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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6화 (26/178)

26화

메데우스가 어떤 명령을 했는지 듣질 못했으니 이렇다 저렇다 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여기서 두두가 잘못된다면 그건 어느 정도 나택의 책임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온전하지 않은 컨디션에도 나택은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다.

“제가 크게 다친 줄 알고 걱정이 돼서 와 본 겁니다. 그…… 가족 같은 사이예요. 아시잖아요, 라가쉬에서 함께 지냈던 거.”

“가족 같은 사이?”

그 말에 메데우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메데우스에게 가족 같다는 뜻은 저와 의미가 많이 다를 텐데. 가문을 누구보다 경멸하는 메데우스 앞에서 이런 비유를 해 버렸다.

하지만 친구도 가족과도 사이가 안 좋은 메데우스에게 이 관계를 적절히 전달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나택이 상황을 수습할 말을 고르는데, 메데우스가 먼저 두두에게 말했다.

“네놈이 루할자게시의 처소에 드나드는 걸 봤어. 유독 자주 보이던데.”

순간, 두두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그…… 유독 타르타르지 님……이 저를 자주 찾으십니다. 그래서 간 겁니다. 정말이에요.”

두두가 나택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도와주세요, 라고 쓰여 있는 눈빛이었다. 몽롱한 나택의 머리가 한순간에 뒤죽박죽이 됐다.

두두가 저를 도와주듯 루할자게시와 타르타르지 쪽에도 정보를 날라 주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설마… 다른 수작이 있어서 연막을 치고 있던 걸까.

메데우스의 검이 더욱 두두의 목에 바짝 붙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를 베어 낼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길 드나들었다.”

두두의 손이 발발 떨렸다. 메데우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두두의 진의가 어떻든 간에 지금 나택에게 제일 도움이 되고 있는 사람은 두두였다. 저놈마저 없으면 우루크에서의 앞날이 캄캄했다.

보고만 있을 순 없어 나택이 얼른 두두를 변호했다.

“제 형님이 불러서 드나들고 있던 게 맞을 겁니다. 타르타르지요. 예전부터 놈이 두두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그러자 두두가 감격스럽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이 말이 맞다는 건지, 편들어 줘서 고맙다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메데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근거는.”

근거?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변명을 지어냈다.

“라가쉬에 있을 때도 자주 그랬어요. 유독 두두를 많이 불렀죠. 제가 봐 와서 압니다.”

“그게 전부야?”

메데우스는 검을 치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느새 두두는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 이건가.

나택이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무슨 변명이 놈에게 씨알이라도 먹힐까.

이번에는 초점을 메데우스에게 맞추었다.

“사실 두두는 제가 이곳에서 메데우스 님을 모시는 데 도움을 많이 준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알려 주기도 하고, 또 저택 내에서 물어볼 만한 사람도 두두밖에 없어요. 메데우스 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선 제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필요하다.”

“그… 예. 필요합니다.”

나택은 메데우스에 초점을 맞춰 변명했지만, 메데우스는 나택의 필요에 마음을 움직였다. 메데우스가 검을 거두며 허리의 검집에 넣었다.

“…꺼져.”

“가, 감사합니다, 셋째 주인님!”

두두가 도망치듯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갔다. 또 이렇게 구석진 처소 근처에는 메데우스와 나택만 남았다. 메데우스가 창문 너머로 나택을 응시했다.

“처소를 잘 지키라고 한 지 반나절도 안 된 것 같은데.”

나택은 억울했다. 안에 들인 것도 아니고, 두두가 제멋대로 담장 밖에서 쳐들어온 것까지 어떻게 지켜보느냔 말이다. 그래도 철저한 을의 입장은 어쩔 수 없이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택이 눈알을 굴리는데 메데우스가 손을 뻗었다.

한번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은 주먹에 기어코 맞고 마는 건가.

나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쏟아질 손맛을 예상하고 긴장할 때였다. 메데우스의 손이 열려 있는 창문을 잡았다.

메데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지켜.”

창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다음 날 올 줄 알았던 메데우스는 두 밤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나택은 그동안 감금 아닌 감금 속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이틀이 지난 아침, 메데우스를 다시 만났을 때 나택은 그사이 체력을 말끔하게 회복한 상태였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메데우스를 따라가며 나택이 물었다.

“에안나 신전으로 갈 거야.”

메데우스는 앞만 보며 니누르타 담장을 나섰다.

에안나 신전.

에안나 신전은 우루크의 주신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난나’를 섬기는 신전이었다. 우루크가 라가쉬를 정복 1순위에 올린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주신을, 감히 이웃 도시국가의 군주가 가문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제게 내릴 축복이 분산된다 생각한 니누르타 쿠샨나는 이를 못 견뎌 했다.

나택은 메데우스를 따라 걸으며 에안나 신전에 대한 정보를 되새김질했다.

그런데 생뚱맞게 아침부터 신전은 왜 가는 걸까.

“신전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지 여,”

“여쭤봐도 된다고 했잖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어느새 습관이 되었는지 나택은 또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예.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어떤 걸요.”

메데우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급정거한 몸 때문에 나택의 이마가 메데우스의 어깨에 부딪혔다. 메데우스가 눈을 찌푸리며 나택을 내려다보았다.

“삼나무 숲에서의 일. 너도 기억하지, 그 화살.”

“구티족 게 아니었던 화살이요?”

“그래.”

메데우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전에 가면 화살에 대해 어떤 단서라도 얻을 수 있는 건가요?”

“테레시.”

메데우스가 대뜸 나택을 불렀다.

“예.”

“질문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어떻게 참았어?”

“…….”

“제한을 풀어 줘도, 이렇게 내게 질문하는 시종은 없었는데.”

“…그렇습니까.”

“귀족 놈들 습성은 어디 가질 않네.”

메데우스를 따라가며 나택이 황당하다는 듯 메데우스의 등을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족 놈이 아니라 신분제가 없는 현대인의 습성인데. 놈에게 그걸 설명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택에게 핀잔을 한번 준 메데우스가 말을 이었다.

“화살촉을 만들려면 구리와 주석이 필요해. 그중에서 주석은 델람에서만 수입할 수 있고. 근데 근래에 들어서 우루크랑 델람 사이가 안 좋아졌거든.”

“왜 안 좋아졌습니까.”

“……귀찮게 해서.”

“…예?”

이상한 대답에 나택이 되물었지만, 메데우스는 평소와 다르게 답을 해 주지 않고 곧바로 제가 하던 말을 이었다.

“뭐, 그런 상황이라 주석을 구하기가 힘들어졌지. 주석이 없어 화살촉을 만들기도 어려워졌으니, 우루크군 내에 화살 보급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왔고.”

왜 델람과 우루크의 사이가 안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귀한 화살을 고작 메데우스 하나 잡자고 허공에 돈 뿌리듯 쏴 댄 놈이 있다는 소리였다.

“주석을 대량으로 구하려면 반드시 델람의 담가르갈(대상인)을 통해야 해. 담가르갈이 우르크 안에서 거래하는 상대가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우루크군이고 또 하나는.”

메데우스가 눈앞을 턱짓했다.

“에안나 신전의 대신관이야.”

어느새 도착한 신전의 아치형 출입구에는 화려한 벽화와 거대한 석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도미노처럼 직선으로 늘어선 입구를 메데우스가 걸어갔다. 나택이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데 왜 대신관이 메데우스 님을 노립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냐고?”

메데우스가 미간을 마구 구기는 순간, 신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문이 활짝 열렸다.

“에안나 신전의 대신관으로 있는 게 저놈이거든.”

넓고 밝은 신전의 내부에는 루할자게시가 있었다. 다른 이와 대화를 하고 있던 루할자게시의 표정이 메데우스를 보자마자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메데우스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더러운 발을 들여놓느냐!”

“에안나 신전은 우루크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못 올 이유가 없지.”

“우루크인? 야만인의 핏줄 주제에 어딜!”

루할자게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메데우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건 나택이었다.

수눈키에서는 군주, 신관=귀족, 자유민, 노예의 순으로 신분의 고하가 정해져 있다. 게임 속 고대 문명이 제정일치의 사회라는 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니누르타 가문의 귀족 누군가가 신관의 자리에 있을 거라는 예상도 했지만, 설마 그게 루할자게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런 인성 쓰레기가 대신관이라니…….

고대 시대의 부정부패 주축이 신전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나택이 속으로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메데우스가 루할자게시 곁으로 다가가자 그가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듯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루할자게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다른 남자였다.

“메데우스 장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자는 진심으로 메데우스를 반기는 듯 환한 표정이었다. 반면 메데우스는 남자를 떨떠름하게 보며 목만 가볍게 까딱였다. 남자는 델람의 담가르갈 에무쉬였다.

“마침 와 있었네.”

“대신관님과 주석을 거래하러 며칠 전에 들른 참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델람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메데우스 장군님을 뵙고 싶었는데.”

델람의 상인은 우습게도 제 주 고객일 루할자게시보다 메데우스를 더욱 반겼다.

“이번에야말로 델람에 한 번 들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주님께서 장군님을 무척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공주?

나택이 메데우스와 담가르갈을 번갈아 보았다. 대상인이 말을 이었다.

“메데우스 장군께서 델람에 들러 주신다면 공주님도 기뻐할 테고, 델람의 주석 거래에 대한 제한도 곧바로 조치가 있을 겁니다.”

아…….

나택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근래에 들어서 우루크랑 델람 사이가 안 좋아졌거든.’

‘왜 안 좋아졌습니까.’

‘……귀찮게 해서.’

아무래도 메데우스가 델람의 구애를 거절한 탓에 주석의 거래가 어려워지게 된 것 같았다.

나택이 메데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메데우스는 진심으로 탐탁지 않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나택은 생각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을 시키는 과정이… 이렇게 시작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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