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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4화 (24/178)

24화

거칠게 문을 열던 것과 다르게 메데우스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나택을 옮겼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건 창문으로 들어오는 화롯불이 전부였다.

메데우스의 침대는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잘 짜인 프레임 위에 아마포(리넨)를 깔았는데, 그 속은 염소 털로 풍성하게 채워져 있었다. 메데우스는 거리낌 없이 제 이부자리에 나택을 눕혔다. 그리고는 등불을 켠 뒤 포장을 풀듯 나택을 싸맨 모포를 풀었다.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나택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나택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몸을 꼬부려 붙이고 덜덜거렸다. 바싹 마른 입술은 갈증을 호소하듯 미약하게 오물거렸다.

메데우스는 곧바로 처소 내 저장 창고로 빠르게 걸음 했다. 우선은 수분을 보충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택의 목을 축여 주려 시카르를 잔 하나에 가득 담던 메데우스는 그대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선술집에서 나택이 시카르 세 잔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루크 사람들은 시카르를 식수 대용으로 마셨다. 하지만 알코올 쓰레기인 나택에게는 그게 불가능했다.

“…누가 귀족 출신 아니랄까 봐. 손이 많이 가네.”

메데우스는 그대로 시카르는 제 몫으로 챙겨 두고는 과일 음료가 담긴 옹기병을 쥐었다. 메데우스의 처소는 그야말로 불신을 토대로 구축한 작은 벙커였다. 메데우스가 있는 한 아무도 이 안을 침범할 수 없었다.

게다가 처소의 작은 저장고에는 니누르타 저택의 창고가 없어도 한동안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약초와 건조시킨 식료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침대 옆 바닥을 긁었다. 메데우스는 의자를 끌고 와 침상 옆에 앉고는 우선 나택의 가까이에 작은 화롯불을 켰다. 그 위에 과일 음료를 담은 주전자를 올리고, 건조시킨 레몬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양모로 짠 이불을 나택에게 덮어 준 뒤에는 선반 구석에 두었던 약초 상자를 꺼냈다.

나택이 숨을 색색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듣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괜히 말을 걸었다. 석석, 약초 잎이 돌절구에 개는 소리가 뒤이어 울렸다.

상처나 병을 치료하는 일 정도는 메데우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익숙했다. 전쟁터에서 다치거나 병으로 앓아누울 때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살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성을 타인을 위해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가 쓰지 않을 화롯불에 제가 마시지 않을 과일 음료를 데우고, 제가 바르지 않을 약초를 개어 내는 일련의 과정이 낯설었다. 낯설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약초를 개는 메데우스의 손은 자꾸만 멈칫거렸다.

“뭐 하고 있는 건지….”

메데우스의 입에서 쓴웃음이 터졌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갔다.

‘윽…. 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

메데우스의 손이 또 한 번 우뚝 멈추었다. 정적 속에서 과일 음료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냈다. 메데우스는 이상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고는 데운 과일 음료를 잔에 담았다. 그러고는 의자를 침대에 바짝 끌어 앉아 뜨거운 잔이 식을 동안 나택의 손에 약초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으….”

나택이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메데우스가 오므라드는 손을 다시 쫙 펼치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 말에 나택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마치 불만을 토로하듯이. 순간, 달리는 쿤가 위에서 나택이 중얼거렸던 말이 메데우스의 뇌리를 스쳤다.

‘억울…해…. 왜 나만……. 억우…해……. 억울…….’

메데우스는 쿤가를 모느라 흘려들었던 나택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억울하다고?”

그러자 또 한 번 나택이 앓는 소리를 냈다. 메데우스가 나택의 손바닥에 천을 감아 주며 자문자답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해. 석초를 구하느라 이 지경이 된 게?”

나택은 그저 끙끙거리기만 했다. 손의 치료가 끝나자 메데우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택의 몸을 일으킬 등받이로 단단한 제 팔과 가슴을 이용했다. 불덩이 같은 몸을 아이 다루듯 품에 안는 낯빛에는 심란함이 가득했다.

뭘까. 이게 무슨 기분일까.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찝찝한 기분이었다.

메데우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괴상한 느낌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내저어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메데우스가 한쪽 팔로 나택을 받치며 찻숟가락을 들었다. 식은 과일 음료를 한 숟가락 떠서 먹이는데 나택이 좀처럼 삼키질 못했다.

“테레시. 입 벌려. 먹어야 나을 거 아냐.”

‘입 좀 벌려 봐요.’

‘눈 떠. 먹어야 할 거 아냐.’

의식이 없는 나택에게 말을 걸 때마다 희미한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뒷말을 잘라먹은 나택의 목소리였다.

메데우스가 품을 내려다보며 나택에게 나직이 으름장을 놓았다.

“…깨어나면 할 얘기가 많겠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메데우스는 나택의 몸을 추어올리며 더욱 깊이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잔을 침대 한쪽에 내려놓은 메데우스가 엄지로 나택의 입술을 끌어 내렸다. 그런데 아랫입술을 매만지는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치료 행위입니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나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요. 알았죠.’

또 흐리멍덩한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메데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택의 입술을 응시했다. 이게 의식이 없을 때 벌어진 일의 기억인지, 아니면 단순한 꿈의 조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엄지로 문질러 보는 나택의 아랫입술은 버석버석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메데우스가 찻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잔으로 손을 뻗었다.

“한번 해 보면 알겠지.”

그러고는 과일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입술을 맞대고 달콤한 향을 부드럽게 나택의 목 안으로 넘겨 주는 틈에 시스템이 문구를 띄웠다.

‘기묘한 포션’의 효과가 사라져 갑니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풀려 갔다. 하지만 나택은 이 소식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 * *

“어으….”

푹신한 양털 이불 아래에서 나택이 꿈질거렸다.

“…몇 시야…….”

나택이 시계를 찾아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간밤의 고열로 리셋 된 머리는 판단력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푹신한 이불의 감촉 역시 판단력을 흔드는 데 한몫했다.

“하…. 죽겠네, 진짜….”

나택의 손이 더듬더듬 머리 위를 헤맸다. 그런데 이상했다. 갈대 줄기가 수북해야 할 옆자리에 허여멀건 벽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사람의 가슴이었다. 놀란 나택이 엉덩이를 뒤로 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누워 있는 자리가 침대인지도 모르고.

나택의 몸이 그대로 굴러떨어지려는 찰나, 메데우스가 긴 팔다리로 침대 끝을 막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나택의 몸을 침대 안으로 굴렸다.

다시 메데우스의 품 안이었다. 당황한 나택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물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네가 할 소리야?”

“……예?”

“네가 할 소리냐고. 내가 할 말이지.”

나택이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설마… 또 간밤에 제정신이 아닌 채로 메데우스의 침대에 쳐들어온 건가.

메데우스의 숨이 나택의 정수리에서 흩어졌다.

“숲에서 그 꼴을 하고 날을 샜으니 병이 안 날 턱이 있나.”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나택이 후다닥 침대 밖으로 기어 나갔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골병이 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리 꾸준히 운동을 해 왔던 나택일지라도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와 고된 노동, 스트레스가 쉼 없이 몰아쳤으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노예 처소의 허접한 잠자리 때문에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질 못했으니, 결국 버티고 버티다 이 사달이 난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것 역시 나택의 사정이었다. 귀족의 침대에 드러누운 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순 없었다. 나택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했는데…….”

“됐어. 내가 데려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예상외의 반응에 나택이 그대로 굳었다.

어…? 신경 쓰지 말라고? 저놈이 웬일이지.

“그것보다.”

메데우스의 말에 나택이 흘끔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괴고 있는 메데우스는 나택의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컨디션이 덜 회복된 탓인지 나택의 두뇌는 오늘따라 느리게 회전했다.

평소와 다른 건 나택뿐만이 아니었다. 맨정신 같아 보이는 메데우스도 평소와 다르게 질문을 질질 끌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나택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나택의 말에 메데우스가 더 깊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내가 어젯밤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메데우스가 쯧, 혀를 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

정말 이상했다. 아무리 본인이 데려온 거라고 해도 귀족의 침대에 누워 있는데 아무 질책 없이 이렇게 넘어가 준다고…?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난관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기력이 없는 정신에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택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얼른 세숫물을 가져오겠습…. 억.”

그런데 성큼성큼 다가온 메데우스가 나택의 뒷덜미를 잡았다. 나택이 뒷걸음질 치며 질질 끌려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어디로 가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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