 빛났다 사라졌다. 나택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메데우스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잠깐 상처 좀 봐요.”
그러자 메데우스가 고삐를 쥐고 있던 손 한쪽으로 나택의 손목을 잡았다. 메데우스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
“좀 볼게요.”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메데우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택이 획 시선을 올려 메데우스의 안색을 살폈다. 늘 여유가 넘치던 낯빛이 어두웠다. 그렇게 바람을 맞고 달렸는데도, 관자놀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HP 31.8% 감소
빌어먹을….
HP 32.2% 감소
“독인 거죠. 화살에 독이 묻어 있던 거죠?”
메데우스는 아무 말 없이 평원을 응시했다.
“저기, 메데우스 님. 대답해 주세요. 독화살 맞는 거죠?”
HP 32.7% 감소
미치겠네!
감소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고통을 참고 있을 메데우스보다 나택이 더욱 애가 탔다. 연동된 HP가 수치까지 정리해 가며 실시간으로 제 남은 목숨이 떨어지는 걸 중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지금 우리 같이 죽게 생겼다고!
답답한 나택이 줄줄이 말을 덧붙였다.
“해독할 수 있는 약은 갖고 계신 겁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은요. 정말로 우루크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성곽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못 버텨.”
화살을 맞은 메데우스의 한쪽 팔이 잘게 떨렸다. 나택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크를 구하기 위해 전력으로 달렸음에도, 낮에 출발해서 해가 질 때쯤 겨우 도착할 수 있었던 거리다. 게다가 낮 동안 내내 달리느라 지친 쿤가가 돌아가는 길에도 전력을 내 줄지는 미지수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데우스가 고삐를 고쳐 쥐며 말했다.
“지금은 소극적으로 굴지만, 놈들이 언제 마음 바꿔서 쫓아올지 몰라. 그럼 이쪽이 불리해.”
몸을 숨길 수 없는 평원, 지친 쿤가 한 마리에 성인 남자 둘의 조합. 거기다 실시간으로 HP가 떨어져 가는 메데우스까지.
불리해도 너무 불리했다.
HP 33.1% 감소
돌아 버리겠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알려 주세요. 알려 주시면 뭐든 해 볼 테니까 알려 주세요.”
마치 제 일처럼 다급하게 구는 나택을 메데우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넌 뭐가 그렇게 초조해?”
“초조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메데우스는 화살에 맞은 제 몸 상태를 나택이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피 통이 깎이는 수치를 객관적으로 보고받고 있는 게 나택인데.
“얼른 말씀해 주세요. 방법이 있는 거죠?”
메데우스가 쿤가의 방향을 바꾸었다. 일직선으로 늘어선 숲의 왼쪽으로.
“두 번째 숲길로 갈 거야. 그 안에 해독초가 있어.”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빨리 출발하자는 듯 비장하게 있던 나택이 갑자기 상체를 획 들었다.
“아, 잠시만요.”
그러더니 말 옆구리에 걸어 둔 작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긴 가죽끈을 꺼내 메데우스와 제 허리를 함께 칭칭 동여맸다.
“뭐 하는 거야?”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저도 같이 떨어지니까요.”
“허.”
저도 같이 죽어요, 라는 말은 차마 재수 옴 붙을까 봐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메데우스가 가슴을 나택에게 바짝 붙였다.
“너나 꽉 잡아. 버리고 가기 전에.”
나택이 볼을 부풀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이랴!”
철썩-!
고삐를 내리치는 소리가 퍼졌다. 쿤가가 두 번째 숲길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쿤가가 달리는 내내 시스템 안내창은 멈추지 않았다.
HP 33.6% 감소
HP 33.9% 감소
HP 34.2% 감소
나택은 쿤가에게 바짝 엎드려 그저 빨리 숲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드디어 두 번째 숲길에 들어섰을 때 HP는 37.1%가 감소했다는 경고문을 빛냈다. 메데우스가 고삐를 당겨 쿤가를 멈추었다.
“풀어.”
메데우스가 나택의 목뒤에 대고 말했다. 아닌 척하려는 듯했지만, 피부에 닿는 메데우스의 숨은 아까보다 훨씬 가빴다. 나택이 얼른 제 배에 묶어 두었던 매듭을 풀었다. 메데우스가 먼저 말에서 내리고 뒤이어 나택도 따라 내렸다.
민첩성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포션의 효과로 나택이 안정감 있게 발을 디뎠다. 내리자마자 시야가 빛났다.
자그로스산맥의 ‘약초 숲’에 진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