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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1화 (21/178)

21화

‘약초 숲’은 ‘삼나무 숲’과 생태계가 확연하게 달랐다. 똑같이 삼나무가 자라긴 했지만, ‘삼나무 숲’은 삼나무 단일 수종으로 이루어진 단순림이었고, ‘약초 숲’은 보다 다양한 나무와 풀, 꽃이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시냇물 같은 물줄기도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정글 같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택이 현대에서 가끔 등산하다가 보았던 숲 같기도 했다.

메데우스가 시냇물로 다가가자 나택도 얼른 쿤가를 묶어 두고 그에게 향했다.

“화살을….”

“건드리지 마. 내가 할 테니까.”

메데우스가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러고는 팔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아냈다.

“읏….”

HP 38.9% 감소

나택이 걱정스럽게 메데우스를 지켜보았다. 메데우스가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 내며 천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나택이 재빠르게 안장의 보조 가방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왔다. 나택은 천 하나를 메데우스에게 건네고, 또 하나는 피를 씻어 낸 팔에 둘러 묶었다.

메데우스의 팔은 아까보다 더욱 떨리고 있었다. 메데우스가 천으로 화살촉의 피를 닦더니 냄새를 맡았다. 한참 숨을 들이마시던 미간이 사납게 조여들었다.

“청금초….”

메데우스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나택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청금초.

분명 메데우스가 얼마 전 처소의 약초 강의에서 알려 줬던 풀이었다. 나택이 곧바로 시스템에게 요구했다.

청금초. 청금초 정보를 보여 줘.

그러나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나택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속으로 크게 외쳤다.

청금초!

그제야 마지못해 시스템 안내창이 떴다.

|청금초|

청금석을 닮은 푸른 독초. 델람 고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맹독을 가지고 있으며 극소량으로도 치명적이다. 나무를 태우는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

중독됐을 시 증상 첫 번째는 근육의 떨림과 미열, 식은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온몸의 혈관을 팽창시켜 장기에 다발적인 출혈이 생긴다. 움직임이 많을수록 독이 더욱 빨리 퍼진다.

해독법! 삼나무 진액에 석초 잎을 개어 삼킨다. 빠른 해독을 원한다면 물을 많이 마셔 줄 것!

주의 사항! 해독 효과를 보려면 5시간 안에 진행해야 한다.

다섯 시간….

삼나무 진액은 구하기 쉬웠다. 지천으로 널린 게 삼나무이니. 하지만 석초는….

석초 역시 메데우스가 알려 주었던 약초학 수업에 있었다. 하지만 석초의 서식지는 분명 북쪽의 습한 호숫가 근처였다.

나택이 재빨리 메데우스에게 물었다.

“석초. 석초가 필요한 거죠?”

“제대로 외웠네.”

메데우스가 나택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이 새끼야. 지금 웃음이 나와?

HP 39.8% 감소

메데우스의 말에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나택은 요점만 질문했다.

“석초가 여기서도 자랍니까?”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어. 시냇가 근처에서.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네.”

메데우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쿤가를 지키고 있어. 둘러보고 올 테니까.”

그 말에 나택이 덥석 메데우스의 손을 잡았다.

‘움직임이 많을수록 독이 더욱 빨리 퍼진다.’

청금초의 설명대로라면 메데우스가 움직일수록 제한된 5시간이 4시간, 아니, 2시간까지 줄어들지도 몰랐다. 나택이 벌떡 일어났다.

가긴 어딜 가.

“제가!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여기 가만히 계세요.”

“네가 왜.”

“왜라뇨? 움직이면 독이 더 빨리 퍼지는 거 모르시지 않잖아요. 그러니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순순히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메데우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너의 뭘 믿고 여기서 기다리지?”

뜻밖에 치고 들어온 메데우스의 불신. 복병이 허를 찔렀다. 나택이 그대로 벙 찐 표정을 했다.

“제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석초를 구해 오겠다고 했다가 그대로 도망이라도 갈까 봐요?”

“잘 아네.”

나택은 제 뒷목을 잡을 뻔한 손을 간신히 눌렀다.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설마 내가 여기서 도망을 치겠냐고. 게다가 우린 말 그대로 일심동체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나택은 복장 터지는 심정을 심호흡 한 번을 뱉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타이밍에 눈치 없는 시스템 알림창이 또 혈압을 오르게 했다.

HP 40.4% 감소

“저… 도망 안 칩니다. 진짜 안 쳐요. 그, 제 주인님이시잖아요.”

“그래서 믿어라?”

“네. 믿어 주세요. 진짜 믿어 주세요.”

나택이 간절하게 손에 힘을 실어 메데우스를 붙잡았다. 나택의 표정을 보는 메데우스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이상한 동물을 구경하는 듯했다가 수도 없이 색을 바꾸어 댔다. 나택이 사력을 다해 메데우스에게 호소했다.

“제가 꼭 구해 올게요. 그러니까 여기 제발 가만히 계세요. 메데우스 님이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요.”

“…왜?”

결국, 메데우스의 표정이 읽을 수도 없는 색으로 물들었다. 나택이 간절한 만큼 메데우스는 더욱더 혼란스러워했다.

HP 40.7% 감소

“메데우스 님이 죽으면, 저도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여기서 제가 버리고 그냥 가면, 그, 뭐든, 뭐든 하셔도 좋습니다. 제 목을 자르셔도 상관없습니다!”

“…….”

저도 죽을 겁니다. 그 말의 뜻은 나도 죽게 되고 말 것이다, 라는 의미였지만 메데우스에게는 나택의 의지를 표명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메데우스는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택이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제발요…. 예?”

“내 목숨을 네게 맡겨라?”

나택이 짐작하건대 메데우스는 누군가를 신뢰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배신으로 되돌려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택을 믿어야 하는 근거를 심어 주어야 했다. 나택은 감정에 호소하는 동시에 제 과거를 메데우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저는 우루크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루크 때문에 가문이 몰락해서 노예로 끌려온 처지죠. 니누르타 사람들을 미워하면 미워했지, 그쪽에 붙어서 메데우스 님에게 해를 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저 혼자서는 쿤가를 탈 줄 모릅니다. 메데우스 님이 잘못되면 저도 돌아가지 못해요. 그러니 메데우스 님이 잘못되면 안 됩니다. 게다가 저는 독사 사건 때도 메데우스 님을 도왔어요. 이만하면 믿고 맡겨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

메데우스는 여전히 의심스럽단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택의 근거 있는 말에는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살고 싶은 마음에 나택의 눈치 스탯은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메데우스의 눈빛을 귀신같이 읽은 나택이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메데우스와 이나택을 연결하는 이방인이라는 동질감.

그래. 내 본명을 깐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성곽에서 목욕하던 날에, 제게 말씀하셨죠. 버림받은 이름은 잊어버리자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이름을 버리는 건 과거를 버리는 겁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에겐 테레시라는 이름보다 이나택이라는 이름이 훨씬 중요합니다.”

한낱 게임 캐릭터 닉네임과 현실의 본명은 비빌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택의 최종 목표는 오직 현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런 나택의 의중을 모르는 메데우스에게는 나택의 진심이 담긴 어투만 전달되었다.

“……버리지 않겠다고.”

“예. 그러니까 믿어 주세요.”

“…….”

고대인에게 가문을 지키는 것은 신념이자 의지를 지키겠다는 것과 의미를 함께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결국, 메데우스가 한발 물러섰다.

“…좋아.”

메데우스가 삼나무 한그루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굵은 줄기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택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단계는 성공이다.

HP 41.1% 감소

그런 나택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시스템 안내창이 번쩍였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앞에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어디서 보셨습니까? 석초.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아니.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주 서식지가 아니라 찾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찾아오겠습니다. 냇가 근처를 살피면 되는 거 맞죠?”

“…그래.”

HP 41.2% 감소

메데우스가 뒤통수를 나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움직임이 줄어들어서인지 HP가 감소하는 수치 역시 낮아졌다.

나택이 결의를 다지며 일어났다.

“진짜 찾아올게요. 꼭 찾아올 테니까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나택은 곧바로 석초를 찾아 나섰다. 전등 하나 없는 밤하늘을 오직 달빛에만 의지해 살폈다. 대기 오염이 없기 때문인지, 보름달이라 그런 건지 달빛이 밝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택은 더듬더듬 시냇물을 따라가며 수풀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무른 땅을 밟으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낼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석초…. 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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