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HP 53.7% 감소
HP가 떨어지는 양은 적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HP 53.9% 감소
HP 54.0% 감소
메데우스가 눈앞에 없는데도 그의 상태가 고스란히 보였다.
시냇가 한 줄기를 거의 다 타고 올라왔는데도 석초의 붉은 잎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택은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풀숲을 헤집었다. 그러다 돌 위를 딛는 순간.
첨벙-.
이끼가 낀 돌에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시냇물에 빠지고 말았다.
HP 54.2% 감소
물에 닿은 발바닥이 따끔따끔했다. 풀과 나뭇가지에 긁힌 팔다리도 따가웠다.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삽시간에 감각을 깨웠다. 이것 때문에 감소가 빨라지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몸을 사려 가며 움직일 순 없었다.
“하… 씨…….”
나택의 눈가에 열이 몰렸다. 억울하게 끌려온 처지 때문인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제 목숨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가가 자꾸 젖어 갔다.
하지만 나택이 주저앉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운다고 뭐가 해결되냐.”
벌떡 일어서자 젖은 옷에서 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움직여. 움직여.
나택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며 저 자신을 채찍질했다.
마지막 남은 저 앞만 보고 다른 지류로 넘어가자, 계획을 세우며 풀숲을 양손으로 벌릴 때였다.
푸드덕-!
무언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나며 시야가 밝아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나택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가 실눈을 뜨고 눈꺼풀을 껌벅거렸다. 나택의 주변으로 별 조각이 맴돌고 있었다. 풀숲에 숨어 있던 반딧불 무리였다.
어둠을 걷어 내는 빛 덕에 나택이 벌려 놓은 수풀 사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무성한 풀잎 사이에 새빨간 잎과 꽃송이를 가진 풀 한 포기가 있었다.
시스템이 안내창을 띄웠다.
행운 +50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석초’를 획득하셨습니다!
미친…….
나택이 헛웃음을 치며 석초를 쥐었다. 시스템은 얄짤 없었다. 행운의 효과는 발동시켜 주지만, 에누리 없이 +50이란 수치에 딱 맞는 행운만을 준 것이다.
HP 55.3% 감소
메데우스가 부르고 있었다. 해결책을 손에 얻은 마음은 한순간에 너그러워졌다. 나택은 석초를 챙겨 메데우스가 있을 자리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기다려라. 금방 간다.
* * *
삼나무 한그루 밑에서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서 나택은 단번에 메데우스가 있는 자리로 갈 수 있었다. 나택이 미끄러지듯 달려 메데우스의 앞에 앉았다.
“괜찮아요?”
메데우스는 답 없이 눈을 감고 숨만 가쁘게 쉬었다.
HP 60.1% 감소
나택이 재료를 구해 오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의 목숨은 40%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석초 구해 왔어요. 정신 좀 차려 봐요.”
그러나 메데우스는 미간만 찌푸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짚어 본 이마는 펄펄 끓었다. 병에는 장사 없다더니, 그 메데우스마저도 독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HP 61.2% 감소
일단 해독제를 먼저 먹여야 했다. 삼나무 진액을 얻기 위해 검이 필요했지만, 메데우스가 주었던 검은 하크의 줄을 끊어 주면서 두고 왔다. 메데우스의 긴 검은 효율이 높지 않아 보였다. 거기까지 계산이 됐을 때 나택의 머릿속에 불현듯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나택이 제 옷 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고대 문명 속에 들어와서 처음 얻었던, 점토판과 함께 획득한 ‘초보자용 단검’이었다.
시스템은 이걸 계산하고 준 건가? 어디까지가 시스템의 계략인지 소름이 돋았지만 그런 사실 하나하나에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메데우스 옆에 있는 삼나무를 찔러 손바닥에 진액을 담았다. 그러나 석초 잎을 개려는데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방망이 대신 쓸 돌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액체 형태의 진액을 담아 짓이길 만한 절구가 없었다. 나뭇잎은 연약하고 천은 진액이 스며들게 뻔했으며 돌은 옴폭하지 못했다.
산 넘어 산이네….
HP 62.4% 감소
“…….”
고민하던 나택은 곧바로 냇가에 가서 깨끗한 돌을 주워 왔다. 그러고는 메데우스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 손이 좀 더럽긴 한데. 그래도 물로 대충은 씻었어요. 너무 걱정 말고.”
듣지 못하는 메데우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제 손을 절구 삼아 석초 잎을 개기 시작했다. 상처가 잔뜩 난 손바닥을 잎이 곤죽이 되도록 짓이겼다. 참으려고 해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윽…. 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아니지.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죠. 안 그래요?”
제게 하는 말인지, 메데우스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위태위태한 고생길 끝에 드디어 해독제가 완성됐다. 시스템은 웃기게도 이런 업적은 알림창을 띄워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 거기에 은근히 열이 받았다.
HP 64.9% 감소
“메데우스 님. 메데우스. 정신 좀 차려 봐요.”
나택이 한 손으로 메데우스의 뺨을 톡톡 쳤지만, 그는 앓는 소리만 냈다.
“눈 떠. 먹어야 할 거 아냐.”
조금 더 세게 때려 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마 시스템이 안내해 주는 수치가 없었다면 이놈이 저승문 코앞에 있구나, 확신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택과 메데우스에게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HP 66.1% 감소
나택이 메데우스의 맞은편으로 위치를 바꿔 앉았다. 그러고는 검지로 해독제를 듬뿍 찍어 메데우스의 입에 가져다 댔다.
“입 좀 벌려 봐요.”
나택이 검지를 메데우스의 힘없는 붉은 입술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혓바닥을 긁었다. 메데우스가 약초 수업을 해 줄 때 잎을 제 혀에 문댔던 움직임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느리게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HP 67.8% 감소
HP 69.0% 감소
하지만 메데우스가 입 안에 들어간 해독제를 삼키지 못했다. 제대로 된 액체였다면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을 넘어갔을 텐데. 진액의 점성 때문인지 그조차도 되질 않았다.
“하…….”
나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때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에서 보여 주던 장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약을 먹일 때 쓰는 도구.
나택이 한 손으로 제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해독제를 쏟을까 봐 반대쪽 손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살다 살다 남자의 목욕 수발드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처럼,
살다 살다 남자랑…. 남자한테…. 그것도 내가 먼저…….
그러나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치료 행위입니다. …아시겠죠.”
그러고는 메데우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제 입 안으로 먼저 해독제를 옮기려 했지만, 손바닥에 담겨 있는 적은 양이 나택을 망설이게 했다.
이걸 다 못 먹이면 석초를 또 개어야 하는데.
여기서 더한 개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한두 번 안에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입술 가까이 제 입을 가져다 댔다. 닿을 듯 말듯 얼굴을 붙이고서는 시선을 내려 주의 깊게 살폈다.
이 각인가?
고개를 기울여 봤다.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나택이 화들짝 놀라 자라처럼 목을 뒤로 뺐다.
“아, 진짜…….”
나택이 제 코끝을 슥슥 비비며 메데우스를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태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메데우스는 넝마 같은 꼴을 하고 있으면서도 눈 튀어나올 정도의 미인이었다.
HP 70.2% 감소
시스템이 다시 현실을 일깨웠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나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요. 알았죠.”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택이 해독초 반을 입에 머금고는 한 손으로 메데우스의 턱과 뺨을 쥐었다. 그대로 고개가 젖혀지도록 각도를 조절한 뒤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열 때문인지 메데우스의 입술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나택은 눈을 뜨고 메데우스를 내려다보며 최대한 흘리지 않도록 해독제를 밀어 넣었다.
삼켜. 빨리 삼키라고.
조물조물 지점토를 만지듯 잡은 메데우스의 얼굴을 살살 주물럭거리자 메데우스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해독제 포션의 효과가 50% 발동되었습니다.
됐다. 됐어!
감격에 겨워 나택이 얼른 제 입술을 뗐다. 그러고는 남은 해독제를 전부 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는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메데우스의 뺨을 쥐어 올렸다. 약을 흘려보내기 위한 각도였지만, 멀리서 보면 나택이 메데우스를 덮치고 있는 모양새로 보일 뿐이었다.
나택이 열심히 약을 먹이려 애를 쓸 때였다. 돌연 가만히 있던 메데우스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헉.
나택이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떼었다. 먹이다 만 해독제가 두 사람의 사이에서 길게 늘어나더니 끊어졌다.
나택이 손등으로 제 입술을 슥슥 문질렀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가만히 있어, 인마.
짜증 섞인 손끝으로 메데우스의 입술을 약하게 찰싹 때렸다. 메데우스의 미간이 움찔거렸지만, 나택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다시 메데우스의 뺨을 쥐어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얼마 후, 시스템 안내창이 반가운 소식을 전달했다.
해독제 포션의 효과가 100% 발동되었습니다.
HP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 씨, 진짜……. 됐다. 됐어. 하아…….”
나택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이 놓이자 그제야 불쌍한 제 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뭔 개고생이냐….”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택이 메데우스에게도 한마디를 했다.
“너도 참 고생이다….”
그래도 고난을 함께 넘은 처지라 그런지 의식이 없는 메데우스가 오늘은 좀 불쌍해 보였다. 나택의 인간성이 측은지심을 발동했다. 가까이 다가가 짚어 본 메데우스의 피부는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차가운 숲의 밤공기 때문인지 몸도 잘게 떨고 있었다.
나택은 쿤가의 안장으로 가서 챙겨 온 작은 모포를 메데우스에게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저도 삼나무에 기댔다.
* * *
자그로스산맥에 햇빛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메데우스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약초 숲의 풀, 나무, 그리고 쿤가의 다리였다.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자 가슴께에서 스르륵 모포가 떨어졌다. 모포를 내려다보며 메데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간밤의 일을 하나씩 짚어 보는데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이어지지 않았다. 활을 뽑아서 독을 확인하고, 석초를 캐 오는 것으로 실랑이를 하다가…….
기억을 짚어 가던 메데우스가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왼쪽으로 틀어 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택이 저와 같은 나무 기둥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메데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택에게로 다가갔다.
“테레…….”
그런데 나택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옷에는 흙이 묻어 지저분했고 머리카락에도 풀과 흙이 엉겨 있었다. 바닥에 늘어트린 손바닥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더욱 엉망이었다. 거지를 데려다 놔도 이보다는 나을 판이다.
“……테레시.”
메데우스가 톡톡, 나택의 어깨를 쳤다. 손바닥에 닿는 나택의 옷은 눅눅했다.
“꼴이 이게 뭐야. 테레시.”
메데우스가 방금보다 조금 더 세게 나택의 어깨를 쳤다. 그러자 나택이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놀란 메데우스가 재빠르게 나택을 품에 받아 안았다.
“테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