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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3화 (23/178)

23화

품으로 떨어진 나택은 불덩이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마르다 만 빨래처럼 눅눅했다. 메데우스가 큰 손으로 나택의 뺨을 두드렸다.

“테레시. 눈 좀 떠 봐.”

“으…….”

“테레시.”

큼직한 손이 볼을 때리는 느낌에 나택이 이마를 찌푸리며 눈꺼풀을 새 모이만큼 열었다.

“하…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으으….”

나택은 비몽사몽으로 눈만 껌뻑거렸다. 메데우스는 실소를 흘리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숲의 바닥을 점점이 밝혔다. 메데우스는 하늘과 제 품에 기대있는 나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길과 시간을 계산했다. 이런 상태인 나택을 데리고는 쿤가를 재촉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해가 질 때쯤이나 되어야 성곽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메데우스는 우선 모포를 바닥에 펼쳐 나택을 그 위에 눕혔다. 그러고는 나택의 허리끈을 풀었다.

“석초를 찾아오겠다더니, 물놀이라도 하고 왔어?”

조심스럽게 젖은 옷을 벗기는데 나택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가냘프게 대답했다.

“시비… 걸지… 마시죠….”

“…….”

메데우스가 조심스럽게 나택의 몸을 두른 천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나택은 단단한 팔이 등을 받쳐 들어 올릴 때도 그저 앓는 소리만 냈다. 털 한 올 없는 나택의 매끈한 피부가 숲의 푸른 빛을 그대로 반사했다.

메데우스는 벗긴 나택의 옷을 곧바로 두 쪽으로 찢었다. 더러운 천을 시냇가에 담가 깨끗하게 헹구고는 한쪽으로는 나택에게 붙어 있는 지저분한 이물질을 닦아 냈다. 흙과 먼지를 훔쳐 낸 뒤에는 깨끗한 다른 천으로 손바닥에 엉겨 붙은 피딱지를 닦았다.

“으윽…….”

메데우스가 악수하듯 상처 가득한 손을 쥐고 살살 문질렀다. 손바닥에 마찰이 가해질 때마다 나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나택의 모습을 보는데 새어 나오는 신음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불쑥불쑥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내 손이 좀 더럽긴 한데. 그래도 물로 대충은 씻었어요. 너무 걱정 말고.’

메데우스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곱씹고 또 곱씹어 보면서.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죠. 안 그래요?’

“…….”

메데우스의 회색 홍채가 나택을 깊게 담았다.

암흑 같았던 어젯밤, 삼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메데우스는 사실 석초를 찾아 나서려 했었다. 어설프게 붙잡고 있던 미심쩍은 신뢰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빛 한 점 없는 자리에서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메데우스는 후회했었다.

그러다 제가 직접 나서야겠다 결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정신은 흐려져 갔다.

다음 날의 해를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보게 된 풍경이 지금이었다.

‘너도 참 고생이다….’

나택을 보는 메데우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너는 정말 이상해.”

메데우스가 중얼거리듯 나택에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나택에게서는 신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메데우스는 축축한 옷 대신 모포를 나택의 몸에 둘렀다. 김밥을 말듯 팔째로 둘둘 말아 놓자 밖으로 드러나는 건 나택의 매끈한 다리와 검은 머리카락뿐이었다. 그 상태로 챙겨 왔던 끈을 모포 위에 둘러 묶었다. 그러고는 나택을 아이 안듯 품에 안고는 쿤가에 올라탔다.

“힘들면 얘기해.”

메데우스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검은 머리카락이 품 안에서 미약하게 끄덕거렸다.

* * *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자리한 풍요로운 땅 메소포타미아를 일컫는 말이다. 축복받은 대지를 한 마리의 쿤가와 빼어난 미인, 그리고 모포에 쌓인 환자가 달렸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 녹아든 나택의 속은 사실 죽을 맛이었다. 맨정신에 달릴 때도 이를 악물고 버틸 만큼 쿤가가 익숙하지 않았는데, 제정신이 아닌 지금은 더욱더 힘들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괜찮을 텐데. 흔들리는 쿤가의 등 위가 마치 과격한 놀이기구 같아서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통에 구역감마저 올라왔다.

“하으… 후…….”

깊어지는 나택의 앓는 소리에 메데우스가 속도를 낮추었다.

“왜 그래.”

“잠깐… 쉬었다 가면….”

“그랬다간 해가 저물어서도 도착하지 못해.”

“……하….”

곧바로 다시 쿤가를 재촉하려던 메데우스가 제 품을 내려다보았다.

“…많이 힘들어?”

“…예……. 죽을 거 같습니다….”

“입이 살아 있는 거 보니 아직은 버틸 만하네.”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다시 쿤가를 재촉할 것처럼 굴더니, 메데우스는 고삐를 내리치는 대신 안장 옆에서 수통을 꺼냈다. 나택을 안은 채로 뚜껑을 열어 마른 나택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마시고 조금만 더 견뎌.”

나택이 그 말에 실눈을 뜨며 메데우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뭐라 대꾸할 수는 없었다. 기운도 없을뿐더러 입에 흘려 넣는 물을 삼키기도 버거웠다.

두 눈을 꾹 감자 나택의 시야로 꼴도 보기 싫은 시스템창의 안내 문구가 떴다.

HP가 79.4% 회복되었습니다.

그제야 포션을 마신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메데우스에게 해독제도 먹였을뿐더러, 간밤에 모포까지 덮어 줬다. 당연히 아침이면 100% 회복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것밖에 회복이 안 됐지?

나택이 게슴츠레 눈을 뜨는 동시에 메데우스가 주는 물이 입꼬리로 흘러내렸다. 나택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저 성질에 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고 수통을 머리에 들이붓는 거 아닌가, 싶어 나택이 움찔했다. 하지만 메데우스는 별 불평 없이 손등으로 나택의 입가를 닦아 주고는 수통을 도로 집어넣었다.

HP가 80.5% 회복되었습니다.

멀쩡한 메데우스와 좀비처럼 늘어진 제 상태를 상기하며 나택은 깨달았다. HP의 연동. 나택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HP가 지속적인 회복세를 보이는 것은 메데우스의 괴물 같은 회복력 덕분이었다.

메데우스가 다시 쿤가를 몰기 시작했다.

나택은 억울했다. 어젯밤 메데우스가 사경을 헤맬 때는 급속도로 HP를 하락시켜서 저를 그렇게 개고생하게 만들더니. 나택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는 도리어 HP가 회복되고 있는 꼴을 보니 괜히 약 올랐다. 사람 목숨에 중요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억울해…….”

나택이 중얼거리자 메데우스가 흘끔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뭐?”

“억울…해…. 왜 나만…….”

“뭐라는 거야. 말할 체력 있으면 입 다물고 잠이나 자.”

메데우스가 쯧, 혀를 차며 나택을 제 품으로 더욱더 깊게 끌어안았다. 메데우스의 가슴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흩어졌다.

“억우…해……. 억울…….”

억울해.

* * *

우루크 성곽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캄캄한 어둠이 내린 뒤였다. 불덩이 같던 나택의 몸은 넓은 평원을 달리는 동안 끓는 냄비처럼 달아올랐다.

쿤가가 숨을 몰아쉬며 니누르타 담장 안에 들어섰다. 메데우스는 쿤가가 멈추자마자 나택을 안고 훌쩍 뛰어내렸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셋째 주인님 오셨……. 그건 뭡니까, 주인님?”

어두운 밤 조명 때문에 시종의 눈에는 모포에 감긴 긴 덩어리와 검은 머리털만 보였다.

“사냥해 오신 건가요? 창고로 옮겨 두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손 치워.”

메데우스가 시종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주춤 물러난 시종의 눈에 그제야 모포의 아래가 보였다. 긴 덩어리 아래 달린 매끈한 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놀란 시종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뜨며 주춤주춤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메데우스를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다른 시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뭐야? 왜 그래?”

“사… 사람을….”

“엉?”

“결국엔 사람 하나를….”

“뭔 소리야?”

“결국엔 사람 하나를 족치고 왔나 봐. 들고 가는 저거… 사람 맞지?”

“사람? 누구.”

“메데우스 놈의 시종 아니야? 같이 나간 사람이 그놈 말고 또 있어?”

그 말에 멀찍이 담장에 붙어 있던 두두가 후다닥 달려왔다. 두두는 해가 진 후부터 제 일을 끝내고 나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무,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갑자기 끼어든 두두를 시종 두 명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위아래로 훑었다.

“자네, 라가쉬에서 온 그 노예지?”

“예. 맞습니다. 근데 저기, 사람을 족치고 오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누가 누굴요? 방금 오신 거 셋째 주인님 맞지요? 테레……. 아니, 셋째 주인님의 시종도 함께 돌아온 게 맞습니까?”

“에휴….”

“왜요. 같이 오지 않았나요?”

“왔지. 오긴 왔어. 송장이 돼서.”

“예? 송장이요?”

옆에 있던 다른 시종이 혀를 쯧쯧 찼다.

“구티족한테 당했든지, 아니면 메데우스 놈의 눈 밖에 나서 그대로 당했든지. 둘 중 하나겠지. 알 만해.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우리에게 칼부터 꺼내 드는 성질머리인데. 야만족의 피는 속일 수 없다니까.”

“저놈까지 저렇게 골로 가면, 메데우스 놈 시중은 또 누가 드나.”

시종 하나가 팔을 끌어안으며 소름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데 다 죽어 가는 송장은 뭐 하러 들고 가는 거야?”

“난들 아나. 가죽이라도 벗겨서 쓰려나 보지, 뭐.”

“으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이어지는 시종들의 대화를 듣던 두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 *

넓은 우루크 저택 내에서도 메데우스의 처소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살벌한 안광을 내며 걸어가는 메데우스를 보며 시종들은 가까이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거나, 혹은 메데우스의 시야에 들어가기 전에 후다닥 도망치기 바빴다.

메데우스가 품을 한 번 더 추켜올리는데 가슴팍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났다. 마치 꺼져 가는 촛불 같아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숨소리였다.

“…테레시. 정신 차려. 다 왔어.”

메데우스가 나직이 불러 보았지만, 기력이 다한 나택은 이제 시답잖은 대꾸는커녕 앓는 소리 한 번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뭐야. 죽은 거야?

몰라. 그런 거 같은데.

시종들이 멀리서 수군대는 소리가 청동 화로의 재를 타고 흘러왔다. 앞만을 주시하며 걷던 메데우스가 그 웅성거림에 걸음을 멈추더니 어둠 속의 군중을 향해 살의를 보냈다.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바퀴벌레가 빛을 피해 사라지듯 구경꾼들이 부리나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택을 안고 있는 메데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메데우스가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대로 죽으면 사지 멀쩡하게 묻힐 생각은 하지 마.”

죽어서는 안 된다는 협박이었다.

어느새 메데우스의 처소 앞이었다. 주인이 없는 처소 안은 어둠 그 자체였다.

메데우스가 발로 출입문을 열려는 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메데우스를 불러세웠다.

“저, 저기!”

험상궂은 표정으로 메데우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자리엔 두두가 서 있었다.

“테레…. 그……. 괜찮으신 겁니까? 설마 정말 돌아가신 건 아니죠……?”

울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두를 보던 메데우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네 입부터 찢어 버리기 전에.”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의 생사를 확인한 두두가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시면….”

“네놈은 라가쉬에서 온 시종이 아닌가?”

“예, 맞습니다. 라가쉬에서 테레……. 그분을 가까이서 모셨습니다.”

그 말에 메데우스의 눈매가 더욱 차가워졌다.

“니누르타의 시종들이 나를 보듯 네놈도 테레시를 같은 눈으로 봐 왔겠군.”

“아닙니다! 절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가까이 와 봐.”

메데우스의 말에 두두가 후다닥 메데우스의 앞으로 뛰어갔다. 메데우스가 두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손이 부족한 덕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내 허락이 있기까지 이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다른 놈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

“알아들었으면 꺼져.”

두두를 차갑게 쏘아보며 메데우스가 발로 문을 걷어차 열었다.

쿵-!

나택과 메데우스가 컴컴한 처소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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