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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에서 탈출시켜 줄 히든영웅을 찾습니다-27화 (27/178)

27????

메데우스가 담가르갈에게 말했다.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양쪽이 모두 끝을 내야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루크의 엔시께서는 거절하셨지만, 대신관 루할자게시 님께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시고요.”

“대상인이라는 자가 계산에 서투르네.”

“그럴 리가요, 메데우스 님. 저는 오히려 이미 계산을 다 마쳤습니다. 주석이야 델람에 남아돌고, 거래야 언제든 줄였다 늘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까. 시기와 때가 있지요. 메데우스 장군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델람의 구애에는 공주의 호감 이외에 델람 군주의 욕심도 있었다. 메데우스를 데려오는 순간 국력이 그만큼 견고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니누르타 쿠샨나는 메데우스를 보내지 않으려 했다. 반면에 루할자게시는 메데우스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하길 원했다. 사이에 낀 메데우스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그저 귀찮고 번거로울 뿐이었다.

“그래서 우루크군과의 거래량은 줄이고, 대신관과 거래하는 물량은 늘렸나? 시기와 때를 핑계로 협박을 하려고?”

“그렇게 곡해하시면 섭섭합니다.”

메데우스가 날카롭게 나오는데도, 델람의 담가르갈은 그저 조부모가 손주를 보는 듯한 미소로 메데우스를 응시했다.

“뭘 어찌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장군. 한 번만 델람의 초대를 받아 주십시오. 그 이유를 헤아려 주세요. 더불어 오랫동안 우루크와의 교류를 맡은 제 체면도 생각해 주시면 더욱더 좋고요.”

메데우스가 혀를 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신경전 속에서 루할자게시가 조용했다. 놈은 비열한 웃음을 띠었다가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가, 메데우스를 쥐어박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듯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담가르갈과 메데우스의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이 타이밍에 신전의 노예가 달콤한 게슈틴(Geshtin)(메소포타미아에서 와인을 부르던 명칭) 몇 잔을 쟁반에 내왔다.

“쓸모없는 것…. 이걸 지금에서야 가져와?”

루할자게시가 게슈틴 잔을 빠르게 낚아챘다.

인성 봐라.

루할자게시의 행동을 보는 나택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당연했다. 지금의 태도뿐 아니라, 나택에게는 루할자게시로 추측되는 놈에게 당한 일이 있다.

저놈한테 꼭 한번 엿을 먹여야 하는데….

어느새 메데우스는 나택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이동해 담가르갈과 대화 중이었다. 아무래도 우루크군의 주석 거래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멀리 이동한 메데우스와 담가르갈 덕분에 나택은 루할자게시와 둘이 남겨졌다. 메데우스를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루할자게시의 화는 당연하게도 나택에게 향했다.

“천한 노예 주제에… 어디를 올려다봐?”

나택이 그제야 얼른 허리를 숙였다. 루할자게시가 잔을 들고 나택의 곁으로 다가왔다.

“감히… 내게 오물을 쏟고….”

…시장에서 부딪힌 일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다니…….”

루할자게시가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손을 떨었다.

살아서 돌아와? 말이 이상했다. 나택이 살아서 ‘돌아올’ 만한 곳은….

역시 삼나무 숲밖에 없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 진짜였네.

심증으로 확정한 범인이었지만, 이렇게 본인이 직접 확인시켜 줄 줄은 몰랐다.

루할자게시가 말을 이었다.

“그런 것도 모자라 야만인을 등에 업더니 노예 주제에 나를 꼿꼿이 서서 노려봐?”

이건 아마도 방금 나택이 무의식중에 ‘꼭 엿 한번 먹이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었던 표정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이 신분을 거스른 죄로 사형당할 수도 있는 문명이 아니었다면, 나택 역시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국의 노예가 된 최하위 계급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할자게시가 느리게 걸어가면서 나택의 몸을 툭 쳤다. 일부러 놓친 건지, 실수로 그런 건지 루할자게시가 들고 있던 게슈틴이 나택의 머리를 타고 신전의 바닥으로 줄줄 쏟아졌다.

하…….

나택이 두 눈을 꾹 감으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세 번씩 써 내려갈 때였다. 루할자게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더러운 노예가 이곳에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신전까지 더럽혀?!”

누가 봐도 루할자게시가 쏟은 게슈틴이 분명한데 놈은 나택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 말에 나택이 허리를 폈다.

“제가….”

“신성한 신전을 더럽힌 것도 모자라, 허락도 없이 대신관을 노려보다니!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무릎을 꿇고 네놈이 더럽힌 것을 죄다 핥아먹지 않으면, 신과 신관을 모욕한 죄로 참형에 처하겠다!”

나택은 황당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이런 건……. 유교국이었던 조선시대에서도 보기 힘들 억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여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란 사실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나택은 사죄를 해야만 했다. 살아남으려면.

“…죄송합니다.”

나택은 일단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까지는 쉽게 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거기다 바닥을 핥아먹으라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너무 과한 처사였다. 나택이 엿 한번 먹여 보겠다고 작정하고 짜는 계획도 이 정도로 비열하진 않을 것이다.

“어서 네놈이 저지른 죄를 정리하지 않고 뭘 하느냐!”

루할자게시가 길길이 날뛰었다.

진짜… 해야 하나.

굴욕적이고, 또 굴욕적이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해? 말아?

……아무리 생각해도 엿 같네. 내가 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그때, 작은 정보 하나가 나택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 시대에 노예는 곧 그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타인의 것을 함부로 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업신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택이 나무늘보 같은 움직임으로 몸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저를 무릎 꿇리는 것은 곧 제 주인을 무릎 꿇리게 되는 것인데……. 대신관님께서 그걸 원하시는 게 맞는지요.”

“무, 무어라?”

루할자게시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 나왔다. 바닥에 비치는 긴 그림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죄?”

멀찌감치서 대화를 하던 메데우스가 어느새 나택의 옆에 와 있었다. 메데우스의 손에도 똑같은 게슈틴 잔이 들려 있었다.

“메데우스! 네놈의 시종이 신전을 더럽힌 꼴을 보아라!”

루할자게시가 바닥을 가리켰다. 메데우스의 시선이 루할자게시의 손가락을 따라 바닥을 보더니 숙이고 있는 나택의 젖은 머리를 응시했다.

메데우스가 대뜸 물었다.

“할 거야?”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메데우스가 나택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할 거냐고. 무릎 꿇고 핥아먹는 거.”

“……해야 합니까.”

나택이 허리를 숙인 채로 되물었다. 마음 같아선 개소리 말라고, 내가 왜 그 짓을 하냐고 벌떡 일어나 소리치고 싶었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답했다.

귀족도 높은 계급의 신분이지만, 특히나 신관의 말은 그 자리에서 참수형을 내려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택이 기억하는 수눈키의 설정은 일단 그랬다.

하지만 대신관 루할자게시가 날뛰거나 말거나. 메데우스는 나택의 뒷덜미를 획 잡아당겨 일으켰다. 어느새 나택의 얼굴은 메데우스의 어깨 옆에 붙어 있었다.

“네 주인이 누구였지?”

“메데우스, 네 이놈이…!”

“나야, 저놈이야.”

“메데우스… 님이시죠.”

나택이 사실을 읊었다.

“그렇다면 내 말을 따라야겠지. 일어나.”

답을 듣자마자 메데우스가 나택을 성의 없이 뒤로 밀었다. 루할자게시는 제게 사죄해야 할 죄인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노발대발 성을 냈다.

“감히 신전을 더럽힌 죄인을 두둔해?”

“잔은 큰형님께서 들고 계셨던 것 같은데. 잘 쥐고 계시지 그랬어요.”

“뭐라?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냐, 메데우스?!”

“대신관이나 되는 분이. 제 실수를 일개 시종에게 덮어씌운 것도 모자라 아량마저 베풀 줄 모르다니….”

“메데우스!”

“나는 네 앞에 무릎 꿇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그러니 내 시종이 무릎 꿇는 것 역시 두고 볼 수만은 없지.”

메데우스가 들고 있던 잔을 느리게 휘휘 돌렸다. 기울어지는 잔이 쪼르륵 소리를 냈다. 게슈틴이 신전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루할자게시의 발등 위를 적시며 퍼져 나갔다.

“나도 핥아먹어야 하나?”

“이게 무슨 짓이냐!”

루할자게시의 혈압을 올리게 하는 데는 메데우스만큼 재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루할자게시는 대신관이라는 체면과 장군인 메데우스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손 한번을 쓰지 못했다. 그저 씩씩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메데우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짓이냐고?”

“메데우스…. 네놈이 감히….”

“실수로 신전을 더럽힌 내게 벌을 내릴 자는 이난나겠지. 네가 아니라. 그리고.”

메데우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택이 서 있는 뒤를 눈짓했다.

“벌을 줘도 내가 줘.”

“이건 신을 향한 모독이다…. 감히 에안나 신전에서…!”

“자, 자. 대신관님. 진정하세요, 진정. 장군이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고. 원래 이런 분이 아닙니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지요.”

담가르갈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메데우스와 루할자게시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택은 탄식했다. 메데우스의 저 성질을 이웃 나라의 대상인까지 웃으며 받아들일 정도라면… 대체 어디까지 소문이 난 걸까.

그렇게 소문난 망나니에게 구애를 하는 공주와 델람의 엔시는 대체 뭐고.

어쨌거나 메데우스의 등장과 담가르갈의 중재로 나택은 굴욕적인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귀족과 신관 사이의 싸움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메데우스가 성큼성큼 나택에게로 다가왔다.

“따라와.”

출구를 향하는 메데우스를 나택이 재빠르게 따라갔다. 두 사람의 뒤에서 담가르갈이 소리쳤다.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메데우스 님!”

담가르갈의 말에 메데우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쿵-!

신전의 문이 닫히고, 메데우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처소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메데우스를 보며 나택이 방금의 말을 곱씹었다.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니. 지금을 말하는 건가. 델람으로 정말 가는 거야?

나택이 주저 없이 물었다.

“델람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설마 오늘 가시는 건 아니죠?”

“내일 새벽에.”

“아…. 그럼 오늘은 이것저것 할 게 많겠네요. 식사를 준비한 후에 바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정찰을 갈 때처럼 두 개씩 준비하면 될까요?”

나택은 머릿속으로 채비를 떠날 때 필요한 물품을 나열했다. 동시에 점술사에게 찾아갈 계획도 세웠다. 피곤에 절어 잠시 미루어 두었던 캐릭터 카드와 그 안에 적힌 수호신에 대해, 그리고 제 수호신의 이름을 가진 ‘아누 메데우스’에 대해 점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메데우스가 불쑥 나택을 불렀다.

“테레시.”

“예.”

“델람에는 나 혼자 다녀올 거야.”

예상치 못한 말에 나택이 우뚝 멈춰 섰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뒤로 따라오는 그림자가 없자 메데우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 혼자 다녀오겠다는데, 뭘 그렇게 놀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날 두고 가긴 어딜 가.

“……언제 돌아오시는 건데요?”

“글쎄. 그것까진 알 수 없지. 가서 좀 알아볼 것도 있고 해서.”

순간 점술사가 했던 말이 나택의 머리를 스쳤다.

‘캐릭터 카드에 있는 수호신 있지? 아무래도 이 수호신이 여기 생활을 하는 데 힌트를 주는 것 같아.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사건이 터질 때 이 수호신이랑 관련된 물건이나 사람이 길잡이 역할을 해 주더라고.’

안 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이난나 테레시의 등대지기이자 안내판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진엔딩으로 가는 실마리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는데.

“오래 걸릴지도 몰라. 비품은 그쪽에서 알아서 조달할 테니, 배에서 쓸 만큼만 챙겨 둬.”

안 된다. 안 됐다. 아누라는 신과 관련 있는 사람을, 그것도 귀족을. 메데우스 말고 나택이 또 어디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내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이 신을 믿었거든. 그런데 같은 피를 나눈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나뿐이야. 그 결과만 놓고 봐도 신이 저버렸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메데우스의 말대로라면 아누라는 가문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메데우스 한 명뿐이었다.

절대…. 절대 놈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저도…. 저도 가게 해 주세요.”

“……뭐?”

나택이 메데우스에 다가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안 됩니다…. 저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같이 가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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