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몇 걸음을 끌고 가던 메데우스가 나택을 내동댕이치듯 놓았다. 나택의 바로 옆에는 넓은 테이블이 있었다.
“앉아.”
메데우스가 테이블을 턱짓했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과일 음료가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치킨 상자처럼 생긴 나무 상자들 안에는 으깬 감자와 옹기에 담은 스튜 등 푸짐한 음식이 담겨 있었다.
나택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메데우스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메데우스는 저와 달리 단정하게 옷을 다 갖춰 입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택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알만 굴리고 서 있자 메데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앉으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일단은 메데우스의 말을 들어야 했다. 우루크에 우루크의 법이 있고 로마에 로마의 법이 있듯, 단둘만 있는 이 처소 안에서는 메데우스가 곧 법이었다.
나택이 느린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앉았다.
“제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귀족과 노예의 겸상 금지.
“그런 것치고는 네가 한 짓들이 많지 않아?”
메데우스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한 짓이 많긴 했다. 주인이란 사람의 뺨을 갈기기도 했고, 경칭 없이 이름을 부르기도 했으며,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한 강가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거기에 지금 이 겸상까지 더하면…….
계산을 마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수눈키에서 탈출하기 전에 이 업보들을 갚을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유 모를 메데우스의 접대는 나택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먹지 않고 뭐 해.”
식사의 대가가 무엇일지 예측되지 않아 나택은 차마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결국, 나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저…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정말 하나만 할 거야?”
“…….”
두 개 해도 되냐.
나택이 메데우스의 안색을 살피는데 먼저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묻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얘기해. 허락하지 않아도 너는 계속 질문할 것 같으니까.”
…얘가 진짜 왜 이러지?
나택의 머릿속에서 메데우스를 향한 의심과 제 신변에 대한 걱정이 증폭됐다. 소설과 영화 어디서든,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사망 플래그가 뜬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제가 왜 이걸 먹어야 하는지…. 그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핏 본 식기며 음식들은 니누르타 저택에서 만든 게 아니었다. 즉, 메데우스가 따로 차려 놓은 밥상이란 뜻이다.
나택이 자는 동안 이렇게 테이블 가득 손수 음식을 차려 놓고도 저는 손도 대지 않고 있던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게 나택의 지론이었다.
메데우스가 숟가락을 건네며 답했다.
“나는 빚지는 걸 싫어해.”
“제게 빚지신 일이… 없는데요.”
그 말에 메데우스가 나택의 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제야 나택도 눈치를 챘다. 석초의 은혜를 이런…. 이런 갑작스러운 밥상으로 갚겠다는 뜻인가 보다.
“그… 석초의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려 주신 건 감사히 먹겠지만 제게 빚지신 건 아닙니다. 메데우스 님도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너를? 누구한테. 구티족한테서?”
“예.”
그 답에 메데우스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탐탁지 않은 시선이 이어졌다.
“계산은 똑바로 해. 나는 분명 가기 전에 너 하나 정도는 지켜 줄 수 있다고 했어.”
나택이 수저로 김이 나는 잔을 휘저었다.
기껏 지 생각해서 해 준 말인데. 말본새하고는…. 도움받은 게 자존심 상해서 그런 건가.
나택이 후후 불어 음료를 한 모금을 삼켰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급격하게 입맛이 돌았다. 나택이 수저를 고쳐 쥐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걸로 알고 밥은 잘 먹겠습니다.”
독감에 걸려 며칠을 앓을 때도 백숙 한 마리는 가뿐하게 먹어 치우던 나택이었다. 이깟 몸살 따위는 나택의 입맛을 없앨 수 없었다. 나택은 스튜 속의 고기를 건져 먹고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면서 야무지게 그릇을 비워 갔다.
쉼 없이 쓸어 담는 입이 신기했던 걸까. 메데우스의 시선은 줄곧 나택의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나택 역시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체력이 국력이라고,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했다.
나택이 먹어야 산다는 주문을 되뇔수록 테이블 위는 텅텅 비어 갔다.
* * *
메데우스는 음식이 모조리 나택의 배로 들어가는 진풍경을 감상한 뒤,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나택은 잠시 맛본 꿀 같은 시간을 뒤로한 채 다시금 노예의 생활 수칙을 되새김질했다.
“어디 가십니까. 저도,”
“따라오지 마.”
…혼자 가야 하는 곳인가 보다.
“언제쯤 오십니까? 오실 때 맞춰서 저녁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필요 없어.”
“그럼… 야참이라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메데우스가 허리에 검을 차고는 망토를 두르며 나택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들어오지 않을 거니까, 준비할 필요 없어.”
“그럼 처소 청소를,”
“처소 안은 아무것도 손대지 마.”
……그럼 대체 뭘 하고 있으라는 거야. 빨래라도 해야 하나?
나택이 곧바로 제 할 일을 머릿속으로 셈하고 있는 사이 메데우스는 벌써 문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내가 올 때까지 처소를 지키고 있어.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요?”
“그래.”
쿵-
소리를 내며 메데우스가 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택은 넓은 귀족의 처소에 혼자 남겨진 상태였다. 청소도 하지 말고, 밥도 뭣도 하지 말고, 아무도 못 오게 지키고만 있으라니. 그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가 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흠…….”
나택이 침음하며 팔짱을 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나택의 예상을 빗나갔다. 기술직이 천대받기도 하고, 할 줄 아는 거 없는 개자식이 하늘같이 떠받들어지기도 하고.
메데우스의 속내를 추측해 보던 나택은 결국 생각하길 포기했다. 수눈키에 들어와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처음 얻는 하루의 휴식이었다. 메데우스도 없고 눈치 볼 다른 시종도 없는 온전한 휴식. 그 사실을 깨닫자 제 처지도 잊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먹은 건 정리해야지.
나택이 테이블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제일 구석진 창문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택이 정리를 멈추고 얼른 창문 쪽으로 걸음 했다.
설마 메데우스가 뭘 잊고 간 건가.
“두고 가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왜 문으로 오시지 않…고…….”
“테레시 님!”
창문에 붙어 있는 건 두두였다.
“테레시 님, 살아 계셨군요!”
두두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창문 안으로 팔을 뻗었다. 흡사… 팬 사인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택은 엉겁결에 두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 두두. 살아 있었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노예 하나가 아프다는 게 광고 거리가 될 만한 시대가 아닌데. 얘는 내 소식을 어떻게 안 거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런 꼴로 돌아오셔서…. 메데우스 님은 어떻다 말도 안 해 주시고, 얼씬하지 말라고만 하시지. 시종들은 가죽을 벗기네, 기름을 짜네, 그런…. 흑…. 얘기만 하고 있지…. 진짜 큰일이라도 당하신 줄 알고 밤새 잠도 안 왔어요.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택이 묻고 싶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두두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가죽을 벗기고 기름을 짜…? 누굴, 나를?
저는 도리어 밤새 양모를 덮고 숙면을 했으며 배 속에 잔뜩 기름칠까지 한 상황인데.
“두두. 나는 괜찮아. 그냥 몸살이 좀 나서 그랬던 것뿐인데….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죽을 벗기는 건 또 뭐고.”
두두가 제 아래팔에 눈을 훔치며 말했다.
“실은 그게 어젯밤에….”
하지만 곧바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엔가 두두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창가 쪽의 온도가 순식간에 낮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척도 없이 온 메데우스가 두두의 옆에 서 있었다.
“분명 허락하기 전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메… 메데우스 님….”
“내가 허락을 했던가?”
칼날이 두두의 목에 더 가까이 닿았다.
“아닐 텐데.”
두두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고 맞은편에 있는 나택 역시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메데우스는 누구의 변명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두두는 뒤에 선 메데우스가 보이지 않겠지만 나택은 아니었다.
저 미친놈이 뭐 하는 거야…!
메데우스가 정말 팔을 휘두를 것 같았다. 나택이 재빠르게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요!”
메데우스가 회색 홍채를 나택에게로 고정했다. 반사되는 빛 때문인지,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소리를 질러서인지 눈앞이 핑 돌았다. 나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나택을 지켜보는 메데우스의 눈썹도 약하게 달싹였다.
나택이 창틀을 잡으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두두는, 그러니까… 그냥 제가 걱정돼서…. 그래서 보러 온 겁니다. 안부 차원에서요.”
“그래서 내 명령을 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